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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고단이 그리워
    겨울이면 유난히 극성을 부리는 산프란시스코(San Francisco)의 짙은 밤 안개가 자욱하게 드리운 창밖을 내다보면서, 조금 전에 태평양을 건너와 미국 서쪽 해안까지 실어온 텔레비전 뉴스를 따라 멀리 눈 덮힌 지리산 노고단을 향하여 눈을 감고 그리움에 시름겨워하다가 컴퓨터를 켜고 이렇게 앉았다. 기후에 대한 기록이 있어 온 이래 가장 많은 11월의 폭설이 한국을 덮쳤고, 수많은 피해를 냈다는 고국의 뉴스를 들으면서 나는 눈 덮인 노고단의 아름다운 모습이나 떠올리며, 한가한 그리움에 젖어 이 글을 시작하니, 처지가 달라지면 느낌도 달라지는 한심한 자신에게 연민을 느끼기도 한다. 내가 20년을 살았던 지리산파크 아파트 701호에선 아름답게 눈 덮인 겨울의 노고단을 바라보기가 가장 좋은 위치였다. 여름이면 비가 내린 뒤에 지리산의 웅장한 산허리를 감고 피어오르는 안개가 마치 백룡(白龍)이 춤추며 하늘로 오르는 모습이라고 매번 감탄하기도 했지. 초여름 신록이 피어나기 시작하면 연두색 새 잎새들이 무리지어 솟구쳐 온 사방에 신선한 생기를 뿜어대던 그 찬란한 향연을 나만이 독점한 듯이 이기적인 기쁨을 만끽하기도 했지. 아아 그리운 구례,.... 지리산 노고단, 섬진강 물여울, 백운산의 먼 병풍, 밤재를 넘어 달려 내려오던 구례 평야의 시원한 바람, 나의 한국 생활 20년 동안 가장 많은 발자국을 찍었던 서시천 언덕의 다정하고도 유연한 구비들, 구례는 사시사철 향기에 젖은 그야말로 금환낙지(金環落地)의 땅이 아니더냐! 그런데 사실 그리움의 초점은 아름다운 산하를 지닌 구례의 자연환경이란 공간만이 아니라, 그 속에서 함께 웃고, 떠들고, 마시고, 노래했던 사람들과 더불어 지냈던 세월이란 시간이 더욱 아프게 내 가슴에 가라앉아 있다. 하나 하나 이름과 얼굴을 그리면서, 차마 잊지 못하는 사연들도 떠올리며, 내가 한국에서 살았던 삶의 자취를 아직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내 나이가 80을 넘었고, 주변에서 하나씩 사라져간 사람들이 마지막에 치매를 앓다가 가신 분들이 꽤 많으니, 나 자신도 절대 장담 못 하는 연령에 도달했기에, 한시적인 기억에라도 아직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지난 5월 6일에 구례의 젊은이들이 모여 시간과 정성을 드려 미국으로 떠나는 나를 위해 송별연을 베풀어주며, 현수막에 여러분들이 한마디씩 남겨준 글씨를 나는 지금 내 방 벽에 걸어두고 수시로 콧잔등 시큰거리며 바라본다. 나 자신도 그토록 떠나기 싫었던 구례를 기어코 떠나와야만 했던 자신의 운명에 대해 지금도 솔직히 슬퍼하고 있다. 나 죽거든 시신을 화장해서 화엄 계곡 어디엔가 나무 밑에 한 삽 푹 뜨고 뼈가루를 파묻어달라고 유언을 써서 벽에 걸어두기도 했었는데, 그게 불법이라서 실현이 안 되었는가, 이제는 먼 나라 미국 땅 산프란시스코 바다에 유골을 뿌려달라고 유언서를 벽에 걸어 둘 작정이다. 태평양 넓은 바다를 떠돌다가 뼈가루 한 알갱이라도 조국의 해변에 다을 수 있을지...(그럼 뭘해, 공연히 한 번 말이나 해 보는 것이지...) 내 말투가 잡탕으로 이루어진 터라, 구례에 사는 동안 사람들이 몇 차례 나의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고, 그때마다 언제나 구례는 나의 타향이었다. 그래서 충청북도 제천에 있던 호적을 구례로 옮겨놓고 나도 전라남도 구례 사람이 되기로 작정했었다. (전라남도? 남자들이 홀딱 벗고 나체로 사는 동네란 뜻인가?) 이제는 그것마저 쓸데없는 짓이 되고 말았다. 나의 두 아들 녀석들도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미국에 유학생으로 온 아비를 따라 왔다가 초등학교부터 대학원까지 미국에서 교육받고 자란 미국 시민권자들이 된 50대의 사내들이니, 한국에 돌아갈 희망은 절망일 뿐이다. 호적이고 주민등록이고 다 쓸데없는 장소에서 그들도 죽어갈 것이고, 가계를 기록한 족보도 소용없는 나라에서 영어를 쓰면서 살아가는데, 그들이 비록 한국말을 곧잘 하기는 하지만, 정작 진지한 의사표시는 영어로 하는 녀석들이다. 가족은 물론 주변 사람들과도 영어로 대화하기기 불편한, 간단히 말해서 나는 실향민(失鄕民)이다. 괜히 멋을 부려 영원한 에뜨랑제라고 프랑스말로 자조한다. 제천의 심심산골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 6년, 한문 서당 3년, 중학교 3년을 지냈고, 고등학교는 부산에서, 대학교는 서울에서, 대학원은 미국에서, 그래서 학교 따라 떠돌며 보낸 세월 동안에 내 말투는 온갖 사투리가 범벅처럼 뒤엉킨 부대찌개가 되어버렸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산프란시스코에서 전동차로 한 40분 거리에 있는 이른바 East Bay (東彎) 지역의 Hayward 란 동네다. 도산 안창호 선생께서 한국인들을 조직하여 활동을 시작한 지역도 East Bay에 소속된 오클랜드(Oakland)였다. 여기 Hayward에 2차 대전 후 영어가 불편한 일본인 1세 노인들을 위해 2세들이 40 가구 3층 목조건물을 지어, 일본식 정원에 비단잉어들이 유영하는 연못에 일본식 도리이까지 곁들인 시설을 만들었다. 1세들이 나이 들어 점차로 사라지게 되자 일본인 후예들이 이 건물을 캘리포니아 주 정부에 헌납했고, 주 정부 당국은 이들의 아름다운 뜻을 살리고자 60가구를 더 지어 붙여 Y 자 모양의 100가구 아름다운 3층 목조건물을 완성하여 이름을 에덴 이쎄이 테라스(Eden Issei Terrace)라고 부른다. 그러니 나는 지금 에덴 동산에 살고 있는 것이다. 