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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소동의편지] 난세란 과연 어떤 세상을 말하는가
    ‘난세(亂世)’란 과연 어떤 세상을 말하는가? 박소동 지난해 8월 15일 현암사에서 출간한 번역 『맹자(孟子)』의 머리말에 내가 어릴 때 들었던 ‘난세에는 반드시 맹자를 읽어라[亂世必讀孟子]’라는 말을 썼다. 그런데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난세라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나는 고전에 나타난 난세의 판단 기준으로 3가지를 제시하고 21세기를 사는 대한민국 집단지성들의 판단을 구한다. 첫째 : ‘상벌부중(賞罰不中)’이다. 잘한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잘못한 자에게는 벌을 주는 일이 정확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바른 통치의 치세이자 통치자의 기본 덕목이다. 그래야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는 ‘권선징악(勸善懲惡)’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상을 주는 것과 벌을 주는 것이 그 행위에 적중하지 않고 통치자의 자의적인 집행으로 법의 기능을 웃음거리로 만들거나 작은놈은 걸리고 큰놈은 통과하는 ‘거미줄 법’이 되면 국민은 법치를 불신하게 되고 통치자를 증오하게 된다. 난세의 길로 가는 조짐이자 상징이다. 둘째 : ‘현재불거(賢才不擧)’이다. 통치자는 혼자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조직이 동원되어 통치하는 것이다. 그러니 조직에 알맞은 인재를 등용해서 맡겨야 하는 일이 통치자의 중요한 임무이자 의무이기도 하다. 그런데 조직과 임무에 알맞은 인재가 아니라 사적인 친불친과 이해관계로 관리를 등용하면 그 조직이 무너지고 그로 인한 피해는 국민의 몫이 된다. 국민은 통치자를 불신하게 되고 원망하게 된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회복할 수 없는 ‘시스템 붕괴’로 이어져 국가 존립의 중요 기능인 ‘국내의 치안[內治]’은 물론이고 국방과 외교마저 위태롭게 된다. 국가의 존망을 좌우했던 지난날 모든 나라들의 역사가 이를 대변해 주는 지금의 교훈이다. 셋째 : ‘언로폐색(言路閉塞)’이다. 통치자에게는, 잘한다고 칭찬하는 말은 듣기에는 달콤하지만 올바른 판단을 하고 올바른 통치를 하는 데는 독이 된다. 엄밀하게 말하면 통치자를 망치는 말이다. 그래서 ‘말[言]’이라고 하지 않고, 잘못한 것을 지적하는 바른말을 ‘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바른말은 듣기에는 거북하다. 바른말을 할 수 있고 수용하는 통로를 ‘언로(言路)’라고 한다. 전통 군주 시대에도 통치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고 법으로 보장하였다. 그래서 2중 3중으로 ‘언관제도(言官制度)’를 두어서 언제든지 통치자에게 바른말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말이 옳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만이지 옳지 않다고 벌을 주면 바른말 하는 사람을 천리 밖에서 거절하는 것이고 그러면 군주의 주변에는 달콤한 말만 하는 아첨배 간신배만 가득할 것이니 눈멀고 귀먹은 군주가 어떻게 국민의 마음을 알아서 바른 정치를 하겠느냐?”라고 군주에게 언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대목이 『조선왕조실록』에 종종 등장하는 이유이다. 조선왕조 시대의 군주가 모두 현명한 것은 아니었지만 500년을 유지했던 것은 실로 언로의 활성화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로가 시스템화한 덕에 어리석은 혼군(昏君)의 전횡을 극복한 사례가 많다. 『조선왕조실록』의 한 사례를 들어 보면 얼마나 언로가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한 선비의 상소문 중에 ‘당신은 허수아비 같은 군주다.’라는 비유를 하는 문장까지 있었다. 왕은 이 상소에 답하면서 ‘내게도 이렇게 말할 정도면 다른 일에야 얼마나 더 강직하겠는가. 가상하다.’라고 한다. 그런데 그 답 아래에 ‘사신왈(史臣曰)’로 시작하는 댓글이 달려 있다. ‘말은 가상하다고 하지만 불쾌한 기색이 역력하니 그 말이 받아들여지겠는가.’ 임금 앞에 앉아서 사실을 기록하는 사관이 현장의 분위기를 전한 것이다. 이렇듯 군주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역사를 의식하며 하여야 하는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국민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하는 정치가 가장 말기적인 난세의 현상이라는 『춘추』의 판단이 지금도 유효하다. 현실 정치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21세기를 사는 우리 민주시민의 집단지성들은 과연 이 세 가지 판단 기준에 얼마나 동의하고 동감할지 자못 궁금하다. 글을 쓴 박소동 교수는 구례에서 태어났다. 난포蘭圃 서한봉徐漢奉 선생을 사사하였다.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실장 · 편찬실장 · 교무처장, 한국고전번역원 한학교수, 성균관대학교 한문고전번역 석박사 통합과정 겸임교수,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원 초빙교수, 한국고전번역원 이사를 역임했다. 현재 한국고전번역원 명예한학교수이며,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했다. 지난해 출간한 『맹자』 외 다수의 저서가 있다. 귀향 후 구례 호양학교를 터 삼아 고전에서 길어 올린 시대의 좌표를 가르치고 있다. 호양학교는 을사늑약 이후 구례 지역의 선각자들이 망국의 한을 안고 후학 양성을 위하여 1908년 광의면에 설립하였고 1920년 폐교되었으나 2006년에 복원하였다.
    • 사람이야기
    2025-01-09
  • 지리산방송국
    지리산방송국 “여보, 노랑이 눈이 왜 이래?” 마당 어귀 가마솥 앞에 앉아 메주콩을 삶는 아내에게 큰소리로 외쳤다. 부지깽이로 불잉걸을 툭툭 치며 손바닥만 바라보던 아내는 그러나 내 큰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또 귀에 이어폰을 꽂은 모양이다. ‘쯧쯧’ 혀를 찼다. 바깥마당 길고양이 노랑이 눈에 안약 넣어줄 궁리를 하며 아내께로 다가가 어깨를 흔들었다. 화들짝 놀란 아내가 뒤로 나자빠지는 듯했다. “엇따야, 경기하겠네. 뭘 듣기에 그리 푹 빠졌어?” “아유, 좀 가만가만 말로 하지. 지금 소설 듣고 있거든.” 지난봄 유튜브 방송 가운데 책 읽어주는 방송이 있다는 말이 퍼뜩 떠올랐다. 그때부터 아내는 유튜브 방송에 빠져 살았다. 이른 아침 정치방송에서 시작된 아내의 유튜브 사냥은 저녁때까지 계속되었다. 처음엔 그런 아내가 못마땅했다. 흥미를 끌어 돈벌이하려는 유튜버가 대부분일 거라 믿었다. 거기 나오는 정보가 옳을 리가 있나. 허접한 몸짓과 익살스런 표정으로 관심 끌기에 혈안이 된 돈벌이광기의 도가니일 거란 생각이었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진실은 드러나고 진정은 느껴지기 마련이다. 몇몇 좋은 방송을 만나면서부터 나 또한 유튜브 채널의 중독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국민 여러분. 지금 국회로 나와 주십시오. 이 나라 민주주의를 지켜 주십시오.” 야당 정치지도자의 다급하고 처절한 목소리가 유튜브 방송을 타고 흘러나왔다.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선포했고 무장한 경찰과 군인이 국회를 막아섰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국민은 국회로 나갔고 이 나라 민주주의를 지켜냈다. 그 자리를 지켜낸 국민 모두가 기자였고 기록자였다. 밤새 텔레비전을 켜두고 있었지만 정작 눈과 귀는 손바닥 속에 든 유튜브 방송에 열려있었다. 