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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규장각 의궤와 귀환
- 예전 KBS에서 보여준 정조의 화성 축성, 그리고 화성행차를 다룬 다큐를 보고 의궤의 정밀함과 세련됨 알게 되었습니다. 사치스런 아름다움과 세련된 아름다움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빛나는 유산이라 생각했죠. 박흥신의 '반환 교섭 막전 막후, 외규장각 의궤의 귀환'과 유복렬의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와 외교관 이야기". 무도한 제국주의 프랑스 군대의 방화와 노략질에 잃었던 의궤들의 귀환 과정을 자세히 설명한 두권의 책은 재미있고, 잘 읽히며,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좋은 책이죠. 의궤 반환 실무자였던 참사관 유복렬과 현장 최고 책임자였던 프랑스 대사 박흥신의 동일 시점, 동일 주제 다룬 이책들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고구마 몽땅 먹은 듯 답답하기도 합니다. 현장 책임자와 실무자의 글을 함께 읽으니 당시 현장과 협상 과정이 확실히 파악됩니다. 거의 틀림없을 겁니다. 물론 책들은 같은 듯 서로 다릅니다. 재미는 유복렬의 손을 들지만, 박흥신의 책도 또다른 정보와 재미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함께 읽어야 전체 과정이 완전히 손에 잡힙니다. 읽으며 생각이 많았습니다. 천주교 박해에 의해 처형당한 9명의 신부와 그에 따른 정당화 논리, 사냥개 처럼 논의에 풀어놓은(고의로 풀어 놓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프랑스국립도서관 상송사무장, 뻔뻔한 '문화재 불가양 원칙'. 과연 문화와 영토 문제는 이성만으로 해결 할 수 없는 문제가 맞는 것 같습니다. '문화'는 아름답고 고귀한 것으로 인식되지만, 이것 만큼 '차별과 배제 그리고 우열'를 손쉽게, 편리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개념도 없습니다. 문화는 종교와 함께 제국주의의 첨병이기도 했습니다. 반환이 끝난 마당에 많이 주제넘는 생각이지만, '대여' 형식으로 그 귀중한 의궤를 국내에 들여 놓는것이 과연 실용적인 판단이었는지 계속 머리에 맴돕니다. 차라리 거부하고 경제나 외교협상에서 계속 프랑스 압박 카드로 활용하는 것이 더 실용적이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책을 읽으며 오히려 우리 정부와 협상 담당자들이 서두르지 않았나 하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아마도 의궤 반환을 자존심 회복으로 여긴 국민 정서가 작용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너무나 소중한 책이지만, 오히려 너무 소중해서 무엇이 명분이고 무엇이 실리인지 곰곰히 생각해 보게 만드는 책이었습니다. 권해봅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 임시 사서로 근무하던 1975년, 국립도서관 별관창고에서 '조선의 의궤'들를 발견하고 세상에 알리신 고 박병선 선생을 기억합니다. 전문가가 아닌 지식인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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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시인의 사회
- 가난한 시인의 사회 -박두규 시인 오래전, 한 시인의 죽음을 두고 많은 시인들은 ‘한 시대의 퇴장’이라는 말을 했다. 그는 충분히 그럴만한 상징성이 있는 시인이었다. 1980년대 벽두에 처음으로 노동자 문학이라는 영역을 일궈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또 문단에서 비중 있는 중견시인으로서의 문학적 성과도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이념적이고 정치사회적인 시만을 쓰며 투사적 삶을 산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서정성 짙은 본류의 문학을 했고 그런 성과를 이룬 많은 시들이 그것을 말해준다. 하지만 그랬대서 그의 죽음을 ‘한 시대의 퇴장’이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죽음을 ‘한 시대의 퇴장’이라고 말한 것은 순전히 그의 일상적 삶이 가졌던 상징성 때문이다. 그는 부안군 변산 출신이며 전주고 1년을 마치고 중퇴한 ‘박영근’이라는 시인인데 그의 일상은 여느 현대인의 일상과는 너무나 달랐다. 일반인의 눈으로 보면 한마디로 대책 없는 사람이었고 그를 이해하는 시인들의 눈으로 보면 이 시대의 형벌을 대속하는 자와도 같았다. 이 시대의 가장 큰 형벌이자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벌은 무엇일까? 그것은 죽음도 아니고 바로 가난이다. 