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11-1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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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만규화백의 섬진팔경사계] 연재를 시작합니다.
    송만규 화백의 '섬진팔경 사계절' 연재를 시작합니다. 기대해주세요................................................................................................................................................ 송만규 한들 송만규(宋滿圭)ㆍ 1955년 전북에서 태어나 원광대학교에서 한국화를 전공했다.ㆍ 사람에 대한 호기심과 삶의 가치에 대한 관심은 대학을 졸업한 후에 시민사회단체 활동으로 이어졌다.ㆍ 1993년에 〈이 바닥에 입술을 대고〉라는 주제로 첫 번째 개인전을 가졌고, 서민들의 일상적인 삶을 세밀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냈다. 이를 계기로 붓을 잡고 창작에 집중하게 되었다.ㆍ 2002년에는 섬진강이 내려다보이는 구미마을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장장 21m, 24m 등에 이르는 긴 그림 〈새벽강〉, 〈언 강〉 등을 발표하였으며 섬진강 물길을 수없이 걸으며 자연의 아름다움과 물이 건네는 메시지를 한지와 수묵으로 담아냈다.ㆍ 20여 차례의 국내외 개인전과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ㆍ 물과 강, 인간과의 호흡이라는 화두로 여러 강물을 따라 사색하며 또 다른 강물에 붓을 적시고 있다.ㆍ 저서로는 <섬진강, 들꽃에게 말을 걸다>. <강의 사상>, <들꽃과 놀다>를 간행하였다. 섬진강 8장면을 사계절 총 32개의 대형 화폭으로 그려내다역사의 강, 호남의 젖줄인 섬진강 전체를 그려낸 최초의 대서사화라 할 만하다섬진강 600리 길을 “언젠가, 온몸이 아리도록 매서운 꽃샘추위를 안고 섬진강 강변을 종일토록 헤맸습니다. 나의 삶, 나의 존재라는 새삼스러운 화두를 잡고 물길 따라 걸어 다녔습니다.”작가에게는 추운 날 더운 날, 궂은 날도 없었습니다. 새벽의 강 풍경을 보려고 작은 불빛에 의지하여 산을 오르내리기를 수없이 했습니다. “강 언저리에 잠시 머무르려고 했던 것이 어느덧 25년 동안 강물에 붓을 적시게 되었습니다.”그렇게 오르내리며 깨닫습니다. “작고 가느다란 도랑의 물은 구담, 장구목을 지나며 이 도랑, 저 계곡에서 모여드는 물줄기들과 함께 어우러져 더 힘차게 흐릅니다. 강물은 이곳저곳, 이 일 저 일에 구시렁거리지 않고 묵묵히 기웃거립니다. 메마른 곳, 목마른 사람은 적셔 주고, 있어야 할 곳이라면 잠시 머물다가 기꺼이 섬세하게 배려하며 낮은 곳으로 만 흐른다는 당연한 사실을 깨닫습니다.”섬진강을 부감하기 위해 오르내려야 했던 지리산, 작가는 또 다른 역사의식과 감흥을 불러내며 섬진강과 하나가 되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저 아래로 굽이굽이 길게 늘어진 강줄기를 보러 오릅니다. 구름이나 안개가 산 아래를 가리지 않은 시간에 도착하려고 서두릅니다. 해가 뜨기 시작하면 고요하던 대기가 요동친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지리산 남부 능선을 오르면 평사리 들녘이 광활하게 펼쳐집니다. 광양 무동산에도 수없이 올라봅니다.”“계절마다 산기슭에서 산꼭대기로 오르내리며 가슴에 던져주는 메시지가 유난히 남아 있는 여덟 곳에 집중하였습니다. 섬진팔경의 사계절이 그림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한 매듭을 짓고 싶었습니다.” -송만규 화백의 <강의 사상>출간 서평 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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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12
  • [도시농부 안철환의 땅 이야기3] 바람과 물, 대지의 피
    바람과 물, 대지의 피 도시농부 안철환의 땅 이야기 3 안철환 (전통농업연구소 대표) 물보다 공기 물 다음으로 숲 속의 흙을 살아있게 하는 건 공기와 바람입니다. 제가 앞 글에서 물의 중요성을 많이 강조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번 글에선 물보다 공기가 더 중요함을 말하려 합니다. 살아있는 흙에는 살아있는 물이 있어야 한다는 거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살아있는 공기입니다. 도시텃밭에 가보면 물 주기를 열심히 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채소 잎사귀에 물 주는 소리가 참으로 좋다고 합니다. 농부는 논두렁에 물 들어가는 소리와 자식 입에 밥들어가는 소리가 제일 듣기 좋다는 말과 상통합니다. 저도 모종 키우다보면 참 물 주는 소리가 좋습니다. 이파리에 물 닿는 차르르 차르르 소리가 마치 즐겁게 채소가 먹는 것 같지요. 그렇지만 물 좋아하길 너무 좋아하면 농사 망치기 십상이에요. 집의 화초도 마찬가지로 초보자의 제일 큰 악덕(미덕의 반대)은 물 많이 줘 물 배 터지게 하는 거잖아요. 물 많이 주면 땅 속에 공기가 부족해져 숨막혀 죽거나 과습 피해로 병들어 죽기 아주 쉽죠. 대개 밭의 경우 만병의 근원은 과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과습 상태의 밭을 보면 흙 표면에 이끼가 낀 것처럼 녹색끼가 살짝 돕니다. 공기가 부족해 숨이 막힌다고 흙이 호소하는 모습입니다. 흙에 물 대신 공기를 넣어주는 행위는 뭘까요? 바로 호미질입니다. 호미질은 단지 제초에만 목적이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호미질은 풀만 제거하지 않습니다. 풀 없는 곳도 호미질 해주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풀이 없는 건 아니에요. 그렇게 풀 있는 곳 없곳 작물만 빼고 다 긁어줍니다. 그리고 작물에게 북을 주지요. 그러면 제초 외에도 공기를 넣어주는 효과와 흙 속의 습기가 날아가는 길을 끊어주어 간접적으로 물을 공급해주는 효과, 북주기를 통해 작물에게 양분을 몰아주는 효과까지 있어요. 그래서 풀을 뽑는다고 하지 않고 매준다고 합니다.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럼 왜 숲의 공기가 들녘 공기보다 더 살아있는 걸까요? 그 또한 답은 간단합니다. 숲의 공기는 나무들이 뱉어 낸 것이기 때문이지요. 나무야말로 살아있는 공기 정화기에요. 대기 중 탄소를 흡수해 광합성을 하고 그것의 결과로 산소를 잎으로 배출하죠. 뿌리에서 흡수한 물까지 배출하니 적당한 습기를 머금은 아주 쾌적한 공기를 내뿜습니다. 뿐입니까? 피톤치드라는 방어물질까지 함께 배출하니 나무가 뱉어내는 공기야말로 생명의 공기인 겁니다. 원래 들녘의 논에도 나무가 있었어요. 버드나무와 미류나무가 많았지요. 논을 바둑판처럼 개간하면서 이 나무들이 다 사라지고 논의 경관은 벼만 남고 말았어요. 이 나무들이 논을 둘러싼 대기(미기후)를 건강하게 해 주었는데 햇빛을 가린다는 이유로 없애버린 겁니다. 나무에 관한 재밌는 시가 있어 소개해볼까 합니다. 다들 잘 아시는 윤동주 시인의 시입니다. 