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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활동가들의 새해편지] 5. 함양에서 : 싸울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여, 부디 건강하시기를
    2025년 한 해를 마무리하고, 2026년 새해를 맞으며, 『지리산人』 독자들께 특별한 새해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저 날짜 하나 지나가는 것뿐이지만, 우리에겐 흩어지지 않을 희망과 용기가 계속 필요하니까요. 지리산 자락 다섯 개 지역에서 난개발을 막으려고 애써 온 현장 활동가들의 이야기를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구례, 남원, 산청, 하동, 함양에서 무겁지만 가볍게, 가볍지만 무겁게, 길을 내 온 활동가들의 마음을 읽어 주세요. 우리가 서로 마음을 나누는 것으로 새해 복은 넉넉히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지리산人』 드림 [활동가들의 새해편지] 5. 함양에서 싸울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여, 부디 건강하시기를 “지방 소멸 앞당기는 난개발을 그만두라” 경상남도 함양군 병곡면에서 지곡면으로 넘어가는 산길을 따라가다 보면, 작은 마을이 하나 나온다. 이름하여 대광마을이다. 그 마을 초입에 나무 두 개를 기둥 삼아 펼침막이 하나 걸려있다. 펼침막에는 위와 같은 글이 쓰여 있다. 지난 5월까지만 해도 각양각색의 펼침막이 저마다 주장을 담고 여기저기 걸려 있었으나, 지금은 달랑 한 장만 남아 마을을 지키는 장승 같은 느낌을 준다. 빛도 소음도 없는 곳을 찾아 이 글을 쓰는 사람은 도시에서 살다가 오래전에 귀농을 한 사람이다. 쓰기 쉽게 이제부터 ‘농부’라 하겠다. 농부는 도시에서 학교 선생을 하다 여차여차한 사정으로 오래전에 명퇴하고, 농부가 되었다. 농부라 해서 농사만 짓고 사는 사람은 아니다. 젊어서부터 몸이 시원찮아 몸을 붙들고 씨름하다 보니, 몸(병)에 대한 나름의 식견을 갖추게 되어 ‘몸’을 살리는 운동도 보급하고 있다. 대광마을은 농부가 사는 마을이다. 농부가 이곳에 자리 잡은 해는 2007년. 20년이 다 되어간다. 농부가 이곳을 새 삶터로 정한 것은 개발이 되기 어려운 곳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마을이 워낙 깊은 산속에 있는 데다 이렇다 할 풍광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교통이 편리하고 풍광이 좋으면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개발될 가능성이 크다. 농부는 빛도 소음도 없는 곳을 원한다. 조용히 살고 싶은 것이다. 일 년 열두 달 전 국토가 공사판인 나라에서 그런 곳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적어도 농부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개발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그런 곳이 지금 농부가 사는 대광마을이다. 개발 바람에 깨어진 바람, 그리고 전쟁 조용히 살고 싶은 농부의 바람은 지난해, 그러니까 2024년 1월에 끝났다. 1월 하순, 느닷없이 마을이 개발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잇달아 면에서 주민들에게 사업설명을 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이기 무신 일?” 주민들은 어리둥절했다. 급히 마을회의가 열렸다. 마을회의라 해 봐야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의 모임이다. 마을 이장이 먼저 들은 바 있어 그것을 주민들에게 들려주었다. 내용인즉슨, 함양군청이 경상남도에서 시행하는 지방소멸대응기금 공모사업에 대광마을 개발 사업계획서를 내놓아 당첨되었다는 것이다. 사업계획(함양사계포유사업)은 대광마을 일대의 산과 들을 지방정원, 야영장, 첨단농장, 그리고 분양과 임대를 위한 집단 주거지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산 너머에는 골프장도 계획하고 있었다. 목적은 관광객을 불러들이고, 이주민을 늘려 군이 없어지는 것을 막는다는 것이다. 군의 계획대로라면, 사람이 사는 곳을 제외하고 마을 일대의 모든 땅이 관광지와 이주민들의 터가 될 판이었다. 주민의 삶을 챙겨야 할 군청이 해당 지역 주민도 모르게 사업을 벌여 주민의 삶터를 빼앗겠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을에 난리가 났다. 이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주민들은 급히 대책위원회를 만들기로 하고 위원장으로 농부를 뽑았다. 마을 이장이 있으나, 이장이 농부의 가방끈이 길다는 이유로 억지로 떠넘겼다. 열 손가락이면 헤아릴 수 있는 주민을 대표하는 대책위원장이라, 기가 찼다. 당장 위원회를 꾸리는 일부터 쉽지 않았다. 주민 대부분이 나이 많고, 어려운 살림이라, 싸움에 나서기 쉽지 않았다. 상상도 못 했던 싸움에 원치 않는 감투(?)까지 쓴 농부는 걱정이 태산 같았다. 어떻게 이 싸움을 끌고 갈 것인가? 위원장이 된 그날 밤, 농부는 잠도 안 오고 해서 생각나는 대로 싸움 계획을 짰다. 계획은 이러했다. 그나마 주민 중에 싸울 여력이 있는 서너 사람 중심으로 역할을 나누어 맡고, 시민사회단체와 정당의 도움도 받기로 했다. 군수에게 면담 신청도 하고 군 의회를 방문, 군의원들의 도움도 받기로 했다. 마을대책위는 먼저 군수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군수는 면담을 거절했다. 군의회를 방문해 도움을 요청했다. 군의원들은 말로만 돕겠다고 했다. 그들은 사업 예정지인 마을에 와서 현장답사를 하겠다고까지 했지만, 일이 벌어진 지 2년이 다 된 지금까지 코빼기도 내밀지 않고 있다. 군청 담당자들에게 따지기도 여러 차례. 그들은 이미 정해진 사업이라 어쩔 수 없으니 양해하라고만 했다. 시민사회단체의 도움을 받는 것도 싶지 않았다. 단체는 있으나 활동가는 드물고 그나마 나이 많이 들어 큰 도움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런 가운데 다행히 농부와 같은 녹색당 당원인 민영권, 정기용 두 분이 함께 힘을 실어 주었다. 민 선생과 정 선생은 각각 서울과 화성에서 사회운동을 하다가 최근에 귀농했는데, 귀농해서도 자기 사는 지역사회에 관심을 두고 꾸준히 사회운동을 하고 있다. 그 외도 수달 아빠로 알려진 최상두, 서울환경운동연합에서 일하다가 귀농한 마용운 님도 우리 마을 일에 관심을 갖고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들은 대광마을의 ‘함양사계포유사업’ 뿐만 아니라 지리산권 여기저기에서 벌어지는 난개발을 막기 위해 아예 ‘난개발대책위원회’를 만들었다. 난개발대책위원회는 ‘함양시민연대’, ‘지리산사람들’과 같은 기왕의 단체들과 연대하여 ‘난개발’에 맞서 싸우기로 하고, 싸우고 있다. 최소한의 인원으로.^^ 싸우는 기술, 그리고 휴전 몇 안 되는 사람으로 그런대로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기자회견이라, 기자회견을 많이 했다. 기자들이 취재를 제대로 안 하거나 취재해도 보도를 안 해서 서운하기는 했지만. 일주일에 한 번은 군청 앞에 가서 시위도 했다. 아침, 또는 점심때 군청 앞에서 손팻말과 방패 팻말을 들고 매고 시위했다. 군청 직원들은 시위대 앞을 지나갈 때 짐짓 모르는 척했다. 시위할 때는 이동식 소리틀을 들고 가서 노래를 틀었다. 노래는 ‘쾌지나칭칭’을 시위에 맞게 고쳐 쓴 것인데, 마을 사람 중에 소리 가능한 이 모두가 참여하여 만들었다. 인기가 좋았다. 인기가 좋은 만큼 군수는 싫어했다. 농부는 농부의 누리그물망(카톡,밴드 등)에 대광마을 사정을 알리고, ‘함양사계포유사업 반대 서명’을 받아 군청에 제출하기도 했다. 짧은 기간 천 명 넘는 분이 참여해 주어 힘이 되었다. 군수는 계속 만나기를 거부하고, 담당 공무원들은 하던 말 되풀이하고, 군의원은 주민을 대표하는 의원이 아닌 군수의 의원이 되어있고. 결국 법리로 다투기로 했다. ‘지리산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감사원에 감사를 청구했다. (결과는 아직 안 나왔다) 싸움이 일 년 넘게 이어지자 예상한 대로 주민들의 투쟁 동력이 떨어졌다. 분열이 일어났다. 그리고 ‘함양사계포유사업’에도 변화가 있었다. 주민의 투쟁 때문인지, 군청 자체 사정인지 몰라도 군청의 계획이 변했다. 원래 계획했던 사업을 많이 줄였다. 난개발대책위는 전체 일됨새를 놓고 의논한 끝에 알맞은 선에서 군청과 타협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었다. 주민 대책위는 군청 실무자들을 만나 타협안을 냈다. 안은 이랬다. “주민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안을 내놓아라. 그러면 동의 여부를 검토해 보겠다.” 이에 군청이 응하여 새로운 계획안을 가져왔고, 주민들은 그 안을 놓고 생각을 주고받은 끝에 맞장구치기로 하였다. 단, 사업을 해나가는 동안 주민의 민원을 군청이 잘 들어주는 것을 사부주(조건)로. 이렇게 하여 2025년 6월부터 대광마을 주민과 군청은 휴전에 들어갔다. 사업은 진행 중이고 주민은 지켜보고 있다. 지리산과 가까이 산다는 이유로 ‘싸울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늘 빚을 지고 사는 기분이다. 산이 돈이다, 강이 돈이다, 새가 밥 먹여 주나? 하는 사람이 넘쳐나는 세상이 해가 바뀐다고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지리산과 함께 살고자 하는 모든 이가 부디 건강하기를 바란다. 글쓴이 : 신종권(아닌) 전 부산한살림이사장, 전 부마항쟁기념사업회이사, 전 5.18기념재단이사, 전 만세협동조합이사장, 현 대광마을사계포유사업반대대표. <통증보감>이라는 이름의 책과 블로그가 있다. 같은 이름의 유튜브도 있다. 어디든지 아픈 데 있으면 찾아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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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01
  • 보살행 - 람천, 임천 보듬고 살피며 걷기 행동, 후기 두 편
    보살행(람천, 임천 보듬고 살피며 걷기 행동)을 다녀오신 분들의 글을 전합니다. 두 번째 보살행과 세 번째 보살행 이야기입니다. 람천-임천 물이 왜 이렇게 아파하고 있는지에 대한 글은 맨 아래 '관련기사'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보살행 두 번째 걸음 > 11월 8일(토) 9시 30분, 지리산둘레길 인월센터에 20명이 모였습니다. 이날은 양미희샘의 안내로 몸살림 동작으로 몸풀기를 하였어요. 이어서 쓰레기를 줍기 위해 장갑과 쓰레기봉투를 나누어 가졌습니다. 두 번째 걷기 날도 많은 쓰레기를 주웠습니다. 우리의 걸음으로 강과 길과 논과 밭이 조금이나마 깨끗해졌기를 바라봅니다. 우리가 길 걷기에 앞서 ‘자연놀이터 그래’에서 사전답사를 해주셨습니다. 그래 회원님(^^)들께서 함께 해주신 덕분에 준비된 코스를 따라 편안하게 걸을 수 있었어요. 또 그래님들께서는 중간중간 만나는 식물과 동물 친구들에 대해서도 설명해주셨어요. 자주 보지만 잘 몰랐던 식물, 동물에 대해 배우는 시간이 되었답니다. 걸은 지 얼마되지 않아서부터 물에서 냄새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걸을수록 그 냄새는 더 심해졌어요. 천둥오리, 논병아리 등 천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요, 뿌연 물 위에서 노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강 주변으로는 가깝게 혹은 멀게 축사가 정말 많이 있었습니다. 돈사, 우사, 계사 등 종류별로 있었어요. 돼지 축사 바로 옆까지 가서 주변을 관찰해 보기도 했습니다. 폐수가 흘러나오는 곳을 살펴보고, 주변 땅 색깔은 어떠한지 비교해 보기도 했어요. 폐수가 나오는 물길은 시멘트로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이 수로가 시멘트가 아닌 흙으로 되어 있었다면 어느 정도 자연정화가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마을 전체에 분뇨냄새가 진하게 났고, 물은 탁했습니다. 축사에서 흘러나온 물이 강과 만나는 지점에는 거품이 떠 있었고, 강 주변으로는 배추, 사과, 토마토 등이 함부로 버려져 있었습니다. 거름으로 만들어쓰면 될 텐데, 왜 강에다 불법 투기를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설명을 들으니 비료, 퇴비를 저렴하게 보급하기 때문에 농가에서는 더 이상 옛날처럼 힘들게 거름을 만들어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논에서는 커다란 기계가 엄청난 양의 비닐로 짚더미를 둘둘 말아 공룡알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이젠 예전처럼 짚을 논에 넣어 퇴비로 만들지 않는다고 해요. 짚이 돈이 되기 때문에 판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비닐이 엄청나게 사용된다는 것을 목격하고 다들 놀라고 가슴 아려했습니다. 비밀의 정원처럼 어떤 작물이 자라는지 알 수 없는 거대한 비닐하우스도 걷는 내내 볼 수 있었어요. 평지라 걷기 편안한 천변 길은 우리 외엔 걷는 사람을 전혀 볼 수 없었습니다. 정말 이 모습이 우리 농촌의 현실인걸까요?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 홍보관’까지 걷고 홍보관 앞에서 점심도시락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날이 쌀쌀해 신강샘이 준비해주신 컵라면과 커피가 정말 꿀맛이었다는 감탄사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왔습니다. 내가 사는 바로 근처에 유네스코 등재 문화유산이 있는데도 와보지 못하다가 오늘에서야 와 보았다는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가야고분군도 보고 홍보관에서는 관련유물도 보았습니다. 남원에 고분이 무려 100개나 있고, 유곡리, 두락리에만 40개가 있다고 해요. 해설사님의 안내가 있어 더욱 풍성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관람을 마치고 아늑한 홍보관에서 보살행에 참여하신 분들의 소감을 들었습니다. 