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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웅박 씻나락] "히가시카와에서 상상하는 n개의 산내" 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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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카와에서 상상하는 n개의 산내
누리 (지리산이음, 산내청년네트워크틈새 활동가)
반듯한 도로와 평야가 펼쳐진 히가시카와의 풍경.
네모반듯한 ‘칼각’으로 푸르고 광활하게 펼쳐진 논밭 사이를 국도가 가로지른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이어지는 평원 너머에는 하얀 물감을 군데군데 칠해 놓은 듯이 머리가 희끗한 설산이 자리 잡고 있다. 지붕이 비스듬한, 서로 닮은 디자인의 집들이 길가에 점점이 서 있어서, 시력 검사 기계 속 언덕 위의 빨간 집이 떠오른다. 6월의 홋카이도, 일본 1호라는 다이세쓰 국립공원은 아직 눈에 덮여 있었다.
6월 첫 주를 일본 최북단 북해도의 시골마을 히가시카와정에서 보냈다. 일본의 기초잔치단체인 시, 정, 촌 중 정은 한국으로 치면 ‘읍’ 정도에 해당한다. 요즘은, 평소와 다른 풍경 속에서 쉬엄쉬엄 일하라고, 여행 대신 ‘워케이션’을 오라며 현대 도시인들에게 말을 거는 지자체들이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각지에 많다. 우리는 바다 건너 히가시카와에서 워케이션을 보냈다. 이번 여정에는 제주, 태백, 거창 등 전국 곳곳, 각자의 지역에서 작은 변화를 만들어 가고 있는 사람들 13명이 함께했다.
사람들의 말소리보다 새들의 지저귐이 훨씬 크게 들려오는, 한적한 히가시카와에서 13인의 한국인들은 서로 약속하지 않았는데도 마주쳤다. 미슐랭의 인정을 받았다는 작은 소바집에서, 행정에서 운영하는 공공도서관이자 복합 교류 공간인 ‘센토퓨어’의 서가에서, 동네에서 가장 큰 마트의 조리식품 코너 앞에서. 일행 중 누군가가 자전거를 타고 몇 번이나 다녀왔다는, 걸어가기에는 제법 먼 거리의 주먹밥집에 옹기종기 찾아가 아침 찬을 쓸어오기도 했다. 여정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먼저 다녀간 사람들의 평을 듣고 즐겨찾기 해 둔 구글 지도가 있었는데, 낯선 동네에서 동행들의 추천 멘트는 하나같이 강력했다. 한 사람이 대화 중에 ‘여기 다녀왔는데 좋더라’ 하면 사람들은 귀를 열고 열심히 들었다. 그게 재밌어서 '도장 깨기'하는 것처럼 여기저기 쏘다녔다.
내가 사는 남원시 산내면은 히가시카와에 비하면 (적어도 구글 지도에서는) 불모지에 가깝다. 일본에서 유일하게 25년 연속으로 인구가 늘어났다는 농촌 마을, 히가시카와의 성공 비결이 궁금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구해 읽는다는 『히가시카와 스타일』 처럼 특별하고 고유한 ‘산내 스타일’ 따위를 정의한 책도 없다. “왜 여기 살고 계세요?”라는 말을 지금도 가끔 듣는다. 다른 곳으로 나가고 싶지는 않냐는 일말의 걱정 섞인 질문도 동네 어른들에게, 바깥에서 온 사람들에게 골고루 종종 듣는다. 나름대로 고민은 해 봤지만, 딱히 상대를 이해시킬 만한 뾰족한 대답도 없어서 얼버무리고 만다.
다만 몇 해 전 동네 한의원이 문을 닫고, 어린이집이 휴업을 하게 되면서 새로이 갖게 된 물음표는 이런 것이다. 여기가 없어지더라도 계속 산내에 살고 싶을까? 예를 들면, 이사 온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이 여유 시간을 보내고 마음 맞는 커뮤니티를 찾아가는, 내 10대 시절이 담긴 품안작은도서관이 없어진 산내는 어떨까? 산내초등학교에는 4월이면 함께 추모식을 하고 노란 꽃을 심어 가꾸는 세월호 기억 꽃밭이 있는데, 꽃밭을 돌볼 어린이들이 없어진 산내는 어떨까? 지금 당장 나에게 필요 없는 옷과 물건들이 순환될 수 있도록 내어놓는 '득템'의 성지, 자원순환가게 나눔꽃이 없어진 산내는 또 어떨까? 눈인사를 건너뛰고 안부를 묻는, 서로의 맥락을 아는 이웃들이 떠난 산내라면?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계속 산내에 살고 있는 이유, 없어지면 몹시 아쉬울 산내 고유의 아름다움이라는 건 있는 셈이다.
산내청년네트워크 틈새에서는 올해 그러한 연유로 다른 지역에 사는 또래 청년들에게 산내에 잠깐 살아보자는 초대장을 보내고 있다. 방식은 여러 가지다. '지금 도시에서 살고 있는 방식이 마음에 들어? 고민된다면 여기 와서 조금 다른 속도로 사는 마을을 경험해 보는 건 어때?'하고 말을 걸기도 하고, 산내에 사는 사람들의 삶 이야기를 거쳐서 마을을 소개하기도, 산내에서 더 예민하게 감각할 수 있는 사계절의 세계로 안내하기도 한다.
다가오는 7월의 프로그램을 위해 시도해 본 방식은 바로 함께 지도를 채워 나가는 작업이다. 산내를 가로질러 흐르는 람천과 임천의 물줄기를 따라, 지리산의 푸르른 산줄기를 따라 평면 지도 위를 짚어 나가다 보면 잊고 있던 장소 속 이야기들이 되살아난다. 산내 구석구석에 얽힌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 조각도 받았다. 내가 일하고 가꾸는 지리산문화공간 토닥은 누군가에게 카페 대신 소중한 '무대'로 의미화되었고, 물 흐르는 소리의 크기로 지금 계절이 비가 많은지, 가문지 가늠할 수 있는 해탈교는 누군가가 밤하늘 가득 총총한 별을 올려다보며 산내에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은 곳이었다. 이럴 때는 같은 산내에 살고 있는 것 같아도, 100명이 경험하는 100개의 산내가 다 각기 다를 것이라는 깨달음이 찾아와 아득해지기도 한다. 수학이든 무엇이든 정말 내가 잘 이해하고 있는지 판단하려면 다른 사람을 가르쳐 보라고 하는데, 우리는 스스로 무지를 깨닫고 열심히 공부하는 중이다. 불특정 다수의 손님에게 말을 걸어보기로 한 덕분에, 오히려 내가 산내를 많이 알게 되었다.
센토퓨어의 '너의 의자' 프로젝트 전시 코너.
주민과 여행자,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히가시카와의 복합 교류공간 '센토퓨어'의 정문으로 들어가면 이 지역이 자랑하는 '너의 의자' 프로젝트 컬렉션이 명당 자리를 차지하고 서 있다. 2006년부터 2026년까지, 히가시카와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본인의 이름과 생년월일이 새겨진 세상에 하나뿐인 수제 의자를 선물 받는다. 매년 그해만의 맞춤 디자인이 선정되고, 제작 또한 히가시카와에 위치한 목공방 중 하나에서 맡는다. 이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아이들은 의자를 통해 소속감을 느낄 것이고, 학업이나 취업 등으로 다른 지역에 가게 되어도 마을에는 여전히 내 자리가 있다는 안정감을 느끼리라 어렵지 않게 짐작해 볼 수 있다. "태어나 줘서 고마워, 너의 자리는 여기에 있단다." 적어도 그런 의미를 담아 기획했다는 모양이다.
'우리'라는 말에는 울타리 안의 요소들을 마법처럼 하나로 묶어 주는 힘이 있고, 동시에 그 바깥의 것들을 밀어내는 배타성도 숨어 있다. 그런 '너의 의자'의 의미가 확장된 순간이 있었다. 일본인들에게 큰 상흔으로 남은 3.11 동일본 대지진이다. 2만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거나 실종된 참사의 날에도 피해 지역인 도호쿠 지역에는 104명의 아이들이 태어났다. 800km 떨어진 북해도에서 보내온 '희망의 너의 의자' 104개에는 "다부지게 미래로."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히가시카와 공민관 앞에 나란히 선 어린이용 자전거들.
히가시카와에서 보낸 시간 동안 먼 길을 떠나온 몸과 다르게 마음은 자꾸 고향으로 돌아가, 산내가 어떤 마을이기를 바라는지 상상하게 되었다. 숙소와 카페에 이 마을에서 만드는 가구와 잔, 소품들이 자연스레 비치되어 있었던 점, 거리낌없이 문턱을 넘고 자리 잡을 수 있는 장소가 있다는 점은 정말이지 마음에 들었고, 어딜 가든 외국에서 온 사람에게 편하고 친근하게 말 걸어 주는 점도 괜찮았다. 반면 마을버스를 타려면 전날 예약해야 하는 시스템은 잠시 다녀가는 입장에서는 높은 장벽으로 느껴졌고, 외식 메뉴를 고를 때에 채식 등 다양한 선택지가 없는 부분은 다소 아쉬웠다.
히가시카와에 함께 간 사람들은 바다를 건너가서도 참 자기다웠는데, 농사를 짓는 사람은 줄기가 아직 여린 새싹 작물을 어떻게 보호하며 키우는지 유심히 들여다보았고, 산을 타는 사람은 새벽같이 뒷산을 오르며 울창한 나무들과 새를 만나고 왔고, 일본 각지를 누비며 탐방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사람은 그곳에서도 미니 탐방 루트를 만들어서 동행들을 능숙하게 가이드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고. 13명이 만난 13개의 히가시카와가 거기 있었다. 산내 마을 구석구석에도 방문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시선이 더해지고, 경험이 쌓여 나갈 것이 기대된다. n명의 사람들이 만나는 n개의 산내. 지금 '우리'를 넘어 누구에게 손을 내밀고, 어떤 의자를 내어줄 수 있을까? 거창하지 않더라도 함께 궁리하고, 무턱대고 실천하고 싶다.
틈새에서 진행한 2주살이 캠프 참여자들의 그날 하루를 돌아보는 엽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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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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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주옥 X 인간주옥] ⑤ 곰과 커피 사이, 내가 몰랐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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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곰마루쉼터(이하 곰쉼터)에 사육 농장에서 살던 곰들이 이주한 건 2025년 9월 말이다. 나는 곰들이 지리산에 살기 위한 목적이 아닌 이유로 구례에 오게 되었다는 점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이 곰들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뜬장에 살았다고 하고, 영양 상태가 좋지 않고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눈이 보이지 않거나 귀가 들리지 않는 곰들도 있다고 했다. 나에게 곰은 원래도 관심이 가는 존재이지만, 이러한 상황을 들으니 더 마음이 쓰였다.