현대의 가난은 단순히 물질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굴욕적인 것이며 비속해지는 것이며 비굴해지는 것이고 인간으로서의 지위를 잃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가난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사람들이 바로 현대인들이다. 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와 일상의 삶이 그렇게 구조화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시인 박영근은 그 가난의 중심에 있었다. 그리고 자본을 최고의 가치로 두는 현대라는 괴물에 저항하며 온몸으로 싸우던 전사였다. 무슨 사상과 조직을 가지고 기획된 싸움을 진행했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그의 일상생활이 그랬다는 것이다. 적어도 그는 돈에 구속되어 있지 않았고 어쩌면 자유로웠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적어도 그에게 가난은 두려움으로 존재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나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언젠가 나는 밖에서 행사를 하고 술 한 잔 후에 집에 12시를 넘겨 들어갔었다. 그런데 파출소에서 전화가 왔는데 급히 출두해달라는 것이었다. 박영근이라는 사람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서울에 있어야 할 그가 왜 이 한밤중에 순천의 파출소에 있는 것일까. 나는 급히 파출소로 갔다. 그는 술 한 잔을 하다가 무슨 이야기 끝에 내 이야기가 나왔고 내가 보고 싶었다는 것이다(그는 나의 고등학교 2년 후배다). 그게 전부였다. 그래서 그길로 바로 택시를 타고 전남 순천까지 왔던 것이다. 물론 그의 주머니에는 최근에 받은 몇 푼의 원고료가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혼자 사는 그로서는 한 달도 더 생활할 수 있는 돈이었겠지만 택시비로도 모자란 돈이어서 택시 기사가 파출소에 데려갔던 것이다. 덕분에 나도 그와 밤새워 술을 마시고 다음 날 출근도 하지 못하고 내 일상의 견고한 틀을 한 번 깰 수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런 일을 나만 겪은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다시 말해 그에 있어서 이러한 사건은 일상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에 대한 에피소드는 많지만 어쨌거나 그는 이 자본에 길들여져 가는, 그리고 돈 앞에 무릎 꿇기 시작하는 사회와 사람들에게 억지를 썼던 것만은 분명하다. 아니 그건 분명 억지가 아니라 온몸으로 저항했던 거라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렇게 죽었기 때문이다. 그런 삶은 이 사회에서 죽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그렇게 살았으니까. 그가 새벽 2시건 3시건 거는 전화도 우리의 일상을 깨는 그의 일상이었으며 우리의 일상을 반대하고 이 세상에 저항하는 이 시대 마지막 순정한 영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죽음을 ‘한 시대의 퇴장’이라고 말한 이유는 이제 그처럼 살아낼 사람도, 그런 저항을 수용해줄 사람도 없는, 참으로 고적한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전화를 받고 나서 쓴 졸시 하나를 소개한다. 늦도록 술에 젖다가/ 전화를 거는 시인이 있다./ 새벽 3시가 넘어 전화를 받은 나는/ 갑자기 이부자리 속 남편에서/ 생뚱맞은 시인이 된다.// 창밖의 희붐한 빛살을 타고/ 취한 시인의 목소리가 건너 왔다./ 20여 년 서울 생활에/ 지금도 갈 곳이 없다는 시인의 말이/예전엔 은유로 들렸던 그 말이/ 이젠 그대로 슬픔으로 온다./ 슬픔의 그림자까지 그대로 따라 온다.// 하지만 어느 시인이 말한 것처럼/ 우리도 이젠 눈물도 아름다운 나이가 되어/ 새벽안개에 젖은 시인의 취한 목소리도/ 아무런 저항 없이 내 잠자리에 들어와 눕는다./ 달랑 목숨 하나 걸어 놓고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서글픈 것들도/ 이제는 차라리 아름다움으로 온다.// (졸시「시인의 전화」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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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시인의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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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사람은 두 배 더 재밌는 아버지의 해방일지