서로 다른 시선과 생각을 나누는 시간이 또 다른 배움의 시간이 되었기에 공유해 봅니다. 가장 어린 참가자인 자우는 ‘쓰레기 줍기가 재미있었다. 끝말잇기도 재미있었다. 내가 이겼다!’고 소감을 나누어주었어요.^^ - 오늘 걸었던 길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처음 알게 되었다. 오랜만에 많이 걸을 수 있어서 좋았다. 고분군도 한 번 와 보고 싶었는데 덕분에 와 볼 수 있었다. - 축사에서 냄새가 많이 났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산내는 비교적 물이 맑은데, 누런 물이 흘러 나가는 장면을 보니까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변을 시멘트로 벽을 만들어 놓았는데, 풀이 자라게 했으면 물 정화에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 여기를 누가 걸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동네와 좀 떨어져 있기도 하고 냄새도 나서 동네 사람들도 걸을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전북삼천리길’이라는 팻말이 계속 붙어 있었다. 팻말은 작년 말, 올해 초에 설치했다고 하는데 길만 자꾸 만드는 것이 의미가 있나? 있는 것을 손대지 않고 잘 관리하는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 강을 가까이서 보니 오염이 많이 되어 있었다. 강 바로 옆에 축사가 있고 축사에서 나온 물이 슬러지처럼 떠다니기도 해서 건강한 모습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자신의 몸이나 집은 청결하게 유지하려고 하는데 이것이 왜 확장이 안 되는 것일까? 우리가 자연의 일부이고 그것으로 인해 피해를 입을 수도 있을텐데 왜 확장이 안 되는 걸까 하는 질문을 안고 걸었다. 조금씩 이런 이야기들은 해 나가고 싶다. - 차로 다닐 때에는 편안한 시골마을 풍경이었는데 발로 걸어다니니까 이전에 보지 못했던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자료로만 볼 때는 잘 몰랐는데, 이렇게 많은 축사가 물에 폐수를 흘려보내고 있다는 것을 직접 보니 정말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 물이 우리 집 앞을 흐른다는 것을 직접 걷지 않으면 몰랐을 것이다. - 하천들이 다 직선으로 정비가 되어 있었다. 원래 모습대로 구불구불했으면 수생식물들도 자라고 자연적인 정화도 더 잘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직선화했던 나라들 중에도 다시 그것을 부수고 예전모습대로 회복시키는 경우가 많다. 우리도 그렇게 가야하지 않을까? 중간중간 농업용수로 쓰기 위해 만들어 놓은 작은 보가 굉장히 많던데 지금은 역할을 거의 안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보들을 다 없애버리면 좀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번째 보살행도 함께 해요! 보살행 첫번째 걸음에서는 소수력발전소가 강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고 대정리 합수지점에서 맑은 물과 오염된 물의 차이를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두번째 걸음에서는 축사가 물과 삶터에 미치는 영향을 진하게 경험할 수 있었어요. 수많은 비닐하우스를 보며 우리 농촌마을의 풍경은 어떠해야할까?를 고민하게 하기도 했구요. 세번째 걸음에서는 어떤 모습을 보고, 또 어떤 고민을 하게 될까요? 조금 울적한 모습을 보게되긴하지만 이상하게도 내 발로 꼭꼭 밟으며 걸은만큼 마을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는 것 같아요. 세번째 보살행은 운봉지역을 걸어요. 2000년에 '아름다운 숲 대회'에서 대상을 차지한 '서어나무숲'도 갑니다. 서어나무숲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약200년 전에 조성한 인공숲이라고 해요. 숲해설사님을 모시고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예정입니다. 그리고 이 날, 이야기손님을 모시고 '동학이야기'도 듣습니다. 내가 사는 마을의 시공간과 더 깊이 연결될 수 있는 멋진 시간이 될 것 같아요?! ^^ < 보살행 세 번째 걸음 > 11/22(토), 아침 기온은 차지만 파란 하늘과 햇살이 좋은 날이었습니다. 오늘은 운봉 서어나무 숲에서 황산대첩비지까지 근 8km 를 걷는 여정이었습니다. 이번 보살행엔 특별히 완주에서 온 전북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김상윤님, 서천에서 오랫동안 환경운동을 해 온 여길욱님, 구례에서 온 <지리산사람들> 정정환님이 함께 했습니다. 첫출발지인 서어나무 숲에서 정계임님의 고향사랑을 담아 설명을 들었습니다. 정계임님이 어렸을땐 훨씬 숲이 크고 마을 아이들이 뛰노는 자연 놀이터였데요. 그 뒤 사람들이 무분별하게 이용하고, 주위 밭을 만드느라 주변 지대가 높아지고, 흐르던 천도 오염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남았답니다. 하지만 여전히 국가산림문화자산으로 지정되어 보호될 정도로 독특하고 소중한 숲이랍니다. 숲 해설이 끝나니 수달아빠님이 방송 카메라와 함께 등장했어요!?! 보살행이 수달아빠를 주인공으로 해서 <6시 내고향>에 나온다네요. 하루종일 방송카메라와 인터뷰에 응대하며 분주하게 걸었어요. 손수 만든 몸자보를 가방에 붙이고 걷기 시작했습니다. 서림공원까지 걸으며 보니 그래도 둘레길코스라 나름 정비가 잘 돼 있어서 지난 보살행때 보다는 천이 맑아 보였고 냄새도 덜 났어요. 물론 바람 방향에 따라 중간중간 양계장 냄새가 나긴 했지만요. 천에서 자유로이 노니는 청둥오리, 흰빰검둥오리, 논병아리, 가마우지, 물닭 등등을 만났어요. 중간엔 전선줄에 나란히 앉았다 날아오르는 철새 떼까마귀도 봤습니다. 까마귀는 다 텃새인줄 알았는데 철새도 있다니!?! 정정환씨가 좋은 망원경을 가져와서 보여 주고 자세히 설명도 해주셔서 흥미로웠습니다. 곧 정정환씨의 책도 나온다니 기대가 됩니다. 서림공원에서 점심을 먹고 갑오토비 사적비 앞에서 신강님에게, 동학농민항쟁때 박봉양이 민보군을 일으켜 동학군을 퇴치한 사건에 대해 들었어요. 부농이었던 양반계급이 동학농민군과 일제에 대해 모순적 입장을 취했다는 설명을 들으니 비애감 같은 게 들었어요. 덧붙여 실상사에 있는 것과 비슷한 두개의 석장승(방어&진서)에 대해서도 들었는데, 원래 장승이 아니라 ‘벅수’라고 불러야 한다네요. 신강님은 겉으론 헐렁해 보여도 참 아는 게 많고 깊이도 있는 진짜배기에요. 설명 후 두번째 코스를 걷기 시작했어요. 점차 갈수록 천은 탁해지고, 수초 옆으로 녹조류가 보였습니다. 생활하수(음식물 쓰레기), 축사의 폐수 등이 원인이었습니다. 지난 아영때와는 달리 운봉은 지대가 넓어서 축사는 하천 가까이에 있기 보다는 멀찍히 떨어져서 오히려 훨씬 대형으로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천 가까이에는 거의 건축물에 가까운 대형 하우스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어요. 파프리카와 딸기 등을 재배한다고 합니다. 목적지인 황산대첩비지에 도착해서 해설사님의 설명을 들었어요.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구를 섬멸한 기록을 선조때 비로 세웠고, 일제때 비를 깨부수고 기록을 긁어냈답니다. 1963년에 사적으로 지정된 뒤 깨진 거북돌을 다시 맞추고 오석(烏石)으로 비신을 다시 세웠답니다. 참가자들 일부의 소감만 정리하자면, 람천-임천 살피기에, 탐조활동에, 역사해설에, 쓰레기 줍기에, 방송 촬영 협조까지 하느라 정신없이 바빴지만 유익하고 알찬 시간이었고, 천이 점점 더러워지는 모습을 보고 걷고 있자니 속상하고 안타까웠으며, 10년전에 예산을 들여 제방공사를 한다고 시멘트로 다 발랐으나 결국 천이 흐르며 다시 수초가 자라고 구불구불 원래의 모습을 찾아가는 걸 보면, 인위적인 작업보다 하천은 자연 그대로 두는 게 좋겠다. 등등 입니다. 그럼, 다음 보살행을 기대하며 이만 끝! 람천-임천 물 살리기에 함께하는 마음으로, 지리산 살래장 밴드에 보살행 후기를 올려 주신 '세연정'(두 번째 보살행 후기) 님과 '날개'(세 번째 보살행 후기) 님의 글을 옮겨 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지리산인 드림
    • 고을이야기
    • 남원
    2025-12-05
  • 지리산권 담수보 추진 중단하라!!!
    산불이후 난개발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산불이 번지고 있을때는 '임도'와 '숲가꾸기'가 지속적으로 나왔고 지금은 잠시 주춤해 있는 상황이지만 저 지하에서는 현재 더 많은 임도와 더 많은 숲가꾸기를 추진하려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숲을 이용의 대상이 아닌 숲은 생명의 공간이며 생명을 지켜주는 공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생명다양성이 풍부한 숲은 사람의 삶 터도 지켜준다는 것을 이번 산불에서 확인되었지만 기득권은 그 사실을 들으려 하지 않고 자식의 이익을 위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10월 19일 산과 숲을 파괴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 강까지 파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함양군과 산청군의 요청으로 경남도에서 소방용수 공급을 위한 담수보를 추진하겠다는 보도자료를 베포하였습니다. 그래서 지리산사람들과 지리산지키기연석회의, 경남환경운동연합은 긴급 기자회견을 진행하였습니다. 기자회견 후 경남도와의 면담에서 경남도는 '담수보 신설이 아닌 기존 낡은 보를 철거하고 가동보로 교체하는 것이다.'라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함양군과 산청군은 무슨 근거로 담수보 신설이라며 호도하고 나섰던 것인지 의문입니다. 아래는 기자회견문 전문입니다. [기자회견문] 지리산댐의 망령을 되살리려는가? 지리산권 담수보 추진 중단하라!!! 경상남도가 19일 보도자료를 통해 지리산 권역의 산청·함양 일대에 산불 대응용 다기능 담수보를 추진한다고 밝혔다. 해당 지역인 덕천강과 임천은 멸종위기 야생생물의 보고이자 지리산 상류 수생태계를 대표하는 하천이다. 재난대응, 수자원관리, 생태보전의 명목 아래 전혀 생태적이지도 관리되지도 않는 담수보 설치가 추진되고 있어 지역사회에 논란이 되고 있다. 이 사업은 지역사회의 협의 없이 생태적으로 건강한 하천을 인위적으로 막아 훼손하는 불필요한 공사이다. 생명의 강을 단순하게 홍수가 나면 ‘재해복구’, 산불이 나면 ‘소방용수’ 공급원으로, 토목사업의 대상으로만 보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지리산댐의 망령’을 다시 되살리는 정책 이번 사업은 과거 ‘지리산댐’ 추진 때와 다를 바 없다. 지리산댐과 규모는 다르다하지만 강의 생태적 근간을 훼손하는 것은 동일하다. 추가적인 공사나 다른 토목사업으로 변질되어 지역사회를 위협할 수도 있다. 지난 수십 년을 지리산댐 건설 추진으로 고통받았던 우리 지역사회는 강의 흐름을 영구히 바꿀 콘크리트 구조물이 아니라, 강의 생명과 자연스러운 흐름을 지키고, 또 물려주고 싶다. 소방용수 공급은 이미 충분한 상태 함양과 산청 일대에는 다수의 저수지, 농업용 댐, 소형 저수지가 존재한다. 2025년 3월 지리산 산불 당시에도 소방헬기는 하천의 자연 유수지와 저수지의 물로 진화작업을 수행했다. 이런 현황을 무시하고 담수보를 설치하는 것은 불필요한 중복사업이자 세금낭비에 불과하다. 산불 대응에는 ‘보’가 아니라 이동식 펌프, 저수지 급수장, 산림 내 간이 수조 등 효율적 용수공급체계가 훨씬 현실적이다. 산불 대응을 위한 합리적인 판단과 정책 결정이 시급한 이 시기에 조급하게 지역사회를 논란에 빠뜨리는 '보' 사업은 당장 중단해야 한다. 주민 동의 없는 일방적 추진 이 사업은 지역 주민의 공론화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지금은 산불로 인한 재난복구라는 중차대한 시기이다. 단순히 행정 편의의 관점에서 강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강은 지역 주민과 자연이 공유하는 공공재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행정은 토목업체의 경제 논리에 따를 게 아니라 생태적 가치와 민주적 절차를 따라야 한다. 멸종위기 생물의 보고, 덕천강과 임천 이 지역은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 야생생물인 여울마자, 큰줄납자루, 얼룩새코미꾸리 등의의 핵심 서식지이다. 이들 생물들 중에는 국제사회에서 권고한 IUCN 적색목록 생물도 포함되어 있다. 담수보 설치로 강의 유속이 느려지면 퇴적·부영양화가 가속되고 하천의 홍수 위험이 증가할뿐만 아니라, 멸종위기 야생생물의 서식지 파괴로 이어진다. 한마디로 국가 보호종의 생명을 위협하는 행위이자 국제사회의 지탄을 받을 일인 것이다. ‘다기능’이라는 이름의 허구 경상남도는 ‘재난대응·수자원관리·생태보전’을 동시에 달성한다고 주장한다. 강에 보를 설치하는 순간 자연 하천은 인공 저수지로 전락한다. ‘친환경 공법’이라 주장하지만, 강을 막는 그 행위 자체가 이미 비친환경적이다. 홍수기에는 개방형이라 하지만, 하천과 불과 1~2m 높이의 도로와 마을의 홍수 위험성은 어떻게 예방할 수 있을 것인가? 겨울철 건기에는 결국 물을 가두어 강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차단하는 생태훼손을 어떻게 생태보전이라 할 수 있나?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물’이 아니라 ‘흐름’이다 하천은 살아있는 생명체이다. 물을 가두는 콘크리트가 아니라, 자연의 흐름이 강의 본질이다. 지금은 강을 통제하는 시대가 아니다. 지금은 강과 공존하는 시대로 가야 한다. 지리산의 강은 단순한 강이 아니라 수많은 생명의 터전이자, 우리 모두의 자연유산이다. 우리가 지키고 물려주어야 할 것은 ‘가둔 물’이 아니라 ‘흐르는 생명의 강’이다. 경상남도는 지리산댐의 망령을 되살리려는가? 지리산의 강을 토목 실험장으로 만들지 말고, 지금 당장 지리산권 담수보 추진을 중단하라. 우리는 지리산권의 모든 생명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1. 산청·함양 담수보 설치 계획을 즉각 중단하라. 2. 지역 주민·전문가·환경단체가 참여하는 공론화 절차를 마련하라. 3. 기존 댐·저수지·하천 저류지를 활용한 대체 용수체계 구축 방안을 검토하라. 2025. 10. 23.
