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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날의 지리산 성지순례(聖地巡禮)
    그날의 지리산 성지순례(聖地巡禮) 성염 (자문위원) 지난 6월 25일, ‘지리산종교연대’가 산청함양추모공원에서 기도회를 열었다. 한국전쟁 71년을 맞아서 불교, 천주교, 개신교, 원불교가 ‘좌우 남북 대립에 스러져간 영령들을 기억하고 한반도의 영구적 평화정착을 위해 드리는 생명평화 기도문’을 함께 작성해서 종단별로 번갈아 낭송한 다음, 경건한 침묵 중에 공원을 한 바퀴 돌며 묘역에 참배하였다. 1951년 2월 7일 전쟁의 공포 속에서도 설날을 맞아 늙으신 부모님 슬하로 모인 민간인 705명이 대한민국 군인들에게 집밖으로 끌려나와 학살당한 흔적이다. 묘석에 적힌 생몰 연월일로 보아 희생자 거의 절반이 10세 미만의 어린이, 나머지 절반이 아낙네들이었다. 그런데 묘역을 참배하는 ‘종교연대’ 사람들의 양심을 더욱 참담하게 누른 것은, 국민을 지키는 국군이 산골 어린이들 머리에 방아쇠를 당기는 범죄를 자행한 용기가, 기독교 장로대통령 이승만이 “남녀 아동이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여 반역적 사상이 만연하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서에서 기인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날 하늘에 올려진 종교인들의 기도문은 “희생자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지금 여기에서 좌와 우, 남과 북의 생명평화의 길을 닦게 해주소서!”라는 염원으로 이어졌다. 죽음의 공포에 떠는 어미 품에 안겨 세상 모르던 젖먹이들, 할머니 치마폭에 싸여 벌벌 떨다 머리에 총을 맞고 쓰러진 저 아이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을 수 있다?’ 지리산의 근대사만으로도 동학운동을 일으켰다 우금치에서 패퇴하여 뱀사골로 들어왔다 관군에 몰살당한 농민들, 여수 순천에서 몰려 피아골로 들어섰다 토벌대에 총 맞아 죽은 시민들, 산청 방곡 고향집에 모여 설을 쇠다 끌려나와 국군의 손에 학살당한 아녀자들의 죽음이 무슨 보람을 낳을 수 있단 말인가? 필자도 종교를 신봉하지만 ‘선한 창조주가 선한 인간을 만들었다’는 교설보다 인생 자체가 생로병사로 엮어진 고해(苦海)라는 가르침에 더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래도 지구상에 만연한 인생고, 더구나 무죄하고 무구한 어린이들의 기아와 병고와 죽음을 목도하노라면 사찰 본존의 은은한 미소에서도 가슴을 쓸어내지 못한다. 다만 굴곡 많은 현대사에서 월남이나 한국의 스님들이 올려온 소신공양(燒身供養)이나 등신불(等身佛)의 일그러진 표정에서는, 숨 끊어진 시신으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단말마에서는 언뜻 해답도 비칠 듯하다. ‘무죄한 자의 고통과 죽음’이 타인을 살리는 희생(犧牲)이라는 종교적 교설이 맞다면, ‘과거사위원회’의 추산으로 6.25 전후 대한민국 군경의 손에 학살당한 민간인이 150만이라니까, 가련한 민족사의 구비마다,지리산 능선과 골짜기마다 세워진 무수한 십자가들이 속삭이는 것 같다. “우리 혼백이 지리산 자락에서 가냘픈 몸뚱이를 벗던 순간 이 반도 속으로 우린 스며들었다오. 저기서 우린 이 땅에 살아갈 겨레의 번영을 도모하는 기운으로 되살아나고 있다오!” 그래서 노고할매 치마에서도 끝자락 방곡에 세워진 추모공원은 민족사의 성지(聖地)였고 그 작은 묘석 밑에 한 줌 흙으로나마 묻힌 어린이들은 세계 유일의 분단을 털고 일어나라고 겨레를 일으켜 세우는 순교자(殉敎者)들이었다! 그날 우리 기도회는 참 경건한 성지순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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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26
  • 기상청 산악날씨 정보
    기상청 산악날씨 바로가기http://www.kma.go.kr/weather/forecast/theme_national.jsp?areaCode=11H002P0#노고단날씨 #기상청산악날씨 #만복대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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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23
  • 꿈을찾는농부들 침수된 땅에 서다.