현재 이 건물에 한국인 노인들이 한 25가구 입주해 있어서 제일 수가 많고, 일본인은 단 한 가정이 남아 있을 뿐이다. 도서실에는 아직도 일본 서적들이 상당히 많이 있고, 방 한칸은 특히 일본식으로 단장된 곳을 보존하고 있다. 현재로는 여기 있는 일본 책들을 즐겨 읽는 사람이 아마도 바로 나 하나뿐일 것이다. 그리고 유일한 일본 할머니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장 정중한 예의를 갖추고 대해주는 사람도 나 하나뿐일 것이다. 내 아내는 한국인 할머니들을 부추겨서 노래 동아리를 만들고, 매주일 한 차례씩 가라오케 시간을 즐기며, 영어가 불편한 한국 할머니들의 유일한 통역관 노릇도 하는, 이른바 한국 할머니부대의 소대장 노릇을 잘도 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상대할 할아버지들도 없으니, 그저 혼자 책도 읽고, TV로 Youtube를 통해 하염없는 시간들을 때우고, 종종 10마일쯤 떨어진 해안 골프장에 혼자 나가서 서툰 골프채를 휘두르고 오기도 한다. 행여 외로운 신선놀음이라고 부르지 말라! 나의 눈물은 가슴 속으로 흘러내리고 있으니까. 그 좋아하는 테낄라(Tequila) 술도 누구 더불어 마실 상대도 없으니, Tequila가 그만 The Killer(살인자)로 변한다. 아아 구례에서 더불어 술도 마시고 책도 읽던 친구들, 내가 주책(酒冊)바가지들로 이름을 붙였던 그 늙은이들도 사무치게 그립다. 나의 노년을 지탱해주는 경제적 도움은 미국에서 살아온 30여년 동안에 내었던 사회보장제도 세금과 연금을 합해 에덴 이쎄이테라스에 입주 가능한 자격 때문이다. 소득이 너무 많으면 들어올 수 없는 저소득 노인 아파트라서, 일부 영리한 한국 할머니들은 재산을 전부 자녀들에게 양도하고, 자기 은행 잔고는 최소한으로 줄여서, 가짜로 가난해진 노인 신세로 10년을 기다려 이곳에 들어온다. 산프란시스코 지역 주택값은 미국 전역에서도 뉴욕과 더불어 최고 수준이라, 지금 내가 살고 있는 12평 아파트면 대략 월 3000달러 정도인데, 이곳 저소득층 노인아파트에선 그것의 10분의 1정도 월세를 내고 산다. 나로서는 죽을 때까지 미국 정부에 감사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러나 미국은 이제는 정말 마음이 안 가는 곳이다. 산프란시스코는 미국 전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낭만의 도시로 한때 많은 사람들을 불러들인 곳이기도 했었다. 그래서 한국에서도 1953년 한국전쟁 직후, 손로원 작사, 박시춘 작곡으로, 처음에는 장세정이 노래 불렀으나, 나중에는 백설희의 꾀꼬리 같은 절묘한 목소리로 부른 노래로 널리 알려진 산프란시스코란 트로트 노래가 있다: 1.비너스 동상을 얼싸안고 소근대는 별 그림자, 금문교 푸른 물에 찰랑대며 춤춘다. 불러라 샌프란시스코야 태평양 로맨스야. 나는야 꿈을 꾸는 나는야 꿈을 꾸는 아메리칸 아가씨. 2.네온의 불빛도 물결따라 넘실대는 꽃 그림자. 빌딩에 날아드는 비둘기를 부른다. 불러라 샌프란시스코야 태평양 로맨스야. 내일은 뉴욕으로 내일은 뉴욕으로 떠나가실 님이여. 3.메트로포리탄 오페라에 꿈을 꾸는 님 그림자. 달콤한 그 키스에 쌍고동이 울린다. 불러라 샌프란시스코야 태평양 로맨스야. 나이트 여객기가 나이트 여객기가 유성같이 날은다 나는 이 노래를 지금도 3절까지 외워서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산프란시스코는 Homeless (노숙자)들의 난장판으로 변해서, 거리 곳곳에 일인용 천막들을 치고, 주변을 쓰레기더미로 만들며, 대낮에도 길거리에 팔을 늘어뜨리고 허리를 굽힌 채로 몇 시간이고 서 있는 좀비들 같은 마약에 취한 인간들이 점령한 더러운 거리로 변했다. 심하게 말하면 뉴욕, 쉬카고, 로스안젤레스, 휴스톤, 아틀란타 등등 미국의 대도시들이 거의 같은 모습들이다. 나는 산프란시시코로 자동차를 몰고 나가 주차할 생각이 없다. 숱한 자동차들이 파괴되고 물건들은 도둑맞고, 밤이면 절대로 혼자 다닐 생각조차 못하는 위험지역들이 미국의 도시들이다. 미국은 총기, 마약, 홈리스 때문에 망해가고 있는 중이다 . 한국은 이에 비하면 지상 천국이다. 그러니 미국, 유럽, 전 세계의 많은 젊은이들이 한번 한국에 오면, 그냥 거기에 눌러앉아 살고 싶어 하는 나라가 되었지. 도처에 WiFi 인터네트가 깔렸고, 밤중에 홀로 거리를 산책해도 위험하지 않고, 언제라도 택배가 가능하고, 병원 가기가 이웃집 가기처럼 편한 나라는 아마도 전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 (물론 요즈음 응급실 뺑뺑이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건 이상한 놈이 용와대에 앉아있기 때문이고). 여기 미국에선 내가 병원 갈 일이 있어서 의사 예약을 잡는데, 자그만치 1달 뒤로 예약일을 잡아야 하는 미국의 병원 현실에 그만 질렸다. 사실 나는 이민 1세 한국인들 가운데서는 그래도 영어를 잘하는 편이리라. 미국인 교회에서 영어로 목회를 한 것만도 6년이나 했으니. 그래도 집 밖에만 나가면 영어에 영어(囹圄)된 신세가 괴롭다. 한국말은 잘할 자신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지리산의 넓은 품속에 안긴 구례, 5일 시장이 서는 날이면 나는 참을 수 없는 그리움으로 그곳에 나가 어슬렁거리다 아는 사람 만나면 막걸리도 마시며 이야기도 나누고, 구례 향교에 나가 뒤늦게 고전 공부도 하면서 사람들도 사귀고, 3, 4월이면 환장하게 피어나는 꽃들 속에 파묻혀 몽환적인 감상에 젖어 살기도 했지. 더구나 나 같은 늙은이를 친절하고도 정중하게 상대해 주는 구례의 젋은이들이 왜 이다지 그리운가? 아아 돌아가고 싶어라, 내 고향 구례로! 아아 그리워라 지리산인이여! - 2024년 12월 1일 언재 한성수 (焉哉 韓盛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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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05