나무 나무가 춤을 주면 바람이 불고 나무가 잠잠하면 바람도 자오 바람이 불어야 나무가 춤을 추는 게 상식일텐데 거꾸로 얘기를 하고 있어요. 일제 강점기 저항시인의 시이기 때문에 아마 나무(민족)의 주체성을 말한다고 해석하는 게 자연스러울 겁니다. 근데 저는 말 그대로 해석합니다. 나무가 춤을 춘다는 건 공기와 물을 잎사귀로 내뿜는 모습이라고 보는 거지요. 한 여름 느티나무 밑 그늘에 가 본 사람은 알 겁니다. 자연 에어콘 바람이 얼마나 시원한지요. 나무가 춤을 추니 바람이 부는 시 그대로의 현장입니다. 이런 바람은 생명을 살리는 바람입니다. 이런 생명의 바람이 풍부한 곳이 바로 숲이지요. 그렇지만 우거진 숲이 최고는 아닙니다. 숲 속 야트마한 동산 밭이거나, 숲과 들녘이 만나는 경계선, 곧 산 밑 밭이지요. 에덴동산에서 흙으로 인간을 빚고는 숨을 불어넣은 바로 그 바람이 부는 곳입니다. 신의 숨, 바람 옛 사람들은 바람을 신이 숨쉬는 것이라 했습니다. 신이 화나면 무서운 숨을 쉽니다. 태풍 같이 습한 바람이거나 건조한 바람을 일으켜 때로는 물 난리, 때로는 불 난리를 가져다 주지요. 신은 성난 바람만 불지는 않아요. 곡식의 싹을 틔우고 곡식의 성장을 돕고 이삭을 영글게 해주며 마침내 긴 긴 겨울 생명을 이어주는 식량으로 남게 해 주지요. 그래서 바람을 불어오는 곳에 따라 크게 동서남북에 맞춰 네 종류로 나누었습니다. 동쪽에서 불어오는 동풍은 해가 뜰 때 부는 바람이라 해서 날 새우는 바람, 곧 샛바람이라 했지요. 날을 새워 동(東)이 트는 바람이니 동풍이고 봄 바람이기도 합니다. 곡식의 싹을 틔워주는 바람이기도 하지요. 서쪽에서 부는 서풍은 하늬바람이라 해서 건조하고 서늘한 바람으로 곡식을 익게 해주는 가을 바람입니다. 남쪽에서 부는 남풍은 마파람이라 하는데 맞바람에서 왔답니다. 맞은편 남쪽에서 불고 주로 여름 장마철에 불어오므로 곡식을 무럭무럭 자라게 해 줍니다. 북쪽에서 부는 북풍은 된바람이라 해서 몹시 춥고 세게 부는 뱌람이죠. 힘든 일을 하고 나면 ‘몸이 되다’는 말과 상통해 보입니다. 추우니 곡식은 곳간에서 휴면에 들어가 사람에게 소중한 식량이 되어주겠지요. 이 중 샛바람이 백두대간을 넘어오면 높새바람이라 해서 고온건조한 바람이 됩니다. 푄 현상이라고 들어보셨을 겁니다. 바다에서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내륙으로 불다 큰 산을 만나면 해안쪽은 비를 내려주지만 산을 넘으면 습기는 말라 건조한 바람이 되어 내륙 쪽에 가뭄을 일으키고 심하면 산불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강원도나 경북도 동해안 쪽에선 샛바람이라 하지만 산넘은 내륙쪽에선 높새바람이라 부릅니다. 늦봄에서 초여름, 절기로는 하지 전에 찾아오는 가뭄을 일으키는 바람이 되지요. 그렇지만 우리가 평상시에 느끼는 보통의 바람은 산에서 내려오는 바람과 산으로 올라가는 바람입니다. 산에서 내려오는 바람은 나무가 뱉어내는 공기와 계곡의 물이 뱉어내는 공기입니다. 그래서 순하고 깨끗하고 농사에 아주 좋은 바람이지요. 반면 산으로 올라가는 바람은 바다 또는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인데 이 바람은 세고 들녘의 온갖 것들을 쓸고 오기에 그리 좋은 바람은 아니에요. 김광석이라는 유명한 가수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 노래말에도 이런 차이가 묘사되고 있어 재밌게 되새겨 보게 되더라구요.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네 그대의 머릿결 같은 나무 아래로 .... 중략 .....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네 출렁이는 파도에 흔들려도 수평선을 바라보며 나무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그대의 머리결처럼 부드럽지만,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파도가 출렁거려 흔들린다 하잖아요. 그래서 숲에서 부는 바람은 생명의 바람이라는 거지요. 이러한 바람은 흙 속으로 들어가 생명의 공기(기상)가 됩니다. 그렇지만 바람이 직접 흙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에요. 오히려 반대로 흙이 스펀지처럼 대기 중 공기를 빨아들인다고 해야 맞을 겁니다. 흙 속에서 공기를 빨아들이는 것은 유기물, 아니 좀 더 정확하게는 호기성 미생물입니다. 호기성 미생물들은 유기물을 분해하면서 공기를 만들어냅니다. 기본적으로 호기성 미생물들은 공기 중에도 흙 속의 산소를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흙 속에 산소가 잘 들어가도록 조건을 만들어주어야 하지요. 그 조건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은 풍부한 유기물의 존재입니다. 유기물을 단순히 거름이나 비료라고만 이해하면 곤란해요. 유기물의 핵심은 탄소질입니다. 유기물을 정의하기를 탄소화합물이라 하지 않습니까. 유기물의 뼈대라고 이해해도 돼요. 그 뼈에 살처럼 붙는 것이 질소질 재료인데 똥이 대표적이죠. 보통은 거름이나 비료를 똥 중심의 질소질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유기질비료를 말하면 대개 계분, 돈분, 우분 등 축분으로 이해하는 게 그것입니다. 근데 그것은 살이지 뼈가 아니에요. 질소질은 작물을 빠르게 잘 키울 수는 있어도 흙을 살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먼저 흙에 뼈 역할을 하는 탄소질 재료를 잘 넣어주어야 합니다. 그럼 어떤 게 탄소질 재료일까요? 톱밥이나 숯가루, 재 같은 재료입니다. 이른바 목질부 재료이지요. 이 중에 리그닌이라는 탄소질 재료가 핵심인데 이유는 앞에서 말한 호기성미생물이 아주 좋아하는 유기물이기 때문이에요. 이 리그닌을 미생물이 먹고 분해하면 접착제를 만들고 이 접착제는 흙 알갱이들을 몽글몽글하게 뭉쳐줍니다. 홑알의 흙 알갱이를 떼알로 만들어주는 거죠. 떼알의 흙에는 틈새가 많습니다. 그 틈새로 공기가 들어오는 거죠. 물론 물도 들어옵니다. 이 틈에 물이 공기보다 많이 들어오면 혐기상태가 많아져 호기성미생물들이 떠납니다. 그 자리에 곰팡이나 병원성 세균이 들어오지요. 그리고 흙은 병이 드는 겁니다. 물론 공기가 더 많으면 흙은 가뭅니다. 흙에 물이 모자라면 흙 속에 있는 영양분을 작물이 제대로 먹질 못합니다. 숲 속의 흙에는 이런 탄소질 재료가 많습니다. 나무 잔가지에서부터 낙엽까지 수도 없지요. 반면 들녘엔 숲이 적어 탄소질 재료는 적고 질소질 재료는 많습니다. 아무래도 인구도 많아 인분도 많고 목축도 많이 해 축분도 많지요. 그래서 당장은 들녘의 땅에서 농사가 잘 됩니다. 탄소질 재료는 비에 의해 숲에서 떠 내려 오지요, 질소질 재료는 많은 사람의 인분, 많은 가축의 축분까지 해서 매년 풍년이 끊이질 않습니다. 그렇지만 장기적으로 가면 들녘의 땅엔 염류집적, 연작피해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기후위기에 아주 위험한 구조를 축적해갑니다. 토양의 생산력은 한계에 다다르고 기후위기로 농사가 되지 않으니 식량위기가 극에 다다릅니다. 토양에 질소질이 많지 않은 숲의 땅에선 풍년이 흔하질 않습니다. 그렇지만 흉년도 많지 않습니다. 기후위기가 와도 피해 갈 구멍이 있습니다. 흙도 잘 견뎌 작물 피해도 덜하지만, 야생의 먹거리가 풍부하기 때문입니다. 야생의 식물들은 작물보다 기후위기에 아주 강하지요. 힘이 세서가 아니라 적응을 잘 하기 때문입니다. 글을 쓴 안철환 선생은 온순환협동조합, 전통농업연구소 대표이고 경기도 안산에서 ‘산림생태텃밭 먹거리숲 농장’을 운영한다. 