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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가 너무 슬프네
- ■ 2026 지리산에서 보내는 편지 5 오늘은 병원에 가는 날 오늘은 병원에 가는 날, 아내가 아픈지 벌써 3년째다. 다행히 열흘에 한 번 통원 치료하며 병을 어느 정도 관리, 유지하고 있는 편이다. 날씨가 좀 풀리니 아내는 걷기운동도 하고 봄나물도 캐면서 봄기운을 받아낸다. 나도 밭에 퇴비를 넣고 뒤집어 고르며 텃밭일을 시작했다. 감자와 생강을 심고 상추, 케일, 청경채, 아옥, 쑥갓.. 등 모종들을 시장에서 사와 심었다. 고장 난 외등도 고치고 마사토를 1톤 트럭 분 들여와 패인 잔디밭에 고루 뿌렸다. 집안일은 하다 보면 끝이 없다더니 과연 그랬다. 아내는 아내대로 나는 나대로 많이 달라진 일상 현실에 잘 맞춰 살고는 있으나 언뜻언뜻 어떤 결핍감에 시달리곤 한다. 누구나 그렇듯 갇힌 듯 사는 시간과 공간 아니냐고 달래보지만 크게 위안이 되지는 않는다. 오늘, 의사는 마냥 수혈에만 의지할 수는 없게 되니 골수 이식에 대비해서 대상자를 찾는 등 준비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준다. 그래, 지금까지만 해도 고마운 일이다 싶다. 20대 청춘에 만나 함께 살아온 날이 얼만데 이제야 부부의 깊은 정이라는 게 무언지 느끼게 해주는 날들이다. 같이 외출할 읍내의 오일장을 기다리는 하찮은 일상마저 사소한 기쁨으로 오는 하루하루가 소중한 날이니 그렇다. 전에는 아내를 시에 올리는 일을 꺼렸었는데 요즘은 아내를 대상으로 쓴 시가 많아졌다. 예전 같은 마음에 걸림이 없어진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다. 내 삶의 중심으로 깊게 들어와 버렸기 때문이다. 아내와 관련된 시 2편을 첨부한다. ======================================= 가사가 너무 슬프네 아내를 태우고 화순 암센터 다녀오는 길 가로수 화려한 나무들은 바람에 꽃잎을 날리고 옆자리에서 아내의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끊어질 듯 가녀린 노래가 가까스로 이어지는데 .. 알뜰한 그 맹서에 봄날은 간다 겨우 한 소절 중얼거리더니 가사가 너무 슬프네, 하며 몸을 차창 쪽으로 뒤척이더니 말이 없다. 아마 아내는 눈시울이 조금 붉어졌을 것이다. 모처럼 밖으로 드러낸 아내의 마음에 나는 피할 수 없는 과녁이 되어 깊고 선명하게 박히는 화살 하나를 받아냈다. 누군가의 안으로부터 농축된 오랜 슬픔이 새어나 올 때 사람이 지극히 사랑스러워진다는 것을 알았다. 목까지 차오른 심정心情으로 차를 세우고 안아주고 싶었는데 차창을 스치는 가로수처럼 일상은 늘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간다. 사는 일의 무상無常함이야 일러 무엇하랴 어느새 두텁나루숲이 가까웠나 차창에 지리산 자락들이 가득 차 있고 저무는 빛들이 능선에 걸려 있다. --------------------------------- 아슬아슬한 세월 그렇게 사랑을 얻고 또 여읜다. 화려한 세상에 눈멀어 한세상 꿈속을 살며 사랑도 하며 꿈의 실상實相을 짐작해 보건만 서투른 사랑은 늘 구름처럼, 구름의 그림자처럼 시시각각 변하며 흩어지고 그렇게 형해形骸도 없이 사라지는 사랑이다. 사람들은 그래도 그 사랑에 대한 기억 하나로 아슬아슬한 세월을 건너고 그렇게 사랑을 얻고 또 여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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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한 일
- 미안한 일 이상국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시인으로 살며 언제부턴가 세상은 자꾸 넓어지고 나는 작아져서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던 시절이 있었지 어느 해 겨울 밤 아들의 주머니 속 손을 뜨겁게 잡고 마을 길을 걸으며 아버지는 가진 게 시밖에 없으니 너는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했지 지금 생각하면 아들에게도 미안하고 시에게도 미안한 일이었다 ======================================================== 시인으로 사는 일이 그렇다. 스스로 간절히 원해서 하는 일이지만 일용할 양식을 제대로 물어오지 못해 가족에게 미안하다. 그리고 가난은 나의 문제지 시의 문제가 아니어서 시에게도 미안하다. 시인이라는 존재로 사는 일만이겠는가. 세상에 태어나 무엇으로 산들 그게 가난의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무엇으로 산다는 것, 무엇이 된다는 것을 늘 돈의 문제로 경제의 문제로만 규정짓는다. 그러나 그것은 ‘어떻게 사느냐’라는 삶의 문제일 뿐이다. 돈의 문제는 알다시피 삶의 문제 중 한 부분일 뿐이다. 삶의 근원을 생각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내가 선택한 삶은 내 인생을 창조하고 발명하는 일이지만 돈에 끌려다니는 삶은 나를 잃는 삶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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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자편지]함께읽기9 김정희: 바라는 삶을 살고 싶은 해바라기 벗들에게
- 지리산인>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벗자편지>>를 펴낸 니은기역 출판사입니다. 자급을 어렵게 하는 허울을 벗어던지고 나와 둘레를 돌보며 고귀한 하루를 살려는 농부들의 편지, <<벗자편지>>를 여기 <지리산인>에 한 달에 한 번, 한 꼭지씩 들려드려, 어느덧 마지막 편에 왔습니다. 마지막까지 함께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나의 시간을, 나의 생산수단을, 나의 재주를 좀 더 아름답게 쓰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책이 용기를 주면 좋겠습니다. 바라는 삶을 살고 싶은 해바라기 벗들에게, “담대한 결론에 도달하는 일은 이미 우리 안에서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김정희 식물을 키우면서 세상에 대해서 새삼 다시 생각해 본다. 채소와 과일은 맛이 다 다르고 특성도 다르다. 사람도 그럴 것이다. 사람마다 자기가 타고난 특성이 다 다르고, 잘할 수 있는 재능이 다 다를 텐데. 그러나 세상이 정한 잣대는 하나뿐. 