    • 고을이야기
    • 산청
    2025-10-28
  • 기억되지 못한 이장, 김길동
    오늘 나는 김길동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그는 1916년 경남 함양군 휴천면 문정리 문하마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1959년 5월 10일 생을 마쳤다. 내가 그에 대해 처음 들은 건, 지리산종교연대가 사단법인 숲길과 공동 주관해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에서 진행했던 <지리산생명평화기도회>에서였다. 그날 성염 선생님(전 로마 교황청 대사)은 “우리 마을에 조그만 공덕비가 있어요. 학살사건 때 동네 사람들을 전부 살렸어요.”라고 말씀하셨다. 장마가 막 시작된 날이었다. 그날 이후 ‘김길동’이라는 이름이 자주 떠올랐다.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 그래서 어떻게 살아갔는지가 궁금해졌다. 그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 『지리산인』 (편집장 김인호) 편집위원들과 함께 문하마을을 찾아가 성염 선생님과 전순란 선생님을 만났다. 그날 역시 장맛비가 내렸다. ↑성염 선생님 집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지리산인』 편집위원들 문하마을은 법화산 자락에 자리해 지리산을 바라보고 있고, 앞으로는 엄천강이 흐른다. 내가 이곳을 처음 찾은 것은 2000년대 초반이다. 초등학교 아이들과 지리산을 종주한 뒤 실상사에 들러 도법스님을 뵙고, 마을청년회가 폐교를 고쳐 운영하던 숙소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 뒤로도 성염 선생님을 뵙기 위해 몇 차례 더 찾아왔기에, 문하마을은 내게 낯설지 않다. 올 때마다 하늘에는 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있던 기억이 남아 있다. ↑하늘에서 바라본 엄천강과 문하마을 문하마을 뒷산에는 고려 말 충신 이억년의 묘가 있다. 성염 선생님은 마을 이름의 연원을 이렇게 설명했다. “고려 말 나라가 망하자 이백년, 이억년 같은 분들이 지리산으로 들어와 이 부근에 살았지요. 그래서 산골임에도 ‘문하(文下)’라는 이름이 붙은 겁니다.” 그 말처럼, 문하마을은 예로부터 바른 길을 지키며, 함께 살아가는 가치를 소중히 여겨온 곳으로 전해져 왔다. 성염 선생님의 집은 마을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해 지리산이 한눈에 펼쳐졌다. 그곳에서 우리는 김길동 이장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성염 선생님은 마을에 살았던, 이제 아흔을 훌쩍 넘긴 아주머니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했다. ↑논과 숲으로 둘러싸인 문하마을 이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그가 이장을 맡았던 1950년대 전후 지리산 자락에서 벌어진 일을 알아야 한다. 1951년 초, 산청·함양 일대에서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 국군은 빨치산을 도왔다는 이유로 주민들을 모아 총살했는데, 아이와 노인, 여성도 예외가 아니었다. 공식 기록만으로도 천 명이 넘는 희생자가 있었다. 전쟁 속에서 적이 아닌 자기 나라 주민이 군의 총에 쓰러진 사건이었다. 추모공원이 세워졌지만, 가족을 잃은 이들에게 그날의 상처는 여전히 생생하다. “김길동이라는 분은 당시 이장이었어요. 군인들이 ‘집에 사람이 있으면 모두 죽인다’고 해서, 중풍 걸린 시아버지를 업고 나온 며느리도 있었다고 하지요. 그날 군인들이 기관총 앞에 주민들을 세워 놓고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이장이 달려가 ‘왜 사람들을 죽이냐’며 항의하며 막아섰답니다. 목숨 걸고 총구 앞에서 버틴 겁니다. 그 덕분에 마을 사람들은 살 수 있었어요. 바로 아래 한남마을부터는 100여 명씩 세워놓고, 이장이 손가락질하면 아기든 노인이든 끌려가 총살을 당했지요. 산청·함양 추모공원에 가보면 약 1,300명의 희생자가 기록돼 있습니다. 그중 7세 이하 아이들까지 ‘공비’라 불리며 죽임을 당했고, 그걸로 훈장을 받은 사람도 있었어요.” 그 시절에 토박이가 아닌 사람이 이장이 되었다는 점은 놀라웠다. 그가 문하마을에서 태어났지만 집안의 뿌리가 순창이라, 어떻게 이장이 될 수 있었는지 궁금해하자, 전순란 선생님은 잠시 생각하더니 “아랫집 정 선생도 몇 차례 출마했지만, 토박이가 아니라는 이유로 뽑히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35년을 살아도 여전히 외지인으로 불릴 만큼, 마을에서는 토박이가 아니면 이장이 되기 어려운 분위기라고 덧붙였다. 이에 박두규 시인은, “아마도 인품과 생활 속 태도로 마을 사람들의 신뢰를 얻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보탰다. 전순란 선생님은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장이 그렇게 큰소리를 치며 막아설 수 있었던 데에는 이유가 있어요. 군인들이 들어오기 전날, 소를 잡아 장교들에게 대접하면서 ‘우리 마을은 죄 없는 사람들이니 그냥 지나쳐 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 후에도 평생 마을을 위해 힘썼지요.” 전순란 선생님의 말대로, 그는 한평생 마을을 위해 헌신했다. 장사로 번 돈으로 땅을 사서 마을에 기증하며, “내가 평생 여기서 살았으니 마을 사람들에게 남긴다"고 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정작 마을 사람 누구도 김길동 이장의 이야기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제는 그를 기억하는 이도 거의 없다. 마을 입구의 비석만이 그가 살았음을 전해준다. 나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왜 마을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이야기하지 않는 걸까. 이 질문에 대해 성염 선생님은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셨다. “그 무렵 지리산은 빨치산 토벌 작전이 이어지던 지역이었습니다. 주민들은 낮에는 군인들의 검문과 의심을, 밤에는 산에서 내려온 무장대의 요구를 동시에 겪어야 했습니다. 어느 쪽에도 피해를 입을 수 있었기에 말조심과 침묵이 일상이 되었고, 마을은 늘 불안 속에 살았습니다. 지리산은 아름다웠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전쟁과 두려움의 공간이었지요. 그래서 주민들 마음엔 늘 복잡한 두 감정이 공존했습니다. 부모·조부모가 살아남았다는 고마움, 그러나 동시에 ‘빨갱이를 살린 빨갱이’라는 낙인이 남아 있었던 겁니다.” “빨갱이를 살린 빨갱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빨치산들이 와서 쌀 보급해가고, 지리산 골짜기마다 아지트가 있었거든요. 백무동의 ‘하동바위’ 부근에 빨치산 본부가 있었고, 그 근처에서 토벌대와 교전이 벌어졌어요. 그래서 주민들 인식 속에는 ‘빨갱이가 산 곳, 빨갱이가 드나든 곳’이라는 기억이 남아 있는 겁니다. 결국 부모가 살아났음에도, 의식 속에서는 ‘빨갱이 마을’이라는 딱지가 붙은 거죠. 김길동 이장은 문하마을에서 태어났지만, 집안의 뿌리가 전라도여서 외지인 취급을 받았고, 낙인도 더 무겁게 작용했습니다.”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은 어떤 사람에게 붙은 꼬리표가 그 사람의 다른 면모를 가려버릴 때, 그것을 ‘낙인’이라 불렀다. 김길동 이장은 마을을 살린 이장이었지만, 동시에 ‘빨갱이를 살린 사람’이라는 딱지를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기억에서 멀어졌고, 이야기는 쉽게 입에 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염 선생님은 그를 ‘의인’이라 불렀다. 잊힌 이름 뒤에 가려진 그의 용기와 희생이야말로 마을 사람들을 살린 힘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이 잊힌 이유는 단지 과거의 문제가 아니었다. 전쟁의 상처는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았다. 성염 선생님은 버스에서 만난 한 노인의 술기운 섞인 고백을 통해, 그 기억이 여전히 사람들 마음속에 남아 있음을 전해주었다. 그리고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작은 비석만이 그날의 이야기를 짧게 기록하고 있다. “1951년 2월 8일, 군인들이 주민들을 집결시켜 총을 겨누자, 김길동 이장은 웃옷을 벗어던지며 ‘죄가 있다면 나를 죽이라, 무고한 주민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그의 호소 덕분에 주민들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마을 입구의 김길동 이장 비석 김길동 이장은 본디 이곳 사람이 아니라는 한계를 넘어 마을의 신뢰를 얻었고, 목숨을 걸고 주민들을 지켜냈다. 그러나 전쟁의 시대는 그의 공적에 영광 대신 낙인을 남겼다. 그의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일은 한 사람의 행적을 기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전쟁의 폭력과 그 속에서 잊힌 용기를 직면하는 일이자, 우리가 어떤 역사를 기억하고 이어가야 하는지를 되묻게 한다. 사진_ 김인호 편집장
    • 사람이야기
    2025-09-18
  • 2025 세계 수달의 날 "제4회 수달의 아우성"에 함께해 주세요
    지리산인 독자 여러분, 지리산을 사랑하는 분들, 강의 연대에도 함께해 주세요. 생명의 연대가 필요합니다. 지역 학교와 단체, 개인 모두 환영합니다. 2025년 5월 27일(화) 14시 ~ 28일(수) 10시 경남 함양군 휴천면 천왕봉로 2257-2 지리산리조트
    • 고을이야기
    • 함양
    2025-05-21
  • [지리산자락책방] 함양의 온도를 올리는 동네서점 “오후공책”
    사월 말이었다. 수달래가 예쁘게 피던 날이었다. 함양의 오후공책을 찾아가고 있다. 오후공책은 23년 4월에 문을 연 함양의 작은 책방이다. 같은 협동조합에 속한 세 사람이 함께 운영하고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따스한 사월의 오후 햇살 같은 미소를 가진 책방지기 두 분이 반갑게 인사를 해준다. “안녕하세요” “네” “반갑습니다.” 우리는 책방 안에 있는 4인용 테이블에 모여 앉았다. 조영선 대표는 출장 중이었고, 김현임 님과 정은경 님이 책방을 지키고 있었다. 오후공책? 이름이 재밌네요. 어떤 뜻인가요? > 처음에는 함양의 귀촌한 사람들이 모여서 책 읽기 모임에서 시작했어요. 매주 한 번씩 만나 책 읽기 모임을 했죠. 함께 책을 읽다 보니 친해지게 되었고, 함께 죽이 잘 맞아 책 모임을 1년 정도 하게 되었어요. 책이라는 주제로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서점을 한번 해 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렇게 함께 서점을 준비하면서 협동조합 “오늘”을 만들게 되었죠. 오후공책(5 Who 함께하는 책방)은 협동조합 “오늘”에서 운영하는 독립 서점입니다. 협동조합 오늘,은 삶에 문화, 예술, 놀이, 철학과 가치가 스며들기를 바라며 생활 속 여러 가지 실험을 해 보고자 뭉쳤습니다. 책방은 실험을 위한 꿈의 아지트이며, 책, 먹거리, 예술, 놀이 등의 다양한 활동을 도구 삼아 환경, 교육, 성찰, 치유의 바다를 항해할까 합니다. 이곳에 오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함양이라는 산골 작은 읍에서 그것도 작은 책방으로 살아남는 것은 어려울 것 같은데요. 2년이나 지났으니 어느 정도 안정이 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 네. 맞아요. 서점이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곳은 아니죠. 그렇다고 아무런 수익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또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어요. 도서관에 책을 납품하거나 최근에는 지역서점 희망도서 바로대출 같은 일도 하고 있습니다. 희망도서 바로대출은 어떤 사업인가요? > 도서관에 책이 없는 경우 도서관에 책을 신청하고 내가 지정한 서점에서 그 책을 읽을 수 있는 서비스입니다. 읽고 싶은 책을 지역서점에서 빌려 보고 반납도 할 수 있어요. 정부에서 이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책방에 보조금을 주기도 해서 작은 서점을 운영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또 저희가 서점을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행사를 하고 있고요. 지금 책 모임 다섯 개 등산 모임과 바느질 모임까지 운영하고 있죠. 저희가 처음 생각했던 책이라는 주제로 지역 문화를 만들어 가는 일이기도 합니다. 책 이야기 마당이나 음악 주제로 모임을 하기도 하고요. 책방에서 책을 읽고 계신가요. 책방에서 글을 쓰고 계신가요. 책방에서 바느질을 하고 계신가요. 책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계신가요. 자, 이제는 산에도 가보실래요? 오후공책은 다양한 활동을 통해 지역 주민들과 함께하고 있네요. > 다양한 일을 만들어 지역 사람들이 함께하는 공간으로 만들어 가고 싶거든요. 다행히 서로 죽이 잘 맞다 보니 이런저런 아이디어가 생각나면 함께 이야기하고, 그렇게 하다 보면 또 일이 하나 늘어나고 하는 식입니다. 올해는 책 문화제도 해 볼 생각이에요. 책 문화제는 어떤 일인가요? > 김현임(김) : 함양의 작은 서점이 두 곳이 있어요. 그림책을 주제로 하는 그림 책방 “퐁당”이라는 곳이 하나 더 있는데 올해가 그림책의 해라서 그림책을 주제로 체험도 하고 그림책을 보고 함께할 수 있는 것을 해 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오후공책과 퐁당이 멀지 않아서 가는 길에 책이 있는 거리 같은 것을 해 보면 좋을 것 같아 지금 기획 중입니다. 책방은 모두가 아는 사양 사업 중 하나잖아요. 많이 없어지기도 하는데 사실 창업자도 꾸준하게 증가하고 있거든요. 책방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뭘까요? > 정은경(정) : 저희가 책방 창업을 준비하면서 다른 책방을 방문하기도 했어요. 