남은 음식물과 똥오줌, 커피 찌꺼기를 받아 직접 거름 만들기를 실천하고 있으며, 우리 토종 종자와 전통 농업 살리기에 열중하고 있다. 25년 전, 처음으로 심은 배추 씨가 3일 만에 싹 트는 걸 보고 ‘씨 안에 누가 있었구나!’ 깨닫고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우리가 먹는 배추는 단순히 물질적인 먹을거리가 아니라 나와 별 차이 없는 생명이며, 그래서 먹는다는 것은 생명을 먹고, 생명과 소통하고, 생명과 하나 되는 일이라고 믿는다. 쓴 책으로 《시골똥 서울똥》(2009), 《24절기와 농부의 달력》(2011), 《호미 한자루 농법》(2016), 《토종농법의 시작》(2020)이 있고, 옮긴 책으로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2004)이 있다. 이 글은 전국도시농업시민협의회 홈페이지에도 연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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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04
  • [도시농부 안철환의 땅 이야기 2] 들녘엔 갑(甲)이 살지만 숲엔 정령이 산다
    들녘엔 갑(甲)이 살지만 숲엔 정령이 산다 안철환(전통농업연구소 대표) 한 동안 귀농하려는 분들께 가급적 들녘보다는 숲으로 귀농하시라 했습니다. 왜냐고 물으면 농반진반으로 했던 말이지요. 인류 역사상 인간들이 꿈꾸던 유토피아는 거의 숲에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았어요. 들녘의 숲이 아니라 야트막한 동산 속 숲 말이죠. 에덴동산이 그렇고 무릉도원, 샹그리라가 그렇습니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수필가로 유명한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Walden, or Life in the Woods)이란 책에서 저자가 그리는 곳도 숲 속이고, 하다못해 웰컴투 동막골이란 영화에서 그리는 이상향 마을도 산 숲속에 있었습니다. 유토피아까지는 아니라도 속세를 떠나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 공간들 또한 거의 들녘보다는 숲 속 전원이었습니다. 조선 시대 낙향한 유학자가 쓴 대표적인 농사 책 “산림경제(山林經濟)”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책 제목에서 그리는 곳도 들녘이 아닌 숲이었습니다. 요즘 인기있는 TV 프로그램으로 “나는 자연인이다”도 대부분 산의 숲속으로 들어간 사람의 얘기인 것을 보면 숲 속의 삶은 인류 모두의 로망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마도 인류의 조상이 숲 속에서 살다 내려와 원초적 고향인 숲으로 돌아가고픈 지향이 유전자에 새겨져 있어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추상적인 얘기보다는 숲에는 흙이 살아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럼 왜 숲엔 흙이 살아있다는 걸까요? 그럼 숲이 아닌 곳의 흙은 살아있지 않다는 걸까요? 저는 살아있는 흙과 비옥한 흙을 구별하고자 합니다. 아마 비옥한 흙으로 치자면 당연히 들녘의 흙일겁니다. 특히 삼각주(델타)의 흙 곧 충적토가 그렇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나일강 삼각주, 유프라테스, 티그리스 강의 메소포타미아 유역, 인더스 강 유역, 황하 화북지방의 토양이 대표적이죠. 이른바 4대강 문명 발원지입니다. 그 외에도 인도차아나 반도의 메콩강, 미 서부평원의 미시시피강, 남미의 젓줄 아마존강이 대표적입니다. 이런 거대 문명을 일군 강 주변의 충적토양은 강 상류지역의 숲에서 영양물질들이 흘러내려와 강의 범람으로 생긴 땅들입니다. 그러니까 강 주변 비옥한 흙도 따지고 보면 숲 속 상류에서 흘러온 것입니다. 그럼 무슨 근거로 숲 속의 흙은 살아있고 강 주변 들녘의 흙은 그렇지 않다는 걸까요? 흙이 살아있으려면 하늘과 소통해야 합니다. 하늘과 소통하는 핵심은 앞 글에서 말한 바람이고 그로 인해 물과 불이 소통을 합니다. 바람이 세게 불면 물과 불은 소통하지 않고 싸우기만 합니다. 태풍이 불어 물이 불을 이기면 수재가 나고 건조한 바람이 불어 불이 물을 이기면 화재가 납니다. 그러나 흙을 기반으로 하면 물과 불은 소통합니다. 물과 불이 소통한다고 하니 그 말도 좀 추상적으로 들립니다. 살아있는 흙의 구조를 살펴보면 바위에서 부서져 나온 흙 알갱이 고상(固相)이 반을 구성하고 그 중 반의 반을 물이 액상(液相)을 이루며 또 그 만큼의 공기가 기상(氣相)을 차지하고 있는데 그 외에 5% 이하로 아주 일부인 유기물이 존재합니다. 이런 흙을 떼알의 흙이라고 하고 입단화된 흙이라고도 합니다. 떼알이란 낱알(홑알)의 흙들이 뭉글뭉글 뭉쳐진 흙으로 특징은 틈새(공극)가 많다는 겁니다. 이 틈새가 살아있는 흙의 본 모습이고 이 틈새를 유지해 주는 게 흙 알갱이 표면에 코팅되어 있는 유기물입니다. 여기서 액상은 물이고 기상은 하늘에서 바람이 흙에 스며든 따뜻한 불입니다. 그리고 이 물과 불이 흙에서 만나 소통한 결과가 바로 유기물입니다. 그런데 이런 흙이 숲에만 있는 건 아니죠. 숲이든 들녘이든 농경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생명수의 기원 그러나 숲에는 남다른 게 있습니다. 바로 남다른 물과 불, 물과 바람, 물과 공기입니다. 우선 물을 살펴보겠습니다. 숲의 물은 어떨까요? 금방 눈치채셨겠지만 깨끗하죠. 왜 깨끗할까요? 그것은 산의 흙과 나무와 풀들이 뱉어낸 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물이 깨끗한 것은 각종 미네랄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지하 암반수가 깨끗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깨끗한 지하수는 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위험한 경우가 많지요. 지하수엔 중금속이 많기 때문입니다. 무겁기 때문이죠. 화강암이 많은 우리나라 지하수엔 철분이 많고 우라늄도 적지 않습니다. 겉으론 맑고 깨끗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지하수 말고 맑고 깨끗한 물로 증류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시겠지만 이런 물들은 겉만 깨끗하지 실제로는 위험한 물입니다. 반면 미네랄이 풍부한 물이야말로 살아있고 그래서 진짜로 깨끗한 물입니다. 이런 물이 생명을 살리고 기르기 때문입니다. 물은 하늘의 비로 시작되기 때문에 물 또한 하늘과 땅의 소통의 산물입니다. 그 하늘의 물이 제일 먼저 내려 모이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설산입니다. 만년설이죠. 굳이 설산이 아니라도 하늘의 물은 산으로 내려와 생명수로 재탄생합니다. 산에는 바로 흙이 있고 나무가 있기 때문이죠. 그 생명수가 산에서 내려오다 용출하는 곳에 에덴동산이 있고 무릉도원이 있고 샹그리라 동막골이 있습니다. 아마 페루의 마추픽추도 그런 곳일 겁니다. 우리의 전통 마을도 그 생명수가 용출하는 곳에 만들어집니다. 다만 다른 점은 산 속은 아니고 산 밑이죠. 들녘과 숲의 경계에 위치합니다. 마을을 동네라 했죠. 동은 한자로 동(洞)입니다. 골짜기죠. 동네는 같은 물을 먹는 사람들인셈입니다. 