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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
- 바늘 김 경 옥 쇠를 갈고 남은 몸이다 매끈한 은빛 몸매 뾰족한 침 끝, 더는 아무것도 없다 저 침에 닿을 때까지 사방 팔방 십이방 모서리 없어지고 이웃마저 사라질 때까지 얼마나 제 몸을 깎아냈을까 이 악물고 덜어내어 물러설 수 없는 절벽에 이르렀을까 갈고 닦는 일의 무한함이여 깎고 덜어내는 일의 은은한 아픔이여 가는 몸속에서 들리는 소리 하나에 기울이며 작은 귀 하나만 열어놓은 세월이여. --------------------------------------------------------------- 죽을 때까지 배우는 것이 사람의 일이라는 말은 그저 지식을 말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사실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이 무엇이며 왜 존재하고 있으며 이 세상은 또 무엇인가 하는 궁극적 질문을 안고 사는 존재다. 세상을 살아내는 일의 첫 번째가 나의 존재와 나를 존재하게 하는 이 세상이 무엇인지를 가늠하는 일일 것이다. 느티나무의 작은 박새 한 마리도 알에서 깨어나 날개를 퍼덕이며 제가 날짐승인지 들짐승인지부터 가늠하고 바람이 불면 어디로 날아야 한다는 것을 눈치 채며 자란다. 그렇게 모든 생명은 구체적 생활세계 속에서 자기 존재와 세상을 일치시켜내는 것이 세상을 살아내는 일인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 그 답을 말하고 죽는다. 태어나 죽기까지의 삶 자체가 스스로의 답일 것이니 그렇다. 다시 말하면 삶에는 정답이 없고 우리는 스스로를 살다가 죽을 뿐이다. (박두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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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산에서
- ■ 시 겨울 산에서 이건청 나는 겨울 산이 엄동의 바람 속에서 꼼짝도 못하고 서서 겨울밤을 견디고 있는 줄만 알았다. 겨울 산 큰 그늘 속에 빠져 기진해 있는 줄만 알았다. 겨울 산 작은 암자에 며칠을 머물면서 나는 겨울 산이 살아 울리는 장엄한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대개 자정을 넘은 시간에 시작되곤 했는데 산 아래, 한신계곡이나 칠선계곡 쪽을 지나 대원사 스쳐 남해 바다로 간다는 지리산 어느 골짜기 물들이 첫 소절을 울리면 차츰 위쪽이 그 소리를 받으면서 그 소리 속으로 섞여 들곤 하였는데 올라오면서 마천면 농협 하나로마트 지나 대나무 숲을 깨우고 산비탈, 마천 사람들의 오래된 봉분의 묘소도 흔들어 깨우면서 골짜기로 골짜기로 올라오는 것이었다. 오를수록 그 소리는 점점 더 곡진한 하모니를 이루는 것이었는데 산 중턱을 넘어서면서 홍송들이 백 년, 이 백년씩 그들의 가지로 서로의 어깨를 걸친 채 장대한 비탈을 이루고 있는 곳까지 와서는 웅장한 코러스가 되는 것이었다. 그 소리는 내가 사순절의 어느 날, 대성당에서 들었던 그레고리 찬트의 높은 소절과 낮은 소절이 번갈아 마주치는 어느 부분과 같았다. 이따금 이 산에 사는 산짐승들이 대합창의 어느 부분에 끼어들기도 하는 것 같았는데 그때마다 그레고리 찬트 속에서 짐승들의 푸른 안광이 빛나곤 하였다. 겨울 산이 울려내는 대합창이 온 산을 울리다가 서서히 함양 쪽으로 잦아들 때쯤 건너 쪽 지리산 반야봉, 제석봉의 윤곽도 밝아오는 것이었는데 날이 밝고 산의 윤곽들이 선연해지면 자작나무도 굴참나무도 그냥 추운 산의 일부로 돌아가 원래의 자리에 가지를 늘어뜨리고 서는 것이었다. 그냥 겨울 산이 되어 침묵 속으로 잠겨드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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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 아래서
