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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전에 딱 한번 만난 꽃 패모
- 저는 1998년 DJ 취임 초 진주교도소에 국가보안법으로 2년 6월을 선고 받고 복역 중 815 특사로 가석방되어 고향인 운봉고원 샛터마을과 남원시내에서 2022년까지 살고 있는 김태윤입니다. 교도소 복역 중 '작은 것이 아름답다' 와 최재성님의 부패에 관한 책을 교도소 독방에서 접한 후 출소를하면 우리 들꽃을 키우는 농부로 살기로 결심하며 지내던 중.. 유가협 후배의 도움으로 똑딱이 디카를 구입해서 20여년이상 내 방식의 들꽃 사진만 찍고 있는 바보 촌놈입니다. 그때는 이론교육도 디지털에 대한 지식도 없이 막 샷을 날리며 사는 촌놈였습니다. 첫 들꽃사진은 어떨 결에 인월에 사는 사회 친구 토종꿀벌 농장에서 찍었습니다.. 촛점도 노출도 엉터리로 찍었는데.... 우연히 잘 나온 사진이 패모였습니다. 이 꽃에 대한 정보도 몰라서 전북대 교수님에게 문의하여 알게 된 이름이 "패모" 였습니다. 지난 20년 간 지리산 권에서 특히 남원 권에서 찍은 사진을 시간이 나는 되로 사진으로 소통할까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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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전에 딱 한번 만난 꽃 패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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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우씨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서울대 출신 건축가에서 버섯 농부가 된 정철우씨 안녕하세요. 네 오랜 만입니다. 저 예요. 아... 네. 퇴근 길에 지인에게 전화가 왔다. 구례에서 버섯을 키우는 농부가 있는데 도움을 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어디로 갈 것인가?> 나는 황금빛으로 빛나는 오미리 들판에 넋이 나가 있었기 때문에 그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네. 알겠어요” 라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집에 도착해보니 문자가 와있었다. 그 농부의 연락처였다. 다음 날 출근해서 농부에게 연락을 했다. 농장은 사무실에서 차로 2-3분 거리에 있었다. 오후에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 직접 지은 버섯농장 > 농장은 구례 서시천변에 있었다 2년 전 수해로 이 지역은 지붕까지 잠긴 곳이었다. 5-6년 전에 귀농 했다는 이야기를 어제 들었으니 수해를 피해가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마트에서 만나는 거의 모든 버섯은 실내에서 키운다. 자본 집약적 농업이다. 버섯은 식물이 아니다. 그렇다고 동물도 아닌 균사체다 균사체라는 것은 균의 덩어리라는 뜻에 가깝다. 버섯은 균의 몸덩어리 근육에 가까운 것이다. 균은 동물에 가깝고 그것도 민감한 동물이다 그는 농장에 있었다. 정철우라고 했다. 서울대 건축과를 졸업했다고 했다. 이력이 궁금하다. 어쩌다가 귀농을 했나? 건축관련 일하다가 어느 날 영화를 봤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영화였다. 거기 이런 문구가 있었다. 삶은 현실이 된다, 당신이 망설이고 있는 그 순간 해본 것 없음 가본 곳 없음 특별한일 없음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그는 이영화를 보고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우여곡절 끝에 구례에 정착하게 되었다. 내려오자 마자 한 눈 팔지 않고 바로 농사를 시작했다. “처음부터 농사를 시작했어요. 처음 1년은 호박 농사를 했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그 다음엔 표고 버섯 농사를 했습니다. 이 건물을 지어서 농사를 시작한 것이죠 그리고 2020년 8월에 수해로 모든 것을 잃었다." 암담했다. 섬진강댐을 방류한다는 문자를 받은 다음날 아침 마을 앞이 이미 잠기기 시작했다. “서둘러 농장으로 가봐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이미 냉천 사거리가 잠기고 있었어요. 경찰이 통제를 했어요, 그래서 산업 도로로 차를 몰았죠, 농장은 지붕만 보였어요.” 그 날 그는 6억을 투자해서 만든 농장이 물에 잠겨 있는 것을 보고 무엇을 상상했을까? 만약 월터라면 그 특유의 상상력으로 흘러 넘치는 물을 다시 섬진강으로 돌려보냈을 것이다. 아니면 버섯을 키우는 땅을 하늘로 들고 날아올랐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농장은 물에 잠겼고 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 의지가 사라졌을 때 가장 현명한 방법은 다른 일을 찾아보는 것이다. 그는 수해대책본부에서 일했다. 결국 구례군 수해대책위는 수자원 공사에게 48%에 해당하는 금액을 돌려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빚이 남았다. 그는 지금 참송이 버섯을 키우고 있다. 참송이는 어떤 버섯이죠? “표과와 송이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버섯입니다. 유전적으로 보면 표고와 가깝죠. 