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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성다양성축제 후원해주신 감사한분들
- 구례성다양성축제 아직 끝이 아니에요! 무지개코딱지들은 해마다 축제의 장터수익금 일부와 남은 후원금을 지리산권 개발반대 활동에 기부했는데요! 올해도 축제를 물심양면 후원해주신 분들 덕분에 기부금을 잘 전달했습니다.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 후원금 보내주신 분들 장소영/ 정이어린/ 똥폼/ 우물/ 강혜인/ 조아라/ 국승일/ 느림보/ 새봄여름/ 강효선/ 진명일_백지/ 탱자씨 (이외 칩코차라의 유부어묵탕을 구매해주신 분들????) > 공간과 물품 대여해주신 분들 비온뒤무지개재단/ 서울퀴어문화축제/ 동아시아에코토피아/ 지리산사람들/ 느긋한쌀빵/ 두루다살림장/ 행행행 올해 축제 기부금(총400,000원)은 아래 단체들에 나누어서 전달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지리산골프장백지화연대 - 지리산사람들 - 새벽이생추어리 사진. 나무(@fishbowl_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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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성다양성축제 후원해주신 감사한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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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성다양성축제 칩코의 후기 하편
- -이전 게시글에 이어서 축제 공간을 어디로 할지 고민이 많았다. 우리 축제는 퍼레이드도 인가 없는 논둑길을 걸어왔다. 우리끼리 안전하게 놀기 위함이었다. 무지개코딱지들이 평소 자주 다니는 두루다살림장은 이미 산정마을에서 정기적으로 장터를 해왔고, 장터 기획쌤들은 별다른 설명 없이도 우리 축제를 환영해주신 분들이셨다. 두루다살림장의 명성에 묻혀서 장터인 척 축제를 해버리자는 게 우리의 얄팍한 꾀였는데, 장터 기획쌤들은 아무래도 이장님께 허락을 받아야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해주셨다. 우린 또 어물쩡 다양성 축제라고 주절댈 심산이기도 했고, 속으론 성다양성축제라고 해도 못 알아들으실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이장님은 찰떡같이 ‘티비에서 보던 헐벗은 축제’를 알아채셨고, 허락은 하겠지만 마을에서 시끄러운 말이 나오는 게 염려되니 떡이라도 돌리면 어떠냐고 해주셨다. 축제날 마을회관에 무지개떡을 돌린 이유였다. 물론 이장님의 허락도 두루다살림장 쌤들이 아니었다면 떡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을 테다. 이번 축제를 준비하면서 확실히 세상 물정을 안 기분이다. 나쁘게 보면 쫄은 거고, 좋게 보면 신중해진 거다. 근데 또 나만 이렇게 조심스러운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이번 축제 참여자들은 모르는 얼굴이 부쩍 늘어났다. 그들도 우리 축제에는 처음 오셔서 그랬는지 조금은 수줍고 낯설어 보이기도 했다. 산내 축제에선 공연을 볼 때 무조건 강제 스탠딩석이었다. 퍼레이드가 끝나서도 람천교가 부서져라 흔들어대는 친구들을 진정시켜 집에 보내는 게 매번 일이었다(실로 퍼레이드 마지막곡은 브로콜리너마저의 ‘앵콜요청금지’였다.) 구례 축제는 산내의 활기와는 또 다른 설렘이 있었다. 올해 피날레는 퍼레이드가 아닌 강강술래로 했는데, 그게 올해 참여자들 텐션에 딱 맞아 기쁘기도 했다. 강강술래 가락에 맞춰 손잡고 돌다 보면 고요하고 부드럽게 모두 하나가 되었고, 우리만큼 둥글게 차오른 달님을 다들 한동안 바라보았다. 세상 물정을 알고 나니 더 깊이 감사하게 된다. 산내라는 유일무이한 동네도 기적이었음을 새삼 느끼고, 올해 구례 축제를 도와주던 새로운 이웃들의 다정함도 기적이고, 벽장에서 나와 축제에 놀러와 준 참여자들도 기적이고, 아무 혐오세력 없이 안전하게 축제를 마친 것도 기적이고, 축제날 달이 밝은 것마저 기적이었다. 글이 길었지만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는 말이다. 일일이 헤아리지 못하는 친애하는 존재들이여, 내내 사랑스럽고 퀴어하소서. 나무마고할미불. 사진. 정환쌤(@potodoto93 ), 한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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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성다양성축제 칩코의 후기 하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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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성다양성축제 칩코의 후기 상편
- “축제갈 때 마스크 써야 하나 싶었어요.” 이번 축제 참여자분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구례에서 처음 여는 성다양성축제는 확실히 산내와 달랐다. 애초에 산내 성다양성축제는 우리 놀자고 만든 거였다. 더 많은 퀴어를 만나고 싶다거나, 퀴어가 더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겠다거나 하는 대단한 포부도 없었다. 산내 축제에선 다 이미 건너건너 얼굴을 아는 친구들이 놀러 왔다. 또 산내는 귀에 딱지가 앉도록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마을이라서 그런지, 성다양성 축제를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퀴어’란 단어를 모르실까봐 ‘성다양성’이라는 단어로 바꿔 부른 것이었는데, 산내는 대체로 퀴어라고 하면 다 아셨던 것도 같다. 오히려 ‘성다양성축제’라는 이름이 더 낯설어서, 본의 아니게 위장용 이름처럼 들릴 지경이었다. 구례로 축제 장소를 옮긴 것이 대단한 포부가 생겨서는 아니다. 구례에서 놀거리를 또 찾아야 했을 뿐이다. 