    <수해로 인해 망친 옥수수 > 8월8일 아침 멀리 섬진강이 넘실넘실 둑을 넘는 것이 보였다. 마을 앞 정자 넘어 까막정이뜰이 잠기기 시작했다. 이 곳은 비가 많이 오면 자주 잠기는 곳이었기에 별일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시간이 좀 더 지나고 19번 국도가 잠기기 시작했다. 논 옆에 있던 저온저장고가 잠기기 시작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배처럼 떠 오르기 시작했다. 마을 앞을 나가 보기 그 사이 마을 앞 모든 논이 물에 잠겼다. 불과 두 세 달 전에 새로 만들었던 하우스 하나가 물속으로 사라졌다. 섬진강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한 마을 사는 현근종씨 하우스가 물속으로 사라졌다. 그 안에 고추와 옥수수 그리고 아피오스가 심어져 있었다. 지금은 모두 사라졌다. 섬진강에서 넘친 물들이 점령군처럼 마을과 논 그리고 축사를 물속으로 집어넣고 있었고 갈 곳 없는 소들은 섬진강 둑에서 잠긴 축사를 그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뉴스 속보로 남원 금지면의 제방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렸다. 남원에서 농사를 짓는 김동일 농부에게 전화를 했다. 집과 하우스가 모두 물에 잠겼다고 했다. 섬진강 하류지역인 남원 금지면 하도마을의 하우스 지붕까지 물이 찼다고 했다. 하도는 감자농사를 많이 짓고 맛도 좋은 곳이다. 김동일 농부도 하도에 비닐 하우스가 6동이 있었다. 몇 년 전부터 일이 힘들어 그만 두려고 했다면서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물에 찬 하우스는 고물상에 이야기해서 전부 철거를 해가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가보기도 싫고 치우기도 힘들고 해서 안 가보려고요." 그게 15일 전인데 며칠 전 전화를 했더니 잠긴 하우스를 정리해서 토마토를 심었다고 했다. 겨울에 나올 딸기 모종도 다시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물에 잠겼던 하우스에는 10월이 되면 다시 붉은 토마토가 열릴 것이다. 땅은 사라지지 않았고 농부도 그대로 남았다. 구례 심문희 농부 하우스도 물에 잠겼다. 대부분 살아 남지 못했지만 다행이 몇몇 농산물은 그래도 멀쩡했다. 줄을 타고 오르는 여주나 수세미가 살았다. 죽은 것도 있지만 살아남은 것들도 있었다. 죽은 것이 더 많지만 하우스가 멀쩡하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했다. 홍수는 갑자기 농부들을 터전을 덥 쳤다.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하우스가 물에 잠기고 물은 침수당 했다. 소들은 죽어 나갔다. 죽은 소들 옆에서 농부들은 절망했다. 아직 희망을 이야기하기에는 그 피해가 너무 크다. 하지만 땅은 그대로 남았고 농부도 여전하다. 다시 시작해야 지… 별 방법이 없잖아. 전화기 넘어 한숨과 함께 말하던 그 목소리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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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14
  • (영상) 지리산을 그리는 화가 이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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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14
  • 툇마루 수다
    한승명 (지리산생명연대 사무처장) 저는 지리산(산내면)에 깃들어 어머니를 모시고 두 아이를 키워내고 이제는 <지리산생명연대>에서 함께 지리산이 되자고 총총 걸음을 걷고 있는 아낙입니다. 봄볕 따사로운 툇마루에서 봄나물 다듬듯 잘 아시는 이야기 하나 풀어놓을게요. 한 농부에게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어느 날 더 많은 황금알을 갖으려고 거위배를 갈라보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거위는 죽고 뱃속에는 창자와 똥뿐이였습니다. 