그리고 책방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인터뷰도 봤거든요. 그런데 서울에 있는 인문학 교수님이 운영하는 인문학 책방 대표님 이야기를 보니 종일 아무도 오지 않는 날이 며칠 이어진 경우도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도 저희는 책이 한 권도 팔리지 않은 일도 있었지만 아무도 오지 않는 날은 거의 없었어요. 사람이 없으면 여기저기 전화도 합니다. 저희가 처음 책방이라는 공간을 생각했을 때도 성공을 바라지는 않았거든요. _김현임 책방지기 책방을 운영하는 일은 재밌나요? 책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 책방을 한번 해 보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꽤 있지만 실행에 옮기는 사람은 거의 없잖아요. 누가 봐도 책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기는 힘들어 보이거든요. > 정 : 음. 사실 힘들고 지치는 날도 있어요. 하지만 지금까지 즐겁지 않은 날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날은 손님이 거의 없는 날도 있거든요. 그런 날은 제가 책을 좋아해서 손님이 없다면 책을 읽어도 좋다고 생각해요. 사실 책을 많이 읽기도 해서 손님이 없는 날도 나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그리고 손님이 없어도 바쁜 일이 많아요. > 김 : 저희가 처음 책방이라는 공간을 생각했을 때도 성공을 바라지는 않았거든요. 아마 시골 책방 문을 열면서 책방으로 집 한 채 마련해야지, 이런 마음 가진 사람은 없으니까요. 다들 이런 점은 공유된 상태였어요. 그래도 책방을 유지하고 일하는 사람들이 최저 인건비 정도는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 정도는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 정 : 사실 조금 조용하게 살고 싶은데 너무 활발해진 것 같기도 해요. 처음 시골에 내려왔을 때는 번잡하지 않게 조용히 살고 싶다고 생각하잖아요. 도시에서 바쁘게 살았으니 이제 좀 조용하게 살고 싶었는데 서점을 하면서 재밌는 일을 자꾸 하고 싶고 책방을 찾아오는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어요. 좋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혼자만의 시간은 없어서 약간 아쉽기도 해요. 그래서 짧은 시간이라도 혼자 있거나 숲을 걷거나 합니다. 나를 찾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전혀 힘들지 않다고 하면 좀 그럴 수도 있는데 책방을 운영하는 것이 재밌어요. 재미가 없다면 못 할 것 같아요. _정은경 책방지기 운영 시간은 어떤가요? 오후공책이니까 오후에만 운영하나요? > 오전 10시에서 오후 6시까지 운영하고 있어요. 처음 시작했을 때는 오후 8시까지 운영했는데 6시 이후에는 손님이 거의 없더라고요. 저희도 사실 오후에 좀 여유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 오전 10시에서 오후 6시까지 운영하는 것으로 바꾸었어요. 그랬더니 몇몇 손님들이 오후에 열지 않아서 아쉽다고 말하기도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런 손님들은 주말에 다시 오시기도 합니다. 저희는 주말에도 쉬지 않고 문을 열고 있거든요. 사실 추석이나 설 명절을 제하고는 매일 문을 열고 있어요. 저희 서점은 세 명이 운영하고 있어 가능하거든요. 일주일에 한 사람이 2번에서 3번 정도 나오면 되니까요. 뭐 함께할 일이 있으면 모두가 출동하기는 합니다만.... 힘들지는 않나요. > 정 : 전혀 힘들지 않다고 하면 좀 그럴 수도 있는데 책방을 운영하는 것이 재밌어요. 재미가 없다면 못 할 것 같아요. 아직은 뭐 할 만하고 좋아요. (책 외에도 음료와 의미 있는 상품들을 판매하고 있다.) 많은 책방이 책보다는 음료 판매나 기타 수익이 더 많은 경우가 있던데 오후공책은 어떤가요? > 정 : 함양에서 책을 구매하는 분들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주말에 여행을 오시는 분들이 책을 구매하는 편입니다. 월 150에서 200권 정도가 판매돼요. 우리 책방에 책이 천 권 정도가 있어요. 공공기관에 납품하고 있기도 하고요. 저자와의 만남 같은 행사를 통해서 책을 판매하기도 하고 프리마켓에서 책을 팔기도 합니다. 책을 판매하기 위해 분투 중이시네요. > 김 : 책방이니까 책 판매가 주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밖에서 보면 한가롭게 책방을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주 열심히 발을 동동거리고 있다고 봐야겠죠. 오후공책만의 책 선별 기준이 있을까요? 공간이 크지 않다 보니 진열 공간도 부족할 것 같고요. 각자의 취향이나 판매도 해야 하니까요. > 정 : 음… 세 명이 한 책장씩 선별한다고 보면 될 것 같아요. 소설을 좋아하는 책방지기가 선택한 곳도 있고, 환경이나 에세이를 좋아해서 그런 책을 선택하기도 하고요. 그림책을 좋아하는 책방지기가 고른 책도 있고요. 팔릴 만한 책을 선택한 것도 있지만 어쨌든 운영하는 세 명의 취향이 담긴 책들이죠. 팔릴 만한 책과 취향과의 마찰이 있기는 해요. 책은 문화이자 상품이니까요. 독립 출판사들의 책도 많은데 독립 출판사 책은 잘 팔리지 않더라고요. 그래도 한 번씩 구매해 주는 사람이 참 고맙다는 생각이 들어요. 1년에 3번 정도 안 팔리는 책들은 반품하는데요. 반품하면 대부분 폐기가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가능하면 최대한 팔아 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책에 대한 예의라고 할까요! > 김 : 제가 서점을 시작한 이후에 여행을 가면 지역 서점들을 많이 찾거든요. 책방에 들어서면 그 책방지기의 취향이 알겠더라고요. 책방이 없는 곳도 있는데 그런 곳은 왠지 모르게 삭막해 보이고 차가워 보여요. 그런 의미에서 오후공책은 함양의 온도를 2도 정도는 올려 주고 있다고 봐도 되겠네요. 저에게 추천할 만한 책도 있을까요? > 정 : 저는 김금희 작가의 <대온실 수리보고서>를 추천해요. 최근에 김금희 작가에게 푹 빠져 있는데, <나의 폴라 일지>라는 에세이 추천해요. 기회가 있다면 읽어 보세요. 책방을 창업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추천하시겠어요. 저도 책을 좋아해서 서점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거든요. 대학 때 후배 한 명이 선배는 어떻게 살고 싶냐고 물어본 적이 있어요. 그래서 책방 해 볼까 한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거든요. 그런데 못하고 있네요. > 두 분 모두 : 누군가 하고 싶다면 해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매력이 있는 일이니까요. 수익은 보장이 안 되지만요. 그래도 역시 좋은 일이에요. 하고 싶은 일이라면 해보고 후회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고 저희는 사실 아직은 만족하고 있거든요. (책방을 짓는 과정 ) 오후공책도 음료를 판매하시는데 수익은 어떤가요? > 매출은 책이 많은 편이지만 책은 이윤이 많지 않으니까 음료 판매가 아무래도 수익은 더 많은 편이기는 해요. 하지만 그 차이가 아주 크지는 않아요. 거의 반반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그래도 저희는 책이 중요하고 책을 고르거나 읽는 데 신경이 쓰이지 않도록 믹서기를 사용하지는 않아요. 그래서 드립커피만 제공하고 있어요. 맞아요. 요즘 카페에 가면 얼음 가는 소리가 아주 크게 들리기는 하더라고요. > 그래서 오후공책은 믹서기 사용하지 않고 있어요. 그리고 지역과 함께하기 위해 만드는 음료나 식자재들은 가능하면 지역 농산물을 이용합니다. 지역의 딸기를 사용해서 딸기 음료를 만들고 지역의 생강으로 생강 음료를 제공하고 있어요. 많이 사용하지 않더라도 그 마음이 중요하죠. 그 외에도 비닐 없는 책방, 숍인숍으로 제로웨이스트 상품 같은 것을 판매하기도 해요. 액체세제 리필스테이션을 운영 합니다. 여러 가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싶어요. 책방이나 책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요? 요즘 책 읽는 사람들이 정말 없잖아요. 제가 보기엔 가장 책을 많이 읽는 나이는 가장 어린 나이 때일 것 같아요.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님들이 그림책을 정말 많이 읽어 주잖아요. 그러다가 점점 아이가 크면 책이 학습지가 되고 또 문제집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면 책을 읽고 있으면 공부하지 않는다고 꾸지람을 듣기도 하고요. > 김 : 세상의 변화가 너무 빠르고 접하는 소식도 그렇고 사람에 대한 관심도 빨리 생기고 식는 것 같아요.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책을 읽는 속도는 변하지 않는 것 같거든요. 저는 책을 읽는 속도가 다른 인간에게 적절한 속도라고 생각해요. 하루하루가 너무 정신없이 지나가고 나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엇을 해야 할지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책 읽는 속도로 살면 좋지 않겠느냐고 생각하게 됩니다. 저에게 초등학생 딸이 있는데 만화책이라도 읽으면서 뒹굴뒹굴하는 여유를 주는 것이 책 때문에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요즘 문제가 되는 문해력도 결국 책을 많이 읽지 않아 생기는 문제이기도 하고요. > 정 : 저는 책을 읽는 이유가 좀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해요. 책을 읽고 있으면 좀 더 나은 사람, 좀 더 좋은 사람이 되어 간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요즘 같은 인공지능 시대에도 여전히 책은 남아 있을 것 같습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으니까요. 그것은 인공지능이 채워 주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책을 좋아하는 인간은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는 희망이 있어요. 주류는 못되겠지만 아웃사이더로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어요. 나른한 오후에 햇살이 책방을 비추고 있었다. 책과 책방이라는 주제로 수다를 떨다 보니 인터뷰라기보다는 책에 대한 사랑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 된 것 같다. 함양에서 작은 지역 책방으로 오랫동안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방이 있다면, 그 마을엔 온기가 깃든다.” 서점 하나 없는 곳은 어쩐지 삭막한 느낌이 든다. 오래전 읽은 책 속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너는 어떻게 살고 싶니?” 한참을 머뭇거리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따스한 햇살 아래, 책을 읽으며 살고 싶어.” 사월의 오후의 햇살이 오후공책에 따스하게 들어왔다. 그 안에는 마음이 지칠 때, 세상을 이해할 수 없을 때, 혹은 그냥 조용히 무언가가 그리울 때, 따뜻한 음료와 책이 함께 위로를 건네는 작은 책방이 있다. 그곳에는 책을 사랑하는 이들을 정성껏 맞이하는 책방지기가 있고, 한 권의 책을 통해 마음을 건네는 책이 있었다. 책이 그리운 날, 혹은 햇살 좋은 날, 책방으로 여행을 가고 싶은 날 향기로운 음료 한 잔과 함께 조용한 책이 있는 공간을 찾는다면 함양의 ‘오후공책’을 찾아가 보는 건 어떨까. 책과 햇살, 그리고 사람이 어우러진 그곳에서, 당신도 분명, 마음 한편이 따뜻해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오후공책 책방 여는 시간 오전 10시에서 오후 6시 추석과 설날을 빼고 매일 오픈 함양읍 한들로 67번지 글 조태용 사진 김인호
    • 사람이야기
    2025-04-26
  • 지리산 벽소령을 관통하는 도로를 만든다고? 벽소령 도로 철회 촉구 지리산 5개 시군 시민행동 선언
    00:00 인트로 00:09 벽소령 '봉산정계' 석각 이야기 00:26 벽소령에 모여든 사람들 01:01 벽소령 도로 철회 촉구 지리산 5개 시군 시민행동 선언문 낭독 05:10 인터뷰1. 하동기후시민회의 최지환 대표 06:15 인터뷰2. 지리산사람들 윤주옥 대표 벽소령 도로 철회 촉구 지리산 5개 시군 시민행동 선언문 함양군은 벽소령 도로 개설계획 철회하고 벽소령 도로 폐쇄하라! 민족의 영산, 지리산은 어머니 품 같아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산이며, 그 모두를 지리산은 그 너른 품에 다 안고 왔다. 그리하여 옛날부터 지리산은 사람들에게 삶의 터전이자 안식처요, 동식물들의 보고이기도 하며, 그것은 지금도 그러하다. 그런데 이 무슨 말인가? 지리산에 댐을 만든다, 케이블카를 설치한다, 도로를 개설한다, 산악열차를 건설한다는 둥 하루도 지리산이 조용할 날이 없다. 지리산이 아무 말이 없다고 해서, 지리산은 아무나 이용할 수 있는 공공자원이라고 하면서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맘대로 난도질해도 되는 산이란 말인가? 선심성 공약을 내건 단체장과 사업시행으로 인해 이익을 얻는 일부 개발론자들이 이러한 사업추진을 위해 내세우는 첫 번째 논리는 경제성‧수익성‧지역경제 활성화이다. 지리산케이블카 추진 계획을 살펴보자. 6월에 발표된 산청ㆍ함양 단일노선은 중산리에서 장터목대피소 인근까지 4.38km로 추정 사업비는 2천억원에 이를것으로 보이고, 겨우 사업비를 건질수있는 엄청난 규모다. 전국 관광케이블카 41개중 38개가 적자이고, 지리산 인근 사천,남해,하동 케이블카가 모두 적자인 상황에서, 지리산케이블카는 무슨 근거로 100억씩 수익을 낸다는 말인가? 주민의 혈세만 낭비하고, 적자 운영으로 주민들만 피해를 볼수밖에 없는데, 이 모든것을 임기 4년의 지자체장이 책임질수 있는가? 다음으로, 벽소령 도로개설 사업비 1,950억원, 함양군의 연간예산 6,500억에 재정자립도 10%에 불과한 지자체는 이 돈을 어떻게 조달할까? 국민세금으로 메꾸는 수밖에 없다. 관광객 유치로 지역경제 활성화와 생산유발효과가 기대된다지만, 도로가 뚫리면 관광객들은 단축된 방문 시간으로 더 빨리 스쳐 지나갈 것이며, 남는 것은 환경오염뿐이라는 사실은 지리산 반달곰도 알 것이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도로개설인가? 그리하여 지자체는 개발이익이라는 명목하에 환경을 파괴하고 주민을 분열시키는 일체의 시도를 그만둘 것을 촉구하며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함양군은 벽소령 도로개설 사업추진을 즉각 중단하라. 아울러 케이블카 설치 등 지리산을 훼손하는 일체의 계획을 철회하라. 우리 고유의 신성한 지리산을 보전하여 미래에 물려주는 것이 우리의 의무임을 자각하여 그것이 상식이 되는 날까지 우리는 노력할 것임을 선언한다. 부디 영험한 지리산 신령님께서는 저들을 깨우쳐 헛된 사업을 벌이지 않게 해주소서. 2024.7.22 함양난개발대책위원회, 하동참여자치연대, 지리산연석회의
