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11-1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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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를찾아서] 뒷간에 앉아 보낸 세월
    뒷간에 앉아 보낸 세월 박 두 규 사진: Unsplash의Marko Lengyel 두텁나루숲 뒷간에 앉아 있으면 강이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온다. 서서히 안개가 걷히며 강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쪼그려 앉아 바라보는 두텁나루의 아침은 또 다른 세상이다. 새들은 날아오르거나 자맥질하거나 바위에 외다리로 서 있다. 그래, 나도 그러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경이로운 풍경 속 점 하나로 쪼그려 앉아 있는 것이다. 그 세상은 그 세상대로 이 세상은 이 세상대로 쪼그려 앉아 다리가 저린 세상, 그렇게 하루가 가고 한 해가 가고 한 생이 간다. 그렇게 지리산 어느 구석 바위틈에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구절초 하나 홀로 피었다 진다. ------------------------------------------ <시작 노트> 거처가 강가에 있다 보니 매일 흐르는 강을 보며 산다. 흐르는 세월이다. 촌음도 멈추지 않고 세월이 흐르고 있음을 매일 느끼며 사는 것인데 이는 生의 무상함으로 온다. 붓다의 제행무상諸行無常을 두텁나루숲 뒷간에 앉아 하나의 풍경으로 보는 것이다. 모두가 스스로에 주어진 한 生을 보내는 촌음의 시간인데 누구의 눈길이 부럽거나 두려울 게 무어 있을까. 지리산의 홀로 핀 구절초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어디도 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평생을 살다 가지만, 세상의 비와 바람을 다 맞고 꽃을 피워 스스로 봄이 되고 벌과 나비의 양식이 되고 씨를 맺어 생명을 잉태한다. 평생을 한 곳에서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건만 스스로에게 또는 세상에게 하지 않은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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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4
  • [벗자편지] 함께읽기 3_칩코; 삶이 신비가 되려면
    <지리산인>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벗자편지>>를 펴낸 니은기역 출판사입니다. 자급을 어렵게 하는 허울을 벗어던지고 나와 둘레를 돌보며 고귀한 하루를 살려는 농부들의 편지, <<벗자편지>>를 여기 <지리산인>에 한 달에 한 번, 한 꼭지씩 들려드리게 되어 기쁩니다. 나의 시간을, 나의 생산수단을, 나의 재주를 좀 더 아름답게 쓰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책이 용기를 주면 좋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 이번 시간엔 ❸ 칩코 : 말이 글이 되게 해 주는 이들에게 "삶이 신비가 되려면" 꼭지를 함께 읽겠습니다. 다음 시간엔 ❹ 똥폼이 월간정상순에게 “함께 살자는 그 말, 아주 힘이 센 그 말” 이 함께합니다. 고맙습니다. 말이 글이 되게 해 주는 이들에게 “삶이 신비가 되려면” 칩코 도인의 딸 엄마와 아빠는 이혼했습니다. 어느 부부나 그렇듯 둘은 상극이었습니다. 아빠는 멋쟁이셨어요. 어딜 가나 사람들 시선을 사로잡는 유머와 언변이 있었고, 동안 외모에 옷은 명품을 두르고 다녔습니다. 명품이 아빠의 지갑 형편에 맞아서는 아니었습니다. 저흰 집도 차도 없었으나 아빠는 ‘없어 보이지’ 않는 게 중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빠는 태어나서부터 줄곧 집도 차도 없이 자랐습니다. 친척 집을 전전하고 길거리에서 물건을 팔고 아는 형들에게 얻어터지는 것이 아빠가 기억하는 그의 유년 시절이에요. 아빠는 세 딸을 ‘없어 보이지’ 않게 기르는 것에 가장 열과 성을 쏟았습니다. 어쩌다 돈만 생겼다 하면 딸들을 백화점에 데려가 비싼 옷을 입혔고, 먹다 체할 듯한 분위기의 고급 식당에 앉히곤 했습니다. 대학 시절 저는 또래에게서 찾기 힘든 브랜드 옷을 입고 다니는 바람에, 우리 집 사정을 모르는 친구들은 제가 왜 국가장학금을 꼬박꼬박 받는지, 학교 근로장학금은 왜 학기마다 신청하는지 이해를 못 하기도 했습니다. 엄마로 말하자면 도인이었습니다. 어디서 배우지도 않았는데 벽을 보고 틀어 앉아 명상했다는 것이 엄마의 유년 시절이에요. 결혼 생활이 힘들어지면서 엄마는 더더욱 내면에 몰두했고, 온갖 영성 서적들을 탐독했습니다. 덕분에 안방엔 아빠의 ‘박정희 평전 시리즈’와 엄마의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따위의 ‘영성 서적’이 뒤섞인 책장이 자리 잡았어요. 어릴 적에 전 엄마와 함께한 기억이 없습니다. 엄마를 떠올릴라치면, 집에선 워낙 아빠의 존재감이 압도적이어서 엄마는 술 취한 아빠의 안주를 만들어 주거나 발을 씻겨 주시던 것만 기억날 뿐입니다. 엄마와 대화를 많이 하게 된 것은 이혼 후 아빠가 집을 나가고 난 고등학교 시절부터였어요. 전 미운 친구가 생기면 엄마에게 하소연했는데, 엄마는 그럴 적마다 그 친구는 네 거울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엔 사실 나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고요. 세상은 내 마음의 슬픔, 오만, 증오, 기쁨 등을 비추는 거울일 뿐이기에, 마음 외의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잘난 척해서 미운 친구는 사실은 내가 잘나고 싶은 마음 때문에 미운 것이고, 날 소외시켜서 미운 친구는 관심받고 싶은 내 마음 때문에 미운 것이었어요. 내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나의 질투와 탐욕마저 온전히 사랑하지 않는 한, 계속 다른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서 저를 괴롭힐 거라고 했습니다. 냉정한 상담이라고 들릴 법도 하지만, 어린 저는 그 말에 용케 고개를 끄덕였던 것이 기억납니다. 어릴 적엔 아빠의 영향을 많이 받다가, 나이가 들면서 엄마의 영향을 빠르게 흡수하며 자랐습니다. 그래서인지, 제 삶은 아빠와 비슷했다가 엄마와 비슷한 방향으로 선회하면서 흘렀어요. 저는 유행에 민감한 10대를 보냈습니다. 외출을 준비하느라 무려 두 시간 가까이나 쓰곤 했으니까요. 머리를 손질하고 옷을 고르고, 손톱과 발톱까지 멋을 낸 후에야 집을 나섰습니다. 화장대와 옷장은 늘 가득 차 있었습니다. 집에 돌아오면 종아리에 알이 밸까 봐 맥주병으로 마사지하며 하루를 마쳤고요. 이십 대 초반을 넘고부터는 서서히 이런 일과에 의문을 가졌습니다. 서른을 바라보는 지금 저를 그때와 같은 사람이라고 보려면 과감한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캄캄한 새벽에 일어나 명상하고, 방의 모퉁이마다 깃든 보이지 않는 존재들에게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나면 해가 밝아 옵니다. 집에는 거울이 없습니다. 외출 준비 시간은 필요하지 않다고 보는 편이 나아요. 계절별로 단벌인 개량 한복을 입고 집을 나서면, 내 까까머리를 보고 이웃 할머니는 ‘여잔지 남잔지 모르겠어’ 하면서 나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리십니다. 이제 저는 아빠와 썩 데면데면합니다. 아빠는 ‘남자인 척하는 여자’를 가장 혐오하는데, 제가 머리를 밀고 화장하지 않고 젖꼭지를 가리지 않는 것이 남자 행세하기 위함이라고 이해하신 듯합니다. 아빠에게 여자를 만난다고 커밍아웃을 한 적은 없으나 아마 고백한다면 아빠의 이런 오해에 더욱 힘을 실어줄 듯합니다. 언젠가 아빠는 불안한 예감이 들었는지 협박식으로 ‘난 내 자식이 홍석천 같은 놈이면 죽여 버릴 거야.’라고 한 적이 있는데요. 저는 아빠의 말을 살인 예고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아빠의 눈에서 살기보다는 두려움을 읽은 까닭이어요. 살인 협박이 전혀 먹히지 않은 것은 아니라, 저도 두려움 때문에 아빠와 계속 거리는 두고 있긴 하지만요. 제가 돌연 시골 생활을 시작해 버린 것으로, ‘남자 행세’가 아니라 ‘스님 행세’였나 헷갈리시는 듯합니다. 그런데도 아빠와 영 만나지 않는 것은 아니에요. 마치 이혼하지 않은 것처럼, 예전의 그 정상 가족이었던 것처럼, 아빠는 딸들을 비싼 식당에 데려가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입히는 것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중처럼 하고 다니니, 이제 더는 아빠가 사 주시던 금팔찌나 가죽가방이나 원피스 따위가 도저히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채식하니, 아빠가 데려가던 식당에서 제가 먹을 메뉴는 전혀 없었어요. 아빠의 당황스러움과 서운함도 십분 이해는 갑니다. 아빠는 허탈하면서도 쓸쓸하게 웃으며 말하곤 했습니다. “네 엄마 명상하러 다니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었는데… 딸도 똑같이 되다니.” 늘 그렇듯이, 오랜만에 만난 아빠와 도리어 더 외로워진 마음으로 헤어지고 나면, 엄마의 말이 생각납니다. ‘삶 속에서 반복해 아빠를 괴롭힌 아내와 딸’이라고. 신은 아빠가 자신을 스스로 사랑하게 만들기 위해, 저를 엄마와 똑 닮은 삶을 살도록 했을까요? 명상을 너무 했네 벌써 세 차례 화장실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밤새 메스꺼움에 발만 비비적대다가, 기어코 밀려오는 토기를 참을 수 없던 것이죠. 그날 새벽은 원인을 알 수 없는 구토를 여러 차례 하고, 결국 토를 받을 대야를 가져와 침대 아래에 두고서야 겨우 잠든 날이었습니다. 명상센터에서 장기 봉사를 하던 때였어요. 다음 날은 쫄쫄 굶고 나서도 메스꺼움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새벽에도 두 차례 속을 게워 낸 이후, 결국 센터를 나와 병원으로 향할 참이었습니다. 전 서구 의학으로 치료하는 병원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제 애인은 심장이 아파서 심장 전문 병원에 갔는데, ‘이상 무’를 판정받았습니다. 도무지 이해가 안 가던 애인은 요즘 스트레스가 심했는데 그것 때문이냐고 물었더니, 의사는 자신은 심장만 알기 때문에 그건 정신과에 문의하라고 했답니다. 요즘 코피를 자꾸 쏟는데 그게 심장 통증과 연관이 있는 게 아닌지 물었더니, 다시 말하지만 자신은 심장만 다루므로 이비인후과에 가라고 했답니다. 이 사례 때문에 삐친 것은 아니고, 서구 의학은 인간을 물질로만 취급해서 믿음이 가지 않습니다. 인간을 영성과 물질의 유기조합으로 보는 게 아니고, 부품으로 구성된 자동차 정도로 보는 듯합니다. 저는 생물만큼은 1과 1을 더해서 2 이상이 된다고 여기거든요. 일반 병원 대신으로 대체의학 마사지를 치료받았습니다. 온몸이 멍이 들도록 마사지를 했는데 몸은 호전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결국 혼자 단식 치료를 하기로 했습니다. 