앞에서 말한 4대강 문명도 다 이런 설산이나 골이 깊은 산에서 기원했습니다. 그러나 국가권력이라는 거대 문명은 강에서 발원했을지는 몰라도 인류의 근본 문명은 산에서 시작했다고 봅니다. 종자학자로 유명한 바빌로프는 강이 아닌 계곡과 산악지대에서 생물학적, 문화적 다양성의 기원을 찾았습니다. (게피 폴 나브한 지음, 강경이 옮김 "세상의 모든 음식은 어디에서 오는가?" 참조) 우리 민족의 고향이라는 백두산도 이름을 보면 원래 설산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머리가 하얀 산, 바로 백두(白頭)산, 설산이란 뜻입니다. 백두산과 같은 산이 알프스의 몸블랑입니다. 몽(Mont)은 프랑스 말로 "산"이고, 블랑(Blanc)은 "하얀 색"이라는 뜻이니 바로 백두산인 것이죠. 화산이 터져 천지가 만들어졌지만 물의 기원은 변함이 없지요. 반면 4대강 유역은 비옥합니다. 산에서 물만 발원한 게 아니라 물이 각종 영양물질을 실어오기 때문입니다. 물과 영양이 풍부해 농사가 아주 잘 됩니다. 그렇지만 사람이 먹는 물로 볼 때는 깨끗한 물은 아닙니다. 강물은 농업용수로는 훌륭하나 식용수로는 적당지 않아 사람은 산의 골짜기 물을 직접 받아 먹어야 합니다. 골짜기 물이 있는 산으로 들어가던가, 그 물이 용출되는 곳, 산 밑을 찾아 우물을 파 먹든가 해야 합니다. 그곳과 멀리 떨어진 들녘에서 그 물을 먹으려면 수로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 수로로 유명한 게 바로 로마의 수도교지요. 예로부터 치수정책의 핵심은 농업용수와 식용수 확보에 달려있었습니다. 비옥한 강 유역에서 발달한 거대 문명은 로마처럼 식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수도교를 설치해서 먼 산의 골짜기에 빨대를 꽂아 빨아 먹었습니다. 독점한 것이죠. 중국에선 제방을 쌓아 큰 강을 다스리고 운하를 파서 지천들을 연결해 마을 곳곳에 물을 공급했습니다. 그 일에 성공해 중국 최초의 왕조를 세운 사람이 바로 우(禹)왕입니다. 수시로 범람하는 황하의 본류를 다스리려면 제방 쌓아 막아서만 될 게 아니라 강의 지류들을 소통시켜 강물을 흐르게 함으로써 범람을 근본적으로 막는 전략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지류를 다스려 본류까지 다스렸다는 것은 농업용수와 식용수 확보 둘 다에 성공했다는 뜻입니다. 지류를 통하게 해서 식용수 확보도 원활해졌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임원경제지라는 백과사전을 집필한 조선 후기 유학자 서유구는 우왕보다 더 근본을 파악한 사람입니다. 본류보다 지류의 치수를 강조한 우왕의 정책을 겨우 홍수만 억제한 것으로 보고 더 근본은 밭 도랑과 밭 주변 물길 다스리는 일이라 했지요. 강의 본류가 대동맥이라면 밭 도랑은 모세혈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밭 도랑을 잘 다스리면 밭 사이에 물을 고르게 대어 흙과 물이 잘 섞이면 구름과 안개가 일어나 비가 내리고 가뭄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고 물을 잘 저장하면 홍수도 예방할 수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세상 모든 사람에게 밭을 일구게 하는 것은 그 사람들 모두 다 하천을 관리하게 하는 것과 같다 했으니 치수의 근본이 무엇인지 깨우쳐 주었다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한 모세혈관 같은 밭 도랑과 물길이 바로 강, 하천 발원지라 할 산 중턱 숲인 것입니다. 보통 땅심(지력)이라 하면 거름 또는 유기물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서유구 선생은 거름보다 중요한 게 있으니 바로 물이라 했습니다. 아무리 땅 속에 거름이 많다 해도 물이 없으면 전혀 쓸모가 없어요. 그래서 비옥한 흙이 아니라 살아있는 흙의 관건은 바로 물에 달려 있다는 겁니다. 글을 쓴 안철환 선생은 온순환협동조합, 전통농업연구소 대표이고 경기도 안산에서 ‘산림생태텃밭 먹거리숲 농장’을 운영한다. 남은 음식물과 똥오줌, 커피 찌꺼기를 받아 직접 거름 만들기를 실천하고 있으며, 우리 토종 종자와 전통 농업 살리기에 열중하고 있다. 25년 전, 처음으로 심은 배추 씨가 3일 만에 싹 트는 걸 보고 ‘씨 안에 누가 있었구나!’ 깨닫고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우리가 먹는 배추는 단순히 물질적인 먹을거리가 아니라 나와 별 차이 없는 생명이며, 그래서 먹는다는 것은 생명을 먹고, 생명과 소통하고, 생명과 하나 되는 일이라고 믿는다. 쓴 책으로 《시골똥 서울똥》(2009), 《24절기와 농부의 달력》(2011), 《호미 한자루 농법》(2016), 《토종농법의 시작》(2020)이 있고, 옮긴 책으로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2004)이 있다. 이 글은 전국도시농업시민협의회 홈페이지에도 연재되고 있다. 지난해 5월11일에 게재한 '흙에서 나고 흙에서 살다 흙으로 돌아가는 삶 -도시농부 안철환의 땅 이야기'에 이어 쓰여졌다. 앞으로 안철환 선생의 후속 글을 2주 간격으로 연재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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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19
  • [이호신화백의 지리산그림순례] 2025년 새아침
    '지리산 그림순례'를 연재하고 계신 이호신화백의 새아침 인사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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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02
  • [이호신화백의 지리산그림순례] 금대암에서 본 지리산 천왕봉
    함양의 겨울그림 <금대암에서 본 지리산 천왕봉>을 올립니다. 지리산-인에 연재하는 '이호신 화백의 지리산 그림 순례'가 어느새 4년이 지났네요. 하동, 구례, 남원, 함양에 이어 내년 산청편 사계그림을 마치면 계획한 지리산 5개 지역을 완결합니다. 2025년에 산청편 사계 그림으로 뵙겠습니다. - 이호신 삼가 - 이호신/금대암에서 본 지리산 천왕봉 70x275cm 2024, 부분1 - 이호신/금대암에서 본 지리산 천왕봉 70x275cm 2024, 부분2 -이호신 / 함양 금대암에서 59x72cm, 2011년 -이호신 / 금대암과 지리산 천왕봉 스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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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18
  • [이호신화백의 지리산그림순례] 함양의 가을
    - 함양 엄천골의 가을, 70x275cm, 한지에 수묵채색 , 2024년 - 지리산 용유담, 171x271cm, 한지에 수묵채색,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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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0-18