명망 있는 독점언론 독점방송의 시대가 저무는 것을 느꼈다. 누구나 방송인이 되어 주관을 밝힐 수 있는 방송국이 내 손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낮은 곳에서 느리게 살자’는 맹세를 하면서 지리산에 들어온 지 스무 해가 다 되었다. 그러나 세상은 내 삶을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괭이 하나에 의존했던 농사에 관리기를 더했고 농사는 늘었다. 자꾸 위를 향하는 숨 가빠지는 세월이었다. 내 삶만 그랬을까. 곳곳이 갈라지고 파이는 국토와 이리저리 떠밀리며 착취당하는 이웃들, 서식처를 잃고 쫓기는 가녀린 생명들, 이 문명은 우리들을 느리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지리산 여기저기 함성은 끊임없이 들끓었다. 누구는 ‘케이블카반대’를 외쳤고, 어디서는 ‘골프장반대’를 외쳤다. 저 언덕엔 산악열차가 저 골짜기엔 양수발전소가 들어올 거라는 말이 들렸다. 이 광란의 문명은 삶터를 지키려는 우리들 저항의 돛을 꺾고 노를 부러트리기 일쑤였다. ‘여기 와보세요. 저 아름다운 숲을 보세요. 거기 깃들어 사는 무수한 생명들 순수무구한 눈빛을 봐주세요. 저들과 함께 살아가는 길을 열어주세요. 그 길을 여럿이 함께 따박따박 걸어주세요.’ 이런 말을 해주는 방송이 있으면 좋겠다. 구상나무 떡갈나무 사이를 오가는 하늘다람쥐의 비행과 연하능선 흐드러진 범꼬리 산오이풀 현란한 춤사위를 보여주는 방송이 있으면 좋겠다. 덕산장 인월장 옹기종기 모여 앉은 사람들 살아가는 이야기가 흐르는 방송이 있으면 좋겠다. 낮은 곳에서 느리게 살아 더 아름다운 사람의 모습을 전해주는 방송이 있으면 좋겠다. 유튜브 방송채널에 아내가 즐겨 만날 ‘지리산방송국’이 더해지면 좋겠다. 지리산의 노래와 시와 함성과 소곤거림이 세상천지에 메아리치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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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24
  • [반달곰1%가게유람기] 새참 먹는 시간, 그녀가 만드는 한 끼
    반달곰을 사랑하는 1% 가게 유람기입니다. 반달곰1%는 지리산권 가게들(현재는 구례)이 자발적으로 진행하는 공존프로그램으로 반달곰1% 가게에 가면 반달가슴곰을 자연스럽게 만나고, 특별히 계획하지 않아도 반달가슴곰 보호활동에 참여하게 됩니다. 2021년 5개 가게로 시작한 반달곰1%는 2024년 현재 10개 가게로 늘어났습니다. ‘유랑인증서’를 통해 반달곰1% 가게에 들러 물품을 먹거나, 마시거나, 구입하여 모아진 1%의 기부금은 올무수거 활동, 무인센서카메라 구입 등 반달곰 보전활동을 위해 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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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20
  • 천왕봉 아래에서 새 문명을 꿈꾸네
    김석봉 선생 댁 마당에 들어서니 귀여운 고양이들이 먼저 나를 맞이하였다. 40여 마리에 이른다니 이 집의 주인은 고양이들이 아닌가. 집안에서는 또 견공들이 활달하게 손님을 접대한다. 나중에 만났지만 밖에는 목욕을 마친 거위도 집안 곳곳을 활보하고 있었다. 대부분 일부러 들인 게 아니라 갈 곳 없는 처지의 생명들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들을 돌보는 데 들이는 시간과 정성뿐 아니라 먹이기 위해서 투입하는 경제적 부담은 내가 상상하는 수준을 몇 배는 뛰어넘었다. 선생의 마음, 살아가는 태도가 깊숙이 다가온다. 원래 선생은 지역의 청년 작가로 활동하면서 진주교도소에 재직하고 있었는데 재소자로 온 문익환 목사를 만나면서 생애의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이때부터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는데 2천년대 초반 우리나라 환경운동의 굵직한 장면들을 이끌었다. 2009년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2012년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을 거쳐 2007년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함양의 이 집으로 들어왔다. 여기로 오셔서 한 번도 옮기지 않고 18년째 살고 계십니다. 귀농, 귀촌할 때 지역과 집을 결정하는 문제가 간단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운명 같습니다. 그게 결심해서 되는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처음 이 집을 보러 왔을 때 2년 동안 방치되어 있어서 보잘것없었지만 내 느낌이 참 좋았어요. 집을 보러 온 게 아니라 다른 사람 따라서 우연히 온 것인데 너무 좋아서 집사람하고 함께 다시 한번 보고 나서 바로 계약했어요. 그 전에 시골에 살아야겠다는 계획은 하고 계셨나요? 우리 나이 정도(선생은 57년생이다)면 그런 꿈은 다들 가지고 있지요. 하지만 내 경우는 갑작스러운 일이었어요. 그때 진주환경운동연합 상근 의장을 하고 있었는데 이 집을 사고 나니까 가서 살고 싶더라구요. 그래서 도배, 장판만 하고 이사를 하면서 단체 일을 정리했습니다. 과연 그럴까? 10년 넘게 준비하고서야 내려온 사람으로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쩌면 선생은 무의식 속에서 오랜 시간 자연 속에서의 삶을 이미 살고 계셨기 때문이 아닐까? 농사 규모가 적지는 않습니다. 농사일에 적응하기가 쉽지는 않았을텐데요. 처음부터 농사를 지었던 것은 아니예요. 이명박 정부 시절 4대강 반대 싸움 등 환경운동연합 대표로 활동하고 이후 녹색당 운영위원장까지 서울을 왔다갔다 하느라고 농사는 뒷전이었지요. 2012년 중반 서울 활동을 정리하고 나서 그때부터 전업농부로 살았어요. 힘들지는 않으셨어요? 규모가 어느 정도죠? 농사일이 운동보다는 쉬웠어요. 지금 밭으로만 2,400평 정도 됩니다. 제 기준으로는 어마어마합니다. 더구나 밭농사여서 그렇습니다. 예전에 논농사도 했는데 그건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요. 모든 것을 기계가 하잖아요. 그래서 ‘이건 하나마나 한 농사다’ 생각이 들어 3년 하고 때려치웠습니다. 밭농사는 자기 의지대로 하는 거잖아요. 작은 관리기 하나하고 괭이 가지고 내 마음이 가는 대로 고랑과 두둑을 크게도 하고 작게도 하고 얼마나 자유로운지 몰라요. 한동안 선생께서는 수확물을 판매하는 데 힘을 쓰셨던 것 같다. 그 과정에서 마음의 불편함을 느끼신 적도 있었다. 이제는 대부분을 나눔으로 소진하고 계시다. 농사의 규모도 조금은 줄이셨다.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러나 나는 농사일을 결코 욕심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내 삶에 부여하는 고결한 예의라 여겼다. 그랬거나 말거나 내년부턴 이 밭을 주인께 돌려주리라 마음먹었다. 욕심이라면 도려내기로 했고 스스로에 대한 예의라 해도 채울 만큼 채웠다 싶었다.”(선생의 페이스북에서) 선생님! 펜션인가요? 운영하고 계시죠? 펜션은 무슨(웃음), 민박입니다. 이 아래채인데 1945년 해방되던 해에 지은 집이예요. 그 사이 기둥을 보강한다거나 했겠지만 원형을 최대한 살리면서 방 세 칸 짜리 민박을 하고 있어요. 생활의 즐거움 가운데 하나인 것 같습니다. 맞아요. 우리가 여기서 살게끔 하는 가장 큰 동력이기도 했고 소재이기도 했지요. 이웃들이 있지만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너무 달라서 소통이 어려워요. 농사 얘기 말고는 할 얘기가 없고. 민박 손님들과는 대화, 소통, 교류가 잘 되니까 적적하지 않았어요. 사모님께서 음식에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계신 점이 큰 힘이 되었겠어요. 그렇죠. 시설 보고 오는 사람은 없을 것 같고 음식 때문에 오는 사람은 있어요. 아들과 며느리, 이쁜 손녀딸까지 3대가 모여 사는 모습이 오늘날에는 흔치 않은 사례가 될 것 같다. 