- 소설을 자주 읽는 편이다.그것도 가능하면 지역성이 강한 소설을 더 좋아한다. 소설 속의 배경을 이해하고 읽는 소설은 그렇지 않은 것과는재미가 다르기 때문이다. 내 고향을 배경으로 쓴 조정래 작가의 아리랑이 그랬다. 옆 동네 내촌마을과 죽산, 하시모토 농장 등 내가 이미알고 있는 동네가 나오면 소설 속의 인물들이 마냥 소설 속의 인물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구례에 19년을 살았다. 그리고 소설 속에 나오는 지명 대부분을 알고 가본 곳들이다. 소설속의 주요 배경인 아버지를 떠나보낸 산림조합 장례식장은 내가 일하는 사무실에서 고작 400m도 떨어지지 않았다.오거리도 반내골도 가려고 하면 5분 20분이면 가는 곳이다. 반내골은 2008년에 처음 가봤다. 그때 내가 일하던 사무실은 간전면 양동마을에 있었다. 오래된 한옥이었다. 딱 이맘때 볕 좋은 오후에 반내골에 살던 손종안씨에게 전화가 왔다. 토종꿀을 좀 팔아달라는 이야기였다. 문척면 반내골과 간전 양동마을은 고개 하나만 넘으면 되는 지척이다. 별일 없던 나는 그날 오후에 그와 함께 반내골에 갔다. 따스한 가을 햇살이 이제 막 오산에 가려져 가고 있었다. 골짜기 깊은 곳에 마을이 이었는데여기저기 밤과 감나무가 많았다. 그 사이에 산속에서 그는 벌을 키우고 있었다. 집에 들어가 애써 챙겨준 간식거리를 먹고 대충 이야기를 끝냈다. 마을을 떠나오기 전에 동네 한 바퀴 돌아봤다. 여기구나…. 1990년 초에 나는 정지아 작가의 빨치산의 딸을 읽었다. 정지아 작가가 반내골에서 살았던 이야기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여기서 걸어서 문척 다리까지 가려면 두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문척면 반내골에 살던 손종안씨는 작년에 폐암으로 사망했다. 장례식장은 구례 산림조합 장례식장이었다.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의 장례식장과 같은 곳이다. 나는 구례에 산지 꽤 오래되었다. 정지아 작가를 만난 본 기억이 없다. 만난 기억이 있는 것도 같다. 사실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생각해 보니 모 협동조합 사무실에서 인사를 했던 것 같다. 소설은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신 후 장례식을 치르면서 문상을 오는 사람들과 아버지의 관계 그리고 이웃 친척, 아버지의 혁명동지와 동네 술친구들과 얼키고 얽힌 전후 현대사 만큼 복잡하고 슬픈 늙은 아버지들의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이해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이 담긴 중년의 딸 자신의 이야기다. 얼마 전에 끝난 나의 해방일지의 손석구는 매일 술을 마신다. 그것도 매일 소주를 마신다. 작가의 아버지도 매일 소주를 마신다. 지천에 술친구들이 많다. 나는 소주를 마시지 않는다. 20대에는 소주를 잔뜩 마시고 취하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한 번도 취하도록 술을 마셔본 적이 없다. 나의 치열한 삶이 끝났기 때문이다. 작가의 아버지는 영원한 사회주의자로 세상을 떠났다. 혁명을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소주를 취할 때까지 마셔도 될 것 같다. 혁명가의 삶은 치열하고 힘들고 고단하기 때문이다 술 말고는 위안이 되어줄 것이 없다. 내 아버지도 병이 깊어지기 전에는 항상 술을 마셨다. 그 나이 또래의 사람들이 울분을 삭이고 사람을 사귀는 방법이 술 말고는 없었기 때문이다. 가진 돈이 작고 술은 늘가까이 있으니까.. 아버지가 죽어서야 작가는 아버지와 진심으로 화해하고 자신이 아버지를 너무나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니 드디어 자신이 세상과 화해 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소설은 무척이 재밌었다. 최근 읽은 소설 중엔 빠친코 만큼 재밌었다. 더구나 내가 다 아는 동네 이야기지금 사무실에 나가서 오거리에 나가면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이 나오는 소설이니 더 재미가 있었다. 가끔 눈물이 났고 실실 웃고 나니 소설은 끝나 있었다. 페이지 줄어드는 것이 아쉬운 소설은 오랜 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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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사람은 두 배 더 재밌는 아버지의 해방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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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묵은 앵두는 어떤 맛일까?