다만 어떤 퀴어한 수다를 지껄여도 척하면 척 알아듣던 산내 친구들이 없으니, 더 많은 퀴어 친구를 만나고 싶기는 했다. 지역살이 햇수가 쌓이면서 퀴어가 더 살기 좋은 마을이면 좋겠다는 소망도 스멀스멀 생겼다. 뭣도 모르던 귀촌 1년 차에는 아예 상상력이 없어서 겁대가리가 없었다. 시골에선 한 명이 어떤 사실을 알면 곧 마을 전체가 다 알게 된다는 것과, 퀴어라고 하면 집주인이 쫓아낼 수도 있다는 것을 뒤늦게 학습한 후, 나랑 애인은 마을 길을 걸을 땐 손을 잡지 않는다. 한 마디로 구례 성다양성축제는 조심성이 많아졌다. 산내라는 다 된 밥상에서 축제를 차리다 보니, 지역 퀴어축제 기획을 너무 물로 본 듯싶다. 나의 집주인은 매우 다정하고 사교적인 기독교인이시다. 환경보호에도 퍽 관심이 있어, 우리가 하는 행사를 요리조리 물으시다 지난 골프장 반대 문화제 땐 놀러 오시기도 했다. 우리가 축제 준비로 정신이 쏙 빠져있자 집주인댁은 무슨 축제냐고 물으셨고, 우린 “다양성 축제요”라고 중요한 단어를 빼먹고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가셔서 한숨 돌렸는데 다음날 또 오시더니 “근데 뭐가 다양해요?”하고 또 물으셨다. “성...별, 나이, 인종, 뭐든 다양한...”하고 얼버무리니 무릎을 탁 치시며 “아하! 풍습이나 종교도 다양하고요?”라며 해맑게 덧붙이셨다. 나는 급하게 프라이빗 파티인 척 선을 그었고, 그날 우린 집 마당에서 ‘성다양성축제’라고 적힌 대문짝만한 피켓을 칠할 때 집주인이 지나가실까 망을 봐야했다. 또 나는 젊은이들을 너무 납작하게 봐왔다. 내 얕은 경험상, 서울이나 산내나 또래들은 대부분 퀴어거나 앨라이였어서 내 머릿 속엔 ‘젊은이=퀴어축제 짱좋아함’이라는 이상한 공식이 있었다. 같은 마을에서 피어싱을 한 젊은 빡빡이 여성 분과 알게 됐는데 그분은 캐나다에서 오래 거주하셨다고 했다. 나는 또 그분을 납작하게 보고 “담주에 퀴어 축제 놀러오세요!”하며 방방 뛰었는데, 그분은 “퀴어...가 뭐에요?”라고 물으셨다. 내 발음에 문제가 있나 싶어서 “퀴얼... 퀴이얼ㄹ...”하고 몇 차례 다시 발음해주다가 결국 그가 퀴어를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이번 축제 땐 무지개공간을 섭외했는데, 이때도 퀴어를 전혀 모르거나 알지만 정중히 거절했던 몇몇의 젊은 분들에 여러 차례 내심 놀랐다. (물론 내 머릿속 공식을 강화시킨 젊은 퀴어나 앨라이들이 정말 많아서 놀라기도 했다.) -다음 게시글에 이어서 사진. 정환쌤(@potodoto93 ), 한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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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성다양성축제 칩코의 후기 상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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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의 손자가 지리산으로 피신한 사연은?
- 함양군 마천면 군자리에 있는 삼정산(三丁山, 三政山)[1,156m] 정상의 세 봉우리는 상무주암, 문수암과 삼불주암(三佛住庵)을 거느리고 있다. 가운데 문수암에서는 지리산 천왕봉이 암자 앞의 산줄기에 막혀서 보이지 않고, 상무주암과 삼불주암에서는 동남쪽으로 10km 직선거리의 지리산 천왕봉과 중봉, 하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리산 삼불주암 천왕봉 전망, [사진, 이완우] 이들 세 암자는 지리산 7암자 코스의 셋째, 넷째와 다섯째 암자로서 지리산 칠암자 코스의 중심 지역에 있다. 삼정산의 남쪽으로 지리산의 도솔암과 영원사가 지리산의 주능선에 가깝게 높은 위치에 있고, 북쪽에 약수암과 실상사가 지리산 북쪽의 람천의 흐름을 지켜보며 지리산 7암자 코스의 시작과 마무리 지점을 이룬다. 11월 중순의 늦가을 지리산 문수암을 거쳐 삼불사 찾아가는 산길은 낙엽 밟는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이 암자는 도마마을에서 2시간을 걸어와야 하므로 찾는 이가 거의 없는 조용한 암자이다. 법당에는 ‘삼불주(三佛住)’ 편액이 한가롭게 걸려 있을 뿐이고, 산신각과 요사채 등 사찰 전각들은 황토와 돌을 섞은 돌담 벽으로 이루어져 소박하고 친근한 느낌이다. 지리산 삼불주암 편액, [사진, 이완우] 법당 옆에는 3층 석탑이 서 있는데, 개성적인 양식이 눈에 띈다. 석탑의 1층과 2층의 탑신 네 면에는 불상, 사천왕상과 신장상 등의 부조가 있다. 1층 탑신의 전후 면에 있는 이불병좌상(二佛倂坐像)은 흔하지 않은 양식이고, 옥개석에 기왓골을 표현한 양식 기법은 거의 이곳이 유일하다고 한다. 최근에 조성한 석탑이지만 미래의 석탑 양식을 지향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지리산 풍경을 수십 년간 사진 찍어왔던 류요선(남원시 이백면 강촌마을)씨는 20여 년 전에 이곳 삼불주암이 비구니 참선 도량이었을 때 실상사에서 약수암과 도마마을을 거쳐서 찾아왔다고 말한다. 그가 이 암자에 도착한 봄날 늦은 오후에 뜨락 옆의 정갈한 텃밭에는 금낭화가 군락을 이루고 피어 있었다며, 그때 찍은 금낭화 사진을 보여주었다. 지리산 삼불주암 금낭화(1995년 봄) [사진, 류요선] 이곳 삼불주암의 주지인 효성(曉星) 스님이 류요선 씨에 향기로운 차 몇 잔을 여유롭게 권하였다. 스님은 지리산 천왕봉 너머로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르는 풍경은 참으로 맑고 깨끗하여 인상적이며, 비 내린 후 산자락에 피어나는 운무는 무념무상의 경지를 표현하는 듯하다고 했다. 밤하늘의 별빛과 고요한 달빛에 환한 도량은 또 얼마나 고적하며 평온하게 아름다울까? 류요선 씨가 효성 스님에게 지리산 풍경 사진 몇 장을 우편으로 보내주기로 약속한다. 스님은 메모지에 암자 아래의 마천면 도마마을 한 집 주소를 써서 건네준다. 이곳 암자에 오는 택배나 우편물은 아랫마을의 한 집에서 수령하여 머물러 있다가, 마을 주민이 이 암자에 올라올 일이 있을 때 가져다준다고 한다. 지리산 암자의 시간은 속세와는 다르게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지리산 삼불주암 법당 벽면 채반, [사진, 이완우] 이곳 삼불주암으로 도마마을에서 올라오는 삼정산 자락이 견성(見性) 골이다. 이 골짜기에는 “까마귀나 까치도 경(經)을 외우며 간다”는 속담이 예로부터 전해온다. 