  • 지리산을 바라보는 백두대간 고남산 창덕암 역사 문화 여행
    지리산 주능선을 지향하며 백두대간이 운봉고원의 북쪽과 서쪽을 에워싸고 돌면서 커다란 외륜(外輪)을 이룹니다. 운봉고원의 외륜 백두대간 고남산의 약수터 창덕암 고려 말, 왜구들이 준동하는 운봉고원을 내려다보며 이성계 장군이 고남산 정상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낼 약수를 얻은 곳이라 합니다. 지리산을 바라보는 백두대간 고남산 창덕암의 역사 문화 여행입니다. 백두대간 고남산 창덕암 여행의 오마이뉴스 기사입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078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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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26
  • 학력고사의 추억
    1992년 내가 대학에 들어간 해다. 보통사람 노태우가 대통령이었던 해이고 그해 눈 내리던 겨울에는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1991년에 대입을 위한 학력고사 시험을 봤다. 나는 보통 사람들처럼 사는 인생이 아니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도 대학에 들어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대학에 들어가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고, 들어간다고 해서 좋을 것 같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담임을 나를 학교 뒤편으로 불렀다. 담배 한 대를 권하더니 솔직하게 이야기를 해보자고 했다. 학교 담벼락에 기대 선생님과 나는 맞담배를 피우면 상담했다. 지금이라면 난리 날 상황일 수도 있지만, 뭐 그냥 낭만이었다고 치자. 담임선생은 나에게 대학에 가지 않을 이유를 이야기해 보자고 했다. 대학에 관심이 없고, 집안 형편도 그리 좋지 않으니, 대학에 갈 이유가 없을 것 같다고 했다. 담임이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내가 고3이라면 의례 해야 할 자율학습과 보충수업 모두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3학년에 올라와 첫 상담부터 나는 입시를 포기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당연히 자율학습과 보충수업 모두를 하지 않겠다고 했고 하지 않았다. 아마도 전교생 500명의 학생 중에 유일하게 두 가지를 거부한 학생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6월 초가 되자 담임은 조용하게 나를 다시 불렀다. 그러면 대학에 안 가고 무엇을 할 것이냐고 물었는데 나는 "노동 운동가가 꿈이라고 했다" 그런 꿈을 가진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역시 책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책을 좋아했다. 학교수업시간에도 매일 책만 읽는 학생이었다. 당시 읽었던 노동문학들..... 난쏘공, 작은 돌멩이의 외침, 강철 군화, 전태일평전 등등 그리고 사회과학 서적들 그리고 집회참가등….일반 고등학생이라면 하지 않을 행동들을 했었고 당연히 노동운동가나 정치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담임은 나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대학에 들어가 학생운동을 해라! "네!" 그리고 6월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군대 간 형이 휴가를 왔다. 우리는 술을 마시며 대학에 관한 이야기를 했고,형도 학생운동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런가? 나는 그렇게 대학이 아니라 학생운동을 하기 위해 대학입시를 준비했다. 그럼 나는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었나? 아니다.공부라고는 거리가 먼 학생이었다. 물론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볼 때 공부하기는 했지만, 평소엔 전혀 하지 않았다. 내가 학생 때 마음 잡고 공부를 한 것은 3번 정도다 한 번은 초등학교에서 중학교 입학시험? 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시험을 봤었는데 이상하게 오기가 생겨서 공부했고 꽤 좋은 성적으로 중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중학교에 들어가면 성적별로 1반 10반까지 골고루 배치했었는데 중간고사가 끝나자마자 담임이 나를 불러 너는 우리 반 평균을 깎아 먹고 있다면 들어올 때는 성적이 좋았는데 중간고사 시험에서 중간에 있다고 뭐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고등학교 입학시험 김제에서 익산으로 고등학교를 갔는데 당시엔 고등학교 입학시험이 있었고 김제에 고등학교를 가기 싫어서 공부했던 기억이 있고 넉넉한 성적으로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물론 그 이후엔 공부하지 않고 책만 열심히 읽었다. 