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2-23(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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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늘
    바늘 김 경 옥 쇠를 갈고 남은 몸이다 매끈한 은빛 몸매 뾰족한 침 끝, 더는 아무것도 없다 저 침에 닿을 때까지 사방 팔방 십이방 모서리 없어지고 이웃마저 사라질 때까지 얼마나 제 몸을 깎아냈을까 이 악물고 덜어내어 물러설 수 없는 절벽에 이르렀을까 갈고 닦는 일의 무한함이여 깎고 덜어내는 일의 은은한 아픔이여 가는 몸속에서 들리는 소리 하나에 기울이며 작은 귀 하나만 열어놓은 세월이여. --------------------------------------------------------------- 죽을 때까지 배우는 것이 사람의 일이라는 말은 그저 지식을 말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사실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이 무엇이며 왜 존재하고 있으며 이 세상은 또 무엇인가 하는 궁극적 질문을 안고 사는 존재다. 세상을 살아내는 일의 첫 번째가 나의 존재와 나를 존재하게 하는 이 세상이 무엇인지를 가늠하는 일일 것이다. 느티나무의 작은 박새 한 마리도 알에서 깨어나 날개를 퍼덕이며 제가 날짐승인지 들짐승인지부터 가늠하고 바람이 불면 어디로 날아야 한다는 것을 눈치 채며 자란다. 그렇게 모든 생명은 구체적 생활세계 속에서 자기 존재와 세상을 일치시켜내는 것이 세상을 살아내는 일인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 그 답을 말하고 죽는다. 태어나 죽기까지의 삶 자체가 스스로의 답일 것이니 그렇다. 다시 말하면 삶에는 정답이 없고 우리는 스스로를 살다가 죽을 뿐이다. (박두규. 시인)
    • 지리산문화
    • 시를 찾아서
    2023-11-13
  • 겨울 산에서
    ■ 시 겨울 산에서 이건청 나는 겨울 산이 엄동의 바람 속에서 꼼짝도 못하고 서서 겨울밤을 견디고 있는 줄만 알았다. 겨울 산 큰 그늘 속에 빠져 기진해 있는 줄만 알았다. 겨울 산 작은 암자에 며칠을 머물면서 나는 겨울 산이 살아 울리는 장엄한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대개 자정을 넘은 시간에 시작되곤 했는데 산 아래, 한신계곡이나 칠선계곡 쪽을 지나 대원사 스쳐 남해 바다로 간다는 지리산 어느 골짜기 물들이 첫 소절을 울리면 차츰 위쪽이 그 소리를 받으면서 그 소리 속으로 섞여 들곤 하였는데 올라오면서 마천면 농협 하나로마트 지나 대나무 숲을 깨우고 산비탈, 마천 사람들의 오래된 봉분의 묘소도 흔들어 깨우면서 골짜기로 골짜기로 올라오는 것이었다. 오를수록 그 소리는 점점 더 곡진한 하모니를 이루는 것이었는데 산 중턱을 넘어서면서 홍송들이 백 년, 이 백년씩 그들의 가지로 서로의 어깨를 걸친 채 장대한 비탈을 이루고 있는 곳까지 와서는 웅장한 코러스가 되는 것이었다. 그 소리는 내가 사순절의 어느 날, 대성당에서 들었던 그레고리 찬트의 높은 소절과 낮은 소절이 번갈아 마주치는 어느 부분과 같았다. 이따금 이 산에 사는 산짐승들이 대합창의 어느 부분에 끼어들기도 하는 것 같았는데 그때마다 그레고리 찬트 속에서 짐승들의 푸른 안광이 빛나곤 하였다. 겨울 산이 울려내는 대합창이 온 산을 울리다가 서서히 함양 쪽으로 잦아들 때쯤 건너 쪽 지리산 반야봉, 제석봉의 윤곽도 밝아오는 것이었는데 날이 밝고 산의 윤곽들이 선연해지면 자작나무도 굴참나무도 그냥 추운 산의 일부로 돌아가 원래의 자리에 가지를 늘어뜨리고 서는 것이었다. 그냥 겨울 산이 되어 침묵 속으로 잠겨드는 것이었다.