표고에 60% 송이의 40% 정도라고 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가 준 참송이의 향기를 맡아 보니 얼마전 먹어본 송이 향이 느껴졌다. “진짜 송이 향이 나네요” “네.. 그쵸.” 그는 반갑게 웃었다. 참송이 버섯을 시작하게 된 이유가 있나요? “표고는 사실 규모의 싸움에 가깝더라고요. 얼마나 많이 수확 생산이 가능 한 가에서 승부가 나요. 그러다 보니 일이 많고 너무 힘들어요. 시간이 없죠” “수해를 입지 않았으면 계속 했을 텐데 수해를 입다 보니 1년간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죠. 다시 건물을 보수하면서 참송이를 재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참송이 버섯> 참송이 재배의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요? “키우는 것은 표과와 다를 것이 없어요. 하지만 관리와 판매가 어려워요 표고는 재배만 하면 수요가 많기 때문에 가격만 낮추면 처리가 되는데 참송이는 경매가 없기 때문에 개인이 판매를 해야 합니다. 그러니 재배 관리가 어렵고 판매가 어려워서 힘들죠” 제 참송이 재배사가 25평씩 8개 총 200평인데 지금은 판매가 가능한 정도만 키우고 있습니다. 판매가 늘면 더 키워 야지만 지금은 제가 혼자서 가능한 양만 재배하고 있어요. 구례에 내려와서 시작한 농사가 수해로 모두 망가졌잖아요? 후회 안 하시나요? “구례는 어쩌다가 내렸 왔지만 참 예쁜 곳입니다. 처음에 내려왔을 때 상사 마을에 살았는데 아침마다 30분씩 멍 때리고 바라봤어요. 너무 예뻐 서요. 물론 농사만 본다면 구례는 추천할 만한 곳은 못되는 것 같습니다만” ㅎㅎ 그와 한 시간 정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영화를 다시 봤다. 라이프지에서 일하던 월터는 매일 같을 일을 반복하는 16년된 포토 에디터였다. 라이프지가 온라인으로 바뀌면서 마지막 호에 사용할 25번째 사진이 사라지자 사진의 단서를 찾기 위해 베일에 쌓인 사진 작가 숀 오코넬을 직접 찾기 위해 그는 사무실에서 나와 상상이 아닌 현실로 뛰어든다.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반복되는 일상은 어느 날 일탈로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뀔 수 있다. 바이던의 시귀 중에 이런 말이 있다. 고개만 돌리면 다른 세상…. 그는 매일 같은 출근 길을 가다가 고개를 돌리고 다른 세상으로 진입했다. 그의 상상은 현실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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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우씨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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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 지리산을 사랑하는 사람들 연대를 위해 애쓰신 분들
- 그 당시는 카메라로 인물을 찍을 때는 거부하는 사례가 참 많았습니다. 그 나마 열린 사고를 가진 분들이 여서 편히 지리산생명연대 회의 하는 모습을 담을 수 있었습니다. 대략 20여년간 컴 속에서 잠자다가 지리산인을 통해 공개 합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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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 지리산을 사랑하는 사람들 연대를 위해 애쓰신 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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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움은 한 번도 나를 비켜가지 않았다
- 고마움은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박 두 규(시인) 글의 제목은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라는 책 제목의 패러디다. 이 책은 36년 옥살이를 한 비전향 장기수 허영철 선생의 삶을 기록하고 있다. 만델라가 27년 옥살이 하고 대통령이 되었을 때 아직도 대한민국 교도소에는 30년이 넘은 장기수들이 수두룩하였고 선생은 그 중의 한 분이셨다. 하지만 나는 허영철 선생을 민족의 현대사를 정면으로 부딪치며 살아온 역사의 증인으로서보다 인간이라는 종(種)이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가를 보여준 한 사람으로, 또는 삶 속에서 ‘고마움’이란 진정 무엇인가를 알려준 스승으로, 내 마음 속에는 그렇게 남아 있다. 오래 전 일이다. 어느 늦겨울 전주의 젊은 친구들이 장기수 선생님들을 모시고 구례 지리산 자락으로 나들이 와서 하룻밤 같이 보낸 적이 있었다. 나는 그때 이틀 동안 내내 한 순간도 놓치지 않는 그분들의 ‘고마워하는 마음’을 보았다. 맑게 갠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다는 고마움, 이마를 스치는 신선한 바람 한 줄기의 고마움, 그 표정이며 몸짓 자체에 깊게 배어 있는 그 마음이 그대로 느껴졌다. 선생의 말투 하나 행동 하나가 티끌만큼의 가식도 없이 너무 오랫동안 자연스럽게 몸에 배인 고마움이라는 것을 누구라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하기야 36년을 오로지 수행으로만 보낸 세월인데 오죽하랴. 사과 하나를 건네받으며 사과 꽃을 피우게 한 햇볕과 뿌리를 적시게 한 비와 흙과 사과를 건넨 사람의 고마움까지, 사과 하나를 얻기까지에 기여한 세상의 모든 존재에 대한 고마움을 뼛속 깊이 새긴 자의 마음을 보았다. 