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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산 봄(春/見), 루이네
    지리산 봄(春/見), 루이네 강회진(시인, 독립연구자) 마음이 아픈 줄도 모르고 어른이 되어 앞으로 운이 좋아 80살 까지 산다고 쳤을 때 내게 남은 생은 살아온 날 보다 적다. 마음이 아픈 줄도 모르고 어른이 되었다. 무엇을 견디는지도 모른 채 인생이 지나고 있다. 나의 욕심으로 때론 너무 왔거나 지나갔거나 눈치 채지 못한 관계에 지치고 하지 않아도 될 일들까지 하느라 몸과 마음이 늘 고단했다.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 수는 없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으나 진짜 나만을 위한 시간, 나를 위한 시간을 갖고 싶었다. 더 늦기 전에. 더 늦기 전에. 드디어 나는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하나. 오랫동안 지리산과 섬진강을 그리워했기에 구례, 하동을 꿈꾸었다. 언젠가 초여름 지리산 둘레길을 걸으며 보았던 산내의 다랭이논 일렁이는 초록 물결과 손에 잡힐 것 같던 흰 구름, 고즈넉한 실상사의 저녁 예불 모시는 풍경들이 자꾸만 나를 불렀다. 마음을 정하고 나니 모든 것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집을 구하기 어렵다는 산내에 빈 집이 나왔고 내놓은 아파트는 금방 입주자가 나타났다. 마치 오래 전부터 계획되어 있었던 일처럼. 2. 세 가지면 충분하다 사람들은 내게 왜 그 먼 곳으로 가느냐 물었다. 대체 어디에서부터 먼 곳이라는 말일까? 나에게는 가장 가까운 곳이 바로 이곳이라 말하지 못했다. 마당에서 듣는 하루 두 번 실상사 범종 소리와 수달이 살고 있다는 람천의 우렁찬 물소리,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천왕봉. 이곳으로 이사를 위한 이유로 이 세 가지면 충분했다. 게다가 이곳은 내게 완벽하게 낯선 곳. 이사를 하는 날 고속도로에 눈발이 날려 앞이 보이지 않았다. 운전기사는 “이사하는 날 눈이 오면 부자된다 안하요.”라며 애써 웃음을 보였다. 지리산 IC에 들어서는 순간 가슴이 쿵쿵 뛰었다. 저 멀리 펼쳐진 지리산 자락이, 마을이 온통 눈으로 환하게 빛났다. 지리산에 곁들어 사는 일은 지리산이 허락해야 한다던데 드디어 나도 지리산의 선택을 받았구나. 다정한 지인들은 문패를 만들어 보내주었고 마당에 심을 꽃나무와 다양한 꽃씨를 보내주거나 어여쁜 커튼을 보내 새로운 출발을 기꺼이 응원해 주었다. 이사 후 두 번의 큰 눈이 내렸다. 저 멀리 눈에 덮인 천왕봉은 감탄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실상사 저녁 범종 소리를 들으며 구들방 아궁이에 불을 넣었다. 가끔 불씨가 아까워 고구마를 구워 강아지와 나눠먹었다. 그렇게 산내의 첫 겨울이 고요히 흘러갔다. 3. 산내는 산내말로 살래 맘씨 좋은 이웃이 밭 귀퉁이를 무상으로 빌려주셨다. 또 다른 이웃은 슬며시 거름을 부려놓고 가셨다. 감자를 심고 두둑 가에는 옥수수도 심어야지. 밭을 일궈 고랑 네 개를 만들고 거름을 뿌렸다. 다음날 맞춤비가 내렸다. 나른한 햇살을 받으며 꽃씨를 담구고 씨감자 눈을 쪼개다보니 어느새 담장에 노란 개나리가 막 피어나는 춘분이 되었다. 밤마다 멀리 무논에서 개구리들이 정겹게 울어댔다. 어느 밤, 마당에 나가 올려다본 하늘, 선명하게 반짝이던 북두칠성이 말했다. 그래, 잘 찾아왔어. 너의 길. 이른 아침 단풍나무에 새가 날아와 한참을 앉았다 날아가는 흔하디흔한 그 풍경이 좋았다. 새들을 위한 모이를 뿌리고 수돗가 물을 갈아준다. 햇살이 길게 들어오는 이른 아침, 멀리 천왕봉을 게으르게 앉아 바라보는 그 시간을 놓칠까봐 아침 일찍 일어난다. 지리산에 와 매일 매일이 행복한 검은 개 루이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면 이웃 어르신들이 묻는다. 어디사요? 놀러왔는가베? 아니요, 저 살래 살아요. 저 멀리 앞 산 노란 산수유 지면 대문 옆 감나무에도 반짝이는 새 잎 무성할 것이다. 마당에 정성껏 심은 모란이 피고 지는 깊은 봄이 흘러 옥수수를 따고 감자를 캐면 좋은 사람들 모아 잔치를 해야지. 지리산의 첫 봄, 살래의 첫 봄, 나의 첫 봄이 설렌다. -달궁수달래 / 김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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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09
  • 가여워 하는 마음