까마귀나 까치도 경(經)을 외우며 간다. 수수께끼 같은 이 속담은 함축적이며 흥미롭다. 이 속담은 이 지역에 전승하는 설화를 반영하고 있는데, 이 지역에 불교 활동과 민간에 대한 영향력이 그만큼 컸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7세기 중반인 신라 무열왕 때에 마적 대사가 이 지역 하천인 용유담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삼정산에 문수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조선 시대 중기에는 인오(印悟, 1548-1623) 대사가 이 지역 지리산 영원사에서 수행할 때 함양 장터를 다니며 백성들과 소통하고 교화하면서 함께 산을 넘던 고개(오도재)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지리산 삼불주암 삼층 석탑, [사진, 이완우]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보며 삼정산 아래 기슭인 함양군 마천면 군자리에는 군자사지(君子寺址)가 있다. 신라 진평왕(眞平王 567~632, 재위 579~632)이 국왕으로 즉위하기 이전 10살의 어린 나이에 이곳에 피신하여 3년을 지냈다고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신라 진흥왕(眞興王 534~576, 재위 540~576)이 승하하자, 진흥왕의 둘째 왕자가 진지왕(眞智王, 재위 576~579)으로 즉위하였다. 진흥왕의 태자인 동륜태자(銅輪太子, ? ~572)의 어린 아들(후대 진평왕)은 숙부가 왕위를 잇자, 신변에 위협을 느껴 국경 지대인 지리산 자락의 함양의 이곳으로 피신하였다. 진지왕이 즉위 3년만에 화백회의에 의해 폐위되고, 진평왕이 13세의 나이로 신라 국왕으로 즉위하여 18세부터 친정하였다. 진평왕 어린 시절의 함양 지리산 자락 피신과 3년 후 화백회의에 의한 진평왕 즉위 등의 역사적 사건은 당시 신라 왕실의 왕권을 향한 권력 투쟁을 암시한다. 지리산 삼불주암 삼층 석탑 조형물, [사진, 이완우] 국왕이 즉위하기 전에 잠룡(潛龍) 신분으로 거주한 저택을 잠저(潛邸)라고 한다. 진평왕은 어린 시절에 거처했던 함양 지리산 자락의 잠저에 군자사(君子寺)를 건립했다. 이곳 군자사는 조선 시대에 지리산을 유산(遊山)하는 관리나 선비들이 머물렀다가 하동암을 거쳐 천왕봉으로 오르는 주요 거점이었다. 진평왕이 어린 시절에 이곳 지리산 자락에 머물면서 아들 낳기를 지리산 산신에게 기원하여서 이곳 지명을 군자리(君子里)라고 한다는 지명 설화가 전해오는데, 진평왕의 아들은 기록에 나오지 않는다. 선덕여왕과 선화공주가 진평왕의 딸이며, 태종 무열왕 김춘추가 진평왕의 외손주이다. 진평왕이 이 지역에 세운 군자사의 사찰 이름에서 군자리라는 지명이 유래했다고 볼 수도 있다. 진평왕은 ‘왕이 곧 부처’라는 왕즉불(王卽佛) 관념을 확립하였으며, 자신의 직계 가족을 부처의 집안과 동일시하였다. 진평왕은 다양한 방법으로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정치 제도를 정비하고 활발한 외교 정책을 펼쳐서 진흥왕에 이어서 신라의 삼국 통일 기틀을 다졌다. 지리산 삼불주암 삼층 석탑 부조, [사진, 이완우] 군자사는 진평왕이 어린 시절을 보내며 국왕으로 즉위하기 위해 때를 기다렸던 의미 있는 장소로서 진평왕의 53년 재위 기간에 왕실의 안녕과 나라의 평안을 기원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왕명에 의해 국태민안을 기원하기 위해 지리산을 오르내렸을 행렬에서 “까마귀나 까치도 경(經)을 외우며 간다”는 이 지역의 속담이 발생하였을 수 있다. 이 속담 속의 까마귀나 까치에서 같은 옷을 입은 단체가 줄지어 산길을 이동하는 모습이 연상된다. 지리산 삼불주암에서 지리산의 천왕봉과 중봉, 하봉을 바라보고, 시선을 돌려 산 아래 견성골 산자락을 찾아본다. 지리산의 수많은 봉우리, 능선, 골짜기와 계곡에는 역사와 설화들이 씨줄과 날줄로 잘 짜여 천오백 년 전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지리산에서 내려오는 오후의 산길은 낙엽이 밟히며 버석거리는 소리와 조릿대 군락지가 바람에 흔들리며 서걱대는 소리로 가득하였다. 지리산 삼불주암 흙집 산신각, [사진, 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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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의 손자가 지리산으로 피신한 사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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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요선 작가의 지리산 사진 이야기 [넷째 마당]
- [대성골의 바위 모임. 1998. 4. 18.] 하동 화개면의 대성골 대성교의 콘크리트 다리 난간에서 계곡을 바라보았다. 녹음이 짙은 계곡에 흘러내리는 물소리를 들으며, 커다란 바위들이 회의하는 듯 오개오개 둘러앉아 있었다. [심원마을 용소 계곡. 1997년 5월] 심원 마을 용소 계곡의 맑은 물과 화사한 진달래꽃. 1997년 7월 29일. 1시간에 149mm의 폭우가 내려 이 계곡의 지형이 번하였고, 이런 아름다운 풍경은 다시 만날 수 없다. [벽소령 남쪽의 쿵쿵소. 1997년 봄] 벽소령 남쪽 심정 마을로 가기 전의 쿵쿵소이다. 폭포 소리가 쿵쿵 떨어진다는 의미이다. 바위 옆과 아래에 진달래꽃이 아직 활짝 피지 않았다. 햇빛을 잘 받은 곳은 꽃이 잘 피었고 그늘진 곳은 아직 덜 피었다. 그때 심정 마을에서 민박하면서 사진을 찍었다. 한 2~3일 더 기다리면 진달래꽃이 다 필 텐데, 수중에 돈도 떨어지고 더 있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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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요선 작가의 지리산 사진 이야기 [넷째 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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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에는 있고 놀이에는 없는 것은?