↑ 이가 없어서 모든 음식을 잘라서, 익혀서, 분쇄해야 먹을 수 있다는 ‘BM-22’ 방 앞 안내판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곰곰학교’(곰처럼 곰곰이 생각하는 학교, 2025년 10월 구례에서 운영)를 열었고, ‘반달곰을 사랑하는 1%’(이하 반달곰1%)를 구례뿐 아니라 하동까지 확대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이 곰들의 일상을 궁금해하는 건 나만이 아니었다. 지난 1월, 구례 반달곰1% 가게 주인들과 곰쉼터를 방문했다. 곰들의 상황을 설명하던 최신영 수의사가 이런 말을 했다.
“반달곰 1%에 카페들도 참여하나요? 그럼 커피박을 모아주실 수 있을까요? 여기 곰들에게 커피박은 좋은 풍부화 재료, 그러니까 사육농장에 있으면서 퇴화된 곰의 감각과 근육을 발달시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거든요.”
곰들을 위해 할 일이 있다는 사실이 기분 좋았다. 반달곰 1% 가게 주인들도 ‘그거라면 할 수 있다’고 동참 의사를 밝혔다. 하기로 마음을 굳히자, 이왕이면 반달곰1% 가게뿐 아니라 관심 있는 카페에도 알리는 캠페인을 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캠페인 문구를 정하고, 그림과 디자인을 요청했다. 웹자보를 SNS에 올리고, 자주 가는 카페 주인들을 만나 취지를 설명하며 참여를 부탁했다.
↑ 캠페인 ‘곰에게 가는 커피향’ 웹자보
“일주일에 한 번씩 수거할게요. 커피박을 말려서 보관만 해주시면 됩니다.”
흔쾌히 해보겠다는 분도 있었지만, 커피박을 말리는 게 쉽지 않다고 주저하는 분도 있었다. 웹자보를 보고 연락한 분도 있었고, 카페를 운영하지 않지만 커피를 마신 후 나오는 커피박을 일반쓰레기로 버릴 때마다 마음이 안 좋았다며 함께 하겠다는 분도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모인 카페 10곳과 개인 1명이 ‘곰에게 가는 커피향’ 활동을 시작하였다.
↑ 곰쉼터에 전달된 마른 커피박
‘곰에게 가는 커피향’ 활동은 100% 자원활동이다. 특히 매주 월요일마다 커피박을 수거해 곰쉼터에 전달하는 일에 나서준 이영숙 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번 해볼게요’로 시작한 이영숙 님은 매우 성실하게 활동했고, 마치 곰이 된 것처럼 커피박의 상태를 점검했다. 이영숙 님은 커피박에 곰팡이가 생기는 것을 가장 경계했다. 커피박은 충분히 말린다고 해도 플라스틱 통이나 비닐에 담아두면 바닥에서 곰팡이가 피었다. 이런저런 고민 끝에 천으로 커피박 수거 가방을 만들기로 했다.
↑ 커피박 수거 가방 만들기 회의에서, 참여자 유현숙 님이 직접 만든 가방을 들어 보이며 설명하고 있다.
커피박 수거 가방을 만들기 위해 바느질할 분을 찾고, 가방 재료를 고민하고, 실크스크린 작업을 도와줄 분들을 섭외했다. 여러 사람의 정성과 수고 덕분에 재활용 천과 커피 자루로 ‘커피박 수거 가방’이 완성되었다.
6월 8일, 커피박 수거 가방을 들고 곰쉼터에 갔다. 그날 함께한 분들은 곰을 직접 본 것이 처음이라고 했다. 곰들이 얼마나 커피박 향기를 좋아하는지 커피박이 든 자루를 껴안고 뒹굴었으며, 방사장으로 나가지 않던 곰도 커피박 향기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미소를 지었다. 임옥주 수의사는 커피박 자루를 넣어주면 곰들이 냄새를 맡고 탐색하거나 껴안고 굴리는 행동이 늘어나는데, 이런 자극이 곰들의 감각과 근육을 깨우는 ‘풍부화 효과’라고 설명했다.
↑ 커피박 수거 가방 만들기 참여자들이 곰쉼터 답사를 마친 뒤 기념 촬영을 했다. 왼쪽부터 실크스크린 작업을 맡은 임산하 님, 커피 자루를 기부해 준 한지인 님, 유현숙 님과 함께 가방을 만든 이정훈 님, 필자, 곰쉼터에서 근무하는 임옥주 수의사.
곰쉼터 방문 후 커피 이야기가 나왔다. 25년째 커피와 인연을 맺고 있다는 한지인 님이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폴레옹이 머물렀던 세인트헬레나 섬이 커피로 유명하다는 이야기, 윤리적 논쟁이 있지만 코끼리 배설 커피가 있다는 이야기까지 이어졌다. 흥미로운 이야기였지만, 나에게 더 크게 다가온 것은 따로 있었다. 커피가 콩과 식물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네? 커피가 콩과가 아니라고요? 그럼 왜 커피콩이라고 해요. 커피나무 열매가 체리와 같다고요? 브릭스가 12나 되니 단 것을 좋아하는 곰들도 좋아할 거라고요?”
내 생애에서 지금처럼 커피에 관심을 가진 적은 없었다. 나는 커피를 마시면 설사를 한다. 어떤 때는 커피 향만 맡아도 배가 아플 때가 있다. 평생 마셔본 커피는 세 모금 정도다. 그런 내가 커피박을 수거하고, 커피 향을 맡고, 커피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고 있다니 묘한 일이다.
나는 이제 커피를 마시지 않아도, 커피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곰을 통해 커피를 다시 배우고 있다. 관심은 연결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때는 아무 의미 없이 버려지던 커피박이 이제는 곰들의 감각을 깨우고 삶을 넓히는 도구가 된다. 내가 몰랐던 커피의 진실은 맛이나 향이 아니라, 이렇게 다른 생명과 이어지는 가능성이었는지도 모른다. 온통 오해뿐이던 커피에 대한 내 생각을 바로잡아준 곰주옥과 그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이 작은 연결이 더 많은 생명과 사람에게 이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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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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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환의 절기 이야기] 가뭄에서 장마로 이어지는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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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제일 높은 하지가 지나면 해 입장에선 가을로 접어 든 것임에도 하지 지나야 무더위가 찾아오니 왜 그럴까요? 다름아닌 복사열 때문인데요, 하지 때까지 달궈진 복사열이 하지 지나 소서 대서의 복 더위로 드러나는 겁니다. 게다가 몬순 기후의 영향으로 북태평양의 높은기온과 습한기운이 찾아와 무더운 장마가 시작되지요.
반면 하지 전엔 가뭄이 찾아옵니다. 이 가뭄이 참 이해가 가질 않았습니다. 이 시기의 속담으로 가뭄에 비 그칠 날 없다는 말이 궁금증을 더 했지요. 실제로 일주일이 멀다하고 비가 와도 흙을 뒤집어보면 먼지만 일어요. 왜 그럴까요? 비가 찔끔 와 오히려 흙속 수분마저 빼앗아 가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모세관현상인데요, 옛날에 문창호지를 바르고 입으로 물을 분사해주면 창호지가 마르면서 빳빳해지는 현상과 같아요. 비 온 뒤 땅이 굳는다는 말과도 같지요.
그런데도 숲 속 나뭇잎들의 녹색은 더 짙어가니 무슨 조화일까요? 다들 아시겠지만 나무들은 일종의 물탱크입니다. 물 저장고죠. 사람도 몸의 70%가 물인 것처럼 나무도 50%~70%가 물이에요. 그 중 뿌리와 줄기, 가지의 비중이 크죠. 잎사귀도 적지 않으나 잎은 물 저장보다 증산작용으로 물을 퍼 올리는 ㅅ펌프 기능이 큽니다. 이 시기 녹색이 짙어진다는 것은 그만큼 많아진 잎들이 물을 엄청 빨아대면서 자기 몸 키우는 데 쓰느라 내뿜지는 않고 저장만 하니 땅속에 물이 마르게 되는 겁니다. 물론 비도 적게 오지만 그보다 더 많이 퍼올리니 가물 수밖에요.
반면 하지 지나 장마기에 들면 비도 많이 오지만 나무도 적당히 자라 저장용량이 다 차서 물을 대기로 뿜게 되니 이래저래 물 많고 습한 철로 접어들게 됩니다.
하지전삼, 하지후삼이라 했습니다. 하지 삼일 전이 벼 모내기 마지막 적기고 삼일 후는 더 이상 넘겨서는 안되는 마지노선이란 뜻입니다. 물 사정이 좋은 곳은 일찍 하지만 아무리 물 사정이 좋지 않다해도 하지를 넘겨선 안된다는 뜻이겠죠. 벼는 단일식물이라 해서 해가 짧아지면 이삭(꽃)이 맺히는데, 하지 지나서까지 늦게 심으면 제대로 몸을 키우지 못한채 이삭을 올리니 수량이 확 떨어집니다. 미숙 상태에서 짝짓기하면 2세가 부실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또 다른 의미로는 하지 이후엔 장마가 시작되니 모낸 후 벼가 활착하기 딱 좋은 때라는 겁니다. 이게 천수답인데요, 왠지 천수답이라고 하면 미개한 농법 같지만 그게 아니라 장마비를 활용한 지혜로운 농법인 것입니다. 그래서 기우제를 단오나 하지에 지냈으니 그 때 되면 비가 온다는 걸 알았기 때문일 겁니다.
그 다음 하지에 모내는 결정적인 이유는 그 때 되면 밀, 보리와 이모작이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밀, 보리 수확하고 이어 벼를 심을 수 있는 적기이거든요. 이런 조건 때문에 밀, 보리가 우리에겐 쌀 못지않은 소중한 식량이었습니다. 먹을 게 없어 먹는 구황식량이 아니라 여름에 먹는 필수 주식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저는 쌀만으로 주식을 삼으면 위험하다고 생각하지요.
베트남이나 필리핀 같이 벼만 갖고 이모작 삼모작 하는 나라에서나 쌀만으로 주식이 가능한겁니다. 옆에선 벼 수확을 하는데 옆에선 모내기하는 나라이니 진정한 쌀 나라인거죠.
쌀만으로 보리고개를 넘겠다는 야심찬 의지로 만든 게 통일벼인데요, 그래서 저는 이게 큰 오산이었다고 평가합니다. 통일벼는 수량 많은 알랑미와 아끼바리 같은 찰진 쌀과 교배한 잡종쌀인데요, 문제는 얘는 밀, 보리 수확 전에 심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통일벼 수량이 재래벼에 두배 가까이 되서 다들 놀랐지만 밀, 보리를 심지 못하면 그 수량이 많다는 게 얼마나 의미 있겠습니까?
그 다음으로 결정적인 문제는 통일벼는 자가채종이 안된다는 점이에요. 매년 분양 받아 심어야 됐습니다. 이게 농부로선 받아들이기 힘든 거였어요. 씨앗 농사가 근본이었거든요. 남의 씨 받아 자식농사를 지을 수는 없잖아요?
환경적으로도 문제였습니다. 밀, 보리와 이모작을 할 수 없으니 벼를 수확하고 나면 논이 일년 중 반은 사막인 거에요. 땅이 반은 놀고 있으니 토지의 경제적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도 문제겠죠.