바로 곁에 며느님이 운영하는 카페가 있고 선생의 페이스북에서는 이쁜 손녀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페이스북을 훑어보면서 사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셨을 듯 느꼈습니다. 처음에는 마을 가운데 있는 이 집이 좋았어요. 외따로 떨어져서 사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약간은 이해가 가요. 마을기업을 했었어요. 그런데 이웃들은 내 이익 이외에 공동의 이익, 마을의 이익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 벽을 허물어보려고 함께 견학도 다니고 열심히 설득을 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보조사업 지원금이 나왔는데 그걸 나눠 갖자는 거예요. 기가 막히더라니까. 내가 ‘우리 모두 쇠고랑 찹니다’라고 했죠. 결국 2~3년 후 접었어요. 그 아픈 기억이 있지만 선생은 여전히 마을의 일원으로서 음식도 나누고 마을행사에 참여한다. 불편함도 삶의 한 부분이 아니던가. 우리 모두 함께 늘 고민하고 깊이 성찰해야 할 중요한 주제가 아닐까. 선생님께서 열정을 바친 환경운동을 회고하면서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들려주십시오. 쉰 한 살 때 운동을 정리하고 완전히 내려왔어요. 한창 일할 나이이고 더 나이 든 분들도 열심히 하고 계시지만 나보다 더 진취적이고 잘할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했어요. 돌아보면 우리가 했던 환경운동은 모두 옳다고 확신했어요.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 일들이 모두 미래지향적이고 생태적이었나 안타까운 점들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대체 에너지를 확보하기 위해서 태양광 발전에 힘을 쏟았지요. 그런데 그 결과 논과 밭, 숲을 파헤치고 사방에 태양광 패널이 볼썽사납게 설치되고 또 그것 때문에 길을 내는 등 환경을 파괴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우리는 주차장 등 우리 삶의 유휴공간을 활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지요. 환경운동의 큰 방향을 어떻게 가져가야 할까요? 개별적인 운동들은 대부분 개인적인 관계 속에서 전개돼요. 예를 들어 군산에 골프장 들어선다고 함양 사람이 가지는 않잖아요? 물론 그런 운동이 필요하지만, 근본적인 문명의 전환을 도모하는 어젠다를 제시하는 운동을 개발해야 하지 않는가 생각해요. 다만 그것은 민간 차원에서는 쉽지 않지요. 전환은 지방정부나 국가 차원에서 해야 하는데 자본이 최고인 이 사회에서 가능할까요? 자본주의 체제의 극복을 목표로 정치지형을 전복하는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일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합니다. 점점 더 어려워진다. 그러나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말씀이다. 기후위기를 향해 돌진하는 이 미친 문명을 멈춰 세우기 위해서 우리가 숙고하고 토론해야 할 무겁고도 뼈아픈 말씀이다. 선생은 땅을 일구고 사람을 만나고 고양이를 돌보는 모든 일상을 시인의 눈길로 갈무리해 왔다. 따스하고 애틋하다. 2020년 농사일 와중에 틈틈이 써온 글들을 엮어 『뽐낼 것 없는 삶 숨길 것 없는 삶』을 펴냈다. 선생의 글을 읽으면 자연과 하나 된 삶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이해된다. “볕이 쏟아지는 빈 밭에 나가 내 몸뚱이도 말려야겠다. 한 시절 흘렸던 뜨거운 눈물도 말려야겠다. 사랑도 말리고, 분노도 말리고, 그리움도 말려두면 좋겠다. 아, 눈물 나게 좋은 가을볕이다.” 내내 건강하시기를!!!
    • 사람이야기
    2024-12-15
  • 어쩌다 누리씨는 산내 마을 활동가가 되었나?
    2024년 12월은 유난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시민들이 불의에 분노했고,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구례 밤재를 넘고, 남원 여원재를 넘어 산내로 향했다.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누리였다. 그는 30대 초반의 반짝이는 눈을 가진 맑은 사람이었다. 자신을 “마을 활동가”라고 했다. -남원 산내 마을 활동가 김누리씨 / 사진 김인호 마을 활동가는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 마을과 활동, 두 가지가 만나는 지점을 생각해 봤다.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마을에는 사람이 살고, 누구나 활동한다. 활동하지 않는 사람은 죽은 사람 밖에 없고 죽은 사람은 이미 저승의 사람이라는 엉뚱한 생각을 들었다. 산내는 남원에서 30분 거리다. 2000년 초반부터 많은 도시 사람이 내려와 살았다. 각자의 이유가 있었겠지만, 산내로 찾아 들어온 사람들 대부분은 귀농귀촌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남원과 함양의 경계에 있다 보니 남원과 함양 양쪽을 연결하기도 하고, 지리산을 가기 위해 백무동이나 뱀사골을 찾는 사람들이 지나는 마을이고, 도시와 농촌을 연결하는 합류 지점 같은 곳이다. 토닥은 산내면 소재지 끝쯤에 있었다. 카페 안에는 책들이 있었고, 셀프로 운영한다는 표지판이 보였다. 편안한 소파와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벽보도 있었다. 여는 카페와는 다르다는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토닥은 산내 사람들이 커뮤니티 공간 겸 카페로 문을 열었다고 한다. 한동안 잘 되었지만, 주변에 카페들이 많이 생기고 나서 약간 시들해졌다. 그리고 1년을 쉬었다. 올봄에 김누리 씨는 다시 토닥의 문을 열었다. 9시에 출근해서 5시에 퇴근해요. 직장인이죠! 부모님이 2000년 초반에 시골에 내려와 살기 시작했어요. 제가 초등학교 4학년이었어요. 잠시 구례에 살기도 했고요. 구례 마산면 청천초등학교를 다니다 8개월 만에 산내로 이사왔어요. 부모님은 여기서 고사리 농사를 하셨어요. 저도 여기서 초등학교를 졸업했고요. 중학교 2학년까지 다니다가 홈스쿨링을 했어요. 그리고 잠시 서울에 있는 대학을 다녔고, 문화예술 관련 일을 했는데, 서울에서 살기 힘들었어요. 2017년에 다시 내려와 지금까지 살고 있어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많은 것 같은데 어떤 일을 하고 있나요? 우선 여기 마을 카페 토닥에서 일하고 있고요. 지리산 작은 변화 지원센터 이음에서도 일하고 있고요. 성폭력근절과 성폭력 피해자 지원하는 일, 성 인지 감수성 교육을 지원하는 일, 그리고 산내 청년 공간 등등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어요. [ 산내 마을 카페 토닥] 일이 정말 많은데 많은 일을 하는 이유가 뭔가요? 우선 먹고살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어요. 살아야 하니까요.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고요. 시골에 살려면 재밌는 일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사람들과 만나고 대화를 나누는 일을 진행하는 것이 재밌어요. 맞아요. 시골에서 사는 것의 가장 힘든 부분 중의 하나가 재미가 없다는 것이라고 저도 생각해요. 구례에도 도시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많은데 재미가 없어 떠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은퇴하신 분들은 느긋하고 나른하게 살아도 되지만 젊은 분들은 다르잖아요. 재미가 없으면 살기 힘들죠! 그런 면에서 누리 씨가 하는 일들은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하는 일과 그 재미를 찾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되겠군요? 