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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에는 있고 놀이에는 없는 것은?
"달빛 놀이터를 하는 금요일이 너무 기대되요" “게임은 시작하기 전부터 긴장이 되는데 놀이는 승부가 없어 맘이 편해요” 우리는 나이가 들기 때문에 놀지 않은 것이 아니라, 놀지 않기 때문에 나이가 드는 것이다. -조지 버나드 쇼- 지리산산골 토지면 토지초등학교에는 달빛 놀이터라는 전래 놀이를 하며 아이들과 함께 노는 마을학교가 있다. "놀이도 배워야 하는 시대" ▲ 전래놀이를 하는 아이들 어른 아이들이 함께 놀이를 즐기고 있다. ⓒ 마을학교 지난주 일요일 전래놀이를 보급하는 아자 학교 대표 고갑준선생님과 함께 놀이를 하고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을 보냈다. 그날 아이들과 학부모는 이랑타기, 진놀이, 두부놀이, 안경놀이, 술래잡기, 짝꿍 술래잡기를 배우고 함께 놀았다. 학부모들도 땀을 듬뿍 흘렸고 아이들은 녹초가 되었다. 반나절 동안 놀이에 빠지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신이 나서 놀이에 몰입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어린 시절 놀이는 마을형과 누나들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배웠다. 배웠 다기 보다는 그냥 알게 되었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되었다. 하루 종일 이 놀이 저 놀이가 끝이지 않았다. 요즘처럼 찬바람이 부는 때에는 고산댁 담벼락 양지에 모여 소꿉놀이를 했다. 반짝이는 사금파리를 모으고 분유통을 가져다 솥단지를 만들어 밥도 하고 국도 끓여 맛있게 먹는 시늉을 하며 놀다가 지겨워지면 밤톨 같은 돌을 주어 다가 공기놀이를 했다. 공기놀이처럼 기술이 필요한 놀이는 동네 선수들이 다 파악이 되어 있기 마련이어서 승부의 재미를 위해 적당히 편을 만들어 놀았다. 그것도 지치면 다른 놀이를 하면 된다. 시간이 없지 놀이가 부족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놀다 보면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고 굴뚝에 연기가 난다. " 종구야! 너네 집 연기 난다" 밥먹으로 가야겠다. "왜 우리 엄마는 밥을 빨리하지" 불평이 따라오기 일수였지만 어쩔 수 없다. 해가 지고 여기저기 동무들 집에 연기가 모락모락 퍼지면 누가 말할 것도 없이 우리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아쉬워할 것도 없다. 내일도 놀며 되니까? 우리는 모두 시간 부자였다. 우리의 놀이는 끝이 없었지만 어제 함께 놀던 형과 누나들이 고학년이 되면 우리와 함께 놀아주지 않는 것이 그저 섭섭할 따름이었다. 그러다가 나도 어른이 되었고 놀이는 점점 잊혀 갔다. 그러다가 마을하교를 하게 하면서 옛 놀이를 하나 둘 다시 하게 되었다. 좀 덜 잘 놀기 위해서 잊힌 놀이를 기억하고 있는 선생님을 초대해서 놀이를 배우고 전래 놀이를 하며 아이들과 함께 놀이를 전하는 일이 토지 마을학교가 달빛 놀이터가 1년 동한 한 사업의 전부다. 놀이와 게임의 가장 큰 차이는 승부에 있다고 한다. 게임에는 반드시 승부가 있다. 승자가 있고 패자가 있다. 놀이에도 승부가 있는 놀이도 있고 없는 놀이도 있지만 승부가 있다고 하더라도 누가 이겨도 그만인 것이 놀이다. 술래도 승자가 아니고 숨는 아이도 승자가 아니다. 승자는 없고 재미만 있다. 더구나 놀이는 함께 해야 하고 맨날 나만 이기면 그 친구가 더 이상 놀아주지 않기 때문에 적당히 져주기도 해야 한다. 그래야 맨날 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도 아니면 다음판에는 이긴 사람 진사람을 섞어 버리면 어느새 승부는 사라지고 만다. ▲ 잘 놀려면 놀이도 배워야 한다. 놀이를 배우는 아이들과 학부모들 ⓒ 토지달빛놀이터 전래 놀이는 어른도 아이도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물론 축구를 아이와 함께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야구도 아이와 함께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드물다. 왜냐면 체격과 능력차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놀이는 아니다. 달빛 놀이터에서 매번 하는 그물 술래잡기나 대문 술래잡기는 학부모와 유치원생이 함께 뛰어 놀면서 할 수 있다. 특별한 능력도 필요 없다. 아이들이 더 유리한 놀이도 있고 어른들이 배려해야 하는 놀이도 있지만 나이와 성별로 능력으로 인해 차별당하지 않고 함께 어울려 놀 수 있다는 점이 게임과는 다르다. 승부도 없고 오직 재미만 있는 놀이를 통해 아이들은 어떤 것을 배우게 될까요? "PC게임은 혼자서도 할 수 있지만 놀이는 혼자 할 수 없습니다. 놀이를 하려면 혼자서 할 수 없지만 배려하지 않으면 놀이가 진행되지 않습니다. 내가 힘이 쌔고 강하다고 해서 매번 이기면 친구가 더이상 놀아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적당히 힘 빼고 배려하면서 함께 해야 하는 것이 놀이입니다. 다음번에 놀아주지 않기 때문에 매번 승리하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놀이를 통해 배우게 됩니다" - 놀이선생님- 우리의 고전 놀이는 두 가지로 보면 된다. 민속놀이는 특정한 날에 하는 대규모 놀이 예 줄다리리 강강수월래 차전놀이 같은 놀이다. 전래놀이는 매일매일 할 수 있는 일성적인 놀이다. 예를 소꿉놀이, 재기차기,비석치기 같은 것이다. 그렇다고 토지 아이들이 게임을 안 하는 것은 아니다. 내 아이들도 매번 달빛놀이터에 나가서 신나게 놀지만 집에 오면 다시 게임을 한다. 하지만 특이한 것은 게임을 그렇게 좋아하는 아이들도 게임 시간을 포기하고 달빛놀이터에 나가서 노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것이다. “전래놀이는 맘이 편해요. 놀기만 하면 되니까요” “게임은 시작하기 전부터 마음이 조마조마해요 이기면 좋지만 지면 기분 나쁘고 매번 이기는 아이만 이겨서 기분이 별로 에요” 내 아이에게 물어보면 항상 이렇게 말한다. 게임은 혼자 또는 팀이 상대방과 경쟁을 통해서 승부를 결루는 것이 대부분이다. 항상 승부가 있고 패자가 있다. 승자는 즐겁고 패자는 유쾌하지 않다. 전래 놀이는 하다 보면 승부도 없고 패자도 없다. 즐겁게 땀 흘리고 놀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그렇다고 PC 게임을 하지 말자는 것은 아니다. 지금 아이들은 친구들과 놀만한 시간도 없고 공간도 부족하다. ▲ 놀이에 관한 토론을 하는 놀이 선생님과 학부모들 놀이와 게임의 차이 그리고 놀이를 통해 배우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 토지달빛놀이터 우리가 하는 것은 한 달에 한 두번이라도 아이들에게 놀시간과 공간을 열어주자는 것이다. 아이들과 더불어 전래 놀이를 통해 아이들에게 지리산 산골 마을 공동체의 일원이었다는 생각을 심어주는 것이 놀이의 핵심이라는 생각이다. 오래전엔 놀이가 일의 연장선에 있었다. 놀이를 통해 힘을 키우고 놀이를 통해 협동과 협력을 배웠다. 이를 통해 서로 돕는 품앗이와 두레를 했던 민족이 바로 우리의 민족문화였다. "전래놀이는 인공적인 것이 필요하지 않다” 자본이 필요 없다. 고가의 PC가 없어도 되고 특별한 장비가 없어도 가능하다" 놀이는 평등하다. 청소년 자살율 1위인 우울한 한국 사회에서 사라져가는 우리의 전래 놀이를 통해 우리 아이들과 학부모 그리고 마을 공동체가 더불어 살아가는 행복과 관계의 미학이 필요한 시기다. 놀이의 반대는 일이 아니라 우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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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항하는 청춘의 원더풀 라이프 “나는 반항한다 고로 존재한다"
섬진강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오고 가던 시절이 있었다. 아마도 2005년이나 2006년쯤이었을 것이다. 나는 구례에서 악양까지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왕복 60km였다. 봄이 끝날 무렵 시작한 자전거 출퇴근은 겨울이 오면서 끝났다. 그 후로 자전거 출퇴근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하던 일을 그만두었고 악양은 나에게서 멀어졌다. 지리산에 내려와서 살게 된 이유는 간단했지만 살아가기는 녹록하지 않았다. 구례에서 섬진강을 따라 악양으로 향하면서 그때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는 올해 지리산사람들 공동집행위장이 되었는데 올해 관운이 있는 사주라고 했다. 사진 김인호> 오늘 악양에 사는 최지한씨를 만나기로 했다. 그를 지난겨울 남원의 산악열차 반대 시위장에서 본 기억이 있다. 아마도 남원시청 옆이었을 것이다. 한겨울이었는데 그는 맨발에 슬리퍼 차림이었다. 딱 봐도 보통은 아닌 사내다. 머리는 삭발이었다. 그를 악양면 소재지에 있는 카페에서 만났다. 길 건너에 악양초등학교가 보였다. <그의 첫인상은 “나는 반항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진 김인호> 오래 전에 악양에 일할 때 그 초등학교 운동회에 참가했던 기억이 난다. 아이들의 신난 함성이 가득한 운동장에 오후에 햇살이 눈 부셨다. 커다란 히말라에시더(개잎갈나무 50미터까지 자란다)가 동쪽에 있었다. 누군가는 이 나무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무라고 했었다, 나도 가끔 동의하지만, 집안에 심기에는 나무가 너무 크다. 