능력으로만 줄을 세웠다. 사람에게 등급을 매기고 어릴 적부터 성적으로 평가하고, 어른이 되어서도 치열한 경쟁 속에 내몰려 하루하루 버텨 갔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들 대부분의 공통적인 삶이자 고민이다. 조금은 여유 있게, 사람다운 삶을 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지만 좀처럼 벗어나기란 어려웠다. 모두가 경쟁 사회에 내몰려 남보다, 아니 내 옆에 가장 가까운 친구보다 한 발짝이라도 뒤떨어지면 패배자로 취급받는 게 오늘날 현대인의 삶이 아닌가. 아파트 평수에서부터 성적 순위, 직급 순위, 모든 게 경쟁으로 내몬다. 어떻게 하면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사람은 저마다 타고난 능력과 재능이 있고, 자신이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분야가 제각각인데. 이걸 인정해 주는 사회가 아니었다. 누가 인정해 주지 않아도 아랑곳하지 않고 스스로가 제 능력을 기를 마음의 여유도 없다. ‘언젠가는 이걸 하고 싶어. 언젠가는 내가 예전에 좋아했던 일, 내가 잘했던 것을 하고 싶어. 그런데 지금은 아냐. 지금은 여유가 없어. 나중에, 나중에…….’ 나도 하고 싶은 게 있었다. 그러면서 현실이라는, 나 스스로 만든 울타리에 갇혀 정작 내가 가고 싶은 길을 막았다. 물론 어릴 적부터 작가가 되고 싶은 게 꿈이어서 그 길로 쭉 걸어왔지만, 꿈이 일상이 되니까 또 다른 삶을 살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렸다. 사회가 들이미는 잣대에서 벗어나 좀 더 여유 있는 삶, 좀 더 다양한 세상에 도전해 보고 싶었다. 그렇게 50대 중반에 정해진 경로를 벗어났다. ‘실험 삼아 딱 1년만 어때?’ 도시에 살면서 언젠가는 시골로 내려가서 살고 싶다는 희망을 막연히 꿈꿨다. 꿈과 희망이지만 당장 눈앞에 놓인 현실은 만만찮았다. 나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도 늘 비슷한 넋두리를 했다. “시골에 내려가서 살고 싶지만, 당장 뭐 해서 먹고살아.” 문제는 먹고사는 문제였다. 누구나 평생 고민하는 문제. 그 문제에 매달려 꿈도 희망도 스스로 접어 가면서 현실에 매달려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가는 게 대부분 사람의 삶이 아닌가. 나 역시 막연히 꿈만 꾸었다. 시골로 내려간다고 내가 여태껏 해 온 책 쓰는 일을 접어야 하는 게 아닌데도, 오랫동안 도시 생활에 익숙해서 몸이 멀리 떠나는 게 왠지 망설여졌다. 용기가 없었다. 그렇지만 도시라는 욕망과 경쟁과 치열함으로 가득한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언젠가는 시골에 내려가서 텃밭을 일구며 자연과 더불어 살고 말겠다며, 아주 낭만적인 세상을 꿈꾸면서 가끔 인터넷 검색을 했다. 산과 들판과 바다가 어우러진 터전. 밤이면 하늘에 별이 반짝반짝 빛나고 푸른 들판이 펼쳐진 곳. 그저 온라인 검색으로 마음을 달랬다. 그러다 때마침 서울과 그리 멀지 않은 화성에 내 상상과 비슷한 터전, 그리고 전원주택이 셋집으로 나왔다. 화성은 반으로 갈라서 반은 동탄이라는 아파트 숲이 있고, 나머지 반인 서해 바닷가 쪽으로는 강원도권이라고 일컬을 만큼 시골 분위기가 나는 지역이라고 했다. 농촌 풍경과 바닷가가 어우러진 마을이라니, 얼른 구경이라도 해 보고 싶은 마음이 부풀었다. 옆지기에게 말하려니 좀 조심스러웠다. 그도 언젠가는 시골에 들어가서 살고 싶다며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미루고 미루어 왔다. 돈을 더 벌어서 가자는 뜻이었다. 대체 그 ‘때’가 언제인지, 자꾸 미루다 보면 결국은 포기하고 말 것 같았다. 신경전이 벌어졌다. 나라고 당장 모든 걸 접고 가자는 건 아닌데. 주위 사람들 조언에 따라, 어디든 정착하기 전에 일단 셋집을 구해서 살아 보고 그다음에 정착을 하든지 말든지 결정하자는 거였다. 그래야 나중에 후회가 덜하다고 하니. 당연히 처음부터 도시나 아파트 생활을 다 접고 산골짜기나 궁벽한 촌으로 가자고 하면 덜컥 겁나는 게 현실이다. 갑자기 환경이 완전히 바뀌고, 그것도 살 곳이 어떤 곳인지도 잘 모르는데 당장 내려가자 하면 거부감이 드는 게 당연하다. 왜 시골로 내려가 살고 싶다면서 안 가느냐고 따지거나 대거리를 하면 서로 싸움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게 그냥 부담 없이 가볍게 나들이 가는 마음으로 가 보자고 나름 꾀를 낸 것이다. 그럼 마음에 부담이 덜할 것 같아서. 내 제안에 옆지기는 마지못해 길을 나섰다. 찾아간 집은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 적어 두었던 모양보다 훨씬 큰 전원주택이었다. 집을 직접 지은 옆지기가 세상을 먼저 떠난 후에 비워 둔 집이라고 했다. 나무도 많고, 전면이 유리로 된 거실과 이층 창이 갑갑한 마음을 탁 트이게 했다. 널찍하고 비교적 깨끗한 전원주택을 보면서 마음이 흡족했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마음에 들었지만 옆지기 반응이 어떨지 몰라서 내 의견을 먼저 꺼내지 않았다.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그도 극구 반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망설였다. 여전히 우리에겐 시골에 들어와 살 용기가 부족했다. “실험 삼아 딱 1년만 살아 보자.” 시골 생활에 적응할 수 있을지 없을지 일단 한번 살아 보자고 고민 끝에 뜻을 모았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마음을 정한 김에 계약하고 바로 이사를 준비했다. 마음만 품고 도전하지 않으면 늘 제자리에서 끙끙 앓기만 할 테니까. 때는 11월 말이어서 김장이며 이것저것 겨울 준비도 해야 하고, 너무 추워지기 전에 이사하는 게 마음이나 생활에 안정이 될 것 같아 망설임 없이 저질렀다. 그렇게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시골살이를 시작했다. 50대 중반에 말이다. 시골 생활은 하루가 길었다 길어도 너무 길었다. 하루 24시간이 아니라 36시간, 어쩌면 멈춰 버린 시간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밤과 낮은 어김없이 바뀌었다. 그런데도 시간이 길게 느껴지는 건 아마도 마음부터 먼저 느슨해진 탓일 거라고 여겼다. 화성시는 시골이 아니라고 하지만 내가 들어간 면 소재지 마을은 바다에서 차로 10여 분 거리이고, 누가 봐도 농촌 마을 풍경이었다. 하루에 노란색 마을버스가 몇 번 오갈 정도니 승용차가 없으면 마음대로 나다닐 수도 없는 그런 마을이었다. 