- 은행나무 아래서 조 영 옥 가장 찬란란 모습으로 제 몸을 던지는 은행나무 아래서 한 잎 두 잎 허공 중의 은행잎과 작별을 했다 가야할 길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소멸 속에서 생명을 얻는 자 생명을 통해 소멸에 이르는 자 세상은 둘이라 생각했다 오래토록 그렇게 서 있었다 세상은 어두워지고 문득 고개를 들면 하늘을 가로지르는 영겁의 길 이별은 서로가 하나가 되는 것 만남은 그대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렇듯 은행잎과 내가 다르지 않아 은행나무 아래서 나도 나무가 되었다 ------------------------------------------------------------------------------------ 1990년 경은 사회적으로 민주와 반민주의 구도 속에서 군사독재정권과의 선명한 전선이 형성되어 민주와 통일의 큰 변혁의 물꼬가 터져 흐르던 격동의 시기였다. 그때만 해도 조영옥은 해직교사로서 교육운동을 했던 걸출한 여전사로서의 이미지가 강했고 시를 쓰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녀의 시에는 조직활동가로 살아온 세월 속에서 단련된 대담함과 성실성, 소탈함과 겸허함, 그리고 늘 스스로를 성찰하고 반성하는 일상 속 삶이 잘 녹아있다. 이 시는 가을빛의 중심에 있는 은행나무 아래서 떨어지는 은행잎들을 보며 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를 사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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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거獨居
- 독거獨居 이 원 규 남들 출근할 때 섬진강 청둥오리 떼와 더불어 물수제비를 날린다. 남들 머리 싸매고 일할 때 낮잠을 자다 지겨우면 선유동계곡에 들어가 탁족을 한다. 미안하지만 남들 바쁘게 출장 갈 때 오토바이를 타고 전국 일주를 하고 정말이지 미안하지만 남들 야근할 때 대나무 평상 모기장 속에서 촛불을 켜놓고 작설차를 마시고 남들 일중독에 빠져 있을 때 나는 일없어 심심한 시를 쓴다. 그래도 굳이 할 일이 있다면 가끔 굶거나 조금 외로워하는 것일 뿐 사실은 하나도 미안하지 않지만 내게 일이 있다면 그것은 노는 것이다. ------------------------------------------------------- 시인이 은유한 ‘가끔 굶는 것과 조금 외로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원규 시인이 삶의 현실에서 가장 비중 있게 지향하고 있는 그 무엇이다. 나는 그것을 인간적 욕망을 벗어나 존재의 본연을 찾아가려는 구도자적 지향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내가 볼 때 이원규는 구도자가 되는 것이 목표는 아니다. 혼자 떠돌며 살아가는 것으로 보아 훌훌 털어 버렸을 것 같은 세속의 질긴 인연들도 사실은 자신의 내면에서 늘 데리고 다니는 것들이고, 시대적 현실문제도 나몰라라하고 도망치며 살아온 사람이 아니다. 이처럼 그는 탈속하지 않으면서도 그 지향은 구도의 길이다. ‘가끔 굶는 것과 조금 외로워하는 것’에서 ‘굶는 것’은 풍요로움을 추구하는 구체적 생활세계에서 자신을 앞질러 가려는 세속적 욕망을 끊어주는 것이요, ‘외로워하는 것’은 앞서 말한 존재의 본질적 외로움이며 또한 바쁜 현실 속에서 자신을 잃고 사는 현대인들은 존재의 본연인 자아를 만나야 한다는 당위적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가끔’과 ‘조금’의 수식이 의미하는 것은 그럼에도 그것에 전격적으로 매달려 구도자의 길을 가는 것보다는 주어진 세속의 세월을 부대끼며 살아내야 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인간이라는 점을 깊이 깨달은 것이라고 본다. (박두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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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읍 장미 나이트 클럽