농부는 울상이 되었습니다. '지리산'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의 우리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황금(돈)인줄 알던 때도 있었고 성공인줄 알던 때도 있었고 사랑인줄 알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리산에 깃들면서 진정 내게 소중한 것은 '생명'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리산을 우러러 어머니의 산, 여신(마고)의 산이라고 칭송하는 것은 모든 것을 내어주고 살려주고 품어준 '생명의 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지리산을 나의 이기와 편리로 파헤치고 자르고 베어 거위 죽이듯 지리산을 죽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곳에 태어나 지리산 덕분에 잘 살아왔고, 스스로 어쩔 수 없는 어려움과 직면하거나 어지러운 세상, 환란을 맞아 살아보고자 깃들은 지리산이건만 그 고마움을 망각한 채 그 지리산이 죽어가고 있는 것은 나와 상관없는 듯 침묵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지금 살아있다는 것은 이 땅을 지키고자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았으며, 모든 생명이 함께 살아야한다고 거리에서 외치고, 어린 자식들을 잃고 슬피 우는 어미들을 안아 주었고, 병든 세상에 맞서 서로를 살리기를 기꺼이 해낸 지리산 같은 이들 덕분입니다. 나는 그들을 주저 없이 '지리산'이라고 부릅니다. 지리산은 제일 높이 솟은 천왕봉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높으니 낮으니 어깨를 걸고 있는 모든 봉우리가 모두 '지리산'입니다. 자신을 내어놓고 서로 돌보고 살리면 내 자신의 생명도 건강하고 풍성하게 살수 있다는 지혜를 지리산은 가르쳐주었습니다. 오늘도 멍청이 잠을 자는 나를 흔들어 깨우는 것들이 있습니다. 기지개켜는 흙, 개구리 울음에 흔들리는 바람, 소녀의 숨소리처럼 달뜬 냇물, 온갖 생명들이 저마다 부르는 노래... 지리산이 이 봄에 내 귀를, 내 눈을, 내 온 몸을 흔들어 깨웁니다. 쑥개떡이나 빚어 이웃과 나눠 먹어야겠네요.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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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01
  • 지리산 아래(下)
    김창승 (섬진강 수해극복 구례군민 대책본부 상임대표) 지리산과 함께 사는 기쁨을 아십니까. 큰산과 더불어 살고 싶다는 꿈은 누구나 꿀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는 없습니다. 갈망하면서도 가까이 갈 수 없는 산, 누구나 어느 때나 다가갈 수 있는 산이지만 특별히 허락된 자에게만 자신의 몸 한자리를 내어주는 산이기에 쉬우면서도 어려운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참배하듯 산을 보며 어떤 인연과 행운으로 지리산 아래(下)로 왔을까? 자문해봅니다. 그건 내 의지와 희망으로 선택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래 전 부터 한 인간의 외로움과 허기 같은 갈증을 지켜보며 그의 자락, 어머니 같은 그의 품으로 불러준 지리산의 호명 때문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지리산이 '김창승' 이름 석 자를 불러주었던 2014년 1월 14일, 그날은 지리산 하(下)에서 새로운 인생의 여정을 시작한 생일 같은 날입니다. 트럭에 짐을 싣고 오는 욕망의 덩어리를 지리산은 두 팔 벌려 그의 품에 안아주며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다!' 시린 등을 토닥토닥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그날로 부터 지리산은 내 영혼의 안식처가 되었고 그의 곁으로 한 발 한 발 다가설수록 쉼표와 느낌표를 주었습니다. 산의 깊은 숨소리에 위안과 기쁨을 느꼈고 둘이서만 나누는 은밀한 대화는 달콤했습니다. 그를 떠나 멀리가면 왠지 어린아이처럼 불안했고 산이 도망가 버릴 것 같은 마음에 서둘러 돌아오곤 하였습니다. 무지개 터널을 지나 지리산과 구례가 한 눈에 보이는 언덕에 서면 나도 몰래 안도의 한숨이 나오곤 했습니다. 지리산중(中)을 돌면서 사람을 만났습니다. 