    • 지리산문화
    • 시를 찾아서
    2023-02-26

실시간 시를 찾아서 기사

  • 파랑 또는 파란
    파랑 또는 파란 송태웅 뒤뜰을 바다로 깔았다 하여 내 뒤뜰로는 파랑도 끼룩거리는 철새처럼 밀려오는 것인데 나의 배후가 짙푸르게 물들어 끊임없이 출렁인다 해도 당신은 그 어느 피안에서 흰 주단을 덮고 눕길 바란다 생은 한 필지의 주민등록지 위에 내리는 폭우와 싸워나가는 것 내 영혼이 노쇠한 낙타처럼 더 이상은 어디로도 갈 수가 없을 때 비로소 생은 신생 교회의 거대한 십자 네온사인 같은 헛된 경전을 집어던지고 겨우 허름해질 수 있는 것 생애 처음으로 내게 온 남루여 뒤뜰 토란잎에 맺힌 물방울처럼 고요히 내려앉은 파란이여 --------------------------------------------- 지리산 자락에 들어온 송태웅 시인의 삶의 또는 의식의 현주소가 변하는 과정을 잘 드러내주고 있는 시다.몸도 마음도 바닥을 치고 있는 엄정한 현실 속에서 그는 가식과 위선의 헛된 지난 세월을 집어 던지고 허름한 마음으로 현실의 가난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그러자 그 신산스럽던 가난도 파란만장한 인생도 토란잎의 물방울처럼 고요히 내려 앉아 영롱하다. 그는 달라진 자신의 현실을 삶의 새로운 영역으로 받아들이고 있고 그 가난이 비로소 ‘삶의 실재’를 살게 하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의 삶으로부터 오는 빛나는 각성과 성찰이다. 그리고 시인은 자신의 삶의 배후에는 물결처럼 끝없이 밀려오는 ‘파랑’이 있다고 말한다. 자본의 사회를 사는 사람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죽음도 아닌 가난이라고 하는 세상에서, 가난은 무능함이고 비천함이며 장애라고 말하고 있는 세상에서, 그런 가난에 휘둘리지 않고 가난을 보듬어낼 수 있는 것으로 자신의 배후에는 ‘파랑’이 있다고 말한다. 그 파랑은 바닥을 치고 있는 자신의 몸과 마음의 현재를 치유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 ‘파랑’은 뒤뜰의 작물들이든 자연이든 농사든 시골이든 무엇이든 어쨌든 생명의 근원에 닿아있는 무엇일 것이다.