- 구례읍 장미 나이트 클럽 - 박 두 규 구례에 첫발을 디딘 1986년에도 번잡한 장터거리 끄트머리에 있었지 입구의 골목에 빨간 넝쿨장미가 피어 있는 일반 가정집 같은 장미 나이트클럽 키 큰 사람이 손을 올리면 천장에 닿는 손바닥만 한 나이트클럽 대여섯 식탁의 홀에 룸도 하나 딸려 있어 장날이면 견우와 직녀가 된 광의면 홀애비와 문척면 홀엄씨가 술잔을 훌쩍이며 손을 잡고 신세타령도 할 만한 구례읍 장미 나이트클럽 읍내에서 어울리던 늙은 한량 중 한 명이 가족을 따라 미쿡으로 영영 들어간다고 송별식을 위해 장미 나이트클럽을 통째로 빌렸는데 흰머리, 벗은 머리 여나뭇 모이니 홀이 꽉 찬다 장에서 사 온 순대와 회무침, 김밥을 벌여 놓고 음주가무에 판이 어우러지니 석별의 정인들 따로 있을까 파장 술에 취해 늘 그러하듯 취하면 그만인 것을 어쩌면, 한 치 앞을 모르고 더듬거리며 사는 것이 인생이어서 부는 바람 홀로 맞아내는 것이 사람의 일이기도 해서 그렇게 오늘도 섬진강의 노을이 붉다 어두워진 지리산의 공제선이 더욱 또렷하다 장미 나이트클럽의 쌍팔년도 장밋빛 붉은 사랑 불현듯 한 생이 그처럼 지나간다 구례읍 한량들이 그렇게 또 취해간다 --------------------------------------------------------- 읍내 장터거리의 끄트머리에 이 나이트클럽이 있다. 지나갈 때마다 젊은 날 나이트클럽(고고장)에 가고 싶어서 친구들과 함께 공사판 노가대 일을 다녔던 일이 생각나는 곳이다. 입구에 덩쿨장미가 피어있고 텃밭이 딸려있는 가정집처럼 보여서 묘하게도 애틋한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구례에 산 날들이 20년 가까이 되지만 올해에서야 처음으로 우연한 기회로 들어가 보게 되었다. 그래서 시도 한 편 쓰게 되었다. 이 시를 페북에 올리려고 나이트클럽 야경을 찍으러 갔는데 밤 10시경, 나이트 클럽의 영업이 이제 막 시작되는 시간이어야 할 텐데 벌써 영업이 끝나 간판의 불이 꺼져있었다. 나이트라는 말이 무색하게 행인 하나 없는 거리에 가로등 불빛만 가물거리고 있었다. 요즘 시골의 밤 풍경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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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짓기
- 집짓기 김 영 언 집을 짓는다 허공에 벽을 둘러치고 길을 막고 하늘을 가린다 바람의 길이었으나 구름의 정원이었으나 하늘을 덮고 서서 자는 벚나무의 잠자리였으나 욕망의 높이만큼 견고하게 구획을 짓고 나무의 잠을 쓰러뜨린다 이 세상 잠시 꿈의 밀실을 꾸미기 위해 층층이 벽돌을 쌓아 올린다 지상을 밀어 올려 구름 같은 삶을 세웠으나 비로소 허공을 차지하였으나 저 멀리 흰 구름 흩어지는 것도 모르고 눈을 가린다 ---------------------------------------------------------------------------- 위의 시처럼 우리는 ‘허공에 집을 짓는다.’ 바람의 길이나 구름의 정원 그리고 벚나무의 잠자리를 빼앗아 허공에 집을 짓는다. 많은 시들에 등장하는 ‘집’이라는 시어의 의미망 속에는 ‘존재의 근원’을 가리키는 것들이 많다. 우리는 ‘나’라는 존재를 짓기 위해 자연의 균형을 깨고 우주의 순환 질서를 거스른다. 하지만 그것은 허공에 집을 짓는 것처럼 존재의 거처로서는 부질없고 허망한 것일 뿐이고 시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 와서 잠시 ‘꿈의 밀실’을 꾸미기 위한 것이지 본질에서 벗어난 삶이라는 것이다. 탐욕의 본질을 참으로 적절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박두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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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 수 없는 싸움
