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3-2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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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검색결과

  • 물고기를 애도하며
    물고기를 애도하며 제임스 테이트 스텐리는 회사를 하루 쉬면서 온종일 수족관 속의 물고기와 이야기했다. 바닥을 다니는 작은 메기에게 그가 말했다. “찌꺼기를 빨아들여. 전부 삼켜버려. 그게 네가 할 일이야.” 그리고 연필 물고기가 헤엄쳐 지나가자 그는 “휘갈겨 써. 쓰고 또 써. 나에게 한편의 소설을 써보이란 말야” 또 천사고기가 지나가자 스텐리는 말했다. “넌 천사는 아니지만 운전 하나는 잘하는구나.” 그러고 난 뒤 그는 점심을 먹기 위해 자리를 떠나 참치로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이것이 그가 벗어날 수 없는 아이러니였다. 아니, 그는 한입 한입 맛을 음미하면서 아이러니 속에서 뒹굴었다. 그리고 수족관 앞 의자에 다시 와 앉았다. 한 떼의 작은 네온 물고기가 그를 즐겁게 했다. “너희는 이 수족관이 뭐 타임스퀘어라고 생각해?” 스텐리가 소리쳤다. 그렇게 밤은 깊어 갔다. 다음 날 아침 스텐리는 어제 자신이 한 행동 때문에 무섭게 당황했고 물고기들에게 여러 번 사과했다. 그러나 물고기들은 그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스텐리는 바로 물고기들의 물고기다움을 조롱했던 것인데, 그렇기 때문에 용서라는 게 있을 수 없었다. ------------------------------------------- 이 시는 산문시의 형식으로 쓰여진 미국의 제임스 테이트(1943~2015)라는 시인의 시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르다. 일란성 쌍둥이라고 해도 서로 다르다. 누구나 자신만의 형상과 자신만의 생각을 가지고 자신만의 삶을 진행하는 것이 인생이다. 한 생명이 가진 자신만의 정체성은 누군가에게 조롱받거나 비판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키가 작다거나 얼굴이 못생겼다고 해서,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그것을 비난하거나 조롱하거나 배척해서는 안 된다. 다만 그가 하나의 공동체에서 전체의 룰을 어겼거나 해악을 끼쳤을 때는 당연히 제지당해야 하고 약속한 벌을 받아야 한다. 함께 산다는 것이 그렇다.
    • 문화예술
    • 시를 찾아서
    2025-03-13
  • 삼독三毒
    삼독三毒 한세상을 살며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감옥을 살다 간다. 어쩌면 죽어야만 그 감옥을 벗어날 수 있다. 한 生을 살며 오직 ‘나’라는 자신만을 살다 가는 것이다. 붓다는 모든 중생은 삼독三毒을 벗어나야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했는데 그 삼독이야말로 나의 감옥을 가득 채우고 있는, 아니 그것이 바로 내가 만든 그리고 스스로 갇혀 있는 나의 감옥이라고 할 수 있다. 탐貪, 진嗔, 치痴삼독三毒중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은 탐이다. 잘못된 탐심으로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대통령직 파면을 자초한, 부족해도 너무 부족한 어떤 사람을 보면 그렇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 살아야 한다는 존재 욕구를 본능적으로 갖는다. 사람만이 아니라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은 본능적인 존재 욕구가 있다. 그 욕구는 탐이 아니다. 탐은 이것을 이탈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나무는 싹이 튼 그 자리에서 햇볕과 물과 바람만으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한 생을 살다 간다. 이처럼 모든 생물은 그 한계를 넘지 않고 사는데, 인간만이 그 한계를 넘는 탐심을 가지고 있다. 작금의 자본주의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자본의 토대 속에서 과학기술문명이 진행되면서 많을수록 좋다는 물량주의, 빠를수록 좋다는 속도주의, 나와 나의 이익이 먼저라는 개인 이기주의 같은 자본 이데올로기가 형성되었고 그 속에서 우리는 탐욕을 자연스럽게 그리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살고 있다. 현대인들의 탐욕은 생존경쟁의 삶 속에서 오히려 필요한 것이며 부끄러워할 무엇도 아니라는 듯 당위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탐에 대한 반성과 성찰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리고 탐욕은 물질적인 탐욕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탐욕이 오히려 삶의 균형감을 더 잃게 한다. 힌두의 수행 계율 중에 ‘샨토샤’라는 것이 있다. 자신에 주어진 삶의 조건과 상황이 어떠할지라도 그것에 ‘만족하라’는 계율이다. 우리는 한 생을 살면서 수없이 많은 어떤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고 어떤 삶의 조건에 갇히게도 된다. 멀쩡한 사람으로 살다가 갑자기 암 환자가 되기도 하고 어느날 재산을 잃고 거리에 나앉을 수도 있는 것인데, 살아 있는 이승의 어느 순간에도 ‘만족하라’는 것이다. 살면서 나이를 먹고 어느덧 노인이 되어 있는 자신을 보며 ‘무상無常의 진리’를 조금이라도 느껴본 자라면 이 말을 수긍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숨 쉬며 존재하기만 해도 고맙다고 느끼는 만족의 순간이 있기도 할 것이다. 이것은 만족이 손에 잡히는 것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마음으로부터 오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 만족을 물질적인 것에서 찾으려면 불가능하지만, 정신적으로 접근하면 얼마든지 가능하고 손쉬운 것이다. 