  • [이호신화백의 지리산그림순례] 함양의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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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7
  • [도시농부 안철환의 땅 이야기 1] 흙에서 나고 흙에서 살다 흙으로 돌아가는 삶
    흙에서 나서, 흙에서 살다, 흙으로 돌아가는 삶 안철환(전통농업연구소 대표) 흙에서 나다 하나님은 왜 인간을 흙으로 만드셨을까요? 더럽고 비만 오면 허물어질 흙으로 말이죠. 만약에 금으로 만드셨다면 평생 가난하지 않게 살 수 있고 대리석으로 만드셨다면 얼마나 멋진 모델처럼 살 수 있겠습니까? 참 이상하죠? 그렇지만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가 있을 겁니다. 금과 대리석에는 생명이 깃들어 있지 않잖아요. 반면 흙에는 무궁무진한 생명들이 깃들어 있습니다. 우주의 별만큼이나 있을 미생물이 그것이고요, 그 말고도 지렁이를 비롯 작은 벌레와 두더쥐 같은 작은 동물이 흙에 의지해 살고 있습니다. 우리 몸에도 세포 수보다 더 많은 미생물이 살고 있고 나쁜 놈이긴 하지만 옛날엔 대장에 회충 같은 작은 동물도 살고 있었죠. 어쩌면 흙과 우리 몸은 비슷한 점이 의외로 많습니다. 우리 몸에 없어선 안되는 피도 흙에서 왔답니다. 바로 철이죠. 피의 주성분인 헤모글로빈이 철로 되어 있잖아요? 빨간 피의 색은 바로 산화된 철의 색깔이죠. 철은 지구 어디에나 고르게 있답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흙으로 만들었다는 생각은 흙에서 싹이 나는 걸 보고 떠올렸을 겁니다. 봄만 되면 길고 추운 겨울 동안 죽어 있던 생명들이 흙 틈을 비집고 올라오죠. 옛날 사람들에겐 아주 신기한 일이었을 겁니다. 사실 저도 우연히 심은 배추씨가 3일만에 땅 속을 비집고 올라와 싹을 틔우는 걸 보고 얼마나 놀랐던지 그에 미쳐 농사를 짓게 되었어요. 씨가 싹이 트는 건 저에게 더 이상 과학이 아니라 생명의 부활이었어요. 속으로 그랬지요. 씨 안에 누가 있었구나! 사실 기독교만이 아니라 인류의 초기 종교나 신화나 전설에선 흙과 대지를 생명의 어머니로 여겼습니다. 흙으로 인간을 빚고선 하나님은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저는 그 숨을 씨앗으로 해석하지요. 흙에다 씨앗을 심은 겁니다. 그리고 봄에 싹이 올라오듯 인간(생명)이 움터 올라온 거지요. 그럼 흙이 어떻기에 수많은 생명을 품고 낳을 수 있을까요? 저는 흙 속에 물이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사막의 흙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물이 없어서입니다. 그렇지만 물이 있다고 해서 저절로 생명이 탄생하지 않습니다. 하늘의 작용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하늘의 작용은 불입니다. 그렇습니다. 물과 불이 만나야 생명이 나옵니다. 어떻게 만날까요? 바로 바람입니다. 하느님의 숨이죠. 물은 아래로 향하고 불은 위로 향하려 하죠. 그러면 만날 수가 없습니다. 바람은 하늘이 불의 기운을 아래로 향하게 합니다. 그리고 땅 속의 물을 위로 끌어올리는 작용도 합니다. 과학으로 말하면 베르누이 법칙, 유체역학입니다. 나이 드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저 어릴 때는 모기약을 입으로 불었어요. 티(T)자처럼 생긴 빨대를 모기약이 든 병에다 꽂아 한쪽에서 훅~ 하고 불면 압력의 차가 생겨 병 속의 모기약이 위로 빨려지고 반대쪽 빨대 구멍으로 분사되어 나아가죠. 세게 불려고 큰 숨을 들이마시다간 모기약이 내 입으로 쳐 들어오는 낭패를 겪기도 했습니다. 하늘에서 땅으로 부는 바람은 땅 속으로도 들어갑니다. 태풍처럼 센 바람은 흙을 날려 버리지만 봄바람처럼 살살 부는 바람은 땅 속으로도 스며 들어 숨길을 만들고 그길 따라 물길도 만들어집니다. 그 물길 따라 드디어 땅 속에서 올라온 물은 바람 따라 내려온 하늘의 불과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물과 불이 만날 때는 회오리처럼 만납니다. 그 형상을 표현한 게 태극 마크입니다. 빨간 것은 불이고 파란 것은 물입니다. 물고기처럼 머리와 꼬리가 있어 불의 머리는 땅을 향하고 물의 머리는 하늘을 향하고 있죠. 그렇게 서로 기운을 받아 불의 머리는 싹을 만들어내 다시 하늘로 향하고 물의 꼬리는 뿌리를 만들어내 다시 땅으로 향합니다.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물론 싹을 올리고 뿌리를 내리는 것은 식물이겠지요. 사람이 어떻게 식물처럼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못 움직이는 것이 식물의 본질이 아니라 늘 하늘과 땅과 소통하는 것이 식물의 본질이라고 저는 봅니다. 그러면 인간도 식물처럼 살 수 있습니다. 늘 머리는 하늘과 소통하고 발은 늘 땅과 소통하는 삶 말이죠. 이것이 저는 하느님이 인간을 흙으로 만든 이유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늘의 기운을 넣어 흙으로 빚었으니 하늘과 소통하고 흙과 소통하며 살라는 것이죠. 흙에서 살다 흙에서 났으니 흙에서 살아야겠죠? 그럼 어떻게 하는 게 흙에서 사는 걸까요? 말 그대로 흙을 밟고 살면 됩니다. 간단하죠? 그런데 그게 어려워진 게 지금의 복잡한 우리네 삶입니다. 귀농운동을 하면서 저는 그랬습니다. 귀농하기가 이민 가기보다 어렵다고요. 그렇다고 귀농해서, 땅을 샀다고 해서 흙만 밟고 살면 흙의 삶이 되는 것일까요? 흙을 밟더라도 하늘과 소통해야 비로소 가능합니다. 현재로는 그것에 가장 가까운 삶이 농사입니다. 지금은 고인이신 신영복 교수님은 농사를 공부와 같다고 했습니다. 한자 문화권인 한중일 나라 중에 공부(工夫)를 학습의 의미로 쓰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습니다. 일본에선 학습을 면강(勉强)이라는 한자로 씁니다. 중국에서 공부는 쿵푸입니다. 무예죠. 단련한다는 의미에서는 상통합니다. 공부(工夫) 글자의 상형은 대장간의 모루(工) 위에 불로 달군 쇠덩이를 대장장이(夫)가 망치로 두드리는 모습입니다. 두드려 단련해서 목적한 모양을 이루는 것이니 공부의 뜻 답죠? 그런데 왜 농사를 공부와 같은 일이라 했을까요? 단련해서 목적을 이루는 뜻이 농사에도 있다는 걸까요? 신영복 교수님의 또 다른 설명을 이어가보겠습니다. 교수님은 공부를 머리에서 시작해 가슴을 거쳐 발로 가는 여행이라 했습니다. 저는 이 말을 보고 공(工)의 뜻을 딱 떠올렸습니다. 공(工) 글자에서 위의 일(一)자는 하늘입니다. 머리와 맞닿아있지요. 머리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하늘의 뜻을 말합니다. 어떤 면에선 이론이자 말씀(Logos, 道)입니다. 가슴은 곤(丨)으로 사람이자 따뜻한 열정이며 실천입니다. 이론은 따뜻한 마음으로 실천해야 하는 겁니다. 발은 공의 아래에 있는 일(一)자로 땅이자 사람이 발 딛고 있는 현실을 뜻합니다. 하늘의 뜻이 사람의 실천을 통해 현실화되는 것입니다. 흙의 입장에서 보면 하늘의 뜻이 농부의 실천을 통해 흙에서 구현되는 것입니다. 비로소 흙의 삶이 하늘의 뜻과 만나 구체화되는 것입니다. 하늘엔 길이 있고 땅엔 흐름이 있습니다. 하늘의 길은 도(道)입니다. 도는 관념적인 게 아닙니다. 태양의 길은 황도이고 달의 길은 백도이며 지구의 길은 적도입니다. 덧붙여 목성을 비롯한 태양계 오행성의 길이 있으며 우주 전체의 별자리들도 길이 있지요. 땅의 흐름은 물과 바람입니다. 하늘의 길처럼 정해져 있지 않지만 흐름이 있고 이치가 있습니다. 