- 이미지 써클이 찍힌 사진이 없어서 본문 사진은 보리수 열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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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묵은 앵두는 어떤 맛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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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전에 딱 한번 만난 꽃 패모
- 저는 1998년 DJ 취임 초 진주교도소에 국가보안법으로 2년 6월을 선고 받고 복역 중 815 특사로 가석방되어 고향인 운봉고원 샛터마을과 남원시내에서 2022년까지 살고 있는 김태윤입니다. 교도소 복역 중 '작은 것이 아름답다' 와 최재성님의 부패에 관한 책을 교도소 독방에서 접한 후 출소를하면 우리 들꽃을 키우는 농부로 살기로 결심하며 지내던 중.. 유가협 후배의 도움으로 똑딱이 디카를 구입해서 20여년이상 내 방식의 들꽃 사진만 찍고 있는 바보 촌놈입니다. 그때는 이론교육도 디지털에 대한 지식도 없이 막 샷을 날리며 사는 촌놈였습니다. 첫 들꽃사진은 어떨 결에 인월에 사는 사회 친구 토종꿀벌 농장에서 찍었습니다.. 촛점도 노출도 엉터리로 찍었는데.... 우연히 잘 나온 사진이 패모였습니다. 이 꽃에 대한 정보도 몰라서 전북대 교수님에게 문의하여 알게 된 이름이 "패모" 였습니다. 지난 20년 간 지리산 권에서 특히 남원 권에서 찍은 사진을 시간이 나는 되로 사진으로 소통할까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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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전에 딱 한번 만난 꽃 패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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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우씨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서울대 출신 건축가에서 버섯 농부가 된 정철우씨 안녕하세요. 네 오랜 만입니다. 저 예요. 아... 네. 퇴근 길에 지인에게 전화가 왔다. 구례에서 버섯을 키우는 농부가 있는데 도움을 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어디로 갈 것인가?> 나는 황금빛으로 빛나는 오미리 들판에 넋이 나가 있었기 때문에 그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네. 알겠어요” 라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집에 도착해보니 문자가 와있었다. 그 농부의 연락처였다. 다음 날 출근해서 농부에게 연락을 했다. 농장은 사무실에서 차로 2-3분 거리에 있었다. 오후에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 직접 지은 버섯농장 > 농장은 구례 서시천변에 있었다 2년 전 수해로 이 지역은 지붕까지 잠긴 곳이었다. 5-6년 전에 귀농 했다는 이야기를 어제 들었으니 수해를 피해가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마트에서 만나는 거의 모든 버섯은 실내에서 키운다. 자본 집약적 농업이다. 버섯은 식물이 아니다. 그렇다고 동물도 아닌 균사체다 균사체라는 것은 균의 덩어리라는 뜻에 가깝다. 버섯은 균의 몸덩어리 근육에 가까운 것이다. 균은 동물에 가깝고 그것도 민감한 동물이다 그는 농장에 있었다. 정철우라고 했다. 서울대 건축과를 졸업했다고 했다. 이력이 궁금하다. 어쩌다가 귀농을 했나? 건축관련 일하다가 어느 날 영화를 봤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영화였다. 거기 이런 문구가 있었다. 삶은 현실이 된다, 당신이 망설이고 있는 그 순간 해본 것 없음 가본 곳 없음 특별한일 없음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그는 이영화를 보고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우여곡절 끝에 구례에 정착하게 되었다. 내려오자 마자 한 눈 팔지 않고 바로 농사를 시작했다. “처음부터 농사를 시작했어요. 처음 1년은 호박 농사를 했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그 다음엔 표고 버섯 농사를 했습니다. 이 건물을 지어서 농사를 시작한 것이죠 그리고 2020년 8월에 수해로 모든 것을 잃었다." 암담했다. 