    • 지난호
    2024-07-22
  • 궁금해, 지리산? 함양- 김종직의 유두류록 길을 따라 걷다
    안녕하세요~ 지리산 산청 소식을 전하는 포네입니다. 지난 6월 20일(목)에는 지리산사람들과 지리산이음, 다시지리산에서 주최하는 답사 프로그램 ‘궁금해, 지리산- 함양편’이 있었어요. <김종직의 유두류록 탐구(2020. 삼우반)> 저자인 류정자 선생님이 550년 전 김종직이 지리산을 탐방하며 걸었던 길의 일부를 안내해 주셨습니다. 김종직(金宗直, 1431년 6월 ~ 1492년 8월 19일)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성리학자이며, 1470~1475년까지 함양군수를 역임했습니다. 함양군수 재임 시절 1472년 음력 8월 14~18일까지 5일간 지리산을 탐방하고 유두류록(遊頭流錄)이란 산행기를 남겼는데 류정자 선생님이 여러 차례의 탐방을 통해 코스를 확인했다고 합니다. 적조암 주차장에서 모여 인사를 나누고 출발합니다. 적조암까지 가는 길이 구불하고 좁았는데 암자가 너무 커서 놀랐어요. 김종직이 걸었을 당시에는 지리산 구석구석에 암자가 350여 개나 되었다고 해요. 김종직의 유람도 어느 스님이 안내를 했습니다. 유두류록을 읽어보면 고열암에서 하루 자게 되는데 오늘은 거기까지 가보자고 하십니다. 김종직인 언급한 절이 4개인데 이곳들을 찾아내는데 15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적조암 위 마지막 민가를 지나 산길로 들어서자 새소리가 들려왔어요. 김종직이 지리산을 유람했을 때는 국립공원이 시작되는 돌배나무가 있는 지점까지 조랑말을 타고 올라갔다고 합니다. 중간에 출입금지 팻말이 있는데, 류정자 선생님의 건의로 올해 초 탐방로로 허가를 받았다고 해요. 노장대(독바위)까지 2m 넓이의 야자매트를 깔 예정이라고 합니다. 산속에는 군데군데 돌로 쌓은 축대가 있어서 과거에 민가와 경작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중간에 금낭화 군락지가 있었는데, 옛날 운암마을 터로 경남인민유격대 대원들이 한참 머물렀던 곳이라고 합니다. 유격대는 법화사에서 결성되어 1947년에 이곳으로 1,200명이 옮겨와 머물렀다는 설명이었습니다. 빨치산이 숨어 살았던 곳. 조릿대 숲을 헤치고 산을 더 올라갑니다. 중간에 길이 갈라지는 지점에서 류정자 선생님이 빨치산 이야기를 한 번 더 해주셨어요. 이 근방에 빨치산 식량저장소였던 삼각바위와 굴이 있다고 합니다. 발견되었을 당시 박쥐가 날아다니고 곡식이 삭아서 먼지에 발이 빠질 지경이었대요. 조릿대를 헤치고 더 올라가니 500년 된 돌배나무가 나왔어요. 돌배나무가 이렇게 오래 사는 나무였군요. 돌배나무는 이 개체 말고도 오다가 두 그루를 더 보았어요. 수고가 워낙 높아서 열매가 날렸는지 어떤지는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돌배가 떨어질 무렵 배낭을 메고 주우러 오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배꽃이 필 때 오면 환상적일 거 같은데 시기를 맞추기는 어렵겠지요. 김종직은 이 지점까지 조랑말을 타고 왔대요. 가다가 큰 바위 옆에서 잠깐 휴식.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지장사 터가 있는데, 빨간 얼룩이 군데군데 묻은 바위가 있대요. 무엇인가 하면 빈대의 핏자국이라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암자가 많이 사라진 건 숭유억불 정책 때문이기도 하지만, 빈대가 너무 많아서 그랬다는 재미난 이야기. 절이 없어진 후 무시무시한 빈대도 없어졌겠지만, 우리는 지장사 터엔 들리지 않고 오른쪽으로 나아갔습니다. 조릿대숲을 벗어나자 산이 점점 가팔라졌습니다. 올라가는 길에는 작은 동굴도 있고, 올라가니 산내가 내려다 보이는 큰 바위(환희대?) 도 있었습니다. 이 다음에 나오는 절터에서 식사를 했습니다. 암자 이름은 잊어버렸네요. 큰 바위 아래 낮은 동굴에 샘이 있어서 그 옆에 암자를 짓고 수도를 했던 모양입니다. 동굴을 들여다보니 흙바닥에 물이 조금 고여 있긴 한데, 가물어서 그런지 마실 만한 양은 되지 않아 보였습니다. 옛날에는 1~2인 정도 마시고 살 만한 물이 나왔을까요? 돗자리를 깔고 점심을 먹으려 류정자 선생님에게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큰 바위 위에 흙이 있고 중이 채소밭을 가꾸고 살더라는 기록을 보고 이곳을 찾았다고 합니다. 기왓장과 자기 조각이 많이 발견되고, 이 높은 곳에 있는 암자들도 다 기와로 지붕을 이었대요. 절을 짓기 위해 산속에 기와를 굽는 가마터부터 만들었다는. 식사 후 류정자 선생님과 일행의 3분의 2는 하산했습니다. 수달아빠가 안내를 맡아 6명이서 독바위(노장대)를 목표로 산행을 이어갔습니다. 수달아빠가 발견한 수정란. 원래는 투명한데, 날이 가물어 흰색을 띄는 거랍니다. 수정처럼 투명하다고 수정란인데, 잎도 없고 뿌리도 없고 꽃만 있는 신기한 식물이에요. 엽록소로 광합성을 하지 않고, 뿌리곰팡이가 제공하는 영양분으로 꽃을 피우고 종자를 맺는답니다. 수정난을 기생식물이라고 하는데, 그건 적당하지 않은 분류인것 같아요. 광합성을 하는 평범한 식물도 그런 식으로 따지면 태양에 기생하는 거잖아요? '균종속영양식물'이라는 분류가 그나마 나은 것 같습니다. 종속이라는 단어 빼고 그냥 뿌리곰팡이영양식물이라고 했으면 더 나았을 텐데요. 수정란은 지하세계의 생명의 네트워크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려주는 지표 같아요. 숲속의 요정 같은 식물. 팅커벨이 마법의 숲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지키고 있는 걸까요? 수정란을 뒤로 하고 가파른 길을 한참 올라가니 신열암이 있었어요. 신열암 입구에는 뽕나무가 가지를 드리우고 있어서 잠시 멈추고 향이 진하고 달콤한 오디를 따먹었어요. 산의 낮은 곳에서는 오디철이 지나 바위 위에 시든 열매가 떨어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여기는 한창이네요. 오디는 담비나 오소리의 식량이 되는지, 바위 위나 굴에 싸 놓은 똥을 보면 오디씨앗이 많았어요. 이곳에 암자를 짓고 불도를 닦았다니 어마어마합니다. 바위벽에 몇 군데 홈이 파인 걸로 보아 나무를 박아 넣었던 거 같아요. 여기도 바위 밑에서 물이 나와 암자를 지었나 봅니다. 날씨가 가물어서 샘에는 물이 한 방울도 없었고, 깊숙한 곳에 축축한 흙이 있는 정도였어요. 조선시대에는 여기서 꾸준히 물이 나왔겠지요? 그렇지 않으면 암자가 지어지지 않았을 테니. 샘에서 물 떠서 나뭇가지로 불을 지펴 산나물·나무열매 따위로 밥해먹고,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잠들었을 선승들의 생활을 상상해봅니다. 신열암 앞 함박꽃나무에는 꽃이 딱 한 송이 피어 있었어요. 독바위는 이 위에 있다고 해서 수달아빠를 따라 다시 산을 올라갔어요. 여기가 어딘고? 산등성이까지 올라가서 걷는데 암만 봐도 독바위는 없고, 너무 멀리 가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가다가다 보니 와불산 꼭대기. 이 산꼭대기 밑에 독바위가 있다고 하여 가파른 비탈을 내려갔는데, 참여자 1인의 지도 앱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중. 아.. 여기가 아닌가. 다시 비탈을 올라 와불산 정상에 오른 다음, 능선을 따라 온 길을 되짚어서 돌아갔어요.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터덜터덜 한참을 돌아가서야 제대로 된 길을 찾아 내려갔습니다. 여기는 신열암 바로 위 같은데, 신열암이랑 매우 가까이 있는 독바위를 못 보고 그냥 지나쳐 온 거였네요. 흑흑. 독바위로 가는 통로라는 안락문. 와~ 다른 세상으로 가는 문 같아요. 편안하고 즐거운 세상으로 가는 문이라니, 이 문을 관통하면 이제까지의 고생은 끝? 치솟은 바위벽 사이에 틈이 있습니다. 어떤 지질학적 작용으로 바위가 둘로 쪼개져 이런 길이 생겨난 걸까요. 참 신기해요. 바위로 된 산도를 통과하여 다시 태어났습니다. 조금 더 내려가니 엄청나게 큰 바위산이 있었습니다. 저것이 독바위, 독녀암이로군요. 하늘을 찌르는 거대한 바위가 몇 갈래로 쪼개져 있습니다.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이런 대목이 있어요. <신열암(新涅菴)을 찾아가 보니 중은 없었고, 그 암자 역시 높은 절벽을 등지고 있었다. 암자의 동북쪽에는 독녀(獨女)라는 바위가 있어 다섯 가닥이 나란히 서 있는데, 높이가 모두 천여 척(尺)이나 되었다. 법종이 말하기를, “들으니, 한 부인(婦人)이 바위 사이에 돌을 쌓아 놓고 홀로 그 안에 거처하면서 도(道)를 연마하여 하늘로 날아올라 갔으므로 독녀라 호칭한다고 합니다.” 하였는데, 그 쌓아놓은 돌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잣나무가 바위 중턱에 나 있는데, 그 바위를 오르려는 자는 나무를 건너질러 타고 가서 그 잣나무를 끌어 잡고 바위 틈을 돌면서 등과 배가 위아래로 마찰한 다음에야 그 꼭대기에 오를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을 내놓을 수 없는 사람은 올라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종리(從吏) 옥곤(玉崑)과 용산(聳山)은 능란히 올라가 발로 뛰면서 손을 휘저었다. 내가 일찍이 산음(山陰)을 왕래하면서 이 바위를 바라보니, 여러 봉우리들과 다투어 나와서 마치 하늘을 괴고 있는 듯했는데, 지금에 내 몸이 직접 이 땅을 밟아보니, 모골(毛骨)이 송연하여 정신이 멍해져서 내가 아닌가 의심하게 되었다.> 어느 여인이 홀로 기거하며 도를 닦아 승천했다는 독바위. 우리들은 잣나무가 아니라 어느 친절한 이가 매어놓은 나일론 밧줄을 잡고 바위 위로 올라갔어요. 부처머리에 두 번이나 올라가느라 힘이 빠져서 정상에 올라갈 수 있을지? 밧줄이 삭아서 좀 불안했지만 다들 낑낑거리며 중턱까지 올라가는데 성공했어요. 김종직 일행이 잣나무를 타고 올라간 바위는 이 지점 위에 있는 한층 더 높은 바위 같은데 거기까지는 도전하지 못했습니다. 여기까지만 올라와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풍광. 저 아래 출발 지점이었던 적조암이 내려다보였어요. 와불산을 헤메고 부처머리에 두 번이나 올라갔다 내려온 시간이 다 용서되었습니다. 안락문과 독려암을 보았으니, 높은 산을 헤맨 보람이 있지요. 하늘을 나는 새가 된 기분. 여기서 속세의 때를 벗고 다른 차원으로 승천하면 좋겠지만, 아직 속세에서 할 일이 남은 관계로 하강해야. 이렇게 높은 곳에서 산아래를 내려다보며 구름이 아련한 먼 지평을 내다보기 위해 케이블카를 타는 거겠죠? 단돈 2만 2천 원을 내면 5분 만에 승천한 기분이 느껴지는 곳까지 갈수 있죠. 아무런 힘을 들이지 않고 케이블카로 이곳까지 왔다면 어땠을까요? 빨치산의 루트와 금낭화 군락지가 된 옛 마을터, 환희대, 신열암도 못보고, 수정난도 만나지 못하고, 부처머리로 가는 길에 있는 다래의 군락도 못보고, 오소리의 화장실도 마주치지 못하고, 이름 모를 풀과 나무들의 향기도 맡지 못하고, 깊은 산속의 새소리도 못 들었겠지요. 독녀가 했다는 승천은 무엇일까요? 위치상으로 높은 지형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는 건 아닐 거 같아요. 지리산의 깊은 산속에서 동식물과 바위의 영과 공생하면서 이들의 노래와 침묵을 해치지 않으며 고독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세속의 소음 속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특별한 신체의 감각이 열리고, 시공을 초월하는 영안이 뜨이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게 승천 아닐까 하네요. 케이블카를 타고 산에 올라 피상적으로 시야를 넒히는 건 사진을 남기는 것 외에는 별 의미가 없답니다. 뭇생명과 그들의 모태인 지구의 영을 우리의 신체로 직접 만나고, 육체를 넘어선 미묘한 신체로 공생, 공감하는 정신적 지평이 넓혀져야 하는 것이지요. 산에서 내려오는 길은 중력을 주체하지 못해 침착하게 한발 한발 내딛으려 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고 비틀거리며 떨어지듯 빠르게 내려왔어요. 승천은 느리지만 하강은 빠른 속도로 일어나는군요. 먼저 하산해서 적조암 주차장에서 독녀지망생을 기다리며 담배를 태우고 있을 가께목 선사가 심심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어요. 차 안에서 <20세기 소년>이라도 꺼내보게 키를 드리고 독바위에 올라갈 것을, 아차 싶었죠. 무면허 음주운전을 하실까봐 키를 안 드렸는데, 이렇게 오랜 시간 산을 헤맬 줄은.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돌배나무 근처에서 팔색조의 노랫소리를 들었어요. 수달아빠가 폰을 켜고 휘파람으로 새소리를 흉내 내기 시작했어요. 서투르나마 나도 흉내를 내 보았어요. 이렇게 5분정도 소리를 내고 있으며 새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2분쯤 지나 푸른색 날개가 우리들 옆을 휙 하니 지나갔어요. 와~ 나뭇잎에 가려 보이지 않는 곳에 앉았길래, 조금 더 불러보았는데, 어쩐지 짜증이 섞인 듯한 울음소리로 대답하는 걸 들었어요. 결국 촬영은 하지 못한 수달아빠. 그래도 산에서 내려오면서 팔색조를 보아서 너무 기뻤어요. 이젠 산속에만 가면 5분 동안 휘파람 불면서 팔색조를 기다려 볼 것 같아요. 하루를 꼬박 투자하여 지리산의 숨은 비경과 역사, 생태를 만난 시간이었습니다. 김종직이 걸었던 오래된 길과 빨치산 루트, 암자터를 안내·해설 해주신 류정자 선생님, 지리산의 동식물들을 만나게 해준 수달아빠, 앞서거니뒷서거니 함께 걸으며 서로 낙오되지 않게끔 지켜준 여러 선생님들 고맙습니다. 지리산에서 또 만나요. #궁금해지리산 #궁금해함양산 #류정자 #김종직 #유두류록 #독바위 #독려암 #지리산을_그대로 #지리산_케이블카 #승천
    • 고을이야기
    • 함양
    2024-06-24
  • 온누리에 빛나라 대광 하지축제 - 함양 대광마을 난개발사업으로 위기