네. 시골에서 청년들이 남아 있으려면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저도 생각해요. 재미라는 것이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우선 사람들이 만나서 이야기하고 함께 하는 일만큼 재밌는 일도 없고요. 그래서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많이 하려고 하고 있어요. 제가 하는 일들 대부분이 그런 일들이라고 봐야 할 것 같아요. 토닥은 오후 5시면 문을 닫아요. 하지만 진짜 문을 닫는 것은 아니에요. 저녁엔 지역 사람들이 필요한 공간으로 내어주는 거죠. 책 읽기 모임을 하거나 마을 모임을 하는 공간이 되는 거죠! 그동안 저는 제가 내성적이라고 오랫동안 생각했어요. 근데 이 일을 하고 나서 생각이 변했어요.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하고 하는 일이 재밌더라고요. 그동안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사실 힘들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처럼 다양한 활동을 하며,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그 사람들을 알아가고 이야기하는 시간이 재밌다는 생각을 들었어요. 그래서 지금도 더 다양한 일을 찾아보려고 모색하고 있어요. 토닥 판매 수익으로 카페를 운영하기 힘들 것 같은데요? 네. 그래서 일종의 후원회원을 모집해서 운영하고 있는데 아직은 많은 편은 아니에요. 100명을 모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100명 모집해도 사실 운영하기 쉽지는 않아요. 그래도 다행히 임대료가 없어서 가능하죠. [건물을 기증하신 분에 대한 감사의 책장] 이 건물은 처음 토닥을 시작할 때 매입했어요. 처음 구매했던 분들이 증여를 해주셔서 임대료 없이 운영할 수 있어요. 그래서 지금도 운영이 가능한 것이고요. 임대료가 있었다면 하지 못했을 거예요. 벽에 건물을 기증한 분의 사진이 걸려 있더라고요. 그분들이 참 고마운 일을 하셨네요. 네. 그분들이 아니었으면 운영하기 힘들죠.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지리산이나 자연, 시골에 사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사실 제가 어려서부터 시골에 살았지만, 시골이나 자연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어요.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 같아요. 눈앞에 항상 지리산이 보이지만 산이 보이는구나! 정도의 느낌 이상은 아니었어요. 이 동네 사람들은 눈 내리면 바래봉에 가야 한다는 일종의 국룰이 있는데 저는 눈 내릴 때 바래봉에 가야겠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거든요. 그만큼 좀 무심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여기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생각이 변했어요. 생각이 바뀌니까 지리산도 바래봉도 산내도 달라 보이더라고요. [카페 토닥의 내부 모습 커피와 음료 대부분이 2천원 정도였다.] 책장에 자본주에 관한 책들이 많이 보이는데요. 현 체제에 대한 고민이 많은 것으로 보여요. 자본주의 문제점이나 대안 같은 것을 고민하고 있나요? 음....너무 큰 주제인 것 같기는 하네요. 그러면 누리 씨가 생각하는 자본주의 가장 큰 문제점은 뭐라고 생각하나요? 음… 여전히 힘든 질문이에요.(웃음) 제 주변 상황에서 보면 자본주의 가장 큰 문제점은 지독한 개인주의라는 생각이 들어요. 타인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심 같은 거죠. 서로를 배려하지 않고 자기 입장만 생각하다 보면 함께 하지 못하고 결국 외로워지는 점도 있다는 생각도 들고요. 타인에 대한 배려나 나눔 같은 문화가 풍요한 세상은 되었으면 좋겠어요. 자신만을 생각하고 살면 좋을 것 같기도 하지만, 어려운 상황이 되면 누구나 도움 받기를 원하잖아요. 그렇게 개인주의가 너무 강화되면 아무도 도움을 주지 않을 것 같거든요. 저는 산내에서 재밌게 살기 위해서 서로서로 배려하고 지역에 대한 고민하는 일을 하고 싶어요. 그럼, 지금 생활은 어떻게 하시나요? 작년에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대장암이었는데 진단받고 두 달 만이었어요. 그동안은 농사가 주 수입원이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농사를 지속하기 힘들게 되었죠. 그래서 어머니는 인월에서 미미부엌이라는 식당을 운영하고 있어요. 저도 여러 가지 일을 해서 생활하고 있지만 사실 큰돈을 버는 일들은 아니라서 이일 저일 많이 하고 있죠. 그래도 사는 데 큰 지장은 없고 잘살고 있답니다. 서울에 살 때 너무 밀집되고 압축된 생활을 했었는데 그곳에서 제가 살기가 쉽지 않았어요. 여기서 사는 것이 저에게 맞는 것 같아요. 숨 쉴수 있고 마음이 편안해요. 그래서 2017년부터 쭈욱 살고 있답니다. 시골에서 청년들이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제가 사는 구례에도 많은 청년들이 살고 있지만 어떻게 살고 있는지 저도 잘 몰라요. 그래서 산내의 청년들은 어떻게 생활하는지 궁금하거든요. 산내는 구례읍보다 작은 곳이다 보니 여기서 버티면서 사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가장 큰 문제가 경제적인 문제고 두 번째는 아무래도 심심할 것 같거든요? 네. 저도 이 점에 대해서 고민이 많아요. 경제적인 문제는 카페에서 일하거나 농사일을 돕거나 소소한 일들을 하거나 일을 만들어 생활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두 번째 문제는 서울처럼 공연이나 행사가 많은 곳이 아니라 지루 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여러 가지 재밌는 일들을 만들어 보려고 해요. 제가 하고 있는 지리산 작은 변화 지원센터도 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못하고 있는 일을 지원하고 있기도 합니다. 토닥에서 책 읽기 모임도 하고 있거든요. 책을 읽는 좋아한다면 여기 나와 함께 이야기해 볼 수도 있겠죠. 청년들의 펜션 쇼 같은 것도 해보고 싶어요. 결국 재미라는 것은 사람들과 만나고 이야기하고 서로를 알아 가는 것들, 그래서 만날 사람이 있고 돈 버는 일이 아니라도 소통하면서 지내면 재미가 있을 것 같거든요. 저는 여기서 남아서 재밌는 일들을 하고 싶어요. 산내사람들과 더불어서요. {웃음} 이야기할수록 김누리 씨에게 더 궁금한 질문들이 늘어났다. 그만큼 청년이 지역에서 살아남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고 마을은 점점 소멸해 가고 있다. 가끔 시골에 내려와 1~2년 동안 무엇인가 열심히 시도하다가 어느 날 봄 눈처럼 사라지는 청년들에 대한 기억들도 있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힘듦, 또는 시골문화와 충돌, 또는 지루함 이것도 아니면 두고 온 도시가 그리워 버티기 힘들었기에 그들은 다시 원좀으로 회귀했을 것이다. 하지만 누리 씨는 도시에 살던 몇 년을 빼고는 시골에 남아 산내 사람들과 함께 일을 만들어 내고 그 일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란 청년들이 다시 지역으로 돌아온다면 마을 소멸이라는 단어는 사라졌을 것이다. 떠난 청년들이 돌아오지 않기에 지금 이 시간에도 시골 마을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있다. 그래서 누리 씨의 도전은 더욱 빛나는 것 같다. 토닥에서 인터뷰하는 동안 천왕봉을 넘어온 오전의 햇살이 자꾸자꾸 들어와 토닥과 책들을 비추고 누리 씨를 비추고 있었다. 그의 삶에도 항상 따뜻한 지지와 행복한 햇살이 비췄으면 좋겠다. [김인호 사진기자]
    • 사람이야기
    2024-12-11
  • 노고단이 그리워