도시와 아파트, 빡빡하게 돌아가는 일상생활, 늘 시간에 쫓기듯 계획을 하고 일정을 마쳐야 하고, 시간이 아니라 분까지 쪼개 홀로 계획했던 생활에서 한결 벗어난 기분이 들었다. 시간뿐 아니라 공간도 넉넉했다. 드넓은 하늘과 탁 트인 시야, 넓고 끝없는 들판, 하늘을 그리며 날아다니는 새들이 비록 겨울이지만 정겹기 그지없었다. 마치 꿈꾸던 세상에 성큼 들어온 것 같아 흐뭇한 마음마저 들어 일부러 겨울 들판과 뒷산을 오르내렸다. 하루가 얼마나 긴지, 왜 이런 세상을 그동안 몰랐을까. 내가 살아온 세상에서 훨씬 벗어나 어느 곳엔가 존재하고 있었을 텐데. 시간이란 게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 것이라 여겼는데, 얼마나 주관적인지 깨달았다. 시간 개념이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고즈넉하고 한가한 분위기에 젖어 있다가도 때로는 심심했다. 빡빡하게 돌아가는 생활에서, 싫든 좋든 서로 부딪히며 살아야 하는 공동생활에서 벗어나니까 마치 두꺼운 껍데기를 벗어 버린 것 같아 가벼웠는데, 아직은 이런 생활을 어떻게 메워야 할지 몰라 심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이런 심심함마저 즐겨야 한다는 걸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일명 ‘자본주의 병’이라는 병에 걸려서 살았던 걸까. 한가하게 보내는 시간을 즐기면서도 왠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남들은 다 열심히 바쁘게 사는데 나만 한가하게 보내니까 세상에 뒤떨어지지 않을지, 지인들과 멀어지지 않을지, 책을 내는 출판사와 너무 멀리 떨어져서 뒤처지지 않을지, 온갖 잡념이 밀려들었다. 한때는 도시에 살면서 성냥갑 같은 아파트에서 평생을 보내며 살기는 싫다고 생각했는데. 자연에 가까운 삶, 조금은 여유를 부리면서 밤하늘을 쳐다보며 별을 감상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낮에는 밭을 갈고 밤에는 책을 읽는 ‘주경야독’의 삶을 살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는데, 막상 그렇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심심하고 불안하기도 했다. 사람 마음이 이래서 변덕스럽다고 했던가. 마음에서 일어나는 이 불안을 처음에는 그대로 방치하다가 다른 일을 찾아냈다. 심심할 때는 심심한 대로 그대로 멍하니 산과 들을 하염없이 바라보거나 아니면 그동안 읽지 않았던 책을 집어 읽었다. 원고 쓰는 데 매여서 책 읽기를 조금은 미루어 두곤 했는데, 심심한 시간을 메우려고 책을 읽기 시작하자 예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원래 책 읽는 걸 좋아했다. 내가 사는 세상을 벗어나 또 다른 세상에 들어가 볼 수 있고, 내가 알지 못했던 세계도 책을 통해서 느낄 수 있으니까. 그런데 원고를 쓰기 시작하면서 해마다 책을 내야 한다는 생각에 원고 쓰기에도 하루하루가 바빴다. 나도 모르게 책 읽는 일에 소홀했다는 걸 책을 손에 잡으면서 깨달았다. 불안한 마음이 들 때는 ‘이건 자본주의 병이야. 이제 느리게 느긋하게 사는 삶을 살아야 해.’ 하면서 마음을 다독거렸다. 이론으로만 생각하던 걸 현실에서 살려니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태껏 습관처럼 하루에 원고 몇 매라도 써야지 마음이 놓였는데,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다. 하루 이틀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해결이 되었다. 농사일이 점점 커져 일이 많아지고 머리가 아닌 몸을 쓰는 삶을 사니까 피곤해서라도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짧은 시간 안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따뜻한 팥죽 한 냄비 겨울이어서 그런지 밖에 나다니는 사람도 좀처럼 보이지 않고, 마을에 모여 사는 집이 여덟 집뿐이었다. 다닥다닥 붙어 살아도 별로 교류도 없고 데면데면한 도시와 달리, 시골은 오랜 세월 함께 살아온 사람들끼리 정이 끈끈했고 그만큼 외지인을 낯설고 부담스러워하는 듯했다. 그런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떤 사람들이 내 마을에 들어와 사는지, 어떤 사람들이 마을에 무슨 해를 끼치지나 않을지 걱정되는 건 당연했다. 그래서 선뜻 낯선 집에 문을 두드리기가 망설여졌다. 아마도 도시에서 살아오면서 타인과 적당히 거리를 두는 게 습관이 되어 이런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70대가 한 분, 대부분 80대였다. 몇십 미터 뚝뚝 떨어진 아랫집이나 윗집 둘레를 산책하다가 어쩌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만나면 어색하게 인사를 하는 정도였다. 왠지 무뚝뚝하고 마뜩잖은 듯 겨우 인사만 받아 주고는 집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아침, 일어나니까 문 앞에 낯선 양은냄비가 놓여 있었다. 이게 뭐지, 하고 뚜껑을 열어 보다가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팥죽이었다. 오늘이 동짓날이었다. 순간, 가슴이 울컥했다. 아직 인사 정도만 하는 사이인데 누가 팥죽을 갖다 놓은 것이다. 그것도 말도 없이 조용히 갖다 놓고 갔다. 불현듯 팥죽에 얽힌 추억이 떠올랐다.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신 엄마는 동짓날이 되면 그 전날 밤에 팥죽을 쑤었다. 경상도 풍습이었다. 그때는 오랜 관습으로 팥죽을 쑤면 사람이 먹기 전에 대문 밖으로 나가 담벼락을 돌며 팥죽을 던졌다. ‘고수레 고수레’ 하고 팥죽을 던지면서 나쁜 기운과 악귀가 물러나서 새해에는 집안을 평안하게 해 달라고 빌었다. 엄마가 살아 계실 때는 동지가 되면 어김없이 팥죽을 쑤었지만, 엄마가 돌아가신 뒤에는 한 번도 팥죽을 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우리 집으로 들어온 팥죽이 까마득히 잊힌 추억을 되살린 것이다. 내가 영천에서 초등학교 다닐 때였다. 한겨울이라도 눈이 많이 오지 않는 지역인데 갑자기 눈이 펑펑 쏟아졌다. 일부러 눈을 맞으며 얼마나 좋아했던지. 엄마가 팥죽을 끓이는 동안, 우리 골목 이웃 골목 아이들까지 죄다 나와서 강가에서 눈싸움을 벌였다. 그 장면이 마치 아련한 추억처럼 떠올라 마음마저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참 아련한 시절. 