이 나무를 키우다 보면 예상보다 너무나 커버리기 때문에 위를 잘라버린다. 주변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들은 싹을 잘라 버리는 것이 사회의 일반적이 법칙이다. <그가 환경운동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공해문제연구소에서 만든 한국의 공해지도라는 책을 초등학교 3학년 때 만났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진 김인호 > 그의 첫인상은 “나는 반항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세상 사람들이 히말라야 시더의 위를 자르는 것같은 사회의 일반적인 잣대를 그는 봐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가 하동에 살게 된 것은 2006년쯤이라고 한다. 내가 하동을 떠난 것이 그쯤이었다. 그는 멀리 강원도 고성 출신이라고 했다. 화진포가 가까운 강원도 산골 마을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북한을 지척으로 둔 강원도 최북단에서 태어났다. 나는 몇 해 전 화진포에 가봤다. 화진포 바다는 서해나 남해와는 다른 고독하고 외로워 보이는 진한블루였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초등학교 시절 어느 해 서울로 이사를 했다고 한다. 그 후 대학에서 양식업을 공부했다. 그리고 남해의 여러 섬마을을 전전하며 양식장에서 일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결국 여기 하동 악양에 정착했다. 그의 직업은 대바구니를 만들거나 수리하는 일과 정원관리라고 한다. 그리고 지역의 사람들과 환경을 지키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가 환경운동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공해문제연구소에서 만든 한국의 공해지도라는 책을 초등학교 3학년 때 만났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도 고등학교 시절 그 비슷한 책을 본 적이 있다. 한국에서 가장 오염도가 높은 곳은 하동 넘어 광양이었다. 광양에는 광양제철소가 있다. 세계최대 규모의 제철소가 있고 거기서 품어져 나오는 대기 오염 물질은 한국 대기 오염 물질의 5.43%라고 한다. 나 역시 검은 역기가 품어져 나오는 그 사진을 책에서 본 기억이 난다. 그 책을 보고 열 받아서 환경운동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동기가 순수하다. 아마도 그는 순수한 남자인 것 같다. 몇 해 전부터 하동은 산악열차로 인해 갈등이 깊었다. 악양 형제봉에 산악열차를 설치하겠다는 하동군의 야심 찬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산악열차 반대 운동을 했다. 그것도 열 받아서 했다고 한다. 나는 그에게 양말을 신지 않는 이유를 물었는데 대답은 간단했다. “발에 열이 많아서 답답해요.” 그는 역시 열이 많은 사람이었다. 재밌는 이야기를 해 달라고 했더니 그는 마루에서 3년을 살았던 적이 있다고 했다. 왜 그러셨나요? [어느 해 봄 비가 오는 날 구들이 고장이 나서 일산화탄소 중독이 된 적이 있어요. 마을로 기어와 동치미 국물을 얻어먹었어요. 그 후로 방에 들어가 자지 않았어요.] 방에 들어가지 않으니 마루밖에 잘 곳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그렇게 마루에서 3년을 살았다고 한다. 보통 사람은 아니다. 카페에서 인터뷰하고 그가 일하는 대나무 공방에 가봤다. 녹색평론 읽기 모임이라는 작은 안내문이 문 앞에 붙어 있었다. 나 역시 오래전에 녹색평론 읽기 모임을 한 적이 있다.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오래전 일이지만 말이다. <간디의 물레라는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그가 수리하는 대바구니가 물레처럼 보였다.> 공방에는 헤진 바구니와 새로 만든 바구니 그리고 수리를 원하는 대바구니가 보였다. 그가 말한 바에 의하면 이것으로 먹고살고 약간의 잉여자본도 생긴다고 했다. 간단한 도구로 생계가 가능한 일이라서 좋다고 했다. 나는 이런 식의 밥벌이를 본 적이 없다. 그가 작업하는 모습을 한참 동안 보고 있었다. <공방에는 헤진 바구니와 새로 만든 바구니 그리고 수리를 원하는 대바구니가 보였다.> 익숙하게 대바구니를 수리했다. 능숙한 솜씨가 보기 좋았다. 간디의 물레라는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그가 수리하는 대바구니가 물레처럼 보였다.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도 간단한 도구로 새로운 물건을 만들거나 물건을 고치는 일은 매력적이다. <간디의 상징이 된 물레> 그가 좋아하는 영화는 고레이다 히로카즈 감독의 환영의 빛이라고 했다. 섬진강을 따라 돌아오면서 오후에 햇살이 섬진강을 비추는 것을 봤다. 아마도 환영의 빛은 이런 빛일 것이다. 누군가 한 번은 자신을 끌어들이고 유혹하는 환영의 빛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는 어느 곳에서 멍하니 서 있는 자신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는 반항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아마 그는 자본주의 주류 사회를 거스르고 싶은 환영의 빛에 어느 순간 이끌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는 빛이 이끄는 경로를 따라 여기까지 왔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항하는 청춘 최지한, 그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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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을 너무나 사랑했던 사람의 지리산 사랑법
첫 수선화가 피던 봄날 함양 휴천면으로 향했다. 지리산 높은 곳에는 잔설이 남아 있었지만, 우리가 만난 그날은 여름이라도 되는 듯 따뜻했다. 만나기로 한 식당 한쪽에 노인 한 분이 앉아 있었다. [함양 휴천면 지리산 리조트 식당] 봄나물이 가득한 밥상에서 음식 이야기와 날씨 이야기 같은 상투적인 말들이 오갔다. 식사가 끝나고 카페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야기를 시작하자 흰머리가 가득하던 그녀의 눈은 반짝이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이루지 못한 첫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10대 소녀 같았다. [김종직의 유두류록 탐구의 저자 류정자 작가. 사진 김인호] 류정자 선생님은 밀양 태생으로 1948년생이다. 1965년에 산악회 활동을 하던 사촌 오빠와 처음 지리산에서 왔다고 한다. "오빠가 지리산에 한번 가보자고 하더라고요" "저는 그때만 해도 지리산에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어요." “그때는 심원마을에서 출발해서 노고단으로 갔어요." “심원마을에는 사람들이 꽤 살고 있었죠" "심원마을에서 하루 쉬고 노고단에 올랐어요." "노고단에 오르니 노고단 천지가 모두 원추리 꽃밭이었어요. “ "산을 가득 메운 원추리꽃을 보고 있으니 너무 좋았죠“ "어찌나 예쁘고 곱던지 지리산이 내 가슴에 박혀 버렸죠“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어느새 순간 번쩍이는 것이다. 그날 그 일행은 노고단에 이틀을 머물다 내려왔다고 한다. "꿈같은 시간이었어요." [지리산 모임 [우리들의 산악회]에 회원으로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지리산 골골을 누비고 다녔다. 사진 김인호] 그때만 해도 그녀도 그날 이후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지리산에 빠져서 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처음에는 지리산은 노고단뿐이라고 생각했다. 지리산에 가고 싶을 때는 매번 심원마을을 거쳐 노고단에 올랐다. "제 산행 방식은 좋으면 매번 그 장소에 다시 가는 겁니다." 아마도 그런 스타일이었기 때문인지 노고단에만 가도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단다. "다른 곳을 찾을 필요도 없었죠" 하지만 곧이어 지리산 골골 여기저기를 다니게 되었다. "결혼을 일찍 했어요" "부산에서 살았는데 부산에서도 틈만 나면 산에 왔지요." 지리산 모임 [우리들의 산악회]에 회원으로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지리산 골골을 누비고 다녔다. “저는 지리산 골짜기 골짜기 안 가본 곳이 없어요." "저는 좋으면 같은 장소를 자주 가는 스타일이거든요." "결혼하고 아이 셋을 키우면서도 매번 지리산에 왔지요". "아이들은 엄마를 지리산에 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자랐어요."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를 빼고는 틈만 나면 지리산을 찾았습니다." 한 권의 책이 류정자씨를 탐구자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지리산 산행은 지리산이 좋아서 가는 것에서 지리산을 탐구하는 방식으로 바뀌게 된다. 그 결정적인 책이 바로 조선 시대 함양의 군수 김종직의 유두류록이다. [김종직(1431∼1492)은 조선 시대 성리학자·문신인 선생이 함양군수로 부임한 이듬해 지리산 천왕봉을 다녀와서 '유두류록(遊頭流錄)' 이란 기행문을 남겼다. 