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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웅박 씻나락] "우리가 의료사협을 시작하게 된 이야기" 김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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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의료사협을 시작하게 된 이야기
김명철 (경남산청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사진: Unsplash의 Shane Rounce
무엇보다 내가 행복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려면 제 주변 사람들도 같이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했고요. 그래서 젊은 시절부터 이야기해 오던 공동체를 느슨하게라도 실현하고 싶었습니다. 만드는 게 힘이 들긴 하지만 어느 정도 형성이 되고 나면 (마치 합창처럼) 거기서 느껴지는 ‘같이하는’ 것에 대한 행복감을 맛보고 싶었던 거죠,
시작은 안솔기마을이라는 생태마을에서 했습니다. 같이 음악회도 하고 소풍도 가고 운동회도 하고.... 그러다 마을이 너무 작아 같이 하는 것에 불편해하는 분들을 봤고 그러면서 안 하고 싶은 자유가 굉장히 중요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주변의 마을들과 합창제도 해 보고 같이 운동회도 하고 했는데 이것도 역시 쉽지는 않더군요. 그러면서 규모가 좀 커야 개인의 자유도 보장하고 좀 더 다양한 일을 할 수 있겠다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러다 12년 전 산청에 한방 엑스포가 열린다길래 군민들을 대상으로 건강 강좌를 매달 마지막 수요일에 (마수걸이)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하니 자발적으로 도와주는 분들이 있어서 운영위를 만들었고 그 운영위 중 한 분이 구례 콩장을 다녀와서는 우리도 플리 & 프리마켓을 하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저도 그게 너무 좋겠다 싶어 동의했고, 그 길로 바로 주변 사람들에게 연락해서 모임을 열고 그 해에 목화장터라는 마켓을 시작했습니다.
제 생각엔 이 마켓이 생기면 촌에서 흩어져 살고 있는 사람들이 한 번씩 모여 안부도 묻고 정보도 나누고, 재미난 공연으로 문화적 갈증을 해소하고 음악적 재능이 있는 분들에겐 그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장소 제공도 되고, 또 혼자 먹기에는 많고 시장에 내다 팔기에는 어중간한 분들의 판매처도 되고, 직접 만든 공예품이나 옷 같은 것을 팔 수도 있고, 버리기에는 아까운 물건들을 팔거나 나눔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적극적으로 찬성을 했죠. 그리고 무엇보다 제가 기대를 했던 건 맥주나 막걸리를 같이 마시면서 소통을 하다가 집으로 갈 때는 장 본 것을 들고 가는 독일의 어느 장터를 우리도 했으면 하는 것이었죠.
그렇게 장터를 주변 사람들과 같이 열고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재미도 있었습니다. 우리 온라인 커뮤니티(밴드) 회원이 많아지다 보니(현재 5,075명) 모임을 만드는 것이 쉬워져 합창단, 지속가능발전협의회 등 원하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게 되었죠. 그리고 이 장터의 힘으로 만들어진 지속넷(지속가능발전네트웍)에서 주최한 100인 원탁회의에서 의료사협(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을 만들자는 제안을 했었고 많은 분의 도움으로 이 일도 진행이 되었죠.
사실 의료사협을 만들자고 했을 때 제 개인적으로는 사회적 약자를 돕고 느슨한 공동체를 형성하고 싶어서였는데 만들고 보니 정말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할 수 있는 일들이 많더군요. 시작할 때의 슬로건은 ‘함께 만드는 건강, 더불어 행복한 삶, 지속 가능한 공동체’였는데 한의원이 그런대로 안정적으로 운영되니 지역에서 일어나는 필요한 곳에 도움을 줄 수도 있게 되었고 성심원 내에 장애와 비장애, 남녀노소를 아우르는 공동체를 만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실제로 시작을 한 상태이긴 합니다) 제대로 된 요양원이나 호스피스 병동을 포함한 힐링센터를 만들 수도 있겠단 꿈을 꾸기도 하고요. 그리고 즐거운 일들은 같이 나누고 힘든 일은 같이 돕는 이런 일들을 어느 정도 실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좋습니다.
실제로 목화장터에 도움을 주기도 하고 지속넷과도 같이 협력하며 도와 주기도 하고 지역의 ‘그늘과 언덕’이라는 곳과도 같이 힘을 모아 작년의 수해복구와 피해자들의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일도 했고요. 이런 일들을 의료사협이라는 곳의 조직력과 (미미하지만) 재정적인 여유로 같이 행복한 공동체를 만드는 데 역할을 하는 것 같아 좋습니다. 지금은 재택의료센터도 만들어 열심히 방문 진료를 하는 중이고 가정의학과도 열어서 한방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좋은 의사 선생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국가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아서 통합돌봄을 실천 중이기도 하고요.
이렇게 어쩌면 정신없을 정도로 짧은 시간에 많은 일들을 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주변 사람들이 좋은 강좌나 지역 소모임을 통해 아프기 전에 건강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또 혹시 아프면 믿을 수 있는 의료진과 주변의 도움으로 나을 수 있도록 하며, 설령 잘 낫지 않아 사망하게 되더라도 주변의 배웅과 도움을 받으며 존엄하고 평안하게 갈 수 있는 곳을 만들고 싶습니다.
물론 이런 일들이 다 실행이 안 될 수도 있겠지만 ‘가다가 중지하면 간만큼 이익이다.’란 생각으로 ‘오늘도 어떻게 하면 같이 행복해질 수 있을까?’란 생각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글쓴이 : 김명철
_경남산청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경남산청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홈페이지 https://gscmedc.org 사무국 055-973-0407
경남 산청군 산청읍 산청대로 1381번길 17
*산청 주민이 아니어도 조합원으로 가입하실 수 있습니다. 사무국으로 문의해주세요.
[뒤웅박 씻나락 칼럼]
지리산 자락 삶이 우리 사회의 대안적 삶의 모습이 되길 꿈꾸는 <지리산人>의 바람을 담아, 지리산 곳곳에 계신 씨앗 같은 이들의 삶과 생각을 싣고자 합니다. 칼럼 글쓴이의 일부 주장이 <지리산人>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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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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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웅박 씻나락] "히가시카와에서 상상하는 n개의 산내" 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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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카와에서 상상하는 n개의 산내
누리 (지리산이음, 산내청년네트워크틈새 활동가)
반듯한 도로와 평야가 펼쳐진 히가시카와의 풍경.
네모반듯한 ‘칼각’으로 푸르고 광활하게 펼쳐진 논밭 사이를 국도가 가로지른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이어지는 평원 너머에는 하얀 물감을 군데군데 칠해 놓은 듯이 머리가 희끗한 설산이 자리 잡고 있다. 지붕이 비스듬한, 서로 닮은 디자인의 집들이 길가에 점점이 서 있어서, 시력 검사 기계 속 언덕 위의 빨간 집이 떠오른다. 6월의 홋카이도, 일본 1호라는 다이세쓰 국립공원은 아직 눈에 덮여 있었다.
6월 첫 주를 일본 최북단 북해도의 시골마을 히가시카와정에서 보냈다. 일본의 기초잔치단체인 시, 정, 촌 중 정은 한국으로 치면 ‘읍’ 정도에 해당한다. 요즘은, 평소와 다른 풍경 속에서 쉬엄쉬엄 일하라고, 여행 대신 ‘워케이션’을 오라며 현대 도시인들에게 말을 거는 지자체들이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각지에 많다. 우리는 바다 건너 히가시카와에서 워케이션을 보냈다. 이번 여정에는 제주, 태백, 거창 등 전국 곳곳, 각자의 지역에서 작은 변화를 만들어 가고 있는 사람들 13명이 함께했다.
사람들의 말소리보다 새들의 지저귐이 훨씬 크게 들려오는, 한적한 히가시카와에서 13인의 한국인들은 서로 약속하지 않았는데도 마주쳤다. 미슐랭의 인정을 받았다는 작은 소바집에서, 행정에서 운영하는 공공도서관이자 복합 교류 공간인 ‘센토퓨어’의 서가에서, 동네에서 가장 큰 마트의 조리식품 코너 앞에서. 일행 중 누군가가 자전거를 타고 몇 번이나 다녀왔다는, 걸어가기에는 제법 먼 거리의 주먹밥집에 옹기종기 찾아가 아침 찬을 쓸어오기도 했다. 여정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먼저 다녀간 사람들의 평을 듣고 즐겨찾기 해 둔 구글 지도가 있었는데, 낯선 동네에서 동행들의 추천 멘트는 하나같이 강력했다. 한 사람이 대화 중에 ‘여기 다녀왔는데 좋더라’ 하면 사람들은 귀를 열고 열심히 들었다. 그게 재밌어서 '도장 깨기'하는 것처럼 여기저기 쏘다녔다.
내가 사는 남원시 산내면은 히가시카와에 비하면 (적어도 구글 지도에서는) 불모지에 가깝다. 일본에서 유일하게 25년 연속으로 인구가 늘어났다는 농촌 마을, 히가시카와의 성공 비결이 궁금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구해 읽는다는 『히가시카와 스타일』 처럼 특별하고 고유한 ‘산내 스타일’ 따위를 정의한 책도 없다. “왜 여기 살고 계세요?”라는 말을 지금도 가끔 듣는다. 다른 곳으로 나가고 싶지는 않냐는 일말의 걱정 섞인 질문도 동네 어른들에게, 바깥에서 온 사람들에게 골고루 종종 듣는다. 나름대로 고민은 해 봤지만, 딱히 상대를 이해시킬 만한 뾰족한 대답도 없어서 얼버무리고 만다.
다만 몇 해 전 동네 한의원이 문을 닫고, 어린이집이 휴업을 하게 되면서 새로이 갖게 된 물음표는 이런 것이다. 여기가 없어지더라도 계속 산내에 살고 싶을까? 예를 들면, 이사 온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이 여유 시간을 보내고 마음 맞는 커뮤니티를 찾아가는, 내 10대 시절이 담긴 품안작은도서관이 없어진 산내는 어떨까? 산내초등학교에는 4월이면 함께 추모식을 하고 노란 꽃을 심어 가꾸는 세월호 기억 꽃밭이 있는데, 꽃밭을 돌볼 어린이들이 없어진 산내는 어떨까? 지금 당장 나에게 필요 없는 옷과 물건들이 순환될 수 있도록 내어놓는 '득템'의 성지, 자원순환가게 나눔꽃이 없어진 산내는 또 어떨까? 눈인사를 건너뛰고 안부를 묻는, 서로의 맥락을 아는 이웃들이 떠난 산내라면?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계속 산내에 살고 있는 이유, 없어지면 몹시 아쉬울 산내 고유의 아름다움이라는 건 있는 셈이다.