    가여워하는 마음 박두규/시인 어김없이 새날이 오듯 새해도 온다. 그리고 사람들은 바쁜 연말이나 연시의 와중에도 한 번쯤은 가는 세월이나 오는 세월을 머릿속에서 정리하거나 다짐하게 된다. 나는 인생 간판에 시인 딱지를 붙이고 살다 보니 연말연시가 되면 문학이니 예술이니 하는 것에 대한 생각을 가끔 되짚어보곤 하는 것인데 그때마다 박수근(화가)이 했다는 말이 떠오르곤 한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이 말은 어디서 어떻게 알게 된 것인지 기억에도 없는데 느닷없이 날아온 돌멩이처럼 나의 뇌리에 강하게 박혀 수시로 울림을 준다. 예술이 아름다움의 영역이라면 그 아름다움은 선함과 진실함의 바탕에서 이루어진다는 어떤 믿음이 있었던 건 아닐까? 그의 말처럼 정말 평범한 일상생활 속의 착함과 진정함이 가장 아름다운 삶이 아닐까? 그냥 스치고 지나갈 수도 있는 이 말이 나에게 강하게 올 수 있었던 건 아마 당시 이런저런 경전들을 읽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경전의 바탕이 선함과 진실함이 아니던가. 그리고 그때 그것들을 읽어내며 스스로의 단어로 정리해낸 말은 ‘가여워하는 마음’이었다. 그 즈음에 나온 시집의 제목을 ‘가여운 나를 위로하다’라고 붙인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새 정부가 들어선 후 이런저런 부족한 짓, 말도 안 되는 짓, 터무니없는 짓들을 많이 한다고 하는데 내가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점은 윤가와 그의 사람들에게는 이 ‘가여워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이긴 자가 진 자에 대해 그리고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 또는 민초들에 대해 ‘가여워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됨의 근본이 없는 것이다. 세상과 사람에 대한 연민도 없이 살아가는 것들이 무슨 정치며 예술이며를 할 수 있겠는가. 그러한 마음을 학문이나 사상에 앞서 삶 속에서 잘 보여준 옛사람으로 퇴계 이황 선생이 있다. 요즘 자본주의 기후 위기에 연계된 이런저런 책들을 보게 되었는데 21세기에 들어 사상적 출구를 모색하는 세계의 석학들에게 주목받는 사람 중에 퇴계 선생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퇴계를 생각하면 그의 사상이나 학문보다는 그가 살아낸 구체적인 일상 삶과 그를 통해 보여준 ‘가여워하는 마음’이 먼저 떠오른다. 그는 스물한 살에 결혼하고 아내 김해 허씨와 함께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지만, 아내가 결혼 6년 만에 병사한다. 그리고 3년 상을 치른 후 재혼하는데 맞아들인 권씨 부인은 정신질환이 있는 병약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퇴계가 마음속으로 존경했던 권주(연산군 때 갑자사화로 사약)의 아들 권질의 딸이었다. 권질은 조광조 숙청의 기묘사화 때 예안으로 귀양 와 있었는데 퇴계가 이따금 찾아가 문안 인사를 하며 지내는 사이였다. 그런데 권질은 병을 얻어 죽으며 여러모로 부족한 딸을 두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려 퇴계에게 딸을 돌봐달라고 부탁한다. 퇴계는 마음속으로 존경하던 분의 집안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몰락하는데 자손들마저 불행해지는 것이 가슴 아파서 그 딸을 맞아들여 재혼하게 된다. 하지만 퇴계 선생의 진정 훌륭한 점은 결혼 후 그 정신적 질환이 있는 부인에게 ‘손님처럼 공경하는 법도’를 실천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퇴계 선생이 공부하고 펼친 지식과 사상이 현실 속에 살아있는 학문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또 그의 ‘가여워하는 마음’의 정도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알다시피 퇴계는 인간의 근본 마음 네 가지 중 앞세운 것이 측은지심(仁)이며 바로 ‘가여워하는 마음’에 다름 아니다. 그렇게 늘 4단四端의 마음을 중심에 두고 7정七情의 마음을 경계하는 것이 당시 선비들의 수행이고 공부였는데 선생은 삶 속에서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런 결혼생활도 16년 만에 권씨 부인의 죽음으로 막을 내린다. 퇴계의 ‘손님처럼 공경하는 법도’ 또한 그렇게 끝났는데 퇴계는 훗날 그 시절을 ‘결혼생활 16년 동안 더러는 마음이 뒤틀리고 생각이 산란하여 고뇌를 견디기 어려운 적이 없지 않았다’라고 술회한다. 이러한 고백으로 짐작할 수 있듯이 비록 퇴계가 그 시절을 자신의 덕을 쌓는 수양의 화두로 삼아 모범을 보였다고는 하나 얼마나 괴롭고 힘들었나를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퇴계의 ‘가여워하는 마음’을 짐작하게 하는 또 하나의 일화는 그의 며느리 이야기다. 