두류산(頭流山)은 '지리산'의 다른 이름이다. 1472년 8월14일부터 18일까지 4박 5일 일정으로 13.3㎞ 가운데 국립공원에 속한 노장대(함양독바위)∼상내봉(향로봉)∼미타봉∼어름터 4.5㎞ 구간이다. 옛 문헌에 김종직 선생이 올랐던 탐방로가 지리산 전체 등산길의 제1호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유람동기, 동행인, 날짜별 기록, 사적들, 풍경, 서정적인 감정, 당시 시대상 등을 모두 담고 있어 역사적인 가치가 매우 높다.] 사실 필자도 김종직의 유루류록을 읽은 적이 있다. 물론 읽기만 했지 거기에 나오는 지명이라든지 절터라든지 이런 것에는 일말의 궁금증도 없었다. 오래된 지리산 이야기를 읽고 싶었고 마침 도서관에서 그 책을 발견하고 재밌게 읽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지리산 산중에 산재 되어 있는 민가와 암자 터 등을 보면서 지리산이 품고 있는 인간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들의 산지를 통해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 국역본을 접하면서 지리산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천착하게 되었다. 2003년 지리산학의 정립을 꿈꾸며 결성한 [지리99] 운영진에 참여해 본격적인 [유두류록 탐구팀]을 꾸려 20여 년간 탐구산행을 이끌어 왔다. 이 책은 그 오랜 탐구의 작은 결실이다. 또한 ≪유두류록≫ 탐구와 병행하여 문헌기록에 등장하는 폐사지 탐구에도 심혈을 기울여 찾아낸 암자터가 100여 군데 이른다. 이 외에도, ‘세석의 청학연못’, ‘지리산의 시대를 연 달궁’, ‘지리산 고성탐구-추성’, ‘촛대봉 각자 高麗樂雲居士李靑蓮書를 찾아서’, ‘대궐터 탐구’, ‘문창대는 어디인가?’, ‘천왕봉 성모석상 수난의 역사’, ‘천왕봉 각자 일월대에 대하여’ 등 다수의 소고를 발표하면서 지리산학의 정립에 몰두해 왔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전을 잡고 지리산과 함께 살고 있다.] - 노컷뉴스 소개 글- [지리99라는 사이트에 류정자 작가의 다양한 글을 만날 수 있다. 사진 김인호] 그녀의 나이는 이제 75세가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지리산을 오른다. 3년 전에 김종직 선생이 산을 오르기 시작했던 마을로 이사를왔다. 류정자 선생은 두 번이나 암에 걸려 두 번의 큰 수술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정말 슬픈 일은 막내아들을 먼저 보낸 것이다. "그때가 가장 힘들었어요. 엄마가 지리산에 다닌다고 아들을 잘 살피지 못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 후 몇 년간 지리산에 오지 못했어요." 하지만 그녀는 다시 지리산으로 돌아왔다. 지금 이루고 싶은 것이 있으세요? "뭐 다른 게 있을까요?" "이제까지 발견한 폐사지(사라진 절터)가 100여 곳이 됩니다." "이제 이걸 정리하고 싶어요." "책을 묶어 두면 누구에겐가 도움이 되겠지요." "김종직 선생님이 류두류록을 남기지 않았다면 그 후세에 지리산에 오르려고 했던 분들에게 참고 자료가 되지 않았을 것이고 제게 폐사지에 관심을 두지도 못했을 겁니다“ [김종직의 유두류록 탐구 600년 전 지리산 산행기 저자류정자] "제가 얼마 전에 김종직의 유두류록 탐구을 책을 내기도 했습니다만, 제가 여러 서적과 문헌들을 참고하고 직접 수십 번을 찾아가서 발견한 지리산 폐사지 터에 대한 기록도 저 처럼 관심있는 누군가에게는 작은 도움이라도 되리라 생각 합니다." "이런 작업을 하는 사람은 없거든요." "그리고 김종직 선생님이 지리산에 올랐던 길을 복원하고 싶은 작은 소망이 있습니다." 지리산을 좋아하게 된 이유가 뭘까요? 류정자 작가는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그렇지! 사랑하는 것에는 이유가 없는 법이다. 그녀의 지리산 사랑이 60년이 되어 가고 있다. 무엇인가 사랑하게 되면 자주 보고 싶고, 더 알고 싶고,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것이 사랑의 방식일 것이다. 그녀는 지리산을 사랑하다 보니 자주 갔고, 관심이 커지다 보니 책을 냈고, 폐사지를 탐구했다. "내가 죽으면 지리산 골짜기 여기 저기에 뿌려 달라고 아이들에게 이야기 해두었어요." 그녀는 죽어서도 지리산과 함께하고 싶은 것이다. 찐 사랑은 이런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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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출 4억에 도전하는 구례 오이 농부 이야기
구례 서동민 농부는 구례가 고향입니다. 건설업체에서 일하다가 몇 해전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가 두 번째 직업으로 선택 한 것은 농부 아버지가 하던 오이 농사입니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 도전이지만 규모를 늘려 작년 매출 3억 올해는 매출 4억에 도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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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닮아가는 구례 한전
요즘 기사에 가장 많이 나오는 그것이 압수수색이다. 그런데 구례에서는 검찰 대신 한전이 농민들을 압수수색을 하고 나섰다. 그들이 압수수색을 감행하는 대상은 다름 아닌 농민들의 저온 창고다. 그들은 검찰이라도 되는 양 예리한 관찰력으로 농민들의 창고를 들쑤시고 다니면서 그들의 판단으로 불법 물품이 들어가 있다면 어김없이 벌금에 처하고 있다. 농업인구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빨리 사라지고 있는 직업 중에 하나다. 더구나 구례 농민들은 농사지은 이래로 가장 힘든 시절을 보내고 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2020년 8월 수해 때문이다. 당시 피해 보상은 50%의 해당하는 금액만 보상받았다. 고작 2년 전에 농민들은 때아닌 수해로 인하여 재산의 50%를 상실한 것이다. 그것도 2년 이상 구례 농민들이 투쟁한 결과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전에서 농민들의 저온 창고를 수색해서 벌금을 물리고 있다. 벌금을 물린 이유는 농가에 설치된 저온 저장고에 1차 농산물 외에 김치나 가공식품, 물 등을 저장하여 '농업용 전기 공급 운영 규정'에 위반하였다는 것이다. 한전은 농사용 전력을 사용하는 농가들이 저온 창고에 농산물 대신 김치, 젓갈 등 가공식품을 보관했다는 이유로 2017년부터 구례에서만 농가 88곳에 위약금 8천200만 원을 부과했다. 그런데 올해는 60여 호에 5천 5백만 원의 과태료에 이른다 한전이 농민들에게 많은 벌금을 지금 물린 이유가 무엇일까? 한국전력공사는 현재 30조의 누적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한전은 세는 주머니를 찾고 나선 모양이다. 한전의 농사용 전기 판매량은 1902만8829㎿h(메가와트시)로 전체(5억926만9715㎿h)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3.7%에 불과했다. (2021년 기준) 그것도 대규모 기업형 시설 농장에서 쓰는 비용이 대부분이고 저온 창고로 사용된 전기료는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더구나 현재 진행하고 있는 벌금은 명확한 기준도 없다. 저온 창고는 농민들의 농산물을 저장하는 창고다. 농민들의 농업 행위나 농사를 위하여 사용하면 큰 문제가 없다. 고추 농사를 지은 농민에게 고추나 고추장 고춧가루가 있으면 되고 쌀농사를 지은 농민들은 쌀이 있으면 된다고.…. 누구나 상식적으로 생각할 것이다. 정부는 농민들에게 지속해서 6차 산업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했다. 쌀만 생산하지 말고 쌀로 쌀과자도 만들어서 이것으로 체험도 하고 판매도 하라는 것이다. 그런 것을 요구했으면 저온 창고에 체험에 필요한 것들을 넣는 것이 너무 당연한 것이 아닌가? 2차 생산물이 있으면 안 된다는 규정은 어디에 나오는 것인가? 농업용 저온 창고를 설치하거나 허가를 내주는 곳은 농림축산식품부와 지자체다 한전은 전기설치를 하고 요금을 받는 행위를 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한전은 농민들에게 벌금을 부과하려면 먼저 저온 창고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농림부와 지자체와 상의를 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그 기준에 맞게 농민들에게 미리 통지하고 그때 벌금을 물리든 과태료를 물리든 해야 하는 것이다. 구례 한전 지사장은 검찰 출신이라도 되는 것일까? 한편 구례군의회는 "한전은 농사일하며 반찬 일부를 보관한 영세 농민들에게 가구당 수십만 원에서 수백만 원의 과도한 위약금을 부과했다. 비현실적인 기준에 근거한 단속"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한전은 지난해 수협을 상대로도 가공품 보관과 관련해 수십억 원대 위약금 소송을 했다가 패소했다. 무리한 위약금 부과는 사회적 손가락질을 받을 수밖에 없다"라고 강조했다. 구례 한전은 근거에도 없는 단속으로 부과한 벌금을 즉각 철회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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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치 없는 갈치 마을에는 갈치 신문이 있다.