산내청년네트워크 틈새에서는 올해 그러한 연유로 다른 지역에 사는 또래 청년들에게 산내에 잠깐 살아보자는 초대장을 보내고 있다. 방식은 여러 가지다. '지금 도시에서 살고 있는 방식이 마음에 들어? 고민된다면 여기 와서 조금 다른 속도로 사는 마을을 경험해 보는 건 어때?'하고 말을 걸기도 하고, 산내에 사는 사람들의 삶 이야기를 거쳐서 마을을 소개하기도, 산내에서 더 예민하게 감각할 수 있는 사계절의 세계로 안내하기도 한다.
다가오는 7월의 프로그램을 위해 시도해 본 방식은 바로 함께 지도를 채워 나가는 작업이다. 산내를 가로질러 흐르는 람천과 임천의 물줄기를 따라, 지리산의 푸르른 산줄기를 따라 평면 지도 위를 짚어 나가다 보면 잊고 있던 장소 속 이야기들이 되살아난다. 산내 구석구석에 얽힌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 조각도 받았다. 내가 일하고 가꾸는 지리산문화공간 토닥은 누군가에게 카페 대신 소중한 '무대'로 의미화되었고, 물 흐르는 소리의 크기로 지금 계절이 비가 많은지, 가문지 가늠할 수 있는 해탈교는 누군가가 밤하늘 가득 총총한 별을 올려다보며 산내에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은 곳이었다. 이럴 때는 같은 산내에 살고 있는 것 같아도, 100명이 경험하는 100개의 산내가 다 각기 다를 것이라는 깨달음이 찾아와 아득해지기도 한다. 수학이든 무엇이든 정말 내가 잘 이해하고 있는지 판단하려면 다른 사람을 가르쳐 보라고 하는데, 우리는 스스로 무지를 깨닫고 열심히 공부하는 중이다. 불특정 다수의 손님에게 말을 걸어보기로 한 덕분에, 오히려 내가 산내를 많이 알게 되었다.
센토퓨어의 '너의 의자' 프로젝트 전시 코너.
주민과 여행자,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히가시카와의 복합 교류공간 '센토퓨어'의 정문으로 들어가면 이 지역이 자랑하는 '너의 의자' 프로젝트 컬렉션이 명당 자리를 차지하고 서 있다. 2006년부터 2026년까지, 히가시카와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본인의 이름과 생년월일이 새겨진 세상에 하나뿐인 수제 의자를 선물 받는다. 매년 그해만의 맞춤 디자인이 선정되고, 제작 또한 히가시카와에 위치한 목공방 중 하나에서 맡는다. 이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아이들은 의자를 통해 소속감을 느낄 것이고, 학업이나 취업 등으로 다른 지역에 가게 되어도 마을에는 여전히 내 자리가 있다는 안정감을 느끼리라 어렵지 않게 짐작해 볼 수 있다. "태어나 줘서 고마워, 너의 자리는 여기에 있단다." 적어도 그런 의미를 담아 기획했다는 모양이다.
'우리'라는 말에는 울타리 안의 요소들을 마법처럼 하나로 묶어 주는 힘이 있고, 동시에 그 바깥의 것들을 밀어내는 배타성도 숨어 있다. 그런 '너의 의자'의 의미가 확장된 순간이 있었다. 일본인들에게 큰 상흔으로 남은 3.11 동일본 대지진이다. 2만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거나 실종된 참사의 날에도 피해 지역인 도호쿠 지역에는 104명의 아이들이 태어났다. 800km 떨어진 북해도에서 보내온 '희망의 너의 의자' 104개에는 "다부지게 미래로."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히가시카와 공민관 앞에 나란히 선 어린이용 자전거들.
히가시카와에서 보낸 시간 동안 먼 길을 떠나온 몸과 다르게 마음은 자꾸 고향으로 돌아가, 산내가 어떤 마을이기를 바라는지 상상하게 되었다. 숙소와 카페에 이 마을에서 만드는 가구와 잔, 소품들이 자연스레 비치되어 있었던 점, 거리낌없이 문턱을 넘고 자리 잡을 수 있는 장소가 있다는 점은 정말이지 마음에 들었고, 어딜 가든 외국에서 온 사람에게 편하고 친근하게 말 걸어 주는 점도 괜찮았다. 반면 마을버스를 타려면 전날 예약해야 하는 시스템은 잠시 다녀가는 입장에서는 높은 장벽으로 느껴졌고, 외식 메뉴를 고를 때에 채식 등 다양한 선택지가 없는 부분은 다소 아쉬웠다.
히가시카와에 함께 간 사람들은 바다를 건너가서도 참 자기다웠는데, 농사를 짓는 사람은 줄기가 아직 여린 새싹 작물을 어떻게 보호하며 키우는지 유심히 들여다보았고, 산을 타는 사람은 새벽같이 뒷산을 오르며 울창한 나무들과 새를 만나고 왔고, 일본 각지를 누비며 탐방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사람은 그곳에서도 미니 탐방 루트를 만들어서 동행들을 능숙하게 가이드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고. 13명이 만난 13개의 히가시카와가 거기 있었다. 산내 마을 구석구석에도 방문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시선이 더해지고, 경험이 쌓여 나갈 것이 기대된다. n명의 사람들이 만나는 n개의 산내. 지금 '우리'를 넘어 누구에게 손을 내밀고, 어떤 의자를 내어줄 수 있을까? 거창하지 않더라도 함께 궁리하고, 무턱대고 실천하고 싶다.
틈새에서 진행한 2주살이 캠프 참여자들의 그날 하루를 돌아보는 엽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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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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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웅박 씻나락] "가식 없는 세계" 정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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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식 없는 세계
정지아(소설가)
어린 시절에는 공부 잘한다고 소문깨나 났었다(중학교에 간 뒤로 줄곧 내리막길을 걷긴 했지만). 간혹 모르는 어른들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이, 니가 공부를 고로크롬 잘한담서이..., 말끝을 흐리고는 쯧쯧쯧 혀를 찼다. 어렸지만 이상하다는 건 알았다. 공부를 잘하는데 왜 혀를 찬단 말인가. 아버지가 빨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그 의미를 이해했다. 공부를 잘해봐야 빨갱이의 자식이라 소용도 없을 텐데 불쌍해서 어쩌냐는 한탄의 축약이라는 것을. 구례에 사는 한 빨갱이의 딸이라는 주홍글씨를 뗄 수 없을 것 같아 엄마를 졸라 서울로 떠났다. 서울서 사는 내내 나는 서울의 익명성이 참으로 좋았다. 토요일이면 하릴없이 연신내 사거리를 쏘다니기도 했다. 햇볕조차 들지 않는 단칸셋방에 있으면 나는 가난한 빨갱이의 딸이었다. 인파에 섞여든 순간, 나는 그 수많은 사람 중의 하나가 되는 듯했다. 그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그 익명성이 나를 숨 쉬게 했다.
고향에 돌아온 뒤, 우연히 옛날 작은고모 살던 집 앞을 지났다. 그곳만 시간을 피해간 듯 옛 모습 그대로였다. 팽나무 아래 평상에서 사오십 년 전 그때처럼 동네 아낙들이 모여 고구마 줄기의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험담을 하면서.
그 시절, 엄마가 바람나서 도망간 언니가 있었다. 친하지는 않았다. 엄마에게 버림받은 그 언니는 노상 고개를 푹 수그리고 다녔다. 언니 얼굴을 똑바로 본 기억이 없다. 어깨 축 늘어뜨린 언니 모습이 저만치 나타나면 고모나 혹은 누군가 쯧쯧 혀를 찼다. 빨갱이의 딸이었던 어린 나에게 그랬듯.
“아이고, 샛서방이 암만 좋아도 글제 자석을 두고 발짝(발걸음의 구례 사투리)이 떼졌으까? 옘벵에 걸려도 땀도 못 빼고 뒤질 년!”
언니도 필시 그 말을 다 들었을 터다. 한 마디 한 마디 비수가 되어 심장을 찔렀겠지. 그래서 언니는 생각했겠지. 아무도 내 엄마가 바람나 도망간 사실을 모르는 곳으로 가고 싶다고. 그 시절의 나처럼. 그러나 공부에 목매다는 엄마가 없던 언니는, 아니 그냥 엄마도 없던 언니는, 나와 달리 도망가지 못했다. 언니는 말의 비수를 견디며 중학교까지 구례에서 졸업했다.
언니를 마지막으로 본 건 내가 전학 가기 직전, 언니의 초등학교 졸업식 날이었다. 아버지가 앞장서고 언니는 서너 발짝 뒤에서 늘 그랬듯 고개를 푹 숙인 채 뒤따르고 있었다. 언니 손에는 그 흔한 꽃다발 하나 들려있지 않았다. 아마 졸업장이 들었을 동그란 통을 가슴에 꼭 안은 채 언니는 아기새처럼 부들부들 떨며 걸었다. 나는 연탄난로가 지펴진 자전거포에서 고모가 삶아준 물고구마를 먹는 중이었다. 고모가 나지막이 언니를 불렀다. 아이, 아가, 라고. 고모는 코끝이 빨간 언니를 자전거포로 불러 고구마 하나를 쥐여주었다.
“아이, 느그 어매는 왔드냐?”
고구마 껍질을 벗기다 말고 언니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감청색 낡은 운동화 위로 후두둑 굵은 눈물이 쏟아졌다. 고모는 언니의 등을 따숩게 두드리며 말했다.
“아매 워디 숨어서 니 얼굴이라고 보고 갔을 것이다. 하모. 지 자석 졸업날인디 워치케든 왔겄제.”
고모는 고구마 몇 개를 바구니에 담아 건넸다.
“움시로 묵으먼 목 멩게 가서 동상들이랑 노나묵어라이.”
언니는 고개를 까닥하고는 바구니를 낀 채 멀어져갔다. 그 뒤에 대고 동네 아낙 누군가 푸짐한 욕설을 퍼부었다.
“오기는 멋을 와. 왔으먼 새끼헌티 돈이라도 멫 푼 쥐여주고 갔겄제. 자석도 잊어불고 아조 샛서방 아랫도리에 홈빡 빠졌는갑구마. 호랭이가 칵 씹어물어갈 년!”
목소리를 줄이는 정도의 배려도 하지 않았으니 그 욕설 또한 언니는 고스란히 맞았을 것이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언니는 부산 어느 공장에 취직했다. 아무도 바람난 엄마에게 버림받은 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부산에서 언니는 행복해졌을까?
서울에서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나는 친구들의 입에서 너희 아버지 뭐하냐는 말이 나올까 봐 가슴을 졸였다. 화제가 아버지에 다다르면 눈치껏 자리를 피했다. 그러나 한번은 기어코 그 질문과 마주치고 말았다. 너희 아버지는 뭐하시냐는 평범한 질문 앞에서 나는 얼어붙었다. 내 아버지는 감옥에 있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어려서부터 눈칫밥 먹어 눈치가 백 단이었던 나는 빛의 속도로 머리를 굴렸다. 아니,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다시는 같은 질문을 받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죽었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철없는 아이들이라도 죽은 아버지를 다시 소환하지는 않을 테니까. 열다섯, 살아있는 아버지를 죽었다고 말할 뻔뻔함까지는 장착하지 못한 나이였다. 그래서 말했다.