섬진강댐을 방류한다는 문자를 받은 다음날 아침 마을 앞이 이미 잠기기 시작했다. “서둘러 농장으로 가봐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이미 냉천 사거리가 잠기고 있었어요. 경찰이 통제를 했어요, 그래서 산업 도로로 차를 몰았죠, 농장은 지붕만 보였어요.” 그 날 그는 6억을 투자해서 만든 농장이 물에 잠겨 있는 것을 보고 무엇을 상상했을까? 만약 월터라면 그 특유의 상상력으로 흘러 넘치는 물을 다시 섬진강으로 돌려보냈을 것이다. 아니면 버섯을 키우는 땅을 하늘로 들고 날아올랐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농장은 물에 잠겼고 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 의지가 사라졌을 때 가장 현명한 방법은 다른 일을 찾아보는 것이다. 그는 수해대책본부에서 일했다. 결국 구례군 수해대책위는 수자원 공사에게 48%에 해당하는 금액을 돌려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빚이 남았다. 그는 지금 참송이 버섯을 키우고 있다. 참송이는 어떤 버섯이죠? “표과와 송이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버섯입니다. 유전적으로 보면 표고와 가깝죠. 표고에 60% 송이의 40% 정도라고 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가 준 참송이의 향기를 맡아 보니 얼마전 먹어본 송이 향이 느껴졌다. “진짜 송이 향이 나네요” “네.. 그쵸.” 그는 반갑게 웃었다. 참송이 버섯을 시작하게 된 이유가 있나요? “표고는 사실 규모의 싸움에 가깝더라고요. 얼마나 많이 수확 생산이 가능 한 가에서 승부가 나요. 그러다 보니 일이 많고 너무 힘들어요. 시간이 없죠” “수해를 입지 않았으면 계속 했을 텐데 수해를 입다 보니 1년간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죠. 다시 건물을 보수하면서 참송이를 재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참송이 버섯> 참송이 재배의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요? “키우는 것은 표과와 다를 것이 없어요. 하지만 관리와 판매가 어려워요 표고는 재배만 하면 수요가 많기 때문에 가격만 낮추면 처리가 되는데 참송이는 경매가 없기 때문에 개인이 판매를 해야 합니다. 그러니 재배 관리가 어렵고 판매가 어려워서 힘들죠” 제 참송이 재배사가 25평씩 8개 총 200평인데 지금은 판매가 가능한 정도만 키우고 있습니다. 판매가 늘면 더 키워 야지만 지금은 제가 혼자서 가능한 양만 재배하고 있어요. 구례에 내려와서 시작한 농사가 수해로 모두 망가졌잖아요? 후회 안 하시나요? “구례는 어쩌다가 내렸 왔지만 참 예쁜 곳입니다. 처음에 내려왔을 때 상사 마을에 살았는데 아침마다 30분씩 멍 때리고 바라봤어요. 너무 예뻐 서요. 물론 농사만 본다면 구례는 추천할 만한 곳은 못되는 것 같습니다만” ㅎㅎ 그와 한 시간 정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영화를 다시 봤다. 라이프지에서 일하던 월터는 매일 같을 일을 반복하는 16년된 포토 에디터였다. 라이프지가 온라인으로 바뀌면서 마지막 호에 사용할 25번째 사진이 사라지자 사진의 단서를 찾기 위해 베일에 쌓인 사진 작가 숀 오코넬을 직접 찾기 위해 그는 사무실에서 나와 상상이 아닌 현실로 뛰어든다.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반복되는 일상은 어느 날 일탈로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뀔 수 있다. 바이던의 시귀 중에 이런 말이 있다. 고개만 돌리면 다른 세상…. 그는 매일 같은 출근 길을 가다가 고개를 돌리고 다른 세상으로 진입했다. 그의 상상은 현실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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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우씨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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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 지리산을 사랑하는 사람들 연대를 위해 애쓰신 분들