마을 이름도 산을 닮은 그곳에는 야생화 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상죽, 내죽, 상용, 중용, 하용, 상유, 중유, 하유, 상무, 하무… 산에 기대어 살며 산 하나씩을 내면에 끼고 있는 사람들은 겉으로는 무심해 보였지만 인사를 건내면 물 한 잔이라도 하고가야 한다며 옷 소매를 붙드는 속정 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햇볕 드는 마루에 앉아 몇 시간이고 살아온 얘기, 먼저 가신 서방님 얘기, 아이들 모두 잘 됐다는 얘기를 오래된 지인처럼 하시다가 다시 꼭 오라며 손을 흔드는 고향 같은 사람들을 이었습니다. 이런 인연들을 하나씩 쌓으며 지리산 들꽃 같은 사람들 이야기를 마음속 앨범에 저장하면서 7년이란 세월을 꿈처럼 보냈습니다. 지리산 꼭대기(上)에는 흰 눈이 내렸습니다. 산에 기댄 사람들은 눈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추억을 더듬고 산짐승은 깊은 잠에 들었습니다. 백옥의 산을 올려다 봅니다. 아, 깨끗하고 때 묻지 않으며 시류에 흔들리지 않는 세상을 봅니다. 지리산으로 오기 전에는 높이 높이 올라가려는 꿈을 꾸었습니다. 아래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고 낮은 곳으로 내려가려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그 헛된 꿈과 욕심을 내려놓고 이제는 소박한 꿈을 꿉니다. 봄이 되면 들꽃, 산꽃 가득한 마을로 가는 꿈을 꿉니다. 마당에 들어서며 '이모님, 어르신' 그간 잘 계셨는지 안부를 묻고 손을 덥석 잡는 꿈을 꿉니다. 낮은 곳에서 산을 보는 기쁨, 지극히 겸손하나 산을 닮은 옹골진 사람들을 만나는 즐거움, 목숨걸고 지켜온 그들의 깨알 같은 역사를 공유하는 특별함, 작은 꽃 하나와도 눈맞춤을 하며 대화하는 여유… 이 모두가 지리산의 선물입니다. 가장 평화롭고 생명력 넘치는 것들은 낮은 곳에 있었습니다. 하늘처럼 높고 존귀한 것들은 장엄한 산을 바라보며 기도하듯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있었습니다. 잔잔한 평화로움이 무엇인지, 더불어 함께 가는 삶이 무엇인지, 작은 것 하나라도 함께 나누면 내가 먼저 행복해진다는 평범한 진리를 일깨워준 어머니의 산, 높지만 낮은 곳을 사랑하는 우리들의 영원한 고향 지리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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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01
  • 시민으로 살아가기
    박형규 (기후위기남원시민모임 대표) 2016년 봄, 15년 간 살던 경북을 떠났다. 애초부터 딱히 정해진 곳이 있어서 움직인 건 아니었다. 산정호수 시절부터 20년이 넘게 산골생활을 한 아내는 아이들도 다 나갔으니 이젠 좀 따뜻한 남쪽나라에 가서 살자고 했다. 따뜻한 남쪽나라? 그래 그러면 아예 이참에 쿠바로 가서 살까? 했더니 그건 또 아니라 한다. 그러더니 친정인 무주 안성면에서 1시간 거리 정도면 된다면서 한계를 정해 준다. 임실, 곡성, 장수, 진안, 완주 등 몇 군데 찾아봤지만 별로 내키지 않았다. 그러던 10월 어느 날 지리산 산내 사는 후배를 보러 가는 길이었다. 강변에서 점심을 먹고 잠시 쉬고 있는 데, 흐르는 강물이 편안하면서도 묘한 매력이 느껴진다. 바로 전화를 해서 “여보, 남원은 어때요?” “시내인가요?” “응, 그래” “그럼 거기서 한번 찾아 봐요.” 이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순식간에 남원으로 결정되었다. 박근혜 탄핵운동이 한창인, 11월 중순 경에 세를 얻어 요천가, 죽항동에 살기 시작했다. 이사한 그 주일 박근혜 탄핵운동 남원집행부를 찾아 갔다. 내 소개를 하고 집행부에 함께 동참하면서 남원살이가 시작되었다. 2017년 박근혜 탄핵 직후부터 <직접민주주의 시민남원회의>, <시민참여제도연구회>, <기후위기남원시민모임>의 이름으로 광치동화력발전소 반대투쟁 승리, 남원시민참여기본조례 제정운동을 해왔고, 현재는 기후위기운동과 지리산산악철도 반대운동을 진행 중에 있다. 대부분의 지역 소도시들이 그런 것처럼 남원에도 역시 ‘구체적인 민주주의’가 없다. 남원행정은 지역 주민들의 행복?을 위한 일을 한다면서 전혀 주민, 시민들에게 제대로 묻지 않는다. 남원시엔 16명의 시의원들이 있다. 그런데 이 16명 전부가 다 민주당이다. 