- 수업 일기 1 -이길 수 없는 싸움 박 일 환 넌 맨날 지각이냐? 지각 안 한 날이 더 많은데요? 그래서 잘했다는 거냐? 선생님이 말은 똑바로 하라고 하셨잖아요. 남아서 벌 청소 하고 가. 청소 말고 다른 거 하면 안 되나요? 오늘은 일찍 가야 해서요. 갈 데가 왜 그리 많아? 학교만 아니면 갈 데야 많죠. 그럼 학교는 왜 오는 거냐? 졸업하려고요. 졸업은 해서 뭐 하게? 지금까지 다닌 게 억울하잖아요. 억울하면 청소하고 가. 한 번만 봐주세요, 어차피 도망갈 건데. 니가 나를 좀 봐줘라. 헤헤헤― 허허허― --------------------------------------------------------------- 이 시를 읽으면 대화하는 학생과 선생의 표정과 몸짓, 그리고 그 심리까지도 세밀화처럼 그려져 떠오른다. 나는 사실 이런 애들이 맘에 든다. 그냥 삐딱하고 순종적이지 않아서라기보다는 자기 삶을 향한주체적 대응이 맘에 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응이 매우 논리적이다. 물론 그건 논리라기보다는 말대답일 뿐인데 그게 자신의 주체적 삶에 강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맘에 든다.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 어쩌면 진솔한 자신의 삶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주체적 삶과 연계된 진솔함은 사실 우리 현실 사회의 삶에서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 가운데 하나이지 않은가. 이처럼 진짜 교육은 학교나 교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늘 부딪히는 현실 삶에 더 많이 있다. 그래서 교사의 교육은 수업 시간보다 수업 외의 시간들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좋은 교사란 수업을 잘하는 것보다는 제대로 된 사람 냄새를 풍기는 사람이 아닐까. 교육이 무엇인가. 결국은 사람을 사람답게 길러 내자는 것이 아닌가. 달라이라마가 교육에 대해 이야기한 대목이생각나 인용해 본다. “언제고 공교육 기관들이 내가 ‘가슴 교육(Educating Heart)’이라고 부르는 내용에 관심을 갖는 것이 나의 희망이다. 기본적인 학문에 적절히 숙달될 필요를 우리 모두 인정하듯이 아이들이 학교 커리큘럼으로 사랑, 자비, 정의, 용서 같은 내적 가치들의 필요불가피성을 배우는 그런 때가 오기를 나는 희망한다.” 달라이라마가 말하는 내적 가치들을 학교 커리큘럼으로 넣어서 가르치는 시절이 온다면 위 시 속의 화자 박일환 선생 같은 사람이 바로 적임의 교사일 것이다. ‘니가 나를 좀 봐줘라’ 라는 말에 담겨 있는 것처럼 아이들과 동등한 눈높이에서 가장 적절한 대화를 거짓 없이 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박두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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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얼음
- 물과 얼음 조영옥 얼마 전까지 하나였는데 어쩌면 저렇게 선을 그을까 냇가 얕은 물이 먼저 얼어붙으며 곁을 스치는 물에 상처를 낸다 소스라쳐 놀란 물들이 함께 얼어 붙는다 얼음은 점점 깊고 넓어지고 중심은 아프면서 흐른다 피를 흘리면서 마음을 졸이면서 그래도 생명을 키우기 위해 더 깊이 흐른다 언젠가 얼음이 쩡쩡 큰 울음 울며 깨어질 때 자신을 버리며 안겨 올 그 때에도 물은 말없이 흐른다 어깨 토닥이며 하나 되어 흐른다 ---------------------------------------- 물과 얼음은 본래 하나다. 본래 하나인 물의 분신이 얼음이 되어 물에 상처를 입힌다.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힌다. 자신은 상처입힌 또다른 자신이 본래의 자신으로 합류될 것을 믿으며 중심을 지킨다. 하지만 내면의 자아에 대한 섬세한 들여다보기를 시작한 조영옥의 시라고는 해도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달라진 세상을 어떻게든 품어내야 하고, 세월을 따라가며 먹게 된 나이에도 맞춰 살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살던 집이 너무 낡아서 리모델링을 했으나 그 집의 주인은 바뀌지 않았다는 말이다. 