천문지리(天文地理)라고 하죠. 별들의 길이 무늬(文)를 만들고 땅의 흐름이 이치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늘의 도가 땅의 흐름과 만나 비로소 대지에 우주만큼 무수한 생명의 세계를 열게 됩니다. 흙의 생명의 세계, 곧 토양 미생물의 세계는 인간이 아직도 5% 정도밖에 밝혀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우주만큼이나 미지의 세계입니다. 특히 살아있는 흙에는 무궁무진한 생명의 세계입니다. 흙의 미생물 중에 흙을 살아있는 생명의 세계로 만드는 것으로 방선균이라는 게 있습니다. 인간이 만든 항생제는 바로 방선균이 내뿜는 냄새에서 추출한 것입니다. 그러나 화학적으로 만든 항생제는 부작용이 있지만 방선균의 냄새에는 부작용이 없지요. 더구나 방선균의 냄새에는 항우울제 작용이 있다니 행복약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 흙에서만 살아도 병원이 필요없고 스트레스가 발 붙일 곳이 없습니다. 에덴 동산, 유토피아, 샹그릴라, 무릉도원이 별거 아닌거죠. 흙이 이렇게 살아있으려면 하늘과 소통해야 한다고 했죠. 그 하늘이 알 수 없는 도(道)라고 하면 황당하지요. 하늘과 소통하는 구체적인 모습은 탄소와 질소의 순환입니다. 날씨의 작용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게 크게 보면 기후입니다. 날씨는 물과 바람의 작용입니다. 기후와 날씨는 태양과 달과 별들의 영향을 받지요. 아무튼 오늘날 기후위기는 바로 이 탄소와 질소의 순환에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땅으로 가고 싶어하는 탄소는 하늘에 정체되어 있고 하늘로 돌아가야 할 질소는 땅에 과잉되어 흙과 물을 오염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질소는 탄소가 땅으로 돌아가는 데 도움을 줍니다. 미생물이 지표상의 탄소들을 땅으로 돌아가게 하는 주역인데 미생물의 먹이이자 에너지인 질소가 꼭 있어야 합니다. 또 식물은 질소가 주성분인 엽록소를 통해 대기의 이산화탄소를 고정해 뿌리에 저장을 해둡니다. 바로 광합성입니다. 땅 속에서 유기물로 잘 저장된 탄소는 질소를 가둬두는 작용을 합니다. 그래서 식물이 먹을만큼 내어주어 질소의 순환을 돕지요. 과잉된 질소가 그대로 용출되어 물을 오염시키고 땅을 망가뜨리는 일을 예방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공(工)의 뜻을 해석할 때 일방통행만 얘기했습니다. 하늘의 뜻이 땅으로 향하는 것만 말한 거죠. 사실 반대방향도 일어납니다. 땅의 좋은 기운이 하늘을 이롭게 할 수도 있고 나쁜 기운이 하늘을 노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기후위기는 후자에 속한다 할 수 있겠죠. 그럼 어떻게 하면 하늘을 이롭게 하고 어떻게 하면 하늘을 노하게 할까요? 바로 앞에서 흙의 삶을 농사짓는 일이라 했지요. 그런데 사실 지금의 기후위기와 흙의 삶을 왜곡시킨 원조는 바로 농사입니다. 농사로부터 잉여곡식이 생기니 소유와 독점이 생기고 빈자와 부자가 생기고 계급과 국가가 생기고 급기야 전쟁이 발발하기까지 했어요. 그 뿐입니까? 붙박이 삶으로 같은 땅을 지속적으로 수탈하고 숲을 파괴해 자연환경의 면역력이 감퇴하여 역병이 퍼집니다. 기후위기 같은 재앙이 오면 더욱 위기관리 능력이 고갈되어 피해는 급증합니다. 사실 농사가 아니더라도 기후위기는 주기적으로 오게 되어 있습니다. 빙하기 소빙하기 간빙기 온난기 등 기후는 항상 변화합니다. 농사의 삶이 기후 변화에 대응력을 떨어뜨리고 기후위기를 더 부추기는 것이죠. 인류는 농경사회로 들어서면서 몇 가지 삶의 중요한 변화가 생겼습니다. 채소와 과일, 견과류 중심의 먹을거리에서 곡물 중심의 먹을거리로 변화한 게 제일 큰 변화입니다. 사실 채집사회에서 농경사회로 들어선 중심엔 곡물이 있었습니다. 인류가 농사짓기 시작했다는 것은 곡물농사를 짓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곡물 중심의 먹거리 변화는 먹거리 다양성이 줄었다는 뜻이고 미네랄 섭취는 줄고 단백질과 탄수화물 섭취는 증가했다는 뜻이 됩니다. 에너지 섭취는 증가했을지 모르지만 면역력은 분명 감퇴되었을 겁니다. 역병이 농경의 산물이라는 근거입니다. 붙박이로 몰려 사는 삶이 더 역병을 부추겼을 겁니다. 곡물 중심의 농사는 필연적으로 단작(광작)과 연작으로 이어집니다. 이는 더욱 필연적으로 토양의 침탈과 숲의 파괴로 이어집니다. 단작으로 인한 식량의 증대는 인구수의 급격한 증가로 이어지지요. 단작 농사는 고대엔 노예제를 낳고 현대에 와서는 자본주의를 낳고, 고대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전쟁을 일상화했습니다. 주기적으로 오는 기후위기는 더욱 폭발력이 커지고 주기도 빨라집니다. 인간이 땅을 망가뜨려 하늘을 더욱 노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농사를 잘 지으면 땅을 살릴 수도 있고 그러면 하늘을 이롭게 할 수도 있다고 믿습니다. 이런 농사는 앞의 농사와 다릅니다. 단작과 연작이 아닌 혼작과 윤작을 짓고, 혼작과 윤작은 숲에도 적용되어 숲을 파괴하지 않고 숲과 공생하며 곡식농사만 하는 게 아닌 채소와 과일농사도 짓습니다. 뿐만아니라 농사만 짓는 게 아니라 구석기 채집의 전통을 이어갔습니다. 들에선 냉이와 쑥을 캐고 산에선 취와 곤드레를 캡니다. 갯벌에선 조개를 캐고요. 그런 사회가 얼마나 되겠는가? 있어도 매우 미미한 것에 불과할 것이라 폄하할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주류 문명사회는 분명 단작 중심의 농경을 했지만 지구 전체로 보면 소수였습니다. 대부분의 인류는 적어도 근대까지 흙의 삶을 살았습니다. 소수의 문명사회가 일찍이 고대부터 문명을 발달시켰다지만 그 말을 뒤집 보면 일찍부터 전쟁을 하고 숲을 파괴하며 대지를 침탈하고 선량한 백성과 소중한 뭇 생명을 수탈해 왔다는 뜻입니다. 그런 나라들 중심으로 역사가 쓰여졌습니다. 그러니 역사가 오래되지 않았다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게 아닙니다. 그만큼 평화롭고 소박한 흙의 삶을 살아 온 것입니다. 역사로 기록할 것도 없고 기록할 필요도 없었겠지요. 소위 근대화가 늦었거나 실패하여 소위 빈곤 국가와 지역들입니다. 그렇지만 그 면적은 지구 대부분에 걸쳐 있었어요. 아프리카 원주민, 북남미 인디언, 호주의 에보리진들 뉴질랜드의 마오이족 , 남아시아 및 남태평양 폴리네시안, 북극의 이누이트인 및 시베리아 냉대지역 원주민들이 그들입니다. 그 중 특히 남미 아마존 숲을 지켜 온 원주민 얘기가 감동적입니다. 열대 우림지역의 흙이 비옥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비가 지력을 빼앗아 강 하류 온대지방으로 옮겨 놓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부자 나라들이 이 지역에 자리하고 있는 것도 자기들이 잘 나서 부자가 된 게 아니라 이들 열대 지역 덕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그런데 아마존 숲은 좀 달랐습니다. 생태학자들이 아마존 땅의 지력을 조사해보니 의외의 비옥한 땅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것도 어쩌다 생긴 특이한 지역이 아니라 자그마치 아마존 전체 중 약 12%에 육박하는 거대한 규모의 면적이었습니다. 처음엔 미스테리라고만 봤다가 자세히 조사해 보니 그것은 다름아닌 농경지라는 사실을 알고는 더욱 놀랐죠. 