    • 지리산문화
    • 시를 찾아서
    2024-02-09
  • 생명평화 기도문
    생명평화 기도문 박 두 규(시인) 내 안의 신성한 빛이 스스로 피어나 나를 밝게 하고 혼탁한 세상에 그 빛을 더하소서. 강가의 돌멩이가 하릴없이 물결에 쓸리는 일이나 꿀벌 한 마리가 태어나 죽는 일이 모두 우주의 질서이고 리듬인 것을 알게 하소서. 지상으로 떨어지는 도토리 한 알의 무게와 자욱한 안개 속 강을 건너는 새 떼들, 잠 못 이루는 그대의 슬픔까지도 모두가 평형을 이루게 하는 우주의 저울이며 일상의 평정심임을 알게 하소서. 수평의 저울이 기울고 우주의 리듬을 깨는 것은 오로지 나를 묶고 있는 나의 마음 때문이니 평화로운 마음의 집이 무너지는 것이나 종일토록 조울躁鬱 속 혼란의 시간이 흐르는 것은 내 탓이고 또 내 탓인 것을 알게 하소서.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처럼 사소한 슬픔과 기쁨에도 우주가 흔들린다는 걸 알게 하소서. 두려움에 휩쓸려 깊은 어둠의 숲을 헤맬지라도, 단호하게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처럼 스스로 벗어나 먼바다의 수평을 볼 수 있게 하시고 가여워하는 마음을 일으켜 스스로를 품어내게 하소서. 그리고 生의 균형감각을 찾아 우주질서의 대열에 들어 다시금 빛이 되게 하소서. 모든 생명은 스스로 사랑 그 자체이고 세상의 모든 일은 사랑으로 비롯되는 것임을 알게 하소서. 또한 매일매일 언제나 해가 뜨는 일처럼 태어나는 순간부터 나의 사랑은 완벽하니 그 절대의 사랑을 의심하거나 부정하지 않게 하소서. 그리하여 내가 먼저 고마워하고 내가 먼저 미안해하고 내가 먼저 용서를 구하고 내가 먼저 피와 땀을 나누고 내가 먼저 상대방을 지극정성으로 섬기는 일이 그것이 내 사랑이며 신성임을 알게 하소서. 내 안의 신성한 빛이 스스로 피어나 나를 밝게 하고 혼탁한 세상에 그 빛을 더하소서.
    • 지리산문화
    • 시를 찾아서
    2024-01-09
  • 사랑 무렵
    사진 김인호 - 지리산 반야봉
    • 지리산문화
    • 시를 찾아서
    2023-12-07
  • 바늘
    바늘 김 경 옥 쇠를 갈고 남은 몸이다 매끈한 은빛 몸매 뾰족한 침 끝, 더는 아무것도 없다 저 침에 닿을 때까지 사방 팔방 십이방 모서리 없어지고 이웃마저 사라질 때까지 얼마나 제 몸을 깎아냈을까 이 악물고 덜어내어 물러설 수 없는 절벽에 이르렀을까 갈고 닦는 일의 무한함이여 깎고 덜어내는 일의 은은한 아픔이여 가는 몸속에서 들리는 소리 하나에 기울이며 작은 귀 하나만 열어놓은 세월이여. --------------------------------------------------------------- 죽을 때까지 배우는 것이 사람의 일이라는 말은 그저 지식을 말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사실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이 무엇이며 왜 존재하고 있으며 이 세상은 또 무엇인가 하는 궁극적 질문을 안고 사는 존재다. 세상을 살아내는 일의 첫 번째가 나의 존재와 나를 존재하게 하는 이 세상이 무엇인지를 가늠하는 일일 것이다. 느티나무의 작은 박새 한 마리도 알에서 깨어나 날개를 퍼덕이며 제가 날짐승인지 들짐승인지부터 가늠하고 바람이 불면 어디로 날아야 한다는 것을 눈치 채며 자란다. 그렇게 모든 생명은 구체적 생활세계 속에서 자기 존재와 세상을 일치시켜내는 것이 세상을 살아내는 일인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 그 답을 말하고 죽는다. 태어나 죽기까지의 삶 자체가 스스로의 답일 것이니 그렇다. 다시 말하면 삶에는 정답이 없고 우리는 스스로를 살다가 죽을 뿐이다. (박두규. 시인)
    • 지리산문화
    • 시를 찾아서
    2023-11-13
  • 다정한 것에 대하여