게다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일은 임실, 순창, 남원 지역위원장이 현 이환주 남원시장이다. 어찌 이런 파행적인 일이 있을 수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시행정을 견제하고 감시하는 역할을 맡은 자들의 공천권, 그러니까 생사여탈권을 현직 시장이 쥐고 있는 거다. 이건 시장도, 시의원들도 남원시민을 기만하고 무시하는 처사다. 올바르게 돌아가는 지역이라면 행정과 의회, 그리고 시민들이 함께 어우러져 어떤 일이든지 정당한 ‘공론화 과정’을 통해서 진행되어야 하고, 그것은 마땅히 민주적인 사회의 바탕이 되는 기본이다. 남원의 실정이 이런데 시의회가, 시의원들이 제 직무를 잘 감당할 수 있을까? 시장도, 시의원들도 시민을 존중하기는커녕 시민의 뜻과 의사를 전혀 개의치 않는 곳이 남원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가 없다. 2주 전에 남원시 의회가 ‘기후위기조례 입법예고를 했다. 이는 매우 환영받을 고무적인 일이다. 그런 와중에도 남원시청 기획실에서는 9월 2일에 <지리산 친환경 전기열차 시험노선 유치를 위한 전략분석 및 정책성 수립용역> 심의회 결과보고 공문을 냈다. 처리기간은 1일이다. 매사가 이런 식이다. 지리산산악전기열차는 현재 여러 가지 논란이 일고 있다. 지리산은 남원사람 만의 재산이 아니다. 지리산은 전 국민뿐만 아니라 우리의 후손들까지 함께 누리고 보전해야할 소중한 공유자산이다. 이미 이웃지역 하동에서는 이른 바 ’하동알프스 프로젝트(산악열차, 케이블카, 모노레일)를 반대하는 대대적인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이 엄혹한 기후위기 시대에 개발과 토건을 중지하고 근본적인 정책전환을 도모 하지는 못할망정 이명박의 4대강과 다름이 없는 국립공원을 개발을 하겠다고 하는 망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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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01
  • ‘17년 지리산 살이’
    문미랑 (경상남도환경교육원) 대학을 졸업하고 빛나는 20대 시절에 나는 지리산에 살고 있었다. 구례 화엄사 황전마을 부근에서 5만 원 짜리 월세를 살면서 적은 월급이었지만 우체국의 이자율 9% 짜리 적금을 넣으면서 현재보다 더 빛나는 미래를 꿈꾸며 살고 있었다. 그 당시 나는 드라마 속 밝고 긍정적인 주인공처럼 살아갔던 것 같다. 새소리를 들으며 ‘오늘도 파이팅!’을 외치며 일어나, 어제 보았던 야생화의 꽃봉오리가 폈겠지 하는 설렘으로 카메라를 챙겨 출근을 하여, 동료들과 탐방로를 올라 식물 공부를 하면서 하루를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환상적인 직장 생활이었고 주변에는 내가 좋아하고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들과 함께 했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지리산국립공원관리공단(현 국립공원공단)에서 근무하는 것이 행복했다. 해설을 하거나 외부 강의에 나가면 자랑처럼 나는 이야기했다. 하고 싶은 일, 내가 좋아하는 일, 내가 잘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벌고 사는 삶이 너무 감사하다고 말했다. 실로 그 시절에는 그랬다. 현재 나는 43살이다. 중년이라고 불리는 나이이고 조심하지 않으면 꼰대라고 뒷담화를 들을 수 있는 나이이다. 현재 나는 지리산국립공원 중산리에서 근무하고 있다. 나의 소속은 국립공원공단에서 경상남도 소속으로 바뀌었고 그 사이 하동군 소속으로 7년간 하동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나는 평생 지리산 부근에서 돈을 벌고 생활을 하고 사람을 사귀며 살아가고 있다. 지리산을 무대로 직장생활을 하면서 많은 일들을 했다. 그리고 나의 이름을 아는 사람들도 지리산권 마을마다 몇 명씩은 생겨났다. 지리산 어느 동네를 지나더라도 밥 먹을 사람, 차 한 잔 같이 할 사람이 생겼다. 하지만 3번의 직장을 옮기며 구례, 하동, 산청으로 다니면서 한곳에 정착을 하지 못했다. 지리산권 어디를 가더라도 아는 사람이 있고 만날 사람이 있는 나지만 나는 17년이라는 시간동안 어느 지역에도 정착하지 못했다. 이곳이 내가 사는 곳이다 고 아직 말할 곳이 없다. 지금 근무하는 산청으로 온지는 이제 일 년 하고 6개월이 지났다. 아직도 적응기이고 아직도 누군가를 사귀기에 낯을 가리고 있다. 