속이 편안해질 때까지 계속 굶었어요. 그러다 보식 양을 점차 늘려 가던 중 또다시 새벽에 구토가 시작됐습니다. 임시방편으로 동네 내과에 가서 양약을 타 먹었지만 효과가 없었습니다. 제대로 먹지 못한 지 한 달이 다 되어 갔어요. 몸은 크게 지쳐 갔습니다. 집 근처에 용하다는 한의원에 찾아갔습니다. 한의원장은 무당처럼 사람을 꿰뚫듯이 보는 집요한 눈빛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제 배를 이곳저곳 눌러 보고, 혓바닥을 들춰 보고, 제 최근 일정과 변화에 대해 캐묻더니 역시나 무당처럼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기병氣病이네. 명상을 적당히 해야지, 너무 했어.” 의사는 내 몸이 정상이라고 했습니다. 위장이 건강하다고 말입니다. 다만 명상을 과하게 해서 기가 복부에서 막힌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약을 줄 테니 먹으면 한 방에 나을 것이라고, 자기도 기병을 그렇게 치료했다고 말했습니다. 별로 믿음이 가는 인상은 아니었으나, 제 믿음과는 무관하게 저는 그 약으로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구토라고 했지만, 사실 짐작 가는 바는 있습니다. 구토를 시작한 그 날. 저는 명상센터의 정화조를 홀로 청소했던 것이어요. 센터에서는 수행자들 밥을 차리고 설거지를 해 드립니다. 혼자 시골 생활을 할 적에 저는 가스 불로 요리하지 않고 장작을 주워 와서 불을 때서 밥을 합니다. 세제를 쓰지도 않고, 물은 극도로 아껴서 설거지합니다. 또 설거지로 더러워진 물은 절대 하수로 흘려보내지 않아요. 아무리 화학 세제가 없는 물이라 한들, 인간들이 사용하는 마을 전체의 오수와 합쳐지면 결국 강을 더럽히기 때문입니다. 설거지나 양치나 샤워를 한 물 모두 양동이에 받아서 텃밭에 돌려줍니다. 어차피 화학성분은 없기에 텃밭에는 유기물이 섞인 좋은 양분이 되니까요. 그럼 텃밭에 새 물을 주지 않아도 되니 물도 아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걸 명상센터에서 실천하기는 불가능했어요. 빠른 속도로 수많은 설거짓감을 해치워야 하니 말입니다. 세제는 필수적으로 사용하라고 규정에도 있었고요. 어느 날부터 설거지하는데 역겨운 냄새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알고 보니 설거지통 아래 정화조에 쌓인 음식물 찌꺼기가 썩어서 나는 냄새였어요. 정화조라는 걸 태어나 처음 봤습니다. 뚜껑이 닫힌 채로도 무시무시한 냄새가 나는 그곳을 열어 보는 순간, 제가 받은 충격이란. 설거지한 물이 하수로 내려가기 전에 음식물을 거르는 곳인데, 수챗구멍도 통과할 정도로 아주 미세하게 분해된 음식물 가루들이 사막의 고운 모래처럼 정화조 아래에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냄새는 그대로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지독했고요. 저는 숨을 참고 그곳을 청소했습니다. 잠시라도 숨을 들이켜면 정신이 아찔해 왔습니다. 정화조의 물을 다 퍼내고 가장 아래 있는 고운 음식물들을 다 긁어냈습니다. 네. 다시 하라고 하면 다음 생에나 가능할 것이라고 하겠지만, 그때는 죄책감이 저를 움직였습니다. 명상센터에 있으면서 모른 척하고 흘려보낸 물 생각에 마음이 늘 무거웠기 때문이에요. 전 이 정도 거리만도 견디기 힘든 악취인데, 이게 어느 물속 생물 그들 집으로 흘러간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못 본 척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 물을 내가 마신다면, 이 물로 내가 샤워한다면, 이 물에서 잠을 잔다면……. 불쾌한 수준이 아니라 죽을 수도 있는 악취였으니까요. 얼굴도 모르는 그 물속 생물들이 뻐끔뻐끔 제게 말을 거는 것 같은 환청 이후엔, 손이 절로 움직였습니다. 수영 선수처럼 그토록 숨을 오래 참은 것도 처음이었답니다. 어느 모로 보아도 욕본 것은 맞지만, 그날 두 시간 남짓한 청소로 한 달을 몸져누운 것은 과하지 않나, 싶습니다. 저는 본래 육신이 건강한 편은 아니어도, 제 평생 그 지경으로 아파 본 적은 없었습니다. 심지어 이때 병은 단순한 위장 문제로 설명되지 않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마사지 치료도, 내과 양약도, 단식 치료도 효과가 없었고, ‘요상한’ 무당 한의사가 준 기병 치료제만 말을 들었으니까요. 믿거나 말거나, 저는 그 고통이 물속 생물들이 내게 선물한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한 말로 표현해 보자면, 그 정화조에 깃든 물속 생물들의 한 같은 것이 제게 붙었다고도 느껴졌어요. 무려 한 달간 금식으로 갚았어야 할 어떤 마음들이었다고요. 투명한 거미줄 제가 언제부터 벽에다 대고도 인사를 하는 사람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기병을 앓은 이후 제 삼의 눈이라도 열린 것은 아니겠으나, 세상을 적어도 눈으로만 보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명상하는 동안에는 아무리 졸려도 눈을 뜨지 않습니다. 눈을 내내 감는 것은 답답한 어둠 속에 저를 가두는 일처럼 느껴졌으나, 반대로 그 아무것도 없는 칠흑 속에서 제 생각과 감정이 쉬지도 않고 팔딱거리는 것을 깨닫게 하는 장치가 되기도 했습니다. 저는 혼자서 과거의 일을 떠올리면서 후회하다가, 미래의 일을 상상하면서 불안하다가, 미워하는 이를 떠올리면서 씩씩대다가, 사랑하는 이를 떠올리면서 애틋합니다. 그러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오직 현재인 내 숨에 집중하면 진정한 쉼이 찾아옵니다. 가능한 모든 물질적 자극을 차단한 어두운 골방에서조차, 저는 자신을 천국으로 데려갈 수도 있고 지옥으로 떨어뜨릴 수도 있었어요. 명상하면서 저는 엄마의 말을 몸으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엔 결국 나 혼자뿐이라는 말. 제가 바라보는 대로 세상은 펼쳐지고, 행복도 고통도 모두 제 속에서 피었다 지는 것이라는 말도. 저는 세상이 놀랍도록 공평하다고 느꼈고, 믿기 어려울 만큼 편안해졌습니다. 삶에서 물질적 조건은 중요치 않았어요. 진짜 행복은 어차피 마음에 달린 것이니 말입니다. 얼마나 더 검소한 조건에서, 얼마나 더 풍요로운 행복을 내면에서 만들어 낼 수 있느냐가 제 삶에서 가장 중요해졌습니다. 느끼한 드라마 대사처럼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라면 우린 모두 독립된 개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러하지 않은 것 같단 말입니다. 저와 물속 생물은 몇 킬로나 떨어져 있었는데, 제 손을 움직여 정화조를 청소한 것은 그들이었으니까요. 눈을 감고 상상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투명한 거미줄로 연결돼 있다고요. 어느 것도 나와 무관한 것이 없고, 내가 아닌 것도 없다고요. 그럼 남보다 돈을 많이 벌 필요도, 더 아름다운 외모를 가질 필요도, 더 안락한 집이나 맛있는 음식을 먹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나’이니 말입니다. 우리 집 쓰레기를 남의 집 앞에 버릴 것도 없습니다. 모두가 ‘내 집’이니까요. 제가 살면서 버린 과자 봉지들이 아직도 태평양에 떠다니고 있겠지만, 태평양도 결국 내 집이라는 걸 알아차린다면요. 눈을 뜨면, 투명한 거미줄 같은 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느낄 수 있습니다. 제 상상이 영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작은 텃밭이나 집 근처의 지리산 둘레길을 걷다 보면 명상하는 존재를 많이 만납니다. 오직 지금 여기에만 존재하는 이들. 고양이나 귀뚜라미나 딸기나 호박이나 바위나 바람이 그렇습니다. 대부분 존재가 제 스승처럼 여겨지면서 자연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상냥하게 인사를 하거나 호명하기도 합니다. 텃밭 생물의 이름표에도 ‘토마토님’, ‘상추님’ 등 존칭을 써 두는 식으로요. 그들을 헤아릴 때도 ‘곱등이 한 마리’나 ‘옥수수 한 개’라는 단위보다는 ‘한 명’으로 셉니다. 다 똑같이 ‘목숨 명命’ 자를 사용하는 것이에요. 다른 사람이 보면 영 쑥스러워서 혼자 있을 때만 합니다. 바람이나 물에도 존대하다 보니, 문득 공기나 어떤 기운도 마찬가지로 존중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어요. 방문을 세게 닫으면 작은 곤충도 놀라지만, 보이지 않는 존재들도 놀랄 것입니다. 핸드폰에도 어떤 정령이 붙어서 쉴 수도 있으니 조심스레 내려놓아야 하고요. 누군가 마구 짜증을 내거나 투덜대면, 옆에 있던 사람도 그 파장이 전달되어 덩달아 불쾌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혼자서도 부정성이 올라올 때 분출하기보다는 정화하려 애씁니다. 제 주위의 존재가 함께 불쾌해지지 않도록 예의를 차리는 것이지요. 이렇게 말하고 나니 제가 득도한 양 공갈하는 기분이라 영 찜찜하긴 합니다. 제가 엄마를 사랑하고 섬긴다고 해서 늘 효녀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는 못하듯, 만물을 섬기긴 하되 부족한 점은 늘 많아요. 특히 혼자가 아닐 때 더욱 그렇습니다. 혼자일 때는 저보다 작거나 말이 없거나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훨씬 잘 느껴지지만, 여러 사람과 함께일 때는 잘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 동물이 너무 커서 그러려나 싶긴 합니다. 한 가지 그럴듯한 이유를 찾았다면, 영성가 에크하르트 톨레의 책에서였습니다. 인간이 꽃과 새를 보면서 유독 진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꽃과 새는 물질이 유약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톨레는 말합니다. “식물에서 나왔지만, 그 식물보다 더 덧없고, 더 여리며, 더 섬세한 꽃은 물질적인 형상의 세계와 형상 없는 세계를 잇는 다리가 된다.” 물질성이 단단하고 강할수록 영적인 힘이 약해지고, 반면 곧 사라지는 것엔 영적인 힘이 부각된다고요. 제가 추리하건대, 어린이들이 그토록 맑은 영혼을 가진 것도, 육신이 병들고 늙을수록 지혜가 생기는 것도 같은 원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명상할 때 숨에 집중하는 것도 숨은 제 육신을 이루는 것 중 가장 희미한 물질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와 부처나 테레사 수녀가 어느 것도 소유하지 않고도 충만한 삶을 살다 간 까닭 역시 물질을 버릴수록 영적인 힘이 강해진다는 걸 알아서였을 테죠. 저에게 역대급 고통을 가져다준 기병도, 육신을 약하게 해서 영적인 어떤 깨달음을 전달하기 위함이었을 겁니다. 결국 전 제 삶과 대화하는 것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저를 이 지구에 초대한 ‘내 삶’에 대해서, 신이 있다면 삶이 바로 그것이라고 여기면서. 어떤 우연도 우연이 아니라고 믿게 되었고, 삶이 제게 보여 주는 어떤 만남과 사건이든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해 배움을 찾았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아빠의 딸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면 상대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가 굳이 말하지 않는 마음도 들으려 하고, 보이지 않는 상처도 끌어안으려 합니다. 