그런데 왜 통일벼의 신화는 여전할까요? 사실 통일벼 자체는 보급된지 10년도 안되어 망했어요. 도열병이라는 게 번져 실패한겁니다. 일찍 심다보니 냉해에도 약했구요. 무엇보다 통일벼만 심게 한 단작방식이 위험을 더 키웠습니다. 원래 농가에선 한가지만을 심지 않았어요. 적어도 4~5가지 심어 먹었는데요, 그래야 흉년을 피할 수 있었답니다. 날씨에 따라 못 되는 놈 있으면 잘 되는 놈 있어 늘 평작은 거둘 수 있다는 얘기죠. 이는 기후위기로 인한 식량위기를 대비할 수 있었던 조상님들의 대표적인 지혜였습니다. 단작 방식은 기후위기에 한방에 무너질 수 있는 위험한 농사였던 겁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아일랜드의 감자역병으로 주식이 사라져 100만명 넘는 사람이 아사한 일입니다. 감자 원산지인 안데스 고산 지대에선 아직도 집집마다 여러종류의 감자를 심어 먹고 있는데 이유는 마찬가지라는 거죠. 그런 점에서 지역마다 대표적인 한가지 종류의 벼만 심는 지금의 농사 방식이 걱정이 아닐 수 없는 거에요.
그런데 아무튼 역설적이게도 통일벼 이후 육종기술이 늘어 신품종 개발에 성공해 알랑미 계통이 아닌 찰진 쌀 계통의 벼들이 자리잡게 됩니다. 그래서 통일벼 신화가 이어진 거지요. 여전히 종자는 사야되고 밀, 보리와 이모작이 안되는데도요. 더 아쉬운 사실은 통일벼 이후 개발한 종자들이 다 일본쌀 계통이라는 사실입니다. 일반미라 불렸던 아끼바리에서부터 최고의 밥맛(?)이라 불리는 고시히까리, 이누히까리 같은 쌀들입니다. 다행인 것은 아끼바리는 추청벼라 해서 들어온지 오래돼 저작권이 없어졌으나 다른 쌀들은 저작권이 있어 적지않은 종자 사용료를 일본에 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몇 해전 바람 분 반일 정서가 농촌에까지 번져 이미 우리쌀이 된 추청벼도 불매운동의 영향을 받은 웃지 못할 일도 있었지요.
그런데 왜 일본쌀 계통의 찰진쌀이 우리밥상을 차지했을까요? 이건 순전히 일제시대 잔재라고 저는 봅니다. 백미주의를 일제가 퍼뜨린거에요. 알랑미나 보리밥은 가난한 사람들이나 먹는 천한밥으로 낙인을 찍은 거죠.
한번은 베트남 가서 알랑미밥을 먹는데 20년 넘게 현미쌀을 먹어서 그런지 저는 거친 알랑미밥이 참 맛있는 거에요. 그 모습을 본 가이드가 반가워서 하는 말이, "알랑미 먹고 끼는 방구를 뭐라 하죠? " 하네요. 다들 깔깔 웃고 나니 이 사람 알랑미 예찬이 거침없이 이어집디다. 더운 지방 사람들은 알랑미를 먹어주어야 한다, 세계 대부분의 쌀은 알랑미다 등등 하면서 말이죠.
어쨌든 일제는 물러갔지만 백미주의는 강하게 남아 우리밥상과 우리입맛과 우리의식을 사로 잡았습니다. 구수하고 깊은 맛을 내는 우리 토종쌀과 밀, 보리는 외면되고 말았지요. 구수하고 깊은 정이 있는 우리의 인심도 전설이 되면서 말이죠.
하지에 또 빠뜨릴 수 없는 얘기가 그루농사입니다. 요즘은 이도 보기 힘든 일이 돼버렸는데요, 뭐든 빨리 심고 비닐하우스 같은 철을 잊은 농사가 퍼져 그렇습니다.
그루농사 또는 그루갈이라고도 하는데요, 지난 가을이나 이른 봄에 심은 작물 수확하고 남은 작물의 그루(밑둥)를 갈아 엎고 심는 농사를 말합니다. 밀, 보리 수확하고 심는 벼도 그렇구요, 마늘, 양파, 시금치처럼 월동한 작물과 이른 봄에 심은 감자 배추 상추 수확 후 심는 콩, 팥, 들깨, 고구마, 조 같은 작물입니다. 이런 작물은 일찍 심으면 자칫 웃자라거나 봄 가뭄 피해를 볼 수 있어 하지 지나 심는 게 좋습니다.
이런 월동농사와 그루농사는 우리 윤작농사의 꽃이라 할 수 있으며 얼마든지 지금도 되살릴 필요가 있고 되살릴 수 있는 전통농업의 지혜라고 저는 봅니다.
그외 하지는 참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절기입니다. 그래도 길면 지루하니 여기서 그만 하지 하고 마치렵니다. 감사합니다.
글을 쓴 안철환 선생은 온순환협동조합, 전통농업연구소 대표이고 경기도 안산에서 ‘산림생태텃밭 먹거리숲 농장’을 운영한다. 남은 음식물과 똥오줌, 커피 찌꺼기를 받아 직접 거름 만들기를 실천하고 있으며, 우리 토종 종자와 전통 농업 살리기에 열중하고 있다.
25년 전, 처음으로 심은 배추 씨가 3일 만에 싹 트는 걸 보고 ‘씨 안에 누가 있었구나!’ 깨닫고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우리가 먹는 배추는 단순히 물질적인 먹을거리가 아니라 나와 별 차이 없는 생명이며, 그래서 먹는다는 것은 생명을 먹고, 생명과 소통하고, 생명과 하나 되는 일이라고 믿는다.
쓴 책으로 《시골똥 서울똥》(2009), 《24절기와 농부의 달력》(2011), 《호미 한자루 농법》(2016), 《토종농법의 시작》(2020)이 있고, 옮긴 책으로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2004)이 있다.
* 대문사진 : 모든 게 푸르른 하지에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는 철의 변화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우리의 풍경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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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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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목소리] 산청간디고 전지율 "환경 위한다면, 급식부터 남기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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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목소리]
환경 위한다면, 급식부터 남기지 말자
안녕하세요 식당문화부입니다. 저희가 간마디에 올라온 이유는 요즘 우리 학교에 생긴 안 좋은 식당문화에 대해, 또 이번 주가 환경주간인 만큼 우리가 식당에서 할 수 있는 환경을 위한 일들을 이야기하고 싶어 이렇게 간마디를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가장 중요하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요즘 식구들이 밥을 잘 안 먹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선생님들과 식문부가 왜 자꾸 밥을 먹으라고 하는지 아시나요? 식문부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식수조사에 왜 이렇게까지 매달리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밥을 먹지 않으면 그만큼의 음식이 남고, 식당쌤들께 예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만큼은 거기서 멈추지 말고, 더 깊이 생각해 봅시다.
4월에 식문부에서 남은 식판의 개수를 세어 봤습니다. 남은 식판 14개. 어느 날은 17개가 남은 날도 있습니다. 14인분, 17인분의 음식이 먹지도 않고 버려졌습니다. 그리고 아침에는 오지 않은 사람 분의 식판을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치우게 됩니다. 식당쌤들은 항상 밥을 먹는 사람만큼의 식판을 딱 맞춰서 꺼내 두신다고 하셨는데 말이죠. 우리 학교는 환경친화적인 것들을 지향하고 다른 학교에는 없는 환경주간도 열며 환경감수성이 높은 학교라고 생각합니다. 근데 그런 학교에서 음식이 매일 이렇게나 많이 버려지고 있습니다. 그럼 도대체 우리가 한 노력들은 무슨 소용인 걸까요? 왜 모두가 환경을 지키자는 것에 동의를 하면서 한 반분 이상의 음식이 하루 만에 버려지고 있는 걸까요. 이번 환경주간 동안 많이 고민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환경친화적인 삶을 살아 보고 싶다면, 자신도 환경을 위한 일을 해 보고 싶은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고 일단 밥부터 드시기 바랍니다. 남는 식판이 없게, 남는 음식을 조금이라도 더 줄이려 노력해 봅시다.
그리고 환경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누군가의 노동권을 침해하는 행동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학교의 급식은 정말 전 세계 어느 나라를 뒤져봐도 볼 수 없는 수준인 영양만점에 푸짐하고 맛도 훌륭한 급식이 제공됩니다. 그중에서도 우리 학교 식당은 자율 배식이며 심지어 채식 음식도 제공합니다. 우린 전 세계 1% 수준의 급식 안에서도 가장 훌륭한 급식을 매일 먹고 있는 겁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급식노동자들의 노동환경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안전사고에 취약하고, 명확한 기준이 없어 과도한 노동을 감내해야 하는 것이 우리나라 급식 노동자들의 현실입니다. 1990년대 이후 그동안 엄마인 여성들에게 전가해 온 ‘도시락 노동’을 사회적으로 해결하겠다고 시작된 것이 학교급식입니다. 하지만 급식 노동은 오랜 세월 제도적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왔습니다. 학교급식실의 산업재해율은 3.7%로 전체 산업 평균인 0.67%의 5배가 넘고, 매우 위험하다고 알려진 건설업보다도 높습니다. 폐암으로 산업재해 승인을 받은 조리노동자도 178명에 이르며, 그중 15명이 돌아가셨습니다. 우리 학교 식당은요? 남은 식판 개수 17개. 식당쌤들은 그날, 만들 필요도 없는 17인분의 음식을 만드셔야 했고, 치워야 했습니다. 학생들이 밥을 먹으러 오지 않더라도 그만큼의 음식까지 만들어야만 하는 것이 학교 급식입니다. 주말에 식수조사를 한 학생이 5명도 안 되더라도, 단 한 명만 신청한 날도 밥해 주려 출근하십니다. 실제로 그런 적이 있었다고도 합니다.
올해 1월이 되어서야 학교급식법 개정안이 노동자들의 힘든 투쟁 끝에 드디어 가결되었습니다. 개정된 학교급식법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급식은 교육의 일환”임이 법적 목적으로 명시되었다는 점입니다. 내 밥상에 오른 음식을 누가, 어떤 조건 속에서 만들었는지를 아는 일은 그 자체로 아주 중요한 교육이라는 이유입니다. 간디 식구분들, 이런 훌륭한 교육의 기회를 걷어차지 맙시다.