아주 오래전 천은사에서 가졌던 모임에서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하는 자리가 있었다. 진행자가 유도 하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은 자기들이 지리산에서 살게 된 이유를 자신의 소개와 함께 이야기 하고 있었다. 나도 그때 그 모임에서 내가 지리산에서 살게 된 이야기를 소설처럼 이야기 했던 것 같다. 그런 와중 뒤에서 누군가의 삐죽거림이 들렸다. “다들 지리산 병에 걸렸구나. 와서 망치지나 말았으면” 그분은 내가 아는 누구보다 지리산을 사랑하시는 분이셨다. 그 모임 이후로 나는 그분을 볼 때 마다 주눅이 들어 은근 피하게 되었다. 그때 내 나이 30대 초반이었다. 무엇이 그렇게 내 양심을 찔리게 한 건지 나는 오랫동안 그 이유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작년부터 번아웃(burnout)도 왔고, 20대의 마음처럼 내가 하는 일이 마냥 즐겁지도 않고 지리산 살이가 완전히 행복하지도 않다. 그리고 나는 가끔 직장을 탓하고 나를 힘들게 하는 주변 사람들을 혼자 미워하기도 한다. 제발 좀 쉬고 싶다는 생각과 26살의 나로 돌아 갈순 없지만 43살의 지금의 나로 계속 살아가는 것은 참 슬플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이다. 나는 천은사 회의 때 이야기했던 지리산 살이 찬양을 지금까지 지켜내지 못하고 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나를 비롯해 그저 왔다갈 사람들이 영원히 살 것처럼 이야기하며 지리산을 망쳐놓고 떠나버리는 모습이 야속해서 그분은 독설을 하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양심에 그분의 독설에 눈치를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지리산인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원고 펑크도 냈었고 매번 원고마감이 다되어서야 편집자의 속을 썩이며 원고를 냈었다. 모자란 글 솜씨로 열심히 쓰려고 노력은 했지만 바쁜 직장생활 핑계를 대며 정성들여 쓰지를 못했다. 일이 바쁘고 원거리 인터뷰의 험난함을 이유로 나는 5월 편집회의에서 편집위원 자리를 내어 놓았다. 그리고 17년 동안 지리산 살이에 정착하지도 못한 내가 ‘지리산 사람들’의 이야기를 써나간다는 것도 나에겐 모순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뭐 하나라도 들어내고 쉬고 싶다. 이제는 좀 쉬면서 내가 정착할 곳에 정을 들여야겠다. 정착할 마음의 끈을 다잡아야겠다. 글하나 안 쓴다고 내 생활이 엄청나게 편해지지 않을 것을 알지만 그래도 당분간은 일을 하나씩 줄이고 17년 지리산 살이의 결론을 좀 내려야겠다.
    • 사람이야기
    2021-06-01
  • 나의 주인은 나
    문미랑 (경상남도환경교육원) 언제부턴가 차 안에서 음악을 듣는 대신 명사의 강의나, 읽어 주는 라디오 책을 듣게 되었다. 나는 음악을 참 좋아했던 사람이었다. 나는 음악을 들으며 멜로디를 통해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져 고독을 즐기기도 하고 고민의 답을 찾아내기도 했었는데 언제부턴가 이것들이 스트레스로 느껴져서 명사가 ‘이렇게 해라’, ‘저것은 틀렸다’ 하는 가르침을 받는 편이 편해져 버렸다. 예전처럼 음악을 삶에 담고 있지 않는 것이 나이듦의 시작인가 하는 씁쓸한 생각도 들지만 이제부터는 마음도 몸도 편안하게 살고 싶은 것이 나의 솔직한 마음이다. 구례에 사는 김동관씨를 만났다. 그와는 조금의 친분이 있는 사이이다. 그는 집짓는 목수, 철학을 논하는 명상가이다. 나는 명상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내가 아는 명상은 가부좌를 틀고 손을 무릎 위에 올려 눈을 감고 마음을 평온의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김동관씨는 무척 말라 있었다. 내 기억 속에 그는 덩치가 꽤 크고 노래를 잘불렀던 사람이었는데 왜소한 그를 만나니 조금은 낯설게 느껴졌다. 1991년에 지리산살이를 시작한 그는 구례에서 꽤 유명한 사람이다. 그를 유명하게 한 것 중 하나는 목수 일이다. 나도 그가 지은 집과 집주인을 몇 분 아는데 그가 지은 집은 대부분 그 집에 사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그가 지은 집을 보고 느껴지는 것들의 공통점은 집이 사람과 닮아있다는 것이었다. 