    겨울이면 유난히 극성을 부리는 산프란시스코(San Francisco)의 짙은 밤 안개가 자욱하게 드리운 창밖을 내다보면서, 조금 전에 태평양을 건너와 미국 서쪽 해안까지 실어온 텔레비전 뉴스를 따라 멀리 눈 덮힌 지리산 노고단을 향하여 눈을 감고 그리움에 시름겨워하다가 컴퓨터를 켜고 이렇게 앉았다. 기후에 대한 기록이 있어 온 이래 가장 많은 11월의 폭설이 한국을 덮쳤고, 수많은 피해를 냈다는 고국의 뉴스를 들으면서 나는 눈 덮인 노고단의 아름다운 모습이나 떠올리며, 한가한 그리움에 젖어 이 글을 시작하니, 처지가 달라지면 느낌도 달라지는 한심한 자신에게 연민을 느끼기도 한다. 내가 20년을 살았던 지리산파크 아파트 701호에선 아름답게 눈 덮인 겨울의 노고단을 바라보기가 가장 좋은 위치였다. 여름이면 비가 내린 뒤에 지리산의 웅장한 산허리를 감고 피어오르는 안개가 마치 백룡(白龍)이 춤추며 하늘로 오르는 모습이라고 매번 감탄하기도 했지. 초여름 신록이 피어나기 시작하면 연두색 새 잎새들이 무리지어 솟구쳐 온 사방에 신선한 생기를 뿜어대던 그 찬란한 향연을 나만이 독점한 듯이 이기적인 기쁨을 만끽하기도 했지. 아아 그리운 구례,.... 지리산 노고단, 섬진강 물여울, 백운산의 먼 병풍, 밤재를 넘어 달려 내려오던 구례 평야의 시원한 바람, 나의 한국 생활 20년 동안 가장 많은 발자국을 찍었던 서시천 언덕의 다정하고도 유연한 구비들, 구례는 사시사철 향기에 젖은 그야말로 금환낙지(金環落地)의 땅이 아니더냐! 그런데 사실 그리움의 초점은 아름다운 산하를 지닌 구례의 자연환경이란 공간만이 아니라, 그 속에서 함께 웃고, 떠들고, 마시고, 노래했던 사람들과 더불어 지냈던 세월이란 시간이 더욱 아프게 내 가슴에 가라앉아 있다. 하나 하나 이름과 얼굴을 그리면서, 차마 잊지 못하는 사연들도 떠올리며, 내가 한국에서 살았던 삶의 자취를 아직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내 나이가 80을 넘었고, 주변에서 하나씩 사라져간 사람들이 마지막에 치매를 앓다가 가신 분들이 꽤 많으니, 나 자신도 절대 장담 못 하는 연령에 도달했기에, 한시적인 기억에라도 아직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지난 5월 6일에 구례의 젊은이들이 모여 시간과 정성을 드려 미국으로 떠나는 나를 위해 송별연을 베풀어주며, 현수막에 여러분들이 한마디씩 남겨준 글씨를 나는 지금 내 방 벽에 걸어두고 수시로 콧잔등 시큰거리며 바라본다. 나 자신도 그토록 떠나기 싫었던 구례를 기어코 떠나와야만 했던 자신의 운명에 대해 지금도 솔직히 슬퍼하고 있다. 나 죽거든 시신을 화장해서 화엄 계곡 어디엔가 나무 밑에 한 삽 푹 뜨고 뼈가루를 파묻어달라고 유언을 써서 벽에 걸어두기도 했었는데, 그게 불법이라서 실현이 안 되었는가, 이제는 먼 나라 미국 땅 산프란시스코 바다에 유골을 뿌려달라고 유언서를 벽에 걸어 둘 작정이다. 태평양 넓은 바다를 떠돌다가 뼈가루 한 알갱이라도 조국의 해변에 다을 수 있을지...(그럼 뭘해, 공연히 한 번 말이나 해 보는 것이지...) 내 말투가 잡탕으로 이루어진 터라, 구례에 사는 동안 사람들이 몇 차례 나의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고, 그때마다 언제나 구례는 나의 타향이었다. 그래서 충청북도 제천에 있던 호적을 구례로 옮겨놓고 나도 전라남도 구례 사람이 되기로 작정했었다. (전라남도? 남자들이 홀딱 벗고 나체로 사는 동네란 뜻인가?) 이제는 그것마저 쓸데없는 짓이 되고 말았다. 나의 두 아들 녀석들도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미국에 유학생으로 온 아비를 따라 왔다가 초등학교부터 대학원까지 미국에서 교육받고 자란 미국 시민권자들이 된 50대의 사내들이니, 한국에 돌아갈 희망은 절망일 뿐이다. 호적이고 주민등록이고 다 쓸데없는 장소에서 그들도 죽어갈 것이고, 가계를 기록한 족보도 소용없는 나라에서 영어를 쓰면서 살아가는데, 그들이 비록 한국말을 곧잘 하기는 하지만, 정작 진지한 의사표시는 영어로 하는 녀석들이다. 가족은 물론 주변 사람들과도 영어로 대화하기기 불편한, 간단히 말해서 나는 실향민(失鄕民)이다. 괜히 멋을 부려 영원한 에뜨랑제라고 프랑스말로 자조한다. 제천의 심심산골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 6년, 한문 서당 3년, 중학교 3년을 지냈고, 고등학교는 부산에서, 대학교는 서울에서, 대학원은 미국에서, 그래서 학교 따라 떠돌며 보낸 세월 동안에 내 말투는 온갖 사투리가 범벅처럼 뒤엉킨 부대찌개가 되어버렸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산프란시스코에서 전동차로 한 40분 거리에 있는 이른바 East Bay (東彎) 지역의 Hayward 란 동네다. 도산 안창호 선생께서 한국인들을 조직하여 활동을 시작한 지역도 East Bay에 소속된 오클랜드(Oakland)였다. 여기 Hayward에 2차 대전 후 영어가 불편한 일본인 1세 노인들을 위해 2세들이 40 가구 3층 목조건물을 지어, 일본식 정원에 비단잉어들이 유영하는 연못에 일본식 도리이까지 곁들인 시설을 만들었다. 1세들이 나이 들어 점차로 사라지게 되자 일본인 후예들이 이 건물을 캘리포니아 주 정부에 헌납했고, 주 정부 당국은 이들의 아름다운 뜻을 살리고자 60가구를 더 지어 붙여 Y 자 모양의 100가구 아름다운 3층 목조건물을 완성하여 이름을 에덴 이쎄이 테라스(Eden Issei Terrace)라고 부른다. 그러니 나는 지금 에덴 동산에 살고 있는 것이다. 현재 이 건물에 한국인 노인들이 한 25가구 입주해 있어서 제일 수가 많고, 일본인은 단 한 가정이 남아 있을 뿐이다. 도서실에는 아직도 일본 서적들이 상당히 많이 있고, 방 한칸은 특히 일본식으로 단장된 곳을 보존하고 있다. 현재로는 여기 있는 일본 책들을 즐겨 읽는 사람이 아마도 바로 나 하나뿐일 것이다. 그리고 유일한 일본 할머니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장 정중한 예의를 갖추고 대해주는 사람도 나 하나뿐일 것이다. 내 아내는 한국인 할머니들을 부추겨서 노래 동아리를 만들고, 매주일 한 차례씩 가라오케 시간을 즐기며, 영어가 불편한 한국 할머니들의 유일한 통역관 노릇도 하는, 이른바 한국 할머니부대의 소대장 노릇을 잘도 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상대할 할아버지들도 없으니, 그저 혼자 책도 읽고, TV로 Youtube를 통해 하염없는 시간들을 때우고, 종종 10마일쯤 떨어진 해안 골프장에 혼자 나가서 서툰 골프채를 휘두르고 오기도 한다. 행여 외로운 신선놀음이라고 부르지 말라! 나의 눈물은 가슴 속으로 흘러내리고 있으니까. 그 좋아하는 테낄라(Tequila) 술도 누구 더불어 마실 상대도 없으니, Tequila가 그만 The Killer(살인자)로 변한다. 아아 구례에서 더불어 술도 마시고 책도 읽던 친구들, 내가 주책(酒冊)바가지들로 이름을 붙였던 그 늙은이들도 사무치게 그립다. 나의 노년을 지탱해주는 경제적 도움은 미국에서 살아온 30여년 동안에 내었던 사회보장제도 세금과 연금을 합해 에덴 이쎄이테라스에 입주 가능한 자격 때문이다. 소득이 너무 많으면 들어올 수 없는 저소득 노인 아파트라서, 일부 영리한 한국 할머니들은 재산을 전부 자녀들에게 양도하고, 자기 은행 잔고는 최소한으로 줄여서, 가짜로 가난해진 노인 신세로 10년을 기다려 이곳에 들어온다. 산프란시스코 지역 주택값은 미국 전역에서도 뉴욕과 더불어 최고 수준이라, 지금 내가 살고 있는 12평 아파트면 대략 월 3000달러 정도인데, 이곳 저소득층 노인아파트에선 그것의 10분의 1정도 월세를 내고 산다. 나로서는 죽을 때까지 미국 정부에 감사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러나 미국은 이제는 정말 마음이 안 가는 곳이다. 산프란시스코는 미국 전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낭만의 도시로 한때 많은 사람들을 불러들인 곳이기도 했었다. 그래서 한국에서도 1953년 한국전쟁 직후, 손로원 작사, 박시춘 작곡으로, 처음에는 장세정이 노래 불렀으나, 나중에는 백설희의 꾀꼬리 같은 절묘한 목소리로 부른 노래로 널리 알려진 산프란시스코란 트로트 노래가 있다: 1.비너스 동상을 얼싸안고 소근대는 별 그림자, 금문교 푸른 물에 찰랑대며 춤춘다. 불러라 샌프란시스코야 태평양 로맨스야. 나는야 꿈을 꾸는 나는야 꿈을 꾸는 아메리칸 아가씨. 2.네온의 불빛도 물결따라 넘실대는 꽃 그림자. 빌딩에 날아드는 비둘기를 부른다. 