    다정한 것에 대하여 김 영 춘 산봉우리에 형제봉이니 자매봉이니 하는 이름을 붙여놓고 살던 사람들이 있다. 행여 사이가 좋지 못할까봐 형제자매들까지 데려다 놓고는 오래오래 그렇게 부르고 싶었을 것이다. 전주의 동학혁명기념관 앞에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늙어가면서 전봉준 김개남 이런 사람들의 눈빛을 지켜보고 있는데 무너지는 몸을 겨우 이기는 그 곁으로 열대여섯 살쯤 됐을까 싱그러운 어린 은행나무가 나란히 서 있다. 요즘 식으로 유전자를 따라가 봤더니 늙은 어머니가 틀림없다고 한다. 아비도 없이 어찌 아이만 남았을까 우금치 전투가 아직 끝나지 않아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어느 날 두 은행나무를 바라보며 앉아 있다가 사람처럼 어미와 아비를 떠올리다가 형제봉이나 자매봉을 불러보던 시간들이 그리 간단해 보이지가 않아서 몸이 슬슬 떨려오기도 했다 이 나라의 슬픔으로는 아비가 돌아오지 않는 동안에 어린 것이 어미 곁에 홀로 서 있는 정도는 되어야 인간사의 다정이 제대로 피어나는 것인가 꼭 그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것인가 동학혁명기념관 앞에도 봄이 왔으므로 할아버지와 손자라면 더 어울릴 법한 두 은행나무가 어미와 자식으로 나란히 잎을 피운다 둘이서도 잘 피운다 다정하기가 그지 없다 슬픔도 그 뒤를 따라가고 싶어서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하다 -------------------------------------------- 다정한 것에 대하여.. '다정'이라는 단어가 먼저 와 닿는다. 다정이 참으로 목마른 시절이어서 그런가, 나만 그런 지는 모르겠으나 요즘 사람들을 만나다보면 이 '다정함'을 느끼기가 참 어렵다. 세상이 무서운 세상이 되어서 그런지, 사람들 스스로가 그런 사람들이 되어서 그런지, 보이지 않는 어떤 단단한 경계를 가지고들 사는 것 같다. 쉽게 가까워져서 스스로 무장한 세상벽을 헐어내는 일이 매우 어렵다. 이 시는 전주의 유명한 보호수 천년 은행나무의 이야기인데 그 인간사의 애정이 참으로 애잔하다. 우리가 사는 이 나라의 '다정'은 슬픔을 꼭꼭 감추고 있는 다정이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아프고 슬픈 다정함이 더 깊은 울림으로 온다. 왠지 더 우리네 다정함 같아서 그렇다. (박두규. 시인)
    • 지리산문화
    • 시를 찾아서
    2023-10-09
  • 반내골 정씨
    반내골 정씨 박두규 구례를 떠나지 않았던 그의 마음을 이제는 조금 알만도 하다. 구례의 해방구 시절 이후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지만 그 시절을 기억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산은 끝내 산으로 남아 흐르는 세월을 견디면 그뿐이지만 사람의 한 세월은 끝내 머물고 마는가. 광주옥사를 나온 정씨는 놀림받는 빨찌산의 딸을 데리고 서울로 순천으로 떠돌다가 탯줄을 묻은 반내골에 다시 들어왔다. 꿈이라고 말하기엔 저 산들이 너무 가까이에 있고 동지였던 아내의 몸은 너무 무너져 있었다. 이제는 자본의 세월이 만들어준 평범한 촌로의 모습으로 시골 아파트 관리인이 되었건만 관리실에 앉아 조간신문을 뒤적이다 문득 고개를 들면 눈 덮인 노고단 너머로 희뿌연 하늘이 아른거리곤 했다. 누구에게나 한 시절이 있는 거라며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면 이렇게 남아 있을 까닭도 없었다. 스스로 지울 수도 지울 필요도 없는 그 한 시절이 그리워서도 아니었다. 살랑이는 겨울강의 풋바람을 맞으며 걸어도 아직은 선선히 내놓을 목숨에 이르지 못했고 굼틀리는 산자락의 햇살을 보면 늙어빠진 몸뚱 어느 구석 이념도 사상도 아닌 사무치는 능선들이 아직도 따라서 굼틀리고 있기 때문이다.
    • 지리산문화
    • 시를 찾아서
    2023-07-13
  • 대답해 보아라
    대답해 보아라 관옥 사람이 없어도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나무가 없으면 사람은 숨도 못 쉰다 그래도 사람이 나무보다 크냐? 사람이 없어도 강은 유유히 흐른다 강물이 없으면 사람은 목 말라 죽는다 그래도 사람이 강보다 크냐?