매년 200권 이상의 책을 읽었고 수업 시간에도 책을 읽었다. 그러니 공부는 항상 뒷전이었다. 그리고 , 6월까지 입시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다. 갈 생각도 없다가 갑자기 공부하기 시작했다. 공부도 해본 사람이 잘하는 것인데….일단 듣지 않던 수업 시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수업을 들어보니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다. 수학은 포기하고. 앞에 3~4문제를 푸는 것으로 가장 쉽게 나오기 때문에 영어는 문법은 포기하고 독해만 다행히 독서를 많이 해서 그런지 그리고 당시 독해 문제가 지금에 비하여 아주 정직한 편이라 아는 단어 몇 개로 추론하여 전체의 뜻을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다행히 책을 많이 읽어서 그런지 국어 사회 지리 사회 경제 등등 이른바 암기과목은 어렵지 않게 높은 점수를 맞을 수 있었다. 그렇게 꽤 공부를 많이 하기는 했지만, 성적이 바로 오르지는 않았고 선지원 후시험이라는 난관 때문에 학교 바로 옆에 있던 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학력고사 성적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기에 너무나 넉넉하게 입학했다. 당시에 나에겐 대학에 중요한 것 도 아니었다. 물론 더 좋은 대학에 갈 수도 있었지만. 아무튼 그렇게 되었다. 당시엔 대학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어려운 시대고 대학에 입학하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어느 대학에나 운동권은 충분히 있었던 시대였다. 학과도 경영대학 중에 국제 경제학과에 지원해서 들어갔다. 그래도 노동운동을 하려면 경영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중요하니까? 하지만 역시 대학에 들어가서도 학과 공부를 해본 적이 없다. 교수가 누군지 과목이 무엇인지도 관심이 없었다. 전공책을 딱 한 권 1학년 때 구입하고 구입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4년을 다니다 보니 어느 날 졸업했다. 평균 학점은 2.75였다. 결론 책을 많이 읽자.
    • 사람이야기
    2024-11-18
  • 지리산 주능선 조망, 섬진강을 내려보는 순창 용궐산 정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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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람이야기
    2024-11-10
  • 네루다를 사랑했던 농부, 투쟁가가 되다.
    “최초의 탄환이 스페인 기타를 관통하고 거기서 음악 대신 피가 솟구쳐 나오자 내 시는 인간의 절망이 널브러진 길 한가운데서 유령처럼 서성거렸고, 시에서는 무수한 뿌리가 생겨나고 피가 강물처럼 흘렀다. 그때부터 내 길은 다른 사람들의 길과 합류하게 되었다. 그리고 문득 고독이라는 남쪽에서 민중이라는 북쪽으로 방향을 전환한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내 보잘것없는 시는 민중에게 칼이 되고 손수건이 되어, 무거운 고통으로 흘린 땀을 닦아 주고 빵을 위한 투쟁의 무기가 되기를 열망했다.” 사람들은 어떤 경험을 통해 그동안 생각했던 생각이 바뀌는 때가 있다. 칠레 시인 파블로네루다(1904~1973)의 시적 세계가 바뀐 시점은 스페인 내전이었다. 당시 마드리드 영사로 현장에 있었고, 직접 참여했던 스페인 내전은 네루다의 시를 바꾸어 놓았다. 그의 말처럼 ‘고독이라는 남쪽에서 민중이라는 북쪽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스페인 내전의 경험은 ‘길거리의 일’ 또한 외면할 수 없게 만들었다. - 파블로 네루다 자사전 중에서- 은목서 나무의 달콤한 향기가 깊은 가을 속으로 사라지던 지난 10월 28일 김창승 서시교대책위 상임대표를 만났다. 서시교 존치를 위한 전문가 토론회가 끝난 며칠후였다. [ 10월 28일 김창승 서시교대책위 상임대표를 만났다. (왼쪽 김창승 대표)사진 김인호] 2024년 구례의 여름은 뜨거웠다. 유럽 기상청 코페르니쿠스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24년 여름은 지금까지 측정된 가장 더운 여름이었다. 이는 인류가 측정한 기온 중 가장 높은 해로 기록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하지만 구례 서시교의 여름은 이 보다 더 뜨거웠다. 서시교 철거 반대운동이 이 뜨거운 다리 위에서 103일간 이어졌기 때문이다. “2024년 7월 2일부터 2024년 10월 5일까지 103일간입니다. 구례의 대동맥이라고 할 수 있는 서시교를 지키기 위하여 구례 군민들은 매일 그 자리에 서 있었어요. 그리고 저도 그 자리를 한 번도 빠지지 않고 함께 했습니다.” [서시교 철거 반대 집회는 2024년 7월 2일부터 2024년10월5일까지 103일간 이어졌다. ] 김창승 대표는 2020년 8월 섬진강 수해 때도 주민대표로 활동했다. 그의 싸움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서시교 철거 역시 2020년 8월 구례 대홍수로 인한 것입니다. 