• 최종편집 2026-10-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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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쥐 잡기와 산통 깨기
    내 안에 있는 악마가 가끔 입 밖으로 욕을 내뱉을 때가 있습니다. 저런 쓰레기 같은, 망할 세상, 이라고요. 악마는 복수의 칼을 갑니다. 누군가에게 슬픈 일이 벌어졌는데도 쌤통이라고 말합니다. 잘못했으니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한다고요. 또 이 악마는 아주 비겁합니다. 큰 소리로 말하지 못하고 작은 소리로 말합니다. 광장에 나와 말하지 못하고 집안에서만 말합니다. 그래도 난 이 악마를 버릴 수 없습니다. 가끔 이렇게라도 욕하고 분노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으니까요. 할 수 있는 일이 겨우 이것밖에 없는 것 같다고 느끼는 날엔 더욱 그가 필요하지요. 누가 소리 지를 텐가 박연준 시인의 첫 소설 『여름과 루비』를 읽다가, 내 안에 숨은 악마에게 물었습니다. 소리 지른다는 것은 무엇일까, 하고요. 여덟 살 여름은 동네가 떠내려갈 정도로 소리를 질렀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한 아줌마가 도망가려는 쥐의 꼬리를 한쪽 발로 잡고는 “집사님 빨리 연탄집게!” 하고 외치고 있을 때였습니다. 여름이 찢어질 듯 비명을 내지른 채 멈추지 않자, 아줌마는 여름에게로 와 화를 냅니다. 다 잡은 쥐를 여름이 소리 지르는 바람에 놓쳤다고요. 사람들은 쥐가 무서워서 소리를 지른 줄로 생각했을 테지만, 여름은 ‘쥐가 아니라 연탄집게의 도착’을 두려워했습니다. ‘일어난 일이 아니라 일어날 일’을 무서워했던 여름은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름이 무서워한 일은 쥐의 죽음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날 그 교회 마당엔 쥐를 잡으려는 아줌마뿐 아니라 친구 루비를 잡으려는 남자애들도 있었거든요. 집에 방이 세 개고, 목욕탕이 두 개 있다는 루비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눈으로 확인해 보고야 말겠다는 남자애들이 루비를 앞장세워 기어코 그의 집에 따라가던 날이었습니다. 루비가 앞서고, 그 뒤를 남자애들이, 또 그 뒤를 여름이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여름은 굳이 루비의 말을 심판대에 세워 쥐 잡듯 잡도리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남자애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집에 가다 말고 루비가 교회 앞 벤치에 앉아 책을 보려 하자 그네들은 얼른 네 집으로 가자며 루비를 닦달합니다. “빨리 가라고! 순 뻥쟁이 아냐!” 여름은 아이들이 루비를 때린다면 달려가 말릴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바로 그때 아줌마가 쥐 꼬리를 밟고 집사님을 불렀던 것입니다. 여름이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면, 쥐가 잡혀 죽었을 것이고, 루비가 애들에게 맞거나 강제로 일으켜져 집으로 가야 했겠지요. 루비의 얼굴이 벌게졌고 쥐의 몸부림이 극에 달했을 때 여름은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렇게 소리를 지름으로써 루비는 남자애들로부터 달아났고, 쥐는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허탕 친 사람들이 여름을 쏘아봅니다. 여름은 너무 세게 오래 소리를 지른 탓에 목이 아팠습니다. 나는 이 장면에서 여름이 부러웠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안의 악마가 여름을 부러워했습니다. 소리를 질러서 산통을 깼으니까요. (아, 좋겠다…….) 와장창, 쨍그랑, 또는 쩍 나의 악마는 늘 산통을 깨고 싶어 합니다. 산통은 점을 칠 때 쓰는, 산가지를 넣은 통인데, 산통을 흔들다가 뚜껑에 난 작은 구멍으로 산가지가 튀어나오면 그 괘로 점을 쳤다고 합니다. 무슨 까닭인지 모르지만, 오늘날 ‘산통을 깬다’는 건 ‘다 잘되어 가던 일을 이루지 못하게 뒤틀다.’라는 뜻으로 쓰고 있어요. 윤석열 전 대통령의 탄핵안이 가결된 이튿날 산통을 깬 사람이 생각납니다. ‘제로웨이스트샵 알맹상점’의 고금숙 대표인데요, 그는 “탄핵안 가결 풍선 날리기, 나만 불편해?”라는 글을 자기 SNS에 올렸어요. 뭔가를 축하하기 위해 굳이 미세플라스틱을 지구에 흩뿌릴 필요가 있냐는 거죠. 그러면서 “누군가는 환경을 생각하자는 제안을 ‘기쁜 순간에 산통을 깬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산통을 깨고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라고 해서, 나의 악마가 기뻐했답니다. 지난 8월, 산통 깨기에 진심인 사람들이 모여 ‘919 기후정의행진 지리산행동’을 준비했습니다. 기후위기를 부추기는 ‘자본 추앙 사회’의 흐름을 깨는 일을 산통 깨기라고 생각한다면 말이죠. 지리산에 케이블카를 놓는다고 해도, 벽소령을 뚫어 도로를 놓겠다고 해도, 한 기업이 하루 600톤이 넘는 지리산 지하수를 퍼내도, 여기저기 송전탑이 세워지고 농지가 사라진다고 해도, 3대 메가프로젝트로 막대한 이윤은 사기업이 가져가고 물 부족과 각종 오염은 시민이 떠안아야 하는 상황이 와도, 누군가는 화석연료의 풍요를 누리고 누군가는 기후재난으로 죽는 기후부정의가 벌어져도, 소리 지르지 않는다면 나는 연탄집게가 될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올해 지리산권 기후정의행진은 구례와 남원 산내에서 열립니다. 구례는 19일 오후 3시 구례읍사무소에서 출발해 봉성산 정상까지 행진합니다. 13일부터 19일에 걸친 기후정의 주간에는 크고 작은 시민 작당 모임도 열립니다(포스터 참고). 거대한 흐름이 아무리 내게 “믿으셔야 합니다” 할지라도 나는 의심하겠다, 그 흐름을 깨 보겠다, 하고 함께 말할 수 있는 기후정의행진에서 만납시다. 그때 우리도 여름처럼 소리를 질러 봅시다. 아무리 흔들어도 착취와 수탈만 나오는 이 산통을 같이 깨 봅시다. 이 글은 <봉성신문>에 실린 글입니다.