오래전에 돌아가신 엄마가 떠올라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져 왔다. 냄비에 손을 갖다 대자 따듯한 기운이 전해져 왔다. 알지 못하는 사람의 따듯한 마음이 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일단 맛있게 먹고 나서 낡은 양은냄비의 주인을 찾기로 했다. 그분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맛있게 먹는 게 팥죽을 쑤면서 고생하신 데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길이라고 여겼다. 옆지기를 깨워 낡은 양은냄비를 내밀면서 팥죽이 문 앞에 놓여 있었다고 하니까, 부스스한 몰골로 감탄을 쏟아 냈다. “이게 시골 인심이야. 아직 시골은 이런 인심이 남아 있었네.” 웃음을 지으면서 흐뭇해했다. 팥죽을 맛나게 나눠 먹었다. 양은냄비 주인은 멀리서 찾을 것도 없이 윗집 할머니였다. “아무래도 도시에서 온 사람들이라 팥죽을 좋아할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오늘 동지니까 나눠 먹고 싶어서 살짝 갖다 놨어. 맛있게 먹었다고 하니까 고마워.” 할머니가 오히려 고맙다고 했다. 이 일을 계기로 80대 부부를 모시고 외식도 하고, 서로 날마다 들여다보는 관계로 발전했다. 서로 음식도 만들어 갖다주고, 세상 사는 얘기도 나누곤 했다. 할머니가 좋게 소개해 주신 덕택이었을까. 마을에서는 한결 나한테 호의적으로 대해 주었다. 길을 가다 마주치면 먼저 웃으면서 인사를 하고, 서로 덕담을 나눌 정도였다. 마을 사람들에게 한층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한번은 가뭄이 이어지는 어느 날 허리가 반쯤 고꾸라진 할머니가 휠체어에 20ℓ나 되는 물통을 얹어서 힘겹게 오시다가 길에서 쉬고 있었다. 내가 인사를 하자 활짝 웃는 얼굴로 반겨 주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얘기 많이 들었어. 마을에 좋은 사람이 들어와야 하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내가 할머니한테 왜 집에서 힘들게 물을 가지고 오냐고, 우리 집에 지하수가 펑펑 나오니 그걸 쓰면 되잖냐고 했다. 그랬더니 우리가 이사 오기 전까지 이 집에는 마을 사람들이 발을 들이지 않아서 아예 생각도 안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지하수를 호수로 빼서 꼬부랑 할머니네 밭에 내다 주었다. 고추와 들깨 밭이 시원한 물로 흠뻑 젖어서 금세 생기를 되찾았다. 할머니는 무척 고마워했다. 그러면서 아주 조심스럽게, 넓은 밭에 듣는 사람도 없는데 작은 목소리로 일러 주었다. “그 집에는 마을 사람들이 안 가! 얼마나 인색한지 밭에 물 한 번 쓰게 해 달라고 부탁하면 자기들 한 달 사용하는 전기세를 몽땅 물으라고 했어. 그게 몇만 원이야. 사람이 그렇게 살면 안 돼! 그래서 앞집에 지하수가 잘 나오는 걸 알면서도 부탁하지 않았어. 밖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어떻게 말할지도 모르고. 그런데 먼저 물을 주겠다고 해서 얼마나 고마운지. 우리 밭에 열무 나면 뽑아 가서 열무김치 담가 먹어. 들깨도 한 가지에 한 개나 두 개씩 따서 먹어. 한 가지에서 너무 많이 따면 열매가 잘 안 열리거든.” 할머니도 내가 물을 내준 데 대해서 기꺼이 마음을 내주었다. 그제야 안 일이지만 마을 사람들이 내가 세 들어 사는 집에 발을 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나는 원래 그런 줄 알고 지냈는데 다 까닭이 있었다. 시골 생활은 내가 막연히 상상하던 낭만이나 꿈같은 생활만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웃과 소통하면서 아름다워진다는 걸 갈수록 깨달았다. 윗집 할머니가 콩과 여러 가지 씨앗을 갖다주었다. 그러면서 씨앗을 심을 시기와 어떻게 심어야 하는지, 언제쯤에 비료를 넣어 줘야 하는지 꼼꼼하게 설명해 주었다. 원주민들의 넉넉함이 농사를 짓는 데뿐 아니라 생활에도 도움이 많이 되었다. 마음을 먼저 내어 준 그 보답으로 가끔 모시고 나들이를 하면 노부부는 무척 좋아하고, 먹고살려고 일만 하느라 놀러 한번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고 넋두리도 하셨다. 그렇게 다녀오고 나면 할머니는 또 밭에서 수확한 팥이며 콩이며 지인이 주었다는 액즙까지 골고루 갖다주었다. 부침개라도 부치거나 빵이라도 사 오면 약소하나마 나눠 먹으면서 서로 안부를 묻고, 제대로 잘 자라지 않는 작물에 관해 물어 조언을 받기도 했다. 모르는 걸 물으면 귀찮아할 줄 알고 조심스러웠는데, 오히려 즐거워하면서 대견해했다. 자신이 여태껏 살아온 삶을 누군가에게 가르쳐 주는 것만으로도 즐거우셨나 보다. 세대를 넘어 마음을 나눌 마을 동료가 생겼다는 데서 나 역시 평화를 느꼈다. 마트에서 고르던 채소를 내 손으로 키우면서 만난 세계 텃밭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마트에서 사 먹던 작물을 내 손으로 키워 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장을 보고 치르는 돈이 훨씬 적어지고 생활비 부담도 줄었다. 내 노등으로 키워서 먹는다는 사실도 신기하고 흐뭇하지만, 무엇보다도 밭에서 시간을 보내며 작물이 자라는 모습을 보는 게 무척 보람을 느끼게 했다. 작은 씨앗에서 수많은 열매가 매달리고, 푸성귀가 무럭무럭 자라나는 걸 보면 작은 씨앗 하나가 온 우주를 품고 있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 작은 씨앗에서 어떻게 식물이 무럭무럭 자라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작물의 성장 세계는 내가 알지 못한 무한한 세계였다. 씨앗에서 싹이 트고, 작물이 자라면 내가 반찬으로 뜯어 먹고, 밭에 남은 작물은 저 혼자 자라서 꽃을 피웠다. 그 사이에도 온갖 벌레들이 작물에 들러붙기도 하고, 나비나 벌들이 꿀을 빠느라 부지런히 날아다녔다. 식물에게는 괴로움이면서 즐거움일까. 이 시간을 보낸 덕에 열매를 맺고, 또 작은 씨앗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내 먹거리를 길러 먹는 삶을 통해 자연 순환 원리가 얼마나 위대한지,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세계를 경험하게 되었고 그 덕에 창작 의욕이 새롭게 일어났다. 내 마음에 창작 씨앗이 들어오고, 그 씨앗은 내 마음속에서 무럭무럭 자라 꽃을 피웠다. 물론 포기하고 싶은 순간순간이 오기도 했지만 잘 참으며 열심히 작업했다. 그러고 나니까 결국은 열매를 맺었다. 