    함양 대광마을에는 대규모 토목사업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사업이 계획중인 1년동안 대상 지역인 대광마을 주민들과는 전혀 협의 없이 이루어졌습니다. 주민들은 사업대상지의 경사로 인한 위험성, 농지를 대규모 꽃밭으로 바꾸는데서 오는 생계문제, 환경문제를 제기하며 이 사업을 철회할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지리산 권역에서 난개발을 반대하는 시민단체가 모여 하지축제를 대광마을에서 열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영상을 참고해 주세요. 아래에 대략적인 내용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00:00 인트로 마을주민 신종권 인터뷰 00:26 하지에 축제를 여는 의미 00:57 하지축제가 대광마을에서 열리는 의미 02:03 기후위기 시대에 맞지 않는 개발 사업 02:42 대광마을 이장님과 마을 한 바퀴 대광마을 이장님 인터뷰 03:03 함양사계4U 사업의 문제점 03:46 함양사계4U 사업은 세금낭비 사업 04:26 하지축제 장터 마을주민 신종권님 인사말 04:39 지방소멸 대응기금으로 진행되는 난개발 04:54 이주민 주거단지, 꽃밭 조성 - 원주민은 어떻게 06:28 마을 주민과 전혀 협의 없이 사업을 진행한 함양군 06:53 이대로 당할 수 없습니다. 힘을 모아주세요 하지축제 07:19 시 낭독 07:50 하지 다례 올리기 07:58 고유문 낭독 08:09 비나리 공연 08:35 최상우 할머니의 육자배기 09:02 쾌지나칭칭 나네 09:51 노래 공연 10:38 마무리
    • 지난호
    2024-06-22
  • [6월 20일 궁금해 지리산 –함양편] 참고자료
    6월 20일, [궁금해 지리산-함양편]을 이끄는 류정자 선생님이 보내준 글입니다. 읽고 오면 선생님의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옛산행기」 1472년 <김종직>선생의 [유두류록] 가객 | 2004.05.28 15:34 5910 ◆요점정리 산행일자 : 1472년(성종3년) 8월14일~18일 산행코스 : 함양관아→엄천→화암→지장사→선열암→신열암→고열암(1박) 청이당→영랑재→해유령→중봉→천왕봉→성모사(2박) 성모사→통천문→향적사(3박) 향적사→통천문→천왕봉→제석봉→세석→창불대-영신사(4박) 영신사→영신봉→직지봉→실덕리→등구재→함양관아(산행종료) 출 처 : 민족문화추진회 간 <점필재집> ◆감상과 이해 선생의 <유두류록>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지리산산행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그리하여 그들의 수친서가 된 작품이다. 선생은 지리산을 "어머니의 산", "고향의 산"으로 인식하여, 천왕봉에 올라 마음을 펴고자 하였다. 천왕봉 성모석상에 대해서 석가의 어머니 마야부인으로 보는 설을 부정하고, 고역사서 <제왕운기>를 인용하여 고려태조의 어머니 위숙왕후로 본다. 유람 도중 현실적 갈등과 모순이 없는 무릉도원을 희구하였으며, 선생은 사림파 지식인과 목민관으로서의 자세를 가지고 산행 도중 만나는 매를 잡는 사람들의 응막을 보고 민생의 어려움을 걱정하였고, 당시의 숭유억불 정책과도 상통하는 승려들의 혹세무민적 행적도 비판을 한다. 한편 천왕봉에 올라 사방을 조망하며 주위의 명산들을 열거하여 설명하는 지리적인 혜안에서는 선생의 국토산하에 대한 애정과 지식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선생의 단촐한 유람단 구성은 조선시대 선비들의 여느 지리산 행적과 비교가 되어 존경심까지 불러 일으키며, 선생의 등로는 지금의 의식으로 볼 때에 하나의 개척산행으로 탐구 가치가 있는 지리산 기행록이다. <본문> "아, 어떻게 하면 그대와 함께 은둔하기로 약속하고 이 곳에 와서 노닐 수 있단 말인가". -본문 중 구롱을 지나며- + 출발 나는 영남(嶺南)에서 생장하였으니, 두류산은 바로 내 고향의 산이다. 그러나 남북으로 떠돌며 벼슬하면서 세속 일에 골몰하여 나이 이미 40이 되도록 아직껏 한번도 유람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신묘년(1471, 성종2) 봄에 함양군수(咸陽郡守)가 되어 내려와 보니, 두류산이 바로 그 봉내(封內)에 있어 푸르게 우뚝 솟은 것을 눈만 쳐들면 바라볼 수가 있었으나, 흉년의 민사(民事)와 부서(簿書) 처리에 바빠서 거의 2년이 되도록 또 한번도 유람하지 못했다. 그리고 매양 유극기(兪克己), 임정숙(林貞叔)과 함께 이 일을 이야기하면서 마음 속에 항상 걸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금년 여름에 조태허(曺太虛)가 관동(關東)으로부터 나 있는 데로 와서 《예기(禮記)》를 읽고, 가을에는 장차 자기 집으로 돌아가려 하면서 이 산에 유람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러자 나 또한 생각건대, 파리해짐이 날로 더함에 따라 다리의 힘도 더욱 쇠해가는 터이니, 금년에 유람하지 못하면 명년을 기약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더구나 때는 중추(仲秋)라서 토우(土雨)가 이미 말끔하게 개었으니, 보름날 밤에 천왕봉(天王峯)에서 달을 완상하고, 닭이 울면 해돋는 모습을 구경하며, 다음날 아침에는 사방을 두루 관람한다면 일거에 여러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가 있으므로, 마침내 유람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는 극기를 초청하여 태허와 함께 《수친서(壽親書)》에 이른바 유산구(遊山具)를 상고하여, 그 휴대할 것을 거기에서 약간 증감(增減)하였다. + 화암에서 쉬고 지장사, 환희대까지 그리고 14일에 덕봉사(德峯寺)의 중 해공(解空)이 와서 그에게 향도(鄕導)를 하게 하였고, 또 한백원(韓百源)이 따라가기를 요청하였다. 마침내 그들과 함께 엄천(嚴川)을 지나 화암(花巖)에서 쉬는데, 중 법종(法宗)이 뒤따라오므로, 그 열력한 곳을 물어보니 험준함과 꼬불꼬불한 형세를 자못 자상하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또한 길을 인도하게 하여 지장사(地藏寺)에 이르니 갈림길이 나왔다. 여기서부터는 말[馬]에서 내려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오르는데, 숲과 구렁이 깊고 그윽하여 벌써 경치가 뛰어남을 깨닫게 되었다. 이로부터 1리쯤 가서 환희대(歡喜臺)란 바위가 있는데, 태허와 백원이 그 꼭대기에 올라갔다. 그 아래는 천 길이나 되는데, 금대사(金臺寺), 홍련사(紅蓮寺), 백련사(白蓮寺) 등 여러 사찰을 내려다보았다. + 선열암과 신열암을 보고 고열암에서 자다 선열암(先涅菴)을 찾아가 보니, 암자가 높은 절벽을 등진 채 지어져 있는데, 두 샘이 절벽 밑에 있어 물이 매우 차가웠다. 담장 밖에는 물이 반암(半巖)의 부서진 돌 틈에서 방울져 떨어지는데, 반석(盤石)이 이를 받아서 약간 움푹 패인 곳에 맑게 고여 있었다. 그 틈에는 적양(赤楊)과 용수초(龍須草)가 났는데, 모두 두어 치[寸]쯤이나 되었다. 그 곁에 돌이 많은 비탈길이 있어, 등넝쿨[藤蔓] 한 가닥을 나무에 매어 놓고 그것을 부여잡고 오르내려서 묘정암(妙貞菴)과 지장사(地藏寺)를 왕래하였다. 중 법종이 말하기를, “한 비구승(比丘僧)이 있어 결하(結夏)1)와 우란(盂蘭)2)을 파하고 나서는 구름처럼 자유로이 돌아다녀서 간 곳을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그런데 돌 위에는 소과(小瓜) 및 무우[蘿葍]를 심어놓았고, 조그마한 다듬잇방망이와 등겨가루[糠籺] 두어 되쯤이 있을 뿐이었다. 신열암(新涅菴)을 찾아가 보니 중은 없었고, 그 암자 역시 높은 절벽을 등지고 있었다. 암자의 동북쪽에는 독녀(獨女)라는 바위가 있어 다섯 가닥이 나란히 서 있는데, 높이가 모두 천여 척(尺)이나 되었다. 법종이 말하기를, “들으니, 한 부인(婦人)이 바위 사이에 돌을 쌓아 놓고 홀로 그 안에 거처하면서 도(道)를 연마하여 하늘로 날아올라갔으므로 독녀라 호칭한다고 합니다.” 하였는데, 그 쌓아놓은 돌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잣나무가 바위 중턱에 나 있는데, 그 바위를 오르려는 자는 나무를 건너질러 타고 가서 그 잣나무를 끌어잡고 바위 틈을 돌면서 등과 배가 위아래로 마찰한 다음에야 그 꼭대기에 오를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을 내놓을 수 없는 사람은 올라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종리(從吏) 옥곤(玉崑)과 용산(聳山)은 능란히 올라가 발로 뛰면서 손을 휘저었다. 내가 일찍이 산음(山陰)을 왕래하면서 이 바위를 바라보니, 여러 봉우리들과 다투어 나와서 마치 하늘을 괴고 있는 듯했는데, 지금에 내 몸이 직접 이 땅을 밟아보니, 모골(毛骨)이 송연하여 정신이 멍해져서 내가 아닌가 의심하게 되었다. 여기서 조금 서쪽으로 가서 고열암(古涅菴)에 다다르니, 날이 이미 땅거미가 졌다. 의론대(議論臺)는 그 서쪽 등성이에 있었다. 극기(克己) 등은 뒤떨어졌고, 나 혼자 삼반석(三盤石)에 올라 지팡이에 기대 섰노라니, 향로봉(香爐峯), 미타봉(彌陀峯)이 모두 다리 밑에 있었다. 해공(解空)이 말하기를, “절벽 아래에 석굴(石窟)이 있는데, 노숙(老宿) 우타(優陀)가 그 곳에 거처하면서 일찍이 선열암, 신열암, 고열암 세 암자의 중들과 함께 이 돌에 앉아 대승(大乘), 소승(小乘)을 논하다가 갑자기 깨달았으므로, 인하여 이렇게 호칭한 것입니다.” 하였다. 잠시 뒤에 요주승(寮主僧)이 납의(衲衣)를 입고 와서 합장(合掌)하고 말하기를, “들으니 사군(使君)이 와서 노닌다고 하는데, 어디 있는가?” 하니, 해공이 그 요주승에게 말하지 말라고 눈짓을 하자, 요주승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그래서 내가 장자(莊子)의 말을 사용하여 위로해서 말하기를, “나는 불을 쬐는 사람이 부뚜막을 서로 다투고, 동숙자(同宿者)들이 좌석을 서로 다투게 하고 싶다.3) 지금 요주승은 한 야옹(野翁)을 보았을 뿐이니, 어찌 내가 사군인 줄을 알았겠는가.” 하니, 해공 등이 모두 웃었다. 이 날에 나는 처음으로 산행(山行)을 시험하여 20리 가까이 걸은 결과, 극도로 피로하여 잠을 푹 자고 한밤중에 깨어서 보니, 달빛이 나왔다 들어갔다 하고, 여러 산봉우리에서는 운기(雲氣)가 솟아오르고 있으므로, 나는 마음 속으로 기도를 하였다. 기묘일(15일) 새벽에는 날이 더욱 흐려졌는데, 요주가 말하기를, “빈도(貧道)가 오랫동안 이 산에 거주하면서 구름의 형태로써 점을 쳐본 결과, 오늘은 반드시 비가 오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 구롱을 지나 청이당에서 쉬고 영랑대까지 그래서 나는 기뻐하며 담부(擔夫)를 감하여 돌려보내고 절에서 나와 곧바로 푸른 등라(藤蘿)가 깊이 우거진 숲속을 가노라니, 저절로 말라 죽은 큰 나무가 좁은 길에 넘어져서 그대로 외나무다리가 되었는데, 그 반쯤 썩은 것은 가지가 아직도 땅을 버티고 있어 마치 행마(行馬)처럼 생겼으므로, 머리를 숙이고 그 밑으로 지나갔다. 그리하여 한 언덕을 지나니, 해공이 말하기를, “이것이 구롱(九隴) 가운데 첫째입니다.” 하였다. 연하여 셋째, 넷째 언덕을 지나서 한 동부(洞府)를 만났는데, 지경이 넓고 조용하고 깊고 그윽하며, 수목(樹木)들이 태양을 가리고 덩굴풀[薜蘿]들이 덮이고 얽힌 가운데 계곡 물이 돌에 부딪혀 굽이굽이에 소리가 들리었다. 그 동쪽은 산등성이인데 그리 험준하지 않았고, 그 서쪽으로는 지세(地勢)가 점점 내려가는데 여기서 20리를 더 가면 의탄촌(義呑村)에 도달한다. 만일 계견(鷄犬)과 우독(牛犢)을 데리고 들어가서 나무를 깎아내고 밭을 개간하여 기장, 벼, 삼, 콩 등을 심어 가꾸고 산다면 무릉 도원(武陵桃源)에도 그리 손색될 것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지팡이로 계곡의 돌을 두드리면서 극기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아, 어떻게 하면 그대와 함께 은둔(隱遁)하기를 약속하고 이 곳에 와서 노닐 수 있단 말인가.” 하고, 그로 하여금 이끼를 긁어내고 바위의 한가운데에 이름을 쓰게 하였다. 구룡을 다 지나서는 문득 산등성이를 타고 가는데, 가는 구름이 나직하게 삿갓을 스치고, 초목들은 비를 맞지 않았는데도 축축이 젖어 있으므로, 그제야 비로소 하늘과의 거리가 멀지 않음을 깨달았다. 이로부터 수리(數里)를 다 못 가서 등성이를 돌아 남쪽으로 가면 바로 진주(晉州)의 땅이다. 그런데 안개가 잔뜩 끼어서 먼 데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청이당(淸伊堂)에 이르러 보니 지붕이 판자로 만들어졌다. 우리 네 사람은 각각 청이당 앞의 계석(溪石)을 차지하고 앉아서 잠깐 쉬었다. 이로부터 영랑재(永郞岾)에 이르기까지는 길이 극도로 가팔라서, 정히 봉선의기(封禪儀記)에 이른바 “뒷사람은 앞사람의 발 밑을 보고, 앞사람은 뒷사람의 정수리를 보게 된다.”는 것과 같았으므로, 나무 뿌리를 부여잡아야만 비로소 오르내릴 수가 있었다. 그래서 해가 이미 한낮이 지나서야 비로소 영랑재를 올라갔다. 함양(咸陽)에서 바라보면 이 봉우리가 가장 높아 보이는데, 여기에 와서 보니, 다시 천왕봉(天王峯)을 쳐다보게 되었다. 영랑은 신라(新羅) 때 화랑(花郞)의 우두머리였는데, 3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산수(山水) 속에 노닐다가 일찍이 이 봉우리에 올랐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소년대(少年臺)는 봉우리 곁에 있어 푸른 절벽이 만 길이나 되었는데, 이른바 소년이란 혹 영랑의 무리가 아니었는가 싶다. 내가 돌의 모서리를 안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곧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종자(從者)들에게 절벽 난간에 가까이 가지 말도록 주의를 시켰다. 이때 구름과 안개가 다 사라지고 햇살이 내리비추자, 동서의 계곡들이 모두 환히 트이었으므로, 여기저기를 바라보니, 잡수(雜樹)는 없고 모두가 삼나무[杉], 노송나무[檜], 소나무[松], 녹나무[枏]였는데, 말라 죽어서 뼈만 앙상하게 서 있는 것이 3분의 1이나 되었고, 간간이 단풍나무가 섞이어 마치 그림과 같았다. 그리고 등성이에 있는 나무들은 바람과 안개에 시달리어 가지와 줄기가 모두 왼쪽으로 쏠려 주먹처럼 굽은데다 잎이 거세게 나부끼었다. 중이 말하기를, “여기에는 잣나무[海松]가 더욱 많으므로, 이 고장 사람들이 가을철마다 잣을 채취하여 공액(貢額)에 충당하는데, 금년에는 잣이 달린 나무가 하나도 없으니, 만일 정한 액수대로 다 징수하려 한다면 우리 백성들은 어찌 하겠습니까. 수령(守令)께서 마침 보았으니, 이것은 다행한 일입니다.” 하였다. 그리고 여기에는 서대초(書帶草)와 같은 풀이 있어 부드럽고 질기면서 매끄러워, 이것을 깔고 앉고 눕고 할 만하였는데, 곳곳이 다 그러하였다. 