    • 기후위기
    2026-10-08
  • 바라는 바가 없는 발걸음을 누가 막을 것인가 _919 기후정의행진 지리산행동을 마치며
    바라는 바가 없는 발걸음 어제는 날이 맑았다. 오랜만에 아는 얼굴들을 마주했다. 처음 보는 이들이어도 좋았다. 기후정의행진에 온 이들은 모두 날씨처럼 맑았다. 물론 그 얼굴 한쪽에는 먹구름을 조금씩들 갖고 있었다. 그들은 알고 있을까. 우리가 맑은 날씨에도 먹구름을 간직한 하늘 같다는 것을. 우리는 깃발을 들었다. 피켓을 보였다. 소리를 질렀다. 아무 소리도 없이 산길을 올랐다. 그리고 이야기도 했다.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파랑과 하양이 하늘에 가득한 날이었다. 세상은 불 타고 있다. 우리도 안다.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내가 오늘 깃발을, 피켓을, 목소리를 높이 쳐든다고 해서 세상의 불을 끌 수는 없다. 그럴 수 있다면 그건 웃기는 일이다. 하루아침에 타오른 불길이 아니다. 세상은 계속 불 탈 것이다. 그러나 나는 걷는다. 나는 소리를 낸다. 나는 바라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불을 끌 생각이 없다. 그 불이 꺼지든 꺼지지 않든 나는 이 불길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그저 소리를 낸다. 내가 불을 끌 수 없다는 사실이 내가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걸 의미하진 않는다. 나는 악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나는 악을 따르지 않을 뿐이다. 내가 악을 무너뜨린다거나 불을 끈다거나 무슨 세상을 더 좋게 만든다는 환상적인 희망은 내게 필요하지 않다. 그건 나를 더욱 밑으로 끌어내리는 엿 같은 것이다. 나는 이 종말의 길에서 내가 갈 길을 가는 것뿐이다. 내 발걸음에는 바라는 바가 없다. 나는 바라지 않는다. 희망이 나를 유혹해도 나는 희망을 품지 않을 것이다. 희망의 등에는 늘 절망이 업혀 있으니까. 나는 바라는 바 없이 갈 길을 가겠다. 그게 내 남은 언어. 나의 유일한 언어가 될 것이다. 나는 아무에게도 기대하지 않는다. 나는 무엇도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얼굴에 남은 먹구름. 여전히 내가 어리석기 때문이다. 이 먹구름을, 슬픔을 거두어 그 슬픔마저도 내가 길을 가는 데 필요한 연료로 써야 할 날이 올 것이다. 머지 않아. 나는 어쩌면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울고 있는지도 모른다. 희망하지 않는다고 말해도 먹구름은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지금 울고 싶다는 걸. 잘 가, 얘들아. 안녕. 우리는 헤어진다. 또 헤어진다. 또 헤어질 것이다. 그리고 또 헤어지겠지. 안녕. 안녕. 안녕. 
    • 기후위기
    2026-09-20
  • 상상할 것인가 상실할 것인가
    여름에 감기라니. “아니, 땀이 줄줄 나는데 어떻게 감기에 걸릴 수 있죠?” 침만 넘어가도 통증으로 답하는 나의 목에게 정중하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목이 대답했습니다. “내가 신호 줬잖아?” 아뿔싸, 그랬구나. 목은 내게 계속 따끔따끔하게 신호를 보냈던 거예요. 목감기가 올 거야, 따뜻한 물을 마셔, 목을 따뜻하게 감싸, 좀 쉬어, 하고요. 그러나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결국 여러 날을 앓았지요.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아오너라 몸에서 나비효과가 일어났던 걸까요? 태풍을 일으킬 수 있는 작은 나비의 날갯짓을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내 몸에서 감기라는 태풍을 일으킨 ‘사소한’ 변화는 무엇이었을지 생각해 봅니다. 오로지 목의 문제였을까요? 어쩌면 이것은 육체의 문제일 수도 있고 정신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목에서 시작된 문제일 수도 있지만, 장에 사는 균에 의해 시작된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염증이나 바이러스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평소 내가 늘 하는 자세와 태도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 드러난 감기는 결말이 아니라 더 큰 한 방을 예고하는 신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 사소한 건 없는 것 같아요. 런던에 사는 루시(Lucy Jiachun Hu)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가꿔 온 공동체 정원을 시의회가 철거할 계획이라는 통보를 받았을 때, 그들만의 나비효과를 계획했습니다. 루시와 친구들은 나비를 유인하는 꽃을 심기 시작했습니다. 정원이 철거될 거라는데 왜 꽃을 심었을까요? 꽃을 심으면, 나비가 모여들고, 나비는 박쥐의 주요 먹이라서 박쥐가 정원에 나타날 것이고, 박쥐가 정원에 둥지를 틀면 그 공간이 종 보호 지역이 될 것이며, 결국 시의회는 종 보호 지역을 함부로 파헤칠 수 없게 될 것이기에, 정원 철거를 막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이 바란 나비효과는 제대로 나타났을까요? 안타깝게도 당장 박쥐는 오지 않았습니다. 오만과 편견에 사로잡힌 눈으로 보면 루시와 마을 사람들의 행동은 바보 같은 짓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상력, 창의성 그러니까 무수한 연결고리를 과소평가하지 않는 공생을 향한 애정 어린 발상이야말로 지금 너무나 이성적이고 너무나 인과를 중시해 능력주의로까지 변질된 이 딱딱한 세상에 꼭 필요한 나비들이 될 수도 있습니다. 벌이 사라지면, 참새가 사라지면, 환삼덩굴과 은행나무가 사라지면 생길 무수한 연쇄 반응을 상상하는 힘은 얽히고설킨 연결고리를 따라 오는 거대한 나비효과의 신호를 알아차리게 해 줄 테니까요. 상상하지 못하는 자들의 도시는 신호를 받지 못한다 큰 대형 사고가 생기기 전에 그와 비슷한 가벼운 사고가 스물아홉 번, 그리고 위험한 징후나 전조가 300번 정도 반드시 먼저 나타난다는 하인리히 법칙이 있습니다. 이 통계적 법칙이 모든 사안에 들어맞진 않겠지만, 사소해 보이는 일이라도 가볍게 넘기면 안 된다는 점을 일깨울 때 종종 인용됩니다. 안전하지 않은 사회 구조는 계속 신호를 보냅니다. 이러다 큰일 난다, 하고요. 그러나 상상하지 못하는 자들의 도시는 허점을 알려 준 사고를 신호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방치하다 결국 대형 사고를 맞닥뜨리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맞닥뜨린 이 불볕더위는 과연 무엇의 전조 증상일까요? 아니면 반대로 어떤 신호를 무시해 온 나비효과일까요? 목의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한 탓에 며칠을 앓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무수한 고리로 연결된 내 몸에, 이 사회에, 나아가 전 우주에, 얼마나 다양한 나비효과가 벌어지고 있을지를 상상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들의 보금자리에 공항 하나를 들이는 일이, 야생동물의 집에 도로를 뚫고 케이블카를 놓는 행위가, 원전을 추가하고 데이터 센터를 짓는 일들이 지구의 시간에서 어떤 나비효과를 일으킬지 상상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맞닥뜨릴 나비효과가 사랑하는 이를 잃는 거대한 사고나 재난, 나아가 멸종의 형태로 찾아오길 바라지 않는다면요. 목감기가 차츰 잦아들고 기침과 콧물이 수줍게 나올 때쯤, 귀와 턱이 만나는 지점이 부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고는 사랑니가 솟아 나오고 있다는 것도 발견했습니다. 우와, 나라는 몸뚱어리의 신비로움이 어디까지 나를 끌고 갈까,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덕분에 요즘 나의 더듬이는 어디를 향해 나 있는지 돌아보게 됐습니다. 너무, 나의 고통에만 집중하고 있었더라고요. 내 안의 충만함을 넘어서 지구로 확장되는 연결을 가능케 하는 상상력을 잃지 않으려면, 더듬이의 방향을 잘 잡아야겠습니다. 전쟁 덕분에 이윤을 보는 자들로부터 인간다움의 절멸을 느껴야 하는 요즘, 당신의 면역력이 떨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글은 <봉성신문>에 실렸습니다.