식물이 자라는 과정과 작은 생각 씨앗이 책으로 나오는 과정이 비슷하다는 걸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어서일까. 글 쓰는 일이 보람되고 견딜 만했다. 흙을 맨손으로 만지면서 나도 모르게 무아의 지경에 빠지게 되었다. 흙이 손에 묻으면서 지저분해지는 게 아니라 계속 만지다 보니까 오히려 내 마음을 정화해 주었다. 살아오면서 겪은 수많은 일들, 그 가운데서도 행복했던 기억보다 속상하고 슬픈 일이 느닷없이 불쑥불쑥 떠올랐다. 나를 슬프게 속상하게 했던 사람들, 왜 그때 바로바로 문제를 제기하고 부당함을 말하지 못했는지 뒤늦게 후회가 되었다. 후회가 내 마음에 상처로 자리 잡고 있었나 보다. 그럴 때 흙을 만지면 상처도 나쁜 기억도 속상했던 일도 시나브로 치유되어 갔다. 일부러 흙을 만지고 싶어 장갑을 끼지 않곤 했는데 엉뚱한 부작용도 생겼다. 면사무소에서 무인발급기로 서류를 떼려고 했는데 기계가 내 엄지손가락 지문을 인식하지 못했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손이 거칠어서 지문이 찍히지 않는다는 말을 공무원에게서 듣고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 비용을 두 배나 치르고 서류를 떼곤 했다. 장갑을 껴야지 했지만 흙만 보면 맨손으로 만졌다. 내 오랜 도시의 때를 벗기고 싶은 마음이 더 컸나 보다. 맨손으로 흙을 만지면 마음이 깨끗해지는 듯했다. 나중에는 손가락이 닳아서 어쩔 수 없이 장갑을 끼기 시작했다.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마을 쓰레기 버리는 요일을 정해서 같이 버리자고 제안했다. 그러면 분리배출도 할 수 있고, 쓰레기도 불에 태우는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다고 구구절절 설명했다. 그래도 시큰둥하기에 날씨와 미세먼지 이야기를 꺼냈다. “해마다 장마 아니면 가뭄이어서 농사짓기 힘들잖아요. 날씨가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서 늘 걱정하면서요. 미세먼지가 너무 많아서 겨울에는 밖에 나가기도 힘들고요.” “아이그, 그것 좀 태우고 버린다고 날씨가 이럴까 봐.” 어른들은 날씨와 공기와 쓰레기 분리배출 사이 관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괜히 어른들한테 잘난 척한 건 아닐까 염려가 되기도 했다. 주거지를 완전히 농사짓는 시골로 옮기고 나서는 기후 문제와 공기 오염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공부를 했다. 언젠가는 환경문제에 대해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고는 차일피일 미루었는데, 막상 시골로 오니까 피부로 눈으로 바로 느낄 수 있었다. 그 심각성도 더 절실하게 깨닫게 되고. 도시에서는 하늘이 좀 흐린 것쯤으로, 비가 좀 많이 내린다는 것쯤으로, 뉴스에서나 책으로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알았다. 그런데 농사를 지어 보고 자연 속으로 들어와 보니까 환경이 얼마나 절실하게 나빠져 가는지 보여 불안하기까지 했다. 마을 할머니들은 밭에 뿌릴 종자 씨는 적어도 3년 정도는 잘 보관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해마다 장마와 가뭄이 번갈아 바뀌면서 자칫 종자도 건지지 못하는 세상이 올지도 몰랐다. 살다 보니까 여러 가지 문제와 부딪혔다. 그 가운데 하나가 쓰레기 문제다. 음식물은 텃밭에 흙을 파고 묻어서 거름으로 만들 수 있지만 다른 쓰레기는 언제 처리해야 하는지 몰랐다. 사람들에게 물어도 쓰레기 수거 차가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면사무소에 전화를 거니까 청소과가 따로 있다면서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었다. 두 번이나 전화를 바꿔 가면서 언제 쓰레기를 거둬 가느냐고 물었는데, 뜻밖의 얘기를 들었다. 내가 사는 마을에는 쓰레기 수거차가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도 쓰레기를 따로 버리지 않아서 차가 들어오지 않는다고. 쓰레기를 분리해서 버리는 게 여태껏 당연한 거라고 여겼는데 여기서는 번거롭게 전화를 걸어야 하고, 요일과 대충 시간을 잡아야 버릴 수 있었다. 어찌나 불편하던지 마을 할머니들한테 쓰레기는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빈 병은 모아 놓으면 고물상에서 가져가고, 음식물은 밭에서 썩혀 거름으로 이용하고, 다른 비닐이나 생활 쓰레기는 통에 넣고 한꺼번에 불 질러 태운다는 것이다.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사는 사람들은 과학이 아니라 몸으로 깨달으면서 자연의 변화를 더 빨리 깨닫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날씨와 쓰레기 분리배출 문제는 따로라고 여기는 데는 변함이 없었다. 환경문제를 처음 접한 게 90년대 초반이었다. 최열 선생님이 ‘공해추방위원회’를 만들어 환경문제 시민 교실을 열었다. 지금 ‘환경연합’이 생기기 전에 생긴 시민단체였다. 아직 문학 수업을 하고 있을 때였는데, 그런 시민 교실 강의가 있으니 함께 공부하러 가 보자고 여럿이 의견을 모았지만 결국은 나와 후배 둘이서만 등록을 했다. 원자력, 핵폭발, 공해 문제를 다룬 강연은 내게 큰 충격을 주었지만, 아직 우리 사회에서는 환경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마치 남의 나라에서만 일어나는 문제로 여겼다. 물론 그즈음에 대구 낙동강 페놀 사건이 한바탕 언론을 달구었지만 한 지역에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으로만 보아 넘겼다. 환경문제 공부를 하러 다닌다니까 오히려 주위에서는 쓸데없는 공부를 다닌다면서 차라리 그 돈으로 술이나 먹자고 했다. 그때는 그런 분위기였다. 그래도 환경 공부를 했다고 실천에 옮기겠다면서 샴푸와 린스를 사용하지 않고 세숫비누로 머리를 감았다. 될 수 있으면 일회용품을 사용하지 않고 물건도 전기도 물도 아껴야 한다는 걸 실천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세숫비누로 감은 머리는 기름기가 많아서 찝찝해 다시 샴푸를 사용하고, 일회용품도 문명의 혜택이라며 편리한 대로 썼다. 물과 전기를 아껴야 한다는 건 어릴 적부터 몸에 익은 습관이었지만, 다른 것은 대충 넘겼다. 환경문제를 강연이나 책을 통해 머리로만 느꼈지, 피부에 와 닿게 내 문제로 여기지 못한 까닭이 아니었을까. 시골로 들어오니 내가 만든 쓰레기를 온전히 다 볼 수 있었다. 더군다나 서해와 가까운 곳이라 겨울철만 되면 미세먼지가 점점 더 하늘을 잿빛으로 뒤덮는 게 눈에 띄었다. 