그 마음을 지구 전체로 확장한다면, 세상에 보이거나 들리지 않아도 느끼는 것들이 있다고 믿어 본다면, 삶은 하나의 신비가 됩니다. 삶에는 매 순간 상상하지 못할 다채로운 방식으로 말을 걸어 오는 신비로움이 분명히 있다고요. 아빠는 ‘나이 들면 딸은 어차피 엄마 편’이라며 볼멘소리를 하시곤 했지만, 저는 ‘딸’이어서 엄마 같은 성질을 지니게 된 게 아닙니다. 전 아주 어릴 적부터 안방의 서재에서 박정희 평전이 아니라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를 꺼내 들던 아이였어요. 저 스스로 인지하기도 전부터 제 삶은 저를 한 방향으로 이끌어 왔습니다. 제가 상극인 엄마와 아빠를 만난 것도, ‘없어 보이지 않는 딸’이었다가 ‘남자인 척하는 여자’가 된 것도, 삶이 저를 이끈 완벽한 커리큘럼이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여기서 저를 향한 아빠의 오해를 풀자면, 저는 남자 행세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남자 행세’는 덜 귀찮고 돈도 아껴서 좋긴 했지만요. 제 삶이 가르쳐 준 게 ‘남자 행세는 편리하다!’ 정도라고 여기면 삶이 조금 언짢아하실 것도 같습니다. 삶은 제게 신인데요? 신이면 더 본질적인 가르침을 주셨을 겁니다. 저는 자신을 정교한 칼로 다듬으면서, 오로지 군더더기 없는 ‘나’만 남기고 싶었습니다. 어색한 까까머리의 거울 속 나를 보면서 신에게 물었어요. “나 누구예요?”라고요. 삶은 제가 매일 얼굴에 덧바르다 하수로 흘려보낸 화장품이나 그것들로 색칠된 제 얼굴이 ‘나’가 아니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제 지갑 속 형편도, 제 능력을 향한 평판이나 학교에서의 성적표, 그 어느 것도 ‘나’가 아니라고 알려 주었어요. 그리고 동시에 화장품 안전 검증 실험에 동원된 토끼나, 화장품 때문에 오염된 물에서 살게 된 물속 생물은 결국 ‘나’라고 알려 주었고, 저를 비웃거나 평가했고 그래서 제가 증오하던 사람들 역시 ‘나’라고 했습니다. 물 한 양동이로 아끼고 아껴서 샤워하다 보면, 오줌 한 번 싸고 13리터의 물을 낭비하는 사람들에 경악하게 됩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저도 수세식 변기 레버를 아무 망설임 없이 눌렀음을 깜빡 잊어버리고요. 저는 백화점의 호화로움이, 어떤 존재의 핏자국을 지우고 화려하게 치장된 금이나 가죽 따위가 미울 때가 많습니다. 그걸 다달이 열심히 소비하는 아빠 같은 사람들마저 밉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눈을 감아야 합니다. 투명한 거미줄이 보이도록요. 어둠 속에서 곰곰이 고민합니다. 삶이 제게 다른 누구도 아닌 백화점광 호모포비아 아빠를 선물한 이유를. 그런 아빠에게 저의 모든 연약하던 시절을 맡겨 저를 숨 쉬게 하고, 제가 지구에 온 순간부터 아빠에게 빚을 지게 한 얄궂은 진실을. 다시 천천히 눈을 뜨고 나면, 제가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살인 협박 속의 두려움이나, 고약한 정화조 속에 담긴 한이나, 핸드폰에 매달린 정령의 쉼 같은, 가장 여린 마음을 느낄 수 있기를 말입니다. 삶은 제가 아빠를 비롯해 세상의 모든 백화점광을 사랑하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과 다르지 않은 저 자신을 스스로 사랑하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빠가 올해는 용돈을 ‘턱’ 보내셨습니다. 백화점에서 옷 한 벌 사 입히지 못하는 딸을 두고 몇 년을 헤매시더니 결국 돈이라도 주고 싶으셨나 봅니다. ‘네가 필요한 게 뭔지 당최 모르겠으니 알아서 사라’며 무뚝뚝하게 건네시더군요. 자식 노릇보다는 중노릇에 더 재능 있는 딸이 뭐가 그리 예쁘다고 이러시는지 눈물이 핑 돌았답니다. 평소보다 한 자릿수가 늘어난 통장 잔고를 보며, 제가 돈으로 하는 일이라고는 환경 운동밖에 없다는 걸 떠올립니다. 아빠가 본의 아니게 ‘홍석천 같은 놈’에게 용돈도 주시고, 환경 운동 후원도 하게 된 아이러니를 떠올립니다. 딸을 그토록 사랑하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도 떠올려 보고요. 아무리 미워도 아빠는 역시 저보다 사랑에 대해 많이 아시니까요. 아빠만큼만 제가 사랑을 배우게 되기를 바랍니다.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인디언들은 바구니를 만들려고 삼나무껍질을 벗길 때면, 나무를 향해 노래를 바치고 허락을 구했답니다. ‘너에게는 쓸모없는 것이 하나도 없다. 나를 부디 가엽게 여기고 너의 옷을 달라’고 말입니다. 저도 이렇게 제 글을 책에 보태게 됐는데요. 제 말이 글이 되도록 해 준 존재들에게 가장 먼저 편지가 가닿으면 좋겠습니다. 지리산은 겨울만 되면 산등성이 한 편이 훤해지도록 나무가 베어집니다. 비울 때를 놓친 휴지통이 넘치듯, 몸통만 남은 나무들이 마구잡이로 쌓이고 구릅니다. 이 종이는 어느 나무에서 왔을까 헤아려 보면서, 그 나무를 먹여 살린 물과 바람과 새들마저 그려 봅니다. 당신들이라면 제 몸을 깎아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을까 고민하면서 편지글을 채웁니다. ‘나’도 결국 당신들이니까 제가 그런 고민을 감히 대신해도 되겠지요. 해가 떠오르는 동쪽을 향해 한 번, 물줄기가 흘러가는 남쪽을 향해 한 번, 집 뒤편에 서 계시는 지리산을 향해 한 번. 절과 합장. 입맞춤을 담아 칩코 드림. ◌ 칩코 ◌ 8살. 죽는 상상을 처음 했다. 죽는 상상도 못 하도록 영영 사라지는 것이 죽음일까 봐 엉엉 울었다. 무척이나 살고 싶던 사람이었다. ‘나의 목숨’을 ‘나’라고 여겼다. 14살. 학교 성적이 좋았다. 동시에 외모에 관심이 많았다. ‘예쁜데 공부도 잘하는’ 타이틀을 놓치고 싶지 않던 사람이었다. ‘나의 성적과 외모’를 ‘나’라고 여겼다. 19살. 학교 성적이 떨어졌다. 하루 14시간을 학교에서 보내는 것을 지옥이라고 생각했다. 도서관에서 책만 읽으며 다독상 문화상품권이나 챙기는 것을 좋아했다. ‘나의 지식’을 ‘나’라고 여겼다. 20살. 국문과에 갔는데 천국이었다. 책만 읽었는데 성적이 좋을 수 있는 게 국문과였다. 정말 공부가 재밌어서 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외모를 향한 관심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예쁜데 공부도 잘하는’ 타이틀에 다시 욕심을 냈다. ‘나의 지식과 외모’를 ‘나’라고 여겼다. 22살. 책을 열심히 읽다가 환경운동에 열정을 갖게 됐다. 외모에 쏟던 노력을 과감하게 철수하고 머리를 싹둑 잘랐다. ‘환경운동’을 ‘나’라고 여겼다. 25살. 살다 보니 빡빡머리의 타투가 많은 강경 환경운동가가 돼 있었다. 동물과 식물과 곤충은 사랑했는데 낭비가 심하고 돈 욕심 많은 인간은 도저히 사랑하지 못했다. ‘쟤보단 나은 인간’이 ‘나’라고 여겼다. 26살. ‘쟤’들이 늘어나면서 마음이 힘들어졌다. 명상을 시작했고 지리산으로 향했다. 지리산에 생전 받아보지 못한 사랑과 겸손을 배웠다. ‘쟤를 사랑하고 싶은 인간’이 ‘나’라고 여겼다. 29살. 아침에 토마토를 먹고 토마토와 하나가 된 사람. 내가 내뱉은 숨을 지리산이 들이키는 바람에 지리산과도 하나가 됐다. 하나라고 저절로 조화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요가할 때 팔다리가 따로 노는 것처럼 아직은 지리산과 따로 놀 때도 많다. ‘쟤’가 결국 ‘나’라고 여긴다. <<벗자편지>> _자급하는 삶을 어렵게 하는 허울을 벗어던지자 • 지은이 : 김혜련, 칩코, 똥폼, 문홍현경, 풀, 상이, 아랑, 김정희 • 펴낸 곳 : 니은기역 • 펴낸 날 : 2022년 11월 22일 • 판형 120*188 / 쪽수 256쪽 • ISBN 979-11-968328-4-1 (03330)
    • 문화예술
    • 책마을
    2025-10-22
  • 사포마을의 가을
    「섬진강 편지」 - 사포마을의 가을 베트남에 사파 다랭이논길이 있다면 구례, 지리산자락에는 사포 다랭이논길이 있다 봄여름가을겨울 여느 때 보아도 어머니의 부드러운 손길 같은 다랭이논두렁길, 이 아름다운 사포마을을 짓누르고 있던 큰 걱정거리가 사라져서 축하 인사를 보낸다. 사포마을 뒷숲에 골프장을 만들겠다던 지리산골프장 사업이 사실상 무산되었다. 10월 19일 mbc 보도에 따르면 구례군은 사업자의 의지가 없어 보인다며 사실상 사업 무산을 인정했다. 지난 2023년 구례군이 골프장 예정부지에 대한 벌목 허가를 내주고 '지리산 골프장 환영' 관제 현수막으로 온 군내를 도배하고 군민들을 현혹하던 기억이 잊히지 않는다. 그 현수막 제작비만도 엄청난 금액일 것이다 이제 문제는 축구장 30개 정도의 규모로 파헤쳐져 방치된 숲의 복원이다. 숲 복원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주민들이 감당해야 한다. 복원 과정도 눈을 부릅뜨고 지켜봐야 할 일이다. 지난 2년 동안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군청 앞에서 지리산골프장 반대 시위를 이어온 지리산사람들과 사포마을 주민들에게 감사 인사를 드린다. -섬진강 편지 / 김인호
    • 문화예술
    • 섬진강 편지
    2025-10-21
  • 77년 만에 쓰는 편지
    「섬진강 편지」 - 77년 만에 쓰는 편지 어머니, 77년 전 그날의 바람, 그날의 흙냄새가 아직도 선합니다. 영문도 모른 채 군인들에게 끌려 트럭에 실려 가던 어머니의 뒷모습을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바라만 봐야 했던 제가 어찌 잊겠습니까? 며칠 뒤 들려온 소문은 너무도 잔인했습니다. 양정리 갱변 다리 밑에서 총살을 당했다는 말을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신들 사이에서 어머니가 그날 입고 가셨던 누비저고리를 찾았을 때 저의 식구들 가슴은 갈기갈기 찢어졌습니다. 그 옷에 남은 온기를 품어 안고 벌벌 떨리는 손으로 모래밭을 파던 그 밤에 저는 갑자기 철이 들었습니다. 저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어머니의 따스한 손길과 목소리, 평범하게 불러볼 ’엄마‘라는 이름이 사라진 그날 이후, 우리 아홉남매는 세상과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자랐고 아버지는 한마디 말도 없이 굳은 어깨로만 우셨으니까요. 그렇게 제 어린 시절은 상실과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어머니, 그럼에도 저는 살아남아 이렇게 여기 서 있습니다. 당신이 못다 본 세월을 제가 대신 살아내고 있습니다. 이 아픔을 기억하는 일만이 당신께 드릴 수 있는 마지막 효도라 믿으면서 살아내고 있습니다. 77년 동안 삼키고 또 삼킨 슬픔 끝에 이제야 당신의 억울함을 말할 용기를 냅니다. 어머니, 당신은 아무 죄도 없는 그저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라구요 함께 한 날보다 그리워 한 날이 더 많은 어머니, 정말 보고 싶습니다. 단 하루만이라도 다시 함께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서로 닮은 얼굴을 바라보면서 웃으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어머니, 그립고 사랑합니다. ---------------------------------------------------------------- 오늘 구례 지리산역사문화관에서 열린 ‘제 77주기 여순 10.19사건 합동 추모식'에는 김민석 국무총리, 정청래민주당 대표 등 정부인사와 정치인들이 대거 참석하였고 도올 김용옥선생의 평화의 메세지 선언도 있었다. 그러나 참석자들을 울린 것은 구례유족회의 이선복님과 AI로 복원된 어머니 故김애남씨 모자 간에 주고받은 77년 만의 편지였다. 8살 때 어머니가 끌려가 총살 당했는데 77년이 지나 이제 9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버린 이선복님이 단 하루만이라도 다시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께 올린 편지를 옮겨봅니다. -섬진강 / 김인호