불러라 샌프란시스코야 태평양 로맨스야. 내일은 뉴욕으로 내일은 뉴욕으로 떠나가실 님이여. 3.메트로포리탄 오페라에 꿈을 꾸는 님 그림자. 달콤한 그 키스에 쌍고동이 울린다. 불러라 샌프란시스코야 태평양 로맨스야. 나이트 여객기가 나이트 여객기가 유성같이 날은다 나는 이 노래를 지금도 3절까지 외워서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산프란시스코는 Homeless (노숙자)들의 난장판으로 변해서, 거리 곳곳에 일인용 천막들을 치고, 주변을 쓰레기더미로 만들며, 대낮에도 길거리에 팔을 늘어뜨리고 허리를 굽힌 채로 몇 시간이고 서 있는 좀비들 같은 마약에 취한 인간들이 점령한 더러운 거리로 변했다. 심하게 말하면 뉴욕, 쉬카고, 로스안젤레스, 휴스톤, 아틀란타 등등 미국의 대도시들이 거의 같은 모습들이다. 나는 산프란시시코로 자동차를 몰고 나가 주차할 생각이 없다. 숱한 자동차들이 파괴되고 물건들은 도둑맞고, 밤이면 절대로 혼자 다닐 생각조차 못하는 위험지역들이 미국의 도시들이다. 미국은 총기, 마약, 홈리스 때문에 망해가고 있는 중이다 . 한국은 이에 비하면 지상 천국이다. 그러니 미국, 유럽, 전 세계의 많은 젊은이들이 한번 한국에 오면, 그냥 거기에 눌러앉아 살고 싶어 하는 나라가 되었지. 도처에 WiFi 인터네트가 깔렸고, 밤중에 홀로 거리를 산책해도 위험하지 않고, 언제라도 택배가 가능하고, 병원 가기가 이웃집 가기처럼 편한 나라는 아마도 전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 (물론 요즈음 응급실 뺑뺑이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건 이상한 놈이 용와대에 앉아있기 때문이고). 여기 미국에선 내가 병원 갈 일이 있어서 의사 예약을 잡는데, 자그만치 1달 뒤로 예약일을 잡아야 하는 미국의 병원 현실에 그만 질렸다. 사실 나는 이민 1세 한국인들 가운데서는 그래도 영어를 잘하는 편이리라. 미국인 교회에서 영어로 목회를 한 것만도 6년이나 했으니. 그래도 집 밖에만 나가면 영어에 영어(囹圄)된 신세가 괴롭다. 한국말은 잘할 자신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지리산의 넓은 품속에 안긴 구례, 5일 시장이 서는 날이면 나는 참을 수 없는 그리움으로 그곳에 나가 어슬렁거리다 아는 사람 만나면 막걸리도 마시며 이야기도 나누고, 구례 향교에 나가 뒤늦게 고전 공부도 하면서 사람들도 사귀고, 3, 4월이면 환장하게 피어나는 꽃들 속에 파묻혀 몽환적인 감상에 젖어 살기도 했지. 더구나 나 같은 늙은이를 친절하고도 정중하게 상대해 주는 구례의 젋은이들이 왜 이다지 그리운가? 아아 돌아가고 싶어라, 내 고향 구례로! 아아 그리워라 지리산인이여! - 2024년 12월 1일 언재 한성수 (焉哉 韓盛洙)
    • 사람이야기
    2024-12-05
  • 지리산을 바라보는 백두대간 고남산 창덕암 역사 문화 여행
    지리산 주능선을 지향하며 백두대간이 운봉고원의 북쪽과 서쪽을 에워싸고 돌면서 커다란 외륜(外輪)을 이룹니다. 운봉고원의 외륜 백두대간 고남산의 약수터 창덕암 고려 말, 왜구들이 준동하는 운봉고원을 내려다보며 이성계 장군이 고남산 정상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낼 약수를 얻은 곳이라 합니다. 지리산을 바라보는 백두대간 고남산 창덕암의 역사 문화 여행입니다. 백두대간 고남산 창덕암 여행의 오마이뉴스 기사입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078598
    • 사람이야기
    2024-11-26
  • 학력고사의 추억
    1992년 내가 대학에 들어간 해다. 보통사람 노태우가 대통령이었던 해이고 그해 눈 내리던 겨울에는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1991년에 대입을 위한 학력고사 시험을 봤다. 나는 보통 사람들처럼 사는 인생이 아니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도 대학에 들어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대학에 들어가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고, 들어간다고 해서 좋을 것 같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담임을 나를 학교 뒤편으로 불렀다. 담배 한 대를 권하더니 솔직하게 이야기를 해보자고 했다. 학교 담벼락에 기대 선생님과 나는 맞담배를 피우면 상담했다. 지금이라면 난리 날 상황일 수도 있지만, 뭐 그냥 낭만이었다고 치자. 담임선생은 나에게 대학에 가지 않을 이유를 이야기해 보자고 했다. 대학에 관심이 없고, 집안 형편도 그리 좋지 않으니, 대학에 갈 이유가 없을 것 같다고 했다. 담임이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내가 고3이라면 의례 해야 할 자율학습과 보충수업 모두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3학년에 올라와 첫 상담부터 나는 입시를 포기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당연히 자율학습과 보충수업 모두를 하지 않겠다고 했고 하지 않았다. 아마도 전교생 500명의 학생 중에 유일하게 두 가지를 거부한 학생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6월 초가 되자 담임은 조용하게 나를 다시 불렀다. 그러면 대학에 안 가고 무엇을 할 것이냐고 물었는데 나는 "노동 운동가가 꿈이라고 했다" 그런 꿈을 가진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역시 책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책을 좋아했다. 학교수업시간에도 매일 책만 읽는 학생이었다. 당시 읽었던 노동문학들..... 난쏘공, 작은 돌멩이의 외침, 강철 군화, 전태일평전 등등 그리고 사회과학 서적들 그리고 집회참가등….일반 고등학생이라면 하지 않을 행동들을 했었고 당연히 노동운동가나 정치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담임은 나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대학에 들어가 학생운동을 해라! "네!" 그리고 6월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군대 간 형이 휴가를 왔다. 우리는 술을 마시며 대학에 관한 이야기를 했고,형도 학생운동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런가? 나는 그렇게 대학이 아니라 학생운동을 하기 위해 대학입시를 준비했다. 그럼 나는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었나? 아니다.공부라고는 거리가 먼 학생이었다. 물론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볼 때 공부하기는 했지만, 평소엔 전혀 하지 않았다. 내가 학생 때 마음 잡고 공부를 한 것은 3번 정도다 한 번은 초등학교에서 중학교 입학시험? 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시험을 봤었는데 이상하게 오기가 생겨서 공부했고 꽤 좋은 성적으로 중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중학교에 들어가면 성적별로 1반 10반까지 골고루 배치했었는데 중간고사가 끝나자마자 담임이 나를 불러 너는 우리 반 평균을 깎아 먹고 있다면 들어올 때는 성적이 좋았는데 중간고사 시험에서 중간에 있다고 뭐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고등학교 입학시험 김제에서 익산으로 고등학교를 갔는데 당시엔 고등학교 입학시험이 있었고 김제에 고등학교를 가기 싫어서 공부했던 기억이 있고 넉넉한 성적으로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물론 그 이후엔 공부하지 않고 책만 열심히 읽었다. 매년 200권 이상의 책을 읽었고 수업 시간에도 책을 읽었다. 그러니 공부는 항상 뒷전이었다. 그리고 , 6월까지 입시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다. 갈 생각도 없다가 갑자기 공부하기 시작했다. 