눈에 보이니 그제야 심각성을 좀 느끼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도 한꺼번에 모든 걸 바꾸는 건 정말 어려웠다. 아무리 텃밭에서 먹거리를 생산한다지만 여전히 마트에서도 장을 봐야 하는데, 대파 한 단, 호박 하나를 사도 비닐봉지에 포장되어 있지 않나. 고기를 사도 생선을 사도 두부를 사도 비닐이나 스티로폼 상자에 담겨 있는데 마트에서 장을 보면 어찌 쓰레기를 안 만드나. 예전에는 포장되어 나온 식품을 당연하게 생각했는데 막상 신경을 쓰니까 포장지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그래서 줄일 수 있는 만큼 줄이려고 애썼다. 비닐봉지도 처음에는 10분의 1로 줄여 보자고 했는데, 비닐 홍수 시대에 살다 보니 금세 첫 목표는 이루었다. 그다음은 20분의 1로 줄였지만, 그래도 몽땅 줄일 수는 없었다. 대신 비닐봉지는 재활용할 수 있게 양념이나 다른 이물질이 묻었으면 깨끗이 씻어서 분리해 버렸다. 그런데 포장재를 깨끗이 씻느라 흘러간 물 역시 또 다른 쓰레기가 된다고, 하수 처리에도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쓰인다고, 게다가 분리배출한 생활폐기물이 실제 재활용되는 비율이 60%도 채 안 된다32고 하니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분리배출을 잘하는 일보다 덜 사고 쓰레기를 덜 만드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하게 된다. 자연스레 배달 음식을 일체 사 먹지 않게 되었다. 물론 손쉽게 사 먹을 수도 없는 조건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치킨은 두 마리 시켜야 읍내에서 배달해 준다는 것이다. 굳이 그렇게까지 아득바득 먹어야 하는지 나 자신에게 의문이 들었다. 피자, 족발, 치킨 등등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전화 한 통으로 배달해서 손쉽게 먹던 습관에서 이 기회에 완전히 끊어 버리자는 생각이 들었다. 여태껏 맛있게 먹던 음식을 한꺼번에 끊자니 자꾸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배달을 시켜 먹던 음식에서 가끔 먹고 싶은 욕구가 솟으면 직접 찾아가서 사 왔다. 먹기가 불편해지니까 사 먹는 음식을 많이 줄일 수 있었고, 내 손으로 직접 마련해 먹기 시작했다. 밖에서 사 먹는 음식보다는 솔직히 맛이 덜했다. 온갖 양념과 사람들 입맛에 착 달라붙게 연구해서 만든 음식을 어떻게 따라가겠나 생각하고, 건강과 환경을 챙긴 대신 중독성 있는 양념을 좀 포기하자고 마음먹었다. 배달 음식을 끊고 나자 이번에는 미용실에 꼭 가서 머리카락을 잘라야 하는지 또 의문이 들었다. 머리는 미용실에 가서 해야 한다는 공식이 깨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집에서 스스로 가위로 자르고 들쭉날쭉한 뒤쪽 머리카락은 옆지기에게 부탁해서 잘랐다. 내가 미용실에 드나들지 않자 옆지기도 내게 머리카락을 정리해 달라고 부탁했다. 인터넷에서 머리 자르는 기계를 사서 앞머리 쪽은 남편이 자르고, 뒤에 보이지 않는 쪽은 내가 정리해 주었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솜씨도 늘었다. 시골에서 이렇게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나니 생활비를 줄일 수 있었다. 서로 머리카락을 잘라 주면서 장난도 치고, 얼마나 예쁜지 거울을 들여다보며 킥킥거렸다. 내 존재는 내가 결정한다 2년쯤 지나자 조금씩 시골 생활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다시는 도시로 나가서 아파트에서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도시 집을 정리하고, 세 얻은 집에서 나와 완전히 시골집으로 이사를 했다. 이때쯤에 농사를 더 늘리면서 식량을 자급자족 형태로 바꾸었다. 세상살이는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예전에는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게 지금은 꼭 맞춰 살아야 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들을 만날 때는 될 수 있으면 화장을 해야 하고, 옷과 신발을 갖춰 입어야 하고, 남에게 흠 잡히지 않겠다면서 외출을 할 때 거울이라도 한 번 더 들여다보는 도시 생활. 그게 당연한 건 줄 알았다. 그러나 내 몸에 피부처럼 배인 습관을 하나둘씩 벗어 내면서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쓸데없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내 모습 그대로 편하게 대할 수 있어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물론 도시에 살면서 누가 억지로 그렇게 꾸미고 남에게 잘 보여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사회 분위기와 스스로 만든 굴레에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내가 생긴 대로 나를 드러내기, 외모와 옷으로 평가하는 문화에서 스스로 벗어나기, 겉을 꾸미는 일보다 내 색깔을 찾는 일에 집중하기, 그리고 화학물질로 내 몸을 망가뜨리지 않기. 내 시골살이에서 찾은 지혜들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그동안 미루어 오던 환경문제에 관한 책을 쓰기 시작했다. 나만이 알고 나만이 실천할 게 아니라, 널리 알리면서 함께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하나씩 실천해 나가면 지구 평균기온이 오르는 걸 조금이라도 더 늦출 수 있지 않을까. 도시 삶을 끊으려고 맘먹기까지 많은 핑곗거리와 제약 조건이 퐁퐁 튀어나올 거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럴 때 나에게 진지하게 물어보자. 내 커리어가 내 옆에서 나와 함께 늙어 가는 사람들보다 중요한가? 내 식욕이 나를 지탱하는 이 지구보다 중요한가? 내 외모가 내 건강보다 중요한가? 좀 더 편리한 삶이 내 생존보다 중요한가? 우리 생존을 위협하는 기후위기 상황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답하기를 두려워하는 것뿐. 담대한 결론에 도달하는 일은 이미 우리 안에서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이젠 마음으로 품고 있던 생각에서 실천을 향해 발걸음을 떼면 된다. 