    • 문화예술
    • 섬진강 편지
    2025-10-21
  • 구례 들꽃사진반 네 번째 전시회
    -모데미풀 -설앵초 -동자꽃 「섬진강 편지」 - 구례들꽃사진반 네 번째 전시회 올해 지리산은 참으로 힘겨웠습니다. 3월의 산불, 4월의 폭설, 이어진 기록적인 폭우와 폭염 속에서 꽃들은 제때 피지 못하거나, 피었다가도 금세 져버렸습니다. 우리는 꽃 앞에 무릎 꿇을 때마다 자연의 신음소리를 듣습니다. 스무 번 넘게 오른 노고단 숲길에서, 세석고원, 연하천, 벽소령, 섬진강 길에서 자연이 보내는 신호를 마주했습니다. 기후변화는 더 이상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작은 꽃 한 송이에도, 두서없는 계절의 변화에도 우리가 감당해야 할 책임이 담겨 있습니다. 이번 전시는 지리산과 섬진강의 들꽃을 기록한 구례들꽃사진반의 네 번째 이야기입니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 소중함을 지키려는 우리의 마음이 여러분의 마음에도 가닿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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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1
  • [그들이 지리산으로 찾아든 까닭]3 빨치산이 생겨난 배경은 무엇일까요?-1
    지리산뱀사골탐방안내소 자료집 『그들이 지리산으로 찾아든 까닭』 _빨치산과 토벌부대, 그리고 사람들 2008년 5월 10일 지리산국립공원북부사무소 발행 <지리산인>은 과거 지리산에 깃들었던 빨치산과 이들을 둘러싼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는 기회로 『그들이 지리산으로 찾아든 까닭』의 전문을 총 10회에 걸쳐 싣고자 합니다. 이번 시간은 <➌ 빨치산이 생겨난 배경은 무엇일까요?-1>을 함께 보겠습니다. 연재 순서 ➊ [연재를 시작하며] 지리산 소개 + 책을 내며 ➋ 빨치산이란 무엇일까요? +지도로 보는 빨치산과 토벌부대 루트 ➌ 빨치산이 생겨난 배경은 무엇일까요?-1 ➍ 빨치산이 생겨난 배경은 무엇일까요?-2 ➎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 ➏ 토벌부대는 어떤 활동을 했을까요? ➐ 숙명의 대결, 토벌군 사령관 백선엽 ➑ 뱀사골에서 있었던 일-1 ➒ 뱀사골에서 있었던 일-2 ❿ 뱀사골탐방안내소, 전시관을 열다 알립니다. 책 <그들이 지리산으로 찾아든 까닭> 글 가운데 '반란군'이라는 표현처럼,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거나 표현이 적절하지 않은 부분이 더러 있습니다. <지리산인>의 역사 인식과 다른 점이 있음에도, 빨치산에 대한 역사적 자료가 부족한 현실에서 독자들께 빨치산 역사에 더 다가갈 기회를 드리고자 역사적 자료로서 이 책을 인용하여 싣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좀 더 나은 자료를 찾아 보여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빨치산이 생겨난 배경은 무엇일까요?-1 사진1. 생포된 빨치산들 당시 사회 분위기 조선의 왕권이 몰락하고 일제의 탄압이 시작되자, 나라의 주권을 잃고 혼란에 빠졌던 사람들은 새로운 살길을 찾아야 한다는 불안함과 절박함을 느꼈다. 저마다 살아갈 길을 찾아 헤매었는데, 일제에 협력하거나 대항하는 두 부류로 크게 나뉘어 있었다. 그중 일제에 대항하고 조선의 독립을 꿈꾸는 세력이었던 독립운동가와 우국지사들은 독립을 이룬 뒤 나라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이때 많은 사상적인 대안이 나왔는데, 그 사상무장을 통해 조국의 광복을 이루고, 나라를 이끌어 갈 중심사상이라 주장했다. 조선의 왕국을 다시 수립하자는 왕정파, 민족주의 계열의 상해 임시정부파와 공산사회를 이룩하고자하는 혁명파들이 독립운동의 선봉에 서 있었다. 특히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독립한 뒤 모든 인민이 공동분배하여 누구나 잘사는 사회를 이룩하려는 공산주의 사상에 대해서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나라 밖에서도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 중국의 공산당 활동이 성공하여 선진사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지식인들은 공산주의를 공부하기 위해 러시아와 중국으로 유학을 가고, 조선에서도 지역별 세포조직을 통해 공산사상이 확산되었다. 그리하여 1925년 공산주의자들은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조선공산당’을 결성했다. 1945년 해방 후에는 조선공산당 재건 활동이 본격화되었고, 북한에 북조선분국을 두게 되었다. 한편, 한반도는 일제패망과 함께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에 따라 남과 북이 갈라지고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미국이 통치하는 남조선과 소련의 지배를 받는 북조선에는 서로 다른 이념을 가진 정권이 탄생하게 되고, 한반도는 사상의 대립과 갈등의 회오리바람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빨치산의 불씨, 전평사건 1945년 8월 15일 아무런 준비 없이 해방을 맞은 한반도는 정치·사상적 갈등과 어려움으로 여전히 혼란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서 있었다. 박헌영이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를 세우면서 좌우익의 대결도 점점 드러나기 시작했다. 마침내 1946년 9월 23일 서울, 대구, 부산을 비롯한 철도노조가 전국적인 총파업을 시작하고 10월에는 대구시에서 전평(全評, 조선노동자조합전국평의회)이 주도하여 총파업이 일어났다. 전국노동자평의회가 중심이 된 이 사건을 계기로 삽시간에 서울을 비롯한 남한 전체에 미군정에 반대하는 시위가 퍼져 나갔다. 미군과 경찰이 주동자들을 체포하고 수배하자, 이들은 태백산과 소백산으로 숨어들어 우리나라 빨치산의 시작인 ‘야산대(野山隊)’를 만들었다. 뒤에 이들을 ‘구빨치산’이라 불렀다. 수는 많지 않았지만 친인척 같은 연고자를 통해 식량을 구하고 은신하는 정도의 매우 초보적이고, 비조직적인 모습이었다. 이들은 경찰의 눈을 피해 밤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집에 다녀오기도 하고, 선거 때는 유세장에서 야유도 하고 다니는, 약간은 낭만적인 투쟁을 벌였다. 여수·순천 10.19사건 한편, 1947년 제주도에서는 3.1절 기념행사를 계기로 좌익과 우익의 갈등이 폭발하고 말았다. 경찰·우익청년단과 주민들이 조직한 자위대가 충돌하면서 보복과 잔인한 살인이 되풀이되었다. 어지러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1948년 제주도에서 4.3사건이 일어나자 야산대의 활동은 무력적이고 격렬한 게릴라 투쟁으로 바뀌게 되었다. 제주4.3사건은 육지에 있는 군인과 경찰을 파병해야 할 만큼 심각했으며, 파병에 반대하는 움직임도 일어났다. 바로 제14연대였다. 여수에서 제주도의 저항세력을 토벌하라는 출동명령을 받은 국군 제14연대는 명령을 따르지 않고 반란을 일으켰다. 사진2. 여순 사건 당시 체포된 사람들 당시 한국 국방경비대(국군의 전신)는 좌익세력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경비대를 모집할 때 신원조회가 없어 좌익성향의 사람도 경비대에 들어갈 수 있었고, 사병이 되면 경찰이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따라서 사병들은 경찰에 대한 반감이 높았고 좌익계열의 피신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군부대 내에서도 공산주의 조직이 비밀리에 형성되었다. 14연대에도 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동기와 명분만 있으면 반란의 불씨는 언제든 지필 수 있었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 14연대의 1개 대대가 제주도 토벌작전을 벌이기 위해 여수항에서 출발준비를 하는데, 선임하사관이던 지창수 상사가 ‘제주도 출동거부, 경찰타도, 인민해방군으로 행동할 것’을 앞세우며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이 일어난 지 하루 만에 반란부대는 여수 시내를 장악하고, 바로 순천으로 북상하여 20일 순천을 장악했다. 이후 광양, 벌교, 구례, 곡성까지 점령했는데, 이 부대를 이끌던 총 지휘관은 당시 중대장인 중위 김지회와 경비사관학교(육사의 전신) 3기 동기생인 홍순석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여수, 순천, 구례, 보성, 광양은 인민공화국의 세상이 되었고, 지배자가 바뀔 때마다 좌·우익 상호보복이 일어나 피가 피를 부르는 살육이 되풀이되었다. 다음 시간에 "➍ 빨치산이 생겨난 배경은 무엇일까요?-2"이 이어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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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0
  • 상실의 아픔을 겪는 사람에게 위로를 "두텁나루숲 뒷산에 앉아" 박두규 신작시집