“안 계셔.”
사실이었다. 집에 없으니까. 감옥에 있으니까. 친구들은 그 말을 아버지가 죽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였고, 나는 적어도 거짓말은 하지 않았으며, 다시는 그 난감한 질문을 받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다고 나아진 건 없었다. 나아지기는커녕 나는 나날이 음울해졌다. 언니는 어땠을까? 누군가 너희 엄마는 뭐해라고 묻지 않았을까? 그때 언니는 뭐라고 대답했을까? 혹여 가슴에 쌓인 한이 넘치고 넘쳐 언니가 원했던 엄마, 평범한 주부랄지, 학교 선생님이라고 대답하지는 않았을까? 그랬다면 언니는 여전히 행복하지 않을 것만 같다.
구례 같은 작은 동네에서는 누구도 자신의 존재를 숨길 수 없다. 내가 빨갱이의 딸이라는 것을, 언니 엄마가 바람나 집 나갔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안다. 다 아는 일이니 굳이 숨기지도 않는다. 호기심에서 혹은 염려에서 내뱉은 말이 비수가 되어 나나 언니의 가슴을 찔렀지만, 억울하게도 그게 나나 언니의 삶에 주어진 조건이다. 남들이 모른다고 해서 우리의 불행한 조건이 달라지지 않는다. 예쁘든 못생겼든, 똑똑하든 멍청하든, 부잣집 자식이든 가난한 집 자식이든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조건은 받아들이고 거기서부터 출발하는 것 외에는 달리 피해갈 방법이 없다.
나이 들어 고향에 돌아와 보니 알겠다. 시골 사람들이 남의 허물을 생각 없이 들쑤시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아무리 아픈 말도 듣다 보면 둔해진다. 어쩌면 그들은 상처 위에 소금을 뿌려야 빨리 아문다는 것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소금만 뿌린 것도 아니다. 부침개를 부친 이웃의 누군가는 엄마 없는 언니가 안쓰러워 몇 장 가져다주었고, 김치를 담근 누군가는 김치를 손 크게 가져다주기도 했다. 물론 이번에도 소금을 뿌리면서. 그래도 언니는 그런 사람들과 살며 아프게 배우지 않았을까? 엄마에게 버림받아도 누군가의 사소한 도움으로 그럭저럭 살게 된다는 것을. 구례의 욕은 그저 누군가를 내치기 위한 험담이 아니다. 너의 존재를, 고달프기도 가슴 아프기도 억울하기도 한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어찌 보면 철학적인 가르침이다.
글쓴이 : 정지아
_소설가. 『아버지의 해방일지』, 『빨치산의 딸』, 『행복』, 『봄빛』, 『숲의 대화』, 『자본주의의 적』, 『하늘을 쫓는 아이: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 권기옥』, 『노구치 이야기』, 『임종국, 친일의 역사는 기억되어야 한다』 등을 썼으며, 만해 문학상, 이효석 문학상, 김유정 문학상, 오영수 문학상, 한무숙 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뒤웅박 씻나락 칼럼]
지리산 자락 삶이 우리 사회의 대안적 삶의 모습이 되길 꿈꾸는 <지리산人>의 바람을 담아, 지리산 곳곳에 계신 씨앗 같은 이들의 삶과 생각을 싣고자 합니다. 칼럼 글쓴이의 일부 주장이 <지리산人>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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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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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웅박 씻나락] "침묵이 깨지고 다른 말이 자라는 동네책방 살롱드마고" _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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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이 깨지고 다른 말이 자라는 동네책방 살롱드마고
우리 책방 ‘살롱드마고’에는 세 가지가 없다. 입시용 참고서나 문제집, 대형서점의 베스트셀러 자리를 차지하는 자기계발서, 평생 권위를 누린 남성 문학가들의 작품집. 대신 다른 세 가지가 있다.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며 생각을 전환해 주는 인문서, 다양성과 페미니즘을 주제로 하여 소수자의 목소리가 담긴 장르별 도서들, 그리고 자기만의 언어로 세상을 한발 더 나아가게 하는 용감한 여자들의 이야기.
살롱드마고 곳곳에는 성소수자를 비롯해 누구나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 환대하고 성폭력에 반대한다는 메시지가 책과 이미지로 전시되어 있다. 이곳에 방문하는 사람들이 “들어오는 순간 왠지 안전하게 느껴진다”고 말하는 이유는 아마 살롱드마고만의 북큐레이션과 지향이 공간에 그러한 색을 입히고, 힘을 더하기 때문일 것이다.
살롱드마고는 2015년 남원시 산내면에서 여성주의 문화단체 ‘문화기획달’의 활동공간이자, 마을 여성들을 위한 창작·교육 공간으로 출발했다. 이후 조직을 재구성하며 ‘협동조합마고’를 창립하고 2020년 활동지를 남원시청 옆으로 옮기면서, 살롱드마고를 지역서점이자 페미니즘 문화공간으로 다시 열게 되었다.
현재는 카페를 같이 운영하면서 책방지기들이 추천한 초대작가들의 작품과 뉴스레터를 볼 수 있는 ‘아티스트 테이블’, 기록을 테마로 하여 필사와 다꾸(다이어리 꾸미기)를 할 수 있는 ‘플레이 라운지’, CD로 청음을 하며 음악가들의 도서 큐레이션을 볼 수 있는 ‘뮤직 바’ 등 다채로운 구성으로 책방의 경험과 가능성을 확장했다. 독서와 기록, 퀴어에 관한 귀엽고 개성 있는 굿즈들도 판매해 보는 재미를 더한다.
‘살롱’은 과거 유럽에서 문학가와 예술가, 철학자들이 모여 토론하고 사교활동을 하는 장이었는데, 주로 귀족 여성이 공간의 주인이거나 모임을 주도했다고 한다. ‘마고’는 지리산 여신의 이름으로, 신성한 창조주로서의 힘을 상징한다. 우리는 살롱드마고가 그 이름들의 유래처럼 지역 여성들이 만나고, 공부하고, 각자의 재능과 창조성을 발휘하면서 함께 힘을 나누고 성장하는 곳이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책방이 단순히 책 파는 곳을 넘어, 책을 매개로 사람들과 소통하고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는 곳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남원 같은 농촌 마을 위주의 소도시 지역에서는 문화적 갈증과 욕구를 충분히 해소하기 어려운데, 살롱드마고에서 여는 글쓰기모임이나 독서모임, 타로 워크숍, 문화예술 프로그램은 시민들에게 일종의 해방구이자 실험무대가 된다.
특히 가부장적인 지역사회에서 성역할을 강요받는 여성들은 책방에서 같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대화하면서 잃었던 자신의 꿈과 목소리를 되찾는다. 몇 년 전 글쓰기모임 참여소감 중 “이제 주변을 배려하느라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겠다”는 말은 우리에게 큰 감동과 울림을 주었다. 공동체의 좁은 관계망 속에 ‘나’를 드러내기 힘들었던 사람들이 책방에 와 위로와 지지를 경험하고, 자신의 삶에서 다가오는 도전과 두려움에 맞설 힘을 키워가는 것이다.
미국의 장애인권여성운동가 해릴린 루소는 책 『나를 대단하다고 하지 마라』에서 “우리를 속박하는 것은 우리의 다름이 아니라 침묵”이라 했다. ‘다른’ 존재와 말을 품어주는 울타리가 넓어질수록 우리는 더 자유롭고 충만해지며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살롱드마고의 고요한 서가에서, 경청을 약속하는 모임 테이블에서, 매일 침묵이 깨진다. 그곳에 ‘다른’ 말이 자란다.
*한겨레신문에 기고했던 글 “지리산 여신 마고의 책방, ‘살롱드마고’에 없는 것”(2023.03.03.)을 <지리산人> 뒤웅박씻나락 칼럼에 맞게 수정한 글입니다.
글쓴이_달리
살롱드마고 책방지기
[뒤웅박 씻나락 칼럼]
지리산 자락 삶이 우리 사회의 대안적 삶의 모습이 되길 꿈꾸는 <지리산人>의 바람을 담아, 지리산 곳곳에 계신 씨앗 같은 이들의 삶과 생각을 싣고자 합니다. 칼럼 글쓴이의 일부 주장이 <지리산人>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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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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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웅박 씻나락] "크리스천들의 손에 쥐어진 날 선 십자가" 성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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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들의 손에 쥐어진 ‘날 선 십자가(cruz espada)’
20여 년 전 필자가 한국 외교관으로 바티칸 시국에 주재할 때(2003~2007)였다. 해마다 1월이면 교황이 바티칸 주재 대사들 부부를 초빙하여 신년하례식을 가졌다. 2,000여 년 승계된 제정일치(祭政一致) 국가답게 교황이 당해 연도 국제정세를 일별하면서 정의와 평화, 인권과 환경 문제를 두고 종교적 시각에서 법적 한계를 초월하는 인도적 호소를 전세계와 수교국 국민들에게 보내는 자리였다.
대사 부부와 공관원 전부가 초빙받는 ‘신년하례회’는 바티칸 ‘왕홀(Sala Regia)’에서 열렸는데 500여 명이 들어가는 그 큰 홀의 한쪽 벽은 천정까지 거창하게 그려진 프레스코 벽화였다. 1571년 그리스도교 신성동맹의 해군이 이슬람 해군을 격파하여 오스만 제국의 서방 진출을 저지한 승리를 기리는 초대형 작품이었다(G.Vasari의 1572년작). 내 곁에 앉은 이집트 대사나 리비아 대사더러 “저 벽화에서 ‘죽는 건 조조군사’로 그려져 군대는 당신네 먼 조상들인 걸 알아요?”라며 놀려주기도 했다.
인류는 지난 20세기 중반에 ‘600만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인류사상 가장 잔인하고 대대적인 집단 학살을 목격했고, 그 범죄가 ‘그리스도교 세계(Christentum)’를 통솔해 온 로마 교황청에 의해서 역사적으로 촉발되고 자행되고 독려되어 왔음을 다 알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로마 박해 300년을 이겨내고 ‘제국의 국교’로까지 격상되자,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만들어졌으니 남의 피를 흘리는 사람은 제 피도 흘리게 되리라.”(창세기 9,6)는 성서 구절이 없지 않음에도, 그리스도교 지성을 대표하는 교부(敎父)라는 위인들부터 앞장서서, ‘나자렛 사람 예수’를 처형했다는 탓으로 유대인들에게 ‘사람 백정’(요한 크리소스토무스[†407])이니, 하느님을 죽인 ‘신살자神殺者’(아우구스티누스[†430])니, 심지어 종교개혁을 부르짖던 루터(†1546)마저 ‘사악하고 독살스러운 뱀’이니 ‘악마’라는 딱지를 붙여 신도들의 증오심을 촉발했다.