시인의 집은 시를 읽는 듯한 느낌이고 외로운 홀아비의 집은 사랑을 찾는 이의 쓸쓸함이 느껴졌던 것 같다. 그리고 자연속의 일부인 듯한 자연스러운 어울림이 그가 공정에 참여한 집들이 갖는 공통점이었다. 그와 ‘명상과 삶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솔직히 나는 간간히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기도 했고, 어느 부분에서는 그가 몽상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그 혼란 속에서 한 시간이 금방 가버렸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음악듣는 것을 즐기지 않게 된 후에는 생각의 늪에 사로잡히는 것이 귀찮은 나였는데 그와 대화를 이어 갈수록 나는 내 속의 질문과 고민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리고 우연히 나온 로드킬 이야기를 하면서는 로드킬의 공포로 밤길 운전이 두려워 밤에 활동하지 않는 나의 문제도 이야기하게 되었다. 그가 했던 말 중에 기억에 남는 구절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똑바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살자. 나는 어디에서든지 명상을 한다. 일상 속에서도 명상을 하고 지금처럼 대화를 하면서도 명상을 한다. 나는 스트레스가 전혀 없어요. 생명의 본질을 깨닫고 매 순간 내 삶에 최선을 다하는 자세로 살아가면 그게 진정한 사랑입니다. 진정한 사랑을 이루면 스트레스는 자연히 없어집니다. 자신의 껍데기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 많아요. 육체는 노예처럼, 감정은 하인처럼, 생각은 지나가는 바람처럼 살아 가다 보면 내 자신의 주인은 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제 아이들에게 늘 강조했던 말은 다섯 가지입니다. 무해(無害), 남에게 절대로 해를 끼치는 일을 하지마라. 진실(眞實), 진실로 상대방을 대하라. 성실(誠實),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라. 매순간 내 인생에 충실해야 후회가 없다. 절제(節制), 지나치지 말고 절제하라. 성찰(省察), 자신을 돌아 보고 반성하며 살아라.” 명상을 하든 일을 하거나 음악을 듣든, 로드킬이 염려되는 길을 운전해가든지 우리는 껍데기를 위해 살지 말고 내 자신의 주인으로 나를 사랑하고 살면 필요없는 염려를 버리고 진정한 사랑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을 그는 나에게 끊임없이 힘주어 강조했다. 집으로 가는 길은 어두웠다. 강 옆에 있는 시골길을 운전해 가면서 나는 음악을 틀었다. 12월 U2공연이 서울에서 있다는 소식을 얼마 전에 인터넷에서 본 것이 기억나서 U2의 음악을 들으며 운전을 했다. 나는 음악을 들으면서 너무 고민하지 않았고 운전을 하며 사고가 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갖고 천천히 조심스레 운전했다. 더 이상 음악은 스트레스가 아니었고 시골길 로드킬에 대한 공포도 시나브로 사라져갔다. 나는 그와 인터뷰를 하는 내내 명상으로 깨달음을 얻었음을 알 수 있었다.
    • 사람이야기
    2021-06-01
  • 지리산 마루금처럼 고운 자연주의자
    문미랑 (경남환경교육원) 내가 일하는 경상남도 환경교육원은 지리산 중산리 산 속에 위치해 있다. 퇴근을 하고 인터뷰를 하기 위해 산을 내려가는 길가에 노란 꽃들이 풍성하게 피어 있다. 무슨 야생화일까 궁금하여 잠시 차를 세울까 고민하다가 피나물이겠지 하고 지나쳤다. 산청 중산리 버스주차장에서 계곡의 다리를 건너 최문옥님네 집으로 갔다. 숲길을 가다가 우연히 쉬어가고 싶은 아늑한 집을 만난 듯한 느낌의 집에서 그녀가 나왔다. 그녀의 집은 모든 소품이 이쁘고 특색 있고 아름다운 조명과 자연을 담은 창이 집과 조화를 이루어 숲속 카페에 놀러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최문옥님은 2001년 지리산 산청 고향마을에 32세의 나이에 남편과 함께 귀촌해서 지리산에 정착했다. 그녀와 남편의 집은 중산리 계곡 옆에 위치해 있는데 귀촌했을 당시 부부의 집만 있고 주변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다고 한다. 