둘째 아들 채(寀)는 정혼한 상태였는데 그 아들이 결혼을 앞두고 급사하게 된다. 그래서 아들이 죽었기 때문에 예식도 못 올린 며느리를 맞이해야만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퇴계는 당시 삼종지의三從之義의 엄격한 규율을 깨뜨리고 처녀의 몸으로 며느리가 된 여인을 친정으로 돌려보내 재가하게 한다. 퇴계 선생의 삶의 바탕에 있던 ‘가여워하는 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퇴계는 엄격한 유가의 선비였으나 깊은 인간애에 바탕을 둔 스스로의 삶을 꾸려내었으며 세상의 법도 이전의 ‘불법不法의 예’를 보인 진정한 유가의 스승이었다. 그리고 퇴계는 첫째 부인이 죽은 후 두 아들을 양육하기 위해 관례에 따라 첩을 들였는데 그 첩도 선생보다 먼저 죽게 된다. 첩에게서 낳은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 또한 자신의 호적에 올렸고 차후에 그 아들의 후손들이 적서의 차별을 받지 않도록 족보에 적서의 구별을 두지 않게 하였다. 또 퇴계 선생은 이런저런 굴곡의 가정사를 다 넘기고 홀아비 생활을 하는 중에 단양군수로 있을 때는 단종 복위에 참여했던 사대부의 후손으로 어린 나이에 관기가 된 기생 두향을 소실로 맞아 외로움을 달래고 남녀의 사랑이라는 것을 하게 된다. 서자와 관기라는 당시 천한 신분의 사람에게도 시대의 법도를 넘어 사람의 근본에 있는 ‘가여워하는 마음’으로 차별 없이 대하였다. 나는 퇴계 선생의 아픈 가정사를 보면서 평범한 일상생활 속의 착함과 진정함이 가장 아름다운 삶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박수근이 말한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그 말의 깊이를 절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황이라는 사람은 위대한 학자요 사상가이기 전에 ‘가여워하는 마음’이라는 존재의 근본을 깨달은 사람이고 그렇게 자신을 살아낸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작금의 우리 사회는 이로부터 얼마나 멀리 왔는가. 국정을 운영한 새 정부의 2022년을 보면서, 제 이익과 안위만을 생각하는 권력을 보면서, 그들의 치졸한 양아치 정치를 보면서, 윤가와 그 권력의 발뒤꿈치를 쪼아 먹고 사는 닥터피쉬들을 보면서, 그 언론과 정치권과 검찰과 윤의 사람들을 보면서, 언감생심焉敢生心 ‘가여워하는 마음’을 꿈꿀 수는 있을 것인가 하는 절망감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나라를 맡긴 것은 국민이니 한편으론 할 말도 없다. 이는 모두 자본주의, 자유주의라는 왜곡된 이데올로기 안에서 돈만 있으면 되고 나만 살면 된다는 그릇된 가치관의 정서가 우리 사회 안에서 당위적 정당성을 얻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가치관의 변화 없이는 우리 사회의 ‘가여워하는 마음’은 회복할 수 없을 것이다. 퇴계 선생처럼 개개인의 진정성으로 실천하는 정도를 넘어 지난날 촛불처럼 온 국민이 지극정성으로 ‘가여워하는 마음’을 기원하는 계묘년이 되기를 바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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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26
  • 인간의 탐욕, 그 쓸쓸함에 대하여
    인간의 탐욕, 그 쓸쓸함에 대하여 박 두 규 (시인) 연말연시를 맞아 바쁘게 살다가 어쩌다 담배라도 하나 빼물면 ‘아, 한 해가 또 가는구나.’ 하며 나도 모르게 긴 숨을 내뱉게 된다. 무슨 큰 걱정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그 긴 숨은 한숨처럼 내뱉어져 스스로를 우울하게 한다. 어쩌면 그 우울함은 한 해가 가고 또 한 살을 먹고 그만큼 남은 삶이 줄었고 그만큼 죽음에 다가갔다는 무의식적인 뇌의 반응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이렇게 외부의 상황에 별다른 생각도 없이 반응하는 몸과 뇌의 기억에 끌려 다니는 것이 못마땅해서 자주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편이다. 그리고 그런 기억의 관성적 반응을 하는 나를 ‘들여다보는 나’의 편이 되어 다시 생각을 정리해내곤 하는 버릇이 있다. 그럴 때 시로 정리되는 경우도 간간이 있는데 올 연초에도 이런 시를 썼었다. “새해 첫 모심/ 오시는 숨, 기쁘게 모시고/ 가시는 숨, 미련 없이 여읜다./ 모든 게 고맙다./ 새해 꼭지를 따며 스스로에게 당부한다./ 허접한 일상을 살지라도/ 세상의 모진 바람에 고개 숙이지 않기를./ 이승의 궁벽한 어느 구석일지라도/ 아무런 미련 없이 처박히기를.” 