고마워하는 마음은 겸허한 마음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한다. 고마워하는 마음은 내 안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자아의 영역에 타자의 영역을 내어준 것이고, 겸허한 마음은 내 안에 타자의 영역이 자아의 영역보다 더 넓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처럼 삶 자체가 경쟁이고 살기 위해 경쟁력을 갖추려다 보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이기적으로 살게 되고, 내 스스로 경쟁력을 갖춰 이만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스스로의 자만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상대방을 고마워하기 보다는 내가 그만큼 노력해서 경쟁력을 갖춰 얻은 것이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타자는 경쟁의 상대요 대립적 존재이지 내 안에서 품어야 할 상대가 아닌 것이다. 우리가 고마워하는 마음과 겸허한 마음을 꾸준히 잃어온 것은 이러한 변화된 일상의 탓이 크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부를 창출하는 것만이 미덕이 되어버린 자본 중심으로 인간의 질서가 재편되면서 깊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마음은 바닥을 치는 상태에 이르렀다. 사실 이 시대에 스스로 겸손해져서 상대를 진정으로 고마워할 줄 알고 낮은 자세를 취하며 사는 이가 얼마나 될까. 나를 내어주고 타자를 섬기는 겸허함은 현대의 일상에서 얼마나 유효한 덕목으로 남아 있을까. 나는 자아의 감옥을 벗어나 타자를 섬기는 선생의 그 텅 빈 마음의 ‘겸허함’을 보며 그것은 분명 36년의 옥살이 명상이 가져다준 깨달음일 거라고 생각한다. 사실은 그렇게 사는 것이 진리의 삶이요, 나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라는 절박함을 우리는 언제나 스스로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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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움은 한 번도 나를 비켜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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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둘레길에서 만나는 옛이야기1-대전리 석불
- 지리산둘레길에서 만나는 옛이야기-대전리 석불 지리산둘레길을 걸으면 산과 계곡, 마을과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걸으면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두리번거리면, ‘지나간 시간들’을 만날 수 있다. 거창하게 국보니 보물이니 지정된 문화재만이 아니라, 옛사람들의 손길이 묻어 있는 소중한 것들을, 거기에 담겨있는 앳된 옛이야기들을 만나 볼 수 있다. 지리산둘레길 오미-방광 구간을 걷다 보면, 한 칸 보호각에 갇혀 계시는 부처님 한분을 만나게 된다. ‘구례 대전리 석조비로자나불입상’이 그분의 공식 이름이다. 보호각에 세워지기 전에는 가로 6m, 세로 6m, 높이 1.1∼0,6m의 방형 돌담속에 계셨다. 1992년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한 ‘남악사지 지표조사’때 공식적(?)으로 이 불상이 알려지게 되었고, 1994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86호로 지정되었는데, 아마도 그 이후 지자체에서 보호각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보호각을 세우면서, 세심한 마음이 없었나 보다, 부처님의 발목이 시멘트 구덩이에 푹 빠져 버렸다. 쯧. 아쉽게도 이 부처님에 대한 문헌자료나 역사기록은 아직까지 없다. 그래서 주변 마을에서 전해오는 이야기와 부처님의 생김새만으로 그 내력을 엿볼 수밖에 없다. 마을사람들은 이 부처님에 계신 곳을 ‘미륵골’이라 부른다. 1992년 조사 때 주변에서 건물의 주초석과 기와조각, 벽돌조각 등이 발견되어 아마도 절집이 있었을 거라는 추정만 할 뿐이다. 조사 당시 절단된 부처님의 목 부분을 누군가 시멘트로 붙여 놓은 것을 조사팀이 시멘트를 제거하고 다시 접착제로 붙였다고 한다. 나무아미타불! 우리나라 문화재 앞에 붙어 있는 안내판이다. 읽고 또 읽어도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게 적혀있다. 아마도, 문화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저하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든 것 같다. 첫째, 왜? 비로자나불이라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없다 둘째, 머리카락이 나발이고 정수리가 육계라는데 이게 뭔뜻인지? 셋째, 법의는 통견이다....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넷째, 나발, 육계, 법의로 고려초 제작이라고 하는데....그 이유도 모르겠다. 양쪽 볼이 풍만하고 소박하면 통일신라 양식이라니...그건 또 뭔지? 첫째, 왜? 비로자나불이라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없다. 