    시집을 선물 받았다. 시집을 받으면 거의 받은 날 다 읽는 편이다. 시집이 좋은 이유는 글이 짧기 때문이다. 읽기 쉽다. 국어 시간의 시는 읽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은유와 직유를 알아야 하고 시어의 뜻을 파악하고 작가의 의도도 파헤쳐야 한다. 내가 학교 다닐 때 서울대 갔던 친구보다 유일하게 잘했던 과목은 국어였는데 내가 그 친구가 영어 수학 공부 할 때 다른 책을 많이 읽어서였다. 선물 받은 책은 박두규 시인의 시집 "두텁나루숲 뒷산에 앉아"였다. 박두규 시인은 국어 선생님이었다. 시집을 받고 인연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지리산인이라는 신문을 만들면서였던 것도 같고 전교조 활동을 하면서 만난 것도 같다. 그러니까 17~18년 된 것 같다. 그중에 시집도 두 번은 받은 것 같다. 처음 받은 시에는 숲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는데 이번에 죽음에 관한 시가 많다. 시인의 아내가 투병 생활을 한 지 꽤 오래되었기 때문이고 주변의 친구나 지인들도 하나둘 세상을 떠나는 분들이 많은 나이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생명을 가진 것은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이다. "나의 꿈은 무엇인가. 어머니의 눈물 닦아드리는 것이지.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지." (시 "나의 꿈") 어머니 품으로 이제 돌아가는 날은 학교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도 아니고 제대하고 어머니에게 돌아가는 기쁜 날도 아니다. 이제 어머니를 만나는 날은 저승뿐이다. 하지만 죽음은 인생의 마감일이 아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떠나는 것을, 잃어버리는 것을. 나만의 사랑, 나만의 세상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강이 끝나지 않으면 바다에 이를 수 없고 소멸이 아니면 되살아날 수 없으니. 내가 모든 것을 잃었을 때... 비로소 하나 되어 그 무엇이 될 것이다. (시 "두려워하지 마라" 중에서) 죽음은 피할 수 없다. 역사 이후 많은 사람들이 불멸을 갈구했지만, 그 누구도 피할 수 없었다. 진시황은 불로초를 찾아 헤매고, 거대한 지하 무덤을 만들었다. 이집트의 파라오는 돌아올 영혼을 위해 완벽한 미라를 만들어 하늘을 향한 높은 피라미드를 만들었다. 인간은 우주의 먼지가 만든 지구에서 태어나 결국은 우주의 먼지가 된다. 소멸은 소멸이 아니다. 우주의 입장에서 인간의 죽음은 불멸인 것이다. 우주가 아직 사라지려면 억 겁의 시간이 남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찾아오는 상실감은 피할 수 없다. 오래전 23살 조카가 백혈병으로 생일 하루를 앞두고 떠났다. 한 달 전만 해도 건강했던 아이가 진단 2주 만에 급작스럽게 떠나버린 것이었다. 함께 지리산 둘레길을 걷기도 했던 조카였다. 상실감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가을 하늘도 잿빛으로 보였다. 우울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죽음에 관한 책들을 읽었 다. 작은 위로을 받을 수 있었다. 이 시집도 상실의 아픔을 겪고 있는 분들에게 위로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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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15
  • 백일선물
    「섬진강 편지」 -백일 선물 아가 백일선물로 무엇이 좋을까 궁리하다 새벽 3시에 일어나 노고단에 갔다. 오롯이 생각하고 집중하기 위해 혼자서 새벽길을 나섰다. 지금까지 100번은 넘게 오른 노고단길이지만 그 어느 날보다 발걸음이 가볍다. 아가 백일선물을 마련하러 가는 새벽 노고단길! 노고단 정상에서 맞이한 천왕봉 너머 솟아 오른 동쪽 해는 붉었고 지리산 주능선의 산그리메는 고왔다. 서쪽 섬진강은 운해가 가득하여 구름바다가 되었다. 꽃향유 구절초 투구꽃은 이슬에 반짝여 꽃빛이 더욱 선연하다. 아가가 지리산빛처럼 푸르고 섬진강물빛처럼 맑게 자라기를 기원하는 마음까지 담아온 아침풍경이다. -섬진강 / 김인호
    • 문화예술
    • 섬진강 편지
    2025-10-02
  • 연재소설 "상실된 조국 2편" "고향이 남원이었지"
    남원은 남쪽이라 서울보다는 좀 따뜻했다. 얼마쯤 걷고 나니 광한루가 보였다. 춘향전 알지? 하나야 하나도 할머니가 이야기해 주던 춘향전이 생각났다. 여기가 그곳이군요. 맞아… 여기가 춘향이와 이도령이 놀던 광한루야… 강준과 하나는 책으로만 봤던 광한루를 쳐다봤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광한루의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가자… 늦었어. 여관에 도착했을 때 둘은 이미 지쳐 있었기에 쉽게 잠들었다. 강준에 일어난 시간은 새벽이었다. 하나를 깨우지 않게 조심스럽게 여관을 나왔다. 요천강을 따라 강준은 걸었다. 이 강물이 어디서 흘러 오는 것일까? 강준은 지나가는 남자에게 물었을 때 그 남자는 짧게 이야기했다. “지리산에서 흘러나와요. “ 남자는 손으로 먼 산을 가리켰다. 큰 산이 남원의 동쪽에서 시작해서 남쪽으로 가다가 다시 서쪽까지 길게 펼쳐져 있었다. “저 산이구나….” 아버지는 가끔 지리산에 관해 이야기했었다. 할아버지 고향에 있는 산이 지리산이라고 그 산은 아버지 어머니 같은 산이라고 아버지는 말했다. “이 물도 지리산에서 흘러오는구나!” 강준은 강으로 내려갔다. 흘러가는 물을 손으로 쥐었다. 4월의 강물은 아직 얼음처럼 차가웠다. 강준은 여관으로 돌아갔다. 하나는 잠에서 깨어 있었다. “어디 갔다 왔어요" “불안했어요" “어… 앞에 강가에 가봤어" “산책하러" “그랬군요" 남원 시내버스 터미널에 도착해 인월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이른 아침 버스 터미널에는 등산객들과 학생들 그리고 출근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한국말속에서 강준은 자신이 한국에 있음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래 여기가 조국이구나! 하나는 자신이 익숙하지 않은 땅에 있음을 확인했다. 조국이라고 생각했지만, 전혀 모르는 말을 사용하는 땅 여기가 조국이 맞는 것일까? 하나는 익숙하지 않은 말들 속에서 자신이 이방인처럼 느껴졌다. 그들은 강준의 할아버지 고향 인월로 향했다. 강준과 하나를 태운 버스는 남원의 평야를 지나 가파른 산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여원재]라는 팻말이 보였다. 높은 산길 사이로 난 가파르고 구불구불한 도로를 버스는 빠른 속도로 올라갔다. 버스는 좌우로 흔들렸다. 하나는 강준의 손을 꼭 잡았다. “무서워?” “조금요" 그렇게 30분쯤 갔을까 고개 하나를 넘고 나니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었다. 전혀 다른 세상처럼 느껴졌다. 이 산꼭대기에 이렇게 넓은 평야가 있다는 것이 강준은 신기했다. 버스는 인월터미널에 둘을 내려주었다. “아저씨 산내요?” “네 타세요" 택시 기사는 간단하게 답했다. 택시를 타자마자 기사는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 저 산이 한국에서 가장 큰 산인 지리산입니다" “한국인에게는 어머니 같은 산이라고도 하지요" 택시 기사는 묻지도 않았는데 지리산에 대해 이것저것 신나게 떠들었다. 인월에서 택시로 20분 달리니 강준 할아버지의 고향이 나왔다. 강준은 동네 분들에게 할아버지에 관해 물었지만 아무도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다. 할아버지가 이 동네를 떠난 지 50년이 지났으니 할아버지를 기억하는 분들도 모두 돌아가셨겠다고 강준은 생각했다. “하나는 고향에 가보고 싶지 않아?” “별로요” 아버지 고향이 제주도라고 하던데요? “제주는 멀어서 나중에 여행이라도 한 번 가면 될 것 같아요. 강준과 하나는 남원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호텔에는 밤에 도착했다. 서울의 밤은 싸늘했다. 도쿄의 뱜을 닮았지만, 전혀 다른 날씨였고 남원과도 달랐다. 아침 방송을 보던 강준은 채널을 돌리다가 멈추었다. 집회 현장이 방송에 보였다. 시위대와 경찰이 몸싸움하고 있었다. 강준은 호기심이 생겼다. “하나! 우리 저기 가보자?” “무서운데요.” “싸우는 곳에 가는 것은 위험해요.” “우리 그냥 서울 경복궁이나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멀리서 구경만 하자.” “일본에서는 저런 현장을 볼 기회가 없잖아.” “무슨 일이라도 생기겠어?” “별일 없을 거야…” 강준의 거듭된 설득에 하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그만 보고 돌아와요? 네? 강준과 하나는 아침밥을 대충 먹고 지하철을 타고 대학교 앞에서 내렸다. 학교에 가보니 어제와는 다르게 아무런 집회도 없었다. 캠퍼스 안에는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게 조용했다, 아무 일도 없는데 집회가 끝났나 봐! 오늘 집회는 안 하나요? 강준은 지나가는 학생에게 물었다. 총학생회의실에 가보세요. 지나는 학생이 학생회실 위치를 알려줬다. 학생회실에 가보니 한 학생이 보였다. 오늘은 집회 안 하나요? 왜요? 저희는 일본에서 왔는데 방송에서 이 학교 앞에서 집회하는 것을 봤거든요. 궁금해서요. 아. 그러세요. 저는 일본어학과 조민의라고 해요. 아 저는 강준 이쪽은 하나라고 해요. 저는 1학년 신입생이라 잘 몰라요. 선배들은 다들 다른 곳에 있나 봐요. 저도 오늘 아는 선배를 만나러 왔는데 없더라고요. 네.. 강준과 하나는 기대와는 다르게 아무 일도 없자, 살짝 실망스러웠다. 캠퍼스 구경이나 하고 돌아가자 학교 안에도 아무도 없는데요. 우리 이제 호텔로 돌아가요 강준과 하나가 광화문을 지날 때 집회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저기 시위하고 있는데, 우리 잠깐 여기서 내려서 보고 가자. 강준 씨 위험해 보여요 우리 그냥 호텔로 가요! 아니야! 멀리서 잠시만 보고 가자 이제 곧 일본에 돌아가잖아 우리 이런 시위는 영원히 방송에서만 볼지 몰라 강준이 버스에서 내리자, 하나는 마지못해 따라 내렸다. 강준과 하나가 내렸을 때 몇 백 명이었던 시위대는 시간이 지나자, 수가 몇만이 넘어 버렸다. 호헌 철폐! 독재 타도! [◆ 호헌철폐뜻 당시의 헌법을 지키는 것(호헌)을 중단하고 헌법을 개정하라는 뜻. 전두환 정권 당시의 대통령 선거는 국민이 직접 투표하는 직접선거가 아닌 대통령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였고, 국민들의 뜻과는 상관없이 군부정권이 계속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반발하여 민주화세력을 비롯한 다수의 국민들은 직접선거제도를 포함한 개헌을 요구했으나 전두환 정부는 1987년 4월 13일에 기존 헌법을 유지하겠다는 ‘호헌’을 선언했다. (4.13 호헌조치) 이 조치를 거두라는 것이 바로 ‘호헌철폐’호헌조치에 맞선 6월 항쟁의 구호였다. ] 시위대의 함성이 광화문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강준과 하나가 서 있던 곳은 처음 시위 시작했을 때는 몇 백 미터 거리였지만 구경하는 사이 강준가 하나는 시위대 중앙에 서 있게 되었다. 강준도 시위대가 외치는 대로 따라 외쳤다, 독재 타도 호헌 철폐 하나는 강준 옆에서 불안하게 쳐다봤다. 강준 씨 이제 돌아가요. 우리 시위대에 너무 깊숙이 있는 것 같아요. 빨리 가요!! 하지만 강준은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강준은 그동안 일본에서 받아왔던 차별 때문일까? 시위대와 함께 구호를 외치는 것만으로도 신이 났다. 하나야 시위대와 함께 구호도 외쳐봐!! 진짜 살아있는 기분이 들어… 호헌 철폐 독채 타도, 사실 강준은 호헌 철폐가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사실 독재 타도 호헌 철폐가 무슨 말인지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차별금지, 차별철폐라고 마음속으로 외쳤다, 많은 사람들과 구호를 외치고 있는 이 순간이 너무 좋았다, 함께 모여 구호를 외치고 하나가 되어 가는 것 이 순간이 좋았다. 강준 씨 이제 우리 빨리 돌아가요. 그 순간 경찰들이 앞쪽에서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을 쏘기 시작했다. 빨리 뛰어요. 강준 씨 빨리 도망쳐요. 