지리산 자락, 섬진강 하류 기슭 어느 구석에 거처를 마련하고 처박힌 지도 벌써 10여년 세월이 흘렀다. 나는 이곳으로 들어오면서 사실은 새로운 인생살이를 꿈꾸며 들어왔다. 누구든 자신의 새로운 삶을 위해서는 그 상황과 조건을 바꿔내려고 새로운 각오를 한다. 나도 이곳에 들어오며 새 집을 짓고 상량문에 그 마음을 새겼다. 노자와 묵자에서 빌려와 無爲無不爲무위무불위와 愛人若愛身애인약애신이라는 글을 새겼는데 집이 내려앉을 때까지 얻지 못할 말을 새겨놓고 쳐다볼 때마다 후회하며 살고 있다. 無爲無不爲를 새길 때만해도 나름의 해석을 글로 정리하기도 했는데 그 일부를 보면 대충 이렇다. “......나무는 어디도 가지 않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세상의 비와 바람을 다 맞는다. 그리고 꽃을 피워 봄이 있게 하고, 벌과 나비의 양식이 되고, 씨를 맺어 생명을 잉태한다. 평생을 한 곳에서 한 치도 움직이지 않지만, 스스로에게 또는 세상에게 하지 않은 것이 없다. 사실은 이처럼 모든 것은 그 존재 자체로 스스로 빛나는 것이다.......” 무엇을 인위적으로 하지 않으면서도 하지 않는 것이 없다(無爲無不爲)는 그 말이 당시에는 너무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일상에서 행동하고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높은 경지의 삶이라는 것도 모르고 그냥 그 내용이 멋있어서 그렇게 나댔었나 싶다. 하지만 21세기 현대인들은 이 무위무불위의 진리를 용납하지 않는다. 저절로 운영되는 우주자연의 존재적 질서와 그 존재의 순환적 질서를 철저하게 깨며 이루어낸 것이 오늘날 현대문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현대의 과학기술문명은 자본주의를 만나 발전된 것이기에 오늘날 우리 문명사회는 자본의 본질적 특성의 하나인 탐욕을 내장하게 된다. 성장주의나 물량주의, 물질만능주의 그리고 지독한 이기주의, 이런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탐욕을 그대로 실현시켜온 현대문명의 특징들이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자본의 논리는 끝없이 탐하는 인간의 탐욕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탐욕은 반드시 폭력을 유발할 수밖에 없다. 돌아보면 이러한 탐욕이 상류 기득권층의 카르텔을 자연스럽게 형성하여 보이지 않게 우리 사회를 지배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두는 아니겠지만 법을 만드는 정치인과 법을 집행하는 검사들과 그것의 여론을 주도하는 언론인들이 결탁하면 대한민국은 이들의 나라였다. 그 중심에는 무소불위의 권력인 검찰이 있었다. 검찰의 눈으로 보면 누구든 털면 나오는 것이고, 누구든 죄인으로 만들고 안 만들고도 그들의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그러하니 골목대장 검찰의 주변에 붙은 언론인과 정치인들, 재벌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검찰은 이러한 카르텔을 형성하며 지금껏 부정부패를 저질러온 곳이지만 이것을 바로잡기는 너무 어렵다. 과거 군부독재 시절의 검찰은 모든 법의 우위에 있는 중앙정보부나 안기부 같은 기관이 충분히 통제할 수 있어서 청와대의 수족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족쇄에서 풀려난 지금은 검찰을 통제할 기관이 없으니 그야말로 최상위 포식자의 위치에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의 본질적 원인은 4,5백 년 동안 진화해온 자본주의 속에서 제어장치 없이 커온 인간의 탐욕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탐욕이라는 것은 생존의 욕구로부터 시작되고 삶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그 생존욕구가 탐욕으로 진화되는 경계선을 인간은 제어하기 힘들다. 그래서 사회적 도덕률과 법률로써 재어하려 하나 그 법률 자체가 잘못되어 있으면 그것도 어려운 일이 되고 만다. 法이라는 것이 글자처럼 물이 흐르는 것처럼 시대에 따라 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회라는 곳이 그러한 역할을 하는 것이지만 그곳에 소속되어 있는 자들이 자신의 이익과 파당적 이익에만 매몰되어 변화를 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온 국민들이 이들의 진영에서 휘둘리지 않고 우리사회의 바른 잣대로서의 그 몫을 해야만 한다. 