사실 이렇게까지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에 조금 의문이 듭니다. 기본적인 예의는 지키자는 정말 당연한 이야기를 너무 어렵게 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요, 요즘 정말 기본적인 예의조차 없어져 가고 있습니다. 나를 위해 누군가가 밥을 만들어 줬는데 먹으러 오지도 않는 행동은 환경, 노동권 다 떠나서 그냥 정말 무례한 겁니다. 그런데 요즘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밥해 준 사람에게 아무런 미안한 마음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식구들이 정말 많습니다. 식당쌤들이 보는 앞에서 부식으로 나온 과일이나 간식, 음료만 챙겨서 식당에서 나가 버리고, 주말에 식수조사 해 놓고 먹으러 오지도 않거나, 오늘 나오는 밥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홍화원(학교와 가까운 식당)가서 먹고 오는 행동들 말입니다. 만약 사정이 있다면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행동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오늘 간마디가 조금 직설적이고 말이 뾰족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 우리 학교에서 꼭 다뤄야만 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앞으로 점점, 남는 식판이 줄어들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6.06.04. "식구총회 식문부 간마디"
글쓴이 : 전지율 _경남 산청 간디고등학교 3학년
안녕하세요. 경남 산청 간디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3학년 전지율입니다. 간디학교에서는 매년 6월 5일 ‘환경의 날’을 기념해 학생자치 부서인 환경부에서 ‘환경주간’을 주관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쭉 고민해 오던 것이 환경주간과 어울리는 주제였기에 우리 학교 사람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인 ‘식구총회’에서 이야기하고 싶어 발표 전날 급하게 글을 써 식구총회 간마디(간디인의 한마디)시간에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저는 앞서 말한 환경부와 같이 우리 학교 학생자치 부서인 ‘식당문화부’의 장을 맡고 있습니다(줄여서 ‘식문부’라고 부릅니다). 간디학교 관계자가 아니라면 식당문화부라는 이름이 생소하게 느껴질 것 같아 조금 설명을 덧붙이자면, 식당은 학교 급식소를 말하는 것이며 우리 학교만의 좋은 급식문화를 만들고 식당쌤들(영영사, 조리사 선생님들)과 함께 식당을 관리하는 일을 하는 부서입니다.
사실 제가 사람 많은 곳에서 발표하는 걸 즐기는 성향도 아니고, 그렇다고 글 쓰는 걸 좋아하는 것도 아니라 간마디는 학교 졸업할 때까지 절대 올라가고 싶지 않은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제 주장이 담긴 글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읽고, 그 글을 기고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네요. 그만큼 어떻게든 표출하여 전하지 않고선 못 견딜 만한 마음들이 제 가슴속에 계속해서 쌓였었나 봅니다. 덕분에 전하고자 하는 것이 가장 잘 느껴지는 글은 분노가 담긴 글이라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글보단 대본에 가까운 이 글을 학교 사람들 앞에서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읽었습니다. 어딘가에 글을 기고하는 것도 처음인데요. 이 글이 읽게 될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함께 분노할 수 있는, 공감되는 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푸른목소리의 첫 주인공이 되어 준 산청 간디고 전지율 님 고맙습니다.
애써 주신 산청 간디고 최보경 선생님께도 고마움 전합니다.
지리산人의 기획 칼럼 [푸른목소리]에는 지리산 둘레에 사는 청소년-어린이의 생태감수성이 담긴 글을 싣습니다.
'이렇게 살아야 해'라고 말하는 사회에 '이런 삶도 괜찮잖아?'라든가 '난 이렇게 살고 싶어' 같은 생각거리를 주는 글,
자연의 생명들을 대신하여 그들의 목소리를 내는 글, 우리 마을의 아름다운 자연과 이를 지키는 사람들에 대한 글을 환영합니다.
>> 지리산人 푸른목소리 기고 문의 : mhgh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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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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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환의 절기 이야기] 단오와 가까운 망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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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종은 보통 단오에 가깝게 드는데 올 망종은 음력 4월 21일에 드니 단오와 사이가 멀어졌습니다. 그래 재밌는 사실은 음력이 늦어 밀, 보리도 따라 늦게 익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평년보다 더 빨라요. 망종 일주일 전인 어제 그제 갑작스럽게 익더만요. 다음 주에 베려던 걸 내일 하려고 부랴부랴 품을 쓰려 합니다. 망종은 망종이더이다. 까끄라기(망) 있는 곡식을 심는 절기라는 뜻인데 우리나라 지역에선 밀, 보리 거두는 절기로 봐야죠. 물론 같은 까끄라기 있는 벼는 심는 게 맞긴 맞습니다.
단오(端午)는 오(여름)의 시작이자 끝이에요. 끝은 마지막이 아니라 머리(정점)입니다. 최고로 해가 높은 하지가 곧 오지 않습니까? 그래서 단오는 하지하고도 관련이 깊지요. 무더위는 그 다음에 오지만요. 아궁이의 불이 달군 다음에야 구들이 따뜻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단오라는 명절은 참 이상한 축제입니다. 보리고개라는 먹을 게 없는 시절인데 무슨 축제를 열까요? 그 이유도 시골 다니며 만난 할머니들에게서 들었습니다. 바로 벼 모내는 축제였어요.
한번은 도시 변두리에 논을 만들어 도시농부들과 모내기를 하고 있는데 지나가던 할머니 한분이 그러는 거에요. "모내면서 떡도 안 해먹어요?" 맞습니다. 축제니 떡 해먹으며 모를 냈던 겁니다. 그게 단오에 해먹는 수리취떡이죠. 곡식은 귀하고 풀은 많으니 취나물 많이 넣어 떡 해먹은 거겠지요. 모를 낼 땐 꼭 풍악을 펼칩니다. 그것도 이해가 잘 가지 않아 "할머니, 바쁘고 먹을 것도 없어 힘 드는데 빨리 끝내야지 풍악은 왜 울려요?"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힘드니 쉬면서 천천히 하라는 거지." 합니다. 하긴 풍악도 행진곡풍이면 그에 맞춰 일하기 좋을텐데 늘어지는 풍이니 놀면서 하기 딱 좋았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더 재밌는 얘길 해 주십니다. 모낼 때 띄우는 못줄이 원래 우리 방식이 아니라는 얘긴데요, "그거 일제 때 들어온 것이요. 각지게 빨리 심으라는 건데 일 못하는 사람 허리 망가지게 하는 못된 방식이지. 원래는 모꾼이 알아서 제각각 심었지. 막모내기, 판모내기라고 해서 일머리 적은 사람은 천천히, 일머리 있는 사람은 빨리 나가서 한소리 하며 늦은 사람들 흥도 돋우지." 얼마나 재밌게 일 했을지 눈에 그려지대요. 그렇게 제각각 심어도 오와 열이 착착 맞았다니 참 신도 났을 겁니다.
저희 농장의 조그만 논에 이맘 때면 어린이집 유치원 애들 200명 가량이 모내기 체험을 옵니다. 애들이라 못줄 띄워 모심기를 해도 들쭉날쭉 심지요. 보통은 애들 돌아가면 어른들이 다시 심곤 하는데 저는 그냥 놔두고 남은 모를 심습니다. 아이들 지도하던 선생님들이 심는데 못줄 띄우지 않고 막모내기 합니다. 그래도 벼들이 스스로 자리잡아가는데요, 사이가 좁은 데는 벼가 덜 분얼하고 넓은 데는 더 많이 분얼하는 거에요. 좁은 데는 벼가 웃자랄까 걱정했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더만요. 신기하죠?
옛날에 허벅지까지 빠지는 수렁논의 경우 들어가질 못하니 둑에서 모를 던지는 이른바 투묘 모내기를 했답니다. 오와 열이 맞을리 없죠. 그렇게 모를 던지고 나선 한동안 논엘 가보질 않았답니다, 괜히 미리 가봤다가 어지럽게 펼쳐진 모들을 손보고 싶어 들어갔다간 더 망가뜨린다는 거죠. 그렇지만 까먹고 한참 뒤에 가보면 모들이 알아서 지들끼리 자리잡아 정리되어 있는 걸 볼 수 있었다고 하니 참 신기하죠.
어쨌든 그래서 단오는 벼 모내기 축제라는 겁니다. 모를 망종에서 하지까지 짧으면 보름, 물 사정 좋으면 입하부터 하지 지나 장마 전까지 한달 넘게 모를 내니 이렇게까지 긴 축제도 없을겁니다. 그것도 노는 축제가 아니라 일하는 축제, 배불리먹는 축제가 아니라 배곯는 축제였으니 그런 축제가 세상에 어디 있겠어요. 강릉 단오축제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모내기와는 무관한 것이 유감인 이유입니다. 제례 굿 놀이 민속행사 등이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인데 본질보단 말단이 인정된 것이라 좀 씁쓸하지요.
벼 모내기는 두레라 해서 마을 모두 나서서 니논내논 구별없이 자기 논처럼 모를 냈습니다. 물 사정 좋은 논부터 시작해 과부 장애인 등 노약자 논을 우선 모내기하는 이타적인 공동체 문화였지요. 물론 지주 논도 우선 했겠지요. 그 정도 갖고 두레의 공동체 가치나 기능이 훼손되진 않았을거라 봅니다.
지금은 이앙기로 모를 내니 모내기 공동체 문화는 싹 사라졌어요. 기계가 공동체를 대체한 것인데요, 기계로 조금 편해졌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농부가 부자된 것도 아니고 농업농촌은 소멸의 위기에 처해있고 식량은 넘쳐나도 국민의 안전한 먹거리는 많지 않으니 농업의 기계화를 환영할 수만은 없을 겁니다. 그렇다고 기계를 없애면 공동체가 살아나는 것도 아니니 참 씁쓸 할뿐이네요.
그나마 곳곳의 도시농부들의 논에서 모내기 공동체가 살아나고 있어 미약하나마 희망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또한 농진청 유전자원센터에서 잠자고 있던 토종벼 400여종을 완전히 복구하는 데 성공한 주역이 바로 도시농부님들입니다. 그많은 종자와 작지않은 논에서 도시농부들은 주말휴식을 내팽개치고 손 모내기를 하며 토종벼도 지키고 모내기 공동체도 이어가고 있습니다.(전국토종벼농부 모임 참고 https://www.facebook.com/share/p/18yEGbU98a/" target="_blank" rel="noopener" data-mce-href=" https://www.facebook.com/share/p/18yEGbU98a/">
https://www.facebook.com/share/p/18yEGbU98a/ )
규모로 치면 티끌에 불과하나 희망의 씨앗을 이어가고 있기에 노아의 방주가 따로 없고 언젠가 태산이 될지도 모릅니다. 우공이산이 별거겠습니까?
글을 쓴 안철환 선생은 온순환협동조합, 전통농업연구소 대표이고 경기도 안산에서 ‘산림생태텃밭 먹거리숲 농장’을 운영한다. 남은 음식물과 똥오줌, 커피 찌꺼기를 받아 직접 거름 만들기를 실천하고 있으며, 우리 토종 종자와 전통 농업 살리기에 열중하고 있다.
25년 전, 처음으로 심은 배추 씨가 3일 만에 싹 트는 걸 보고 ‘씨 안에 누가 있었구나!’ 깨닫고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우리가 먹는 배추는 단순히 물질적인 먹을거리가 아니라 나와 별 차이 없는 생명이며, 그래서 먹는다는 것은 생명을 먹고, 생명과 소통하고, 생명과 하나 되는 일이라고 믿는다.
쓴 책으로 《시골똥 서울똥》(2009), 《24절기와 농부의 달력》(2011), 《호미 한자루 농법》(2016), 《토종농법의 시작》(2020)이 있고, 옮긴 책으로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2004)이 있다.