전경과 경찰이 시위대를 포위하고 무력 진압을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렸다. 순식간에 집회 장소는 전쟁터처럼 보였다. 시위를 하는 사람들이 흩어지기 시작하자 도로는 마비 상태가 되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머릿속이 캄캄해졌다. 강준은 하나의 손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경찰과 전경이 시위대를 압박했다, 강준과 하나는 가게 사이의 좁은 골목길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헉 헉… 탁 탁 턱 턱…. 탁 탁 탁 탁…. , , , 윽…. 여기저기 도망치는 소리와 싸우는 소리와 비명이 들렸다. 몇 분을 달렸을까, 시위대도 경찰도 보이지 않았다. 강준 씨 다행이에요. 여긴 안전한 것 같아요. 그래요. 여긴 경찰이 안 보여요. 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퍽 퍽…. 강준과 하나가 전경이 휘두른 곤봉을 맞고 쓰러졌다. 악…. 야. 이놈들 차에 태워라… 강준과 하나는 호송차에 끌려갔다. 호송차에는 많은 사람들이 잡혀 있었다. 와타시와 니혼진 데스. 저희는 일본 사람입니다. 저 여자는 일본 사람이에요. 이 자식들이 뭐라고 하는 거야. 야! 봐주지 말고 끌고 가…. 강준과 하나는 경찰서에 끌려갔다. 이놈들 좀 이상한데.... 일본말하는 놈들이 시위대에 왜 있어? 한번 취조 좀 해봐, 일본 사람이라고 외치던데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오 그러네요. 일본 사람이 한국 집회에 참여했다. 뭔가 그림이 그려지는 것 같습니다. 이 팀장님 그렇지…. 이놈들 뭔가 있는 것 같으니까 더 조사해 보라고. 일본인이 한국 집회에 참여했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닌데… 이 팀장은 좋은 건수가 생겼다고 생각했다. 일본의 조선총련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팀장은 오늘 하루 종일 집회 현장에서 누적된 피로가 싹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건 꽤 큰 건이 되겠는데…. 빨리 조사해서 보안사에 넘겨. 강준과 하나는 경찰 취조실로 끌려갔다. “야…. 너희들 여기는 왜 왔어? “ 아 서울 관광 왔어요 “관광…. 근데 집회에는 왜 가담했어…. 버스를 타고 오다 보니 사람들이 많아 구경했어요. 진짜야? 네. 강준은 이제야 숨이 쉬어졌다. 이제 호텔에 가면 되죠? 이 자식 아주 웃기는 놈이군…. 야 인마…. 어떤 미친놈이 시위 구경을 오냐…. 그것도 일본 놈이…. 재일 조선인이라…. 이 팀장님 이것 잘 엮으면 한 건 하겠는데요. 그렇지…. 김 경위 일단 상부에 이야기해 보자. 일단 말이 안 되는 저 여자는 유치장으로 보내고 남자 놈은 상부로 보내…. 강준은 수갑이 채워진 채 경찰서에서 나와 기다리고 있던 검은 승용차에 태워졌다. 시동을 걸자마자 차는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이 팀장님, 이 녀석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야…. 어떻게 되긴 어떻게 돼. 이런 녀석을 콩밥을 좀 먹어야지. 제가 봤을 때는 진짜 지나가다가 참가한 것 같은데요. 야…. 이 순경 너는 그렇게 세상을 순진하게 보면 어떡하니…. 이놈들이 얼마나 악질인데, 이런 자식들은 다 잡아서 유치장에 넣거나 감옥에 처넣어야 해 요즘 세상이 너무 편해졌어 오늘 집회 나온 빨갱이 놈들 좀 봐 경기가 얼마나 좋고 일도 많고 지금 얼마나 좋냐…. 그런데 무슨 불만이 그렇게 많아. 씨발놈들이 다 잡아 쳐 넣어야 해 싹 잡아 가지고 정리해야 하는데, 저런 것들 옛날 같으면 다 삼청교육대에 보내서 인간개조를 해야 하는데 말이야. 우리 대통령님 너무 약해지신 것 아니야…. 계엄령이라도 내려서 저것들 다 처넣어야 하는데 말이야…. 안 그러냐고…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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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재소설
    2025-09-24
  • [벗자편지] 함께읽기 2_김혜련;일상을 고귀하게, 몸을 풍요롭게
    <지리산인>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벗자편지>>를 펴낸 니은기역 출판사입니다. 자급을 어렵게 하는 허울을 벗어던지고 나와 둘레를 돌보며 고귀한 하루를 살려는 농부들의 편지, <<벗자편지>>를 여기 <지리산인>에 한 달에 한 번, 한 꼭지씩 들려드리게 되어 기쁩니다. 나의 시간을, 나의 생산수단을, 나의 재주를 좀 더 아름답게 쓰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책이 용기를 주면 좋겠습니다. 지난 시간 '들어가며'에 이어 이번 시간엔 ❷ 김정희 : 몸을 잃어 허공에서 떠도는 젊은 벗들에게 "일상을 고귀하게, 몸을 풍요롭게" 꼭지를 함께 읽겠습니다. 다음 시간엔 ❸ 칩코 : 말이 글이 되게 해 주는 이들에게 "삶이 신비가 되려면" 이 함께합니다. 고맙습니다. 몸을 잃어 허공에서 떠도는 젊은 벗들에게 "일상을 고귀하게, 몸을 풍요롭게" 김혜련 몸을 찾아 땅으로 저는 나이 오십에야 몸을 찾아 땅으로 내려왔습니다. ‘네가 평생 가장 열심히 한 일이 뭐지?’ 스스로 물으면 저 아래쪽 깊은 곳에서 나오는 대답이 있습니다. ‘음… 나 자신을 탐구했지.’ 평생의 방황과 추구가 자기탐구였음을 이제는 아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제가 그토록 자신을 찾아 헤맸던 이유는 아마도 엄마가 절 부정했기 때문일 거예요. “첫날밤에 들어선 웬수”, “천하에 쓰잘데없는 지지배”라는 말을 듣고, 매 맞으며 자라면서 전 늘 허기와 결핍을 느꼈어요. 그리고 자신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지요. ‘넌 왜 숨을 쉬어야 하니?’ ‘왜 밥을 먹지?’ ‘넌 누구니?’ ‘어떻게 살 거니?’ 이런 물음은 사실 인간다움에 관한 질문이었습니다. ‘인간다움이란 무엇일까?’, ‘어떻게 사는 게 인간다운 일일까?’ 일찍이 문학에 탐닉했고, 심리학과 철학에 관심을 두고, 여성학을 공부하고, 교사직을 접고 입산해서 수행까지 한 모든 행위가 그런 탐구의 여정이었어요. 그런데 그런 탐구를 통해 ‘나의 허기는 해결되었나?’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나?’ 아니었어요. 내 갈증과 허기는 여전했어요. 결국 그 모든 과정이 관념에서 관념, 허공에서 허공을 떠도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절망적!’으로 깨달았어요. 그러면서 평생 아무것도 아니라고 무시했던 가장 뿌리가 되는 것들로 내려왔어요. 그건 바로 몸과 자연이었어요. 몸을 유지하고 기르는 일상, 그 가운데서도 핵심은 밥과 집이었고요. 내 허기가 심리나 관념적인 것만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이었음을 깨닫게 된 거죠. 평생 집에서 살았지만 집이 없었고, 평생 밥을 먹었지만 밥이 없었어요. 몸을 가지고 살지만 몸이 없는, 아주 이상한 삶을 보게 된 거예요. 지금 우리가 맞고 있는 위기 상황, 지구의 존립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은 저처럼 살아온 많은 사람이 만들어 낸 일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근원인 몸(생명)을 없는 것처럼 여기고, 도구나 수단으로 쓰고, 심지어는 학대하고 착취하는 문명은 회생 가망이 없는 문명이라는 깨달음 같은 것이 이 글을 쓰게 합니다. 나는 고양이만큼도 모른다 얼마 전 <<고귀한 일상>>이라는 책을 썼어요. 이 책 제목에 대한 말들이 많았어요. “고귀한 일상이라니, 참 낯설다. 난 한 번도 내 일상을 고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매우 역설적으로 들린다.” “정말 멋진 제목이다.” 등등. ‘고귀한 일상’이란 ‘일상이 고귀하다.’라는 말인데, 이 말은 사실 낯섭니다. 한 번도 일상을 고귀하다고 해 본 적이 인류 역사에는 없으니까요. 고대로부터 일상을 가능하게 한 일들은 노예에게 전담시키다가 노예가 사라지자 여자들에게 시켰습니다. 늘 일상은 하찮은 그 무엇이었어요. 그런데 일상이 고귀하다니? 황당하게 들리지요. 사실 문명이 워낙 강한 세상에서 일상을 이야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야기하기도 전에 무력해지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일상이 뭔가요? 사전에는 ‘매일 반복되는 보통의 일’이라고 정의하네요. 아침에 일어나고, 숨을 쉬고, 해를 만나고, 밥을 먹고, 설거지하고, 오후에 빛이 바뀌고, 바람을 느끼고, 비를 맞고, 친구를 만나서 웃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돌리고, 이불을 펴고, 잠을 자고, 계절이 달라지는 것을 느끼고… 이루 다 표현하기 힘든 그 모든 게 일상인데, 그 가운데 절대 빠질 수 없는 게 있지요. 일상의 핵심은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가 자기 생명을 유지하고 키워 나가는 행위들’입니다. 인간만 일상이 있는 게 아니죠. 모든 생명은 일상이 있습니다. 고양이, 두더지, 개구리, 풀 한 포기… 다 자기 일상이 있어요. 일상은 생명을 유지하고 기르는 가장 근원적인 것이고, 날마다 반복하는 것이고,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것이에요. 그러니 일상이 고귀하다고 하는 건 곧 생명이 고귀하다고 하는 것과 같은 말이에요. ‘생명이 고귀하다’는 전제가 있어야 그 생명을 유지하고 키우는 일상은 고귀한 게 되니까요. 그런데, 인류 문명은 일상을 하찮게 여기고 그 위에서 뭔가 특별한 것을 하는 걸 고귀하다고 여기는 쪽으로 발전해 왔어요. 어떤 사람(생명)이, 어느 한 곳에 집중해서―그게 이념이든 예술이든―꽃을 하나 피웠다 하면 그걸 고귀함이라고 보았죠. 생명은 복잡한 수많은 느낌과 감정, 희로애락이 복합된 감수성의 덩어리인데, 그 꽃은 특정한 감수성만 발전시키고 나머지는 다 배제하고 피운 거예요. 소위 말하는 성공한 사람들이 공통으로 느낀다는 게 허망함, 피폐함이라고 하지요. 그 까닭은 생명을 다 써 버리는 성공이어서 그럴 것입니다. 생명을 키우고 향유하는 방식으로 이룬 성공이 아닌 거지요. 인류 문명은 생명 자체를 억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왔어요. 특히 서구 근대 문명은 생명을 ‘생각하는 자’로서 주목했어요. 생명을 사유로 특화했죠. 모든 것을 수량화하는 기하학적 사유로.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인간에게서 사유를 뺀 나머지 생명의 영역에 대한 관심이 없다는 선언이지요. <<식물의 사유>>에서 페미니스트인 이리가레Luce Irigaray는 이 대전제에 대해 반론을 제기합니다. “나는 살고 싶었고 생명을 키우고 싶었습니다. 생명의 대체물로서 사유는 나에게 맞지 않았습니다.”하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생명이라는 말 자체가 낯선 세상에 살고 있어요. “내 몸이 생명이다.” 이런 말이 낯설어요. 내 생명, 내 몸에 대한 관심이 없어요. 내 생명이 뭘 원하는지, 무엇을 기뻐하고 거부하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고양이만큼도 모르고, 풀 한 포기만큼도 모를 거예요. 우리 집 뜰에는 고양이 두 마리가 살고 있어요. ‘나비’와 ‘웅’이에요. 