공부도 해본 사람이 잘하는 것인데….일단 듣지 않던 수업 시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수업을 들어보니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다. 수학은 포기하고. 앞에 3~4문제를 푸는 것으로 가장 쉽게 나오기 때문에 영어는 문법은 포기하고 독해만 다행히 독서를 많이 해서 그런지 그리고 당시 독해 문제가 지금에 비하여 아주 정직한 편이라 아는 단어 몇 개로 추론하여 전체의 뜻을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다행히 책을 많이 읽어서 그런지 국어 사회 지리 사회 경제 등등 이른바 암기과목은 어렵지 않게 높은 점수를 맞을 수 있었다. 그렇게 꽤 공부를 많이 하기는 했지만, 성적이 바로 오르지는 않았고 선지원 후시험이라는 난관 때문에 학교 바로 옆에 있던 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학력고사 성적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기에 너무나 넉넉하게 입학했다. 당시에 나에겐 대학에 중요한 것 도 아니었다. 물론 더 좋은 대학에 갈 수도 있었지만. 아무튼 그렇게 되었다. 당시엔 대학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어려운 시대고 대학에 입학하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어느 대학에나 운동권은 충분히 있었던 시대였다. 학과도 경영대학 중에 국제 경제학과에 지원해서 들어갔다. 그래도 노동운동을 하려면 경영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중요하니까? 하지만 역시 대학에 들어가서도 학과 공부를 해본 적이 없다. 교수가 누군지 과목이 무엇인지도 관심이 없었다. 전공책을 딱 한 권 1학년 때 구입하고 구입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4년을 다니다 보니 어느 날 졸업했다. 평균 학점은 2.75였다. 결론 책을 많이 읽자.
    • 사람이야기
    2024-11-18
  • 지리산 주능선 조망, 섬진강을 내려보는 순창 용궐산 정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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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람이야기
    2024-11-10
  • 네루다를 사랑했던 농부, 투쟁가가 되다.
    “최초의 탄환이 스페인 기타를 관통하고 거기서 음악 대신 피가 솟구쳐 나오자 내 시는 인간의 절망이 널브러진 길 한가운데서 유령처럼 서성거렸고, 시에서는 무수한 뿌리가 생겨나고 피가 강물처럼 흘렀다. 그때부터 내 길은 다른 사람들의 길과 합류하게 되었다. 그리고 문득 고독이라는 남쪽에서 민중이라는 북쪽으로 방향을 전환한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내 보잘것없는 시는 민중에게 칼이 되고 손수건이 되어, 무거운 고통으로 흘린 땀을 닦아 주고 빵을 위한 투쟁의 무기가 되기를 열망했다.” 사람들은 어떤 경험을 통해 그동안 생각했던 생각이 바뀌는 때가 있다. 칠레 시인 파블로네루다(1904~1973)의 시적 세계가 바뀐 시점은 스페인 내전이었다. 당시 마드리드 영사로 현장에 있었고, 직접 참여했던 스페인 내전은 네루다의 시를 바꾸어 놓았다. 그의 말처럼 ‘고독이라는 남쪽에서 민중이라는 북쪽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스페인 내전의 경험은 ‘길거리의 일’ 또한 외면할 수 없게 만들었다. - 파블로 네루다 자사전 중에서- 은목서 나무의 달콤한 향기가 깊은 가을 속으로 사라지던 지난 10월 28일 김창승 서시교대책위 상임대표를 만났다. 서시교 존치를 위한 전문가 토론회가 끝난 며칠후였다. [ 10월 28일 김창승 서시교대책위 상임대표를 만났다. (왼쪽 김창승 대표)사진 김인호] 2024년 구례의 여름은 뜨거웠다. 유럽 기상청 코페르니쿠스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24년 여름은 지금까지 측정된 가장 더운 여름이었다. 이는 인류가 측정한 기온 중 가장 높은 해로 기록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하지만 구례 서시교의 여름은 이 보다 더 뜨거웠다. 서시교 철거 반대운동이 이 뜨거운 다리 위에서 103일간 이어졌기 때문이다. “2024년 7월 2일부터 2024년 10월 5일까지 103일간입니다. 구례의 대동맥이라고 할 수 있는 서시교를 지키기 위하여 구례 군민들은 매일 그 자리에 서 있었어요. 그리고 저도 그 자리를 한 번도 빠지지 않고 함께 했습니다.” [서시교 철거 반대 집회는 2024년 7월 2일부터 2024년10월5일까지 103일간 이어졌다. ] 김창승 대표는 2020년 8월 섬진강 수해 때도 주민대표로 활동했다. 그의 싸움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서시교 철거 역시 2020년 8월 구례 대홍수로 인한 것입니다. 당시 피해자가 1,914 가구에 달했어요. 국가배상이 확정되는 2년 동안 주민들과 함께했습니다. 그리고 문척교 철거에 관한 투쟁으로 이어졌어요. 아쉽게도 문척교는 철거되었지만 대신 구례와 섬진강을 상징 할만한 문척 달빛교는 올해 12월에 착공 예정입니다.” “구례 대홍수 당시 1,914 가구의 피해액 48%, 500억 정도를 국가로부터 배상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국가에서 자연재해로 국가 손해배상을 한 첫 사례로 기록되었습니다. 국가가 물관리 잘못을 인정한 첫 사례가 된 것이죠. 댐 관리를 잘못했다고 인정한 것입니다. 문척교나 서시교 역시 구례 홍수로 인한 것입니다. 서시교 철거는 수해로 인해 발생한 것이니 이것 역시 첫 싸움의 연장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4년간 긴 싸움을 하셨습니다. 10년 전에 귀촌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난 4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지난 4년 동안 제 일상이 사라졌습니다. 처음 구례로 올 때는 자연인처럼 살고자 했던 목적이 사라졌죠. 가끔은 꿈에 서도 투쟁하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지난 4년 동안 제 일상이 사라졌습니다. 처음 구례로 올 때는 자연인처럼 살고자 했던 목적이 사라졌죠. 가끔은 꿈에 서도 투쟁하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사진 김인호] ■본인을 투쟁가라고 생각하시나요? “투쟁가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정치적인 목적은 없고요. 10년 전 아내의 고향인 구례에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구례 사람이 되었어요. 그리고 6년을 평화롭게 생활했습니다. 그리고 섬진강 대홍수가 있었죠. 구례 사람으로 당연히 구례의 어려움을 보고 외면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무런 죄없이 집과 농지 그리고 삶이 파괴된 피해자들과 함께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과거에도 이런 투쟁을 해본 적이 있나요? 제가 78학번입니다. 당시에 전남대를 다녔습니다. 유신 말기에 대학에 다녔고 3학년 때 5.18 광주항쟁이 있었습니다. 그 시기에, 광주에 살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함께 연대하고 싸웠습니다. 저 역시 역사의 한 지점에 있었고 함께 투쟁했었습니다. 저에게 5.18은 영원한 아픔이고 잊을 수 없는 역사입니다. “ 인간의 삶은 때로 역사의 한 지점과 정면으로 맞서야 할 때가 있다. 어떤 사람은 그 역사를 뒤로하고 다른 방향으로 달려가지만, 어떤 사람은 그 역사를 자신의 역사로 인식하고 민중과 함께하게 된다. ”그 후에 다시 시험을 봐서 경희대에 들어갔어요. 83학번으로요. 