- "달빛 놀이터를 하는 금요일이 너무 기대되요" “게임은 시작하기 전부터 긴장이 되는데 놀이는 승부가 없어 맘이 편해요” 우리는 나이가 들기 때문에 놀지 않은 것이 아니라, 놀지 않기 때문에 나이가 드는 것이다. -조지 버나드 쇼- 지리산산골 토지면 토지초등학교에는 달빛 놀이터라는 전래 놀이를 하며 아이들과 함께 노는 마을학교가 있다. "놀이도 배워야 하는 시대" ▲ 전래놀이를 하는 아이들 어른 아이들이 함께 놀이를 즐기고 있다. ⓒ 마을학교 지난주 일요일 전래놀이를 보급하는 아자 학교 대표 고갑준선생님과 함께 놀이를 하고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을 보냈다. 그날 아이들과 학부모는 이랑타기, 진놀이, 두부놀이, 안경놀이, 술래잡기, 짝꿍 술래잡기를 배우고 함께 놀았다. 학부모들도 땀을 듬뿍 흘렸고 아이들은 녹초가 되었다. 반나절 동안 놀이에 빠지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신이 나서 놀이에 몰입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어린 시절 놀이는 마을형과 누나들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배웠다. 배웠 다기 보다는 그냥 알게 되었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되었다. 하루 종일 이 놀이 저 놀이가 끝이지 않았다. 요즘처럼 찬바람이 부는 때에는 고산댁 담벼락 양지에 모여 소꿉놀이를 했다. 반짝이는 사금파리를 모으고 분유통을 가져다 솥단지를 만들어 밥도 하고 국도 끓여 맛있게 먹는 시늉을 하며 놀다가 지겨워지면 밤톨 같은 돌을 주어 다가 공기놀이를 했다. 공기놀이처럼 기술이 필요한 놀이는 동네 선수들이 다 파악이 되어 있기 마련이어서 승부의 재미를 위해 적당히 편을 만들어 놀았다. 그것도 지치면 다른 놀이를 하면 된다. 시간이 없지 놀이가 부족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놀다 보면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고 굴뚝에 연기가 난다. " 종구야! 너네 집 연기 난다" 밥먹으로 가야겠다. "왜 우리 엄마는 밥을 빨리하지" 불평이 따라오기 일수였지만 어쩔 수 없다. 해가 지고 여기저기 동무들 집에 연기가 모락모락 퍼지면 누가 말할 것도 없이 우리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아쉬워할 것도 없다. 내일도 놀며 되니까? 우리는 모두 시간 부자였다. 우리의 놀이는 끝이 없었지만 어제 함께 놀던 형과 누나들이 고학년이 되면 우리와 함께 놀아주지 않는 것이 그저 섭섭할 따름이었다. 그러다가 나도 어른이 되었고 놀이는 점점 잊혀 갔다. 그러다가 마을하교를 하게 하면서 옛 놀이를 하나 둘 다시 하게 되었다. 좀 덜 잘 놀기 위해서 잊힌 놀이를 기억하고 있는 선생님을 초대해서 놀이를 배우고 전래 놀이를 하며 아이들과 함께 놀이를 전하는 일이 토지 마을학교가 달빛 놀이터가 1년 동한 한 사업의 전부다. 놀이와 게임의 가장 큰 차이는 승부에 있다고 한다. 게임에는 반드시 승부가 있다. 승자가 있고 패자가 있다. 놀이에도 승부가 있는 놀이도 있고 없는 놀이도 있지만 승부가 있다고 하더라도 누가 이겨도 그만인 것이 놀이다. 술래도 승자가 아니고 숨는 아이도 승자가 아니다. 승자는 없고 재미만 있다. 더구나 놀이는 함께 해야 하고 맨날 나만 이기면 그 친구가 더 이상 놀아주지 않기 때문에 적당히 져주기도 해야 한다. 그래야 맨날 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도 아니면 다음판에는 이긴 사람 진사람을 섞어 버리면 어느새 승부는 사라지고 만다. ▲ 잘 놀려면 놀이도 배워야 한다. 놀이를 배우는 아이들과 학부모들 ⓒ 토지달빛놀이터 전래 놀이는 어른도 아이도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물론 축구를 아이와 함께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야구도 아이와 함께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드물다. 왜냐면 체격과 능력차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놀이는 아니다. 달빛 놀이터에서 매번 하는 그물 술래잡기나 대문 술래잡기는 학부모와 유치원생이 함께 뛰어 놀면서 할 수 있다. 특별한 능력도 필요 없다. 아이들이 더 유리한 놀이도 있고 어른들이 배려해야 하는 놀이도 있지만 나이와 성별로 능력으로 인해 차별당하지 않고 함께 어울려 놀 수 있다는 점이 게임과는 다르다. 승부도 없고 오직 재미만 있는 놀이를 통해 아이들은 어떤 것을 배우게 될까요? "PC게임은 혼자서도 할 수 있지만 놀이는 혼자 할 수 없습니다. 놀이를 하려면 혼자서 할 수 없지만 배려하지 않으면 놀이가 진행되지 않습니다. 내가 힘이 쌔고 강하다고 해서 매번 이기면 친구가 더이상 놀아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적당히 힘 빼고 배려하면서 함께 해야 하는 것이 놀이입니다. 다음번에 놀아주지 않기 때문에 매번 승리하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놀이를 통해 배우게 됩니다" - 놀이선생님- 우리의 고전 놀이는 두 가지로 보면 된다. 민속놀이는 특정한 날에 하는 대규모 놀이 예 줄다리리 강강수월래 차전놀이 같은 놀이다. 전래놀이는 매일매일 할 수 있는 일성적인 놀이다. 예를 소꿉놀이, 재기차기,비석치기 같은 것이다. 