그러면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먼저 내 마음과 몸의 자유로움을 얻을 수 있고, 다른 생명을 덜 해칠 수 있고, 또 지구 환경 위기를 해결해 나가는 데 기꺼이 동참할 수 있다. 지금 힘들고 어렵고 세상이 막막하더라도 내 존재의 권리와 행복을 위해서 기꺼이 희망을 품어야 한다. 누가 이렇게 말한 게 내게는 큰 힘이 되었다.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보다도 더 젊어서 무슨 일인가에 원하는 게 있으면 충분히 도전해 볼 수 있다’고. 도전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지금 내 현실이 막막하고 벗어날 수 없는 감옥이라고 여겨지면, 그 감옥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것도 용기이다. 결국은 환경도 나이도 경제적 형편도 내 모든 도전을 지배할 수는 없다. 환경이 힘들고 어렵고 막막하면 그 환경을 바꾸어 사는 삶에 도전해야 한다. 가만히 그대로 환경이 바뀌기를 바라기만 하면, 그런 행운은 좀처럼 오지 않는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먼저 찬찬히 살펴보아야 한다. 내가 원하는 삶이 한꺼번에 이루어지기를 바라지만 말고, 그 방향을 향해 한 발자국 먼저 내딛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나는 내 인생의 주인공이고, 내 존재는 내가 결정한다는 걸 늘 명심해야 한다. 오늘날을 사는 모든 사람에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 김정희 ◌ 귀촌해 농사를 지으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도시라는 욕망과 경쟁에서 벗어나고파 시골을 택했는데, 그동안 머리와 마음으로만 살던 삶에서 몸으로 사는 노동을 병행하는 삶을 이루었습니다. 실천하지 않고 머리로만 사는 삶은 건강할 수 없다고 늘 생각해 왔거든요. 그동안 역사에 관심이 많아 <<국화>>, <<야시골 미륵이>>, <<노근리 그 해 여름>>, <<대추리 아이들>>, <<곡계굴의 전설>> 등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다룬 작품들을 꾸준히 써 왔습니다. 농사를 짓고 살면서 환경 문제에 절실함을 느껴 <<후쿠시마의 눈물>>, <<시화호의 기적>>, <<비닐봉지가 코끼리를 잡아먹었어요>>, <<별이네 옥수수밭 손님들>>, <<아마존의 수호자 라오니 추장>> 등 여러 책을 썼습니다. ** 여러 각주가 있으나 <지리산인> 지면엔 표기하지 않았습니다. 책에서 확인해 주세요. <<벗자편지>> _자급하는 삶을 어렵게 하는 허울을 벗어던지자 • 지은이 : 김혜련, 칩코, 똥폼, 문홍현경, 풀, 상이, 아랑, 김정희 • 펴낸 곳 : 니은기역 • 펴낸 날 : 2022년 11월 22일 • 판형 120*188 / 쪽수 256쪽 • ISBN 979-11-968328-4-1 (03330) 글이 마음에 드신 분은, 동네 도서관에 신청해서 여러 사람이 볼 수 있게 해 주세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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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자편지]함께읽기9 김정희: 바라는 삶을 살고 싶은 해바라기 벗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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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젖줄, 530리 섬진강길 걷기(2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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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젖줄, 530리 섬진강길 걷기(2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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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젖줄, 530리 섬진강길 걷기(1일차)
- 섬진강길 걷기 1일차 ■ 걷기 개요 일시 : 2026년 3월 16일 (월) 총 거리 : 13km 소요 시간 : 약 3시간 ■ 걷기 인원 : 총 16명 ■ 출발지 도착까지 일정 (총 3시간) - 08:00 구례 냉천삼거리 출발 - 데미샘자연휴양림 주차장 도착 (1시간) * 데미샘 휴양림 ↔ 백운면사무소 차량 이동 (1시간) - 10 : 00 휴양림 → 데미샘 이동 (30분) * 데미샘에서 고천제 행사 (30분) ■ 걷기 세부 일정 11:00 데미샘 출발 - 데미샘 -> 백장로 -> 반송마을 (8km / 2시간) 13:20 반송마을 도착 - 반송마을 회관에서 점심 14:20 반송마을 출발 - 무등마을, 덕현교, 백운면사무소 (5km/1시간 20분) 15:40 백운면사무소 도착 - 15:40~16:20 차량 회수 (왕복) 출발 17:20 구례 도착 □ 출발지 주차장 주소 (데미샘자연휴양림 안내소) 전북특별자치도 진안군 백운면 데미샘1길 172 □ 도착지 주차장 주소 (백운면사무소) 전북특별자치도 진안군 백운면 임진로 1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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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거와 화엄매
- 「섬진강 편지」 -솔거와 화엄매 꽃샘바람에 화엄 홍매 꽃잎 진다 한 달여 동안 중생들에게 환한 화엄세상 빛 나눠주고 사르르 꽃잎 지는 날 원통전 처마 밑에 놓인 화엄매 그림 한 폭, 그림 속 화엄매는 아직 꽃잎 생생하여 박새 한 마리 그림 속 가지에 날아가 앉는다 아, 솔거 화공이 화엄사를 다녀가셨구나 그의 숨결이 느껴진다. 참 오랜만에 불러보는 그 이름, 솔거 *솔거 : 통일신라시대 화가로 황룡사 벽에 그린 〈노송도 老松圖〉에는 새들이 앉으려다가 부딪혀 떨어졌는데 세월이 흘러 단청을 했더니 새가 날아들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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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레지 햇꽃