    • 기후위기
    2026-08-31
  • 환경을 위해 채식하겠다던 네가 오늘 치킨을 먹는다고 해도
    벽소령 관통도로 공약 철회를 요구하며 열린 2026 생명평화 하지제에서, 내게 온 꽃등에. 때로는 이런 작은 맞닿음이 수백 마디 말보다 힘이 셀 때가 있지요. 얼마 전까지 저는 350일 채식인이었습니다. 이젠 달걀을 조금씩 먹기 시작해서 이렇게 부를 수가 없지만, 전에는 한 해 365일 가운데 350일 정도 채식하고, 보름 정도는 잡식인으로 살았습니다. 채식하는 날이 349일이 될 수도 있고, 351일이 될 수도 있지만, 날 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한다는 게 중요하니까요. 벌써 채식한 지 열다섯 해가 넘었으니, 이제는 채식하는 일이 저에게 너무 힘들고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무서운 건, 어릴 때 고기 맛을 알아 버린 ‘입맛’이란 놈이 한두 달에 한 번 정도 찾아와 고기를 그리워하게 만든다는 거예요. 또, 저를 완전한 비건이 될 수 없게 만든 입맛이 하나 더 있는데, 그건 우유를 못 끊는 입맛이에요. 당신이 키가 작아 두 딸만큼은 꼭 키를 키우겠다고 한을 품은 우리 엄마는 어릴 때부터 두 딸에게 하루에 500리터씩 우유를 먹게 했습니다. 그 맛에 길들었는지, 우유를 끊는 일이 고기를 끊는 것보다 어려웠거든요. 입맛이라는 게 참 무서워요. 치킨을 찾는 입맛, 라테를 원하는 입맛이 제게 찾아오면, 아무리 머릿속으로 좁은 케이지에 갇힌 닭이나 강제로 임신해 우유를 착취당하는 젖소를 생각해도 그놈의 (우라질) 입맛을 떨쳐내기가 힘드니. 그렇더라도, 날마다 고기를 찾던 제가 350일 채식인이라도 된 걸 보면 입맛을 완전히 못 바꾸는 건 아닌 듯합니다. 시간과 노력, 그리고 무엇보다 함께 채식하고 채식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입맛도 조금씩 바꿀 수 있더라고요. 그렇게 저는 천천히 조금씩 너무 괴롭지 않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 생각해 350일 채식인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한 일이어도 몸에 밴 습관을 이기기가 이렇게 어려운데, 하물며 채식에 의지가 없는 사람이 채식하는 일은 얼마나 더 어렵겠어요? 그러니 채식하지 않는 사람에게까지 채식을 강요할 수는 없다는 걸 저도 잘 압니다. 남의 행동을 고치려 드는 지적질은 정말 못 만든 광고 같아서 아무리 해도 효과가 없었어요. 그걸 알면서도 저는 가끔 못 만든 광고를 또 내보내기도 하니, 이 또한 습관의 폐단인가 싶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누군가가 어떤 판단을 내리기까지 고려해야 할 일들은 내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다는 걸 깨닫게 해 준 경험이 많았고, 덕분에 못된 지적질 습관을 꽤 줄이게 됐는데요, 그 가운데 하나가 황정은의 소설 『계속해보겠습니다』에 나오는 ‘순자’를 만난 일입니다. 순자는 자기 핏줄인 나기뿐 아니라 옆방에 사는 아이인 소라와 나나를 위해 날마다 도시락 세 개를 여섯 해나 싸는 인물입니다. “반찬으로 머리 달린 부세 구이가 통째로 담겼다거나 고춧가루에 버무린 오이지만을 수북하게 담았다거나 이따금 달걀말이지만 대개는 달걀프라이 혹은 다른 반찬 없이 달걀프라이 한 가지를 밥에 얹고 양념간장을 뿌린 것 하는 방식으로 투박하기 이를 데 없는 도시락이었다.” _『계속해보겠습니다』 황정은 순자가 싼 도시락은 육식에 가깝습니다. 만약 순자가 환경을 위해 채식해야 한다는 강박을 느꼈거나, 누군가로부터 그런 강요를 당했다면, 아마도 옆방 아이들의 도시락까지 챙기지는 못했을 것 같아요. 순자는 늦은 밤까지 과일을 팔고 돌아와야 했고, 뇌경색으로 죽은 남편이 남긴 빚도 해결해야 했는데, 그런 순자에게 달걀프라이는 손이 많이 가는 나물 반찬보다 쉽게 세 아이의 도시락을 싸도록 도와주었을 거예요. 게다가 싸구려 달걀 한 판이면 싼 값으로 여러 날 아이들을 먹일 수 있었겠죠. 들여야 하는 노력을 보나, 돈을 보나, 육식 도시락이 옆방 아이들을 위한 순자의 선물을 가능케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물론 달걀이 어떻게 이렇게 싸게 대량으로 날마다 인간의 밥상에 오를 수 있는지를 두고 문제를 제기할 수는 있지만, 순자를 그저 동물복지나 기후위기도 생각 안 하는 악당이라고 비판할 수는 없겠지요. 순자가 어떤 사람인가요, 여섯 해째 날마다 새벽같이 일어나 옆방 아이들 도시락까지 싸는 인물이면, 그 인품은 말 다했지요. 그가 동물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350일 채식하는 저보다 몇 배는 더 헤아렸을 겁니다. 다만 먹여 살려야 할 자식과 배고파하는 이웃 아이를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순자는 자기가 생각하기에 최선이라고, 가장 바람직하다고 본 방향으로 움직였을 뿐입니다. 모두에겐 저마다 사연이 있고 그 사연은 제삼자가 상상할 수 없는 고달픔과 슬픔, 우울함 같은 감정을 안고 있을 수 있다는 걸 생각해 봅니다. 오늘 내가 옳다고 생각한 것이 내일 오답이 될 수도 있다는 것도 함께 생각해 봅니다. 내가 어떤 까닭으로 공장식 대량 축산물을 덜 선택하려고 하는지를 말할 수는 있겠지만, 누군가가 육식을 한다고 해서 그를 비난하거나 미워할 필요는 없다는 걸 순자가 제게 가르쳐줬습니다. 비건을 선택한 뒤로 섭식장애가 생겼다는 친구에게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벗아, 환경을 위해 채식하겠다던 네가 오늘 치킨을 먹는다고 해도 나는 널 비난하지 않을 거야. 당연히 너를 미워하지도 않지. 네 마음을 이해해. 너를 존중해. 오늘은 네 몸에 들어간 닭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내일 더 나은 선택을 할 수도 있잖아. 네가 그간 더 나은 선택을 하느라 얼마나 애썼는지 잘 알아. 너와 같은 지구인 동료가 있어서 나에게도 큰 힘이 돼. 네가 무얼 먹고, 무얼 사고, 무얼 입든, 네가 충분히 고민하고 결정한 선택이라고, 너만의 까닭이 있으리라고 생각해. 그리고 나는 지금 네 모습 그대로 네가 좋아. 우리가 친구여서 좋아.” ‘그냥 될 대로 살다 죽자’ ‘혼자서 그런다고 뭐 달라지냐’ 하는 절망이 찾아오더라도 ‘계속해 보겠습니다’ 하고 마음을 다잡는 비폭력 사랑꾼들을 나는 응원합니다. 내 옆의 소라, 나나, 나기, 순자가 그 감수성을 놓지 않을 수 있게, 계속할 의지를 꺾지 않을 수 있게, 나는 그들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을 응원합니다. 우리 서로가 무지개 색깔로 더 나은 선택을 해 나가도록 빌어 주기를 바라며, 완벽하지 않지만 그래서 더 열심히 고민하는 지구 생명체들을 나는 늘 응원하겠습니다. 글쓴이 : 문홍현경 _니은기역 출판사 이끄미 (이 글은 <봉성신문>에 실린 글입니다.)