부처님의 이름부터 알아봐야 한다. 아무런 기록도 없고, 사찰과 관련된 정보도 없을 때, 불상의 명칭을 확인하는 방법은 보통 수인(손의 모양, 손이나 손가락으로 맺는 모양)을 통해서이다. 보살상의 경우 머리에 쓰는 보관(寶冠)의 모양으로, 앉아 있는 자리의 모양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보관에 화불(化佛)이 있으면 관음보살, 보관에 보병(寶甁)이 있으면 대세지보살, 민머리이거나 두건을 쓰고 있으면 지장보살로 구분한다. 또 사자좌에 앉아 있으면 문수보살, 코끼리좌에 앉아 있으면 보현보살로 구분한다. 부처님이 혼자 계시지 않고 좌우에 다른 불보살과 계시다면, 좌우협시보살을 통해서 부처님의 명칭을 확인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계시다면 아미타불로, 좌우에 문수와 보현보살이 계시다면 비로자나불로 파악한다. 물론, 삼존불일 때 이런 전형을 벗어나는 예도 많기에, 절대적인 구분이라고 봐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대전리 불상은 보살상은 아니고, 좌우에 다른 불보상이 있지도 않기에, 오롯이 수인을 가지고만 판단해야 할 것이다. 대전리 석불의 수인을 명확하게 파악하기엔 너무 많이 손상되었다. 수인의 대략적인 모양은 왼손으로 오른손의 손가락을 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사람은 왼손이 오른손 위에 있으면서 깍지를 끼고 있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렇듯 가슴 앞에서 양손을 모아 주먹을 쥐는 수인을 지권인이라 하고, 이런 수인을 하는 부처는 비로자나불이다. “형상은 두 손을 모두 금강권(金剛拳 : 엄지손가락을 손바닥에 넣고 다른 네 손으로 싸 쥐는 것)으로 만들고 가슴까지 들어올린 후, 왼손 집게손가락을 펴 세워서 위쪽 오른손 주먹 속에 넣는다. 그 주먹 속에서 오른손 엄지와 왼손 집게손가락이 서로 맞닿는다. 이때 오른손은 법계를 뜻하고 왼손은 중생을 뜻하여, 이 수인은 법으로써 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가 있다. 또 일체의 무명 번뇌를 없애고 부처의 지혜를 얻는다는 뜻이기도 하며, 이(理)와 지(智)는 둘이 아니고 부처와 중생은 같은 것이며, 미혹과 깨달음도 본래는 하나라는 뜻이기도 하다. 대일여래(大日如來) 즉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 결하는 수인이다. 법신(法身)인 비로자나불만 이 수인을 하므로 이 수인을 한 불상은 곧 비로자나불이다.” 지권인에 대한 불경의 설명에서는 왼손 엄지를 오른손이 잡는다고 나와 있지만, 대전리 석불은 반대로 오른손을 왼손으로 잡고 있다. 지권인을 한 비로자나불은 통일신라 8세기 중엽에 들어와서 9세기에 성행한 것으로 본다. 더불어 조성 초기부터 비로자나불의 지권인 수인이 뒤바뀌는 변형이 종종 나타나고,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변형된 지권인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대전리 석불의 수인이 좌우가 바뀐 지권인 혹은 깍지낀 지권인이라 하더라도, 비로자나불임은 명확하다. 둘째, 머리카락이 나발이고 정수리가 육계라는데 이게 뭔뜻인지? 부처님 원래의 모습은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부처님의 모습을 불상으로 또는 그림으로 그리려다 보니, 무언가 법칙이랄까 원리가 필요하게 되었을 것이다. “불교가 발생한 이후 약 500년간 인도에서는 불상을 만들지 않았다. 서기전 1세기 무렵부터 인간의 형상으로 불상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인간과는 다른 특징을 가진 부처의 외형을 삼십이상 팔십종호(三十二相 八十種好)로 규정하게 되었다. 이미 열반에 들어 존재하는 자로서의 의미가 없는 부처를 인간의 몸으로 만드는 것은 이전에 없었던 부처의 형상을 창안해야 한다는 점에서 고심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생물과도 다른 부처라는 존재의 철학적 의미를 가시적으로 보여주고, 오랜 수행의 과정을 거쳐 깨달음을 얻은 여래임을 중생들에게 확신시킬 수 있어야 했다.거듭되는 윤회의 시간 동안 선업(善業)을 쌓고, 수행을 통해 다시없는 깨달음을 얻은 몸은 삼십이상 팔십종호를 갖춘다고 설명했다. 그러므로 삼십이상 팔십종호는 인간이 갖출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진리가 구현(具現)된 상태를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과 같은 모습처럼 보이지만 인간과는 다른 특징인 삼십이상 팔십종호를 온전히 갖춘 모습으로 부처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삼십이상 팔십종호는 부처의 형상에 대한 규정이자 약속이다.” 〈중아함경〉에는 27번째 특징으로 머리카락을 들고 있다. “정수리에 육계가 있어 둥글고 가지런하며 머리칼은 소라처럼 오른쪽으로 돌아 오른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방광대장엄경〉에는 “정수리에 육계가 있다, 소라 같은 머리칼이 오른쪽으로 돌아 오르고 그 빛은 검푸르다” “머리칼이 아름답고 검다, 머리칼이 가늘고 부드럽다, 머리칼이 어지럽지 않다, 머리칼이 향기롭고 깨끗하다, 머리칼에 다섯 개의 만(卍)자가 있다, 머리칼이 빛나고 소라처럼 돌아 오른다”고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간송미술관 최완수 실장에 따르면, 원래 인도문화권의 남자들은 머리카락을 위로 거둬 모아 상투를 틀고, 그것을 그루터기로 삼아 터번을 둘렀다. 