그리고 87년 대투쟁의 한가운데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역사는 그를 가만히 내두지 않았던 것 같다. ■구례에 내려오기 전에 무슨 일을 하셨나요? 직장인이었습니다. 주식회사 엘칸토에서 기획실장을 했고 그 이후에는 주식회사 GL인터 대표이사를 했습니다. 무크라는 신발을 만든 회사였습니다. 처음엔 노동운동가로 살아 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러지는 못했습니다. ■회사 생활이 이번 투쟁에도 도움이 되었겠네요? ”그럼요. 대홍수도 그렇고 서시교 싸움도 그렇고 눈으로 보이는 투쟁이 있는 반면 안에서 원인을 분석하는 싸움이 있습니다. 문제의 분석이나 원인을 정리하는 것에 회사 생활의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한 정부 기관에 대응할 수 있는 도움이 되었죠.“ ”2020년 17개 시군에서 동시에 수해 피해를 당하였습니다. 다른 지역은 변호사나 법무법인을 위임하여 진행했습니다. 보통 이런 경우 배상액의 3%를 수임료로 주는 조건으로 진행하죠. 하지만 구례는 제가 직접 진행했습니다. 구례 배상액이 500억 정도니까 변호사에 주었다면 15억 정도가 수임료로 쓰였을 것입니다. 구례는 직접 변론했기 때문에 그만큼의 돈이 피해입은 분들에게 더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공부 많이 하셨겠네요? 네, 싸움도 힘들었지만, 공부도 정말 많이 했습니다. 이번 서시교 철거 문제도 그동안 축적된 경험과 공부가 있었기 때문에 대응이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농사도 하시죠? 배추, 양파! 마늘도 심고 벼 농사도 하는데, 논 두 마지기 올해는 벼멸구를 먹어 수확량이 얼마인지 모르겠네요. (웃음) ■고향은 어디인가요? ”고향은 전라남도 무안군입니다. 고등학교는 목포에서 나왔고요. 좀 전에 이야기한 것처럼 전남대를 다니다가 휴학을 했고 다시 시험을 봐서 경희대에서 스페인어를 전공했습니다. 당시에는 외국에 나가서 살고 싶었어요. 가장 좋아하는 시인은 파블로 네루다입니다. 영화 일 포스티노를 좋아하고요. 제가 지리산에 내려온 곳도 영화에서처럼 네루다에게 편지를 전해주는 우체국 직원처럼 통신원 역할을 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지금도 SNS에 지리산 통신원이라는 글을 쓰고 있습니다." ■직접 시를 쓰시고도 하시나요? 네. 시도 쓰고 있고 수필도 쓰고 있습니다. 5.18에 관한 시와 수필 100편 이상을 썼어요. 곧 책으로 낼 생각입니다. ■이번에 한강 작가가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는 5.18에 관한 것인데 그 당시 전남대를 다니셨고 함께 투쟁하기도 하셨잖아요? 소년이 온다는 고등학생 문재학을 만난 적도 있으신가요? ”고등학교 1학년 이었던 문재학을 만나보지는 못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암울하고 너무 아픈 역사죠. 그 아픔이 문학이 되고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일 자체가 저는 희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에 금남로와 도청 앞에서 함께 싸웠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기억해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소설이 많이 사람들에게 읽고 동감하게 된다면 그 시대를 살아왔던 사람들의 삶의 방향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죠. 어쩌면 광주의 자긍심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고요.“ [ 영화 일 포스티노를 좋아하고요. 제가 지리산에 내려온 곳도 영화에서처럼 네루다에게 편지를 전해주는 우체국 직원처럼 통신원 역할을 해보고 싶었어요. 사진 김인호] ■마지막으로 서시교 전망에 관해 이야기해 주시겠어요? ”저희의 입장은 서시교는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죄가 없는 이유는 2020년 서시교가 수해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어요. 서시천 물이 섬진강으로 가지 못하고 역류했던 것입니다. 서시천이 문제가 아니라 섬진강 역류가 문제죠. 섬진강에 문제가 있는데 서시천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맞지 않습니다. 근본적인 원인을 고려하지 않고 물이 들어온 것만 가지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죠. "서시천은 지류에 불과해요. 1.2km나 떨어진 섬진강 본류에 적용되는 법을 그대로 적용한 것도 문제지만, 당시의 하천기본계획을 적용한 것이 아니라 관계기관이 내부적으로 추진되고 있던 하천기본계획상의 여유고 2m를 소급 적용한 설계안을 주민에게 제시한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2023. 10월 서시교 숭상 및 철거안이 완성되었으나 관련법인 하천기본계획은 2023. 12. 14에 뒤늦게 개정ㆍ고시되었습니다. 국토부익산청은 이 사안에 대하여 영산강유역환경청에서 선행 해결을 해주면 본인들은 서시교에 대한 더 이상 관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입니다. 하천 기본 계획을 만든 것은 영산강 유역 환경청이기 때문이죠. 구례군은 입장을 정리하여 영산강유역환경청에 보낼 예정입니다. 관련부처 회의를 통해 서시천 구간의 여유고와 계획홍수위에 대해 재심의 하기로 협의되었습니다." ■이번 서시교 철거 반대 투쟁이 남긴 것은 무엇일까요? 서시교는 구례의 대동맥이고 죄가 없어요. 더구나 구례에서 서시교 철거를 찬성하는 주민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구례군민이 모두 반대하는데 군에서 형식적인 주민 설명회를 하고 철거를 하겠다고 한 것이죠. 앞으로 이런 졸속 행정은 없어져야 합니다. 어떤 길이든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내가 한 일은 바로 이러한 선택이었으며,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비극적인 시기에 내린 결정에 대해서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다 . 파브로 네루다 자서전에서 - 인간은 자신의 길을 스스로 선택 할 수밖에 없다. 힘들고 어렵고 때로는 두렵지만 약자를 외면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에 인류의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다. 구례에서 자연인으로 살고 싶던 자신의 일상을 포기하고 4년을 한결같이 구례 군민을 위해 그는 노력했다. 카페 주인도 은목서 향기도 떠나 버린 찻집에서 짧지만, 긴 이야기를 마쳤다. 그는 트럭에 시동을 걸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지난 전문과 토론회 결과를 올려 둔다. [전문가 토론회 결과] 2024.10.25(금) 구례군 의회 주관(마산면 청마관), 서시교 문제해결을 위한 전문가 토론회 결과 1. 구례군, 구례군의회, 권향엽 의원실, 서대위는 서시교 존치에 대해 뜻을 함께하며 법ㆍ행정적 절차를 조속하게 추진한다. 2. 구례군 의회는 서시교 존치를 위한 전문가 자료를 취합하여 구례군과 관계기관에 공문 발송한다. 3. 구례군은 이른 시일 안에 2023.12.14 전라남도가 개정ㆍ고시한 하천기본계획 중 서시천 구간의 여유고와 계획홍수위에 대한 ‘재심의 요구안’을 영산강유역환경청에 발송한다. 4. 영산강유역환경청은 2024.10.15일 협의에 따라 재심의하고 이를 전라남도에 전달한다. 5, 전라남도는 영산강유역청의 재심의 된 사항을 하천기본계획 변경을 위한 심의위원회를 열어 변경 고시한다 6.영산강유역환경청 및 용역처와 전문가 심층 토론회 개최를 요구하며 구례군은 전문가를 위촉하고 당일 토론회 참여한 전문가는 적극 참여하기로 한다.
    • 사람이야기
    2024-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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