겉으론 보기엔 농경지가 아니었어요. 그냥 숲이나 다름없었죠. 그런데 자세히 조사해보니 숲을 파괴하지 않고 숲에 맞게 농사지은 것입니다. 당연히 농부는 원주민이었습니다. 우리식으로 하면 화전입니다. 화전은 숲의 파괴 현장이 아닙니다. 화전을 일구어 2~3년 농사를 지으면 다시 지력이 살아날 때까지 방치합니다. 나무에 불을 질렀기 때문에 숲을 파괴한 것이라 볼 수 있지만 넓게 보면 그 공간은 숲의 완충지대입니다. 숲이 너무 우거지면 빛도 들어가지 않아 숲 속은 생명이 살기 힘듭니다. 산불에도 위험하고요. 그래서 저는 인간이 이용하지 않아 우거진 숲을 비만병 걸린 숲이라 얘기합니다. 그런데 아마존 숲을 보전하기 위해 원주민을 내쫓고 있습니다. 그리곤 대규모의 단작 농장을 만들기 위해 숲을 파괴합니다. 하늘이 노하지 않을 수 없지요. 참으로 개탄스런 일이지만 그래도 아직 우리 주변엔 이런 지역과 사람들이 그 명맥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게 희망입니다. 우리나라도 비교적 몇십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살아있는 흙의 문화와 삶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급속히 사라지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 희망의 불씨는 남아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흙의 삶이고 그것을 계속 이어갈 수 있을지 살펴보겠습니다. 앞에서 말한 혼작 윤작의 농부, 곧 소농(小農)의 삶입니다. 그리고 이 소농은 신석기 농경의 산물인 면도 있지만 구석기 채집문화의 연속적 발전 형태인 면에 저는 더 주목합니다. 그런데 귀농귀촌하기가 이민가기보다 어렵다고 푸념했듯이 도시민이 당장 소농의 삶을 선택하기는 만만치 않습니다. 잘못하면 넓디넓은 태평양 바다에 오줌 한 방울 더하는 정도에 불과할 우려가 있지요. 저는 그래서 도시농부의 삶을 권합니다. 사실 흙의 삶은 도시가 더 절실합니다. 서울시의 경우 유엔이 권장하는 콘크리트 피복율 20%를 넘어 50%나 된답니다. 그것도 외곽을 둘러싼 산들을 제외하면 피복율이 80% 넘는다고 합니다. 도시의 흙을 살리는 일은 기후위기 시대에 절실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힘든 귀농귀촌만큼은 아니어도 도시농부의 삶도 만만치는 않습니다, 도시엔 땅도 부족하거니와 콘크리트를 거둬내는 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도시농업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먹거리 운동입니다. 참 먹거리를 찾는 운동은 흙의 삶을 복원하는 간접적인 운동이 될 겁니다. 아마 도시민이 가장 접근하기 쉬운 운동이 될 것이고 나아가 흙을 복원하는 강력한 운동이 될 수 있지요. 그럼 참 먹거리는 무엇을 말할까요? 하늘의 뜻을 담아 대지에 구현하고 그렇게 살린 흙은 다시 하늘을 이롭게 하는 먹거리입니다, 이런 먹거리에 가장 근접한 것은 소농의 먹거리이고 로컬푸드, 곧 지역먹거리이며 토종 먹거리이자 친환경 먹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용적으론 육식을 최소화하고 채식, 그것도 재배한 채소 외에 야생에서 절로 자라는 거친 자연산 채소들, 밥은 백미를 지양하고 깎지 않은 곡식들이 그나마 흙을 덜 수탈한 먹거리들이라 봅니다. 앞에서 공부를 정의할 때 신영복 교수의 얘기를 소개했죠. 그 중 마지막으로 소개할 게 있는데 아주 놀라운 얘깁니다. 바로 달팽이도 공부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공부는 공자님 같이 머리 좋은 군자(엘리트)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들의 존재 형식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달팽이도 공부한다고 역설한 것이죠. 어느 날 저희 농장 옆의 산에서 하루종일 망개버섯을 쳐다보며 면벽수도하는 두꺼비를 발견했습니다. 아침 9시 쯤 처음 발견한 분이 그 때부터 제게 보여준 오후 4시까지 꼼짝않고 그러고 있었답니다. 아는 곤충박사에게 사진을 보냈더니 망개버섯에 자기가 먹을 곤충이 내려 앉기를 기다리는 중이랍니다. 그래서 알게 되었습니다. 달팽이도 공부한다는 말을요. 두꺼비도 하루종일 공부하고 있던 겁니다. 먹거리를 얻기 위한 인내 과정이 공부라는 거지요. 어떻게 보면 공부의 시작은 먹거리 공부이고 공부의 완성도 먹거리 공부일 겁니다. 귀농하지 않고 도시농부도 아닌 그냥 도시의 소비자일지라도 한계는 있겠지만 흙의 삶을 간접적으로 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바로 먹거리 공부입니다. 흙에서 나오고 흙을 살리며 결국 흙으로 돌아갈 먹거리를 먹는 일일 겁니다. 흙으로 돌아가다 죽으면 다 흙으로 돌아간다고 하지요.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특히 요즘처럼 화장터에서 한 줌의 재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흙으로 돌아가 좋은 거름이 되어야 할 몸이 에너지를 소모해 태워져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마니 말이죠. 저는 웬만하면 매장하기를 권합니다. 거름이 되어 흙으로 돌아가는 거죠. 물론 모든 매장이 다 흙으로 돌아가는 좋은 방식이라 보진 않습니다. 저는 제일 좋은 매장 형태는 밭에다 모시는 것이라 봅니다. 묘비도 필요없고 돌로 성역화할 일도 없습니다.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만 남아있을 봉분이면 충분하죠. 결국 산소자리는 다시 밭으로 완벽히 돌아갑니다. 요즘은 너무 죽음을 멀리하는 문화가 자리잡았습니다. 원래는 늘 죽음이 우리 옆에 있었지요. 그래야 삶이 경건하고 신중하며 소중해집니다. 죽음은 피할 수가 없지요. 그렇다면 죽음을 삶의 한 과정으로 이해하고 삶은 죽음으로 가는 여정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쩌면 삶도 죽음의 한 과정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늘 태어나고 늘 죽는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태어나고 밤에 죽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또 태어나는 겁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이 이걸 말하는 것이라 저는 봅니다. 웰 빙(well-being)을 주 이슈로 퍼진 친환경유기농 운동이 저는 늘 아쉬웠습니다. 거기엔 흙이 없어요. 내 건강에 좋은 것인가 아닌가만 있죠. 이젠 웰다잉(well-dying)을 주제로 했으면 합니다. 단지 편안한 죽음이 아닙니다. 흙으로 돌아가는 죽음을 말하는 거죠. 먼저 웰빙에서 말하는 건강을 살펴보죠. 건강을 정의한다면 아프지 않은 상태, 에너지가 넘치는 상태, 늙어 회춘하는 능력 등을 말할 겁니다. 그런데 저는 그렇게 정의하지 않습니다. 건강이란 나이에 따라 변화하는 몸과 마음에 적응하는 능력이라고 저는 정의합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늘 아픕니다. 아프지 않으면 로봇이죠. 에너지는 젊은 한 때 넘치는 거지 늙어서도 넘쳐 늦둥이 나을 정도로 회춘한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일 겁니다. 