2023년 1월 9일 겨울 치고는 유난히 따뜻한 날 나는 갈치 마을 이장과 만나기로 했다. 남원 산중 마을 이름이 갈치라고 하니 그 이름이 독특해서 더 끌렸는지 모른다. 함께 가는 일행들과 함께 갈치 마을로 이동하기 전에 우리는 남원 시내에 있는 갈치 집에서 갈치 조림을 먹었다. 푹 끓여진 갈치와 무가 꽤 맛이 좋았다. 갈치 마을 가는 길은 남원에서 장수로 나가는 길목에서 보절면으로 꺽어 몇 분 들어가면 나오는 초입에 있었다. 갈치 마을을 둘러보니 전형적인 산골 마을이었다. 갈치 마을은 상갈치, 중갈치, 하갈치 마을로 생선으로 비유하면 머리, 배, 꼬리라고 볼 수 있을 것같다. 물론 갈치 마을과 바다에 사는 갈치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었다. 갈치의 꼬리와 머리가 비중이 작듯 중갈치 마을이 가장 크고 상갈치 하갈치 마을에는 각각 10가구 정도가 산다고 한다. 갈치 마을의 갈은 칡을 뜻하는 한자에서 왔다. 칡차를 갈(葛)근차 라고 쓰는 그 한자다. 즉 칡이 많은 동네라는 뜻이라 한다. <갈치신문 28호 사진속의 장면은 치치페스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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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농 양파 재배와 양파 크게 키우는 비법
- 남원에서 유기농 양파를 재배하는 농가를 만났습니다. 지난번 수해로 인해 집을 잃고 지금은 하우스에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몇 개월 전에는 하우스에 불까지 나서 힘든 농가입니다. 그래도 양파는 쑥쑥 자라서 수확할 때가 되었네요. 유기농 양파를 재배할 때 어려운 점과 양파를 크게 키우기 위한 비법을 들어 봤습니다. 올해는 작년 저장 양파 때문에 양파 가격이 낮다고 합니다. 양파는 위에도 좋고 모든 요리에 꼭 필요한 채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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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농 양파 재배와 양파 크게 키우는 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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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그리고 하동 녹차찐빵
- 추억 그리고 하동 녹차찐빵 추억 그리고 하동 녹차찐빵 길거리에 걷다 보면 흔하게 보이는 가게 중 하나가 찐빵가게다. 구례 같은 시골에도 스타벅스나 롯데리아는 없어도 찐빵가게는 1-2개가 있다.그만큼 흔하고 흔한 것이 찐빵이다. <찐빵은 흔하다. 하지만 제대로 만든 찐빵은 결코 흔하지 않다.> 찐빵이 흔한 이유는 뭘까? 그것은 그만큼 먹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찐빵을 먹는 이유는 뭔가? 그것은 추억 때문이 아닐까? 누구나 어렸을 때 어머니가 막걸리에 발효시켜 만들어진 찐빵의 맛을 기억할 것이다. 지금은 찐빵이 겨울에 먹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순전히 찐빵 만드는 기업의 광고 때문이고기억 속에 찐빵은 대부분은 여름에 만들어 먹었다. 딱 이때 장마철 말이다. 콩과 벼도 심고 아직 고추는 익지 않아서 따지 않아도 되는 딱 이맘때 어머니는 모처럼 농사일을 쉴 수 있었다. 그 동안 바쁜 농사일에 챙겨주지 못한 자식들을 위해 찐빵을 만드셨던 것이다. 처마에 떨어지는 낙숫물을 받던 커다란 고무 다라이에 물이 차고 넘치는 날 막걸리를 넣어 발효된 밀가루에 팥을 넣어 만들어 주던 그 찐빵 맛의 추억은 삭막한 도로를 지나다가도 찐빵만 보면 나도 모르게 어머니의 얼굴과 함께 겹쳐지곤 했다. 2005년 가을 유독 하늘이 파란 10월의 어느 날이었다. 하동에서 찐빵을 만든다는 두 분을 만났다. 박중욱씨와 양대화씨였다. 딸이 하나 있다. 박중옥씨는 천식을 앓고 있다. 그의 천식은 모든 것을 까다롭게 만들었다. < 울산에서 만나 결혼했다. 중매였다.> 울산에서 만나 결혼했고 거기서 살다가 천식 때문에 더 이상 일이 하기 힘들어 고향인 하동에 내려왔다.누나가 찐빵을 만들고 있어 거기서 빵을 배웠다. 하지만 그는 천식이 있었고 수입밀가루로 만든 빵은 그의 몸이 먼저 거부했다. 그래서 그의 우리밀로 찐빵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가 먹어도 문제가 없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찐빵에 관심이 갔다. 우리밀로 만들과 팥도 국산 팥을 쓴다고 했기 때문이다. 하동 터미널에 주차를 하고 찾아가보니 시장통 골목에 작은 가게가 있었다. 그들의 작업장이장 판매장이었다. 맛짱이라는 가게였다. 여느 시골읍내 장터골목의 찐빵집이었다. 밖에는 찐빵을 찌는 찜 솥이 있고 만두도 있었다. 부부가 빵을 찌고 만두를 만들어 파는 평범하기 그지 없는 찐빵집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다른 것이 외부가 아니라 재료에 있었다. "우린 마가린을 쓰지 않아요. 마가린을 쓰면 모든 참가제를 쓴 것과 같아요.이미 마가린 속에 참가제가 다 들어 있거든요. 통밀 만을 이용합니다.통밀이 거칠기는 하지만 밀 본연의 맛의 충실합니다. " 우리팥을 이용해요. 비싸지만 그것만 사용합니다. 우유 계란을 사용하지 않아요. 손으로만 만들어요. 만들기 어렵지만 손으로 만든 것이 훨씬 부드럽고 맛이 좋아요" 부부가 하루 종일 만들 수 있는 빵의 양의 약 600개라고 한다. 하지만 매일 이렇게 만들 수는 없다. 보통 하루에 300개 정도의 빵을 만든다. 1년에 만들 수 있는 양이 이미 정해져 있다. 109,500개다. 5개씩 포장되어 있으니 21,900봉이다. 하루에 60봉이다. 이것이 이들이 매일 팔 수 있는 찐빵의 전부다. 더는 없다. < 양대화님> 그렇다고 이들이 처음부터 완벽한 찐빵을 만든 것은 아니다.박중옥대표는 " 우리 빵의 레시피는 올해 만들어 졌어요" 매일매일 연구하고실험해서 겨우 완성했죠. 결국 8년이 걸려 완성된 레시피다. < 박중옥님> 그의 말대로 그의 빵은 처음보다 부드럽고 맛있다. “아무리 몸에 좋아도 맛이 없으면 찾지 않으니까요. 설탕을 조금 사용하고 단맛을 올렸고 통밀의 거친 맛을 빼고 부드러워졌어요.우유를 사용하지 않고 부드럽게 만들기는 쉽지 않거든요.” < 찐빵이 무겁다. 꼼수 없이 그냥 팥이 많아서다. > 하동녹차찐빵을 손에 잡으면 무게부터가 다르다.다른 찐빵들이 비싼 팥을 줄이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구사지만 이들은류현진의 돌직구처럼 그냥 팥을 많이 넣어 만든다. 다른 꼼수는 없다. 우리밀빵이라고 해서 구입했더니 알고 보니 팥은 수입 팥이고국산 팥을 사용했다고 구입했더니 마가린이 들어 있는 등의 이런 저런 꼼수가 없다. 안심하시고 드셔도 됩니다. 그렇다 그냥 믿고 드시면 된다. 그저 정직하기 때문이다. 혹시나 들어있는 꼼수가 있을까 봐 항상 신경 쓴다. 재료를 확인하고 꼼꼼히 살펴서 혹시라도 나쁜 것이 있을 까봐 먼전 살핀다.이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 아이들이 좋아한다. 맛있으니까> 현재 그들은 하동 악약으로 작업장을 옮겼다. 꽤 큰 공장이다. 하지만 여전히 두 사람이 전부다. “공장이 넓어져서 작업하기 편해서 좋아요. 깨끗하고요.” 공장개소식에 참가했을 때 어느 개업 장에 방문했을 때보다 기분이 좋았다. < 요즘은 체험행사도 한다. 찐방도 만들어 놓고 지리산 여행을 하고 오면 발효된 빵을 쪄서 가져간다.> 보통은 크게 시작하지만 작은 골목에서 시작해서 여기까지 온 두 분의 노력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손으로 만든 것은 정직하고 더 많은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세상이다. 손으로 직접 만들어 부드럽고 좋은 재료를 썼는데 맛도 좋다. 하나만 먹어도 배가 부르다.다른 것과 비교 할 수 없다. 좀 작게 만들어도 되지 않냐고 하지만 양심이 또 그렇지 않다. <뜨거워도 먹고 싶어한다. 왜 맛있으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자기 길로 걷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은 이와 같은 사람들 때문에 변한다. 그들이 그들의 길을 가기 때문이고 그것은 곧 새로운 길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그들의 손은 바쁘고 그 손에서 새로운 빵들이 만들어진다. 어느때 먹어도 좋다. 그들이 만든 것이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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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우씨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서울대 출신 건축가에서 버섯 농부가 된 정철우씨 안녕하세요. 네 오랜 만입니다. 저 예요. 아... 네. 퇴근 길에 지인에게 전화가 왔다. 구례에서 버섯을 키우는 농부가 있는데 도움을 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어디로 갈 것인가?> 나는 황금빛으로 빛나는 오미리 들판에 넋이 나가 있었기 때문에 그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네. 알겠어요” 라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집에 도착해보니 문자가 와있었다. 그 농부의 연락처였다. 다음 날 출근해서 농부에게 연락을 했다. 농장은 사무실에서 차로 2-3분 거리에 있었다. 오후에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 직접 지은 버섯농장 > 농장은 구례 서시천변에 있었다 2년 전 수해로 이 지역은 지붕까지 잠긴 곳이었다. 5-6년 전에 귀농 했다는 이야기를 어제 들었으니 수해를 피해가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마트에서 만나는 거의 모든 버섯은 실내에서 키운다. 