그렇다고 토지 아이들이 게임을 안 하는 것은 아니다. 내 아이들도 매번 달빛놀이터에 나가서 신나게 놀지만 집에 오면 다시 게임을 한다. 하지만 특이한 것은 게임을 그렇게 좋아하는 아이들도 게임 시간을 포기하고 달빛놀이터에 나가서 노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것이다. “전래놀이는 맘이 편해요. 놀기만 하면 되니까요” “게임은 시작하기 전부터 마음이 조마조마해요 이기면 좋지만 지면 기분 나쁘고 매번 이기는 아이만 이겨서 기분이 별로 에요” 내 아이에게 물어보면 항상 이렇게 말한다. 게임은 혼자 또는 팀이 상대방과 경쟁을 통해서 승부를 결루는 것이 대부분이다. 항상 승부가 있고 패자가 있다. 승자는 즐겁고 패자는 유쾌하지 않다. 전래 놀이는 하다 보면 승부도 없고 패자도 없다. 즐겁게 땀 흘리고 놀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그렇다고 PC 게임을 하지 말자는 것은 아니다. 지금 아이들은 친구들과 놀만한 시간도 없고 공간도 부족하다. ▲ 놀이에 관한 토론을 하는 놀이 선생님과 학부모들 놀이와 게임의 차이 그리고 놀이를 통해 배우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 토지달빛놀이터 우리가 하는 것은 한 달에 한 두번이라도 아이들에게 놀시간과 공간을 열어주자는 것이다. 아이들과 더불어 전래 놀이를 통해 아이들에게 지리산 산골 마을 공동체의 일원이었다는 생각을 심어주는 것이 놀이의 핵심이라는 생각이다. 오래전엔 놀이가 일의 연장선에 있었다. 놀이를 통해 힘을 키우고 놀이를 통해 협동과 협력을 배웠다. 이를 통해 서로 돕는 품앗이와 두레를 했던 민족이 바로 우리의 민족문화였다. "전래놀이는 인공적인 것이 필요하지 않다” 자본이 필요 없다. 고가의 PC가 없어도 되고 특별한 장비가 없어도 가능하다" 놀이는 평등하다. 청소년 자살율 1위인 우울한 한국 사회에서 사라져가는 우리의 전래 놀이를 통해 우리 아이들과 학부모 그리고 마을 공동체가 더불어 살아가는 행복과 관계의 미학이 필요한 시기다. 놀이의 반대는 일이 아니라 우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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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에는 있고 놀이에는 없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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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천 원짜리 약속
- 못먹겠지.. 이번에도.. 지난 5월 햇볕이 따스하고 좋았던 날 점심시간 구례장에 갔다가 무화과 나무를 파는 농부를 만났다. 나무를 판매하는 장사꾼 대부분은 나무를 농부에게 구매해서판다. 근데 이분은 자기가 키운 나무를 팔고있었다. 어떻게아냐고요? 나무 종류가 두 종류뿐이고 파는 자세가 달랐다. 그 농부가 팔던 나무가 무화과 나무였다. 한 그루에 5천 원이었는데 묘목이 튼실하고 좋아보였다. 사실 무화과 나무를 마당에 여러 번 심었다. 모두 얼어 죽거나 열매가 열린 다음 익지 않았다. "이것도 얼어 죽거나 안 익는 것 아닌가요?" "아닙니다! 익을겁니다. 제가 시험을 해보고 파는 것이니 믿어도됩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두 그루를 5천원에 드릴게요. 그리고 만약 죽으면 내년봄에 5천 원 돌려드리거나 다른 묘목을 드리겠습니다" 커피 한 잔 값 이라 속는샘 치고 나무를 받아왔다. 두 그루의 무화과를 주차장옆 양지에 심었다. 마당에 워낙 나무가 많다보니 심을자리가 궁색해 거기 외엔 심을 자리가 없기도 했다. 무화과는 심자마자 쑥쑥크기 시작했다. 무화과는 햇 가지에서 열매가 열리기 때문에 올해 심어도 열매가열린다. 그렇게 심은 나무에 무화과가 콩알만하게열린것이 7월이었다. 곧 대추, 골프공, 그리고 테니스공만하게 커지고 나면 익기 시작하는데 너무 늦어서인지 골프공 사이즈에서 끝났다. 결국 하나도 익지 않았다. 너무늦게 심었으니 내년에는 더 많이 열리고 익기도하겠지하고 포기하고 있었다. 지난 11월 10일 무서리가내렸다. 무화과 잎은 바싹 발라 버렸다. 추위를 이기지못하는 나무이기 때문이다. 올해는 맛 보기는 어렵겠구나.... 어제 아침출근을 하려고보니 나무 아래 떨어진 무화과 하나를 발견했다. 살펴보니 끝에 붉은 기운이 보인다. 익은 것이다. 무화과를 살짝 벌려보니 안에 붉은 꽃이 가득 피어 있었다. 묘목 농부말이 맞았던것이다. 하지만 아직 약속 하나가 더 남았다. 추운 겨울을 이겨 내고 살아남을 것인가? 겨울을 이겨내면 나무가 살고 이겨내지 못하면 뿌리만 살아움이 터서 다시자란다. 아.. 그리고 그농부와 나도 약속하나를 했다. "올해 키워보시고 내년 봄에 만나면 나무상태가 어쩐지이야기 해주세요. 저도 사실 구례에 이 묘목이 잘 크는지 열매는 익는지 궁금 하거든요." 그 묘목 농부를 만나서 좋은 소식을 전하고 싶은데 무화과 나무는 이 겨울을 무사하게 보낼 수 있을까? 아.. 그리고 무화과는 달콤하니 맛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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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천 원짜리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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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교육 2023년 가을호 (환경과생명을지키는전국교사모임)