당시 피해자가 1,914 가구에 달했어요. 국가배상이 확정되는 2년 동안 주민들과 함께했습니다. 그리고 문척교 철거에 관한 투쟁으로 이어졌어요. 아쉽게도 문척교는 철거되었지만 대신 구례와 섬진강을 상징 할만한 문척 달빛교는 올해 12월에 착공 예정입니다.” “구례 대홍수 당시 1,914 가구의 피해액 48%, 500억 정도를 국가로부터 배상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국가에서 자연재해로 국가 손해배상을 한 첫 사례로 기록되었습니다. 국가가 물관리 잘못을 인정한 첫 사례가 된 것이죠. 댐 관리를 잘못했다고 인정한 것입니다. 문척교나 서시교 역시 구례 홍수로 인한 것입니다. 서시교 철거는 수해로 인해 발생한 것이니 이것 역시 첫 싸움의 연장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4년간 긴 싸움을 하셨습니다. 10년 전에 귀촌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난 4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지난 4년 동안 제 일상이 사라졌습니다. 처음 구례로 올 때는 자연인처럼 살고자 했던 목적이 사라졌죠. 가끔은 꿈에 서도 투쟁하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지난 4년 동안 제 일상이 사라졌습니다. 처음 구례로 올 때는 자연인처럼 살고자 했던 목적이 사라졌죠. 가끔은 꿈에 서도 투쟁하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사진 김인호] ■본인을 투쟁가라고 생각하시나요? “투쟁가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정치적인 목적은 없고요. 10년 전 아내의 고향인 구례에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구례 사람이 되었어요. 그리고 6년을 평화롭게 생활했습니다. 그리고 섬진강 대홍수가 있었죠. 구례 사람으로 당연히 구례의 어려움을 보고 외면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무런 죄없이 집과 농지 그리고 삶이 파괴된 피해자들과 함께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과거에도 이런 투쟁을 해본 적이 있나요? 제가 78학번입니다. 당시에 전남대를 다녔습니다. 유신 말기에 대학에 다녔고 3학년 때 5.18 광주항쟁이 있었습니다. 그 시기에, 광주에 살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함께 연대하고 싸웠습니다. 저 역시 역사의 한 지점에 있었고 함께 투쟁했었습니다. 저에게 5.18은 영원한 아픔이고 잊을 수 없는 역사입니다. “ 인간의 삶은 때로 역사의 한 지점과 정면으로 맞서야 할 때가 있다. 어떤 사람은 그 역사를 뒤로하고 다른 방향으로 달려가지만, 어떤 사람은 그 역사를 자신의 역사로 인식하고 민중과 함께하게 된다. ”그 후에 다시 시험을 봐서 경희대에 들어갔어요. 83학번으로요. 그리고 87년 대투쟁의 한가운데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역사는 그를 가만히 내두지 않았던 것 같다. ■구례에 내려오기 전에 무슨 일을 하셨나요? 직장인이었습니다. 주식회사 엘칸토에서 기획실장을 했고 그 이후에는 주식회사 GL인터 대표이사를 했습니다. 무크라는 신발을 만든 회사였습니다. 처음엔 노동운동가로 살아 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러지는 못했습니다. ■회사 생활이 이번 투쟁에도 도움이 되었겠네요? ”그럼요. 대홍수도 그렇고 서시교 싸움도 그렇고 눈으로 보이는 투쟁이 있는 반면 안에서 원인을 분석하는 싸움이 있습니다. 문제의 분석이나 원인을 정리하는 것에 회사 생활의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한 정부 기관에 대응할 수 있는 도움이 되었죠.“ ”2020년 17개 시군에서 동시에 수해 피해를 당하였습니다. 다른 지역은 변호사나 법무법인을 위임하여 진행했습니다. 보통 이런 경우 배상액의 3%를 수임료로 주는 조건으로 진행하죠. 하지만 구례는 제가 직접 진행했습니다. 구례 배상액이 500억 정도니까 변호사에 주었다면 15억 정도가 수임료로 쓰였을 것입니다. 구례는 직접 변론했기 때문에 그만큼의 돈이 피해입은 분들에게 더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공부 많이 하셨겠네요? 네, 싸움도 힘들었지만, 공부도 정말 많이 했습니다. 이번 서시교 철거 문제도 그동안 축적된 경험과 공부가 있었기 때문에 대응이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농사도 하시죠? 배추, 양파! 마늘도 심고 벼 농사도 하는데, 논 두 마지기 올해는 벼멸구를 먹어 수확량이 얼마인지 모르겠네요. (웃음) ■고향은 어디인가요? ”고향은 전라남도 무안군입니다. 고등학교는 목포에서 나왔고요. 좀 전에 이야기한 것처럼 전남대를 다니다가 휴학을 했고 다시 시험을 봐서 경희대에서 스페인어를 전공했습니다. 당시에는 외국에 나가서 살고 싶었어요. 가장 좋아하는 시인은 파블로 네루다입니다. 영화 일 포스티노를 좋아하고요. 제가 지리산에 내려온 곳도 영화에서처럼 네루다에게 편지를 전해주는 우체국 직원처럼 통신원 역할을 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지금도 SNS에 지리산 통신원이라는 글을 쓰고 있습니다." ■직접 시를 쓰시고도 하시나요? 네. 시도 쓰고 있고 수필도 쓰고 있습니다. 5.18에 관한 시와 수필 100편 이상을 썼어요. 