걔들을 보면 어찌나 자기 생명을 잘 알고 향유하는지요. 폭신한 담요, 따뜻한 햇볕, 서늘한 그늘, 높은 곳을 매우 좋아합니다. 그리고 기가 막히게 그런 곳을 잘 찾아내 즐깁니다. 물을 싫어해서 물이 있는 곳은 어찌 그리 잘 피해 가는지요, 그 젤리같이 부드러운 발바닥을 들어 톡톡 차면서요. 저는 고양이를 보면 부러워요. 자기 생명을 맘껏 누리는 그 고요하고도 신비한 몸짓에 매료되지요. 식물이 자라는 것을 봐도 그래요. 같은 식물이 봄과 가을에 달리 자라요. 봄 쑥갓은 위로 자라지만 가을 쑥갓은 옆으로 자라요. 사라져 가는 햇빛을 조금이라도 더 받으려고 힘껏 잎을 넓히면서. 어떻게 하면 자기 생명을 향유할까, 햇살을 더 잘 받을까……. 전 고양이나 쑥갓만큼도 제 생명을 향유할 줄 모른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요즘 많은 사람이 건강에 관심을 가져요. 하지만 건강한 생명 그 자체를 향유하는 게 아니에요. 건강해서 뭔가 다른 것을 하겠다는 거지요. 여전히 내 몸을 수단으로 삼습니다. 식민지 이후 근대화된 자본주의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생각이지요. 내 생명을 도구로 쓰고 수단으로 여기고 사는 거에 우린 너무도 익숙해져 있어요. 몸을 뜯어고치기도 하고 마음대로 마구 쓰지요. 자기착취, 자기학대의 역사인데 마치 개성을 추구하는 것처럼 여겨져 왔어요. 내 몸을 그렇게 대상화하고 수단으로 쓰니 당연히 다른 생명을, 자연을 그렇게 대하지요. 마구 쓰고, 훼손하고……. 그러다가 현재 이 위기 상황까지 온 겁니다. 기후위기라는 두려운 상황, 지구의 존립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 말입니다. 몸을 향유하지 못하니 소비한다 생명은 복잡하고 미묘한 감수성의 덩어리라, 미세한 바람결이나 설핏 스쳐 가는 꽃향기, 해가 질 무렵 깊어지는 고요, 촉촉하게 젖어 드는 가랑비, 봄의 형용하기 힘들 만큼 아름다운 새소리, 애인의 콧등에 송송 돋는 땀……. 이 모든 일상의 기쁨, 충만함을 다 느끼고 있어요. 그런데 그 느낌을 우리는 잘 알아채지 못해요. 사유만이 과장되게 발달된 문명 속에서는 명백한 몸의 느낌 체계를 들여다보는 게 너무도 힘듭니다. 특히 저 같은 사람은 몸이 없는 사람으로 오래 살아서 몸의 느낌에 둔합니다. 내 몸에 머물러 본 적도 없고, 몸 자체를 향유한다는 개념이 아예 없었으니까요. 우리가 일상을 향유할 때 생명은 자기구현을 다하는 겁니다. 내 생명을 꽃피우는 거지요.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일상을, 생명을 향유하고 있을까요? 매일 밥을 먹는데 밥을 먹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적이 없어요. 밥 먹는 행위를 향유하지 못해요. 밥 먹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를 몰라요. 밥은 다른 일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 먹을 뿐이에요. 그러니 아무거나, 대충 먹어요. 마치 자동차에 주유하듯, 쓰레기통에 휴지 던지듯 그렇게 먹기도 해요. 오죽하면 마이클 폴란 같은 학자는 <<행복한 밥상>>에서 ‘음식을 먹어라’ ‘식사를 하라’고 말할까요. 음식이 아닌 ‘음식 비슷하게 만들어진 상품’을 차 안에서든, 걸으면서든, ‘아무 데서’나 우물거리는 현실 속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숨을 쉬면서 희열을 느껴본 적이 있나요? 숨 쉬는 나, 살아 있는 나를 경이로워해 본 적이 있나요? 몸이 얼마나 경이로운지 느껴 본 적이 있나요? 이런 질문들이 계속 다가옵니다.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면서 우리에게 준 건 정말 많지만, 그것으로 인해 잃어버린 것이 존재의 신성성입니다. 모든 게 수량화되어 이해득실을 따지는 세상에서 우리는 생명이 신성하다고 느끼기 어렵습니다. 삶이 먼지처럼 허무하게 흘러가는 건 존재의 기쁨, 아름다움을 잃은 시대에 사는 사람들이 공통으로 겪는 일입니다. 삶을 경이로워하지 못하니 삶이 지루하고 진부해집니다. 그 허무를 메우기 위해 계속 소비합니다. 물건만 소비하는 게 아닙니다. 풍경도 소비하고 배움도 소비합니다. 그 많은 돈과 에너지를 들이고 가는 해외여행 대부분이 풍경이나 문화를 소비하는 일이 됩니다. 그 여행을 통해 내가 변하지 않았다면 그건 소비지요. 여기저기 배우러 다니는데 그 배움이 소비인 경우가 많습니다. 배움이 나를 바꾸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소비입니다. 소비는 내 몸에 축적되지 않으니 하면 할수록 더 공허해집니다. 공허하니 또 소비하고, 악순환입니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고 또 하면서, 내 생명(몸)을 완전히 고갈시키며 사는 것을 마치 잘 사는 것인 양 생각하는 삶에서 벗어나는 일, 그 일이야말로 새로운 문명을 생각할 때 해야 할 일이 아닐까요. 지난 십여 해 동안, 제가 전환한 삶, 몸으로 살아온 삶을 소개해 보려고 해요. 일기 형식을 빌렸습니다. 밥 일기 : “살아 있는 몸들은 다 달다.” 5월의 아침 아침을 먹는다. 늘 그렇듯 정갈하고 아름다운 아침상이다. 밥을 먹으면서 밥 먹는 몸에 머무른다. 그러면 밥의 몸이 느껴진다. 씹고 있는 밥알이 이 사이로 톡톡 뭉개진다. 쌀밥은 부드러워서 씹기도 전에 두루뭉술하게 뭉개져 넘어가지만 잡곡밥은 단단하고 거칠어 자기주장을 한다. 씹는 맛이 있다. 나의 어금니와 단단한 귀리나 보리알이 서로 부딪히며 부드럽게 마찰하면서 부수어지는 그 느낌은 든든하다. 오래 씹을수록 곡식들의 몸은 달다. 입안 가득히 달착지근한 맛이 퍼진다. 정갈한 아침상은 고추에 세워 준 지지대처럼 하루를 지탱한다. 6월의 오후 텃밭에서 따 온 채소들로 유월의 식탁은 풍성하다. 바라만 보아도 아름다운 채소들의 맛을 음미한다. 봄 채소가 지닌 여리고 상쾌한 맛, 씁쓸하면서 뒤끝이 고소한 맛, 강렬하면서 톡 쏘는 맛… 채소 하나하나가 지닌 맛과 물성을 느끼며 먹는다. 밭에서 막 따 온 채소의 맛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다. 고추처럼 아직 제철이 아닌 채소들은 여리고 밍밍하면서 살짝 비릿한 맛이 돈다. 미처 따지 못해 제철이 조금 지난 채소들이 질기고 쓴맛이 도는 것과 대조된다. 제 시기에 딱 맞게 거둔 채소들은 모두 달다. 상추나 쑥갓, 미나리, 케일, 비타민, 청경채는 물론이고, 양파나 마늘처럼 매운 채소들도 매운맛만 있지 않다. 갓 뽑은 양파에서 느껴지는 향긋한 단맛이나, 막 캐어 낸 마늘에서 나는 알싸한 매운맛 사이로 스며들어 있는 달큼한 맛. 그 매혹적인 맛과몸의 질감에 끌려 눈물을 글썽이며, 호호 혀를 내두르며 햇양파와 햇마늘을 맛볼 때 몸이 느끼는 오스스한 기쁨이라니! 양파와 마늘의 질감은 다르다. 양파의 몸은 가볍다. 살짝만 물어도 아사삭 입안에서 무너진다. 마치 반투명한 빛이 입 속에서 터지는 느낌이랄까. 마늘은 그보다는 조금 무겁다.빛보다는 그늘에 가깝다. 자연 상태에서 금방 따거나 캔, 과일이나 채소의 맛은 살아 있는 생명의 맛이다. 땅의 시간이 흙과 물, 햇빛과 공기로 스며들어 있는 생명. <<월든>>에서 소로우가 허클베리를 도시로 가져갈 수 없다고 한 까닭이다. 허클베리를 손수 따보지 못한 사람이 허클베리 맛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흔히 범하는 잘못이다. 허클베리는 보스턴까지는 결코 오지 않는다. 장사꾼의 수레에 실려 오면서 허클베리의 과분만 문질려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과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불사약 성분도 같이 사라지는 것이다. 남은 것은 단지 식품으로서의 딸기일 뿐이다. 순수한 허클베리는 단 한 알도 산골에서 도시로 가져오지 못할 것이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월든>> 그가 가져갈 수 없다고 한 불사약 성분은 다름 아닌 땅의 정기, 땅의 생명력이다. 내가 심고 기른 생명을 내 손으로 따서 먹는 기쁨은 뭐라고 형언하기 힘든 충만함을 준다. 이 생명들의 시간이 내 안에 쌓여 나 또한 싱그러운 존재가 된다. 나는 점점 살아 있는 맛에 섬세해지고, 점점 더 기뻐진다. 그리고 이 기쁨을 적극적으로 이야기해야 한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우리 몸은 우리가 먹은 음식, 즉 타 생명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 막중한 사실을 우리는 너무도 하찮게 여기고 돌보지 않는 문명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자신이 먹는 음식에 관심이 없다. 다른 곳에는 돈을 쓰면서도 먹는 것에 돈 쓰기를 아낀다. 사 먹는 음식에는 돈을 많이 쓰면서도 자신이 해 먹을 음식 재료를 꼼꼼하게 고르거나, 스스로 기르는 일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 내가 먹는 것이 음식인지 음식 흉내를 낸 ‘산업적 상품’인지 구분하지 못한다. 지난 반세기 동안 산업적 음식 시스템의 발전은 사람들을 산업적 음식사슬의 편의성에 길든 산업적 섭식자라는 존재로 바꾸어 버렸다. - 마이클 폴란, <<잡식 동물의 딜레마>> 농사 일기 : “흙을 만지면 저절로 기뻐진다.” 풀 뽑기 밭의 무성한 풀들을 뽑는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했다. 고구마 순들 다 걷어 올리고, 여기저기 무성히 자란 풀들 뽑고, 콩밭의 잡초와 병든 콩들을 제거하고, 땅콩밭에 무성한 풀들 또한 뽑아냈다. 참 이상도 하지, 풀을 뽑다 보면, 흙을 만지다 보면 나는 사라진다. 그저 내가 땅이 되거나,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여름 저녁 밭을 매다가 눈을 들어 바라보는 풍경은 문득 낯설다. 내 존재가 새롭게 보인다. ‘아, 내가 지금 여기 이 땅에 속해 있구나.’ 하는 안도감. 아주 오랫동안 갖지 못했던 낯선 안도감이다. 감자 캐기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으며 감자 몇 뿌리를 캔다. 땅속에서 하얀 살을 서로 맞대고 있던 둥글둥글한 몸들이 밝은 세상으로 나온다. 갓 땅속에서 나온, 속이 말갛게 보일 듯한 감자를 끓는 물에 찐다. 하얀 분이 파사삭 나오는 뜨거운 감자를 호호 불어 가며 먹는다. 밖에는 비가 오고 있다. 문득 비 오는 날 감자를 캐, 쪄 먹는 이 일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처럼 느껴진다. 감자는 비를 맞아 가며 캘 때 거의 예술의 경지에 이른다. 비를 맞아 촉촉해진 땅속에서 희고 둥근 알 감자들이 우르르 드러날 때, 그것을 만지는 손의 촉감과 경탄 어린 눈길, 그리고 그 풍경의 근원이 되어 주는 안개 드리운 들과 산, 하늘…이 모두가 어우러진 한순간, 감자 캐는 노동은 예술의 차원으로 훌쩍 올라가 버린다. 농사일의 기쁨 흙을 만지는 일에는 이상한 희열이 있다. 그 기쁨의 원천이 무엇일까. 잘 모르겠다. 다만 그 기쁨이 땅에서 온다는 것을 알 뿐이다. 농업과 관련된 노동은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묘한 희열이 따른다고 많은 사람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농업과 관련된 노동을 하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열락을 느끼는 대지의 몸과 일체가 되는 순간을 체험하게 된다는 데 있을 겁니다. - 나카자와 신이치,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물신 숭배와 허구의 대안>> 촉촉한 비를 맞으며, 또는 산들바람, 따스한 햇볕을 받으며 땅에 엎드려 있을 때, 기쁜 줄도 모르게 기쁘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른다. 