하지만 현대인들이 이런 일에 참여하는 것 또한 쉬운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 탐욕은 이미 21세기의 삶 속에서 인간의 보편적 정서로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아서 그렇다. 이 탐욕이야말로 폭력의 근원이고 모든 순환 질서를 깨는 근본 원인이지만 이것은 오늘날 현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제성장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에게는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또는 당위적 삶이라는 이름으로,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자유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 또한 우리사회나 다른 누구의 탐욕에는 분노하면서 자신의 탐욕에는 관대한 그런 뻔뻔스러운 삶을 잘도 살고 있기 때문이다.
    • 이야기
    • 지리산인 칼럼
    2022-12-13

실시간 지리산인 칼럼 기사

  • 나의 우리, 우리 속의 나
    박두규 (시인) 현재(6월3일) 우리나라 코로나19 확진환자는 11,590명 사망자는 273명이다. 그리고 현재(6월2일) 세계의 확진자 누적 인원수는 6,330,848명이고 사망자는 376,008명이다. 그리고 국가별 사망자를 보면 미국 106,195명 영국 38,489명 이탈리아 33,415명 브라질 29,314명 프랑스 2,8802명 스페인 27,127명 중국 4,634명 일본 891명 한국 270명이다. 이 수치는 이 글을 읽게 될 즈음이면 훨씬 더 올라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코로나 국면은 앞으로 코로나보다 더 진화된 또다른 바이러스의 유사상황을 예고하는 시작일 뿐이며 단순히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사피엔스라는 종의 멸종을 예감하는 전조현상으로까지 말하는 미래학자도 있다. 이제 코로나19 이전의 시절로 돌아가 예전의 일상 삶을 살 수는 없을 것이며 지구인들의 삶은 큰 변화를 가져올 거라는, 아니 변화해야 한다는 위기의식을 충분히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자본주의를 토대로 이루어낸 과학기술문명, 물질문명의 틀에서 벗어나 한 단계 확장된 의식을 토대로 한 도덕적 과학기술과 정신문명으로의 새로운 판짜기 변화가 절실해진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포스트 코로나의 지구상황을 예견하고 인간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켜 갈 것인가를 이야기해야 된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맞아 변화되어야 할 의, 식, 주, 의료, 교육 그리고 정치,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까지 기존의 질서와 그 틀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를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변화의 국면에서 한국의 위상과 기대치는 매우 높게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그동안 자본의 논리, 물질적 가치로만 삶의 모든 것을 판단하다가 코로나19를 맞아 인간 본연의 존재가치와 정신적 가치로 삶의 문제를 판단하게 되면서 드러난 것이다. 미국이라는 나라와 서구의 선진국들은 이번 코로나 국면에서 그 의식의 수준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그동안 그들을 선망하게 했던 자유주의, 개인주의적 가치가 이런 생명존재라는 근본적 문제에 있어서는 단순히 사피엔스라는 종의 욕망, 욕심, 탐욕이라는 이기적 범주 속에 있는 통속적인 것 이상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서구 석학들의 반성적 성찰은 그래서 동양의 유교적 전통과 사상, 특히 한국의 이번 코로나 대응 국면을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이 국면을 대응하기 위해서는 아니지만 다행히 이 국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민주적 시민성과 공동체 의식, 그리고 그 속에서 형성된 수평적 개인주의, 공동체적 자유주의 등 코로나 방역 성공의 필수적 요소들을 갖추고 있었다. 