** 대문사진 : 아이들 두레꾼입니다. 어릴 때 이런 체험을 해 본 사람 중에 큰 인물이 나올 거라 기대합니다. 시골출신 중에 인물 많은 건 오감교육의 현장에서 자랐기 때문 아닐까요? 지식교육은 전문가 키우는 데 맞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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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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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웅박 씻나락] "가식 없는 세계" 정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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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식 없는 세계
정지아(소설가)
어린 시절에는 공부 잘한다고 소문깨나 났었다(중학교에 간 뒤로 줄곧 내리막길을 걷긴 했지만). 간혹 모르는 어른들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이, 니가 공부를 고로크롬 잘한담서이..., 말끝을 흐리고는 쯧쯧쯧 혀를 찼다. 어렸지만 이상하다는 건 알았다. 공부를 잘하는데 왜 혀를 찬단 말인가. 아버지가 빨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그 의미를 이해했다. 공부를 잘해봐야 빨갱이의 자식이라 소용도 없을 텐데 불쌍해서 어쩌냐는 한탄의 축약이라는 것을. 구례에 사는 한 빨갱이의 딸이라는 주홍글씨를 뗄 수 없을 것 같아 엄마를 졸라 서울로 떠났다. 서울서 사는 내내 나는 서울의 익명성이 참으로 좋았다. 토요일이면 하릴없이 연신내 사거리를 쏘다니기도 했다. 햇볕조차 들지 않는 단칸셋방에 있으면 나는 가난한 빨갱이의 딸이었다. 인파에 섞여든 순간, 나는 그 수많은 사람 중의 하나가 되는 듯했다. 그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그 익명성이 나를 숨 쉬게 했다.
고향에 돌아온 뒤, 우연히 옛날 작은고모 살던 집 앞을 지났다. 그곳만 시간을 피해간 듯 옛 모습 그대로였다. 팽나무 아래 평상에서 사오십 년 전 그때처럼 동네 아낙들이 모여 고구마 줄기의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험담을 하면서.
그 시절, 엄마가 바람나서 도망간 언니가 있었다. 친하지는 않았다. 엄마에게 버림받은 그 언니는 노상 고개를 푹 수그리고 다녔다. 언니 얼굴을 똑바로 본 기억이 없다. 어깨 축 늘어뜨린 언니 모습이 저만치 나타나면 고모나 혹은 누군가 쯧쯧 혀를 찼다. 빨갱이의 딸이었던 어린 나에게 그랬듯.
“아이고, 샛서방이 암만 좋아도 글제 자석을 두고 발짝(발걸음의 구례 사투리)이 떼졌으까? 옘벵에 걸려도 땀도 못 빼고 뒤질 년!”
언니도 필시 그 말을 다 들었을 터다. 한 마디 한 마디 비수가 되어 심장을 찔렀겠지. 그래서 언니는 생각했겠지. 아무도 내 엄마가 바람나 도망간 사실을 모르는 곳으로 가고 싶다고. 그 시절의 나처럼. 그러나 공부에 목매다는 엄마가 없던 언니는, 아니 그냥 엄마도 없던 언니는, 나와 달리 도망가지 못했다. 언니는 말의 비수를 견디며 중학교까지 구례에서 졸업했다.
언니를 마지막으로 본 건 내가 전학 가기 직전, 언니의 초등학교 졸업식 날이었다. 아버지가 앞장서고 언니는 서너 발짝 뒤에서 늘 그랬듯 고개를 푹 숙인 채 뒤따르고 있었다. 언니 손에는 그 흔한 꽃다발 하나 들려있지 않았다. 아마 졸업장이 들었을 동그란 통을 가슴에 꼭 안은 채 언니는 아기새처럼 부들부들 떨며 걸었다. 나는 연탄난로가 지펴진 자전거포에서 고모가 삶아준 물고구마를 먹는 중이었다. 고모가 나지막이 언니를 불렀다. 아이, 아가, 라고. 고모는 코끝이 빨간 언니를 자전거포로 불러 고구마 하나를 쥐여주었다.
“아이, 느그 어매는 왔드냐?”
고구마 껍질을 벗기다 말고 언니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감청색 낡은 운동화 위로 후두둑 굵은 눈물이 쏟아졌다. 고모는 언니의 등을 따숩게 두드리며 말했다.
“아매 워디 숨어서 니 얼굴이라고 보고 갔을 것이다. 하모. 지 자석 졸업날인디 워치케든 왔겄제.”
고모는 고구마 몇 개를 바구니에 담아 건넸다.
“움시로 묵으먼 목 멩게 가서 동상들이랑 노나묵어라이.”
언니는 고개를 까닥하고는 바구니를 낀 채 멀어져갔다. 그 뒤에 대고 동네 아낙 누군가 푸짐한 욕설을 퍼부었다.
“오기는 멋을 와. 왔으먼 새끼헌티 돈이라도 멫 푼 쥐여주고 갔겄제. 자석도 잊어불고 아조 샛서방 아랫도리에 홈빡 빠졌는갑구마. 호랭이가 칵 씹어물어갈 년!”
목소리를 줄이는 정도의 배려도 하지 않았으니 그 욕설 또한 언니는 고스란히 맞았을 것이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언니는 부산 어느 공장에 취직했다. 아무도 바람난 엄마에게 버림받은 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부산에서 언니는 행복해졌을까?
서울에서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나는 친구들의 입에서 너희 아버지 뭐하냐는 말이 나올까 봐 가슴을 졸였다. 화제가 아버지에 다다르면 눈치껏 자리를 피했다. 그러나 한번은 기어코 그 질문과 마주치고 말았다. 너희 아버지는 뭐하시냐는 평범한 질문 앞에서 나는 얼어붙었다. 내 아버지는 감옥에 있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어려서부터 눈칫밥 먹어 눈치가 백 단이었던 나는 빛의 속도로 머리를 굴렸다. 아니,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다시는 같은 질문을 받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죽었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철없는 아이들이라도 죽은 아버지를 다시 소환하지는 않을 테니까. 열다섯, 살아있는 아버지를 죽었다고 말할 뻔뻔함까지는 장착하지 못한 나이였다. 그래서 말했다.
“안 계셔.”
사실이었다. 집에 없으니까. 감옥에 있으니까. 친구들은 그 말을 아버지가 죽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였고, 나는 적어도 거짓말은 하지 않았으며, 다시는 그 난감한 질문을 받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다고 나아진 건 없었다. 나아지기는커녕 나는 나날이 음울해졌다. 언니는 어땠을까? 누군가 너희 엄마는 뭐해라고 묻지 않았을까? 그때 언니는 뭐라고 대답했을까? 혹여 가슴에 쌓인 한이 넘치고 넘쳐 언니가 원했던 엄마, 평범한 주부랄지, 학교 선생님이라고 대답하지는 않았을까? 그랬다면 언니는 여전히 행복하지 않을 것만 같다.
구례 같은 작은 동네에서는 누구도 자신의 존재를 숨길 수 없다. 내가 빨갱이의 딸이라는 것을, 언니 엄마가 바람나 집 나갔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안다. 다 아는 일이니 굳이 숨기지도 않는다. 호기심에서 혹은 염려에서 내뱉은 말이 비수가 되어 나나 언니의 가슴을 찔렀지만, 억울하게도 그게 나나 언니의 삶에 주어진 조건이다. 남들이 모른다고 해서 우리의 불행한 조건이 달라지지 않는다. 예쁘든 못생겼든, 똑똑하든 멍청하든, 부잣집 자식이든 가난한 집 자식이든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조건은 받아들이고 거기서부터 출발하는 것 외에는 달리 피해갈 방법이 없다.
나이 들어 고향에 돌아와 보니 알겠다. 시골 사람들이 남의 허물을 생각 없이 들쑤시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아무리 아픈 말도 듣다 보면 둔해진다. 어쩌면 그들은 상처 위에 소금을 뿌려야 빨리 아문다는 것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소금만 뿌린 것도 아니다. 부침개를 부친 이웃의 누군가는 엄마 없는 언니가 안쓰러워 몇 장 가져다주었고, 김치를 담근 누군가는 김치를 손 크게 가져다주기도 했다. 물론 이번에도 소금을 뿌리면서. 그래도 언니는 그런 사람들과 살며 아프게 배우지 않았을까? 엄마에게 버림받아도 누군가의 사소한 도움으로 그럭저럭 살게 된다는 것을. 구례의 욕은 그저 누군가를 내치기 위한 험담이 아니다. 너의 존재를, 고달프기도 가슴 아프기도 억울하기도 한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어찌 보면 철학적인 가르침이다.
글쓴이 : 정지아
_소설가. 『아버지의 해방일지』, 『빨치산의 딸』, 『행복』, 『봄빛』, 『숲의 대화』, 『자본주의의 적』, 『하늘을 쫓는 아이: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 권기옥』, 『노구치 이야기』, 『임종국, 친일의 역사는 기억되어야 한다』 등을 썼으며, 만해 문학상, 이효석 문학상, 김유정 문학상, 오영수 문학상, 한무숙 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뒤웅박 씻나락 칼럼]
지리산 자락 삶이 우리 사회의 대안적 삶의 모습이 되길 꿈꾸는 <지리산人>의 바람을 담아, 지리산 곳곳에 계신 씨앗 같은 이들의 삶과 생각을 싣고자 합니다. 칼럼 글쓴이의 일부 주장이 <지리산人>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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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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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환의 절기 이야기] 보리고개 넘는 소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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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4월에 드는 소만은 4월을 사巳월답게 해주는 절기일 겁니다. 巳월의 상징인 뱀의 기운은 불 화火인데 음적인 화, 곧 음화입니다. 음화는 차가운 불이 아니라 서서히 올라오는 불이라 해야 합니다. 봄의 시작은 양의 호랑이 기운으로 계란의 껍질을 깨듯 땅을 쩍 갈라 시작되지만, 여름은 뱀처럼 스멀스멀 시작됩니다. 이미 봄에서 따뜻한 기운이 쌓여 여름이 시작되기 때문이거든요. 그래서 소만의 소小는 작다는 뜻이 아니라 부사로서 서서히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거지요.
음 기운의 극인 겨울에서 봄은 양의 시작이라 겨울을 박차고 나와야 하니 그 모습도 양답다면, 여름은 봄과 같은 양의 계열이라 봄을 박차고 나오기보다 봄의 양 기운이 쌓여 서서히 시작되는 게 자연스럽죠.
올 봄은 봄스럽지 않게 겨울의 여운이 끈질기게 남아 있다가 별안간 여름 더위가 곡우 전에 잠깐 나타나더니 다시 꽃샘추위가 반복되었어요. 그리고 소만 되기 5일 전부터 비로소 더워지대요. 소만 전날인 어제는 낮부터 비가 밤새 내리더니 오늘까지 가랑비를 흩뿌렸네요. 그 참에 더위도 누그러지고 가문 날씨도 해갈을 시켜주면서 여름은 스멀스멀 우리 곁으로 기어 오는 것 같습니다.