흙을 만지고 작물을 돌보고 수확하는 일은 그 노동이 아무리 힘들어도 피곤하지가 않다. 피곤한 게 아니라 고단할 뿐이다. 지쳐서 툇마루에 쓰러져 누워서도 비시시 웃음이 나오는 이상한 충만감이 있다. 내 몸도 자연이고, 땅과 풀, 채소, 곡식들도 자연이다. 하늘도 바람도, 비나 햇살도 다 자연이다. 자연인 내가 자연에 속해 일하는 것, 내가 농사일에서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은밀하고 깊은 기쁨일 게다. 걷기 일기 : “사계절을 걸으며 내 몸은 풍요의 곳간이 되었다.” 5월 걷는다, 매일. 구릉을 낀 복숭아밭 사이나 벌판 가득 모내기한 들길을 한 바퀴 돈다. 걸으면서 걷는 내 몸에 집중한다. 어느 날은 아주 몸이 무거워서 걷기가 힘들다. 다리가 천근만근 무겁다. 어느 날은 몸이 가벼워 다리가 날렵하고 기쁘게 나아간다. 이런 날은 몸을 스쳐 가는 많은 것들을 느낀다. 벌판 쪽에서 부는 비람 소리, 한껏 생생하게 올라오는 억새가 서걱대는 소리, 새들이 주고받는 소리, 냇물 흐르는 소리, 그리고 햇살과 나뭇잎… 이 모든 것이 걷는 내 몸과 함께한다. 내 몸은 걷는 장소와 하나가 되고 몸은 기쁘다. 적당히 땀이 오르는 몸은 따뜻하다. 십여 해 동안 사계절을 날마다 걸으면서 내 몸엔 많은 것이 쌓였다. 봄부터 여름, 가을까지 벼들의 일생이, 바람과 개구리 소리, 벼 익어 가는 냄새, 스러져 말라 가는 억새를 한순간에 황금 깃털로 바꾸는 가을 햇살, 겨울에 독경讀經하듯 낭랑한 개울 물소리,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새들의 날개……. 온갖 소리와 냄새와 촉감과 빛깔들, 숱한 감각들이 켜켜이 쌓인 것이다. 내 몸은 깊고 풍요로운 곳간이 되었다. 6월 요즘처럼 걷기 힘든 세상은 걷는 것도 일종의 상품이 된다. 그 많은 ‘걷기 답사’ 프로그램이 그렇다. ‘트래킹’이라는 희한한(?) 상품이 개발된다. 그러나 큰돈을 들여 몇 박 며칠 히말라야 트래킹의 ‘심오한’ 경험을 하고 와서도 여전히 일상을 걸을 수 없다면, 그것은 소비다. 경험은 삶의 일상으로 축적되는 것이다. 얼마 전 지인이 ‘만보기’를 스마트폰 앱에 깔아 주었다. 자신은 하루에 육천 보 이상은 걷는다고 했다. 하루에 ‘오천 보를 걷고, 만 보를 걷는다’는 건 내 몸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내 발이 시멘트 길을 걸을 때 느끼는 감각과 맨땅을 걸을 때의 감각이 얼마나 다른지, 봄에 언 땅이 녹아 마치 이스트에 잘 부풀려진 빵처럼 부드러운 땅을 밟을 때 발이 얼마나 기뻐하는지, 언덕을 오르거나 내릴 때의 무릎이 느끼는 감각의 차이, 스쳐 지나가는 바람결에 온몸이 환하게 열리는 환희, 냇가에 떼 지어 놀던 오리들이 내 발소리에 놀라 후두둑 솟아오르는 모습, 논을 가로지르며 달리는 고라니를 보면서 터져 나오는 웃음……. 그 어떤 것도 만보기는 이야기할 수 없다. 모든 것을 수량화하는 문명은 생명의 느낌, 그 복잡한 감수感受의 세계를 지운다. 생명을 생명으로 볼 수 없게 한다. 그러니 너무도 쉽게 생명을 파괴한다. 사람이 생명으로 보이면 ‘구의역 김 군’과 같은 일이 계속 일어나겠는가? 강이 생명으로 보이면 거기에 포클레인을 들이대고 파헤칠 수 있겠는가? 새로운 문명의 키워드 - 존재의 신성성, 일상의 성화, 몸의 풍요 인간은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길을 간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역사는 말해 줍니다. 망해야 달라졌습니다. 기후위기라는 무시무시한 이 현상 앞에서도 우리는 뉘우치지 않고 망할 때까지 갈지도 모릅니다. 싸움으로 치면 길고 긴 싸움이고, 승부로 치면 이길 가망도 없는 싸움일지도 모릅니다. 이기기 위해서 싸우기보다는 이 고통을 함께 겪기 위해 싸워야 하고, 진다 해도 그 싸움을 통해 내가 달라져 있어야 하는 싸움을 해야 합니다. 내 생명을 해치는 방식이 아니라 나를 살리고 든든하게 하는 방식으로 싸워야 합니다. 두려운 시절이지만 두려움 속에 소망을 품어야 합니다. 두려움으로 하는 일은 오래가기 어렵습니다. 어떤 삶이 아름다운 삶인지 물어야 합니다. 절실하게, 마음을 다해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도 오랫동안 어떤 삶이 아름다운 삶인지 묻지 않았습니다. 물질의 양을 어떻게 내 욕망에 따라 소비하는가가 중요했습니다. 내가 먹을 것을 기르고 거두어 요리해 먹는 과정이 사라지니 그 길에서 느낄 수 있는 무수한 감각과 깨달음도 사라집니다. 소비로 채운 배는 내가 무엇을 먹었는지, 내가 먹은 게 어디에서 왔는지,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르고 금세 더 자극적인 걸 찾으려 합니다. 남들 눈에 더 있어 보이려고, 더 잘나 보이려고 소비하고 벌고 또 소비하다가 하루가, 한 해가, 인생이 저물어 갑니다. 아름다운 삶인가요?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나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가? 삶이 아름다워지려면 몸을 유지하고 기르는 일상, 그 가운데서도 고갱이인 집과 밥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우리는 아름다움이나 신성함이 먼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하고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성스러운 곳이 ‘저기’에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내 생명이 사는 바로 ‘여기’ 내 집이 성스러운 공간입니다. 그러니 집을 아름답게 가꾸어야 합니다. 단칸방에 살더라도 내 생명을 모시는 공간이니 정갈하고 아름답게 가꾸어야 합니다. 내가 찾은 밥의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언어는 동학東學의 언어입니다. 이천식천以天食天, 향아설위向我設位. 이 언어를 얻고 나서 밥이 지닌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밥을 소중히 하는 것이 왜 그리 중요한 일인지 납득하게 되었습니다. ‘이천식천’, 하늘님인 내게 하늘님을 주는 게 먹는 일입니다. 하늘님인 나는 타他존재를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타 존재가 이미 하늘님입니다. ‘향아설위’, 나를 위해 위패를 모신다는 말입니다. 자신을 향해 올리는 예배입니다. 예배는 나 밖의 대상, 신이나 위대한 존재를 향해 올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자기 예배를 이야기합니다. 이때의 나는 주관적, 심리적인 내가 아닙니다. 우주 생명인 나입니다. 우주 생명이 나한테 들어와 있는 거죠. 그 생명에게 올리는 예배입니다. 내가 단순히 몇십 년을 산 존재가 아니라, 수억 년의 몇십 년이라는 역사성을 지닌 ‘온 생명’이라는 것을 아는 이야기입니다. ‘신神이 신을 먹는다’는 사유의 거대함을 생각해 보셔요. 먹히는 존재도 예배받는 대상이고, 먹는 나도 예배의 대상입니다. 이때 일상은 얼마나 거대하고 위대한가요. 대충 먹고 하찮게 여겨 왔던 ‘밥’이 거의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장엄한 아름다움으로 펼쳐집니다. 밥 한 끼는 내 생명에게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러니 밥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나 자신과 타 존재에 대해 깊이 감응하는 ‘심미적 감수성’이야말로 우리가 회복하고 길러야 할 지성이자 감성입니다. 몸과 함께하면 많은 것이 달라집니다. 밥 먹을 때 밥 먹는 몸에 머물러 봅니다. 밥 먹으면서 티브이나 스마트폰을 보거나 딴생각을 하지 않으며 밥을 먹습니다. 내 생명이 밥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섬세하게 깨어서 느껴 봅니다. 걸으며 걷는 내 몸과 함께합니다. 걸으며 만나는 뭇 생명과 사물들을 느껴 봅니다. 설거지할 때 설거지하는 몸에 머물러 봅니다. 무감각하게 하는 습관적 설거지가 아니라, 설거지를 하는 내 몸을 인식해 봅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놀랍게도 고요해지고 기뻐집니다. 지루한 일상에 빛이 들어옵니다. 늘 하던 설거지가 최초의 설거지가 되는 낯선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무언지 모를 생기, 충만함으로 몸이 차오릅니다. 삶이 아름다워지고, 든든해집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몸에 머문다는 건 바로 그 순간에 머문다는 의미고, 우리가 경험하는 건 순간밖에 없으니까요. 그런데 우린 순간마다 내 몸에서 분리되어 있기 십상입니다. 그러니 순간에 머무르지 못하고, 순간에 머무르지 못하니 삶은 허무하게 흩어집니다. 순간에 머무는 것은 과정에 머무는 것이기도 합니다. 무엇이든 결과에 매달려 치달으면 순간을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삶에서 기쁨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일상을 소중히 하면 몸이 풍요로워집니다. 몸의 감수성이 깊어집니다. 그러면 외부의 욕망, 소비 욕망, 타자지향적 욕망이 줄어듭니다. 일상을 귀하게 다룰수록 그러해집니다. 하루에 한 번이라도 내 몸에 머무는 법을 익혀 보셔요. 그러면 삶이 조금씩 아름다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어요. 왜냐하면 내 몸이 곧 내 생명이니까요. 생명을 돌보면 그 생명은 든든해집니다. 생각을 끄고 몸의 말을 들어 보셔요. 감각을 투명하게 벼려 스스로 악기 같은 몸이 되길 바랍니다. 몸을 연주하고 몸의 축제를 만나 보셔요. 젊은 그대들은 몸으로 살아가는 축복이 무언지 배우길 바랍니다. 나를 찾겠다며 허공에서 허공으로 떠다니느라 일상을 외면하지 않길 바랍니다. 소비적 시간 대신 창조적 시간을 살아가길 바랍니다. ‘존재의 신성성’, ‘일상의 성화聖化’, ‘몸의 풍요’는 새로운 문명과 아름다운 삶을 생각할 때 중요한 키워드가 되지 않을까요? ◌ 김혜련 ◌ 평생 허공을 떠돌다가 뒤늦게 철이 들어 땅으로 내려왔어요. 경북 상주 시골 마을에서 흙을 만지고, 산책하고, 고양이를 돌보면서 몸 가진 것들의 절실함과 아름다움을 느끼며 살고 있어요. 20여 년을 국어 교사로 살았고, 30대에 여성학을 만났어요. ‘또 하나의 문화’와 ‘한국여성민우회’에서 활동하고, 「여성신문」, 페미니스트 잡지 「이프」 등에 글을 썼어요. 마흔 끝 무렵에 교사 생활을 접고 여러 해 입산 수행을 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남자의 결혼 여자의 이혼』 『결혼이라는 이데올로기』(공저), 『학교 종이 땡땡땡』『학교 붕괴』(공저) 『밥하는 시간』 『고귀한 일상』이 있습니다. <벗자편지> _자급하는 삶을 어렵게 하는 허울을 벗어던지자 • 지은이 : 김혜련, 칩코, 똥폼, 문홍현경, 풀, 상이, 아랑, 김정희 • 펴낸 곳 : 니은기역 • 펴낸 날 : 2022년 11월 22일 • 판형 120*188 / 쪽수 256쪽 • ISBN 979-11-968328-4-1 (03330)
    • 문화예술
    • 책마을
    2025-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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