- 윤주옥 대표님의 인터뷰 글이 있어서 자료 공유합니다. ## 녹색교육 2023년 가을호 (환경과생명을지키는전국교사모임, 환생교) ## https://eduhope.net/eBook/2023_2/2023_2kon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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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교육 2023년 가을호 (환경과생명을지키는전국교사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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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석굴에 천 명이 앉을 수 있다는 깊은 의미는
-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에 있는 삼정산(1,156m)은 백무동과 한신계곡을 넘어서 지리산 천왕봉을 마주 보고 있다. 이 삼정산 정상의 으뜸 봉우리 아래에 문수암이 자리 잡았다. 지리산 칠암자를 잇는 숲길을 찾아 영원사에서 고개를 넘는 제법 힘든 산길을 1.8km 걸으면 상무주암에 도착하고, 대체로 평탄한 숲길을 0.8km 진행하면 바위 절벽 중간에 도량을 마련한 문수암에 이른다. 지리산 삼정산 바위 끝 문수암, [사진]이완우 이곳 문수암에서는 지리산의 중봉이 보이고 천왕봉과 그 오른쪽 지리산 주능선은 앞산 줄기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다. 이 암자에서는 함양 방면이 잘 조망되며 멀리 가야산(1,432m)이 보인다. 산의 이름부터 가야 문화를 암시하고 있는 가야산은 불교문화가 시대적으로 일찍 꽃 피웠을 수 있다.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품에 안은 가야산은 예로부터 뛰어난 지덕을 갖춘 불교 성지로 여겨졌다. 우리나라 불교는 서역과 중국을 통해 북방 경로로 4세기 후반 삼국 시대에 고구려와 백제에 전래하였다는 것이 통설이다. 그러나 인도에서 해양으로 1세기 중반에 가야에 불교가 전래하였을 가능성이 학계에서 제기되었고, 가야 지역의 문화재와 설화에서 그 방증을 확인할 수 있다. 지리산 삼정산 문수암과 천인굴, [사진]이완우 문수암 터전의 바위 굴을 깨달음의 거처로 삼은 수행자들 지리산의 문수암은 신라 시대에 659년(무열왕 6)에 마적 대사가 수행의 도량으로 터 잡았다고 한다. 이곳에 바위의 절리가 풍화되어 틈새가 벌어져 형성된 천연 석굴이 있는데 이 지역 주민들은 전란 때마다 천 명에 이르는 피난민들이 이곳을 찾았다고 하여 천인굴(千人窟)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 천연 석굴은 수십 명이 들어앉기도 빠듯하게 보인다. 이 지역 함양의 향토지인 『함양군사』(2012년)에 마적 대사의 행적이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휴천면 엄천강 상류 용유담 주변의 마적 대사 전설 탐방로를 따라가면 마적동, 마적사 터, 대사 배나무, 바둑판 바위, 대사 우물과 마적대 등 마적 대사와 관련된 설화와 유적지가 풍부하다. 엄천강과 용유담에는 등에 무늬가 있는 물고기가 살고 있었는데, 그 물고기의 무늬가 마적 대사가 입었던 가사와 같다고 하여 ‘가사어’라 불렸다는 기록이 조선 시대의 문헌에 있다. 이 물고기는 높은 산 깊은 계곡의 차가운 계곡물에 사는 연어과의 열목어로 추정된다. 지리산 삼정산 문수암 천인굴 내부, [사진]이완우 용유담 지역은 지리산의 천왕봉, 노고단과 백무동 등과 함께 지리산 성모 산신 신앙의 터전이었다고 한다. 마적 대사가 용유담 주변을 시끄럽게 하는 용들을 쫓아내며 던진 바둑판이 조각나면서 이 계곡의 바위가 되어 널려 있다는 설화가 전하는데, 용유담 일대에 마적 대사가 불교를 유입하면서 이런 설화가 남겨진 것으로 보인다. 엄천강과 용유담 주변에 활동하던 마적 도사가 자신의 활동 지역과 가까운 지리산 자락의 삼정산으로 올라와 천연 석굴에서 수행하고 이곳에 문수암을 세웠을 것이다. 혜암(慧庵, 1920~2001) 스님은 현대 한국 불교의 대표적 선승이다. 그는 가야산 해인사의 해인총림 방장을 지낸 혜암 스님이 가야산이 보이는 이곳 천인굴 앞의 폐허가 된 문수암 터를 발견하고, 1965년에 암자 건물을 다시 세워 수행의 도량으로 삼았다. 하루 한 끼니 식사만 한다. 눕지 않고 오래도록 앉아서 좌선한다. 의식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수행에만 전념한다. 이렇게 혜암 스님은 일종식(一種食), 장좌불와(長坐不臥)와 두타고행(頭陀苦行)에 철저하였다. 스님의 '공부하다 죽어라.’와 '공부만이 살길이다.'라는 일관된 수행 태도는 수행자들의 많은 귀감이 되고 있다. 지리산 삼정산 문수암 천인굴, [사진]이완우 지리산의 수행 방장이었던 천연 석굴, 그 문수사 천인굴의 의미 문수암의 작은 천연 석굴에 천 명이 앉을 수 있다는 천인굴 이름은 비밀을 간직한 만트라처럼 화두가 되어 탐구심을 자극한다. 이 석굴에 천 명이 들어갔다고 과장한 것은 천인굴이 구도와 깨달음의 정신적 터전이며, 이곳이 영향력이 큰 수행자의 거처인 천연 방장(方丈, 수행자의 사방 3.3m 정사각형 방)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유마경(維摩經)에는 재가(在家) 불자였던 유마 거사가 그를 문병한 3만 2천 명을 그의 작은 방장에 모두 앉게 했다고 한다. 