소만에 서서히 들어오는 더위보다 더 힘들게 했던 게 있으니 바로 보리고개입니다. 지난 해 곳간에 모아 둔 곡식은 떨어지고 새로 먹을 보리는 익으려면 한달을 기다려야 하는 고개입니다. 그럼 무얼 먹고 힘든 고개를 넘어야 할까요? 맞습니다. 이때 먹을 수 있는 건 풀떼기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초봄에 많이 올라 온 냉이 같은 생풀들은 꽃피고 독이 올라 먹을 게 많지 않지요. 이를 대비해 나물을 데쳐 말려서 두고두고 먹습니다. 묵나물이라 하고 건나물이라고도 하죠. 독이 오른 쑥 같은 풀은 푹 데쳐 독을 빼고 쌀이나 밀가루로 쑥개떡, 쑥버무리를 해먹습니다. 초근목피라고 들어봤을 겁니다. 소나무의 부드러운 속 껍질(송기)을 벗겨 다져서 쌀과 섞어 죽을 쑤어먹거나 떡을 해먹기도 했죠. 하다못해 솔잎으로 김치도 담가 먹었다 하네요. 지금 생각해보면 비참해 보이기도 할겁니다.
그런데 요즘 다시 뒤돌아보니 그런 굶주림을 버티게 해준 구황먹거리들이 다 영양식이라는 게 역설입니다. 풀이야 그럴 수 있다손 쳐도 나무껍질이 어떻게 영양식이냐고 따질 겁니다. 그런데 아무 껍질이나 다 먹는 게 아니고 좀 전 소개한 소나무 속껍질 송기는 혈액순환을 돕고 염증 제거에 탁월하다고 합니다. 솔잎 김치도 비타민과 미네랄과 섬유질이 풍부했다네요.
그래도 보리고개 때 대표적인 구황식물은 역시 곤드레일겁니다. 고려엉겅퀴라고도 하는 곤드레를 밥처럼 먹을 수 있었던 건 아마도 맛이 없어서가 아닐까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맛 있으면 곧 물려 오래 못 먹잖아요. 나물 맛보단 양념 맛으로 먹는 게 요즘 식당의 곤드레밥일텐데요, 옛날엔 맛있는 양념은커녕 보리밥 한숟갈, 된장 한숟갈에 보이는 건 순 곤드레뿐이었답니다. 자극적인 맛은 없어도 구수한 맛에 담백해 물리지 않기도 했거니와 채소 중 단백질 함량이 높아 밥처럼 먹기에 손색이 없었다는 거죠.
저희는 밥으로 먹기보다 나물로 묻혀 먹거나 쌈으로 먹는 걸 즐기는데 아삭한 식감이 아주 좋습니다.
토종씨앗도 수집하고 옛날 농법도 배우려고 시골 할머니들 찾아 다닐 때 한분이 이런 말씀을 주셨어요. 여름은 거지처럼 나고 겨울은 임금처럼 나야 한다고 말이죠. 다르게 말하면 여름엔 풀떼기나 거친 보리밥을 먹어야 더위를 버틸 수 있고 겨울엔 찰지고 기름진 음식을 먹어야 추위를 이겨낼 수 있다는 거죠. 곰곰 생각해보니 베트남 같은 열대지역의 사람들은 작고 마른 체질이라면 모스크바나 북서유럽 사람들은 덩치도 크고 뚱뚱한 사람들이 많은 게 떠오르더만요. 더위와 추위를 이기는 전략이었을겁니다. 한번은 시베리아 도시로 유명한 러시아 이르쿠츠크라는 도시를 가봤는데 공원의 참새들이 뚱뚱한 거에요. 겨울이 춥고 긴 지역에 먹을 게 뭐 많다고 참새들이 뚱뚱할까요? 맞습니다. 먹을 게 많아서라기보다 추위를 이기기 위한 전략인거죠.
계절 구분 없이 찰지고 기름진 음식들만 먹는 요즘 세태가 아쉽기만 합니다. 고기를 일상적으로 먹는 것도 그렇구요, 하다못해 떡도 죄다 찰떡이에요. 고실고실한 메떡이 사라졌어요. 예전엔 겨울밤에나 찹쌀 떡 장수가 있었잖아요. 여름에 먹는 음식이 아니라는 거죠.
조선시대 임금 중에 풀떼기와 보리밥 즐겨 먹은 분이 있었는데 누굴까요? 바로 영조대왕입니다. 그래서 오래 장수했을 것으로 보지요. 대부분의 임금들이 단명한 이유 중엔 부드럽고 고소한 음식 위주의 식습관이 커요. 예를들면 왕들은 된장을 먹지 않았답니다. 엑기스 간장만 먹었지 된장은 찌꺼기로 본 겁니다. 우리가 자랑하는 세종대왕님은 사실 고기 중독자였어요. 결국 당뇨로 돌아가셨지요. 영조는 풀떼기와 보리밥이 백성들의 천한 밥상이 아니라 지혜로운 건강 밥상이란 걸 어릴 때부터 알았을 겁니다. 누구에게 배웠을까요? 맞습니다. 천하디 천한 무수리 궁녀 어머니였겠지요. 근데 제가 더 주목하는 건 영조시대는 할아버지 왕이었던 현종부터 기후위기로 살기 어려웠던 시절이라는 사실입니다. 1670 경술년 1671 신해년 2년에 걸쳐 이른바 경신대기근이 발생해 자그마치 100만명이나 굶어죽은 무서운 가뭄이 들이닥친 거에요. 당시는 소빙하기라 해서 추위와 가뭄, 역병 등으로 우리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난리였습니다. 이 난국을 영조는 풀과 보리밥으로 이겨내려 한 셈입니다. 말하자면 근검절약 문화를 퍼뜨리고 몸소 실천한 것이죠. 대표적인 게 강력한 금주정책이었고 농사에선 물 없으면 안되는 벼 모내기를 금하고 직파를 권장한 겁니다.(ebs 역사채널e, 조선 모내기를 금하다) 모내기 방법은 수확량도 높고 제초도 손쉬우며 보리와 이모작이 가능한 선진농법이었지만 가뭄이 들면 한방에 망해버릴 위험한 방법이기도 했거든요. 기후위기 시대에 이른바 물 없이 농사짓는 한전旱田농법이 주목받는 이유입니다. 서양이나 일본은 기후위기를 제국주의로 극복하려 한 면이 있다고 저는 봅니다. 남의 것을 빼앗아 위기를 극복하는 거죠. 반면 우리는 외부에 의존하지 않고 내부의 순환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 한 것을 저는 높이 평가합니다. 결국은 실패했지만 자체적으로 극복하기 전에 외적이 쳐들어 온 거에요.
어쨌든 기후위기를 대처할 지혜를 보리고개를 힘겹게 넘었던 조상들로부터 배웠으면 하는 마음으로 장황하게 말씀드렸음을 양해 바랍니다. 다만 물 의존도가 너무 높고 외부의 석유화학 자재를 너무 많이 사용하는 지금의 농법은 매우 위험할 수 있음을 경계하고자 함입니다.
올 봄은 늦은 음력으로 추위가 지속하여 저는 모든 지 늦게 심었습니다. 이제야 상추, 배추를 먹을 수 있고 고추 가지는 아직 모낼만큼 자라지 않아 직파도 병행하고 있지요. 다만 다년생 나물을 많이 심어 3월부터 밥상에 나물이 끊이지 않는 호사를 누리고 있네요. 굳이 심지 않더라도 야생 나물은 좀만 주위를 둘러보면 어렵지 않게 채취할 수도 있습니다. 농사와 채집을 병행했던 우리의 전통 농경문화를 되살렸으면 하는 마음으로 긴 글을 마무리합니다. 감사합니다.
글을 쓴 안철환 선생은 온순환협동조합, 전통농업연구소 대표이고 경기도 안산에서 ‘산림생태텃밭 먹거리숲 농장’을 운영한다. 남은 음식물과 똥오줌, 커피 찌꺼기를 받아 직접 거름 만들기를 실천하고 있으며, 우리 토종 종자와 전통 농업 살리기에 열중하고 있다.
25년 전, 처음으로 심은 배추 씨가 3일 만에 싹 트는 걸 보고 ‘씨 안에 누가 있었구나!’ 깨닫고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우리가 먹는 배추는 단순히 물질적인 먹을거리가 아니라 나와 별 차이 없는 생명이며, 그래서 먹는다는 것은 생명을 먹고, 생명과 소통하고, 생명과 하나 되는 일이라고 믿는다.
쓴 책으로 《시골똥 서울똥》(2009), 《24절기와 농부의 달력》(2011), 《호미 한자루 농법》(2016), 《토종농법의 시작》(2020)이 있고, 옮긴 책으로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2004)이 있다.
* 대문사진 : 필자의 보리고개를 넘게 해준 고마운 곤드레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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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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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주옥 X 인간주옥] ④ 주옥들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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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리산 자락에 사는 윤주옥이다.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곰주옥도 이곳 지리산 자락에 살며 ‘BF-8’로도 불린다. ‘BF-8’은 구례곰마루쉼터(이하 곰쉼터)에 여덟 번째로 들어온 암컷 곰을 뜻한다.
오늘은 ‘주옥들의 하루’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나는 비교적 일찍 일어나는 편이다. 보통 새벽 4시 전후에 깨어난다. 이 시간에 일어나는 비결은 일찍 자기 때문이다. 새벽에 일어난 나는 절도 하고,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아침밥 준비와 빨래도 한다. 아침밥을 먹은 후 외부에 별다른 일정이 없다면 한겨레숲으로 간다. 한겨레숲에 도착한 나는 차를 마시면서 오늘 하루가 어떤 날일지, 무엇을 할지를 생각한다. 그리고는 차밭을 돌아보고, 김철호의 집 앞 상수리나무를 바라본다. 낮밥을 먹은 후에는 풀을 메고, 오후 5시가 넘으면 한겨레숲을 나와 집으로 돌아와 저녁밥을 먹고 하루를 마무리한다.
그렇게 나의 하루가 흘러간다. 그렇다면, 곰주옥의 하루는 어떨까? 장우찬 수의사로부터 들은 곰주옥의 하루는 이렇다. 아침 7시 전후에 일어나 놀거나 쉬다가, 10시 반에서 11시 사이에 오전 밥을 먹는다. 이후 오후 4시경 두 번째 밥을 먹을 때까지 다시 쉬거나 논다. 오후 밥을 먹은 후에도 놀거나 쉬다가 저녁 9시쯤 잠든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이런 하루가 반복된다.
내가 곰주옥을 하루 종일 관찰하고 싶다고 했을 때, 김만우 팀장은 “그 시간 동안 할 게 있을지 모르겠네요.”라고 말했다. 그 말의 의미를 종일 관찰한 뒤에야 알게 되었다. 곰주옥은 밥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누워 있으며, 움직임이 적다. 굴에 올라가 엎어져 있다가 내려와서도 비슷한 자세로 앉아 있다. 곰주옥의 시간은 나보다 백 배쯤 느리게 흐르는 듯하다.
↑ 방 안 굴 아래에서 쉬고 있는 곰주옥 (사진 제공: 구례곰마루쉼터)
그러나 그 느린 시간 속에서도, 곰주옥은 나름의 방식으로 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곰주옥의 하루를 관찰하고 장우찬 수의사의 말을 종합해 보면, 곰주옥은 겉보기에는 움직임이 적다. 그러나 실제로는 곰쉼터의 다른 곰들에 비해 비교적 활발한 편이다. 관절에도 큰 문제가 없어 굴 위아래를 오가는 것도 잘하고, 위협적인 행동도 없다.