자본 집약적 농업이다. 버섯은 식물이 아니다. 그렇다고 동물도 아닌 균사체다 균사체라는 것은 균의 덩어리라는 뜻에 가깝다. 버섯은 균의 몸덩어리 근육에 가까운 것이다. 균은 동물에 가깝고 그것도 민감한 동물이다 그는 농장에 있었다. 정철우라고 했다. 서울대 건축과를 졸업했다고 했다. 이력이 궁금하다. 어쩌다가 귀농을 했나? 건축관련 일하다가 어느 날 영화를 봤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영화였다. 거기 이런 문구가 있었다. 삶은 현실이 된다, 당신이 망설이고 있는 그 순간 해본 것 없음 가본 곳 없음 특별한일 없음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그는 이영화를 보고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우여곡절 끝에 구례에 정착하게 되었다. 내려오자 마자 한 눈 팔지 않고 바로 농사를 시작했다. “처음부터 농사를 시작했어요. 처음 1년은 호박 농사를 했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그 다음엔 표고 버섯 농사를 했습니다. 이 건물을 지어서 농사를 시작한 것이죠 그리고 2020년 8월에 수해로 모든 것을 잃었다." 암담했다. 섬진강댐을 방류한다는 문자를 받은 다음날 아침 마을 앞이 이미 잠기기 시작했다. “서둘러 농장으로 가봐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이미 냉천 사거리가 잠기고 있었어요. 경찰이 통제를 했어요, 그래서 산업 도로로 차를 몰았죠, 농장은 지붕만 보였어요.” 그 날 그는 6억을 투자해서 만든 농장이 물에 잠겨 있는 것을 보고 무엇을 상상했을까? 만약 월터라면 그 특유의 상상력으로 흘러 넘치는 물을 다시 섬진강으로 돌려보냈을 것이다. 아니면 버섯을 키우는 땅을 하늘로 들고 날아올랐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농장은 물에 잠겼고 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 의지가 사라졌을 때 가장 현명한 방법은 다른 일을 찾아보는 것이다. 그는 수해대책본부에서 일했다. 결국 구례군 수해대책위는 수자원 공사에게 48%에 해당하는 금액을 돌려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빚이 남았다. 그는 지금 참송이 버섯을 키우고 있다. 참송이는 어떤 버섯이죠? “표과와 송이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버섯입니다. 유전적으로 보면 표고와 가깝죠. 표고에 60% 송이의 40% 정도라고 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가 준 참송이의 향기를 맡아 보니 얼마전 먹어본 송이 향이 느껴졌다. “진짜 송이 향이 나네요” “네.. 그쵸.” 그는 반갑게 웃었다. 참송이 버섯을 시작하게 된 이유가 있나요? “표고는 사실 규모의 싸움에 가깝더라고요. 얼마나 많이 수확 생산이 가능 한 가에서 승부가 나요. 그러다 보니 일이 많고 너무 힘들어요. 시간이 없죠” “수해를 입지 않았으면 계속 했을 텐데 수해를 입다 보니 1년간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죠. 다시 건물을 보수하면서 참송이를 재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참송이 버섯> 참송이 재배의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요? “키우는 것은 표과와 다를 것이 없어요. 하지만 관리와 판매가 어려워요 표고는 재배만 하면 수요가 많기 때문에 가격만 낮추면 처리가 되는데 참송이는 경매가 없기 때문에 개인이 판매를 해야 합니다. 그러니 재배 관리가 어렵고 판매가 어려워서 힘들죠” 제 참송이 재배사가 25평씩 8개 총 200평인데 지금은 판매가 가능한 정도만 키우고 있습니다. 판매가 늘면 더 키워 야지만 지금은 제가 혼자서 가능한 양만 재배하고 있어요. 구례에 내려와서 시작한 농사가 수해로 모두 망가졌잖아요? 후회 안 하시나요? “구례는 어쩌다가 내렸 왔지만 참 예쁜 곳입니다. 처음에 내려왔을 때 상사 마을에 살았는데 아침마다 30분씩 멍 때리고 바라봤어요. 너무 예뻐 서요. 물론 농사만 본다면 구례는 추천할 만한 곳은 못되는 것 같습니다만” ㅎㅎ 그와 한 시간 정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영화를 다시 봤다. 라이프지에서 일하던 월터는 매일 같을 일을 반복하는 16년된 포토 에디터였다. 라이프지가 온라인으로 바뀌면서 마지막 호에 사용할 25번째 사진이 사라지자 사진의 단서를 찾기 위해 베일에 쌓인 사진 작가 숀 오코넬을 직접 찾기 위해 그는 사무실에서 나와 상상이 아닌 현실로 뛰어든다.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반복되는 일상은 어느 날 일탈로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뀔 수 있다. 바이던의 시귀 중에 이런 말이 있다. 고개만 돌리면 다른 세상…. 그는 매일 같은 출근 길을 가다가 고개를 돌리고 다른 세상으로 진입했다. 그의 상상은 현실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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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우씨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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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30년을 소작농으로 사는 이유
- 그가 30년을 소작농으로 사는 이유 15년 전 남원 금지면에 있는 영농조합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리고 매년 몇 번씩 만났다. 그렇게 15년이 지났다. 나는 그를 30대에 만나 50대가 되었다. 그는 40대에 나를 만나 60대가 되어 간다. [농부 김갑식] 농부 김갑식 올해 59세다. 남원 금지 출신이다. 고향에서 농부로 40년이 보냈다. 소 10마리와 논1000평과 하우스 10개가 그가 가진 농사다. 한 마디로 복합 농이다. 금지면 농협 앞에 있는 비닐하우스에 찾아가면 그는 항상 있었다. 멀리 가지 않았다. 그는 늘 하우스에 붙박이처럼 살았다. "친환경은 관찰이 중요해요." "친환경 자재는 일반 농약 한 번이면 되는 것을 10번은 쳐야 하거든요 그리고 한 번 번지고 나면 잡기가 어려워 매일 매일 관찰해야 합니다." [올해 심은 블랙망고수박] 그는 유기농과 무농약 농사를 짓고 있다. 그래서 그는 하우스에 붙어 작물들의 상태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작년에 심은 블랙 사파이어 포도 농장을 둘러봤다. 포도가 몇 개 익었다고 해서 가봤다. 아직 맛이 들지는 않았다. 8월이 되어야 맛이 든다고 했다. 뜨거운 하우스를 빠져 나왔다. 6월의 열기와 장마의 습기까지 담은 끈끈한 바람이 불었다. 사방의 열기가 가득 해서 우리는 피할 곳이 없었다. 넓은 논 한 가운데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목이 말라 입에서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는 한증막에 들어간 것처럼 답답해졌다. 15년 만에 처음 그는 옛날이야기를 꺼냈다. “92년에 귀농을 했어요. 도시에서 일하다가 돈 조금 벌어 시골에 내려왔죠. 내려오니까 다들 소를 키우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소를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보증만 서면 농협에서 돈을 잘 빌려줬습니다. 그렇게 소가 100마리까지 늘었어요. 그런데 운이 없게 IMF가 왔다. 소가 똥값이 되었다. 그리고 빚 3억이 남았다. 그 당시 대출 이자가 18%인 시대였다. 그렇게 그가 정신을 차려 보니 3억에 빚을 진 30대 농부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농사지은 지 곧 40년이 다 되어 가지만 아직도 소작농이다. “빚 갚고 먹고 사느라 땅이 한 평도 없어요. 다 임대입니다” 하우스 한 동 200평의 임대료는 년 60만 원 정도라고 한다. 철골은 땅 주인의 것이고 비닐이 직접 바꿔가면 사용한다. 10동의 하우스를 짓고 있으니 1년 임대료는 600만 원이다. 많을 때는 20동 정도를 지었다고 하는데 이제는 나이가 있어 더는 힘들다고 했다. "지금도 그 빚이 1억5천이 남아 있어요. 그것만 없으면 아무 걱정이 없는데…. 농사지어서 그걸 갚는 것이 너무 힘들어요“ 그는 항상 피곤해 보였다. 그 이유가 있었다. 무거은 빚을 한 짐을 지고 있으니 삶이 편안하지 않았을 것이다. “소를 키우다가 빚을 졌잖아요. 이 동네가 소를 많이 키웠는데 지금은 소 키우는 사람이 없어요. 그때 다 망해서 그래요. 소라면 징글징글 하죠. 빚 지고 야반도주한 친구도 몇 명 있어요. 이 동네에서 나만 지금까지 소를 키우고 있죠. 소 키워서 빚을 졌으니 다시 소를 키워서 빚을 갚고 싶거든요. 지금 새끼 낳은 소가 10마리가 있으니 곧 그렇게 될 겁니다. 70 먹기 전까지는 갚고 싶은데 그게 될지 모르겠네요.” 얼마 전에 차 하나를 폐차했어요. 네…. 그때 야반도주한 친구가 먹고 살려니 트럭을 사야 하는데 신용불량이라 내 명의로 차를 샀거든요. 27년 만에 차를 폐차했어요. 그동안 혹시라도 사고가 나면 어쩌나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걱정 하나가 사라졌네요. 그것만 사라져도 맘이 10%쯤 가벼워졌어요. 그는 앞으로 10년 안에 빚을 갚고 돈도 좀 벌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가능할 것인가? 40년간 1억5천을 갚았는데 10년 안에 그 돈을 갚기가 쉽지 않아보인다. 농부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한 번 넘어지면 다시 세우기기 쉽지 않다. 그래도 지금까지 땅에서 버티고 서 있는 그가 대단해 보였다. 더운 바람이 물러가고 시원에 바람이 불어왔다. 그는 오래된 낡은 오토바이를 타고 다른 하우스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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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30년을 소작농으로 사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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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공원을 관광지로 만든 주범(성삼재·정령치도로)