가톨릭교회가 이탈리아 중부를 직접 통치하던 중세에 교황 파울루스4세가 1555년에 로마에 ‘게토(ghetto)’라는 봉쇄구역을 지정하여 유대인들을 강제 수용하자 전 유럽의 도시들이 즉각 그 제도를 채택하였다. 그곳에 수용된 유대인들은 별도 호적에 등록되어 있었으므로 훗날 히틀러 정권이 전 유럽에서 유대인들을 색출 검색하여 멸절시킬 만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었다. 히틀러의 ‘유대인 최종해결책(Endlösung der Judenfrage)’에 추축국은 물론 나치 점령하 모든 정권과 해당 지역의 신구교 교회들이 그 ‘해결책’에 동조하고 적극 협력한 사실은, 그리스도교가 1,500년간 유대인이라는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로 부마(付魔)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리스도교가 ‘유럽의 종교’로까지 세를 확장하자마자, 자기들이 ‘주님’이라고 숭상하는 그리스도가 못 박혀 죽은 십자가(十字架)를 장검(長劍)으로 버려내어 휘두르기 시작했다. ‘성지 탈환’이라는 명분으로 유럽 국가들을 부추겨 장장 200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1095-1291)을 일으켜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만든 것도 클레르몽 공의회를 거쳐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내린 칙령(1095)이었다.
제1차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함락하였고, 성을 방어하던 이슬람 장정들이 다 전사하자 성 안에 남은 아녀자와 노인들 7만 명을 몰살하였다. 그 학살부대 크리스천들은 전투복 가운과 방패에 붉은 십자가를 그려 넣었고, 전장에서 죽으면 연옥벌(煉獄罰)을 면제받고 천당으로 직행한다는 보장까지 받고 있었다. 위에 언급한 바티칸 ‘왕홀’의 벽화의 최상단을 보면 천계에서 예수가 이슬람 해군을 향해 제우스처럼 시뻘건 번개를 날려 보내고 예수를 옹립한 사도들은 모조리 장검을 뽑아 휘두르고 있다. 크리스천들은 예나 지금이나 그 ‘날 세운 십자가(cruz espada)’를 휘둘러 약소국을 침략하고 노예사냥을 하고 원주민들을 학살할 때 ‘하느님께 영광을 올린다’는 희열을 누려온 듯하다.
지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유럽 열강은 이슬람들이 2,000년간 살아온 팔레스티나 영토를 빼앗아 서기 70년에 추방당한 유대인 후손들에게 나라를 세워주고서, 금년 2월 28일 트럼프의 이란 침략과 이스라엘군의 무차별 폭격에 이르기까지 팔레스타인, 요르단, 아프가니스탄, 시리아, 이집트, 이라크, 리비아, 이란을 차례로 침략하여 히로시마 원폭 같은 폐허를 만들고 이슬람 시민들을 대량 학살해 왔다. 그 가증할 반인륜 범죄를 유럽인들은 ‘문화충돌’이라는 단어로 은폐해 버린다. 이란 현지 매체 <테헤란타임스>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이 아이들의 눈망울을 보라"며 1면에 실은 이란 남부 미나브 학교 폭격으로 어린이들의 얼굴 사진과, 그 어린이들을 폭사시킨 트럼프를 개신교 목사들이 에워싸고 무훈과 전승을 빌며 안수기도를 바치는 사진에 독자들은 구토했을 것이다. 21세기 신구 그리스도교가 양식 있는 인간들에게 주는 구토감이다.
작년 12.3 내란 이후 태극기에 성조기에 이스라엘기까지 흔들어대며 광화문에 모여 ‘윤어게인!’을 외쳐대는 크리스천들을 보라! 그 무리를 영도하는 목사의 입에서 “하나님도 나한테 까불면 죽어!”라는 모독이 튀어나올 만큼 추락한 종교인들의 광기라니!
필자가 우리 지리산人들의 양심을 깊이 상처 내는 작금의 국제정세를 그리스도교 역사에 비추어 상기시키는 데는 까닭이 있다. 필자가 크리스천, 더구나 구교 신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교회다’라는 표어에 따라 필자가 몸담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역사적 죄상을 유대인들에게, 이슬람 형제들에게, 지금은 유대인들 손에 몰살당하는 가자의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독자들께 사죄하고 싶기 때문이다, 일개 신도로서나마!
지리산 자락을 흘러내리는 휴천강 턱에 집을 짓고 30년 넘게 살아온 필자에게는 이 산 주변에서 ‘지리산 종교연대’라는 모임을 결성하고 한국불교 사회운동의 메카로 불리는 실상사를 중심으로 불교, 원불교, 개신교, 가톨릭 성직자들과 신도들이 해마다 6월 25일이면 지리산 어느 골짝엔가 모여서, 마고 할매의 치맛자락에 유골을 묻은 이들과 생사를 초월한 친교를 나누는 지성이 눈물겹게 아름다워서다. 뜻이 깊어서든 억울하게든 민초들과 의인들을 희생시킨 그 죽음들이 부디 이 겨레를 싸매주고 번영시키는 분신공양(焚身供養)으로 하늘에 거두어지기를 빌고 싶기 때문이다.
좀 멀리는 왜란 때마다, 지난 세기에는 동학혁명을 일으켰다 패해서, ‘10.19 여순 사건’에 쫓겨서, 6.25 전쟁 중 조선인민유격대를 이루어, 또는 그들을 토벌하는 군경으로서 저 험준한 능선과 깊은 계곡을 축축이 적셨던 피들이 지리산과 한반도 깊숙이 스며들어 역사의 화차를 끌어가 주기 염원하는 까닭이다. 위에 지적한로마 가톨릭의 역사적 죄상을 절감하여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딴 로마 교황이 아마도 교회의 죄과를 씻는 첫 순례지로 한국을 방문하고 떠나면서(2014.8.18.) “얼결에 제3차 세계대전이 이미 발발했네요.”라던 서글픈 장탄식이 필자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연고다.
참조: http://donbosco.pe.kr/xe1/?document_srl=103594
글쓴이 : 성염
전 주교황청 대사·서강대 명예교수
본문 그림(나오는 순서대로) 출처
Wikimedia Commons contributors, "File:Giorgio vasari e aiuti, la battaglia di lepanto, 1572-73, 01.jpg," Wikimedia Commons,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title=File:Giorgio_vasari_e_aiuti,_la_battaglia_di_lepanto,_1572-73,_01.jpg&oldid=1163435605 (accessed March 21, 2026).
https://www.huffingtonpost.kr/article/250181 (원본 테헤란타임즈)
https://www.whitehouse.gov/gallery/president-donald-trump-joins-faith-leaders-in-prayer/
뒤웅박 씻나락 칼럼
지리산 자락 삶이 우리 사회의 대안적 삶의 모습이 되길 꿈꾸는 <지리산人>의 바람을 담아, 지리산 곳곳에 계신 씨앗 같은 이들의 삶과 생각을 싣고자 합니다. 칼럼 글쓴이의 일부 주장이 <지리산人>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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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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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웅박씻나락] "구례의 효(孝) 문화유산, 어떻게 이어야 할까" 홍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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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인 기획 칼럼 - 뒤웅박 씻나락]
구례의 효(孝) 문화유산, 어떻게 이어야 할까
_홍영기
설날의 소박한 생각
설날과 한가위가 우리 민족의 2대 명절로 자리 잡은 것 같다. 며칠 전 설 명절을 지냈다. 이때가 되면 고향을 떠나 도시로 나갔던 사람들이 불원천리 마다하지 않고 사연을 간직한 선물꾸러미를 들고 부모와 친척을 뵙기 위해 귀성길에 나선다. 이른바 민족대이동,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만물이 움트는 봄이 다가오는 시기의 설날은 소원과 복을 빌고, 풍성한 수확을 기대하는 가을 초입의 한가위에는 감사와 기쁨으로 차례를 지낸다. 설날은 한 해의 첫걸음을 시작하는 음력 초하루이고, 한가위는 한 해의 수고로움을 마무리하는 만월의 보름이다.
이 뜻깊은 명절에 가족이 모여 서로 안부를 묻고 격려와 덕담, 위로를 나누다 보면 쌓인 오해와 갈등도 눈 녹듯 사라진다. 이렇게 1년에 한두 번이라도 함께 만나 가슴에 묻어둔 조상의 묘소를 찾거나 연로하신 부모를 만난다. 돌아가시기 전 할머니의 손톱을 깎아드렸거나, 할아버지와 함께 목욕탕에서 등을 밀어드린 추억을 되새기는 것, 이것이 효도의 소박하고 정겨운 모습 아니겠는가.
친지들과 얼굴을 마주보며 따뜻한 차 한잔, 텁텁한 막걸리 한 사발을 같이 마시는 일, 또는 팔짱을 끼고 고샅길 걸으며 마주치는 이웃의 안부를 묻는 일이 곧 효도의 시작일 것이다. <효경>에 신체와 터럭, 피부는 부모에게서 받았으니, 감히 훼상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이라 했지만 말이다.
효 문자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효자도 「사립단지」(<삼강오륜행실도>)
국가가 앞장서서 효를 장려하다
효는 아주 먼 옛날부터 국가가 크게 권장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8세기 중반 경덕왕 때 웅천주에 살던 향덕은 굶주리고 병이 들어 사경을 헤매는 부모를 위해 자신의 넓적다리를 베어 봉양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국가는 그에게 큰 상을 내렸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 비석을 세우고, 마을 이름을 효가리(孝家里)로 바꿨다. 그리고 9세기 후반 진성여왕 때 효녀 지은은 자신을 부잣집 노비로 팔아 지극정성으로 맹인 어머니를 돌봤다는 일화도 실려 있다. 이 때에도 국가는 큰 포상을 내리고, 그녀가 살았던 마을을 효양방(孝養坊)이라 고쳐 부르게 했다. 향덕과 지은의 효행은 <삼국유사>에서도 확인된다.
무엇보다 압권은 경주 사람 손순(孫順) 부부의 사연이다. 이들 부부는 날마다 품팔이를 해서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하지만 어머니의 밥을 빼앗아 먹는 아이가 문제였다. 이들은, ‘아이는 얻을 수 있으나 어머니는 다시 구할 수 없다’며, 아이를 산에 묻기로 하였다. 산중에 들어가 땅을 파던 중 석종을 발견하였다. 기이한 종을 얻음은 아이의 복이라며, 다시 아이를 들쳐업고 종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종을 기둥에 매달아 쳤더니 신비한 종소리가 대궐까지 울려 흥덕왕도 그 사연을 알게 되었다. 손순 역시 국가로부터 집과 곡식을 하사받는 등 큰 포상을 받았음은 물론이다(<삼국유사>, 「손순매아 孫順埋兒」). 이처럼 1,200여 년 전부터 국가가 적극적으로 효자와 효녀를 칭송하고 포상한 역사적 사실을 찾을 수 있다.