이렇게 작은 방에 수많은 사람이 들어가 앉았다는 설화는 수행자의 교화력이 그만큼 컸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자신의 방장을 방문한 문수보살에게 유마 거사가 말했다. “중생에게 병이 있으니, 나에게도 병이 있다. 그들이 나으면, 나도 낫는다. 보살의 병은 자비에서 일어난다.” 유마 거사의 병은 육신의 질병이 아니라 중생들을 교화하고자 하는 자비심의 표출이며 반야의 지혜였다. 지리산 삼정산 문수암의 견성골 조망, [사진]이완우 문수암 천연 석굴 천장에서 불교 경전에 나오는 인드라의 구슬 그물을 연상한다. 인드라 하늘은 하나의 그물로 덮여 있는데, 그 그물은 줄지어 엮어진 구슬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구슬 하나하나는 다른 모든 구슬 비추고 있다. 어떤 구슬 하나라도 소리를 내면 그물로 연결된 다른 모든 구슬도 공명한다. 이 인드라 구슬의 그물은 한 수행자의 깨달음은 많은 사람을 깨달음으로 이끌어 공명하게 한다는 비유이다. 자연 현상이나 사물에는 작은 구조가 전체 구조와 닮은 형태로 끝없이 되풀이하는 프랙탈 구조가 있다. 이렇게 한 수행자의 깨달음이 수많은 중생을 깨달음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대승적 비유와 상징을 이 천연 석굴에서 찾아본다. 문수암 천인굴 앞에서 지리산의 하늘을 올려다본다. 바람은 맑고 가을 단풍이 고운데, 하늘에는 가볍게 구름이 피어나면서 사라지고 있었다. 지리산은 방장산이라 불리며, 불교에서 지혜의 보살인 문수보살의 도량이라고 한다. 지리산 칠암자의 여느 사찰이나 암자의 승방 못지않게 이곳 문수암 천인굴은 수행자가 찾고 싶었던 방장으로 여겨진다. 지리산 문수암의 지리산 주능선 조망, [사진]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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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석굴에 천 명이 앉을 수 있다는 깊은 의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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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을 사찰에서 해우소라고 부르는 깊은 뜻
-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의 지리산 자락에 상무주암(上無住庵)이 있다. 지리산 칠암자 숲길을 거느린 삼정산의 정상을 이루는 세 봉우리에서 지리산 주능선인 벽소령을 바라보는 첫째 봉우리 아래에 상무주암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암자는 9세기 중반에 영원 대사가 지리산 영원사와 함께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리산 삼정산 상무주암, [사진]이완우 영원사를 출발하여 1.8km의 너덜 바윗길을 걸어서 빗기재를 넘으면 상무주암에 도착한다. 11월 초순의 가을 산 낙엽들은 바람결에 흔들리며 서늘한 기운에 잡념이 들 새 없이 가볍게 낙하한다. 봄 여름에 걸쳐 이룬 엽록소의 장막을 걷으며 숲은 환해져 간다. 겨울 산의 추위와 침묵을 예감하며 낙엽들은 쏟아져 내린다. 상무주암 도량을 바라보며 내리막 산길이 평지로 바뀌면서 지리산 주능선 원경이 활짝 열렸다. 지리산 줄기의 봉우리들이 장쾌하기 이를 데 없다. 하늘에는 적운이 피어 오르고 있었다. 구름은 한 장소에서 20분 정도 바라보고 있으면 천천히 모양이 변하여 없어지기도 한다. ‘머무름이 없다’는 이름의 암자에서 머무름 없이 변화하는 구름을 바라보니 새롭다. 지리산 상무주암 앞 오솔길, [사진]이완우 암자는 입구에 탐방객의 출입을 사양하는 정낭이 걸쳐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지리산 깊은 산중의 작은 암자에서 제주도의 풍물인 정낭의 표식을 보니 친밀한 느낌이 든다. 암자 마당 앞 돌담 축대 아래로 난 오솔길을 걸으며 약수터에서 목을 축인다. 이 암자는 공양간 안에 바위 틈에서 물이 고이는 샘이 있고, 탐방객을 위해 암자 앞 오솔길에 약수터가 있다. 암자 앞 내리막 비탈의 다랭이 텃밭에 여러 가지 채소가 푸르게 가꾸어졌다. 암자 공양간 샘의 물줄기가 약수터에서 흘러내려 웅덩이에 모이고 다랭이 텃밭의 수원지가 되어 채소를 자급자족할 터전을 구성하였다. 암자와 함께 도량을 이룬 다랭이 텃밭을 보니 농사일을 수행으로 여기는 스님들의 하루 생활을 짐작할 수 있다. 지리산 상무주암 다랭이 채마밭, [사진]이완우 매년 봄 부처님 오신 날에는 이곳 지리산 칠암자 순례길이 열리고 많은 참배객이 도솔암, 영원사, 상무주암, 문수암, 삼불주암, 약수암과 실상사에 이르는 14.5km의 숲길을 즐겁게 고행 삼아 걷는다. 우리나라의 산티아고 순례길이라고 할 만하다. 그날에 이곳 상무주암은 참배객들의 점심 공양 장소가 된다. 해마다 이곳에서 수백 명의 점심 공양 한마당이 펼쳐진다고 한다. 상무주암과 경봉 스님 해우소 이야기 암자 앞을 지나가는 돌담 축대 아래 오솔길에서 암자 법당의 상무주(上無住) 편액이 보인다. 