- 지리산 이야기 (3) 국립공원을 관광지로 만든 주범(성삼재·정령치도로) 도심처럼 국립공원도 교통체증·매연·소음 '몸살' 배혜원 시민기자(지리산필름 대표)·윤주옥 시민기자(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대표) (webmaster@idomin.com) 2021년 05월 03일 월요일 서울올림픽 맞춰 관광도로 건설 후 연간 차량 약 45만 대 운행…2007년 대도시급 미세먼지 측정 당장 아스팔트포장 못 뜯는다면 주민 운영 친환경차량 이용하고 일반차량은 통제하는 도로 돼야 2003년 가을, 나는 성삼재도로를 처음 걸었다. 나 혼자가 아니라 초등학생부터 60대 어른까지 50명 정도가 함께였다. 천은사에서부터 걷기 시작한 우리는 심한 굴곡과 급경사지를 달리는 차량이 내뿜는 매연과 타이어 타는 냄새, 소음에 아찔했던 기억이 있다. 천은사에서 출발해 약 10㎞를 걸어 올라간 우리는 달궁에서 약 9㎞를 걸어 올라온 분들과 성삼재휴게소에서 만나 지리산에 대한 마음, 성삼재도로를 걸으면서 느낀 점 등을 이야기했다. 다시는 걷고 싶지 않다는 분도 있었고, 달리는 차량으로 위험했지만 걸을 만했다는 분도 있었다. 2003년 이후로 나는 1년에 한 번 이상은 성삼재도로를 걷는다. 성삼재도로를 걸어서 오르자는 캠페인을 할 때도 있었고, 성삼재도로 주변에 사는 나무와 풀을 조사하려고 또는 지리산국립공원을 관통하는 성삼재도로가 다른 지역의 도로와는 어떻게 다른지 조사하기 위해서였기도 했다. 내가 성삼재도로를 걷는다고 하면, 첫 번째 반응은 '몸에 안 좋을 텐데 뭐 하러 걷느냐?'였다. 그럴 때면 생각한다. 맞다, 성삼재도로를 걷는 것은 몸에 좋지 않다. 그러면 이곳이 삶의 터전인 반달가슴곰은, 히어리는, 쇠딱따구리는, 그들 모두는 얼마나 힘겨울까. 국립공원공단이 2007년에 발간한 연구보고서를 보면 성삼재도로 주변의 대기질 농도가 도로에서 멀리 떨어진 노고단대피소보다 전반적으로 짙은 농도를 나타냈다. 가장 심각한 항목은 미세먼지였는데, 2007년 10월 26일(금)∼28일(일) 조사 시 성삼재휴게소는 대기환경기준을 초과했고, 대도시 지역(서울시 월평균 60㎍/㎥)의 평균 농도보다 높은 101㎍/㎥을 나타냈다. 소음 측정 결과도 성삼재도로 주변은 주간 평균 58.6∼65.3㏈로 국립공원이라는 지리적 특성을 고려하면 낮은 수치가 아니다. 내가 걸으면서 느꼈던 구토와 어지럼증은 상상이 아니라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 하늘에서 본 성삼재도로. /김인호 시민기자 자동차 문화가 보편화된 세상에서 성삼재도로를 달려 지리산국립공원에 오르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1100m 깊고 높은 곳에, 그것도 우리나라 제1호 국립공원인 지리산을 달리는 도로가 어떻게 생길 수 있었을까? 구례 천은사에서 남원시 산내면을 연결하는 성삼재도로는 1985년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차관을 포함한 약 68억 원 예산으로, 1988년 서울올림픽을 보기 위해 우리나라를 방문한 외국인들이 지리산국립공원을 편하게 관광하도록 건설됐다고 한다. 성삼재도로와 함께 남원시 주천면 고기리와 산내면 달궁을 연결하는 정령치도로를 건설하고, 1991년에는 성삼재주차장을, 1993년에는 정령치주차장을 만들면서 지리산국립공원은 이리저리 잘리고 파헤쳐졌다. 성삼재·정령치도로로 야생동물 이동통로가 단절되면서 연간 100건 정도의 로드킬이 발생하고, 도로를 건설하면서 심은 외래 수종들로 도로 주변 생태계와 경관은 변화하고 있다. 성삼재·정령치도로는 지리산국립공원의 이용행태를 바꿔 놓아, 도로가 생기기 전과 비교하여 지리산국립공원 탐방객은 2배, 노고단 탐방객은 7배나 증가했다고 한다. 화엄사에서 시작해 연기암을 지나 국수등, 집선대, 코재를 땀 흘리며 천천히 걸어야만 오를 수 있었던 1507m 노고단은 성삼재까지 자동차로 오를 수 있는, 슬리퍼를 신고도 갈 수 있는 유흥지가 된 셈이다. 1988년이니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는 지리산국립공원 심장부까지도 아스팔트 도로를 깔아 돈만 벌면 되는 시대였고, 도로가 건설되면 지역에 큰 이익이 된다고 생각했던 시대였다. 그러나 도로만 건설되면 잘살 수 있다는 '도로 신화'는 지리산자락 마을들을 스쳐 지나는 관광지로 만들었다. 성삼재·정령치도로가 생기기 전, 지리산 아래에서 하루 묵고 지리산에 오르던 등산객들, 밥도 먹고, 차도 마시던 도시 사람들은 이제 물까지 사 가지고 온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지역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 성삼재도로에 뒤엉킨 차량들. /윤주옥 시민기자 이런 지역사람들의 불안한 마음을 비집고, 표면 뭐든지 된다는 정치인과 돈을 따라 움직이는 토건업자들은 지리산에 케이블카와 산악열차를 건설하겠다고 한다. 2012년 남원시, 함양군, 산청군, 구례군은 지리산국립공원 반야봉, 천왕봉, 노고단에 4개의 케이블카를 올리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다행히 환경부 국립공원위원회가 모두 부결시켰지만 지금도 틈만 나면, 선거가 가까워지면 지리산 케이블카를 이야기한다. 정치인과 토건업자들은 케이블카만이 아니라 산악열차도 필요하다고 한다. 하동군은 형제봉에, 남원시는 성삼재·정령치도로에 산악열차를 깔겠다고 나서고 있다. 4개의 케이블카와 2개의 산악열차, 이것이 우리가 꿈꾸는 지리산국립공원일까, 왜 이 지경까지 되었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다. 5월 1일, 나는 남원시가 계획 중인 지리산 산악열차 1구간인 정령치도로를 걸었다. 부슬부슬 비가 내려 스산하고 싸늘한 날씨였다. 그러나 걷기를 시작하자마자 만난 초록의 향연은 시끄럽던 마음을 위로하고 평화롭게 했다. 3시간쯤 걸어 도착한 정령치엔 우박이 내리고 있었다. 자연의 변화, 숲의 냄새, 새 소리, 모두 천천히 걸어야만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함께 걸은 분들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다. 질주하는 오토바이에 무서웠지만 고추나무 꽃을 가까이서 볼 수 있어서 좋았다고 했다. 나는 성삼재·정령치도로가 도로가 아니라 산길이라면 더 좋겠지만, 도로여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성삼재·정령치도로를 지금처럼 놔두고, 똑같은 방식으로 이용하면서, 지리산국립공원 보전을, 반달가슴곰과의 공존을, 녹색뉴딜과 탄소중립을 이야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보호지역 중 보전의 정도가 가장 높다는 국립공원에, 1100m 고지에, 1년이면 45만 대 이상의 차량이 아무런 제한 없이 달릴 수 있다는 현실에 환경부와 국립공원공단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닌가 싶다. ▲ 지난달 29일 열린 성삼재·정령치도로 전환연대 출범식. /정결 시민기자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좋은 방법은 성삼재도로의 아스팔트 포장을 뜯어내어 원래 상태로 복원하면 된다. 그런데 지금 당장 그럴 수 없다면 도로 이용 방식을 바꾸면 된다. 일반차량은 지리산 아래에 놓고, 지역주민들이 운영하는 친환경 차량을 타고, 지리산국립공원의 과거와 지금, 이곳에 사는 야생 동식물에 대해, 지리산 곳곳이 간직한 이야기를 들으며, 지리산국립공원으로 들어가면 된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과 단체들은 지난 4월 29일 국회 앞 산림비전센터에서 '성삼재·정령치도로전환연대'(이하 전환연대)를 출범했다. '전환연대'는 기후위기시대, 탈탄소사회로 가는 길에 성삼재·정령치도로는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장기적으로 모색함과 함께, 당장의 과제로서 일반도로인 성삼재·정령치도로를 국립공원도로화해 일반차량의 출입을 통제하고, 구례와 남원의 주민들이 공동운영하는 친환경 전기버스만 다닐 수 있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나는 전환연대의 활동으로, 전환연대와 같은 뜻이 있는 지역사람들과 국민의 바람으로 지리산국립공원에 새로운 역사가 쓰일 것이라 기대한다. 1967년 지리산국립공원 지정, 1988년 성삼재·정령치도로 건설, 2004년 반달가슴곰 복원사업 본격적 시작과 함께 2025년, 2030년의 어느 날이, 성삼재·정령치도로의 정의로운 전환의 날로 기록될 것이라고 믿는다. 지리산은 우리나라 제1호 국립공원이며 사람과 야생 동식물 모두의 삶터이며, 생명의 산이다. 현 세대가 이 땅을 떠나도 100년, 200년, 1000년 이곳에 있을 지리산과 지리산에 깃들어 살아가는 생명들을 위해, 그리고 기후위기시대에 국립공원이 먼저 나서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성삼재·정령치도로의 전환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 이 기사는 경남도민일보에 실었던 기사를 재수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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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공원을 관광지로 만든 주범(성삼재·정령치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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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이 제초 작업을 하는 시대