그것은 식민지와 전쟁, 군부독재 등 일련의 역사적 과정 속에서 자연스레 축적된 것이며 많은 피를 흘리며 얻어낸 값진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프랑스혁명보다 더 진화된 촛불혁명이라는 인류사적 의식의 확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고 그 확장된 선진의식이 코로나 국면 속에서 발휘되면서 한국이 코로나 대응의 모범적인 극복모델로 부각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사회의 내면을 돌아보면 아직도 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번에 시사IN과 KBS가 공동기획한 대규모 웹 조사 중 하나로 한눈에 무엇인가를 짐작하게 하는 재미있는 결과가 있다. 그것은 코로나19 이후 한국사회 신뢰도를 묻는 질문이었는데 결과는 이렇게 나왔다. ‘질병관리본부(+75) 의료기관(+72) 가족(+67) 대한민국(+53) 친척(+41) 청와대(+29) 정부(+27) 한국국민(+21) 이웃 사람(+11) 지방 정부(+3) 민주당(-3) 국회(-33) 낯선 사람(-36) 언론(-45) 종교기관(-46) 미래통합당(-56)’ 이 신뢰도 결과는 단순히 신뢰만이 아닌 코로나 국면을 맞아 드러난 현재 한국사회의 삶 자체의 여러 단면을 생각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코로나 국면에서 보여준 서구의 사회의식보다 앞선 자유로운 개인인 동시에 공동체에 기여하려는 시민의식을 잘 보여주었다. 격동의 근현대사 과정을 거치면서 개인과 사회의 내면에 축적되어졌던 ‘나의 우리, 우리의 나’인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그래서 코로나 국면에서 나타난 의료진들의 헌신성과 타인을 배려하는 시민성, 진정으로 국민을 우선했던 정부의 모습 등은 미국을 비롯한 서구 선진국들과 직접 비교되어 서양 우월주의를 탈피하는데 충분했다. 그리고 한국과 한국인의 위상이 세계의 표준으로 부상할 수 있다는 생각과 한국이라는 브랜드를 창출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의 높은 시민의식, 민주주의 정신을 이미 세계가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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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산인 칼럼
    2021-06-01
  • 다만 늙었어도 포기하지 않은 것뿐이다
    박 두 규 (시인) 오래 전에 읽은 고은의 소설 『선(禪)』을 보면 달마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처음 갈 때 해로를 통해 베트남으로 상륙해서 중국으로 들어가는 대목이 나오는데, 뱅골만을 벗어날 즈음에 이동 중인 수만 마리의 철새 떼들이 폭풍을 피해 달마 일행의 배로 내려앉는 일이 생긴다. 달마는 그 새떼들을 쫒거나 죽이지 말라고 지시한다. 선원들과 일행들이 그 말을 잘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종료된 후, 배에는 수백 마리의 새들이 죽어 있었다. 그것을 보고 달마는 “저 새들은 늙어서 기력이 다해 죽은 것이다. 다만 늙었어도 포기하지 않았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나는 그 대목에서 잠깐 호흡을 골라야 했다. 무언가가 깊게 마음을 질러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이 때문에 타자로부터 제재를 받기도 하고 스스로 포기하기도 한다. 그러는 중에 점점 무기력해지고 죽음의 그늘이 가까이 드리워진다. 이게 일반적인 일상의 ‘늙음’에 대한 인식이다. 하지만 ‘다만 늙었어도 포기하지 않았을 뿐이다’라는 말은 강한 생명력을 느끼게 하면서 늙음에 종속되지 않는 생명과 생명을 가진 한 존재의 삶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일 뿐이라는 것을 다시금 각인시켜준다. 디팩 초프라가 말한 것처럼 ‘노화’란 하나의 개념일 뿐이고 실재는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는 오로지 자신의 생명을 끝까지 발현하다가 소멸하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라는 영장류만이 유일하게 생각하는 힘이 있어 늙음이나 죽음 따위를 가지고 고민하고 두려워하며 살고 있는 것이지, 나무는 천년을 살아도 스스로 늙었다거나 죽을 때가 다 되었다거나 하는 생각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기만 할 것이다.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생명을 발현하는 즐거움과 기쁨으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새들의 스스로 이상향을 향한 자유로운 날갯짓은 늙음과 무관하며 생명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참으로 감동적이다.