청이당 이하로는 오미자(五味子)나무 숲이 많았는데, 여기에 와서는 오미자나무가 없고, 다만 독활(獨活), 당귀(當歸)만이 있을 뿐이었다. + 혜유령(하봉), 중봉을 지나 천왕봉까지 해유령(蟹踰嶺)을 지나면서 보니 곁에 선암(船巖)이 있었는데, 법종(法宗)이 말하기를, “상고 시대에 바닷물이 산릉(山陵)을 넘쳐 흐를 때 이 바위에 배[船]를 매어두었는데, 방해(螃蟹)가 여기를 지나갔으므로 이렇게 이름한 것입니다.” 하였다. 그래서 내가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때의 생물(生物)들은 모두 하늘을 부여잡고 살았단 말인가.” 하였다. 또 등성이의 곁을 따라 남쪽으로 중봉(中峯)을 올라가 보니, 산중에 모든 융기하여 봉우리가 된 것들은 전부가 돌로 되었는데, 유독 이 봉우리만이 위에 흙을 이고서 단중(端重)하게 자리하고 있으므로, 발걸음을 자유로이 뗄 수가 있었다. 여기에서 약간 내려와 마암(馬巖)에서 쉬는데, 샘물이 맑고 차서 마실 만하였다. 가문 때를 만났을 경우, 사람을 시켜 이 바위에 올라가서 마구 뛰며 배회하게 하면 반드시 뇌우(雷雨)를 얻게 되는데, 내가 지난해와 금년 여름에 사람을 보내서 시험해 본 결과, 자못 효험이 있었다. + 천왕봉에서 신시(申時)에야 천왕봉을 올라가 보니, 구름과 안개가 성하게 일어나 산천이 모두 어두워져서 중봉(中峯) 또한 보이지 않았다. 해공과 법종이 먼저 성모묘(聖母廟)에 들어가서 소불(小佛)을 손에 들고 개게[晴] 해달라고 외치며 희롱하였다. 나는 처음에 이를 장난으로 여겼는데, 물어보니 말하기를, “세속에서 이렇게 하면 날이 갠다고 합니다.” 하였다. 그래서 나는 손발을 씻고 관대(冠帶)를 정제한 다음 석등(石磴)을 잡고 올라가 사당에 들어가서 주과(酒果)를 올리고 성모(聖母)에게 다음과 같이 고하였다. “저는 일찍이 선니(宣尼)가 태산(泰山)에 올라 구경했던 일4)과 한자(韓子)가 형산(衡山)에 유람했던 뜻5)을 사모해 왔으나, 직사(職事)에 얽매여 소원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중추(仲秋)에 남쪽 지경에 농사를 살피다가, 높은 봉우리를 쳐다보니 그 정성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진사(進士) 한인효(韓仁孝), 유호인(兪好仁), 조위(曺偉) 등과 함께 운제(雲梯)를 타고 올라가 사당의 밑에 당도했는데, 비, 구름의 귀신이 빌미가 되어 운물(雲物)이 뭉게뭉게 일어나므로, 황급하고 답답한 나머지 좋은 때를 헛되이 저버리게 될까 염려하여, 삼가 성모께 비나니, 이 술잔을 흠향하시고 신통한 공효로써 보답하여 주소서. 그래서 오늘 저녁에는 하늘이 말끔해져서 달빛이 낮과 같이 밝고, 명일 아침에는 만리 경내가 환히 트이어 산해(山海)가 절로 구분되게 해 주신다면 저희들은 장관(壯觀)을 이루게 되리니, 감히 그 큰 은혜를 잊겠습니까.” 제사를 마치고는 함께 신위(神位) 앞에 앉아서 술을 두어 잔씩 나누고 파하였다. 그 사옥(祠屋)은 다만 3칸으로 되었는데, 엄천리(嚴川里) 사람이 고쳐 지은 것으로, 이 또한 판자 지붕에다 못을 박아놓아서 매우 튼튼하였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바람에 날릴 수밖에 없었다. 두 중이 그 벽(壁)에 그림을 그려 놓았는데, 이것이 이른바 성모(聖母)의 옛 석상(石像)이란 것이었다. 그런데 미목(眉目)과 쪽머리[髻鬟]에는 모두 분대(粉黛)를 발라놓았고 목에는 결획(缺劃)이 있으므로 그 사실을 물어보니 말하기를, “태조(太祖)가 인월역(引月驛)에서 왜구(倭寇)와 싸워 승첩을 거두었던 해에 왜구가 이 봉우리에 올라와 그 곳을 찍고 갔으므로, 후인이 풀을 발라서 다시 붙여놓은 것입니다.” 하였다. 그 동편으로 움푹 들어간 석루(石壘)에는 해공 등이 희롱하던 소불(小佛)이 있는데, 이를 국사(國師)라 호칭하며, 세속에서는 성모의 음부(淫夫)라고 전해오고 있었다. 그래서 또 묻기를, “성모는 세속에서 무슨 신(神)이라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석가(釋迦)의 어머니인 마야부인(摩耶夫人)입니다.” 하였다. 아, 이런 일이 있다니. 서축(西竺)과 우리 동방은 천백(千百)의 세계(世界)로 막혀 있는데, 가유국(迦維國)의 부인이 어떻게 이 땅의 귀신이 될 수 있겠는가. 내가 일찍이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記)》를 읽어보니, ‘성모가 선사를 명했다[聖母命詵師]’는 주석에 이르기를, “지금 지리산의 천왕(天王)이니, 바로 고려 태조(高麗太祖)의 비(妣)인 위숙왕후(威肅王后)를 가리킨다.” 하였다. 이는 곧 고려 사람들이 선도성모(仙桃聖母)에 관한 말을 익히 듣고서 자기 임금의 계통을 신격화시키기 위하여 이런 말을 만들어낸 것인데, 이승휴는 그 말을 믿고 《제왕운기》에 기록해 놓았으니, 이 또한 고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더구나 승려들의 세상을 현혹시키는 황당무계한 말임에랴. 또 이미 마야부인이라 하고서 국사(國師)로써 더럽혔으니, 그 설만(褻慢)하고 불경(不敬)스럽기가 무엇이 이보다 더 심하겠는가. 이것을 변론하지 않을 수 없다. 날이 또 어두워지자 음랭한 바람이 매우 거세게 동서쪽에서 마구 불어와, 그 기세가 마치 집을 뽑고 산악을 진동시킬 듯하였고, 안개가 모여들어서 의관(衣冠)이 모두 축축해졌다. 네 사람이 사내(祠內)에서 서로 베개삼아 누웠노라니, 한기(寒氣)가 뼈에 사무치므로 다시 중면(重綿)을 껴입었다. 종자(從者)들은 모두 덜덜 떨며 어쩔 줄을 몰랐으므로, 큰 나무 서너 개를 태워서 불을 쬐게 하였다. 밤이 깊어지자 달빛이 어슴푸레하게 보이므로, 기뻐서 일어나 보니 이내 검은 구름에 가려져 버렸다. 누(壘)에 기대서 사방을 내려다보니, 천지(天地)와 사방(四方)이 서로 한데 연하여, 마치 큰 바다 가운데서 하나의 작은 배를 타고 올라갔다 기울었다 하면서 곧 파도 속으로 빠져들어갈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그래서 세 사람에게 웃으며 이르기를, “비록 한퇴지(韓退之)의 정성과 기미(幾微)를 미리 살펴 아는 도술(道術)은 없을지라도 다행히 군(君)들과 함께 기모(氣母 우주의 원기를 이름)를 타고 혼돈(混沌)의 근원에 떠서 노닐게 되었으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 통천문과 향적사 경진일(16일)에도 비바람이 아직 거세므로, 먼저 향적사(香積寺)에 종자들을 보내어 밥을 준비해 놓고 지름길을 헤치고 와서 맞이하도록 하였다. 정오(正午)가 지나서는 비가 약간 그쳤는데 돌다리가 몹시 미끄러우므로, 사람을 시켜 붙들게 하여 내려왔다. 수 리(數里)쯤 가서는 철쇄로(鐵鎖路)가 있었는데 매우 위험하므로, 문득 석혈(石穴, 현 통천문)을 꿰어 나와서 힘껏 걸어 향적사(香積寺)에 들어갔다. 향적사에는 중이 없은 지가 벌써 2년이나 되었는데, 계곡 물은 아직도 쪼개진 나무에 의지하여 졸졸 흘러서 물통으로 떨어졌다. 창유(窓牖)의 관쇄(關鎖) 및 향반(香槃)의 불유(佛油)가 완연히 모두 있었으므로, 명하여 깨끗이 소제하고 분향(焚香)하게 한 다음 들어가 거처하였다. 저물녘에는 운애(雲靄)가 천왕봉으로부터 거꾸로 불려 내려오는데, 그 빠르기가 일순간도 채 안 되었다. 그리하여 먼 하늘에는 간혹 석양이 반사된 데도 있으므로, 나는 손을 들어 매우 기뻐하면서, 문 앞의 반석(盤石)으로 나가서 바라보니, 살천(薩川)이 길게 연해져 있고, 여러 산(山)과 해도(海島)는 혹은 완전히 드러나고 혹은 반쯤만 드러나기도 하며 혹은 꼭대기만 드러나기도 하여, 마치 장막(帳幕) 안에 있는 사람의 상투를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절정(絶頂)을 쳐다보니, 겹겹의 봉우리가 둘러싸여서 어제 어느 길로 내려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당 곁에 서 있는 흰 깃발은 남쪽을 가리키며 펄럭이고 있었는데, 대체로 회화승(繪畵僧)이 나에게 그 곳을 알 수 있도록 알려준 것이다. 여기에서 남북의 두 바위를 마음껏 구경하고, 또 달이 뜨기를 기다렸는데, 이 때는 동방(東方)이 완전히 맑지 못하였다. 다시 추위를 견딜 수가 없어 등걸불을 태워서 집을 훈훈하게 한 다음에야 잠자리에 들어갔다. 한밤중에는 별빛과 달빛이 모두 환하였다. 신사일 (17일) 새벽에는 태양이 양곡(暘谷)에서 올라오는데, 노을빛 같은 채색이 반짝반짝 빛났다. 좌우에서는 모두 내가 몹시 피곤하여 반드시 재차 천왕봉을 오르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나는 생각건대, 수일 동안 짙게 흐리던 날이 갑자기 개었으니, 이는 하늘이 나를 대단히 도와준 것인데, 지금 지척에 있으면서 힘써 다시 올라보지 못하고 만다면 평생 동안 가슴 속에 쌓아온 것을 끝내 씻어내지 못하고 말 것이라고 여겨졌다. + 재차 천왕봉에 올라 그래서 마침내 새벽밥을 재촉하여 먹고는 아랫도리를 걷어올리고 지레 석문(石門)을 통하여 올라가는데, 신에 밟힌 초목들은 모두 고드름이 붙어 있었다. 성모묘에 들어가서 다시 술잔을 올리고 사례하기를, “오늘은 천지가 맑게 개고 산천이 환하게 트였으니, 이는 실로 신의 도움을 힘입은 것이라, 참으로 깊이 기뻐하며 감사드립니다.” 하고, 이에 극기, 해공과 함께 북루(北壘)를 올라가니, 태허는 벌써 판옥(板屋)에 올라가 있었다. 아무리 높이 날으는 홍곡(鴻鵠)일지라도 우리보다 더 높이는 날 수 없었다. 이 때 날이 막 개서 사방에는 구름 한 점도 없고, 다만 대단히 아득하여 끝을 볼 수가 없을 뿐이었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대체로 먼 데를 구경하면서 그 요령을 얻지 못하면 나무꾼의 소견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러니 어찌 먼저 북쪽을 바라본 다음, 동쪽, 남쪽, 서쪽을 차례로 바라보고 또 가까운 데로부터 시작하여 먼 데에 이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니, 해공이 그 방도를 썩 잘 지시해 주었다. 이 산은 북으로부터 달려서 남원(南原)에 이르러 으뜸으로 일어난 것이 반야봉(般若峯)이 되었는데, 동쪽에서는 거의 이백 리를 뻗어와서 이 봉우리에 이르러 다시 우뚝하게 솟아서 북쪽으로 서리어 다하였다. 그 사면(四面)의 빼어남을 다투고 흐름을 겨루는 자잘한 봉우리와 계곡들에 대해서는 아무리 계산(計算)에 능한 사람일지라도 그 숫자를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보건대, 그 성첩(城堞)을 마치 죽 끌어서 둘러놓은 것처럼 생긴 것은 함양(咸陽)의 성(城)일 것이고, 청황색이 혼란하게 섞인 가운데 마치 흰 무지개가 가로로 관통한 것처럼 생긴 것은 진주(晉州)의 강물일 것이고, 푸른 산봉우리들이 한점 한점 얽히어 사방으로 가로질러서 곧게 선 것들은 남해(南海)와 거제(巨濟)의 군도(群島)일 것이다. 그리고 산음(山陰), 단계(丹谿), 운봉(雲峯), 구례(求禮), 하동(河東) 등의 현(縣)들은 모두 겹겹의 산골짜기에 숨어 있어서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북쪽에 있는 산으로 가까이 있는 것들은 바로 황석(黃石)(안음(安陰)에 있다)과 취암(鷲巖)(함양(咸陽)에 있다)이고, 멀리 있는 것들은 덕유(德裕)(함음(咸陰)에 있다), 계룡(鷄龍)(공주(公州)에 있다), 주우(走牛)(금산(錦山)에 있다), 수도(修道)(지례(知禮)에 있다), 가야(伽耶)(성주(星州)에 있다))이다. 또 동북쪽에 있는 산으로 가까이 있는 것들은 황산(皇山)(산음(山陰)에 있다))과 감악(紺嶽)(삼가(三嘉)에 있다)이고, 멀리 있는 것들은 팔공(八公)(대구(大丘)에 있다), 청량(淸凉)(안동(安東)에 있다)이다. 동쪽에 있는 산으로 가까이 있는 것들은 도굴(闍崛)(의령(宜寧)에 있다)과 집현(集賢)(진주(晉州)에 있다)이고, 멀리 있는 것들은 비슬(毗瑟)(현풍(玄風)에 있다), 운문(雲門)(청도(淸道)에 있다), 원적(圓寂)(양산(梁山)에 있다)이다. 동남쪽에 있는 산으로 가까이 있는 것은 와룡(臥龍)(사천(泗川)에 있다)이고, 남쪽에 있는 산으로 가까이 있는 것들은 병요(甁要)(하동(河東)에 있다)와 백운(白雲)(광양(光陽)에 있다)이고, 서남쪽에 있는 산으로 멀리 있는 것은 팔전(八顚)(흥양(興陽)에 있다)이다. 서쪽에 있는 산으로 멀리 있는 것은 황산(荒山)(운봉(雲峯)에 있다)이고, 멀리 있는 것들은 무등(無等)(광주(光州)에 있다), 변산(邊山)(부안(扶安)에 있다), 금성(錦城)(나주(羅州)에 있다), 위봉(威鳳)(고산(高山)에 있다), 모악(母岳)(전주(全州)에 있다), 월출(月出)(영암(靈巖)에 있다)이고, 서북쪽에 멀리 있는 산은 성수(聖壽)(장수(長水)에 있다)이다. 이상의 산들이 혹은 조그마한 언덕 같기도 하고, 혹은 용호(龍虎) 같기도 하며, 혹은 음식 접시들을 늘어놓은 것 같기도 하고, 혹은 칼끝 같기도 한데, 그 중에 유독 동쪽의 팔공산과 서쪽의 무등산만이 여러 산들보다 약간 높게 보인다. 그리고 계립령(鷄立嶺) 이북으로는 푸른 산 기운이 창공에 널리 퍼져 있고, 대마도(對馬島) 이남으로는 신기루(蜃氣樓)가 하늘에 닿아 있어, 안계(眼界)가 이미 다하여 더 이상은 분명하게 볼 수가 없었다. 극기로 하여금 알 만한 것을 기록하게 한 것이 이상과 같다. 마침내 서로 돌아보고 자축하여 말하기를, “예로부터 이 봉우리를 오른 사람들이 있었겠지만, 어찌 오늘날 우리들만큼 유쾌한 구경이야 했겠는가.” 하고는, 누(壘)를 내려와 돌에 걸터앉아서 술 두어 잔을 마시고 나니, 해가 이미 정오(亭午)였다. 여기에서 영신사(靈神寺), 좌고대(坐高臺)를 바라보니, 아직도 멀리 보였다. 속히 석문(石門)을 꿰어 내려와 중산(中山 현 제석봉)을 올라가 보니 이 또한 토봉(土峯)이었다. 군인(郡人)들이 엄천(嚴川)을 경유하여 오르는 자들은 북쪽에 있는 제이봉(第二峯 현 중봉)을 중산이라 하는데, 마천(馬川)을 경유하여 오르는 자들은 증봉(甑峯 현 시루봉)을 제일봉으로 삼고 이 봉우리를 제이봉으로 삼기 때문에 그들 또한 이것을 중산이라 일컫는다. 여기서부터는 모두 산등성이를 따라서 가는데, 그 중간에 기이한 봉우리가 10여 개나 있어 모두 올라서 사방 경치를 바라볼 만하기는 상봉(上峯)과 서로 비슷했으나 아무런 명칭이 없었다. 그러자 극기가 말하기를, “선생께서 이름을 지어주시면 좋겠습니다.”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고증할 수 없는 일은 믿어주지 않음에야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이 곳 숲에는 마가목(馬價木)이 많은데, 지팡이를 만들 만하므로, 종자(從者)를 시켜 매끄럽고 곧은 것을 골라서 취하게 하였더니, 잠깐 사이에 한 다발을 취하였다. + 시루봉과 세석을 지나며 증봉(甑峯 현 시루봉)을 거쳐 진펄의 평원에(세석고원) 다다르니, 좁은 길에 서 있는 단풍나무가 마치 문설주와 문지방의 형상으로 굽어 있었으므로, 그 곳으로 나가는 사람은 모두 등을 구부리지 않고 갈 수 있었다. 이 평원은 산의 등성이에 있는데, 5, 6리쯤 넓게 탁 트인 데에 숲이 무성하고 샘물이 돌아 흐르므로, 사람이 농사지어 먹고 살 만하였다. 시냇가에는 두어 칸 되는 초막[草廠]이 있는데, 빙 둘러 섶으로 울짱을 쳤고 온돌[土坑]도 놓아져 있으니, 이것이 바로 내상군(內廂軍)이 매[鷹]를 포획하는 막사였다. 