더위나 모래바람으로부터 머리카락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인도는 계급사회, 자연히 신분의 차이를 나타내려고 높은 신분일수록 상투와 터번에 많은 금은보배를 장식했고, 이러다 보니 상투가 더 높아졌다. 초기 불상조각가들은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 머리카락을 정수리 부근에서 묶어 상투를(후일 육계란 명칭으로 확정) 만든 형태의 불상을 조성했다. 처음에는 상투 끈으로 머리카락을 묶었으나, 불상 양식이 점차 진전되면서 끈은 사라지고 상투만 표현됐다. 요약하자면, 나발(螺髮)은 소라 나(螺)와 머리털 발(髮)이다. 소라 껍데기처럼 틀어 말아 올려진 머리카락 모양을 말하며, 육계는 그런 나발들을 정수리에서 묶어 세운 상투를 의미한다. 대전리 석불의 머리 부분도 많이 손상되어 눈으로 명확하게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우선, 나발의 형상은 연주문(連珠文, 작은 원을 구슬을 꿰맨 듯 연결시켜 만든 문양)형으로 보인다. 통일신라에서 유행하던 나선형과는 조금 다르다. 정수리에 있는 육계는 제법 큰 편이다. 삼도(三道)는 부처님 목 주위에 표현된 3개의 주름인데, 이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 또는 생사 윤회하는 삼계(三界) 등을 뜻한다고도 한다. 대전리 석불의 목부분에 있는 삼도는 예전에 절단되어 시멘트로 붙이고 다시 수리하는 과정에서 눈으로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훼손되어 있다. 셋째, 법의는 통견이다....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삼의일발(三衣一鉢)이란 말이 있다. 세가지 옷과 발우 하나이라는 뜻이다. 부처님이나 수행자들의 검소한 삶을 표현하는 말이다. 스님들의 옷을 인도에서는 가사(袈裟 Kasaya)라 하고, 삼의(三衣)란 상의(上衣-승가리). 중의(中衣-울다라승). 하의(下衣-안타회) 세 가지인데, 그 중에서 상의인 승가리를 법의(法衣)라하여 가사의 대표로 삼는다. 부처님이 이 상의인 승가리(법의)을 입으시는 방식이 있다.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나뉘는데, 하나가 통견이고 또 하나가 우견편단이다. 통견(通肩)은 통양견법(通兩肩法)의 약칭으로, 불교에서 가사(袈裟)를 입는 한 방법으로, 양어깨를 모두 덮는 방법을 말한다. 대개, 승려가 사찰 밖으로 외출하거나 속인의 집에 들어갈 때의 착의법이며, 불상의 경우는 법의를 이 방법으로 입고, 옷자락을 왼쪽 겨드랑 밑으로 당겨서 왼손으로 잡는다. 우견편단(右肩偏袒)은 오른쪽 어깨는 가사를 벗어서 노출하고 왼쪽 어깨만 걸쳐 있는 형식이다. 인도 풍습에는 왼쪽보단 오른쪽이 더 귀하게 여기고, 화장실 등 천한 일은 왼손을 사용했다. 사실 고대인도의 많은 신(神)들의 모습을 보면 더운 날씨 때문에 대부분 웃옷을 입지 않거나 혹은 왼쪽 어깨만 걸친 우견편단 복장이다. 따라서 우견편단(右肩扁袒)은 부처님 만의 고유한 복장이 아니고 인도인들의 복장풍습에서 유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통견의 양식도 두 가지 갈래로 나뉜다. 옷주름의 모양으로 구분하는데, 흔히 아육왕식과 우전왕식으로 구분 짓는다. 아육왕식(阿育王式 Ashoka) 옷 주름은 목에서부터 가슴, 다리를 거쳐 발목에 이르기까지 U자형의 주름이 연속적으로 늘어져 있는 형식이며, 우전왕식(優塡王式 Udayana)은 가슴 위에서 내려온 옷 주름이 허리 부분에서 양쪽으로 나뉘어 두 다리 위에 따로 U자형이 표현된 형식이다. 그럼, 대전리 석불의 법의를 살펴보자. 착의법은 양어깨에 옷이 걸쳐져 있는 통견이고, 상체의 옷주름은 U자형으로 가슴 가운데에서 양어깨와 팔목까지 주름이 반복적으로 겹쳐져 있다. 하체의 옷주름은 상체에서 내려온 U자형 주름이 허리에서 Y자로 나뉘어 지며, 양다리에서 각각 U자를 그리며 발까지 내려온다. 그래서 대전리 석불의 법의 양식은 우전왕식 통견이 된다. 넷째, 나발, 육계, 법의로 고려초 제작이라고 하는데....그 이유도 모르겠다. 양쪽 볼이 풍만하고 소박하면 통일신라 양식이라니...그건 또 뭔지? 문헌과 자료로 고증하기 불가능한 불상은, 위에서 언급된 나발과 육계, 법의 양식, 불상의 전체적인 모양, 부처님의 이름 등으로 제작 연대를 유추해 내는 게 통상적인 방식이다. 우선 법의의 양식에서 대전리 석불의 제작 연대를 유추해 보자. 석가모니 부처님이 어머니 마야부인에게 법을 전하기 위해 도리천에 올라가 있는 동안, 코삼비국의 우전왕(Udayana)이 세존을 너무도 그리워하여 전단나무로 5척 높이의 부처님 형상을 만들게 하였다. 이 상서로운 최초의 불상은 각지에 널리 유행하였다. 당나라의 현장은 우전왕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전단상을 직접 목격하였는데,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 불상을 모사하였고, 이때 “진(眞)을 얻은 것”으로 여겼다고 전한다. 이것은 우전왕이 만든 불상이 석가모니 입멸 전에 만들어진 불상이므로 세존의 본래 모습을 담고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불상의 전파과정에서 이러한 복제는 단순한 형상의 복제에 그치지 않고 ‘신성의 복제’로 이어졌다. 이후 이 불상과 같은 가사형식을 한 불상을 학계에서는 편의상 우전왕식 불상이라 부르게 된다. 이러한 우전왕식은 한반도에 719년 감산사 미륵보살입상에서 처음 나타나며, 8세기 이후 신라 불상에서 많이 나타난다. 이후 고려시대에는 더욱 도식화되어 아산 평촌리 석조약사여래입상에서는 무릎 부분의 옷주름이 몇 번 반복되는 양식화로 이어진다. 이에 비해 대전리 석불의 가사 옷주름은 신라 불상의 양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려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또한, 비로자나불 조성으로 연대를 유추해 볼 수도 있다. 