- 그 당시는 카메라로 인물을 찍을 때는 거부하는 사례가 참 많았습니다. 그 나마 열린 사고를 가진 분들이 여서 편히 지리산생명연대 회의 하는 모습을 담을 수 있었습니다. 대략 20여년간 컴 속에서 잠자다가 지리산인을 통해 공개 합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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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 지리산을 사랑하는 사람들 연대를 위해 애쓰신 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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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움은 한 번도 나를 비켜가지 않았다
- 고마움은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박 두 규(시인) 글의 제목은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라는 책 제목의 패러디다. 이 책은 36년 옥살이를 한 비전향 장기수 허영철 선생의 삶을 기록하고 있다. 만델라가 27년 옥살이 하고 대통령이 되었을 때 아직도 대한민국 교도소에는 30년이 넘은 장기수들이 수두룩하였고 선생은 그 중의 한 분이셨다. 하지만 나는 허영철 선생을 민족의 현대사를 정면으로 부딪치며 살아온 역사의 증인으로서보다 인간이라는 종(種)이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가를 보여준 한 사람으로, 또는 삶 속에서 ‘고마움’이란 진정 무엇인가를 알려준 스승으로, 내 마음 속에는 그렇게 남아 있다. 오래 전 일이다. 어느 늦겨울 전주의 젊은 친구들이 장기수 선생님들을 모시고 구례 지리산 자락으로 나들이 와서 하룻밤 같이 보낸 적이 있었다. 나는 그때 이틀 동안 내내 한 순간도 놓치지 않는 그분들의 ‘고마워하는 마음’을 보았다. 맑게 갠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다는 고마움, 이마를 스치는 신선한 바람 한 줄기의 고마움, 그 표정이며 몸짓 자체에 깊게 배어 있는 그 마음이 그대로 느껴졌다. 선생의 말투 하나 행동 하나가 티끌만큼의 가식도 없이 너무 오랫동안 자연스럽게 몸에 배인 고마움이라는 것을 누구라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하기야 36년을 오로지 수행으로만 보낸 세월인데 오죽하랴. 사과 하나를 건네받으며 사과 꽃을 피우게 한 햇볕과 뿌리를 적시게 한 비와 흙과 사과를 건넨 사람의 고마움까지, 사과 하나를 얻기까지에 기여한 세상의 모든 존재에 대한 고마움을 뼛속 깊이 새긴 자의 마음을 보았다. 고마워하는 마음은 겸허한 마음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한다. 고마워하는 마음은 내 안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자아의 영역에 타자의 영역을 내어준 것이고, 겸허한 마음은 내 안에 타자의 영역이 자아의 영역보다 더 넓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처럼 삶 자체가 경쟁이고 살기 위해 경쟁력을 갖추려다 보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이기적으로 살게 되고, 내 스스로 경쟁력을 갖춰 이만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스스로의 자만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상대방을 고마워하기 보다는 내가 그만큼 노력해서 경쟁력을 갖춰 얻은 것이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타자는 경쟁의 상대요 대립적 존재이지 내 안에서 품어야 할 상대가 아닌 것이다. 우리가 고마워하는 마음과 겸허한 마음을 꾸준히 잃어온 것은 이러한 변화된 일상의 탓이 크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부를 창출하는 것만이 미덕이 되어버린 자본 중심으로 인간의 질서가 재편되면서 깊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마음은 바닥을 치는 상태에 이르렀다. 사실 이 시대에 스스로 겸손해져서 상대를 진정으로 고마워할 줄 알고 낮은 자세를 취하며 사는 이가 얼마나 될까. 나를 내어주고 타자를 섬기는 겸허함은 현대의 일상에서 얼마나 유효한 덕목으로 남아 있을까. 나는 자아의 감옥을 벗어나 타자를 섬기는 선생의 그 텅 빈 마음의 ‘겸허함’을 보며 그것은 분명 36년의 옥살이 명상이 가져다준 깨달음일 거라고 생각한다. 사실은 그렇게 사는 것이 진리의 삶이요, 나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라는 절박함을 우리는 언제나 스스로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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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움은 한 번도 나를 비켜가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