곧 책으로 낼 생각입니다. ■이번에 한강 작가가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는 5.18에 관한 것인데 그 당시 전남대를 다니셨고 함께 투쟁하기도 하셨잖아요? 소년이 온다는 고등학생 문재학을 만난 적도 있으신가요? ”고등학교 1학년 이었던 문재학을 만나보지는 못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암울하고 너무 아픈 역사죠. 그 아픔이 문학이 되고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일 자체가 저는 희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에 금남로와 도청 앞에서 함께 싸웠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기억해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소설이 많이 사람들에게 읽고 동감하게 된다면 그 시대를 살아왔던 사람들의 삶의 방향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죠. 어쩌면 광주의 자긍심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고요.“ [ 영화 일 포스티노를 좋아하고요. 제가 지리산에 내려온 곳도 영화에서처럼 네루다에게 편지를 전해주는 우체국 직원처럼 통신원 역할을 해보고 싶었어요. 사진 김인호] ■마지막으로 서시교 전망에 관해 이야기해 주시겠어요? ”저희의 입장은 서시교는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죄가 없는 이유는 2020년 서시교가 수해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어요. 서시천 물이 섬진강으로 가지 못하고 역류했던 것입니다. 서시천이 문제가 아니라 섬진강 역류가 문제죠. 섬진강에 문제가 있는데 서시천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맞지 않습니다. 근본적인 원인을 고려하지 않고 물이 들어온 것만 가지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죠. "서시천은 지류에 불과해요. 1.2km나 떨어진 섬진강 본류에 적용되는 법을 그대로 적용한 것도 문제지만, 당시의 하천기본계획을 적용한 것이 아니라 관계기관이 내부적으로 추진되고 있던 하천기본계획상의 여유고 2m를 소급 적용한 설계안을 주민에게 제시한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2023. 10월 서시교 숭상 및 철거안이 완성되었으나 관련법인 하천기본계획은 2023. 12. 14에 뒤늦게 개정ㆍ고시되었습니다. 국토부익산청은 이 사안에 대하여 영산강유역환경청에서 선행 해결을 해주면 본인들은 서시교에 대한 더 이상 관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입니다. 하천 기본 계획을 만든 것은 영산강 유역 환경청이기 때문이죠. 구례군은 입장을 정리하여 영산강유역환경청에 보낼 예정입니다. 관련부처 회의를 통해 서시천 구간의 여유고와 계획홍수위에 대해 재심의 하기로 협의되었습니다." ■이번 서시교 철거 반대 투쟁이 남긴 것은 무엇일까요? 서시교는 구례의 대동맥이고 죄가 없어요. 더구나 구례에서 서시교 철거를 찬성하는 주민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구례군민이 모두 반대하는데 군에서 형식적인 주민 설명회를 하고 철거를 하겠다고 한 것이죠. 앞으로 이런 졸속 행정은 없어져야 합니다. 어떤 길이든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내가 한 일은 바로 이러한 선택이었으며,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비극적인 시기에 내린 결정에 대해서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다 . 파브로 네루다 자서전에서 - 인간은 자신의 길을 스스로 선택 할 수밖에 없다. 힘들고 어렵고 때로는 두렵지만 약자를 외면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에 인류의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다. 구례에서 자연인으로 살고 싶던 자신의 일상을 포기하고 4년을 한결같이 구례 군민을 위해 그는 노력했다. 카페 주인도 은목서 향기도 떠나 버린 찻집에서 짧지만, 긴 이야기를 마쳤다. 그는 트럭에 시동을 걸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지난 전문과 토론회 결과를 올려 둔다. [전문가 토론회 결과] 2024.10.25(금) 구례군 의회 주관(마산면 청마관), 서시교 문제해결을 위한 전문가 토론회 결과 1. 구례군, 구례군의회, 권향엽 의원실, 서대위는 서시교 존치에 대해 뜻을 함께하며 법ㆍ행정적 절차를 조속하게 추진한다. 2. 구례군 의회는 서시교 존치를 위한 전문가 자료를 취합하여 구례군과 관계기관에 공문 발송한다. 3. 구례군은 이른 시일 안에 2023.12.14 전라남도가 개정ㆍ고시한 하천기본계획 중 서시천 구간의 여유고와 계획홍수위에 대한 ‘재심의 요구안’을 영산강유역환경청에 발송한다. 4. 영산강유역환경청은 2024.10.15일 협의에 따라 재심의하고 이를 전라남도에 전달한다. 5, 전라남도는 영산강유역청의 재심의 된 사항을 하천기본계획 변경을 위한 심의위원회를 열어 변경 고시한다 6.영산강유역환경청 및 용역처와 전문가 심층 토론회 개최를 요구하며 구례군은 전문가를 위촉하고 당일 토론회 참여한 전문가는 적극 참여하기로 한다.