지혜롭고 슬기롭게 살아가는 방법을 누구보다 먼저 깨우치며 살아가는 그녀도 그 길을 따라 조금씩 변모해 가리라. 욕심 없이 사는 자의 시 또한 무슨 욕심이 있을 것인가. 그저 살아낸 만큼만 쓰면 되는 것을. (박두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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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홀 4
- 황홀 4 이 민 숙 민들레 씨앗은 어디로 날아갈까 알려하지 말아라 멀어서 황홀한 그대 살빛 너머에는 45억 년을 기어와 지금도 기어가고 있는 달팽이의 설움이 있다 흙빛 설움, 바람 부는 허공을 바라보며 가슴을 털어 비우고 있다 텅빈 산정에 흐르는 구름 한 잎, 허공이 황홀이다 염려하지 말아라 민들레 씨앗도 너무 멀리 날아가서 기진할까 봐 피아노 건반을 건너뛰지 않는다 베토벤의 한 손가락도 놓치지 않는다 음표 하나가 영원인, 민들레 깃털 되어 날아가는 고흐의 귀! 아무 것도 들을 수 없는, 절벽이 황홀이다 꿈꾸지 말아라 꿈이 아니다 사랑은, 민들레 씨앗보다 꿈보다 더 멀리 날아가는 그리움의 수액을 받아마셔라 대지의 몸이 척박해질 때 노랗게 기진하는 그리움을 뿌려라 차마고도의 끝에서 걸어온 낙타가 짐을 부리고 잠이 드는, 사막이 황홀이다 ------------------------------------------------------------------------------- 이 시는 ‘민들레’를 소재로 해서 시인 내면의 어떤 사유를 ‘황홀’이라는 시어로 집약해낸 것으로 보인다. 자유로운 생명을 상징하는 민들레 씨앗이 날아가는 곳이 어디일까. 그 생각은 45억년의 우주적 시간 속 존재의 설움까지 나아가고 가슴 속 그 설움을 허공을 바라보며 비워내다가 허공처럼 그렇게 모두 비워내는 것이 삶의 극치에 이르는 ‘황홀’ 아니겠냐고 말한다. 불가에서 ‘공空’이르는 깨달음의 황홀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다시 허공으로 사라지는 민들레 씨앗을 보며 저 생명이 (건반을)건너뛰지도 않고 무엇 하나 놓치지 않는 삶의 과정 속에 있는 엄혹한 현실, 절벽 같은 그 현실 자체에서 다시 꽃을 피우는, 차라리 ‘황홀’이라고 말한다. 생명을 가진 존재는 생명이 붙어있는 지금의 현실만이 전부이며 그것이 아무리 힘들고 절벽 같은 절망 속에 있다 해도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황홀’이며 기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현실은 결코 꿈이 아니며 현실 속의 사랑 또한 꿈이 아니니 그것들에 대한 현실적 갈망, 근원적 그리움을 따라 걷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런 갈망과 그리움의 짐을 싣고 걸어와 잠이 드는 그 사막 또한 ‘황홀’이라고 말한다. (박두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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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 또는 파란
- 파랑 또는 파란 송태웅 뒤뜰을 바다로 깔았다 하여 내 뒤뜰로는 파랑도 끼룩거리는 철새처럼 밀려오는 것인데 나의 배후가 짙푸르게 물들어 끊임없이 출렁인다 해도 당신은 그 어느 피안에서 흰 주단을 덮고 눕길 바란다 생은 한 필지의 주민등록지 위에 내리는 폭우와 싸워나가는 것 내 영혼이 노쇠한 낙타처럼 더 이상은 어디로도 갈 수가 없을 때 비로소 생은 신생 교회의 거대한 십자 네온사인 같은 헛된 경전을 집어던지고 겨우 허름해질 수 있는 것 생애 처음으로 내게 온 남루여 뒤뜰 토란잎에 맺힌 물방울처럼 고요히 내려앉은 파란이여 --------------------------------------------- 지리산 자락에 들어온 송태웅 시인의 삶의 또는 의식의 현주소가 변하는 과정을 잘 드러내주고 있는 시다.