한반도에서는 8세기 중엽부터 비로자나불상이 조성되기 시작해 남북국시대 신라 후기에 크게 유행해 그 흐름이 조선까지 이어졌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보관을 쓴 보살형의 비로자나불을 조성했으나 우리나라는 주로 지권인을 한 불상이 대다수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독존상이 주로 조성됐는데 조성시기가 명확한 불상 중에 석남사 비로자나불상이 766년으로 가장 빠르고 장흥 보림사 비로자나불상이 859년, 철원 도피안사 불상이 865년으로 뒤를 잇는다. 비로자나불은 석불이나 철불로 조성되면서, 초기에는 거의 좌상으로 만들어 지다가 고려시대에 좌상에서 입상으로 변화를 나타낸다. 하지만 대형 석조 비로자나불입상은 현재 거의 찾아 볼 수 없으며, 관촉리 비로자나불입상과 대전리 불상이 대표적이다. 대전리 석불이 관촉리 석불 보다 이른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현재까지 알려진 대형 비로자나불 입상으로는 가장 초기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1992년 조사 당시, 주변에서 발견된 塼(벽돌)과 瓦片(기와조각) 등이 고려초의 것으로 파악되어, 대전리 석불은 대략 9세기말에서 10세기초에 조성된 불상으로 파악된다. 고려초에 이렇게 큰 석불을 조성한 이유는, 신라하대인 9세기 불상의 양식을 이은 온화한 부처의 이미지로는 통일 고려의 강력함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어려웠기에 웅대하고 강한 느낌을 줄 수 있는 불상의 이미지가 필요했을 것이고, 또한 불상을 좌상이 아닌 입상으로 제작해 부처님의 보다 적극적인 중생구제의 모습을 표현했을 것이다. 대전리 비로자나불의 이야기는 이렇게 마무리 하고, 다음에는 대전리에서, 아니 한국 불교에서 가장 문제적인 인물에 대해 이야기 해보기로 한다. 석불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이 인물은 누구인가? 바로가기--- 지리산둘레길에서 만나는 옛이야기2-대전리 공양인물상 – 지리산인 (jirisan-i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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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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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둘레길에서 만나는 옛이야기1-대전리 석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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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30년을 소작농으로 사는 이유
- 그가 30년을 소작농으로 사는 이유 15년 전 남원 금지면에 있는 영농조합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리고 매년 몇 번씩 만났다. 그렇게 15년이 지났다. 나는 그를 30대에 만나 50대가 되었다. 그는 40대에 나를 만나 60대가 되어 간다. [농부 김갑식] 농부 김갑식 올해 59세다. 남원 금지 출신이다. 고향에서 농부로 40년이 보냈다. 소 10마리와 논1000평과 하우스 10개가 그가 가진 농사다. 한 마디로 복합 농이다. 금지면 농협 앞에 있는 비닐하우스에 찾아가면 그는 항상 있었다. 멀리 가지 않았다. 그는 늘 하우스에 붙박이처럼 살았다. "친환경은 관찰이 중요해요." "친환경 자재는 일반 농약 한 번이면 되는 것을 10번은 쳐야 하거든요 그리고 한 번 번지고 나면 잡기가 어려워 매일 매일 관찰해야 합니다." [올해 심은 블랙망고수박] 그는 유기농과 무농약 농사를 짓고 있다. 그래서 그는 하우스에 붙어 작물들의 상태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작년에 심은 블랙 사파이어 포도 농장을 둘러봤다. 포도가 몇 개 익었다고 해서 가봤다. 아직 맛이 들지는 않았다. 8월이 되어야 맛이 든다고 했다. 뜨거운 하우스를 빠져 나왔다. 6월의 열기와 장마의 습기까지 담은 끈끈한 바람이 불었다. 사방의 열기가 가득 해서 우리는 피할 곳이 없었다. 넓은 논 한 가운데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목이 말라 입에서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는 한증막에 들어간 것처럼 답답해졌다. 15년 만에 처음 그는 옛날이야기를 꺼냈다. “92년에 귀농을 했어요. 도시에서 일하다가 돈 조금 벌어 시골에 내려왔죠. 내려오니까 다들 소를 키우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소를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보증만 서면 농협에서 돈을 잘 빌려줬습니다. 그렇게 소가 100마리까지 늘었어요. 그런데 운이 없게 IMF가 왔다. 소가 똥값이 되었다. 그리고 빚 3억이 남았다. 그 당시 대출 이자가 18%인 시대였다. 그렇게 그가 정신을 차려 보니 3억에 빚을 진 30대 농부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농사지은 지 곧 40년이 다 되어 가지만 아직도 소작농이다. “빚 갚고 먹고 사느라 땅이 한 평도 없어요. 다 임대입니다” 하우스 한 동 200평의 임대료는 년 60만 원 정도라고 한다. 철골은 땅 주인의 것이고 비닐이 직접 바꿔가면 사용한다. 10동의 하우스를 짓고 있으니 1년 임대료는 600만 원이다. 