    • 기후위기
    2026-07-30
  • 자연을 닮은 농사, 농생태학 1강
    지리산-인
    • 기획
    2026-07-12
  • 기후변화가 포도 농사에 미치는 영향
    새로운 품종을 심었다는 연락이 왔다. 오래 알고 지내던 농민이다. 섬진강을 건너 구례구, 곡성 그리고 남원으로 간다. 다시 강을 건너 남원 금지면에 도착했다. "어디 계세요?" "아.. 벌써 왔는가?" "네" "어디 하우스로 가면 되나요?" "여기.. " "복숭아 심었던 곳으로 가면 되나요?" "그래, 거기 맞아." 오래전에 그 하우스에는 복숭아가 심어져 있었다. 하지만 잘되지 않았고, 이제는 포도가 자라고 있다. 농장에 들어가 보니 사람은 안 보이고 멀리 닭 몇 마리가 흙을 쪼고 있다. 하우스 끝에서 황 농부님이 걸어오신다. "아이구, 더운데 어찌 지내?" "뭐, 저야 잘 있어요." 이런저런 근황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이건 무슨 품종입니까?" "캠벨 615라고 하는 신품종이야. 캠벨하고 비슷한데 수확이 빠른 품종이지. 씨도 없고 당도도 캠벨보다 높고, 병충해에도 강하다고 하더라고." 농사는 멀리서 보면 항상 그대로 있는 것처럼 보인다. 포도가 나오고 배가 나오고 사과가 나오고, 철이 되면 복숭아가 나오고 매번 그 시기에 때맞춘 과일들이나 농산물이 수확된다. 하지만 같은 복숭아도 작년의 복숭아가 아니고, 포도도 과거의 포도가 아닐 수 있다. 농민에게는 말이다. 국내에는 매년 새로운 과일 품종과 채소, 과채 품종이 쏟아져 들어온다. 그중에 몇 개는 실험적인 농민들이 시도를 해보고 검증을 거치고 나면 전국의 농민들에게 퍼진다. 최근 몇 년간 가장 인기가 높았던 품종은 샤인머스캣이다. 처음 심었던 농민들도 이런 품종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시도를 했고 그것이 성공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캠벨 같은 전통적인 포도를 재배하던 농가가 품종을 바꾼다. 홍수 출하가 이어지고 가격은 떨어지기 시작한다. 급기야는 기존의 캠벨 가격은 오르고 샤인머스캣은 가격이 떨어지게 된다. 식품은 보수적인 시장이다. 우리가 먹고 있는 대부분의 식재료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 외국에 나가면 김치가 생각나듯, 달달한 샤인이 최고처럼 여겨지던 시기가 있었지만, 과거의 캠벨 맛을 잊지 못한다. 잠시 한눈을 팔다가도 돌아간다. 식품은 그런 시장이다. 하지만 농민에게는 숙제가 있다. 같은 품종을 오래 심다 보면 그 품종에 맞게 진화한 벌레들과 균, 선충들이 농장을 지배하게 된다. 오래된 품종은 그 공격에 대응하기 어렵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 더 많은 농약을 쳐야 한다. 그러다 보니 병충해에 강하고 기존 벌레들과 익숙하지 않은 품종으로 대체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더구나 사람도 그렇듯이 나무들도 젊은 나무들이 생산량이 많고 병충해에도 강하다. 새로운 품종을 심는 이유가 된다. 캠벨 615도 그렇게 이 밭에 정식되었고 첫 수확을 시작했다. 생산 농가의 말에 따르면 아직까지는 병충해에도 강하고 맛도 좋고 색도 잘 나온다고 한다. 캠벨은 익으면서 검은색으로 변해야 하는데, 붉은색에서 끝나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 기후변화 때문이다. 새로운 포도를 먹어보니 정말 기존의 캠벨에 비하여 당도가 높다. 씨도 없어 먹기 편하다. 보통 포도씨를 없애기 위해 처리가 필요한데, 이 포도는 씨 자체가 없다. 블랙 사파이어(가지포도)와 비슷하다. 블랙 사파이어 포도도 신품종으로 많이 심었지만, 현재는 많이 남아있지 않은 씨 없는 포도다. 씨가 없어 먹기 편하고 당도가 높으며 송이가 잘 떨어지지 않는다. 캠벨은 송이가 잘 떨어져 유통할 때 힘들다. 여러 가지로 장점이 많지만 시장에서 과연 성공할 것인지는 별개다. 현재 남원에서는 두 농가가 시험적으로 재배를 하고 있다고 한다. 만약 올해 재배에 성공한다면, 내년에 더 많은 농가가 이 품종으로 변경할 수도 있을 것이다.
    • 기후위기
    2026-07-07
  • 단정하지 않아도 괜찮은 세상
    단정하지 않아도 괜찮은 세상 복잡함을 문제 삼는 인간의 속도에 맞추려 하면, 강도 땅도 산도 한 가지 모양으로 반듯해진다. 어떤 꼴의 재앙이 될지 알 수 없다. 친구들과 생강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올해는 새로운 밭에서 시작하게 되었는데요, 그리하여 올해 생강 농사의 첫 일은, 갇힌 땅 구출하기였습니다. 거창해 보이지만, 그냥 제가 붙인 이름으로, 고랑을 꽉 덮고 있는 부직포를 걷어 내는 일입니다. 이미 있는 부직포를 굳이 걷을 필요가 있는지 처음엔 의아했습니다. 몇 해나 묵은 부직포 위아래로는 또 다른 생태계가 끈끈하게 만들어졌고, 또 무엇보다, 걷어 낸 부직포는 또 다른 쓰레기가 되어 매립되거나 소각될 테니 그럴 바에야 땅에 그대로 두어 오랜 세월 뒤 땅으로 돌아가게 두는 게 낫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거든요. 그렇지만 함께 농사짓는 친구들 생각은 달랐어요. 플라스틱이나 다름없는 부직포가 밭에 있으면 땅이 숨쉬기에도 어렵고, 미세플라스틱이 계속 땅으로 들어갈 것이고, 자연농 숲밭의 순환 기능에 해가 될 것이라고 했지요. 저는 그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궁금했습니다. 부직포가 다 벗겨진 우리 숲밭의 변화가. 그래서 친구들 의견에 따르기로 했어요. 내가 땅을 구출한 걸까, 땅이 나를 지켜본 걸까 갇힌 땅 구출하기가 시작됐습니다. 땅에 깔린 부직포와 현수막 겹겹을 벗기려고 힘을 주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덮개를 뚫고 자란 풀들이 덮개와 땅을 이어 주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풀과 흙과 낙엽의 무게까지 더해져 잘 들어 올려지지 않았지요. 있는 근육, 없는 근육을 다 끌어모아 덮개를 들어 올리니, 그 밑에 정말 셀 수 없을 만큼 얽히고설킨 잔뿌리들이 붙어 있었습니다. 도망가느라 정신없는 무수한 곤충 그리고 지렁이들…. 아, 지렁이가 정말 많았습니다. 마침내, 고랑 흙이 다 드러났습니다. 비를 맞은 뒤로 더 다채로운 음영을 보이던 숲은 자기가 품은 밭에서 플라스틱 덮개가 사라지자 훨씬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제 눈에는요. 숲도, 숲속 생명들도, 오늘 우리가 한 일을 좋아할까? 하고 생각해 봤습니다. 그건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제겐 늘 의아한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게 맞는가? 내가 하는 짓이 정말 옳은가? 내가 또 무언가에 치우쳐 있는 게 아닌가? 하고요. 지난날,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갇혀서 내 고집만 부리며 산 것이 어리석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지금도 그러고 사는 게 아닌지 흠칫 놀라곤 합니다. 그래서 자꾸 질문해 보는 거예요. 숲밭에서도 그랬어요. 시간의 속도가 인간과는 다른 생명들에게 인간의 속도에 맞추라고 강요한 게 아닌지, 뜨끔해서요. 인간의 속도로 만드는 ‘보기에 좋은’ 함정 얼마 전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지리산 국립공원 구상나무 보전 세미나 및 자연적응실험>이 있었습니다. 국립공원공단은 지리산과 한라산 아고산대에서 자라는 구상나무가 일부 지역에서 말라 죽은 일을 두고 걱정해 왔습니다. 고심 끝에, 그들은 미리 세석에서 기른 구상나무 묘목 160분을 헬기로 날라, 반야봉에 심었습니다. 이 사업을 위해 많은 이가 반야봉 땅을 밟았고, 할 수 없이 일회용품과 에너지가 쓰였고, 다른 곳에서 자란 묘목이 반야봉에 심어졌습니다. 그들이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을, 숲은, 구상나무는, 그 숲에 사는 생명들은, 좋아해 줄까요? 인간이 자연에 대해 아는 건 고작 빙산의 쪼가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왜 인간은 기다리지 못할까요? 아직 구상나무 죽음을 둘러싼 자료가 충분히 쌓이지도 않았고, 다른 장소에서는 어린나무가 활발하게 자라는 등 지역마다 상태가 다를뿐더러, 자연의 천이 과정을 고려하려면 수십 년을 지켜봐야 할 일인데도, 왜 더 지켜보지 못할까요. 우리 사회가 복잡한 것을 견디는 능력을 잃어가고 있는 걸까요? 불확실하고 복잡한 것을 못 견뎌서 측정할 수 있는 성과와 명확한 인과관계를 자꾸 요구하고, 이런 압력이 거세질수록 세계의 구불구불한 복잡성을 쫙쫙 펼쳐서 통제하려는 게 아닌지. 마치, 한 밭에 한 작물만 쫙 심고, 한 숲에 한 나무만 쫙 심고, 학교에선 아이들을 쫙 줄 세우고, 다양한 개성 같은 건 별종 취급하며 교정해야 할 문제로 바라보는 것처럼요. 다양한 요인, 가지각색 요소, 저마다 가진 색깔, 무수한 변이를 느긋하게 바라볼 여유가 사라져 가는 것 같아요. 인간의 속도 안에서만 생각할 수 있는 것들, 딱 거기에 맞춰서 해결책을 내려고 하다 보니 다양성도 사라지고 기다릴 여유도 사라져 가는 것 같아요. 구불구불, 꿀렁꿀렁, 가지각색, 제멋대로, 울퉁불퉁 복잡하고 얽히고설킨 것들을 좀 내버려둘 여유를 가져 보면 어떨까요. 그런 세상이라면, 인간들이 반야봉의 구상나무를 좀 더 지켜볼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그런 세상이라면, 땅이 맘껏 숨을 쉬고, 아이들도 맘껏 숨을 쉬고, 내가 세상과 어떻게 연결돼 있는지를 탐구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여러 생물이 함께 살 수 있는, 단정하지 않아도 괜찮은 사회일 것 같은데 말이죠, 그런 세상 어떤가요? 글쓴이 : 문홍현경 _독립출판사 니은기역 이끄미 (이 글은 <봉성신문>에 함께 싣습니다.)