    • 지리산문화
    • 시를 찾아서
    2023-06-10
  • 지리산에 들어가면
    지리산에 들어가면 고 은 지리산에 들어가면 살 수 있습니다 운봉 구례 하동 대원사 달려와 지리산에 가면 살 수 있습니다 도저히 살 수 없는 사람일지라도 거기 가면 살 수 있습니다 총 쏘아 그 총소리 수십 개 메아리로 다할 수 없는 산 지리산에 가면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지리산에 들어오면 싸울 수 있습니다 시대와 맞서 고려 강토의 젊은이 철철이 모여들어 이제 바람치는데 원수를 향하여 나갈 수 있습니다 아무리 천치 백치일지라도 여기 오면 동토 싸우는 사람 아니고는 안됩니다 목숨 바쳐 온통 핏방울 튀는 사람입니다 널린 꽃과 잎이여 여기가 온통 무덤입니다 그리하여 지리산에 들어가면 몇천 년 내내 세우려 했던 그 나라를 세울 수 있습니다 9만 리 하늘 가득히 아침햇살 퍼지는데 저 천지개벽의 골짜기마다 능선마다 아침 안개 잠겨 그 아래로 수많은 아이들이 뛰놀고 있습니다 바로 그 나라를 세울 수 있습니다 그 나라를 세울 수 있습니다 -화엄골/김인호
    • 지리산문화
    • 시를 찾아서
    2023-04-09
  • 겨울 산에서
    ■ 시 겨울 산에서 이건청 나는 겨울 산이 엄동의 바람 속에서 꼼짝도 못하고 서서 겨울밤을 견디고 있는 줄만 알았다. 겨울 산 큰 그늘 속에 빠져 기진해 있는 줄만 알았다. 겨울 산 작은 암자에 며칠을 머물면서 나는 겨울 산이 살아 울리는 장엄한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대개 자정을 넘은 시간에 시작되곤 했는데 산 아래, 한신계곡이나 칠선계곡 쪽을 지나 대원사 스쳐 남해 바다로 간다는 지리산 어느 골짜기 물들이 첫 소절을 울리면 차츰 위쪽이 그 소리를 받으면서 그 소리 속으로 섞여 들곤 하였는데 올라오면서 마천면 농협 하나로마트 지나 대나무 숲을 깨우고 산비탈, 마천 사람들의 오래된 봉분의 묘소도 흔들어 깨우면서 골짜기로 골짜기로 올라오는 것이었다. 오를수록 그 소리는 점점 더 곡진한 하모니를 이루는 것이었는데 산 중턱을 넘어서면서 홍송들이 백 년, 이 백년씩 그들의 가지로 서로의 어깨를 걸친 채 장대한 비탈을 이루고 있는 곳까지 와서는 웅장한 코러스가 되는 것이었다. 그 소리는 내가 사순절의 어느 날, 대성당에서 들었던 그레고리 찬트의 높은 소절과 낮은 소절이 번갈아 마주치는 어느 부분과 같았다. 이따금 이 산에 사는 산짐승들이 대합창의 어느 부분에 끼어들기도 하는 것 같았는데 그때마다 그레고리 찬트 속에서 짐승들의 푸른 안광이 빛나곤 하였다. 겨울 산이 울려내는 대합창이 온 산을 울리다가 서서히 함양 쪽으로 잦아들 때쯤 건너 쪽 지리산 반야봉, 제석봉의 윤곽도 밝아오는 것이었는데 날이 밝고 산의 윤곽들이 선연해지면 자작나무도 굴참나무도 그냥 추운 산의 일부로 돌아가 원래의 자리에 가지를 늘어뜨리고 서는 것이었다. 그냥 겨울 산이 되어 침묵 속으로 잠겨드는 것이었다.