구례 백성 손순흥은 ‘고려 제1의 효자’
구례에서도 지명의 영향인지 모르지만 예부터 효성스러운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효문화와 관련된 유적이 제법 많이 남아 있다. 역사에 전하는 구례 최초의 효자는 손순흥(孫順興)이다. 손순흥은 ‘고려 제1의 효자’로 칭송되었다. 병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구례 백성 손순흥은 어머니의 초상화를 그려 놓고 사흘에 한 번씩 무덤을 찾아가 살아 계실 때처럼 음식을 올렸는데, 고려 성종 990년의 일이었다(<고려사> 성종 9년 9월 4일자 교서). 손순흥의 지극한 효성을 파악한 고려 성종은 관리를 파견하여 곡식과 은그릇, 비단과 포목 등을 하사하였다. 또한 ‘집안에서 효자는 나라에 충신이 될 것’이라며, 관직과 품계를 내려주었다. 손순흥이 살던 마을에 정문(旌門)을 건립하고 요역도 면제해 주었다. 당시 고려는 효를 모든 일의 실마리이자 선행의 주체라 하면서, 대대적으로 장려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구례의 손순흥의 효행이 알려지게 되었고, 국가적 포상을 받은 것이다. <고려사절요>에도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니,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라 하겠다.
순흥화상도(順興畵像圖)](<동국신속삼강행실도>)
손순흥 정려비각(구례읍, 우)
손순흥의 효행은 구례 최초의 읍지인 <봉성지(鳳城誌)>(1800년)에도 실려 있다. 이 문헌에는 손순흥의 어머니 생전의 효행과 ‘고려 제1의 효자’로 칭송되었다는 미담이 덧붙여 있다. 1,000여 년이 지난 지금 고려 성종 때 건립한 정문(旌門)의 자취는 찾을 수 없고, 최근에 건립한 정려비각만 구례군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을 뿐이다.
그런데 <봉성지>에는 효자(29), 효녀(3), 효부(1) 등 33명이 기록되어 있다. 고려 시대 효자로는 손순흥이 유일하고, 나머지 32명은 모두 조선시대 인물들이다. 손순흥의 모범적 효행이 조선시대에 계승되어 확대 재생산된 것이다. 이들 중에는 효자 정려를 받은 경우도 적지 않다. 현재 구례군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효자 정려가 아홉 곳이나 된다. 고려의 손순흥을 제외하면 주로 18세기 이후 효자의 정려이다. 다만, 효녀와 효부의 정려가 전혀 없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크다.
최여진 정려(마산면 광평)
김강철 정려(광의면 수월)
김경석 정려(산동면 탑정)
오형진 정려(마산면 상사)
이처럼 효자의 비중이 압도적이나, 어찌 효자만 많았겠는가? 효녀와 효부가 더 많았을지 모르나, 가부장제 문화에 의해 효자가 양산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정려를 받은 효자들은 대체로 아동을 가르치는 동몽교관에 임명되었다. 국가의 정려를 받은 효자들의 효행을 어린이 효교육의 모범사례로 활용한 것이리라.
구례의 자랑스러운 효문화 이어가려면
지금도 효행을 기리고 포상하는 행사는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빛바랜 사진처럼 과거지사로 간주하는 사람들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이다. 언제부턴가 명절 연휴에 고향의 부모를 찾기보다는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국내 여행은 물론이고 해외로 떠나는 여행객이 수백만 명이라 한다. 그러나 전통사회에서 중시한 효문화를 이른바 K-Culture로 활용할 수 있다면 공동체문화의 회복에 도움이 될 것이다. ‘고려 제1의 효자’로 칭송된 손순흥을 비롯한 구례의 효인(孝人)들을 선양하는 다양한 방안을 도출해야 한다. 또한 전통적 효행을 현재에 걸맞은 내용으로 수정하여 남녀노소 모두가 공감하는 효도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구례는 지명과 더불어 효문화 1번지로서의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지 않을까.
구례의 효문화를 올바로 전승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려 제1의 효자’ 손순흥의 정려비각을 효사랑 공원이나 정원으로 조성하면 좋겠다. 현재 손순흥의 이름을 아는 구례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안내판조차 없고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은 채 골목 안에 갇혀 있는 손순흥 정려각, 구례 효 문화유산의 현주소이다. 손순흥, 그를 ‘고려 제1의 효자’로 복원하는 일이 시급하다.
글쓴이 : 홍영기
국립순천대학교에서 한국근현대사를 공부하고 가르치다 일찍 퇴직하였다. 구례 순천 사람들과 조그만 공부 모임을 함께 하며, 한국학호남진흥원장을 맡고 있다. 주중 광주, 주말 구례를 오가는 중이나 머지않아 구례 문전재(文田齋)로 돌아와 텃밭 농사와 미뤄둔 공부를 계속할 예정이다.
지리산人 기획칼럼 [뒤웅박 씻나락]
'뒤웅박 씻나락'은 이듬해 종자로 쓸 귀한 볍씨를 가리키는데요,
이 칼럼의 글들이 앞으로 생명·평화·나눔·돌봄·연대의 사회를 위한 씨앗이자 마중물이 되길 기대하며 만든 칼럼입니다.
지리산 자락 삶이 우리 사회의 대안적 삶의 모습이 되길 꿈꾸는 <지리산人>의 바람을 담아, 지리산 곳곳에 계신 씨앗 같은 이들의 삶과 생각을 싣고자 합니다. 칼럼 글쓴이의 일부 주장이 <지리산人>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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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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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웅박씻나락] "혼자가 아닌 나, 잘 키우기보다 같이 키우기" 푸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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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가 아닌 나, 잘 키우기보다 같이 키우기
_푸른
괜히 찌뿌둥한 날에는 아이들 손을 잡고 목욕탕에 간다. 돌 전부터 나와 목욕탕에 들락거렸던 우리 아이들은 목욕탕 가는 걸 놀이터 가는 것만큼이나 좋아한다. 겨우 두 살, 네 살 된 조그만 내 딸들이 탕 안에 의젓하게 앉아서 반신욕을 즐기고 있는 모습은 내가 봐도 좀 귀엽다. 동네에 내 또래 젊은이도 거의 없고, 아이 키우는 집도 별로 없는 데다, 그중에 목욕탕을 다니는 사람은 더 드물어서 목욕탕에서 우리는 언제나 시선과 사랑을 한 몸에 받는다. 신발장에 아이들 신발이 있으면, 사람들은 들어오면서부터 “아이고~ 아가야들 왔나.” 하면서 좋아해 주신다. 존재만으로 기쁨을 준다니, 이보다 더 감사한 일이 있을까. 내가 다 기억할 수도 없이 많은 동네 어른이 다 우릴 기억한다. 인사해 주시는데 못 알아 뵈어서 난감할 때도 있지만, 그만큼 많은 사람이 낯선 우리 식구에게 축복을 보낸다는 사실이 언제나 놀랍고 감사하다.
아이들이 목욕탕 가는 길에 잠이 들면, 탈의실에 털썩 눕혀놓고 나 먼저 들어가 씻는다. 아이가 깨면 누구든 아이가 옷 벗는 걸 도와주시고, 아이 손을 잡고 탕에 데려다주신다. 아이들만 탕에 두고 내가 잠시 화장실을 다녀올 때도 걱정이 없다. 누구든 내가 다녀올 때까지 아이들을 지켜봐 주신다. 이런 일상은 목욕탕뿐 아니라 동네 카페도, 길에서도, 어디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아이들을 온전히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면 육아는 배로 힘겨웠을 거다. 하지만 언제든 나와 아이들을 도와줄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에 아이 키우는 일이 그렇게 힘들게 느껴지지만은 않는다. 시스템을 갖춘 공동육아는 아니지만, 내 일상은 공동육아 그 자체다. 공동육아 멤버는 주로 불특정 다수의 산청군민이랄까.
사람들은 내가 남편 없이 혼자서 아이 둘을 데리고 다니는 걸 보면서 ‘아이고~ 힘든데!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라든지, ‘고생한다.’, ‘대단하다.’, ‘애들을 수월하게 키우는 것 같다.’라고 한다. 나는 은근히 뿌듯하면서도, 사실은 내가 아이들을 잘 키운다면 그건 다른 사람들이 내 아이들을 자연스레 돌봐주도록 육아 환경을 조성해 두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렇게 동네에 내놓고(?) 키우는 데에 주저함과 어려움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어른들의 기준으로 아이의 존재를 납작하게 만드는 말들도 자주 듣는다. 아이는 달라고 한 적 없는데 과자를 꺼내 보이면서 "나 안 안아주면 이거 안 줄 거야."라고 한다든지, 아이 입장에서는 충분히 부당하고 불편한 상황인데도 "왜 징징거려, 울지 마! 왜 떼를 써!" 같은 말로 서둘러 아이의 정당한 감정 표현을 막아버린다든지 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런 분들 역시 아이들에게 악의가 아닌 선의로 관심을 표현한 것이니, 내가 일일이 해명하거나 대변하기도 애매한 순간들이 많다. 그럴 땐 아이들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든다. 냉랭하고 새침한 표정으로 아이들을 내 품에 꼭 끼고 있었다면 그런 상황 안 겪었을까 싶을 때도 있다.
그러나 아이 둘을 키우면서 배운 것이 있다면, 아이들을 키우면 키울수록 내가 첫 아이를 키울 때 가늠하고 희망했던 모든 기준에 좀 더 가까워지고 완벽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철저히 지켜가고 싶었던 그 많은 원칙과 소신들이 얼마나 예상치 못한 다양한 이유로 조정되고, 타협될 수 있는지 배웠다. 좋은 것만 취하고, (내 기준에) 해로운 것은 단 하나도 아이한테 닿지 않게 하는 게 얼마나 불가능하고 아이에게 해로울 수 있는지 배워야 했다. 부모 경력이 쌓일수록 내가 더 대단하고 완벽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얼마나 나 혼자서는 육아를 완벽하게 해낼 수 없는지 점점 더 분명히 알게 되는 것에 가까웠다. 육아는 언제나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상태를 받아들여 가는 과정이었다.
할머니들이 재미 삼아 한 주먹씩 가득 쥐여주시는 달콤한 과자들은 아직도 아찔하긴 하지만, 아이들에겐 그 사랑이 얼마나 푸근할까 싶어 나서서 막지 못한 때도 많다. SNS에 흔히 보이는 감성 육아 사진들처럼 언제나 뽀송한 환경에서 아이들을 키우고도 싶었지만, 현실을 살다 보니 늘 아이 방에 널브러져 쌓이는 빨래를 어느 날 비효율적인 시간에 걸쳐 아이들과 함께 놀이 삼아 개는 일도 큰 기쁨이었다.