    • 기후위기
    2026-06-15
  • 종말이 오면 좋겠다고 그랬어요
    종말이 오면 좋겠다고 그랬어요 우울하고 불안한 당신에게, 길가의 마거리트(마거렛) 꽃이 주는 햇살 같은 인사를 전합니다. 당신은 문제가 아닙니다, 당신만의 문제도 아닙니다. 피어나는 꽃들을 빌려 계속 안부를 묻겠습니다. 지난 4월 22일 구례에서는 지구의 날이 조용히 지나갔습니다. 2021년부터 해마다 열린 ‘구례 지구의 날 어린이·청소년 기후행동’으로 거리가 시끌벅적했던 지난 해들과 달리, 올해부터는 다른 방식으로 기후운동을 이어가기로 한 까닭입니다. 지구의 날, 다른 지역에선 무슨 일이 있었나 하고 소식을 찾아보다가 제목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지구 걱정은 시험 끝나고. 지구의 날 10분 소등도 어려운 캠퍼스>. “대학생들에게는 10분의 소등조차 허락되지 않는 ‘중간고사 기간’의 압박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라며 한 대학생 기자가 지구의 날조차 지구를 생각할 수 없는 캠퍼스 현실을 드러낸 기사였습니다. 이 기사를 읽고 대학생들이 사회 문제보다 개인 성적 따기에만 몰두한다고 쉽게 혀를 찰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듯합니다. 그들의 무관심은 지난 2022년 대선 토론회에 나와서 “알이백(RE100)이 뭐죠?”하고 묻던 후보 시절 윤석열 씨의 무책임한 무관심과는 결이 달라 보입니다. 고용 불안, 주거비 부담, 경쟁 압박, 우울, 고립과 은둔 등으로 종말보다 못한 현실을 걱정하는 청년들에게는, 어떤 권력도 믿을 구석도 없으니 말입니다. 기후위기라는 재난만큼 청년들의 희망 없는 일상은 우리 사회가 조금씩 쌓아 온 ‘느린 재난’이 된 것 같습니다. 종말을 바라거나, 이미 종말을 살고 있거나 고민실 작가의 단편소설 「쓰나미 오는 날」(『홈가드닝 블루』)에 나오는 인물 유경은 쓰나미가 올 거라는 소문에도 도시를 떠나지 않고 출근합니다. 왜 직장을 그만두지 않는지 묻는 말에 유경은 “다시 취업할 수 없을 것 같아서요.”라고 말합니다. 이 사회에서, 쓰나미보다 실업이 두려운 자들은 유경만이 아닐 것입니다. 기후재난보다 시험이 두려운 아이들처럼요. “기후위기로 학교 문 닫으면 시험 안 봐도 되겠지?” 우연히 들은 고등학생 청소년들의 대화였습니다. 이들의 어깨에는 지구보다도 무거운 짐이 들려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한편에선 기후위기를 시험 문제로 내는 ‘기후수학능력시험’이 치러졌습니다. 2025년 8월에 열린 제2회 기후수능의 점수와 1등 학생에 대한 기사들이 있었습니다. 중고등학교에서 환경 과목이 거의 외면받고, 환경을 담당하는 교사 또한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어서, 환경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최 측 의도에는 공감하지만, 들고 나온 대안이 또 다른 시험이고 줄 세우기라니…. 기후수능으로 환경에 대한 관심이 늘면, 아이들 입에서 “기후위기로 다 한꺼번에 죽으면 시험은 안 봐도 되잖아요.” 같은 말이 안 나올 수 있을까요? 쓰나미보다 실업이 두렵다는 유경이들은 환경수능에서 높은 점수를 받으면 좀 덜 불안해할 수 있을까요? 100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할 정도로 기록적인 폭우가 내린 2025년 여름 한반도에서 폭우로 사망한 이가 37명이었으며, 같은 해 폭염으로 사망한 이는 19명이었습니다. 한편, 2021년부터 2025년 6월까지 전국 17개 시도교육청이 집계한 ‘자살 시도나 자해를 한 학생 수(자살한 학생 포함)’는 하루 평균 19.37명이었습니다. 수치만으로 어떤 죽음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기후위기를 만드는 방식으로 또 다른 재난이 가려지고 있음을 똑바로 바라봐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혹은 눈감는,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폐허’가 이미 재난이나 종말이라는 단어보다도 더 끔찍하게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드러내야 하지 않을까요? 기후위기를 부추기는 방식이 아니라, 기후위기를 막을 생태적 전환의 목소리로 말입니다. 종말보다 못한 현실, 각자 풀어야 할 과제로 남기지 말아야 지구의 날에 열린 한 토론회에선 청년들의 ‘기후 우울’을 주목했습니다. 기후위기로 우울감이나 무기력함, 생태적 상실감에 시달리는 청년이 늘어난 현실을 사회 구조에도 영향을 미치는 심리적 위기라고 진단했습니다. 누군가에게 기후 위기는 먼 미래가 아닌 현재의 위협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불안을 만드는 방식을 가져와 불안을 잠재우겠다고 합니다. 더 열심히 공부해라, 좋은 직장에 가라, 돈 많이 벌어라, 같은 말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꼬드깁니다. 시궁창 같은 현실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방법은 오직 재난뿐이라는 생각에 재난이 오기를 갈망하는 청소년·청년들, 현실이 재난보다 더 무서워서 재난에는 무감해진 무수한 유경이들 그리고 기후위기 불안에 시달려 우울한 청년들이 ‘지금 우리 옆에’ 있습니다. 이것 또한 재난입니다. 각자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닙니다. 게다가, 이미 재난을 겪고 있는 무리에 인간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너무 뜨거워진 물속의 물살이나, 옴짝달싹할 수 없는 나무 같은 생명도 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나의 역사와 ‘동시에’ 존재하는 모든 폐허를 우리는 어떻게 계속 외면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2020년 『살자편지』 『벗자편지』 책들을 기획할 때, 독자에게 이런 물음을 던지고 싶었습니다. “백번 양보해서, 똑똑한 소비자와 과학자가 정말로 기후위기를 막을 수 있다고 치자, 그럼 그 뒤엔? 빈곤과 양극화, 각종 차별과 혐오, 지나친 경쟁과 열등의식, 한계를 모르는 성장 사회의 삶은 기후위기만큼 무서운 일상 아닌가?” 우리 사회가 느린 재난을 만들어 온 방식들을 의심해 보면 어떨까요. 왜 누군가의 일상이 종말보다 끔찍해졌는지 돌아보면 어떨까요. 저는 자꾸 까먹어요. 그래서 동료 지구인들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우리 옆의 폐허와 저 너머의 폐허를, 그리고 인간 언어를 말할 수 없는 자들의 폐허를 못 본 척하지 않게 도와주세요. 글쓴이 : 문홍현경 독립출판사 니은기역 이끄미, <자기 씨앗대로 산다> 지은이 (이 글은 <봉성신문>에도 함께 싣습니다.)