    • 사람이야기
    2024-10-30
  • 단편소설 “뱀사골”
    어떻게 살 것인가를 매일 고민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쉽게 그 고민을 해결할 수 없었다. 봄이면 산으로 가고 여름이면 바다에 갔다. 가을이 오면 길을 걸었고 겨울이 오면 또 산에 올랐다. 겨울 산은 오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어느 해 겨울 눈이 펑펑 내리던 날 지리산 뱀사골로 향했다. 남원에서 뱀사골에 가는 버스는 눈 내린 여원재를 겨우겨우 기어가듯 올랐다. 운봉을 지나 인월을 지난 버스는 그나마 있던 승객을 모두 내려놓았다. 뱀사골에 도착했을 때 승객이라고는 나 혼자뿐이었다. “요로코롬 추운디 산에 가시라고요” 버스 기사가 물었다. “네” “고닥새 눈이 허발라게 오게 생겼는디....위험하지 않을랑가요? 버스 기사는 내가 걱정스러운지 다시 물었다. “네” 나는 짧게 대답했다. “겨울 산에 익숙해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렇게 말하고는 나는 배낭을 챙겨 버스에서 내렸다. 뱀사골계곡 옆 오솔길 따라 화개재로 올라가는 길이 보였다. 사람이 올라간 흔적이 없었다. 산길로 접어들고부터 나는 아무것도 보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땅만 보며 산으로 향했다. 뱀사골 산장에 자면 되니까…. 그리 멀지 않을 거야…. 라고 생각했지만 길은 생각보다 멀었고 힘들었다. 눈이 내린 산길을 미끄러웠다. 나는 몇 몇번 넘어지고 나서야 겨우겨우 올라갔다. 산장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이미 산으로 넘어가 어두웠다. . 산장에는 삼십 대 산장지기와 나 이렇게 둘 뿐이었다. 늦은 저녁을 막 먹으려고 하는데 등산객 한 명이 도착했다. 그는 검은 양복 차림에 구두를 신고 있었다. “이런 눈길에 구두를 신고 올라오셨어요?” “네….” “미친놈 같죠”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그는 웃었다. “어찌 그 차림새로 여길 왔어요?” 그는 술집에서 일한다고 했다. 하던 일이 잘못되었고, 도망치든 산에 왔다고 한다. 그는 허둥지둥 뱀사골에 왔고 아무 생각 없이 산에 오르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한다. “그런 댁은 뭐 하러 이런 날씨에 여기까지 왔소?” “저도 별생각 없이 왔어요.”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도 되고…. “우리 아버지는 중이요” “중인데 결혼해서 나를 낳았잖소? ”절이 답답해서 고등학교 때 집을 나왔소. 몇 년을 대충 살다 보니 이렇게 살고 있소. 이 술집 저 술집 전전하며 웨이터도 하고 뭐 요리도 하고 그리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왜 이렇게 사나 하는 생각이 들지 뭐요? 아니 사실은 함께 술집에서 알던 여자가 있었는데…. 네가 또 순정파 아니요! 그래서요? 그래서는 뭐가 그래서요. 서로 사랑하고 뭐 그랬죠? 그런데요. 얼마 전에 헤어졌소…. 외요? 뭐 만나면 헤어지는 것이 인생 아니요! 그렇죠. 그래서 산에 갑자기 왜 오셨어요.? 어려서 내 친구가 지리산에 한번 가보라고 거기 가면 세상의 시름 반 정도는 내려놓을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무작정 왔소… 근데 배가 고픈데 밥 좀 주면 안 되겠소? 우리는 그렇게 함께 밥을 먹었다. 밥을 먹고 함께 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 그는 사라졌다. 밤새 함박눈이 또 내렸는데 그는 어디로 버린 것일까? 산장 문을 열고 나가 보니 그의 발자국을 확인할 수 없었다. 불현듯 그가 오기는 한 것인가? 아니면 내가 꿈을 꾼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더 이상 산장에 있을 수 없었다. 내려가다가 그가 어떻게 되어버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하산할까 하다가 다시 산으로 올랐다. 화개재에 올라가니 노고단에서 출발한 등산객이 보였다. “혹시 양복 차림에 사내 한 명을 봤나요?” “아뇨” “그런 사람은 못 봤어요?’ “다시 걷다 보니 반대쪽에서 오는 사람이 있었다. 혹시 양복 차림에 30대 남자를 봤어요? “아뇨” 나는 다시 뱀사골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뱀사골에서 올라오는 등산객이 있었다. “혹시 양복 차림의 30대 남자를 봤어요? 아뇨…. 그런 사람은 없었소? 그럼 혹시 산에 쓰러진 사람을 본 적은 없어요? 아뇨…. 그런 사람을 본 적도 없어요? 나는 갑자기 머리가 하얘지기 시작했다. 그럼, 그는 어디로 증발해 버린 것일까? 나는 다시 산으로 올랐다. 세석평전을 지나 장터목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 날 천왕봉에서 일출을 봤다. 한겨울 천왕봉은 1초도 손을 꺼내기 어려울 정도로 추웠다. 얼어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서둘러 산에서 내려왔다. 백무동에 내려와 파전에 막걸리 한 잔을 마셨다. 텔레비전에서 뉴스 속보가 나왔다. 어젯밤 대전에 한 술집에서 여종업원이 살해 당했습니다. 범인은 함께 일하던 30대 남자로 현재 도주 중이며 남자의 고향은 남원으로 .....