이렇게 내가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을 좀 더 믿어보고 싶은 의지로, 아이들을 좀 더 세상으로 내놓고 키우려 했다. (마땅히 그래야 하지만) 일찌감치 아이들을 삶의 주인공으로 모시고 싶었다. 그래서 아이들만의 세상(어린이집, 놀이터, 키즈카페)뿐만 아니라 목욕탕, 면사무소, 은행, 우체국, 세탁소 같은 일상생활의 세상도 함께 경험하려고 애쓰는 편이다. 웬만하면 아이들과 함께 다닌다. 아이들이 이 동네를 아주 편안하고 믿음직스럽게 느끼고, 어딜 가도 낯익은 어른이 있으면 좋겠다. 나의 자녀로서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서 이 동네를 경험하고 관계 맺어가면 좋겠다. 왠지 그러면 아이들이 더 단단하게 자랄 것만 같다. 아이들과 늘 함께 다니다 보니, 다른 이들의 손길이 자연스럽게 필요한 때가 생기고, 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런 도움에 기댄다. 내게 손이 부족하면 손이 오고, 아이들을 돌볼 눈길이 부족하면 어디선가 눈길이 채워진다. 그렇게 아이들을 환대하며 어른들의 마음에도 기쁨이 자랄 거라 믿는다.
셋째를 가진 것도 마찬가지였다. 주변에서 ‘대단하다’, ‘용감하다’라며 많이 칭찬하고 응원해 주신다. 하지만 막상 내게는 ‘셋째까지 가져보겠어!’ 같은 웅장한 결심이 필요한 일은 아니었다. 새 아이와 함께 새롭게 조율해 나갈 새로운 우리 식구의 모습이 기대되는 마음이 더 컸다. 우리 집에 새 아이가 또 온다면, 얼마나 곱절로 재미있고 행복할까 하는 생각만 했다.
지난여름 무서운 수해가 산청을 휩쓸고 간 다음 날 아침, 남편이 폭삭 물에 잠겼던 딸기 하우스와 작업장을 확인하러 갔을 때, 하필 그때. 나는 임신 테스트기에서 두 줄을 확인했다. 수많은 생명이 물에 잠겨 목숨을 잃었던 그날, 내 몸에는 새 생명이 막 싹을 트고 있었다. 지난 긴 세월 동안 켜켜이 쌓인 원인으로 기후 재난이 일어났듯이, 세상은 내가 바라는 대로 되는 일보다 그렇지 않은 일이 훨씬 더 많은데, 그런 세상에서 내가 바라는 대로 이렇게 귀한 생명을 품을 수 있게 된 것은 기적과도 같이 놀라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째, 둘째 때는 임신 사실을 알고 너무 신이 나서 ‘야호! 오예!’를 외쳤다면, 이번엔 마음 깊이 ‘아- 감사하다.’라는 생각이 묵직하게 솟았다.
서로 도와 세상 사람 모두 다 같이 잘 살고 싶다는 남편의 인생관을 받들어 첫째, 둘째 아이 이름은 ‘서로’, ‘도와’가 됐다. 셋째 임신 소식을 들은 거의 모든 사람이 셋째(와 넷째까지) 이름을 지어주곤 했다. 그 이름들은 대부분 이런 거였다. ‘함께’, ‘사랑’, ‘마음-모아’, ‘행복’, ‘나눔’, ‘모두’, ‘기쁨’, ‘희망’, ‘평화’ … 그 이름들을 지어주는 얼굴들이 하나같이 얼마나 설레어 보이던지. 아마 모두가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일 거다.
저출산, 고령화, 수도권 인구 과밀이라는 다소 씁쓸한 배경이 있긴 하지만, 한 사람을 이렇게 귀하게 여기고, 느끼고, 환대하는 마음이 살아있다는 것만큼은 이 지리산 자락의 농촌이 지켜가고 있는 순수한 마음이자 진실한 아름다움일 거다. 이런 곳에서 아이를 낳고, 모실 수 있다는 건 특혜임이 틀림없다. 지리산에 기대어, 앞으로도 아이들과 서로 도와 함께 사는 설렘과 기쁨을 맘껏 나누며 살고 싶다.
글쓴이 : 푸른
대도시에서 자랐지만, 알고 보니 시골살이가 찰떡인 30대 청년. 엄마로 태어난 지 5년 차. 두 아이와 곧 태어날 뱃속의 아이와 함께 날마다 세상을 새롭게 배우고 있다. 어린이, 농촌, 평화, 교육에 대해 늘 생각한다.
(첫 번째 사진 출처 unsplash, 이후 사진은 모두 필자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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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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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웅박 씻나락] "토건사업시민심의제 도입을 제안하며" 이주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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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생태적 개발 사업의 상징, 지리산산악열차
: 토건사업시민심의제 도입을 제안하며
_이주헌(문심당한의원 원장, 남원시민)
10년 넘도록 지리산산악열차는 우리 고장의 골칫거리였다. 남원시는 지리산산악열차가 전기로 운행되기에 매연을 내뿜지 않는 친환경 운송시스템이라고 주장했다. 선로를 설치할 때도 나무 한 그루 베어내지 않고 기존 도로만을 활용하겠다고 장담했다. 남원시의 장밋빛 홍보만 보자면 산악열차는 우리 고장의 백년 먹거리요, 지리산은 한국의 융프라우였다. 정치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숟가락을 얹기 바빴다.
시간이 흐르며 사업의 실상이 하나둘 드러나기 시작했다. 환경 훼손이 전혀 없다더니 시범 사업만 해도 나무 수백 그루를 베어내고 생태자연도 1등급 지역인 원천천 비탈에 옹벽을 무려 600m 가까이 쌓아야 했다. 공공기관이 진행한 연구에선 전혀 경제성이 없던 사업이 민간 회사가 용역을 맡더니 별안간 수익성 충분한 사업으로 돌변했다. 공사비를 축소하고 유발 수요를 부풀렸기 때문이었다. 지리산산악열차를 운행할 도로는 천연기념물인 반달가슴곰 서식지였다. 게다가 그 도로에선 단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산사태가 발생했다.
지리산산악열차 사업은 처음부터 끝까지 기만이요, 엉터리였다. 무엇보다도, 남원시는 주민들에게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고 밀실에서 사업을 진행했으며 공청회를 비롯한 주민들의 공론화 요청을 죄다 무시했기에 이 사업은 철저히 반민주적이었다.
올해 2월 전북지방환경청은 남원시가 신청한 지리산산악열차 시범사업 소규모 환경영향평가에 대해 최종적으로 부동의 결정을 내렸다. 싸움은 마침내 막을 내렸다.
지리산산악열차 사업은 지난 10년간 남원시가 허울 좋은 명분을 덮어씌워 추진해 온 반생태적 개발 사업의 상징이었다. 환경청은 그 반생태성을 통렬히 지적하여 이 사업을 좌초시킴으로써 지리산 개발 광풍에 큰 경종을 울렸다.
끝없는 개발주의의 망령
산악열차는 물러갔지만 개발주의는 여전히 우리 고장 한복판에 똬리를 틀고 있다. 지난 세월 남원시가 벌여 온 대규모 토건 사업들은 기후위기 시대에 역행하는 시대착오적 개발주의의 민낯을 보여준다. 얼추 떠오르는 것만 손에 꼽아도 기가 찰 지경이다.
작은 산을 두 개나 밀어버리고 1,000억 원을 퍼부어 조성한 사매 일반산업단지는 기업 유치에 실패하고 텅 빈 땅으로 방치되면서 잡초가 산을 이루고 있다. 1,900억 원의 민간 자본을 끌어들이기로 한 남원 드래곤 관광단지 사업은 장기간 표류하고 있으며 핵심 관광 시설은 착공될 조짐조차 보이지 않는다. 지난 20년간 1,000억 원 이상을 쏟아 부은 운봉 지리산 허브밸리 또한 기대했던 관광 효과는커녕 유지, 관리 비용만 발생시키는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함파우의 아름다운 경관을 파괴했으면서도 민간 자본을 끌어들여 세금 한 푼 안 들이고 사업을 성공시켰다고 입에 침이 마르게 자랑하던 모노레일, 짚라인 사업은 개장 몇 달 만에 파산하여 400억 원 넘는 사업비를 고스란히 혈세로 갚아야 할 처지가 됐다. 소송으로 인한 지연 이자까지 합치면 배상금은 무려 500억 원에 달한다. 지금도 매일 1,300만 원 넘는 지연 이자가 쌓이고 있다. 이렇게 처참하게 망해 버린 대규모 토건 사업들은 재정을 파탄내고 생태를 파괴하는 개발주의 망령이 여전히 남원시를 지배하고 있음을 증거한다. 이 와중에도 최경식 남원시장은 2,000억 원이 넘는 함파우 아트밸리 사업을 밀어붙이고 있다.
이토록 무분별한 토건 사업이 지속된다는 건 무얼 뜻할까? 나는 이것이 대의 민주주의의 실패를 증명했다고 생각한다. 남원시의 대규모 토건 사업들은 시대의 흐름으로 추진돼 왔다. 시민들을 대신하여 생태 파괴와 재정 낭비를 막아야 할 시의회는 걸핏하면 시청의 들러리 역할을 하며 토건 사업을 방조하거나 날개를 달아 주었다. 이 과정에서 시민들은 철저히 배제되어 집단 지성을 발휘할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다.
지금의 대의 민주주의 아래에서도 주민감사청구나 주민소송 등 주민들이 개입할 수 있는 수단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나 그것은 사후적 통제 수단에 불과하기에 무분별한 토건 사업을 계획 단계부터 효과적으로 막아낼 수 없다. 이제 남은 길은 하나다. '묻지마 개발'의 악순환을 끊으려면 시민들의 참여와 개입이 필요하다. 그 구체적 방안으로 토건사업시민심의제 도입을 제안하고자 한다.
토건사업시민심의제를 도입하자
내가 제안하고자 하는 토건사업시민심의제는 추정가격 고시금액 이상의 대규모 토건 사업에 대해 기획 단계부터 주권자인 시민이 참여하여 사업 타당성과 생태적 지속가능성을 심의하는 제도이다. 지자체마다 편차는 있겠지만 남원시 같은 경우 고시금액을 100억 원 정도로 정하면 될 것이다. 추첨이나 공모, 시민단체 추천을 통해 선정된 시민 대표들이 전문가, 지방의회 의원과 함께 토건사업시민심의위원회를 꾸리고, 이 위원회에서 대규모 토건 사업 계획을 검토하는 것이다. 시장, 군수는 위원회가 요청할 경우 사업 관련 정보를 공개하여 위원들의 자유로운 정보 접근을 보장해야 한다.