    • 기후위기
    2026-05-15
  • 홍천 양수발전소 예정지를 다녀와서- "1년에 14.82분 가동. 오타가 아닙니다."
    “야, 이 빌어먹을 개새끼들아~~~!” 저절로 쌍욕이 튀어나옵니다. 돈으로 자기 배 불리자고 수십년 동안 사람들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베풀어준 잣나무 수십만 그루를 베어내고, 산을 파헤치고, 골짜기를 수몰시키는 배은망덕한 개자식들, 인간의 탈을 쓴 짐승들, 지구 간강범, C발놈들. 이곳은 강원도 홍천 풍천리입니다. 핵발전소에서 생산되는 초과 전기의 쓰레기장으로 예정된 곳이죠. 핵전기쓰레기장을 고운말로는 ‘양수발전소’라고 합니다. 쓰레기처리장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만든 위선적인 이름입니다. 양수발전소는 얼마나 발전을 할까? (주)한국수력원자력(이하 한수원)이 공개하고 있는 자료에 따르면, 2025년 한해 전국의 양수발전소는 평균적으로 39일 가동, 수력발전소는 94일 가동되었습니다. 10% 조금 넘는 가동률입니다. (자료출처: https://www.khnp.co.kr/main/selectWebDisoffView.do?key=152&siteId=&seq=19602, 합계 발전량 ÷ 합계 발전용량 ÷ 24시간으로 계산) ‘가동’이라는 단어는 발전소가 발전목적으로 쓰이는 시간을 뜻합니다. 나머지 시간 동안, 양수발전소는 핵전력을 소모하기 위해 하부저수지에서 상부저수지로 물을 끊임없이 퍼올리고 있으며, 상부저수지에서는 끊임없이 물을 흘려보내고 있습니다. 발전기를 돌리지 않고 그냥 흘려보냅니다. 이것도 어떤 측면에서는 가동이라고 할 수 있고, 환경단체들의 ‘너무 낮은 가동률’ 주장도 오해를 일으킬 만한 지점이 있기 때문에, 좀 더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태양광이 24시간 발전할 수 없듯이, 양수발전소도 24시간 가동할 수는 없습니다. 물을 퍼올리는 동시에 발전하는 건 말이 안 되니까요. 남는 전기를 소모(저장)하기 위해 물을 퍼올리는 시간이 당연히 감안되어야 합니다. 한수원에 따르면, 양수발전소를 풀로 가동한다면 하루에 6시간(25%)이 한계라고 합니다. 전국의 양수발전소는 하루 평균 2시간 30분 정도 가동하고 있습니다. 가동 가능 시간의 절반이 채 안되니, 태생적 한계를 감안하여도 여전히 낮은 가동률입니다. 저기요, 오타 아닐까요? 홍천 풍천리에 건설예정인 양수발전소의 ‘가동률’은 얼마나 될까요? 기절초풍할 정도로 낮습니다. 한수원의 홍천 양수발전소 승인 신청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연간 148.2MWh의 전력을 생산할 수 있으며”(양수건설 타당성조사 용역(홍천지점), 2022, 한국수력원자력). 이 수치는 2025년 청평양수발전소 발전량의 0.059%, 예천양수발전소의 0.014%에 불과하고, 600MW용량임을 감안해 계산하면 연간 14.82분 발전에 불과합니다. 강원생명평화기도회 박성률 목사가 이설도로건설로 엉망이 된 숲속을 안내하며 말했습니다. “보통사람이 메가와트가 얼마나 되는 건지 감이 안 오잖아요. 그래서 AI에게 신청서 분석을 부탁했지요. 그런데 AI가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전력 생산량이 오타가 아니냐고 묻더라고요. GWh를 MWh로 잘못 쓴 거 아니냐고. 그래서 한수원에 전화를 걸었고, 담당자가 오타가 아니라고 확인해 주었어요.” 연간 14.82분. 오타가 아닙니다. 홍천 양수발전소 건설에 드는 비용은 1조 7천억. 이 돈을 들여서 양수발전소를 짓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가동률’이라는 단어를 치워버리고 기능의 비율로 보면 모든 것이 명쾌해집니다. 국내 양수발전소는 전기 쓰레기장 기능이 9할, 발전 기능이 1할이며, 홍천 양수발전소는 쓰레기장 기능이 백프로에 가깝습니다. 양수발전소를 더 짓는 이유는 전기가 더 필요해서가 아닙니다. 밤에도 낮에도 항상 초과되는 전기를 내다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계속해서 초과될 전기를 기존의 양수발전소로는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더 많은 쓰레기장이 필요해진다는 겁니다. 전기 쓰레기장 만든다고 풍천리 할머니들이 50년 전에 심어 가꾼 잣나무 11만 2천 그루를 베어내고 잣수확으로 살아가는 동네 사람들 생계를 박살냅니다. 쫄쫄쫄 흐르는 시냇물을 3년 동안 받아쓴다고 합니다. 그러면 풍천리에는 개천에 물도 없겠네요? 100대 명품숲 유아숲체험장도 물에 잠깁니다. 욕이 나옵니다. "썩을 놈의 개새끼들. 나쁜 새끼들. 한수원 니가 뭔데? 어? 이래도 돼는 거야? 이러고도 니들이 멀쩡할 줄 알아? 천벌 받을 놈들." 나무들은 착해서 욕을 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인 내가 대신 욕을 해줍니다. 사람이 말을 할줄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어요? 말없는 나무들 대신 욕이라도 시원하게 한바가지 해달라고 목소리가 있는 것 아닌지. 풍천 주민들은 젊은 시절 손수 심어 가꾼 잣나무숲을 지키기 위해 7년 동안이나 싸웠습니다. 수몰되는 지역에 들어와 펜션 사업을 하던 이들에게는 보상절차가 진행되었고, 이설도로를 만드는 작업으로 나무들이 베어지고, 산이 파헤쳐졌습니다. 재선충에 감염된 소나무들을 실어와 불법적으로 방치하는 쓰레기장이 됐습니다. 댐 예정지 바깥에 살면서 평생을 잣숲에 기대어 살아온 주민들은 어떠한 보상도 받지 않고 투쟁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이 이만큼 싸워온 덕분에 이만큼 숲이 지켜졌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요? 자본의 폭력은 무자비합니다. 사치품과 쓰레기 사이에서 쓰레기장에 버려야 할 정도로 많은 전기는 왜 생산하는 걸까요? 조절이 어려운 ‘안정적’ 전력공급원인 원전에 모든 탓을 돌릴 수도 있지만, 태양력도 통제 불가능한 초과 전기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원전을 줄이지 않은 채 태양력만 늘어나고 있으니까요. 태양광과 풍력이 각광을 받자, 태초에 핵전기 쓰레기장으로 지어진 양수발전소는 신재생에너지의 배터리 역할로 홍보되었습니다. 그래도 태양광이 늘어나면 원전을 폐쇄하려나 했더니 웬걸, 신규 원전을 늘이겠다고 합니다. 양수발전소는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자연 방전되는 서랍 속 비상 배터리입니다. 부피가 어마어마한 이 배터리로 인해, 상당한 면적의 동식물 서식지와 인간 거주지가 사라지게 됩니다. 피크타임에도 항상 전기가 남아도는 판국에, 더 많은 비상 배터리가 정말로 필요한지 의문입니다. 집집마다 서랍에 비상 배터리 두세 개 갖추고 있는데, “예비 배터리는 생활에 필수”라며 나라에서 또 배터리를 선물해주겠다고 합니다. 기쁠까요? 집집마다 찬장에 안 쓰는 텀블러 여러 개 있습니다. 페트병 내다 버리는 건 일입니다. 넘치는 물건은 기능이 무엇이건, 새것이건 낡았건 관계없이 쓰레기입니다. 결국 쓰레기가 되는 물건을 자꾸 만들고 강매하는 이유는 뻔합니다. 누군가가 돈을 버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발전소와 전력망과 배터리는 국가 예산을 끌어다 쓸 그럴싸한 명분이 됩니다. “전기는 국민 생활에 필수”라고 하지요. 