이것은 포기하고는 다르다. 할 수 없으니까 그냥 현실에 만족한다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탐욕을 절제하는 높은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탐욕에 대한 집착을 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쉬운 일이다. 담배를 끊기가 그렇게 어려운 일이지만 또한 쉽게 한순간에 끊어버리는 사람이 있듯이 진리라는 것은 높고 어려운 것만이 아니라 단순하고 쉬운 것이기도 하다. 이 탐욕을 벗어날 수 있다면 비로소 한 생을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우물 안 개구리가 밖에 나와 그 넓은 새로운 세상을 살며 삶의 자유로움과 생의 기쁨과 존재의 고마움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삼독의 하나인 탐貪을 벗는 것이다. (박두규. 시인)
    • 문화예술
    • 지리산 편지
    2025-03-13
  • 진달래 산천
    진달래 산천 신동엽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꽃 펴 있고, 바위 모서리엔 이름 모를 나비 하나 머물고 있었어요. 잔디밭엔 장총(長銃)을 버려 던진 채 당신은 잠이 들었죠. 햇빛 맑은 그 옛날 후고구려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남햇가, 두고 온 마을에선 언제인가, 눈먼 식구들이 굶고 있다고 담배를 말으며 당신은 쓸쓸히 웃었지요. 지까다비 속에 든 누군가의 발목을 과수원 모래밭에선 보고 왔어요. 꽃 살이 튀는 산허리를 무너 온종일 탄환을 퍼부었지요.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꽃 펴 있고, 바위 그늘 밑엔 얼굴 고운 사람 하나 서늘히 잠들어 있었어요. 꽃다운 산골 비행기가 지나다 기관포 쏟아 놓고 가 버리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그리움은 회올려 하늘에 불 붙도록.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바람 따신 그 옛날 후고구려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잔디밭에 담배갑 버려 던진 채 당신은 피 흘리고 있었어요. ---------------------------------------------------------------------- 이 시는 빨치산 사람들 이야기이다. 나는 등단하기 전 대학 1년 때나 되었을 때 이 시를 접했다. 그때만 해도 그냥 전쟁의 한 모습이려니 했는데 시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하면서 이 시는 빨치산 이야기를 쓴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숨막힌 긴장과 처절했던 시대의 빨치산 이야기를 가장 서정적이고 아름답게 그려낸 최고의 수작이라고 스스로 평가했다. 언젠가 신동엽 문학관에서 그의 유물을 보니 시인은 암벽까지 했던 등산 마니어였던 것 같았다. 내가 3,40대에 전교조나 여순항쟁, 생명평화결사 등의 사회단체 활동을 하며 바쁘게 살던 때에도 꾸준히 지리산에 올랐던 것은 빨치산에 대한 궁금함과 인간적 연민 때문이었다. 그들의 삶에 가까이 접근하면서 그 연민은 존경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들은 당시의 사회적 화두였던 통일의 상징적인 전사였고 이후 옥살이 하며 20~40년의 수행을 하고 나온 장기수 어른이었기 때문이다. 그분들의 겸손한 인품을 접하며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지리산 털진달래
    • 문화예술
    • 시를 찾아서
    2025-03-04
  • 그 봄에 있었던 일
    그 봄에 있었던 일 민영 그 봄은 유난히 쌀쌀맞았다. 눈이라곤 오지 않는 항도 부산에 파편같이 예리한 눈발이 날려 입간판을 쓰러뜨리고 길에 쌓인 눈이 행인들의 발걸음을 더디게 만들었다. 1952년 꽃도 피지 않은 3월이었다. 부산역 플랫폼에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물건들이 하역되었다. 지척에 있는 부두에서는 미국에서 온 수송선이 의기양양하게 고동이 울리는데 뼛속까지 얼려서 시멘트 바닥에 내던진 냉동인간이 누구이며 왜 죽였는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윽고 기관차 뒤에 매달린 객차가 슬그머니 떨어져 나가고 빈 곳간차가 눈앞을 스치고 지나가자, 사람들은 그제야 이 강철로 만든 화물차가 냉동인간을 싣고 온 철마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은 황급히 죽은 자의 몸에 붙은 짐표를 살피기 시작했다. 구례→부산, 남원→부산, 곡성→부산 하동→부산, 산청→부산, 거창→부산 그렇다면 이 냉동인간은 피와 눈물로 얼룩진 역사의 고샅 지리산에서 왔단 말인가? 지금도 항쟁의 불길이 타오르는 산골짜기에 흰 눈으로 덮인 슬픈 전사들 때 묻은 꼬리표 가슴에 달고 말없이 누워 있는 그들이 누구인가를 그제야 알 것 같았다. ---------------------------------------------- 이 시는 염무웅 선생님의 책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에 실려 있는 것이며 선생님은 “지리산 골짜기에서 숨진 수많은 빨치산들의 시신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아무도 묻지 않았고 나는 어느 책에서도 그 답변을 읽지 못했다. 6.25 전쟁 전후 이 땅 곳곳에서 억울하게 처형된 수십만 민간인들의 원혼을 우리는 아직 제대로 애도의 절차를 밟아 저세상으로 떠나보내지 못했다. 그들의 숨죽인 울음은 날씨만 궂으면 다시 돌아와 오늘도 한반도 전역에서 살아있는 사람들 가슴을 떨게 만들고 있지 않은가.”라고 말한다.
    • 문화예술
    • 시를 찾아서
    2025-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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