이 편액은 20세기 우리나라 불교계 고승인 경봉(鏡峰, 1892-1982) 스님의 친필로서 그의 법명인 원광(圓光)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젊은 시절에 경을 보다가 하루는 "종일토록 남의 보배를 세어도, 스스로에게는 반 푼어치의 이로움도 없다[終日數他寶, 自無半錢分]"는 구절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아 더 열심히 본질적인 공부에 노력했다고 한다. 지리산 상무주암 지리산 주능선 조망, [사진]이완우 경봉 스님은 사찰의 화장실을 가리켜 해우소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붙인 스님이다. 그가 통도사 극락암의 조실이었던 1950년대 어느 날 화장실에 해우소(解憂所)와 휴급소(休急所)라는 이름을 내걸었다. 대변 공간이 해우소였고, 소변 공간은 휴급소였다. 자기 자신만의 공간인 해우소에서 마음속의 번뇌, 망상, 근심 등을 다 버리라는 경봉 스님의 깊은 뜻이 있었다. 스님은 세상 살면서 가장 급한 것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찾는 일인데, 세상 사람들은 별로 바쁠 것 없는 것을 바쁘게 찾으며 산다고 하였다. 그래서 매일 몇 차례 찾는 휴급소는 필요 없이 급한 마음을 쉬어 가라는 뜻이었다. 결국 필요 없는 급한 마음은 멈추고, 진정으로 급한 자기 자신을 찾으라는 역설적 표현이기도 하다. 사찰에서 말해서는 안 되는 세 곳이 삼묵당(三黙堂)인데 승당(僧堂), 욕실(浴室)과 해우소이다. 침묵하라는 것은 신중하게 내면을 성찰하라는 의미이니 삼묵당은 곧 수도의 장소이다. 깊은 산중 사찰의 해우소는 지형적 특성을 이용한 누각식 구조가 많다. ‘정월 초하루에 힘을 주면 섣달그믐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찰의 해우소는 높낮이가 있는 개성적인 건물이며, 시원한 바람이 불어 마음을 정결하게 해 주는 장소이다. 지리산 상무주암 전망바위 바둑판 문양, [사진]이완우 상무주암에서 고려 시대 스승과 제자인 선승 3명의 이야기 고려시대 보조 국사 지눌(知訥, 1158~1210)은 불교를 혁신하기 위해 신앙 단체인 수선사를 결성하고 이끌었다. 현재의 조계산 송광사는 처음 이름이 정혜사(定慧社)이며 1205년에 왕명으로 수선사(修禪社)로 바꾸었고, 고려 말기에 송광사(松廣寺)로 개칭되었다. 수선사는 보조 국사가 결성한 단체이며, 송광사의 이전 사찰 이름이었다. 1197년에 이곳 상무주암에 보조 국사가 머무르며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보조 국사의 제자인 혜심(慧諶, 1178년~1234) 선사가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을 지었는데, 혜심의 제자인 각운 선사 역시 이곳 상무주암에서 스승의 저술을 자세히 풀이한 『선문염송설화(禪門拈頌說話)』를 저술했다고 하는데, 이들 저술은 고려 시대 선문(禪門)의 필독 서적이었다. 이들 저술의 구성은 수많은 선문(선문답)마다 염송(깨달음 경지의 선시)을 달고 다시 상세히 풀이한 설화(주석, 설명)를 덧붙이는 삼단 구성을 되풀이하는 형식이 기본이었다. 각운 선사가 염송 설화를 엮을 때 오랜 저술로 붓끝이 닳아 자주 못 쓰게 되었다. 어느 날 어디선가 족제비 한 마리가 나타나서 꼬리를 내밀었고, 그 꼬리털로 붓을 만들어 『선문염송설화』 30권을 마무리 지었다. 그러자 족제비 꼬리털로 만든 붓끝에서 사리가 나왔다고 한다. 이곳 지리산 상무주암에는 이 사리를 보존하여 쌓았다는 3층의 필단사리탑(筆端舍利塔)이 남아 있다. 오랜 세월 이어진 염송 설화 저술의 어려움으로 기진한 각운 선사가 쓰러져 세상을 떠나자 ’붓끝에서 사리가 나왔다‘고 과장한 극적인 요소의 설화가 창작된 것으로 보인다. 지리산 상무주암 바둑판 문양 바위, [사진]이완우 지리산 상무주암에 전해지는 스승과 제자로 이어진 세 선사의 수행과 저술 활동으로 보아 이 암자가 고려 불교의 선풍 진작에 큰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혼자 선정에 들었는데 허수아비 같았다. 얼굴은 거미줄이 덮었고, 새 발자국이 무릎에 찍혀 있었다. 이곳 상무주암에 거주하며 수행하는 모습을 묘사한 이 표현은 수행자들이 얼마나 처절하게 구도에 전념했는지를 느끼게 해 주어 숙연해진다. 상무주암 옆의 가파르게 서 있는 바위 서슬을 찾았다. 이곳은 지리산 주능선의 천왕봉, 중봉과 제석봉이 뚜렷이 보이는 전망대로 이 암자의 스님이 가끔 찾아와 휴식하고 명상하는 장소로 보인다. 바위에 기대어 자란 듯한 소나무 가지 사이로 지리산 주능선이 보여서 색다른 풍경이었다. 이곳 바위 위에 바둑판 문양이 세 곳에 조각나게 그려져 있다. 바둑판은 형식과 규격에 맞지 않아 바둑을 두기 위한 목적은 아닌 듯하다. 푸른 하늘, 지리산 정상, 소나무 등과 어울리는 운치 있는 바둑판 문양을 살펴보면서 전망대 바위에서 오래 머물렀다. 상무주암을 떠나며 사찰 건물의 규모나 형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무주암에 머물렀던 역사, 인물과 깨달음으로 향하는 구도자의 마음을 만나고 떠났다. 어느 큰스님은 떠나는 수행자나 신도들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뒤돌아 머뭇거리지 말고, 똑바로 앞으로 가거라! 지리산 상무주암 산길 삼정산 조망, [사진]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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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을 사찰에서 해우소라고 부르는 깊은 뜻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