많을 때는 20동 정도를 지었다고 하는데 이제는 나이가 있어 더는 힘들다고 했다. "지금도 그 빚이 1억5천이 남아 있어요. 그것만 없으면 아무 걱정이 없는데…. 농사지어서 그걸 갚는 것이 너무 힘들어요“ 그는 항상 피곤해 보였다. 그 이유가 있었다. 무거은 빚을 한 짐을 지고 있으니 삶이 편안하지 않았을 것이다. “소를 키우다가 빚을 졌잖아요. 이 동네가 소를 많이 키웠는데 지금은 소 키우는 사람이 없어요. 그때 다 망해서 그래요. 소라면 징글징글 하죠. 빚 지고 야반도주한 친구도 몇 명 있어요. 이 동네에서 나만 지금까지 소를 키우고 있죠. 소 키워서 빚을 졌으니 다시 소를 키워서 빚을 갚고 싶거든요. 지금 새끼 낳은 소가 10마리가 있으니 곧 그렇게 될 겁니다. 70 먹기 전까지는 갚고 싶은데 그게 될지 모르겠네요.” 얼마 전에 차 하나를 폐차했어요. 네…. 그때 야반도주한 친구가 먹고 살려니 트럭을 사야 하는데 신용불량이라 내 명의로 차를 샀거든요. 27년 만에 차를 폐차했어요. 그동안 혹시라도 사고가 나면 어쩌나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걱정 하나가 사라졌네요. 그것만 사라져도 맘이 10%쯤 가벼워졌어요. 그는 앞으로 10년 안에 빚을 갚고 돈도 좀 벌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가능할 것인가? 40년간 1억5천을 갚았는데 10년 안에 그 돈을 갚기가 쉽지 않아보인다. 농부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한 번 넘어지면 다시 세우기기 쉽지 않다. 그래도 지금까지 땅에서 버티고 서 있는 그가 대단해 보였다. 더운 바람이 물러가고 시원에 바람이 불어왔다. 그는 오래된 낡은 오토바이를 타고 다른 하우스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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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30년을 소작농으로 사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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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공원을 관광지로 만든 주범(성삼재·정령치도로)
- 지리산 이야기 (3) 국립공원을 관광지로 만든 주범(성삼재·정령치도로) 도심처럼 국립공원도 교통체증·매연·소음 '몸살' 배혜원 시민기자(지리산필름 대표)·윤주옥 시민기자(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대표) (webmaster@idomin.com) 2021년 05월 03일 월요일 서울올림픽 맞춰 관광도로 건설 후 연간 차량 약 45만 대 운행…2007년 대도시급 미세먼지 측정 당장 아스팔트포장 못 뜯는다면 주민 운영 친환경차량 이용하고 일반차량은 통제하는 도로 돼야 2003년 가을, 나는 성삼재도로를 처음 걸었다. 나 혼자가 아니라 초등학생부터 60대 어른까지 50명 정도가 함께였다. 천은사에서부터 걷기 시작한 우리는 심한 굴곡과 급경사지를 달리는 차량이 내뿜는 매연과 타이어 타는 냄새, 소음에 아찔했던 기억이 있다. 천은사에서 출발해 약 10㎞를 걸어 올라간 우리는 달궁에서 약 9㎞를 걸어 올라온 분들과 성삼재휴게소에서 만나 지리산에 대한 마음, 성삼재도로를 걸으면서 느낀 점 등을 이야기했다. 다시는 걷고 싶지 않다는 분도 있었고, 달리는 차량으로 위험했지만 걸을 만했다는 분도 있었다. 2003년 이후로 나는 1년에 한 번 이상은 성삼재도로를 걷는다. 성삼재도로를 걸어서 오르자는 캠페인을 할 때도 있었고, 성삼재도로 주변에 사는 나무와 풀을 조사하려고 또는 지리산국립공원을 관통하는 성삼재도로가 다른 지역의 도로와는 어떻게 다른지 조사하기 위해서였기도 했다. 내가 성삼재도로를 걷는다고 하면, 첫 번째 반응은 '몸에 안 좋을 텐데 뭐 하러 걷느냐?'였다. 그럴 때면 생각한다. 맞다, 성삼재도로를 걷는 것은 몸에 좋지 않다. 그러면 이곳이 삶의 터전인 반달가슴곰은, 히어리는, 쇠딱따구리는, 그들 모두는 얼마나 힘겨울까. 국립공원공단이 2007년에 발간한 연구보고서를 보면 성삼재도로 주변의 대기질 농도가 도로에서 멀리 떨어진 노고단대피소보다 전반적으로 짙은 농도를 나타냈다. 가장 심각한 항목은 미세먼지였는데, 2007년 10월 26일(금)∼28일(일) 조사 시 성삼재휴게소는 대기환경기준을 초과했고, 대도시 지역(서울시 월평균 60㎍/㎥)의 평균 농도보다 높은 101㎍/㎥을 나타냈다. 소음 측정 결과도 성삼재도로 주변은 주간 평균 58.6∼65.3㏈로 국립공원이라는 지리적 특성을 고려하면 낮은 수치가 아니다. 내가 걸으면서 느꼈던 구토와 어지럼증은 상상이 아니라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 하늘에서 본 성삼재도로. /김인호 시민기자 자동차 문화가 보편화된 세상에서 성삼재도로를 달려 지리산국립공원에 오르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1100m 깊고 높은 곳에, 그것도 우리나라 제1호 국립공원인 지리산을 달리는 도로가 어떻게 생길 수 있었을까? 구례 천은사에서 남원시 산내면을 연결하는 성삼재도로는 1985년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차관을 포함한 약 68억 원 예산으로, 1988년 서울올림픽을 보기 위해 우리나라를 방문한 외국인들이 지리산국립공원을 편하게 관광하도록 건설됐다고 한다. 성삼재도로와 함께 남원시 주천면 고기리와 산내면 달궁을 연결하는 정령치도로를 건설하고, 1991년에는 성삼재주차장을, 1993년에는 정령치주차장을 만들면서 지리산국립공원은 이리저리 잘리고 파헤쳐졌다. 성삼재·정령치도로로 야생동물 이동통로가 단절되면서 연간 100건 정도의 로드킬이 발생하고, 도로를 건설하면서 심은 외래 수종들로 도로 주변 생태계와 경관은 변화하고 있다. 