그래서 아프지 않은 게 건강한 게 아니라 아픈 것에 적응하는 것이 건강한 것입니다. 이것이 깊어지면 죽음에도 적응할 수 있을 겁니다. 늙는다는 것도 추한 일이 아닙니다. 토종 구하러 시골 구석을 돌아다니는데 어느 마을에 갔더니 늙은호박을 익은호박이라고 부르는 걸 봤어요,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충격이었지요. 늙는다는 것은 점점 흙과 하나되는 과정일 때 익는 과정이라 생각해봅니다. 콘크리트에 사느라 흙과 멀어진 늙은이의 몸에서 나는 냄새는 역합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흙의 무수한 항생 작용은 늙은이의 냄새를 구수한 익은 냄새로 바꿔줍니다. 옛날엔 메주를 띄울 때 가장 따뜻한 방에 두었습니다. 그 방엔 그 집의 제일 어른이 주무시죠. 메주 띄워주는 고초균(바실러스)은 노인의 냄새를 중화시켜주고 노인의 냄새는 메주를 더욱 구수하게 익게 해 줍니다. 구들방 데우는 장작 태우는 연기 냄새도 노인의 냄새를 중화시켜줍니다. 살아있는 흙에서 나는 건강한 먹거리들은 노인의 면역력을 높여 주어 악취의 역한 냄새를 줄여줍니다. 그래서 저는 늙는다는 건 썩는 게 아니라 발효되는 것이라 정의하고자 합니다. 발효되는 삶은 무수한 발효 미생물들과 함께 살 때 가능한 것이겠죠. 이렇게 점점 흙과 가까워지는 삶이 늙는 과정이라면 결국 흙과 하나되는 일이 자연스러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해봅니다. 죽음이 전혀 무서울 필요 없는, 그 또한 삶의 한 과정이라는 걸 도 닦지 않아도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봅니다. 늘 태어나듯이 늘 죽는 실천이 있습니다. 바로 거름 만드는 일입니다. 무슨 거름일까요? 내 똥과 오줌입니다. 똥과 오줌은 또 다른 나의 분신입니다. 나를 어제 먹은 음식이라고 정의하는 말이 있지요. 그 음식의 또 다른 모습이 똥 오줌이니 나의 또 다른 분신이 되는 겁니다. 그 분신을 어쩌다 외출 나갔을 때 불가피하게 수세식 변기에다 누기라도 하면 영 찝찝합니다. 나의 분신이 블랙홀 같은 물 구멍에 휘리릭 빨려들어가 어딘가에서 자연을 더럽힐 것 생각하니 불편하지 않을 수 없지요. 웬만하면 집에서 거름 만드는 뒷간에 누려고 꽤나 애쓰는 이유입니다. 밥은 나가 먹어도 똥은 집에 와 누라는 옛말이 심상치 않게 느껴지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겁니다. 이렇게 똥을 정성껏 발효시켜 땅에 묻는 과정이 나를 매일 땅에 묻는 과정입니다. 늘 죽음을 간접적으로 실천하는 일인 것이죠. 그리고 열심히 내 똥을 전혀 냄새나지 않고 오히려 풋풋한 흙냄새 나게 발효시킨 후 작물을 키워 다시 내가 먹게 되니 이는 내가 부활하는 과정입니다.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자연스레 순환하는 모습입니다. 흙의 삶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글을 쓴 안철환 선생은 온순환협동조합, 전통농업연구소 대표이고 경기도 안산에서 ‘산림생태텃밭 먹거리숲 농장’을 운영한다. 남은 음식물과 똥오줌, 커피 찌꺼기를 받아 직접 거름 만들기를 실천하고 있으며, 우리 토종 종자와 전통 농업 살리기에 열중하고 있다. 25년 전, 처음으로 심은 배추 씨가 3일 만에 싹 트는 걸 보고 ‘씨 안에 누가 있었구나!’ 깨닫고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우리가 먹는 배추는 단순히 물질적인 먹을거리가 아니라 나와 별 차이 없는 생명이며, 그래서 먹는다는 것은 생명을 먹고, 생명과 소통하고, 생명과 하나 되는 일이라고 믿는다.쓴 책으로 《시골똥 서울똥》(2009), 《24절기와 농부의 달력》(2011), 《호미 한자루 농법》(2016), 《토종농법의 시작》(2020)이 있고, 옮긴 책으로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2004)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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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1
  • [이호신화백의 지리산그림순례] 산다는 건 꽃소식을 듣는 일
    산다는 건 꽃소식을 듣는 일 이호신 (화가)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꽃이 피어서 봄이 오는 것이다” 생전의 법정스님 말씀이 떠오르는 봄날이다. 뜨락의 매화나무를 겨우내 마음 곁에 두고 서성거린 나날이 얼마인가. 그 긴 기다림에 꽃망울이 벙글자 꽃이 피고 나는 어김없이 화첩을 챙긴다. 실은 어느 봄날 ‘꽃망울이 터지는 순간, 하늘이 열리는 소리’라고 쓰고 홀로 기뻐한 때가 있었다. 산골에 사는 이가 잠시 귀가 열린 일로. 오래전 산청에 화실을 마련하게 된 까닭은 산청3매(원정, 정당, 남명매)를 그리고 귀촌한 일과 무관하지 않다. 이제는 봄이면 길손들을 맞이해 매화 홍보로 길라잡이를 자처한다. 봄마중의 진정한 뜻을 나누며. 내가 숭상하는 조선의 문인화가 능호관凌壺觀 이인상李麟祥(1710~1760년)의 글이 늘 위안이 되거늘 “매화는 정고貞固한 본성과 빼어난 덕을 지니고 있으니 아무리 높이고 애호하여 벗으로 삼는다 해도 지나친 일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능호관 이인상 서화평석』 박희병 지음 (돌베개) 그러나 어찌 봄소식이 매화 뿐 이랴. 하동의 벚꽃과 구례의 산수유가 잇따라 피어나니 비로소 지리산은 기지개를 편다. 어머니의 산 품속으로 사람들을 부른다. 그중 하동 화개의 봄은 천지가 환하다. 풀린 계곡물은 모두 섬진강으로 합류하는데 청학동의 불일폭포가 학의 형상으로 비상한다. 서산대사 출가지로 알려진 원통암과 건너 산의 칠불암을 내려와 쌍계사에 이르는 강가의 들은 온통 연초록의 차밭이다. 생기가 그윽하니 봄의 기운을 더한다. 마침내 화개장터에 이르는 십리벚꽃은 가히 꽃대궐이요, 꽃터널이다. 이 유장한 섬진강을 거슬러 터진 고매(古梅) 앞에 이르자 강은 흘러내리고 꽃가지는 하늘로 치솟고 있다. 음양의 이치요, 상생의 조화이다. 이처럼 돌아온 봄의 숨결을 만끽하는 순간에는 세상이 평온하게 느껴진다. 한편 문명의 진화로 AI시대가 도래해 꿈같은 현실이라지만 실은 미래가 불투명하다. 편의와 안락을 위한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으니... 하지만 대지를 딛고 사는 한 우리는 해마다 봄마중을 기다릴 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꽃소식이 없다면 행복할 수 없을 테이니. ---------------------------------------------------------------- - 산청 남사리 원정매, 166x262cm, 2008년 * 이 글은 불교문화 2024년 3월호에 실린 글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재수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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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산그림순례
    2024-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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