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역으로 말하면 그렇게 살 수 있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졸저 『生을 버티게하는 문장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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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산인 칼럼
    2021-06-01
  • 문정리(文正里)의 죽음들
    성염 자문위원 필자가 지리산 서북자락 문정리에 ‘휴천재(休川齋)’라는 누옥을 지은 것이 25년 전이고 주민등록을 옮겨 주민으로 살아온 것이 10여년 되는 사이 문하마을 남정네들은 대부분 세상을 떴다. ‘조합장’, ‘부면장’, ‘노인회장’ 등 직함으로 불리던 노인들도, ‘동호양반’, ‘거문골양반’, ‘용산양반’ 등 부인의 택호로 불리던 사람들도, 또 혼자 사는 아짐들의 상머슴 노릇을 해주던 맘씨 좋은 ‘인국이 아재’처럼 수줍던 사람도 세상을 등졌다. 내 또래 서넛이 아직 살아 있을 뿐. 아낙들은 열댓 남았지만 남편의 마지막 몇 해를 치매병간으로 보내다 떠나보내고 나면 ‘안방 아랫목에 누웠으나 앞산 양지에 옮겨 누우나 매한가지’라는 초연한 얼굴을 하고서, 서까래 내려앉는 집에 혼자들 살면서 대처로 살러 나간 아들, 손주 소식으로 연명한다. 대개 산비탈에 묻히지만 손수 쟁기질하던 밭에 묻히기도 하여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 죽어서 실컷 먹으라고 보리밭에 묻었다”(이생진, “그리운 바다 성산포”에서)는 구절처럼 되기도 하고. 휘영청 보름달이 아스라한 밤중에 잠을 깨면 필자는 하봉쪽 문장대를 창밖으로 올려다보면서 “다람쥐처럼 / 사랑 때문에 / 산에 가서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이생진 “행복한 사람”에서)을 그려본다. 우리 민족이 거쳤던 아픔 중에서도 사상과 이념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었던 사람들은 어느 편에 섰든 존경이 가는 까닭에, 저 능선에서 어둑한 골골에서 봉분 없이 스러진 이들이 긴긴 행렬로 만가(挽歌)를 부르는 듯한 환청도 들린다. 내가 사는 문정리 앞을 휴천강이 흐르고 강을 건너는 송문교 옆에는 문장대 일대 산허리를 안내한다면서 ‘빨치산 루트’라고 기록한 간판이 여러 해 서 있었기 때문이리라. 작년 8월이던가? 견불동 사는 조감독이 잠시 들러 냉수나 한 잔 마시고 가겠다고 전화하더니 시간이 되니까 ‘토벌대를 피해 도주하는 산사람들' 행색을 한 일행 열두 명이 나타나서 삽시간에 휴천재를 접수했다. 우리 분단의 역사를 현장답사로 배우는 젊은이들이란다. 무리를 인솔하던 분은 한 때 우리 부부와 친분을 나눴던 김인서(본명 김국홍) 노인을 직접 알고 있었다. 우리 동네 문정리가 1950년 말 남로당 유격대가 조직되고 출정한 곳이라는 연구발표가 있어 그 장소를 확인하러 다닌다 했다. 심심산골에 문정리(文正里)라는 지명도 귀에 설지만, 우리 집에서 100미터가 안 되는 거리에 고려조 이억년 선생의 묘소가 있고, 그가 문정리에 도정정사(道正精舍)를 짓고 사람을 가르친 내력이 ‘도정마을’이라는 이름에 남아 있다. 도정마을에는 일제하에서도 한지공장이 있어 그 자제들이 배우고 깨우친 민족주의자들이었는데 보도연맹으로 싸잡혀 희생당했다는 소문도 있어 그들의 추정도 제법 신빙성 있어 보인다. 거창과 함양-산청 양민학살을 자행한 11사단 최덕신의 소위 ‘견벽청야(堅壁淸野)’가 1951년 2월 8일 아침 9시에 개시된 마을이 이 곳 문정리였다는 점도 시사점이 있다. ‘시국강연’을 한다면서 논으로 끌려나온 주민 200여명이 국군의 기관총에 학살당할 찰나에 강경한 항의와 설득으로 사람들을 살려낸 당시 이장 김길동(金吉童)의 송덕비가 문하마을 초입에 서 있다. 필자가 이 동네로 살러 와서 장례를 치른 노인들은 저 운명의 날 10대의 소년들이었지만 필자에게 그 날 얘기는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바로 그 이튿날 첫 아이를 해산했다는 90대 여인의 눈초리에는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군경에 대한 깊은 공포가 서려 있음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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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산인 칼럼
    2021-06-01
  • 어찌할 수 없는 몸의 고통에도 평화를!