사회적 갈등이 예상되는 사업 계획에 대해서는 위원회가 숙의형 공론장을 열어 주민 의견을 수렴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심의 결과를 도출하면 시장, 군수는 반드시 이를 검토하고 수용 여부를 답변하게 하고, 그 답변은 모든 시민들에게 공개한다.
이 제도가 도입된다면 시민과 전문가의 집단 지성이 무분별한 토건 사업 추진에 제동을 걸 수 있는 기회가 열리게 된다. 무작위 추첨이나 시민단체 추천으로 구성된 시민 위원들은 정치인이나 관료와 다르게 정치공학 또는 상급자의 압력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것이며 공동체 전체의 미래를 위한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더 클 것이다. 만약 토건사업시민심의제가 존재했다면 지리산산악열차 사업은 숙의형 공론장을 통해 실상이 빨리 알려졌을 것이고 모노레일 사업은 진즉 폐기되었을지 모른다.
이제 시민의 손에 지역의 미래를 맡겨야 할 때
환경청이 지리산산악열차 시범사업 부동의 결정을 내리면서 10년을 끌어온 사회적 갈등이 종지부를 찍었을 때 남원시가 정신을 차리고 무분별한 토건 사업의 종말을 선언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여전히 추진 중인 2,000억 원대 함파우 아트밸리 사업은 남원시가 아직도 개발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주권자인 시민의 참여뿐이다.
우리는 기후위기라는 인류 공동의 심각한 위기 때문에 더 이상 무분별한 토건 개발을 용인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전 세계가 폭염, 산불, 홍수, 태풍으로 몸살을 앓는다. 최근 사례만 살펴봐도 끔찍하다. 작년 여름엔 인도 북부의 기온이 50도 가깝게 치솟았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선 메카 순례 중 폭염이 덮쳐 1,300명 이상이 사망했다. 올해 초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대형 산불이 번져 무려 74조 원에 달하는 피해가 발생했다. 태국, 베트남, 캄보디아 등 메콩강 유역 국가들은 수십 년 만에 최악의 가뭄을 겪고 식량 안보가 흔들렸다. 사례를 찾아보자면 수도 없다.
대규모 토건 사업은 반드시 산림을 훼손하고 토양을 유린하며 막대한 양의 콘크리트와 철강재를 사용하여 탄소 배출량을 늘린다. 기후위기 시대에 토건 사업을 무분별하게 밀어붙인다는 건 끝없는 자살 시도나 다름없다. 대의 민주주의는 개발 중독을 통제하는 데 실패했다. 이제 시민들의 집단 지성이 지역의 미래를 설계하고 책임지는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 전 인류의 멸절을 걱정해야 하는 이 시대, 우리 희망은 결국 더 많은 민주주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글쓴이 이주헌
지리산산악열차반대남원대책위 집행위원장을 지냈고, 현재 남원 시민단체 시민의 숲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남원에서 문심당한의원을 운영한다.
뒤웅박 씻나락 칼럼
'뒤웅박 씻나락'은 이듬해 종자로 쓸 귀한 볍씨를 가리키는데요,
이 칼럼의 글들이 뒤웅박 씻나락으로서 앞으로 생명·평화·나눔·돌봄·연대의 사회를 위한 씨앗이자 마중물이 되길 기대하며
만든 칼럼입니다. 지리산 자락 삶이 우리 사회의 대안적 삶의 모습이 되길 꿈꾸는 <지리산인>의 바람을 담아,
지리산 곳곳에 계신 씨앗 같은 이들의 삶과 생각을 싣고자 합니다.
지리산 자락에 사는 여러 살림꾼들이 돌아가며 글을 씁니다.
<지리산인>의 뒤웅박 씻나락 칼럼을 기쁘게 받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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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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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웅박 씻나락] "AI(인공지능) 시대와 대안적 삶" 강수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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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인공지능) 시대와 대안적 삶
강수돌(고려대 명예교수, 하동군민)
사진: Unsplash의Matthew Henry
2025년 10월 말, 경주 APEC 회의장에서 ‘영웅’으로 떠오른 이가 있다. 세계 시가총액 1위를 달리는 엔비디아(NVIDIA)의 최고경영자(CEO) 젠슨 황이다. 대만 출신으로 10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 세계 최고 기업의 대표가 되었으니 얼핏 ‘인생 성공’처럼 보인다.
그가 영웅처럼 된 것은 ‘26만 장 GPU’ 때문이다. 그는 APEC 회의장에서 이재명 대통령,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이해진 네이버 의장 등 한국 주요 기업 총수들 앞에서 최신 GPU 26만 장 공급이라는 “깜짝 선물”을 약속했다. GPU란 그래픽처리장치(Graphics Processing Unit), 즉 인공지능(AI) 시대의 전략 자산인데, AI 개발에 필수품이라 한다.
그런데 말이 선물이지 GPU 하나가 약 1억 원짜리 상품이다. 세계 각국이 ‘새로운 먹거리’랍시고 AI 경제에 사활을 거는데, 그 핵심이 바로 이 그래픽처리장치(GPU)를 얼마나 확보하는가의 문제기 때문! 한국이 26만 장의 GPU를 확보함에 따라 미국과 중국에 이어 ‘세계 3위 GPU 확보국’이 된다며, 모처럼 정부, 재벌, 국민이 웃으며 함께 손뼉을 친다.
이 26만 장의 GPU는 정부가 최대 5만 장, 삼성전자, 현대차그룹, SK그룹이 각기 5만 장씩, 네이버클라우드가 6만 장을 사용할 것이라 한다. 그렇게 해서 회사마다 AI를 활용한 공장이나 상품을 만들 모양새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계획처럼 진행되면, ‘국민주권정부’ 아래 온 국민의 삶이 좋아지는 것인가? AI 경제가 발달하면 이재명 정부가 약속한 대로 ‘국민행복 사회’가 될 것인가?
내 대답은 불행히도 ‘아니올시다!’이다. 왜? 그 이유 중 딱 한 가지만 집중해 보자. 그것은 바로, 전력 문제다. 왜 그런가?
우선, AI 시스템은 자체 학습과 추론 수행 시 대규모 데이터 처리와 고성능 컴퓨팅 능력이 요구되어 ‘데이터센터’ 안에 탑재된다. 따라서 AI 확대는 결국 데이터센터의 소모 전력을 폭발적으로 증가시킨다. (물론, 가솔린 자동차에 대한 ‘친환경적’ 대안으로 부각된 전기자동차(EV), 각종 빌딩의 난방·냉방 장치, 산업의 전기화 등도 전력 소비 증가 요인인데, 여기서는 AI와 직접 연결된 데이터센터에 초점을 맞춘다.)
국제에너지기구(International Energy Agency, IEA)는 최근 발간한 ‘Global Energy Review 2025’에서 세계 데이터센터 전력 사용량이 2022년 기준 460TWh에서 2026년에는 1,050TWh로 2배 이상 증가할 것이라 보았다.
또, 글로벌 에너지 인텔리전스 기관인 Rystad Energy는 한 보고서에서 데이터센터, 전기자동차(EV), 난방·냉방 등 전력 수요 확대 요인으로 인해 향후 10년간 전 세계 전력 수요가 최대 30%까지 급증할 수 있다고 보았다. 미국의 경우, 2030년까지 데이터센터 전력소비가 현재보다 두 배 이상 늘어날 것이라 한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국내 데이터센터는 2022년 9월 기준 147개소에서 2029년엔 784개소로 늘어날 예정이다. 이에 따라 같은 기간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 역시 1.8GW에서 2029년 41.5GW까지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갈수록 데이터센터의 전력 수요가 커질 터인데, 핵발전소 하나가 1GW의 전력을 생산한다고 보면 향후 ‘초대형 데이터센터’ 하나만 해도 7개의 핵발전소가 필요(7GW)할 것이란 견해도 있다. 한편, AI 데이터센터 하나가 ‘도시 100만 가구’에 맞먹는 전력 소비를 한다고도 한다. 그 정도로 데이터센터는 ‘전기 먹는 하마’다.
산업통상자원부의 예측처럼 2029년까지 신규 데이터센터 6~700개나 추가 건설될 경우, 국내 데이터센터의 필요 전력량은 약 50GW까지 늘 전망이다. 이를 송전 과정의 전력 손실분(약 7%)까지 고려하면, 1GW급 핵발전소를 약 53기나 추가 건설해야 할 판이다. 최근엔 소형모듈원자로(SMR)가 대안처럼 부상되나 여러모로 대안이 아니다. 요컨대, AI 경제를 계획처럼 만들어가려면 50GW 이상의 전력이 추가로 요구된다. 그야말로 천문학적이다.
그렇다면 이 막대한 전력을 어떻게 추가 생산할 것인가? 우선, 현재 한국에서 쓰이는 에너지 구성은 거칠게 보아 화석연료(석탄, 가스) 전기가 약 60%, 원자력 전기가 약 25%, 신재생에너지 전기가 약 15% 차지한다.
화석연료 발전은 기후위기를 부르는 온실가스를 대량 방출하기에 더 이상 증가할 순 없다. 그러나 현실 경제는 ‘눈감고’ 화석에너지를 계속 쓰려고 한다. 그리고 원자력 발전은 ‘핵쓰레기’ 문제로 더 이상 불가하다. 지금도 한국은 고준위 방사능 폐기물(암 유발 물질)인 사용 후 핵연료봉이 약 2만 톤, 개수로 약 230만 개나 쌓이고 있어 아주 골칫덩어리다. 향후 더 많은 원전을 건설한다는 건 거의 ‘자살 테러’ 수준이 된다. (원래 사용 후 핵연료봉은 고준위 방사선이 반감기가 될 때까지 지하 500미터 이하에서 무려 10만~30만 년 동안 묻어 두어야 할 정도다. 이는 사용 후 핵연료의 독성이 천연 우라늄 수준으로 감소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그토록 길기 때문이다. 국내엔 그런 저장소가 없다. 저장소 하나 건설에도 무려 30년 이상 걸린다. 그나마 현실적 대안은 신재생에너지인데, 그 비중이 기껏 20% 정도인 게 현실이다. 결국 화석에너지와 온실가스, 기후위기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는 결론이다.)
또 다른 큰 문제는 신규 데이터센터 중 약 85%가 수도권에 지어질 계획이란 점이다. 이게 문제가 되는 까닭은 전력 공급처인 발전원이 전국 각지, 특히 동·서·남부의 해안(풍력, 태양광 발전)에 퍼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전력의 생산지에서 소비지까지 수백 킬로미터에 이르는 거리에 ‘에너지 고속도로’를 만들기 위해 산과 들, 마을을 지나는 ‘전력계통’(송전선, 송전탑, 변전소, 전력망 등)을 깔아야 한다.