지리산을 찾은 사람들이 차도 마시고 정답게 쉬어 갈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 보자는 생각을 한 부부는 ‘나무와 집’이라는 유명한 건축 회사에 가진 돈 전부를 들고 가서 본인들이 생각하는 집을 지어달라고 했다 한다. ‘나무와 집’에서는 그 돈으로는 집을 지을 수가 없으니 돈을 더 벌어오라고 했지만, 부부는 모두가 찾고 여행오고 싶어 하는 지리산에 작품같은 집을 지으면 도시 뿐만 아니라 지리산권에도 홍보가 되어 회사의 이미지에도 큰 도움이 될 거라며 회사를 설득해 집을 지었다고 한다. 30대 초반의 부부가 눈을 반짝이며 열정을 뿜어내 이야기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녀는 지리산국립공원의 자원활동가다. 19년째 자원활동가로 일하고 있으며 식물, 곤충, 기후모니터링, 해설활동까지 하는 다재다능한 시민과학자이기도 하다. 2014년에 지리산국립공원의 시민대학은 ‘유네스코 한국위원회’로부터 지속가능발전교육(ESD) 공식 프로젝트를 인정받았다. 이는 지리산권의 마을과 주민을 대상으로 생태, 환경, 인문학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여 국립공원관리공단과 마을주민들 간의 소통의 장을 마련하게 되었다. 아울러 환경인식 변화, 자연훼손 방지 및 복원사업 등의 성과를 낳게 된 것도 시민대학의 힘이었다. 12년동안 이어져 오고 있는 자원봉사활동과 시민대학의 중심에 그녀가 자리하고 있다. 예전에 국립공원 직원과 탐방로를 가는데 분뇨 냄새가 나니까 직원 왈, 사람들이 산에 와서 화장실이 급하니 아무데서나 볼일을 본다고 말하길래, “아니에요. 이 냄새는 금마타리라는 식물에서 나는 냄새예요. 그래서 패장이라고도 해요.”라고 알려줘서 지역의 신문에 특색 있는 식물 소개를 인터뷰하기도 했다 한다. “‘꿩의 바람’이라는 꽃을 아세요? 중태마을에만 있는 식물인데요. 봄에 꿩이 울 때 핀다고 이름을 ‘꿩의 바람’이라고 부른데요.” 둘레길에 도로공사를 한다고 중태마을에만 있는 ‘꿩의 바람꽃’이 없어질 위기에 놓여서 그녀가 ‘숲길’에 소식을 전해 다른 곳에 옮겨 복원중이라고 전한다. 식물을 전공한 나지만 그녀 앞에서 식물 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다. 그리고 좀 전에 산을 내려 올 때도 노란 군락의 꽃을 보며 짐작만 하고 지나쳐 온 내가 아니었던가. 자연생태사업과 환경교육이 본업인 내가 그녀의 열정 앞에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귀촌해서 지금까지 자연이 소통의 장이었고 취미생활이었으며 가장 소중하게 지켜내야 할 곳이라고 생각한다는 그녀의 지리산 사랑은 끝이 없다. 부드러운 목소리 속에 그녀가 생각하는 자연 사랑이 너무도 대단하여 만난 후 질문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 체 대화가 이어져 나갔다. “식물 공부를 하고 자원활동을 하면서 지역의 숨은 인재들을 만나고 국립공원과 마을 주민들을 만나서 인연을 쌓아가고 소통해 가며 살아갈 수 있어서 너무나 좋아요. 제가 자원봉사활동을 하면서 고맙고 도움받은 일들이 외려 많아요.” 라고 말하는 그녀. 내면이 꽃보다 아름다운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몇 달 동안 일에 치여 개인생활도 없이 살았던 나의 현실에 위로와 힐링이 되었다. 인터뷰도 끝나지 않았는데 나는 “저 다음에 또 놀러 와도 될까요?” 하고 사적인 질문을 했다. 그녀는 본인이 없으면 뒷마당에서 책이라도 읽고 가라고 고운 미소로 웃어 준다. “해설을 처음 시작할 때는 식물 공부에 너무 심취해서 식물 위주로 했는데 요즘은 자연과 삶의 소통을 가져올 수 있는 쪽으로 하고 있어요. 지리산은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치유해주고 모든 것을 받아주잖아요. 산 중의 어른산이 지리산이잖아요. 이런 지리산이 삶의 공간이라는 것이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따뜻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가는 그녀를 보니 마치 지리산의 능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바쁜 일상으로 모나고 각졌던 내가 그녀로 하여금 오늘은 잠시나마 부드러워지게 되었다.
    • 사람이야기
    2021-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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