    임봉재 자문위원 황금돼지의 기운으로 2019년은 하늘 땅 사이의 모든 생명들을 포함하여 모두가 건강하고 웃으며 살 수 있는 행복한 일들이 많이많이 있으면 좋겠다. 지난해 4월 남북정상회담은 오랜 분단과 대립으로 얼어붙었던 한반도에 평화의 싹을 보여주었다. 이제 남북이 반목과 대립이 아니라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들이 모여 한반도에 평화가 이루어지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또한 오랫동안 몸살을 앓게 하던 지리산댐 건설문제가 다행히도 지난해 9월 백지화 되면서 지리산에 평화가 찾아왔다. 지리산 평화는 곧 지리산 주변에 사는 사람뿐 아니라 이 땅에 사는 우리 모두의 평화이기 때문이다. 이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평화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아니, 생명평화결사의 가르침이다. 나는 이 말을 내 남은 생의 화두로 삼고 산다. 2018년, 개인적으로 나에게 참 힘든 한 해였다. 40년 가까이 병원과 약물을 외면하고 살아오며 감기약 한 번 안 먹고 견뎌 왔다. 그런데, 몇 년 전에 감기 기운이 들더니 호흡곤란이 왔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으니 이제 갈 때가 되었나보다 생각하며 죽는 순간까지 편안한 맘으로 기쁘게 살리라 바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밤에 잠을 자다 숨이 막혀 밤새도록 버둥대다 아침을 맞았다. 밤이 두려웠다. 증세가 심해지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러기를 한 달 넘게 하다가 결국엔 한의원을 찾았고 차츰 차츰 나아진 적이 있다. 아직은 내가 이 세상에서 할 일과 보속이 남아있어 하느님이 데려가지 않으시나 보다 생각하며 매일매일 주어지는 시간을 감사하며 살자고 다짐했다. 크게 드러나지 않는 속이 안 좋은 것은 견딜 만한데, 목 위의 기관에 이상이 생기니 견딘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지난해 초부터 나의 일상에 변화가 생겼다. 말이 잘 들리지 않아 이비인후과를 찾았고, 눈에 이상이 생겨 안과를 드나들며 약물치료 중이다, 치아가 저절로 부러지거나 아파 치과를 드나들고... 결국은 쓸 수 없는 치아를 뽑고 씌우고 하다가 의치를 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70년 넘게 썼으니 탈이 나는 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이 들면 대충 보고, 대충 듣고, 대충 먹고 이 세상 사는 날까지 그렇게 살면 된다는 것이 평소 생각이었건만 대충 보고, 듣고... 하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였다. 산다는 것 자체가 혼자 사는 게 아니어서 잠자는 시간 외에는 만나는 상대방에게 폐가 되고 불편을 주게 마련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치과 진료실에서 짧아야 한 시간씩 입 벌리고 고문 아닌 고문을 당하는 기분으로 반년을 넘겼다. 죽기보다 싫은 게 이를 뽑거나 신경치료 할 때 하는 마취였다. 그래서일까! 삶에 의욕이 없어지며 게을러지고 있는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특히 머리를 써야 하는 것은 더더욱 싫어졌다. 책에서 글 한 줄 읽는 것조차 쉽지 않다. 컴퓨터 작업도 쉽지 않고... 이전부터 글을 쓰기가 쉽지 않았다.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이 한없이 부러웠다. 고백하건대 이번 지리산人에 실을 원고가 늦어진 것도 온전히 나의 게으름에서 비롯되었다. 해야지 하고 자리 잡고 앉으면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뭘 써야 할지... 머리가 멍한 상태로... 뭔가는 써서 보내드려야 하는데... 제 때에 보내드리지 못한 미안한 마음에 결국은 하찮은 내 자신의 이야기를 올리게 되어 담당 선생님께도 한없이 미안하고 부끄럽고 죄송하다. 나 하나 때문에 계간지로 나가는 지리산人이 제 때에 인쇄도 배포도 못하고 얼마나 애를 태우고 계실지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없기에 더더욱 면목없고 부끄럽고 죄스러울 뿐이다. 지리산人 모든 분들께 건강과 평화가 넘치는 행복한 한 해가 되시길 두 손 모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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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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