몸도 마음도 바닥을 치고 있는 엄정한 현실 속에서 그는 가식과 위선의 헛된 지난 세월을 집어 던지고 허름한 마음으로 현실의 가난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그러자 그 신산스럽던 가난도 파란만장한 인생도 토란잎의 물방울처럼 고요히 내려 앉아 영롱하다. 그는 달라진 자신의 현실을 삶의 새로운 영역으로 받아들이고 있고 그 가난이 비로소 ‘삶의 실재’를 살게 하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의 삶으로부터 오는 빛나는 각성과 성찰이다. 그리고 시인은 자신의 삶의 배후에는 물결처럼 끝없이 밀려오는 ‘파랑’이 있다고 말한다. 자본의 사회를 사는 사람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죽음도 아닌 가난이라고 하는 세상에서, 가난은 무능함이고 비천함이며 장애라고 말하고 있는 세상에서, 그런 가난에 휘둘리지 않고 가난을 보듬어낼 수 있는 것으로 자신의 배후에는 ‘파랑’이 있다고 말한다. 그 파랑은 바닥을 치고 있는 자신의 몸과 마음의 현재를 치유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 ‘파랑’은 뒤뜰의 작물들이든 자연이든 농사든 시골이든 무엇이든 어쨌든 생명의 근원에 닿아있는 무엇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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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 또는 파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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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평화 기도문
- 생명평화 기도문 박 두 규(시인) 내 안의 신성한 빛이 스스로 피어나 나를 밝게 하고 혼탁한 세상에 그 빛을 더하소서. 강가의 돌멩이가 하릴없이 물결에 쓸리는 일이나 꿀벌 한 마리가 태어나 죽는 일이 모두 우주의 질서이고 리듬인 것을 알게 하소서. 지상으로 떨어지는 도토리 한 알의 무게와 자욱한 안개 속 강을 건너는 새 떼들, 잠 못 이루는 그대의 슬픔까지도 모두가 평형을 이루게 하는 우주의 저울이며 일상의 평정심임을 알게 하소서. 수평의 저울이 기울고 우주의 리듬을 깨는 것은 오로지 나를 묶고 있는 나의 마음 때문이니 평화로운 마음의 집이 무너지는 것이나 종일토록 조울躁鬱 속 혼란의 시간이 흐르는 것은 내 탓이고 또 내 탓인 것을 알게 하소서.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처럼 사소한 슬픔과 기쁨에도 우주가 흔들린다는 걸 알게 하소서. 두려움에 휩쓸려 깊은 어둠의 숲을 헤맬지라도, 단호하게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처럼 스스로 벗어나 먼바다의 수평을 볼 수 있게 하시고 가여워하는 마음을 일으켜 스스로를 품어내게 하소서. 그리고 生의 균형감각을 찾아 우주질서의 대열에 들어 다시금 빛이 되게 하소서. 모든 생명은 스스로 사랑 그 자체이고 세상의 모든 일은 사랑으로 비롯되는 것임을 알게 하소서. 또한 매일매일 언제나 해가 뜨는 일처럼 태어나는 순간부터 나의 사랑은 완벽하니 그 절대의 사랑을 의심하거나 부정하지 않게 하소서. 그리하여 내가 먼저 고마워하고 내가 먼저 미안해하고 내가 먼저 용서를 구하고 내가 먼저 피와 땀을 나누고 내가 먼저 상대방을 지극정성으로 섬기는 일이 그것이 내 사랑이며 신성임을 알게 하소서. 내 안의 신성한 빛이 스스로 피어나 나를 밝게 하고 혼탁한 세상에 그 빛을 더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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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무렵
- 사진 김인호 - 지리산 반야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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