지나친 전기 사용으로 공급이 끊길 수 있는 전력수요 피크 어쩌고 하며 겁을 줍니다. 나라에 필수적으로 가동되어야 하는 시설들은 존재합니다. 그런데 이 시설들은 필수이기 때문에 전기가 우선적으로 공급되며, 비상용 발전시설을 갖추고 있습니다. 소위 전력수요 피크를 세계종말만큼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옛날에 사람은 전기 없이도 살았고, 전기는 인간에게 사치품이지, 필수품이 아닙니다. 필수라고 홍보되는 많은 것들이, 사실 수요를 창출하기 위한 거짓말에 불과합니다. 전기 덕분에 감사하게도 사용할 수 있게 된 여러 사치품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치품들로 세상을 채우기 위해 모든 생명의 생존에 필수품인 숲을 없애도 될까요? 과유불급이라 하였습니다. 어쩌다 정전이 되어도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집집마다, 마을마다 대비하고, 어쩌다 모자랄 수도 있는 적당한 양의 전기를 생산하는 것이 365일 초과 전기를 생산하고 국토를 실리콘과 중금속의 쓰레기장으로 만드는 것보다 안전하고 현명한 길이 아닐까 합니다. 마지막 경고 한 세기 동안 화석연료는 탄소 배출로, 우라늄은 중성자 방출로 지구 온도를 높였습니다. 자동차와 냉장고와 에어컨이 생존필수품이 되고, 연소기관과 전자제품이 지구 온도를 더더욱 높이는 악순환이 영구적으로 정착되었죠. 전기가 충분하고 남는다는 결론이 나자마자, AI를 ‘미래먹거리’로 부각시키며 데이터센터의 전력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더 많은 원전과 송전선을 지어야 한다고 떠들어댑니다. 국가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고요. 중동에 전쟁이 일어나면, 핵으로라도 에너지를 확보해야 한다고 떠듭니다. 이 반이성의 미친 짓거리를 보면 저절로 외계인 음모론이 떠오릅니다. 아름답고 푸른 지구를 질투하는 외계인이 지구를 온통 실리콘과 중금속과 아스팔트와 방사능 쓰레기로 뒤덮고, 동식물과 인간을 멸망시키거나 노예로 만들기 위해 몇몇 인간의 뇌에 침투하여 영감과 정보와 미끼를 제공하고 있는 건 아닌지. AI는 경험의 멸종을 불러오고, 인간 개체들은 생각하는 능력과 기억력, 밝은 눈을 빠르게 상실하고 있습니다. 메가와트인지 기가와트인지 오타 확인도 AI가 담당할 판이죠. ‘모든 것의 외주화’가 이 시대의 좌우명입니다. 돈에 미친 이들의 거짓말에 속지 말고, 이성을 되찾아야 합니다. 숲은 태양의 에너지를 축적하고 저장하는 천연 배터리입니다. 인체 역시 전자기장을 발생시키는 발전소이며, 배터리이고, 모터입니다. 위대한 구루들은 인체를 둘러싼 전자기장을 활성화시키고 운용하는 법을 깨달으면, 음식을 먹지 않고도 살 수 있으며, 시간과 별들 사이를 오갈 수 있으며, 육체의 모습을 영원히 유지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모든 외주화된 것들, 모든 인공적인 것들은 본래 인간과 지구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라고 타이가의 잣나무숲에 사는 아나스타시아는 말합니다. 모든 것의 외주화와 금권을 신봉하는 현대인들은 이런 종류의 지식을 미신이나 사이비로 치부하고 믿지 않으며, 신비주의는 히말라야 설표만큼이나 멸종위기입니다. 그러나 전기가 빛과 열을 발생시키고, 식물이 빛과 열을 흡수하여 저장하는 것은 현대의 ‘과학적’ 상식입니다. 온난화 현상으로 인류 생존이 위협받는 시대에, 우리가 먼저 지켜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일 년에 14.82분 가동되는 양수발전소일까요? 1800ha 잣나무숲일까요? 글쓴이 : 이해성 산청 책방 "지금부터 판타지" 이끄미, 지리산사람들 운영위원, 산청난개발대책위원
    • 기후위기
    2026-05-07
  • 벚꽃은 우릴 서럽게 한다
    벚꽃은 우릴 서럽게 한다 벚꽃은 올해도 아름답습니다. 한참 바라보았어요. 걸음을 멈추고 사진도 찍었어요. 개나리, 목련, 수선화, 산수유 다 한꺼번에 피었어요. 벌들은 혼란스럽겠지만, 풍경은 알록달록 별천지입니다. 저기 중동 땅에서는 전쟁 소식이 계속 밀려옵니다.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나는 아무렇지 않게 아름다운 꽃들을 보고 있으니, 좀 민망합니다. 눈을 내리깔아요.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에요. 아이 교복 빨고, 먼지 쓸고, 설거지하고, 냉장고 정리하고, 겨울 난 시금치 다듬고, 밥하고, 친정엄마랑 통화하고, 때 되면 돈도 벌고, 뭐 이러다 보면, 전쟁이니 기후위기니 머릿속에서 사라져요. 그러다 그렇게 일상을 아무렇지 않게 보내다가, 문득, 아주 잠깐, 생각이 납니다. 폭탄, 펑, 와르르. 그러면 또 잠시 멍해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잠깐이에요. 나는 또 아무렇지 않게 일을 해요. 낮에 찍어 놓은 아름다운 꽃 사진을 천천히 넘겨 봐요. 세상은 아수라장인데 말이에요. 백석 시인의 시 수라가 떠오릅니다. 거미 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모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 버린다 / 차디찬 밤이다 어니젠가 새끼 거미 쓸려 나간 곳에 큰 거미가 왔다 /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 나는 또 큰 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싹기도 전이다 / 어데서 좁쌀 만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적은 새끼 거미가 이번엔 큰 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 미나 분명히 울고불고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아나 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 나는 이 작은 것을 고이 보드라운 종이에 받어 또 문밖으로 버리며 /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 -백석, 「수라(修羅)」 당장 전쟁을 막을 수 없을지라도 시 속의 화자는 추운 밤에 거미를 세 마리나 문밖으로 내보내요. 처음엔 아무 생각 없이 한 마리를 내보냈는데, 그다음으로 어미처럼 보이는 큰 거미가 나타났지 뭐예요. 자기가 아까 쓸어 내버린 거미의 어미인가 싶어 문밖으로 또 내보내요. 아까 그 새끼와 만나길 바라면서 말이죠. 죄책감을 느낀 것 같아요. 그런데 아뿔싸, 이번엔 아주 여린 새끼 거미가 나타났어요. 화자는 가슴이 메요. 밖이 춥지만, 그래도 가족 있는 곳이 좋겠다고 생각해 문밖으로 내보내려는데, 이 녀석이 자꾸 달아나요. 화자는 서러워해요. 결국 그 작고 여린 녀석을 종이에 받아 문밖으로 내버려요. 화자는 적극적으로 거미 가족을 따뜻한 방에서 살게 하지는 않았지만, 자기가 차디찬 밖으로 내버린 거미들을 생각하며 슬퍼해요. 우리가 적극적으로 전쟁을 멈추게 할 수는 없을지라도, 화자와 같은 심정으로 ‘가슴이 짜릿하고, 서럽고, 가슴이 메고, 슬퍼’하는 마음으로 전쟁이 멈추기를 바랄 수는 있을 것 같아요. 