성삼재·정령치도로는 지리산국립공원의 이용행태를 바꿔 놓아, 도로가 생기기 전과 비교하여 지리산국립공원 탐방객은 2배, 노고단 탐방객은 7배나 증가했다고 한다. 화엄사에서 시작해 연기암을 지나 국수등, 집선대, 코재를 땀 흘리며 천천히 걸어야만 오를 수 있었던 1507m 노고단은 성삼재까지 자동차로 오를 수 있는, 슬리퍼를 신고도 갈 수 있는 유흥지가 된 셈이다. 1988년이니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는 지리산국립공원 심장부까지도 아스팔트 도로를 깔아 돈만 벌면 되는 시대였고, 도로가 건설되면 지역에 큰 이익이 된다고 생각했던 시대였다. 그러나 도로만 건설되면 잘살 수 있다는 '도로 신화'는 지리산자락 마을들을 스쳐 지나는 관광지로 만들었다. 성삼재·정령치도로가 생기기 전, 지리산 아래에서 하루 묵고 지리산에 오르던 등산객들, 밥도 먹고, 차도 마시던 도시 사람들은 이제 물까지 사 가지고 온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지역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 성삼재도로에 뒤엉킨 차량들. /윤주옥 시민기자 이런 지역사람들의 불안한 마음을 비집고, 표면 뭐든지 된다는 정치인과 돈을 따라 움직이는 토건업자들은 지리산에 케이블카와 산악열차를 건설하겠다고 한다. 2012년 남원시, 함양군, 산청군, 구례군은 지리산국립공원 반야봉, 천왕봉, 노고단에 4개의 케이블카를 올리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다행히 환경부 국립공원위원회가 모두 부결시켰지만 지금도 틈만 나면, 선거가 가까워지면 지리산 케이블카를 이야기한다. 정치인과 토건업자들은 케이블카만이 아니라 산악열차도 필요하다고 한다. 하동군은 형제봉에, 남원시는 성삼재·정령치도로에 산악열차를 깔겠다고 나서고 있다. 4개의 케이블카와 2개의 산악열차, 이것이 우리가 꿈꾸는 지리산국립공원일까, 왜 이 지경까지 되었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다. 5월 1일, 나는 남원시가 계획 중인 지리산 산악열차 1구간인 정령치도로를 걸었다. 부슬부슬 비가 내려 스산하고 싸늘한 날씨였다. 그러나 걷기를 시작하자마자 만난 초록의 향연은 시끄럽던 마음을 위로하고 평화롭게 했다. 3시간쯤 걸어 도착한 정령치엔 우박이 내리고 있었다. 자연의 변화, 숲의 냄새, 새 소리, 모두 천천히 걸어야만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함께 걸은 분들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다. 질주하는 오토바이에 무서웠지만 고추나무 꽃을 가까이서 볼 수 있어서 좋았다고 했다. 나는 성삼재·정령치도로가 도로가 아니라 산길이라면 더 좋겠지만, 도로여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성삼재·정령치도로를 지금처럼 놔두고, 똑같은 방식으로 이용하면서, 지리산국립공원 보전을, 반달가슴곰과의 공존을, 녹색뉴딜과 탄소중립을 이야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보호지역 중 보전의 정도가 가장 높다는 국립공원에, 1100m 고지에, 1년이면 45만 대 이상의 차량이 아무런 제한 없이 달릴 수 있다는 현실에 환경부와 국립공원공단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닌가 싶다. ▲ 지난달 29일 열린 성삼재·정령치도로 전환연대 출범식. /정결 시민기자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좋은 방법은 성삼재도로의 아스팔트 포장을 뜯어내어 원래 상태로 복원하면 된다. 그런데 지금 당장 그럴 수 없다면 도로 이용 방식을 바꾸면 된다. 일반차량은 지리산 아래에 놓고, 지역주민들이 운영하는 친환경 차량을 타고, 지리산국립공원의 과거와 지금, 이곳에 사는 야생 동식물에 대해, 지리산 곳곳이 간직한 이야기를 들으며, 지리산국립공원으로 들어가면 된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과 단체들은 지난 4월 29일 국회 앞 산림비전센터에서 '성삼재·정령치도로전환연대'(이하 전환연대)를 출범했다. '전환연대'는 기후위기시대, 탈탄소사회로 가는 길에 성삼재·정령치도로는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장기적으로 모색함과 함께, 당장의 과제로서 일반도로인 성삼재·정령치도로를 국립공원도로화해 일반차량의 출입을 통제하고, 구례와 남원의 주민들이 공동운영하는 친환경 전기버스만 다닐 수 있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나는 전환연대의 활동으로, 전환연대와 같은 뜻이 있는 지역사람들과 국민의 바람으로 지리산국립공원에 새로운 역사가 쓰일 것이라 기대한다. 1967년 지리산국립공원 지정, 1988년 성삼재·정령치도로 건설, 2004년 반달가슴곰 복원사업 본격적 시작과 함께 2025년, 2030년의 어느 날이, 성삼재·정령치도로의 정의로운 전환의 날로 기록될 것이라고 믿는다. 지리산은 우리나라 제1호 국립공원이며 사람과 야생 동식물 모두의 삶터이며, 생명의 산이다. 현 세대가 이 땅을 떠나도 100년, 200년, 1000년 이곳에 있을 지리산과 지리산에 깃들어 살아가는 생명들을 위해, 그리고 기후위기시대에 국립공원이 먼저 나서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성삼재·정령치도로의 전환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 이 기사는 경남도민일보에 실었던 기사를 재수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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