그래서 이미 부안, 임실, 곡성 등지에서 ‘대책위’ 중심의 투쟁이 조직되고 있다. 일례로, 11월 10일 오전 곡성군청 앞에서는 ‘초고압송전탑/변전소 전면백지화를 위한 곡성군대책위 출범식 및 투쟁선포식’이 열렸다. 농촌 공동체를 파괴하는 송전탑변전소 건설사업 결사 반대, 주민을 들러리 세우는 입지선정위원회 해산 등이 주요 구호다. 앞으로도 제2, 제3의 ‘밀양 송전탑 사태’가 반복될 것이다.
다행히 지리산권, 섬진강권, 남해안권은 AI 경제와 연동된 데이터센터나 용인에 추진 중인 반도체 클러스터와 직접 관련은 없지만, 향후 전력 소요량이 폭증하게 되면 하동화력발전소나 지리산양수발전소 외에 또 다른 부하가 추가될 가능성이 있다. 한국 사회 전반이 갈수록 더 강한 고에너지 시스템으로 변한다면 이들 지역 역시 그 회오리에 휘말리게 될 것이다.
따라서 참된 대안은 ‘조금 먹고 조금 싸는’ 사회경제 시스템을 만드는 것, 우리들 역시 그런 시스템과 함께 살아갈 새로운 감수성으로 일상을 재구성하는 것 속에 있을 것이다. 소농 공동체, 읍면 자치, 생태 마을, 협동조합 등이 구체적 사례다. 지리산과 섬진강, 다도해는 (인간이 오염, 훼손하지만 않는다면) 자연 그 자체만으로도 ‘영원히’ 먹을거리를 제공하고, 주거 공간과 휴양처를 선물한다. 자연 생태계가 수용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조심스레 감사하며 산다면,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공생할 가능성은 얼마든 있다. 요컨대, ‘탈(脫) 자본, 진(進) 생명’이 자기 파멸적인 AI 경제에 대한 대안이다. ‘젠슨 황의 GPU’ 없이도 행복한 삶은 얼마든 가능하다.
뒤웅박 씻나락 칼럼
'뒤웅박 씻나락'은 이듬해 종자로 쓸 귀한 볍씨를 가리키는데요,
이 칼럼의 글들이 뒤웅박 씻나락으로서 앞으로 생명·평화·나눔·돌봄·연대의 사회를 위한 씨앗이자 마중물이 되길 기대하며
만든 칼럼입니다. 지리산 자락 삶이 우리 사회의 대안적 삶의 모습이 되길 꿈꾸는 <지리산인>의 바람을 담아,
지리산 곳곳에 계신 씨앗 같은 이들의 삶과 생각을 싣고자 합니다.
지리산 자락에 사는 여러 살림꾼들이 돌아가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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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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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웅박 씻나락] "사람만이 희망이라면" 김석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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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웅박 씻나락]
사람만이 희망이라면
_김석봉
(ⓒ한국저작권위원회)
지난주 동네는 소란했다.
119 응급차가 드나들면서 네 명의 이웃이 동네를 떠났다.
배불뚝이 정 씨는 밭에 나가 끝물고추 살피다 전동차가 밭두렁을 굴러 피를 철철 흘리며 병원에 실려 갔고, 소주를 양푼에 따라 마시던 대밭머리 박 씨는 기어이 술병에 쓰러져버렸다.
대추나무집 상촌양반이야 골골 거린지 오래라 병원 문턱이 다 닳았다지만 골목 안 봉칠이 아저씨의 병원 길은 이웃들의 안타까움을 샀다.
팔십 줄에 앉은 봉칠이 아저씨는 논농사가 많았다. 동네서 가장 멀리 떨어지고 가장 높은 지대에 있는 다랑논 열 마지기에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모를 심었다.
봉칠이 아저씨의 병환은 거의 절망적이라는 말이 들렸다. 이제 살아서 돌아오기는 글렀다며 동네 이웃들은 저마다 혀를 찼다.
아침이면 늙은 아내를 싣고 그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는 봉칠이 아저씨의 경운기를 이제 영영 볼 수 없게 되었다. 가을이면 누렇게 여물어가던 논배미도 묵어 산짐승들 놀이터로 변해버리겠지.
봉칠이 아저씨만 그런가. 내가 이 산골에 들어오고 지금껏 세상을 떠난 이웃은 부지기수다. 뒷집도 옆집도 앞집도 모두 비었다.
이제 동네는 폐허의 길에 접어들었다.
스스로 텃밭조차 일굴 수 없을 노인네만 남았다.
묵어 풀숲이 되어버린 논밭은 개울 건너까지 바짝 다가왔다. 마당에서 건너다보면 고라니 뛰노는 모습이 심심찮게 보인다. 엊그제 밤에는 마당 앞 감나무까지 수리부엉이가 찾아와 울었다.
한때 귀농귀촌 열풍이 불던 시절이 있었다. 동네 뒤 언덕바지엔 포클레인이 온종일 뒤척였고 해마다 몇 채씩 집이 들어서는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지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 이 산골도 생기가 돌고 살 만 하려나. 모두들 기대에 차 있었다.
인구 늘리기에 혈안이 되어있던 군청도 앞장서서 귀농귀촌인 유입에 행정력을 쏟았다. 도로와 전기 수도시설을 지원하기까지 하면서 도시의 부동산개발업자들이 동네를 드나들었고, 곳곳에 새로운 주택지가 만들어졌다.
그 유행의 시절도 어느 시기부터 저물기 시작했다.
삶의 희망을 찾지 못한 귀농귀촌자들은 하나둘 떠났고 동네 뒤 언덕바지에 지은 집이 매물로 나왔다는 소문이 들렸다.
마을 주변 논밭들도 온통 천덕꾸러기가 되어 복덕방 매물 장부에 지번을 올렸다.
“김 사장. 여기 사인 좀 해줘요.”
곶감 깎을 요량으로 감대와 바구니를 챙기고 있는데 이장이 불쑥 찾아와 두어 장 서류철을 내밀었다.
“무슨 사인을?”
“다음 주에 군수가 방문한대요. 그래서 발전위원회에서 무슨 사업을 신청할 것인가 주민 의견을 묻는 거요.”
서류철을 받아 훑어보았다. 주민숙원사업 조사서였다. 몇 개의 사업명이 적혀있었고 선택해서 서명하는 형식의 문서였다. 발전위원회의 의중이 담겼는지 특정된 하나의 사업에 서명이 몰려있었다. ‘칠선교 야간조명설치’라는 사업이었다.
뚱딴지도 이런 뚱딴지같은 사업이 있나 싶었다. 밤에 자동차를 타고 그 길을 가면 한 대의 자동차도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를 턱이 있나. 한 사람도 지나가지 않을 칠선교에 밤새 현란한 불빛을 밝히는 일이 어찌 숙원사업이 될 수 있을까.
소위 지역유지라고 하는 자들이 지역 여론을 주도하며 행정에 빌붙어 벌여 온 엉터리 같은 일은 한둘이 아니다. 행정에서 넌지시 말을 흘리면 그 지역유지들이 나서서 공론화하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형식으로 지역숙원사업이 결정되는 것이다.
이장은 행정의 나팔수일 뿐 마을공동체를 가꾸고 살피는 일엔 관심조차 없다. 면사무소 이장회의 다녀오면 마을방송으로 전달사항 읽어주는 일이 유일하다.
그것만 하면 괜찮기라도 하지. 누구라도 이장에 선출되면 임기 내내 자기 잇속 챙기기에 여념이 없다. 자기 논밭으로 가는 농로 보수 작업이나 자기 집 주변 가로등이라도 하나 더 밝히려고 서둔다.
동네가 폐허로 변해가는 이유가 다 여기에 있다. 지역이 소멸해 가는 이유가 바로 이런 현상이 지역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폐허의 그림자는 자기 발끝까지 다가오고 마침내 우리가 지키고 가꾸어야 할 공동체의 소중한 가치가 한 움큼씩 떨어져 나간다.
폐허로 변해가는 동네, 한밤중 인적 끊긴 적막 속에서 다리에 반짝반짝 불을 밝힌다고 무슨 도움이 될까.
차라리 모든 불을 꺼버리는 것은 어떨까. 그 짙은 어둠 속에서 반딧불이를 날게 하고, 별을 더욱 빛나게 하고,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 들리게 하는 것은 어떨까.
농사에 아름다움을 더하고 공동체의 공공성을 되살리는 일을 숙원사업으로 정할 수는 없을까. 그런 일을 해 나갈 사람들은 없을까.
겉으로 나서서는 ‘시골이 큰일입네, 이렇게 방치해서는 안 되네’ 하면서도 정작 무슨 행동도 하지 않았지. 하는 척하다가 금세 물러나 버리는 시늉쟁이였지. 하긴 나도 마을 일에 나섰다가 한순간 손 씻고 돌아앉아 버린 한심한 귀농자였지.
그 사이 지역은 더욱 한심한 모습으로 변해갔고, 동네는 더욱 어두워졌지.
연말이면 동네마다 대동회가 열린다. 대동회는 이장을 선출하는 자리다.
당신이 조금이라도 무너지는 공동체에 관심이 있다면 이장 선거에 나서 보자.
내년이면 지방선거가 기다리고 있다. 지방선거는 지역유지들의 잔치가 아니다.
당신이 지역소멸을 걱정하고 어처구니없는 지역숙원사업이 지역을 망친다고 생각한다면 지방선거에 나서 보자.
사람만이 세상을 바꾼다고 하지 않던가. 사람만이 희망이라면 대동회를 외면해서도 안 되고 지방선거를 남의 일로 여겨서도 안 된다.
저 부패하고 무능한 지역유지들의 자리를 빼앗는 혁명의 길에 나서야 한다.
그래야 지역이 살고 공동체가 살고 너와 내가 산다.
(ⓒ김인호)
글쓴이 김석봉
1957년 경남 하동 옥종 농가에서 태어났다. 민주화운동이 들불처럼 번지던 시기 교도관으로 유월항쟁을 맞이하였고, 1987년 진주교도소에서 문익환 목사를 만나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다. 진주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 공동의장을 거쳐 2009년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로 활동했다. 녹색당 창당발기인으로 참여했고, 2012년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을 맡았다. 2007년 경남 함양군 지리산 기슭으로 귀농하여 적지 않은 농사를 일구고 있다. 아내와 아들내외와 손녀까지 3대 다섯 식구가 모여 산다. 경남작가회의 회원으로 틈틈이 시를 쓴다.
<뽐낼 것 없는 삶 숨길 것 없는 삶>, <인문학과 생태학> 책을 썼다.
뒤웅박 씻나락 칼럼
'뒤웅박 씻나락'은 이듬해 종자로 쓸 귀한 볍씨를 가리키는데요,
이 칼럼의 글들이 뒤웅박 씻나락으로서 앞으로 생명·평화·나눔·돌봄·연대의 사회를 위한 씨앗이자 마중물이 되길 기대하며
만든 칼럼입니다. 지리산 자락 삶이 우리 사회의 대안적 삶의 모습이 되길 꿈꾸는 <지리산인>의 바람을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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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