- 「섬진강 편지」 -얼레지 햇꽃 숲에 들어 햇꽃을 본다 해마다 보는 꽃이지만 볼 때마다 새로운 맘으로 기꺼이 꽃 앞에 무릎을 꿇는다 당신에게 당신에게도 그랬어야 했다 -섬진강 / 김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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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좀더 친해져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 ■ 2026 지리산에서 보내는 편지 4 죽음과 좀 더 친해져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얼마 전 구례 공설 자연장지에 다녀왔다. 「지리산사람들」의 멤버였던 지인을 흙으로 보내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49세의 나이에 폐암으로 세상을 버렸다. 자식을 먼저 보낸 어머니의 통곡에 모두가 눈물을 흘리며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돌아오는 차 속에서 슬픔의 감정이 진정되는 즈음에 우리는 죽음을 두렵고 피해야만 한다는 소극적인 삶에서 벗어나 죽음과 좀 더 친해져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삶의 적극성을 생각해 보았다. 생명을 오로지 물질적인 몸으로만 보기 때문에 죽음이란 곧 끝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늘 정신, 마음, 영혼 등을 말하며 생명을 물질로만 인식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죽음은 유한의 시간을 무한의 시간으로 바꾸며 죽음은 공간의 경계를 무한으로 확장 시키는 통로이기도 하다. 죽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물질적인 우주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비물질적인 영역이 같이 존재한다는 생각이다. 그렇듯 삶이 끝나고 죽음이 시작되는 게 아니라 삶과 함께 의식 속에는 항상 죽음이 같이 흐르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영원한 것, 무한한 것, 변하지 않는 것의 실재는 결코 개인적인 것일 수 없지만 업보나 윤회 같은 종교적 세계관을 통해 죽음은 내가 무엇(이승의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어떤 무엇)이 되느냐에 대한 문제로 늘 가까이에 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도 있지만 삶의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 죽음은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반드시 받아들여야 하는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사랑과 진리는 신성의 영역이지만 현실에 존재하듯이 죽음 또한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현재로 초대하고 어쩌면 그것을 사랑이라는 것처럼 동등한 가치의 고귀한 개념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떻게든 의식적으로라도 죽음과 좀 더 친해져야 삶의 균형을 잘 이루게 될 거라는 생각이다. 사진 unsplash의 Diago Nu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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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좀더 친해져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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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세시시를찾아서 - 새벽 세 시
- 새벽 세 시 김 해 화 새벽 세 시는 새벽이 아니그만 밥을 챙겨 묵자니 너무 이른 시간 그냥 나서자니 목숨 걸고 가야 할 길 이백 리 폭염 아래 하루 노동 천근만근 그새부터 짓눌러 오네 이러케 살아서 쓰는 거시냐고 차라리 하루 포기해버리자고 주저앉다가 다시 일어서네 하루가 쌓여 이틀이 되고 한 달이 되고 한 해가 되지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을 쌓아도 쌓아 올려도 밑바닥 그런다고 무너지는 삶이 일어서는 삶을 뒤덮지는 못해 악착같이 견디는 하루가 내 삶의 높이 물 한 그릇 마시고 다시 물 한 그릇 마시고 새벽 세 시 캄캄한 세상으로 나선다 새벽이 따로 있나 새벽일 가는 사람들이 나서는 때가 새벽 더듬더듬 걷다 보면 하늘이 밝아오겠지 내가 동녘을 향하지 않아도 살몃걸음으로 찾아온 아침은 등 뒤에서 세상을 밝힐 거야 ----------------------------------------------- 김해화는 젊어서부터 철근 노동을 하며 시를 써 왔다. 한때는 노동자 시인으로 문단에서 주목받기도 했으나 그는 나이 고희에 이르렀어도 먹고 살기 위해 일을 다닌다. ‘무너지는 삶이 일어서는 삶을 뒤덮지는 못’ 한다는 생활 철학이 그를 뒷받침하듯이 그는 완강하게 철근을 휘는 의지로 무너지지 않고 세상을 살아왔다. 자연스럽게 마음을 우주의 중심에 놓고 평정심을 잃지 않은 삶을 일궈낸 것이다. 새벽 세 시에 물 한 모금 마시고 이백리 일터로 나가는 칠십 노구에도 희망을 놓지 않고 노래한다. ‘새벽이 따로 있나/ 새벽일 가는 사람들이 나서는 때가 새벽/ 더듬더듬 걷다 보면 하늘이 밝아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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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조루 흰목련
- 「섬진강 편지」 -운조루 흰목련 해마다 기다리는 꽃, 250년 고택 운조루 목련이 폈다 운조루 목련꽃이 특별한 꽃은 아니지만 고택 검은 기와와 어울려 흰 목련의 운치가 있다. 그렇지만 그 운치가 다는 아니다. 목련꽃 그늘 아래 반짝이는 장독대, 이웃 하사마을에서 시집을 와 73년째 운조루를 지키는 종부의 손길이 반짝이는 장독대와 어우러져 운조루 목련꽃빛은 종갓집 묵은 장맛이 스민 빛을 만들어낸다. 저 상사 사는 아무개입니다. 전동휠체어를 타고 대문간에 나와 앉은 종부께 인사를 드리는데 올해도 몰라보신다. 상사 토백이는 아닌디! 총기는 여전히 총총하시다. -김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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