- 로봇이 제초 작업을 하는 시대미국 자율 로봇 스타트업 카본로보틱스(Carbon Robotics)는 최근 AI와 레이저 기술을 결합한 3세대 제초 로봇을 선보였다. 이 제품은 스스로 움직이면서 컴퓨터를 이용해 고성능 레이저로 잡초를 제거한다. 하루 최대 6만4700㎡(약 1만9500평)를 작업할 수 있다. 레이저를 이용한 제초의 가장 큰 이점은 토양과 미생물을 손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잔류농약 걱정이 없다, 카본로보틱스는 현재 미국 서부 해안을 중심으로 신형 모델을 판매하고 있다고 한다.농업에서 가장 힘든 부분이 제초다. 농민에게 영원한 적이 있다면 풀일 것이다.농부와 풀과의 전쟁을 해결하기 위해 시중에는 많은 제초제가 판매 중이다.제초제를 사용하면 간단하게 풀을 제거할 수 있지만, 토양에 오랫동안 잔류가 된다.작물이 재배되고 있다면 제초제 사용이 어렵다. 볏과 작물에는 반응하지 않는 선택성 제초제가 개발되어 있어 이 문제를 해결 했지만 다른 작물의 경우엔 GMO이외에 대책이 없다.유기농업에서 힘든 부분이 제초 작업이다.유기농업을 하는 농부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이 제초다. 비 유기농업에서는 제초제를 사용할 수 있지만, 유기농에서는 이것조차 사용이 불가하기 때문이다. 제초 작업에 많은 인건비를 들여야 하고 비용이 증가하고 가격이 상승한다. 유기농산물의 가격을 올리는 요인 중에 하나가 제초제를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요즘처럼 인력이 없으면 시기를 놓치게 되고 농사는 실패하고 만다. 농업의 무인화 절반의 성공 최근 드론을 이용을 활용해 볍씨를 파종하는 담수 직파재배 육성사업이 실행되고 있다. 즉 드론이 볍씨를 뿌리고 있다. 로봇이 제초 작업을 하고 드론이 농약을 준다. 무인 콤바인과 트랙터도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농사일 대부분 무인화가 가능하다. 농업의 기계화는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농업용 제초로봇의 등장은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될 것이다. 벼농사의 경우 거의 모든 기계화 무인화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밭농사의 경우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GMO 농사에도 큰 영향을 줄 것이다.GMO 농산물은 특정 제초제에 반응하지 않는 씨앗을 개발하는 것이다. 가장 유명한 <라운드업> 제초제는 유전자변형농산물(GMO)만 살리고 그 외 풀들은 모두 죽인다.제초로봇의 등장은 라운드업이 필요가 없어지게 될 것이다. 비용이 문제이기는 하겠지만 언젠가는 제초로봇이 GMO 씨앗을 대체할 날이 오게 될 것이다.문제는 이런 장비들을 사용하지 못하는 농민들이다.대규모 규격화된 농지가 아닌 곳은 장비 사용이 어려울 것이므로 많은 농민이 경쟁력을 잃게 될 것이다. 한국 농민들 대부분이 노인이고 60대도 아닌 70대 농부가 대부분이면 소농들이다. 현대 농업이야말로 규모화 기계화가 아니면 경쟁력이 없는 산업 중에 하나다. 농업 인구는 가파르게 줄어들고 있으면 앞으로도 더 빠르게 가속화될 것이다. 제초로봇의 등장으로 농업을 새로운 국면이 접어들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한국의 소농을 살릴 방법이 존재하는가?사실 이것은 불가능하다. 이미 많은 소농들이 농지를 떠나고 있다. 남아 있는 농부들은 경쟁력 있는 농지를 확보했거나 농업이외의 소득이 존재하는 농부들 뿐이다. 이것도 아니면 농부 본인이 경쟁력을 확보하고 판로를 확보해서 자신의 농산물을 직접 판매하거나 가공하는 것인데 이것 역시 쉬운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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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이 제초 작업을 하는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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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교사 상글이 원하는 세상은?
- 2022년 5월 28일 구례 오일장 상설무대에서 진행된 ‘잘 뽑고 싶다구례 문화제’에서 발언한 상글의 이야기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구례에 살며 초등학교 아이들과 텃밭에서 만나는 상글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발언할 수 있도록 초대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지리산에 깃들어 살게 된지 올해로 3년차에요. 봄이 되면 씨앗을 뿌리고 여름이면 풀도 매고, 자연의 시간에 따라 몸을 움직이며 살게 되었네요. 생태텃밭수업 덕분에 저는 올해 돌보고 있는 텃밭이 4곳이나 있어요. 하나는 저희집 마당이구요, 용방, 토지, 옆 동네 남원에도 한곳있어요. 농은 곧 생명을 돌보는 일이니, 그만큼 책임감도 느끼고 기대가 되기도 해요. 모두의 마음이 푸르러지는 올 봄, 우리는 씨앗을 싹 틔우고 모종을 길러 저마다의 소중한 기대를 담아 텃밭에 옮겨심었어요. 완두, 토마토, 가지, 고추, 파프리카 먹을거리도 풍성하게 심고, 메리골드, 한련화, 해바라기 다양한 꽃들도 어우러져 심었어요. 아이들은 매일 아침 물을 주고, 따뜻한 말을 건네고, 올해도 우리는 텃밭에서 수많은 감동의 순간들을 만날거에요. 그런데 요즘은 손끝에서 가뭄을 느끼고 있어요. 아침에 물을 준 것도 금새 말라버리고, 아이들이 직접 만들어 놓은 빗물 저금통에 물이 말라버린지는 꽤 오래되었어요. 한 없이 펑펑 쏟아져나올 것 같던 수돗물도 요즘엔 찔끔거릴 때가 있어요. 지난 주, 저희 마을에서는 이장님께서 방송을 하시더라구요. 날씨가 가물어 물이 부족하니 빨래를 자제하고, 불필요한 생활용수는 가급적 사용하지 않도록 하라. 그리고 덧붙여 텃밭에 물주는 것도 자제하라고 하셨어요. 비가 오지 않는 것도 문제이지만, 여느때보다도 날씨가 덥고 기온이 높아 땅에 있는 수분의 증발 속도도 훨씬 빠르다고 해요. 지구는 오랫동안 경고신호를 보내왔어요. 이것은 환경적 재난이고 기후위기입니다. 위기감이 우리의 삶에 점점 더 가까워 지는 것을 느끼고 있어요. 구례군은 기후위기에 대한 어떤 대안을 준비하고 있나요? 우리는 어떻게 조금이라도 기후변화의 영향을 늦출 수 있을까요? 코로나로 모든 물리적인 접촉이 제한될때, 무엇보다도 간절한 것은 다시 ‘연결’되는 것이었어요. 불안 속에서 다시 안정을 되찾고 서로에게 따뜻한 포옹을 건넬 수 있는 안전한 사회. 그 안에 있던 연결감을 되찾는 것이요. 저는 이것이 돌봄의 감각으로 온다고 믿어요. 누구나 우리 안에는 돌봄의 감각이 있겠지요. 텃밭에 찾아오는 아이들에게도 있어요. 강자에게도 약자에게도, 인간에게도 비인간동물에게도, 할머니에게도 할아버지에게도, 우리 모두에겐 돌봄의 힘이 있어요. 오로지 경제 성장 중심의 해법으로는 위기를 해결할 수 없어요. 돌봄 사회로의 전환이 기후위기의 근본적인 해법이라고 생각해요. 개인과 사회의 목표가 생명을 돌보고 살리는 노동이 중심이 되어야합니다. 우리는 돌봄을 중심에 놓고 살 수 있는 경제구조와 문화를 만들어야합니다. 생태텃밭에서는 흙의 생태계를 돌보는 일을 함께 하고 있어요. 땅을 갈아엎지않고, 자연 멀칭을 하고, 돌려짓기, 사이짓기를 하고, 퇴비를 직접 만들어 유기물을 땅에 보태줌으로써 흙의 생태계를 되살리고 흙을 지키는 농을 실천하고 있어요. 농을 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농부님들에게 화학비료를 사용하는 것, 살충제를 뿌리는 것은 오랜 시행착오 끝에 현재로서는 최선의 선택이겠지요. 지자체에서 흙을 살리는 농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체제를 구축할 수 있는 정책을 시급히 마련하기를 바랍니다. 화학비료와 살충제를 더 싼 가격에 배급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에도 지구에도 건강하게 순환될 수 퇴비를 생산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마련해주세요. 이제는 전 국민이 기후위기대응교육에 함께 참여해야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공교육에서 농을 만나는 일도 그 중에 하나라고 생각해요. 환경과 생태를 따로 공부할 것이 아니라 농을 통해 텃밭에서 우리는 자연을 만나고 다양한 생태계를 접할 수 있어요. 더 많은 아이들이 생태적으로 순환하는 농을 경험할 수 있도록 생태전환 교육 예산을 확보하기를 요구합니다. 수해 이후 첫 선거입니다. 이번 지방선거는 변화를 만들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기후위기대응 정책을 가지고 있는 후보를 지지하는 것. 그것이 첫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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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 오늘
- 기후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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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교사 상글이 원하는 세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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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 농업 미래를 생각한다.