내가 영랑재(永郞岾)로부터 이 곳에 이르는 동안, 강만(岡巒)의 곳곳에 매 포획하는 도구 설치해 놓은 것을 본 것이 이루 다 헤아릴 수도 없다. 아직은 가을 기운이 그리 높지 않아서 현재 매를 포획하는 사람은 없었다. 매의 무리는 운한(雲漢) 사이를 날아가는 동물이니, 그것이 어떻게 이 준절(峻絶)한 곳에 큼직한 덫을 설치해 놓고 엿보는 자가 있는 줄을 알겠는가. 그래서 미끼를 보고 그것을 탐하다가 갑자기 그물에 걸려 잡혀서 노끈에 매이게 되는 것이니, 이것으로 또한 사람을 경계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나라에 진헌(進獻)하는 것은 고작 1, 2련(連)에 불과한데, 희완(戱玩)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가난한 백성들로 하여금 밤낮으로 눈보라를 견뎌가면서 천 길 산봉우리의 꼭대기에 엎드려 있게 하는 것이야말로 인심(仁心)이 있는 사람으로서는 차마 못할 일이다. 저물녘에 창불대(唱佛臺)를 올라가 보니, 깎아지른 절벽이 하도 높아서 그 아래로는 밑이 보이지 않았고, 그 위에는 초목은 없고 다만 철쭉[躑躅] 두어 떨기와 영양(羚羊)의 똥만이 있을 뿐이었다. 여기에서 두원곶(荳原串), 여수곶(麗水串)·섬진강(蟾津江)의 굽이굽이를 내려다보니, 산과 바다가 서로 맞닿아 더 기관(奇觀)이었다. 해공이 여러 구렁[壑]이 모인 곳을 가리키면서 신흥사동(新興寺洞)이라고 하였다. 일찍이 절도사(節度使) 이극균(李克均)이 호남(湖南)의 도적 장영기(張永己)와 여기에서 싸웠는데, 영기는 구서(狗鼠) 같은 자라서 험준한 곳을 이용했기 때문에 이공(李公) 같은 지용(智勇)으로도 그가 달아나는 것을 막지 못하고, 끝내 장흥 부사(長興府使)에게로 공(功)이 돌아갔으니,6) 탄식할 일이다. 해공이 또 악양현(岳陽縣)의 북쪽을 가리키면서 청학사동(靑鶴寺洞)이라고 하였다. 아, 이것이 옛날에 이른바 신선(神仙)이 산다는 곳인가 보다. 인간의 세계와 그리 서로 멀지도 않은데, 이미수(李眉叟)는 어찌하여 이 곳을 찾다가 못 찾았던가?7) 그렇다면 호사자(好事者)가 그 이름을 사모하여 절을 짓고서 그 이름을 기록한 것인가. 해공이 또 그 동쪽을 가리키면서 쌍계사동(雙溪寺洞)이라고 하였다. 최고운(崔孤雲)이 일찍이 이 곳에서 노닐었으므로 각석(刻石)이 남아 있다. 고운은 세속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이었다. 기개(氣槪)를 지닌데다 난세(亂世)를 만났으므로, 중국(中國)에서 불우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동토(東土)에서도 용납되지 않아서, 마침내 정의롭게 속세 밖에 은둔함으로써 깊고 그윽한 계산(溪山)의 지경은 모두 그가 유력(遊歷)한 곳이었으니, 세상에서 그를 신선이라 칭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겠다. + 영신대에서 영신사(靈神寺)에서 자는데 여기는 중이 한 사람뿐이었고, 절의 북쪽 비탈에는 석가섭(石迦葉) 일구(一軀)가 있었다. 세조 대왕(世祖大王) 때에 매양 중사(中使)를 보내서 향(香)을 내렸다. 그 석가섭의 목[項]에도 이지러진 곳이 있는데, 이 또한 왜구(倭寇)가 찍은 자국이라고 했다. 아, 왜인은 참으로 구적(寇賊)이로다. 산 사람들을 남김없이 도륙했는데, 성모와 가섭의 머리까지 또 단참(斷斬)의 화를 입었으니, 어찌 비록 아무런 감각이 없는 돌일지라도 인형(人形)을 닮은 때문에 환난을 당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오른쪽 팔뚝에는 마치 불에 탄 듯한 흉터가 있는데, 이 또한 “겁화(劫火)에 불탄 것인데 조금만 더 타면 미륵(彌勒)의 세대가 된다.”고 한다. 대체로 돌의 흔적이 본디 이렇게 생긴 것인데, 이것을 가지고 황괴(荒怪)한 말로 어리석은 백성을 속여서, 내세(來世)의 이익(利益)을 추구하는 자들로 하여금 서로 다투어 전포(錢布)를 보시(布施)하게 하고 있으니,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이다. 가섭전(迦葉殿)의 북쪽 봉우리에는 두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이른바 좌고대(坐高臺)라는 것이다. 그 중 하나는 밑은 둥글게 서리었고 위는 뾰족한 데다 꼭대기에 방석(方石)이 얹혀져서 그 넓이가 겨우 한 자[尺] 정도였는데, 중의 말에 의하면, 그 위에 올라가서 예불(禮佛)을 하는 자가 있으면 증과(證果)8)를 얻는다고 한다. 이 때 종자(從者)인 옥곤(玉崑)과 염정(廉丁)은 능란히 올라가 예배를 하므로, 내가 절에서 그들을 바라보고는 급히 사람을 보내서 꾸짖어 중지하게 하였다. 이 무리들은 매우 어리석어서 거의 숙맥(菽麥)도 구분하지 못하는데도 능히 스스로 이와 같이 목숨을 내거니, 부도(浮屠)가 백성을 잘 속일 수 있음을 여기에서 알 수 있겠다. 법당(法堂)에는 몽산화상(蒙山和尙)의 그림 족자가 있는데, 그 위에 쓴 찬(贊)에, 두타 제일이 頭陀第一 이것이 바로 두수인데 是爲 抖擻 밖으론 이미 속세를 멀리하였고 外已遠塵 안으론 이미 마음의 때를 벗었네 內已離垢 앞서 도를 깨치었고 得道居先 뒤에는 적멸에 들었으니 入滅於後 설의와 계산이 雪衣鷄山 천추에 썩지 않고 전하리라 千秋不朽 하였고, 그 곁의 인장(印章)은 청지(淸之)라는 소전(小篆)이었으니, 이것이 바로 비해당(匪懈堂)의 삼절(三絶)9)이었다. 그 동쪽 섬돌 아래에는 영계(靈溪)가 있고, 서쪽 섬돌 아래에는 옥천(玉泉)이 있는데, 물맛이 매우 좋아서 이것으로 차를 달인다면 중령(中泠), 혜산(惠山)10)도 아마 이보다 낫지는 못할 듯하였다. 샘의 서쪽에는 무너진 절이 우뚝하게 서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옛 영신사이다. 그 서북쪽으로 높은 봉우리에는 조그마한 탑(塔)이 있는데, 그 돌의 결이 아주 섬세하고 매끄러웠다. 이 또한 왜구에 의해 넘어졌던 것을 뒤에 다시 쌓고 그 중심에 철(鐵)을 꿰어놓았는데, 두어 층[數層]은 유실되었다. + 직지를 거쳐 실덕리로 하산. 그리고 등구재를 넘어 관아로 돌아옴 임오일(18일)에는 일찍 일어나서 문을 열고 보니, 섬진강(蟾津江)에 조수(潮水)가 창일하였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바로 남기(嵐氣)가 편평하게 펼쳐 있는 것이었다. 밥을 먹고 나서는 절의 서북쪽을 따라 내려와 고개 위에서 쉬면서 반야봉을 바라보니, 대략 60여 리쯤 되었다. 이제는 두 발이 다 부르트고 근력이 이미 다하여, 아무리 가서 구경하고 싶어도 강행(强行)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름길로 직지봉(直旨峯)을 경유하여 내려오는데, 길이 갈수록 가팔라지므로, 나무 뿌리를 부여잡고 돌 모서리를 디디며 가는데 수십 리의 길이 모두 이와 같았다. 여기서 동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우러러보니, 천왕봉이 바로 지척에 있는 것 같았다. 여기에는 대나무 끝에 간혹 열매가 있었는데 모두 사람들이 채취하여 갔다. 소나무가 큰 것은 백 아름[百圍]도 될 만한데, 깊은 골짜기에 즐비하게 서 있었으니, 이것은 모두 평소에 보지 못한 것들이다. 이미 높은 기슭을 내려와서 보니, 두 구렁의 물이 합한 곳에 그 물소리가 대단히 뿜어 나와서 임록(林麓)을 진동시키고, 백 척(百尺)이나 깊은 맑은 못에는 고기들이 자유로이 헤엄쳐 놀았다. 우리 네 사람은 여기서 손에 물을 움켜 양치질을 하고 나서 비탈길을 따라 지팡이를 끌고 가니, 매우 즐거웠다. 골짜기 어귀에는 야묘(野廟)가 있었는데, 복부(僕夫)가 말[馬]을 데리고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옷을 갈아입고 말에 올라 실택리(實宅里 현 실덕부락)에 당도하니, 부로(父老) 두어 사람이 길 아래서 맞이하여 절하면서 말하기를, “사군(使君)께서 산을 유람하시는 동안 아무 탈도 없었으니, 감히 하례 드립니다.” 하므로, 나는 비로소 백성들이 내가 유람하느라 일을 폐했다 하여 나를 허물하지 않은 것을 보고 마음이 기뻤다. 해공은 군자사(君子寺)로 가고, 법종은 묘정사(妙貞寺)로 가고, 태허, 극기, 백원은 용유담(龍游潭)으로 놀러 가고, 나는 등귀재(登龜岾 현 오도재)를 넘어서 곧장 군재(郡齋)로 돌아왔는데, 나가 노닌 지 겨우 5일 만에 가슴 속과 용모가 확 트이고 조용해짐을 갑자기 깨닫게 되어, 비록 처자(妻子)나 이서(吏胥)들이 나를 볼 적에도 역시 전일과 다르게 보일 것 같았다. 아, 두류산처럼 높고 웅장하고 뛰어난 산이 중원(中原)의 땅에 있었더라면 반드시 숭산(嵩山), 태산(泰山)보다 앞서 천자(天子)가 올라가 금니(金泥)를 입힌 옥첩 옥검(玉牒玉檢)11)을 봉(封)하여 상제(上帝)에게 승중(升中)12)하였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의당 무이산(武夷山), 형악(衡嶽)에 비유되어서, 저 박아(博雅)하기로는 한창려(韓昌黎), 주회암(朱晦庵), 채서산(蔡西山) 같은 이나, 수련(修煉)을 한 이로는 손흥공(孫興公), 여동빈(呂洞賓), 백옥섬(白玉蟾)13) 같은 이들이 서로 연달아 이 산 속에서 배회하며 서식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유독 군적(軍籍)을 도피하여 부처[佛]를 배운다는 용렬한 사내나 도망간 천인들의 소굴이 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 무리가 비록 한 차례나마 등람(登覽)하여 겨우 평소의 소원에 보답하기는 했으나, 세속의 직무에 급급하여 감히 청학동을 찾고 오대(五臺)를 유람하여 그윽하고 기괴함을 두루 탐토하지 못했으니, 이것이 어찌 이 산의 불우함이겠는가. 자미(子美)의 방장삼한(方丈三韓)의 시구14)를 길이 읊조리니, 나도 모르게 정신이 날아오른다. 임진년 중추(仲秋) 5일 후에 쓰노라. [註 01] 불교(佛敎)에서 인도(印度)의 우기(雨期)에 해당하는 음력 4월 15일부터 90일 동안 승려가 한 곳에 조용히 있으면서 불도(佛道)를 닦는 것을 말한다. [註 02] 불제자(佛弟子)가 음력 7월 보름날에 선조(先祖) 및 현세(現世) 부모(父母)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음식을 그릇에 담아 시방(十方)의 불승(佛僧)들에게 베푸는 불사(佛事)를 말한다. [註 03] 춘추 시대에 양자거(陽子居)라는 사람이 노자(老子)로부터 “거만해서는 안 되고 항상 남의 눈에 부족한 것처럼 보이는 훌륭한 덕을 지녀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고 거만한 태도를 고친 결과, 처음에는 그가 여관에서 묵을 적에 동숙자들이 좌석을 피해 달아나고, 불쬐는 자들이 부뚜막을 피해 달아났었는데, 그가 태도를 바꾼 뒤에는 동숙자들이 그에게 아무 어려움 없이 서로 좌석을 다툴 정도로 친숙해졌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莊子 寓言》 [註 04] 선니는 공자(孔子)를 이른 말인데, 공자가 일찍이 동산(東山)에 올라서는 노(魯)나라를 작게 여기고, 태산(泰山)에 올라서는 천하(天下)를 작게 여겼다는 데서 온 말이다.《孟子 盡心上》 [註 05] 한자는 한유(韓愈)를 이른 말인데, 그가 일찍이 형산(衡山)에 올라 형악묘(衡嶽廟)에 배알하고 지은 시에 “내가 온 것이 정히 가을비의 절기를 만났는지라, 흐린 기운 깜깜하고 맑은 바람 불지 않아서, 묵묵히 기도하매 마치 응험이 있는 듯하니 어찌 정직함이 신명을 감동시킨 게 아니리오. 잠깐 뒤에 흐린 기운 걷히어 뭇 봉우리 나오자, 푸른 하늘 떠받치는 우뚝한 봉우릴 쳐다보노라.” 한 데서 온 말이다. 《韓昌黎集 卷三》 [註 06]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의하면, 장영기(張永奇)란 도적이 전라도에서 일어나 그 무리들이 날로 퍼져가고 있으므로, 조정에서 허종(許琮)을 절도사(節度使)로 삼아 그를 체포하게 하자, 도적들은 바다 가운데 섬으로 도망쳐 있으면서 틈을 타서 가끔 노략질을 하였는데, 그들이 뒤에 장흥(長興)으로 들어갔다는 정보를 듣고는 허종이 장흥 부사 김순신(金舜臣)에게 격문(檄文)을 보내어 그를 잡도록 하였으나, 그 도적이 오히려 김순신을 쏘아 넘어뜨리고 도망치므로, 허종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가서 그 도적을 사로잡아 참수(斬首)했다는 사실이 있으니, 같은 사건인 듯하나 절도사의 이름 등 서로 다른 점이 있어 자세하지 않다. [註 07] 이미수는 바로 고려 때의 학자이며 문장가인 이인로(李仁老)를 가리킴. 미수는 그의 호이다. 이인로가 일찍이 속세(俗世)를 떠날 뜻이 있어 지리산(智異山)에 들어가 신선이 산다는 청학동(靑鶴洞)이란 곳을 찾으려고 했으나, 끝내 찾지 못하고, 한 바위에다가 시(詩)를 써서 남겼는데, 그 시에 “두류산 먼 곳에 저녁 구름 나지막한데, 일만 구렁 일천 바위가 회계산과 같구나. 지팡이 끌고 와서 청학동을 찾으려는데, 숲 너머서 원숭이 울음 소리만 들리네. 누대는 머나먼 삼신산에 아득하고, 이끼 끼어 네 글자 쓰인 것도 희미하여라. 묻노니 신선이 사는 곳이 그 어디런가. 떨어지는 꽃 흐르는 물이 아득하기만 하네.” 한 데서 온 말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三十》 [註 08] 불교(佛敎)의 용어로서, 즉 수행(修行)하여 온갖 번뇌(煩惱)를 끊고 불생 불멸(不生不滅)의 진리를 깨치는 것을 말한다. [註 09] 비해당은 세종(世宗)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의 호임. 삼절은 곧 안평대군이 시(詩), 서(書), 화(畵)에 모두 뛰어났으므로 일컬은 말인데, 여기서는 특히 몽산(夢山)의 그림 족자에 대하여 그 그림과 찬(贊)과 글씨가 모두 안평대군의 작품임을 의미한 말이다. [註 10] 중령은 강소성(江蘇省) 진강현(鎭江縣)에 있는 천명(泉名)인데 물맛이 좋기로 유명하고, 혜산은 강소성 무석현(無錫縣)에 있는 산명인데 역시 이 곳의 샘물 또한 맛 좋기로 유명하였다. [註 11] 옥첩은 천자가 하늘에 제사 지낼 때의 제문(祭文)을 기록한 서찰(書札)을 말하고, 옥검은 옥(玉)으로 제조한 서함(書函) 위에 제서(題書)한 것을 말한다. [註 12] 하늘에 제사하여 일의 성공(成功)을 고(告)하는 것을 말한다. [註 13] 손흥공은 진(晉) 나라 때의 은사(隱士) 손작(孫綽)을 가리킴. 흥공은 그의 자이다. 여동빈(呂洞賓)은 당(唐) 나라 때의 도사(道士)인데, 세속에서는 그를 팔선(八仙)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일컫는다. 백옥섬은 송(宋) 나라 때 무이산(武夷山)에 은거한 도사로서, 그의 본명은 갈장경(葛長庚)이었는데, 뒤에 백씨(白氏)의 양자(養子)가 되면서 이름까지 옥섬(玉蟾)으로 바꾸었다. [註 14] 자미는 두보(杜甫)의 자임. 두보의 봉증태상장경기시(奉贈太常張卿垍詩)에 “방장산은 삼한의 밖에 있고 곤륜산은 만국의 서쪽에 있도다.[方丈三韓外 崑崙萬國西]” 한 데서 온 말인데, 여기서 방장산이란 곧 조선의 지리산(智異山)에 해당하므로 이른 말이다.《杜少陵集》
    • 고을이야기
    • 함양
    2024-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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