색다른 것은, 다른 곰들은 해먹을 달아줘도 올라가지 못하는데 곰주옥은 해먹에서 잠을 자기도 한다는 것이다. 해먹 위에 누운 곰주옥이라니, 묘한 낭만이 느껴진다. 긴 시간 뜬장에 갇혀 지냈지만, 그럼에도 스스로 올라가는 법을 익혔다. 그 사실이 다행스럽고, 어쩐지 뭉클하다.
↑ 해먹에서 자는 곰주옥 (사진 제공: 구례곰마루쉼터)
사육농장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곰들은 처음에는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곰쉼터 직원들의 노력으로 한 달 정도 지나자, 날씨가 좋으면 밖에 나와 햇볕을 쬐고, 도구를 넣어주면 가지고 놀기도 한다. 그들이 배워가는 삶은 지리산의 반달가슴곰들과는 다르지만, 곰으로서의 감각을 다시 익혀가는 과정이다.
↑ 곰쉼터 직원들이 넣어준 공으로 놀이 중인 곰주옥 (사진 제공: 구례곰마루쉼터)
내가 곰쉼터의 곰들에 관심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들은 종종 내게 묻는다. 곰쉼터 곰들도 도토리를 먹냐고.
장우찬 : 사료를 기본으로 주고요. 부식은 계절에 따라 바뀌는데 지금은 고구마, 당근, 양배추, 단호박 정도입니다.
윤주옥 : 계절에 나는 걸 주는 거네요?
장우찬 : 네, 자연스러운 먹이를 맞추려고 노력합니다. 여름에는 수박을 주고, 가을이나 겨울에는 사과나 배 같은 것도 줍니다.
지리산만큼 풍부하지는 않지만,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과일과 채소, 그리고 밤낮의 길이, 온도의 변화 등을 통해 곰쉼터의 곰들도 나름의 방식으로 계절을 느낀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방식에서 보면, 곰주옥과 나는 서로 다른 자리에 있다. 그러나 나의 하루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깨어나고 - 생각하고 움직이고 - 먹고(아침밥) - 다시 움직이고 생각하고 - 먹고(낮밥) - 또 생각하고 움직이고 - 먹고(저녁밥) - 잠드는’ 일의 반복이다. 나는 나의 하루를 소중히 여기며, 이 하루가 흔들리지 않도록 노력한다.
곰주옥을 포함한 곰쉼터의 곰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생명에게는 각자의 하루가 있다. 그 하루는 특별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수많은 생명의 하루를 무너뜨려 왔다. 지금도 곳곳에서 그들의 삶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채 짓눌리고 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들의 ‘하루’ 역시 우리의 하루처럼 소중하다는 사실이다. 그 하루는 결코 가볍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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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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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환의 절기 이야기] 어린이날과 맞아떨어지는 입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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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엔 봄이 늦게까지 머물렀다면, 올 봄은 봄답지 않은 봄이었어요. 지나간 겨울 손님이 아직 안방을 차지한 듯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더니 더 있어야 올 여름 손님은 예고치 않고 들이닥쳐 봄 같지 않게 온 산을 진작 푸르게 만들었거든요. 그런데도 입하 지나도록 바람에 냉기가 서려 있어 일찍 온 여름 손님은 맛만 살짝 보여주고 겨울 손님의 여운만이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 일찍 심은 것도 아닌데 냉해 입은 작물 얘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 오네요. 감기 걸린 사람 소식도 그렇고요. 꽃과 새싹에 마음 뺏겨 몸 돌보길 방심하지 않기 바랍니다.
절기 공부한 이후 왜 하필 입하에 꼭 어린이날이 드는 지 의문이었어요. 사실 입하는 5월 5~ 6일에 들고 어린이날은 고정적으로 양력 5월5일로 잡혀 있으니 똑 같은 건 아니고 내용적으로도 별 상관은 없어 보이긴 합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일본의 어린이 날입니다. 어린이날이 여아, 남아 따로 있었는데요, 3월3일은 여아 어린이날, 5월5일은 남아 어린이날이 그것인데 지금은 5월5일 하나로 통합되었답니다. 근데 저는 그걸 보고 삼짓날과 단오날이 떠오른 겁니다. 맞습니다. 일본 어린이날의 기원은 단오날이었습니다. 앞의 청명 늬우스에서 말씀드린 단오는 양의 홀수 5가 겹치는 날이어서 양의 기운이 가장 센 날입니다. 숫자로는 중양절인 9월9일이 제일 셀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중양절은 가을이고 단오는 여름이니 그렇습니다. 오(午)는 여름을 뜻하고, 단(端)은 시작의 뜻이니 단오는 여름의 시작이에요. 근데 단오는 음력이어서 양력 5월5일 어린이날을 단오와 연결시키는 것은 억지스럽지만 양력만 쓰게 되면서 그리된 것이라 보면 될겁니다.
일본은 어린이날의 기원을 단오에서 찾는 반면 우리는 좀 다릅니다. 소파 방정환 선생이 제안해 시작한 1922년의 어린이날은 5월 1일이었거든요. 그리고 일본 어린이날의 의미는 아이들 건강 기원에 있다면 방정환 선생의 운동은 어린이 인권운동이자 보이지 않게는 독립운동의 일환이었던 겁니다. 또 5월 1일은 노동절로 사회개혁운동의 성격을 담으려 한 의지도 엿보이지요. 그러다 해방 후 1946년에 어린이날을 제정하면서 5월5일로 바꿨습니다. 일본은 1948년 정식으로 제정하면서 5월5일로 했다니 우리가 일본을 따라하진 않았을 겁니다. 다만 단오를 길일로 여기는 동아시아 문화의 영향은 있었을 겁니다. 그러다 양력 문화가 자리잡으며 음력 단오의 의미는 사라지고 양력 절기로 여름이 시작되는 입하에 맞춰졌을 걸로 저는 해석하지요.
그렇지만 제 생각엔 결과적으로 음력 단오보다는 양력 입하가 더 어린이날로 적당해 보입디다. 왜냐하면, 입하의 기운이 더 어린이 기운에 맞다고 보기 때문인데요, 저는 그걸 미운 일곱살 기운이라 말합니다. 특히 풀의 기운이 그렇지요. 나물로 먹을 수 있는 풀들이 이젠 꽃 피고 독이 오르기 시작해 꼭 미운일곱살 아이 닮았다 할까요. 반면 춘분의 기운은 아기천사의 느낌입니다. 못 먹는 풀이 없을 정도로 독초조차 순하지요. 춘분의 아기천사는 똥 싸도 예쁘지만 입하의 일곱살 아이는 차라리 배속에 있을 때가 더 예쁠만큼 밉지요. 움직였다 하면 사고잖아요. 그렇지만 그런 일곱살이 우리에겐 희망입니다. 한참 뛰어다닐 아이가 노인처럼 뒷짐지고 에헴 거리며 다니면 그런 절망도 없을 겁니다. 아이들은 바쁘지도 않은데 맨날 뛰어다니죠? 심장이 발끝에 있어서입니다. 저 같은 중늙은이는 바쁜데도 느려터졌는데 입은 쉬질 않죠? 손끝발끝은 차고 심장은 입에만 머물고 있어서일 겁니다.ㅋㅋ
암튼 그래서 농부는 최소한 입하부터는 풀을 매야 합니다. 사실 이때 풀을 맨다해도 결코 빠른 건 아니에요. 부지런한 농부는 경칩부터 매준다 했어요. 그때 무슨 풀이 있다고 매냐 할겁니다만, 눈에 보일 때 풀 매면 풀을 이길 수가 없어요.
풀은 뽑는 게 아니라 매는 겁니다. 매는 건 흙을 긁어주며 풀을 제거하는 건데요, 풀 없는 곳도 긁어주는 게 중요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풀이 없는 게 아니거든요. 마찬가지로 경칩에도 풀 없는 게 아니라 풀이 보이지 않을 뿐이죠. 작은 풀 씨도 있고 막 싹 튼 풀도 있어요. 긁어주면 싹튼 풀도 제거하지만 풀씨도 흙에 덥혀 싹을 못 틔우죠. 풀은 빛을 봐야 싹 트는 명(明)발아 성질이거든요. 반면 작물은 오랜세월 농부가 심고 덮어주다보니 암(暗)발아 성질을 갖게 된건데요, 상추 같은 경우는 여전히 명발아 성질을 갖고 있어 씨 심고는 흙을 덮은 둥 마는 둥 해야 합니다. 초보농부님들은 불안해 흙을 두껍게 덮어 발아에 실패하는 일이 종종 있지요.
고추 같은 여름 과채류는 입하 어린이날에 모종 심는 게 좋습니다. 늦서리 가시는 곡우에 심기도 하지만 곡우 지나도 냉해가 올 수 있어 조심해야 합니다. 입하 지나도 내륙엔 냉해 입는 경우가 있는데 올해 경북 봉화에선 0.7도까지 떨어졌다고 하네요. 그렇다고 가끔 생기는 일로 마냥 미룰 수만은 없겠지요. 하늘이 하는 일이니 어쩌겠어요.
저는 올해 오랜만에 고추를 직파했습니다. 직파하면 씨가 알아서 날씨를 보고 적당할 때 올라옵니다. 지주 세울 필요도 없어요. 병도 거의 없습니다. 다만 소출이 좀 적긴하지만 종합적으로 가성비를 따지면 직파법이 훨 나을 수 있다고 봅니다.
미운일곱살 입하의 기운을 입하부터는 다스려 주어야 균형있게 성장해 가을에 풍년을 기약할 수 있듯이 어린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었어요. 너무 오냐오냐 키우면 버릇없어진다고 본 거지요. 그런데 요즘 애들은 사정이 좀 달라보이더만요. 저희 밭에 농사체험 하러 오는 어린애들 보니 선생님들이 전부 여성이에요. 애들의 반은 여아들이고요. 그러다보니 분위기가 매우 여성적입디다. 그걸 약간 걱정스런 눈으로 보고 있자니 한 남자애가 내게 와 악수를 청하는데 손을 잡자마자 내 손을 잡아당기며 힘 자랑을 하는 거지 뭡니까? 재밌어 맞대응으로 밀당을 하고 있자니 남자애들이 줄을 서는 거에요. 그 때 알았지요. 남아애들은 어릴 때부터 힘쓰는 법을 배워야 커서 힘을 함부로 쓰지 않을거라는 걸 말이죠. 남성성을 실현하는 법을 배우긴커녕 소외되어 크다보니 요즘 젊은 남성들의 이상한 문화가 해석이 되대요. 저로선 상상도 못할 여혐 현상, 데이트 폭력, 보수화 편향(보수라기보다는 기득권화된 진보에 대한 반발은 아닐지)들 말이죠. 저희 때는 너무 남성주의가 심해 여아들이 소외받던 것과는 영판 다른겁니다.