    • 지리산문화
    • 시를 찾아서
    2023-02-26
  • 세석고원을 넘으며
    세석고원을 넘으며 고 정 희 아름다워라 세석고원 구릉에 파도치는 철쭉꽃 선혈이 반짝이듯 흘러가는 분홍강물 어지러워라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고 발아래 산맥들을 굽어보노라면 역사는 어디로 흘러가는가 산머리에 어리는 기다림이 푸르러 천벌처럼 적막한 고사목 숲에서 무진벌 들바람이 목메어 울고 있다 나는 다시 구불거리고 힘겨운 길을 따라 저 능선을 넘어야 한다 고요하게 엎드린 죽음의 산맥들을 온몸으로 밟으며 넘어가야 한다 이 세상으로부터 칼을 품고 그러나 서천을 물들이는 그리움으로 저 절망의 능선들을 넘어가야 한다 막막한 생애를 넘어 용솟는 사랑을 넘어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는 저 빙산에 쩍쩍 금가는 소리 들으며 자운영꽃 가득한 고향의 들판에 당도해야 한다 눈물겨워라 세석고원 구릉에 파도치는 철쭉꽃 선혈이 반짝이듯 흘러가는 분홍강물 어지러워라 고정희 시인(1948~1991) 본명 성애, 전남 해남 출신, 5남 3녀의 장녀로서 거의 독립적으로 성장.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였으며, 1975년 {현대시학}을 통해 문단에 나왔다. 광주 YMCA 대학생부 간사, 크리스찬 아카데미 출판부 책임간사를 거치는 동안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문제의식과 함께 "그 이상의 어떤 본질 문제를 환기시키는,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김주연 평) 시들을 써왔다.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평민사, 1979), {실락원}(인문당, 1981 절판), {초혼제}(창작과 비평사, 1983), {이 시대의 아벨}(문학과 지성사, 1983), {눈물꽃}(실천문학사, 1986), {지리산의 봄}(문학과 지성사, 1987), {저 무덤 위의 푸른 잔디}(창작과 비평사, 1989), {Sister's We Are the Path and the Light}(둥지, 1989), {광주의 눈물비}(동아, 1990), {여성해방출사표}(동광출판사, 1990), {아름다운 사람 하나}(들꽃세상, 1990), {뱀사골에서 쓴 편지}(미래사, 1991),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창작과 비평사, 1992) 등을 통해 어떤 상황 속에서도 쉽게 절망하지 않는 강한 의지와 함께 생명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노래했다. 그는 5.18 광주 항쟁을 계기로 전통적인 남도 가락과 씻김굿 형식을 빌어 민중의 아픔을 드러내고 위무하는 장시들을 잇달아 발표했다. 가정법률상담소 출판부장으로 일하면서 여성 문제에 눈을 뜨기 시작, 1984년 대안 문화 운동 단체인 [또 하나의 문화] 창립에 참여, 이후 적극적인 동인 활동과 함께 한국 여성 해방 문학의 지평을 넓히는 데 큰 몫을 담당했다. 1989년에는 여성 해방을 지향하는 여성들의 자발적인 출연으로 창간된 여성 정론지 {여성신문}의 초대 주간을 맡아 1년간 그 기틀을 다지는 데 기여하였으며, {저 무덤 위의 푸른 잔디}(1990)에서는 여성의 삶과 수난을 통하여 인류 해방의 비전을 제시하는 등 왕성한 창작열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1991년 6월 8일, 한국 여성 해방 문학의 정립을 위한 작업의 하나로서, [또 하나의 문화] 월례 논단에서 "여성주의 리얼리즘과 문체 혁명"을 주제로 발표를 마치자마자 평소 그의 시의 모태가 되어 온 지리산 등반을 감행, 이튿날 뱀사골에서 실족, 43세를 일기로 불타던 삶을 마감하였다. ( 또 하나의 문화 자료 참조)
    • 지리산문화
    • 시를 찾아서
    2023-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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