    • 사람이야기
    2024-10-25
  • 백두대간 운봉고원의 돌장승 역사 문화 탐방
    백두대간 운봉고원은 낙동강 상류이다. 운봉고원은 지리산 자락의 고원 분지이다. 이 지역에 돌장승이 밀집하여 분포한다. 운봉읍 북천리, 서천리(서림공원), 권포리와 인월면 유곡리의 10km 이내 지역에 돌장승 10기가 모여 있다. 이곳은 고남산 아래이며 황산의 둘레로서 고려말 황산대첩의 역사적인 장소이다. 돌장승의 해학성은 호랑이와 까치의 민화에 보이는 평민 정신과 상통한다. 운봉고원의 돌장승을 탐방하며 마을 어귀에 서 있는 돌장승이 외롭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옛날에는 마을마다 샘을 중심으로 살았고 그 샘물이 흘러 마을 앞에 둠벙(연못, 방죽, 웅덩이)를 이루었다. 그 작은 둠벙은 생태계의 보고로서 수많은 작은 동식물이 살았다. 옛날에는 논이 있으면 으례 가까이에 둠벙이 있었다. 그러나 경지 정리로 논밭 두렁길이 반듯해지고 저수지가 많아져서 농업 용수를 멀리서도 풍부히 공급하여 논 가까운 둠벙이 사라져 갔다. 운봉고원의 돌장승도 옛날에는 가까이에 둠벙이 있었을 것이다. 그 둠벙에는 어리연꽃도 피었을 것이다. 돌장승과 어리연꽃은 민화의 호랑이와 까치처럼 상상력과 이야기의 보고일 수 있다. 오마이뉴스 기사 (2024.10.23) 제목: 왕방울 눈, 커다란 코... 도깨비 돌장승 찾아 떠난 여행 부제: [사진] 백성들 아낀다던 석장승... 백두대간 운봉고원 돌장승 탐방 역사 문화 여행 이 기사의 인터넷 주소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072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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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0-23
  • 꽃이 없는 과일이 아니라 꽃을 먹는 과일 무화과
    무화과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홍무화과와 청무화과인데 내한성은 청무화과가 더 좋다. 이른 봄에 가지를 잘라주면 새 가지가 나오는데 가지에 열매가 18~20개 정도 열리면 끝을 잘라준다. 그 이상은 10월 말이나 11월 초까지 익기가 어렵다. 그리고 끝을 잘라줘야 열매가 크게 열린다. 병충해가 없는 식물이라 키우기 어렵지 않다. 또한 우리가 먹는 저 빨간 부분은 무화과의 꽃이다. 우리나라에는 무화과를 수정할 수 있는 벌이 없지만, 원산지인 중동지역에는 있다고 한다. 즉 수정하면 씨앗이 열리고 씨앗으로 번식도 가능한 나무다. 하지만 씨앗으로 번식한 나무의 열매는 맛이 없다고 한다. 단 벌이 수정한 무화과는 더 맛있다고 하는데 한국에는 수정할 수 있는 벌이 없어 그 맛을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 사람이야기
    2024-10-07
  • 지리산 치밭목산장 산장지기30년 민병태 대장을 만났습니다
    지리산 치밭목산장 산장지기30년 민병태 대장을 만났습니다 1971년에 만들어진 지리산의 대피소들은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폐허가 되었습니다. 민병태 대장님은 1986년 직접 치밭목대피소를 수리하고 산장지기로 30년을 활동하며 대피소 운영과 많은 구조활동을 하셨습니다. 대장님이 들려주시는 반달곰 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함께 들어보시죠. 00:00 인트로 00:20 치밭목산장지기 30년 민병태 대장 01:19 치밭목대피소에 올라오기 전에는 어떤 일을 02:30 1971년에 조성된 지리산의 대피소들 04:06 관리가 안 되어 폐허가 된 대피소 04:28 당시에는 치밭목 쪽이 메인 종주코스 06:27 치밭목 이름의 유래 07:22 산장 첫 관리인은 첫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하산 08:42 85년도에 산악회 후원금과 사비로 대피소를 수리하다 11:05 87년도에 대피소에서 정식 근무 시작 12:24 왜 산장에 들어가신 거에요? 12:49 산장에서 아내와 함께 보낸 신혼생활 14:16 산행 문화의 변화, 조난사고의 급증과 구조활동 18:42 대피소에서 30년 어떻게 버티셨나요? 19:25 대피소에서 난방없이 침낭만으로 겨울나기 21:00 대피소에서 내려오게 된 이유와 소감 23:39 대피소의 가장 큰 기능은 어떤 것인가요? 26:18 반달가슴곰과 인간의 충돌 30:08 인간과 동식물의 공존, 기후변화 31:03 지리산에게 한마디, 사람들에게 한마디
    • 사람이야기
    2024-09-30
  • 산청 지리산 둘레길 6코스와 경호강 꺽지 설화
    지리산 자락 산청으로 향하는 이른 아침 이슬에 흠뻑 젖은 여뀌 꽃송이에 푸른색 부전나비 한 마리가 앉아서 동터오는 아침 햇살을 받고 있었다. 나비의 날개가 이슬이 젖어 있으니 이곳에서 긴 어둠을 지샌 듯 하였다. 부전나비 날개 크기는 1.5cm로 작은 날개이고, 여뀌꽃은 한 송이가 2mm 크기의 찹쌀 쌀알 같았다. 9월의 마지막 주말에 지리산 둘레길 6코스 구간은 가을 햇살이 청량했다. 지리산 둘레길에서 산줄기는 강 물결고 쉽게 어울리고 이 길을 걷는 걸음도 어느덧 산과 강이 펼쳐내는 자연의 호흡을 닮아갔다. 산청 지리산 둘레길 6코스, 경호강 꺽지 설화 오마이뉴스 여행 기사입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066719
    • 사람이야기
    2024-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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