방정환 선생이 일으킨 어린이 인권운동을 조금은 다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겠어요. 여아는 여아다운, 남아는 남아다운 다양성을 존중할 필요 말이죠. 농사도 마찬가집니다. 춘분에 싹튼 생명들이 입하부터 드러내는 개성들을 잘 존중하는 게 때를 아는 농부의 지혜라는 걸 말이죠.
입하 일정:경기도 안산에 사는 제 개인 일정임을 감안 바랍니다. 입하에 고추 등 과채류 모종하라고 해 놓고 정작 저는 아직 안 하고 있어요. 고추 직파만 했지요.
글을 쓴 안철환 선생은 온순환협동조합, 전통농업연구소 대표이고 경기도 안산에서 ‘산림생태텃밭 먹거리숲 농장’을 운영한다. 남은 음식물과 똥오줌, 커피 찌꺼기를 받아 직접 거름 만들기를 실천하고 있으며, 우리 토종 종자와 전통 농업 살리기에 열중하고 있다.
25년 전, 처음으로 심은 배추 씨가 3일 만에 싹 트는 걸 보고 ‘씨 안에 누가 있었구나!’ 깨닫고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우리가 먹는 배추는 단순히 물질적인 먹을거리가 아니라 나와 별 차이 없는 생명이며, 그래서 먹는다는 것은 생명을 먹고, 생명과 소통하고, 생명과 하나 되는 일이라고 믿는다.
쓴 책으로 《시골똥 서울똥》(2009), 《24절기와 농부의 달력》(2011), 《호미 한자루 농법》(2016), 《토종농법의 시작》(2020)이 있고, 옮긴 책으로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2004)이 있다.
** 대문사진 : 아래는 앉은뱅이밀, 복숭아 나무 지나 보리, 호밀 이삭이 입하 기운 받아 쑥쑥 영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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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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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환의 절기 이야기] 맞아도 온화한 곡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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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사정으로 곡우가 한참 지나서야 곡우 편지를 올립니다. 독자들의 이해를 빕니다!
봄 답지 않은 추위와 더위가 오락가락 하니 물 다라이 밑에 있다 들킨 두꺼비도 매가리가 없네요.
예수님이 우리나라 사람이었으면 춘분보다는 곡우에 부활하기 딱 좋았을텐데 하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상상을 하곤 합니다. 춘분보다는 곡우에 겨울잠에서 깬 생명들의 향연히 더 극적이거든요.
작년엔 곡우비가 일주일 일찍 내렸어요. 음력으로 3월 보름이었지요. 보름엔 비 잘 안오는데 그날은 아침부터 찌뿌리다 오후가 되자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농장에 오기로 한 손님들 맞이하느라 정신없이 비를 흠뻑 맞았지만 그게 곡우비라는 걸 밤이 되어서야 알았어요. 봄비 잘못 맞으면 감기 걸리기 십상인데 그 비는 그러지 않았거든요. 온화한 기운을 담고 있는 비였지요. 아니나 다를까 다음 날 아침에 산을 보니 일제히 나무들에 새순이 돋은 겁니다. 그 기운이 얼마나 신선하고 상큼한지 꽃이 아무리 예쁜들 새순만 할까 했습니다. 화려한 꽃이라 해도 이내 지고 말 운명이지만 새순은 앞날이 창창한 희망을 품고 있으니 그 기운에 어찌 마음이 설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곡우비의 그 기운은 춘분의 기운보다 훨씬 더 극적이고 역동적이라 한 겁니다.
낮과 밤이 같고 낮이 밤을 이기기 시작하는 춘분의 기운이야말로 부활의 힘이란 건 분명하나 춘분 뒤 반갑지 않은 불청객 꽃샘추위가 들이닥치는 게 춘분의 뒤통수라 할까요. 우리 조상들은 이런 걸 보고 액이 빠져나갈 때 꼬리로 뒤통수를 후려 갈기며 나간다 했어요. 액이 나간다고 방심하지 말라는 뜻일 겝니다.
곡우 다음날인 오늘 아침 기온이 1도까지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에는 마치 여름날처럼 낮 기온이 2~3일 28도까지 육박했네요. 그 여름 같은 기운에 곡우가 되지 않았는데도 산의 나무들은 새움 트기 무섭게 여름 기세로 녹색이 우거지고 있었지요. 밭의 나무 새순들도 여느 해와 달랐습니다. 두릅 순은 더운 기운 오기 전에 펴서 먹을만했는데 그 뒤에 올라온 엄나무 순, 오가피 순은 올라오자 마자 세지고 있더만요. 철쭉 꽃도 몽우리 맺히자마자 더운 기운을 맞더니 바로 만개를 하대요.
음력이 늦어 추운 날씨에 봄 같지 않던 기세가 느닷없이 닥친 여름 기운에 봄은 다 간줄 알았다가 오늘 아침 불청객 꽃샘추위로 정신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올 봄 내내 늦게 심어야 한다고 많이 강조했습니다. 음력이 늦은 봄엔 꽃샘추위가 늦게까지 올 수 있거든요. 음력의 주인공인 달은 바닷물을 밀고 당기며 날씨를 주관하는 걸 알았던 조상들은 그래서 음력을 파종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그렇지만 뜨거운 햇빛과 일조량을 주관하는 태양의 존재를 달이 거스를 수는 없다는 것도 알았기에 조상님들은 양력인 절기와 함께 음력을 살펴보았지요.
말하자면 음력이 늦어 늦게 찾아 온 꽃샘추위가 아무리 드세도 봄이 여름으로 가는 길목을 막을 수는 없는 거거든요. 다만 아쉬운 건 봄이 봄답지 못한 건데요, 곡우에 곡식 심기 좋은 비가 내리지 않고 꽃샘추위가 내렸으니 제대로 된 곡우비는 좀더 기다려 봐야겠습니다. 하긴 곡우날인 어제 비가 온다기에 그건 곡우비가 아닐거라고 보긴 했어요. 음력 3월 초순이라 너무 이른 거지요. 그래서인지 5미리도 안 되는 찬비가 찔끔 내리고 말았어요. ㅋ
아무튼 곡우비가 가져다 주는 생명의 기운은 매번 감동적이지만 처음 곡우비의 신비를 보았을 때의 감동은 20여년 지난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저희 밭은 군포에서 안산 넘어 오는 영동고속도로 밑 토끼굴 지나 산 밑에 있는데 곡우비 그친 다음날 어두운 그 굴을 지나자마자 내 눈앞에 펼쳐진 온 산 나무들의 새순은 생명들의 팡파레이자 세레모니였어요. 입과 눈을 닫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걸 예수님 못지않은 생명들의 부활이라 느꼈지요.
우리나라의 봄의 부활이 감동적인 것은 모든 게 죽는 추운 겨울 때문일 겁니다. 겨울이 별로 춥지 않아 변함없는 녹색을 자랑하는 호주의 겨울을 보았을 때 부럽기까지 했어요.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런 나라의 봄은 별로 부활의 감동이 없을 거라는 걸 알았지요. 너무 추워 모든 게 죽는 우리의 겨울이 역설적으로 축복이라는 걸 느낀 것도 한 참 나이 들고 나서였죠.
춘분에서부터 부활하기 시작한 기운이 곡우에 와서야 완성되는 셈입니다. 춘분을 기점으로 부활하는 생명들은 아직 뒤통수를 노리고 있는 꽃샘추위를 조심해야 합니다. 때문에 여전히 움추리고 있는 생명들이 적지 않아요. 그러나 곡우 때 따스한 봄비로 이젠 모든 추위가 물러가니 만물이 마지막 기지개를 켜 약동의 계절을 준비하는 겁니다.
곡우(穀雨) 지나면 여름 나는 작물들은 대부분 파종할 수 있습니다. 곡식 심기에 좋은 비가 내린다는 말 그대로이죠. 벼를 비롯해, 옥수수, 수수, 콩 등 곡식에서부터 고추, 오이, 수박, 호박, 참외, 토마토 등 과채류까지 심을 수 있으나 들깨, 조, 고구마, 메주콩, 팥 등은 장마 근방에 심는 게 좋습니다. 일찍 심으면 웃자라 오히려 피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인데 그래서 늦게 심는 이런 작물들은 감자나 마늘, 양파, 밀, 보리 등을 6월 중에 수확해 그 자리에 이어심는거지요. 이를 그루작물이라 하는데 앞 작물 수확 후 남는 그루(밑둥)들을 갈아엎어 심는다 해서 그렇게 부릅니다. 앞 그루 갈아엎는 거는 그루갈이라 하지요.
고추나 가지 토마토 등 과채류 모종들은 보통 곡우 지나 심지만 보통은 입하 지나 심는 게 안전합니다. 최저 기온이 10도 이하로 내려가면 냉해를 조심해야 하거든요.
곡우 근방에 논을 잘 갈아둡니다, 밭은 경칩부터 갈지만 그렇게는 못해도 곡우부터는 갈아둡니다. 보리나 밀과 이모작 하는 논은 갈 수 없겠지요. 곡우 즈음 보리가 이삭 패고 곡우 조금 지나 보리보다 일주일 늦게 이삭 패는 밀을 위해 이삭거름을 주어야 합니다. 이젠 풀들도 억세집니다. 냉이는 벌써 꽃 피고 져서 씨를 맺고 있어요. 날은 아직 춥지만 풀들은 추위를 무릅쓰고 제 날에 올라와 기세를 부리니, 이래저래 풀을 인간이 이기기는 힘들기만 합니다.
곡우 직전 낮 28~29도까지 여름날씨 처럼 기온이 올라 산의 나무들이 여름 기세로 힘차게 녹색 기운을 뽐 내더니 곡우 지나자 마자 꽃샘추위가 급습하곤 이내 봄 가뭄이 시작됐네요. 곡우 다음날 비온다기에 곡우비인가 했더니 찔끔 오고 말아 봄 가뭄을 막지도 못했지요. 다음 주 음력 3월 중순 즈음 비 소식 있어 곡우 비이길 기대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최고의 봄 가뭄이 올까 저어됩니다.
글을 쓴 안철환 선생은 온순환협동조합, 전통농업연구소 대표이고 경기도 안산에서 ‘산림생태텃밭 먹거리숲 농장’을 운영한다. 남은 음식물과 똥오줌, 커피 찌꺼기를 받아 직접 거름 만들기를 실천하고 있으며, 우리 토종 종자와 전통 농업 살리기에 열중하고 있다.
25년 전, 처음으로 심은 배추 씨가 3일 만에 싹 트는 걸 보고 ‘씨 안에 누가 있었구나!’ 깨닫고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우리가 먹는 배추는 단순히 물질적인 먹을거리가 아니라 나와 별 차이 없는 생명이며, 그래서 먹는다는 것은 생명을 먹고, 생명과 소통하고, 생명과 하나 되는 일이라고 믿는다.
쓴 책으로 《시골똥 서울똥》(2009), 《24절기와 농부의 달력》(2011), 《호미 한자루 농법》(2016), 《토종농법의 시작》(2020)이 있고, 옮긴 책으로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2004)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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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