-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휘발유와 경유 가격이 리터 당 2000원을 넘겼다. 석유 가격은 전쟁이 있을 때마다 고공 행진을 했다. 하우스 농사는 석유 의존적인 농업이다. 대부분의 하우스는 겨울 내내 기름을 사용하고 그 비용은 매달 수십 만원에서 수천 만원에 이른다. 겨울이 지나서 석유 가격이 오르기 시작했으니 올해는 그나마 부담이 적었지만 올 겨울까지 장기화 된다면 올 겨울 농부들도 높은 석유 가격을 부담해야 한다. 밑의 글은 2006년에 작성한 글이지만 상황은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다. 석유 농업 미래를 생각한다.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으로 중동산 두바이유 현물가격이 지난 13일 70달러를 넘어섰다. 8월 인도분 브렌트유 역시 사상 최고치인 76달러를 넘나들고 있다고 한다. 앞으로 5차 중동전쟁이 일어난다면, 국제 유가는 80달러 이상으로 인상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석유시대는 모든 생활의 기본이 석유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매일 쓰는 자동차, 전자제품, 전기, 의류에서 의약품까지 석유에 단 1%도 의존하지 않고 만들어진 것이 하나도 없을 정도다. 그만큼 석유는 우리 생활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밥상 역시 예외가 아니다. 밥상 위에 있는 오이나 호박, 쌈 채소, 쌀, 고기 등 거의 모든 것이 석유가 아니면 생산이 불가능하다. 결국 우리의 밥상도 석유로 채워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중 석유 의존도가 가장 높은 것은 단연 ‘하우스 농사’다. 호박이나 오이를 겨울에 재배하기 위해서는 600평 기준 연 1천 만원 이상의 기름 값이 들어간다. 비닐 역시 석유 화합물임은 두말할 것이 없다. ▲ "다시 농사를 지으라고 한다면 하우스 농사는 절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구례 토지면 현근종씨. 전남 구례에만도 약 180곳이 넘는 하우스 농가가 있다. 지난 13일 구례 토지면에서 비닐하우스에 호박 농사를 짓는 농부 현근종(57)씨를 찾았다. 그는 1200평 하우스 농사를 25년간 지은 하우스 전문 농부다. 하지만 지난 25년 농사를 통해 얻은 것은 2억 3천만원의 빚이 전부라고 한다. 그는 자신이 빚을 지게 된 이유가 다름 아닌 '석유' 때문이라고 단언했다. 이유는 이렇다. 현씨는 25년 전 정부의 시설재배 장려 정책에 따라 하우스 농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런대로 남는 것도 있어 아이들 교육을 시키면서 최대한 아끼고 살았다. 그렇게 밥은 먹고 살았는데, 10년 전부터 석유 값이 조금씩 오르기 시작하면서 빚을 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생기기 시작한 빚은 IMF 직전에 3-4천 만원에 다다른다. 그 빚은 IMF 초기 치솟은 이자 때문에 천정 부지로 늘어났다. 또 기름값 역시 더욱 오른다. 더불어 이자도 오르는 이중고를 겪게 된다. 여기다가 비싼 기름값 때문에 주변 하우스 농가들이 하나 둘 망하게 되는데, 이때 보증을 서 그 채무까지 빚으로 떠안게 된다. 그는 결국 생전에 보지도 못한 돈 2억3천만원의 채무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아니, 기름값이 치솟는데 오이나 호박 값은 예전보다 떨어지는 거여. 그러니 빚 안 지고 살 수 있어. 농민들이 부자 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힘들어. 예전처럼 그냥 하우스 농사 안 짓고, 돈 안 쓰고 소박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이 놈의 빚만 없으면 말이야!” 그나마 구례민생인권상담센터를 통해 알게 된 개인회생제도(법원이 강제로 채무를 재조정해 파산을 구제하는 일종의 개인 법정관리)를 이용해 남은 빚은 월 50만원씩 5년 동안 상환하면 된다고 한다. "그런데 그 빚 갚고 나며 63살이야. 결국 30년 농사를 져서, 15년은 빚만 갚다가 끝나는 것이야"라고 현씨가 말하면서 허탈하게 웃었다. 시설재배 농가의 경우 치솟는 기름값과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자동화된 시설투자를 계속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투자비용은 늘어나는 데 비하여 단위 면적당 생산량은 한계가 있고, 농산물 가격 역시 춤을 추다가 한번 꺾여 버리고 나면 그 투자비용은 그대로 빚이 되어 농민의 숨통을 죄는 것이다. 결국 정부가 주도한 석유 화학을 중심으로 한 상업농, 자본 투입형 농업 방식이 농민들을 빚쟁이로 전락시키고 있다는 주장이다. 대한민국의 하우스 농사 지면서 빚 없는 사람 손들어 보라고 해! 그는 “아마 국내에서 하우스 같은 ‘시설재배’를 하면서 빚이 없는 농민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라고 말한다. 얼마 전 찾아갔던 인근 장미농장 역시 1억이 넘는 부채를 가지고 있었다. 현재 구례에서만 약 2000여 가구에서 신용불량자가 생겼고, 이들의 평균 부채는 약 2억 원에 이른다. 이중 절반에 가까운 약 1000여 가구는 정든 땅을 떠났다. 물론 이들 대부분이 시설 재배에 투자한 농가다. “내가 말이야, 다시 나보고 농사를 지으라고 한다면 하우스 농사는 절대 하지 않을 거야. 지금은 하우스에 투자한 것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지만 말이야. 언젠 가는 이놈의 비닐하우스에서 떠날 날이 있겠지….” 그래서 그는 요즘 다른 농사를 꿈꾸고 있다. 그는 요즘 밭에 도라지나 더덕 같은 것을 키운다고 한다. 하우스에서는 자동화 장비 몇 개를 보여주던 그는 인근 섬진강 강변의 도라지 밭과 더덕 밭을 구경 시켜주겠다고 함께 가보자고 한다. 장마철에 불어난 물 때문에 거친 숨소리를 내며 흘러가는 섬진강 인근 밭에는 3년 된 도라지가 보라색, 하얀색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는 꽃이 참 예쁘다면 앞으로 2년 쯤 더 키워서 약재로 팔 생각이라고 한다. 더덕 밭에서는 더덕 새순을 꺾어주며 먹어보라면 건데 준다. "이게 말이여, 우리 어렸을 때 지리산에서 많이 꺾어 먹었거든. 한 번 먹어 봐…. 맛있지 이것 농약 한 번 안 준거야." 이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엔 하우스에서와는 다르게 어느새 환해지고 있었다. 그는 농산물 가격이 어느 정도 보장된다면 당장이라도 석유농업에서 벗어나 오래된 전통 농업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한다. 석유 농업은 투입하면 생산량이 늘어나지만 투입한 만큼 생산비가 증가하기 때문에 생산량만 많을 뿐 소득이 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생산비용이 이미 투자된 상태에서 가격이 하락하게 되면 결국은 빚쟁이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농부가 빚에서 벗어나는 길은 석유농업이 아닌 오래된 농업 농업은 생명을 키우는 것인 만큼 하나의 생명의 순환 속에서 존재해야 하는데, 오직 생산량과 소득이라는 상업적이 부분만 강조되면서 생산량에 집착하게 되었다. 이는 결국 농약과 화학비료를 과다하게 사용하게 되어 소비자 역시 안전한 농산물을 먹지 못하게 된다. 오래된 우리의 전통 농업은 완벽한 유기농업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작물을 먹은 사람과 가축의 똥이 다시 거름이 되고, 이것이 작물을 키워 사람과 가축이 먹게 되는 순환식 농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석유, 화학농업은 이 순환 고리를 단절시켜, 똥은 바다에 버려지거나 석유로 태워지고, 똥 대신 화학비료가 작물을 키워왔다. 또 화학비료로 약해진 작물들은 병충해에 약하게 되고, 농약은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작물도 사람과 같아서 과잉보호, 즉 화학비료를 많이 주게 되면 약해진다.) 결국 한때 ‘금비’라고 추앙되면서 시작되었던 석유, 화학농업은 농민들에게 고스란히 빚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아직도 농정당국은 시설재배와 고비용, 고투입 농업을 권장하고 있다. 이런 농업으로 돈을 버는 사람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석유재벌들과 비료공장, 그리고 농약공장들뿐이다. 만약 정부가 권장한 농업이 효과가 있었다면, 하우스 농가에 빚이 없어야 된다. 농민들이 농가 부채를 정부에서 탕감하라고 요구하는 것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배럴 당 70달러가 넘는 고유가 시대, 농민들은 과연 어떤 농업을 선택해야 하는가? 석유 농업인가. 아니면 자연과 더불어 농사짓고 살던 오래된 우리의 순환형 농업 방식인가? 답은 점점 명확해지는 것 같다. ==================================================== 2006년에 작성한 글이다. 현재 현근종 농부는 여전히 하우스 농사를 하고 있다. 그는 이제 70대가 되었다. 지금은 하우스 안에 블랙 사파이어와 살구를 재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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