벚꽃을 보다가도, 돈을 벌다가도, 공부하다가도, 집안일을 하다가도, 잠시라도 멈춰서 ‘제발 전쟁이 멈추게 해 주세요.’ 하고 바랄 수 있어요. 그런 마음은 ‘제발, 지구 생명들이 더 사라지지 않게 해 주세요.’ 하고 비는 마음과 같을 거예요. 기후위기를 걱정하는 마음은 전쟁이 멈추길 바라는 마음과 연결될 테니까요.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살육과 착취가 사라지길 바라는 마음이겠지요.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보내고 있지만, 그럼에도, 잊지는 않으면 좋겠습니다. 전쟁이 멈추어야 한다는 마음,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마음, 죄 없는 생명이 죽어 나가는 이 지구 가열이 멈추길 바라는 마음, 이런 마음들을 꼭 붙들고 살면 좋겠습니다. 이 마음들이 모여 결국 전쟁을 막고, 독재자를 막고, 위법한 비상계엄을 막고, 일상의 폭력을 막을 수 있지 않겠어요? 적어도, 폭력배 무리와 한편이 되지 않겠다는, 그런 짓거리에 동조하지 않겠다는, 자기 선언은 할 수 있겠지요. 나는 나를 속이고, 그저 안도하는 걸까 그러나 때로는 이런 순간순간의 알아차림이, 고작 그것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고 헛웃음이 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어느 소설 속 인물들, 예를 들면, 『몫』에 나오는 희영 같은 인물이 나와 내게 쏘아붙일 것만 같습니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기 싫었어. 읽고 쓰는 것만으로 나는 어느 정도 내 몫을 했다, 하고 부채감 털어 버리고 사는 사람들 있잖아. 부정의를 비판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정의롭다는 느낌을 얻고 영영 자신이 옳다는 생각만으로 사는 사람들. -최은영, 『몫』 나도 그런 사람인지 생각해 봅니다. 그저 읽고 쓰는 것만으로, 그저 순간순간 전쟁이 멈추길 바라는 기도를 올리는 것만으로, 그저 부정의를 비판하는 이들의 글에 좋아요를 누르는 것만으로, 마치 내가 내 몫을 다한 것처럼 안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게 휘청거리다가, 또 마음 한자리에서는 이런 생각이 올라옵니다. 시인 윤동주가 적극적으로 항일 투쟁에 앞장서지 않았더라도, 일제강점기 민족의 비극과 한을 제 몸에 담아 고뇌하고, 제 역할을 의심해 부끄러워하고 우리말 시를 써 온 그의 마음을 소극적이라고, 자기만족일 뿐이라고 깎아내릴 수 있겠는가 하는 물음말입니다. 날마다 하는 반성과 깨어 있음이야말로 나를, 그리고 서로를 붙들 힘이 되지 않는가, 또, 스스로 변질되지 않는 길이자, ‘자신이 옳다는 생각만으로 사는 사람’이 되지 않게 나를 닦을 수 있지 않겠는가…. 뭐, 이렇게 생각하면서 다시 종말을 늦출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곤 합니다. 서러움과 부끄러움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다시 벚꽃을 봅니다. 여린 것에 몹쓸 짓을 한 것만 같아 느끼는 죄책감이나 고통받는 이들을 외면하여 드는 미안함과 부끄러움은 우리가 지금 이 아수라장 같은 세상에서 끝끝내 버리지 말아야 할 마음 조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마음을 잊지 않게 하는 것은 시 한 구절이기도 하고, 떨어지는 벚꽃잎 하나이기도 하고, 나를 사랑해 주는 한 사람이기도 하고, 학교에서 만나는 따뜻한 선생님의 손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백석의 시 수라가 일제강점기 가족 공동체의 해체를 표현했다느니 어쩐다느니 하는 시 교육을 하고, 시험 문제로 내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국어 선생님들의 마음은 또 얼마나 서러울까요. 벚꽃이 나리는 계절에도 아름다움을 느낄 새 없이 시험 공부를 해야 하는 아이들의 마음은 어떨까요. 전쟁으로 사람이 죽는 일보다, 당장 내 주식이 떨어지는 것에 분노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떻게 달랠 수 있을까요. 전쟁의 끔찍함과 아픔은 대체 언제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요.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미국에도 깨어 있는 시민이 있어서, 트럼프의 전쟁을 비판하며 “노 킹”을 외치고, 전쟁에 참전하지 않겠다며 양심적 병역 거부를 신청하는 이들이 늘었다고 합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 권리 옹호를 위한 미국 시민단체인 ‘양심과 전쟁 센터’의 소장 마이크 프라이스너는 한 일간지 인터뷰에서 최근 양심적 병역 거부 문의가 무척 늘었는데, 전쟁에서 자신이 죽을까 봐 두렵다고 말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모두 정당성이 없는 전쟁에서 ‘누군가를 죽이게 될까 봐’ 두려워했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죽이게 될까 봐 드는 두려움, 그 두려운 마음이 모여 점점 커지면 좋겠습니다. 전쟁을 막는 마음은 큰 결단과 엄청난 선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날마다 느끼는 아주 작은 서러움과 서글픔과 부끄러움, 아픔, 슬픔, 두려움 같은 마음들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 ‘서러운’ 마음을 잊지 않도록, 나 혼자만 잘 먹고 잘살면 된다는 생각에 빠지지 않도록, 나만 아니면 된다는 마음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그렇게 서로서로 붙잡을 수 있도록, 시 한 구절, 벚꽃 한 이파리, 사랑하는 이의 얼굴, 따뜻한 손길을 일상 사이사이에서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그리고, 생각해 봅니다. 선거철에 더러운 돈을 주고받는 사람들이 스스로 반성하지 못하는 세상에서는 전쟁이 멈추기 어렵다는 것을요. 전쟁은 마치 트럼프 같은 사람만 일으키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아야겠습니다. 내가 나날이 하는 선택들이 전쟁이 될 수 있음을, 부끄러움을 모르고 양심을 파는 일이 곧 전쟁의 씨앗임을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나치 군인들은 매일 1,000구가 넘는 유대인 시체를 불태우고, 집에 오면 착한 남편이자 아빠로서 가족에게 사랑이 담긴 편지를 썼다고 하지요. 아름다운 봄 사이사이 느끼는 서러움과 부끄러움이 우릴 구원하길 빌어 봅니다. 글쓴이 : 문홍현경 <자기 씨앗대로 산다> 지은이
    • 기후위기
    2026-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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