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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철환의 절기 이야기] 맞아도 온화한 곡우비
    * 여러 사정으로 곡우가 한참 지나서야 곡우 편지를 올립니다. 독자들의 이해를 빕니다! 봄 답지 않은 추위와 더위가 오락가락 하니 물 다라이 밑에 있다 들킨 두꺼비도 매가리가 없네요. 예수님이 우리나라 사람이었으면 춘분보다는 곡우에 부활하기 딱 좋았을텐데 하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상상을 하곤 합니다. 춘분보다는 곡우에 겨울잠에서 깬 생명들의 향연히 더 극적이거든요. 작년엔 곡우비가 일주일 일찍 내렸어요. 음력으로 3월 보름이었지요. 보름엔 비 잘 안오는데 그날은 아침부터 찌뿌리다 오후가 되자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농장에 오기로 한 손님들 맞이하느라 정신없이 비를 흠뻑 맞았지만 그게 곡우비라는 걸 밤이 되어서야 알았어요. 봄비 잘못 맞으면 감기 걸리기 십상인데 그 비는 그러지 않았거든요. 온화한 기운을 담고 있는 비였지요. 아니나 다를까 다음 날 아침에 산을 보니 일제히 나무들에 새순이 돋은 겁니다. 그 기운이 얼마나 신선하고 상큼한지 꽃이 아무리 예쁜들 새순만 할까 했습니다. 화려한 꽃이라 해도 이내 지고 말 운명이지만 새순은 앞날이 창창한 희망을 품고 있으니 그 기운에 어찌 마음이 설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곡우비의 그 기운은 춘분의 기운보다 훨씬 더 극적이고 역동적이라 한 겁니다. 낮과 밤이 같고 낮이 밤을 이기기 시작하는 춘분의 기운이야말로 부활의 힘이란 건 분명하나 춘분 뒤 반갑지 않은 불청객 꽃샘추위가 들이닥치는 게 춘분의 뒤통수라 할까요. 우리 조상들은 이런 걸 보고 액이 빠져나갈 때 꼬리로 뒤통수를 후려 갈기며 나간다 했어요. 액이 나간다고 방심하지 말라는 뜻일 겝니다. 곡우 다음날인 오늘 아침 기온이 1도까지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에는 마치 여름날처럼 낮 기온이 2~3일 28도까지 육박했네요. 그 여름 같은 기운에 곡우가 되지 않았는데도 산의 나무들은 새움 트기 무섭게 여름 기세로 녹색이 우거지고 있었지요. 밭의 나무 새순들도 여느 해와 달랐습니다. 두릅 순은 더운 기운 오기 전에 펴서 먹을만했는데 그 뒤에 올라온 엄나무 순, 오가피 순은 올라오자 마자 세지고 있더만요. 철쭉 꽃도 몽우리 맺히자마자 더운 기운을 맞더니 바로 만개를 하대요. 음력이 늦어 추운 날씨에 봄 같지 않던 기세가 느닷없이 닥친 여름 기운에 봄은 다 간줄 알았다가 오늘 아침 불청객 꽃샘추위로 정신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올 봄 내내 늦게 심어야 한다고 많이 강조했습니다. 음력이 늦은 봄엔 꽃샘추위가 늦게까지 올 수 있거든요. 음력의 주인공인 달은 바닷물을 밀고 당기며 날씨를 주관하는 걸 알았던 조상들은 그래서 음력을 파종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그렇지만 뜨거운 햇빛과 일조량을 주관하는 태양의 존재를 달이 거스를 수는 없다는 것도 알았기에 조상님들은 양력인 절기와 함께 음력을 살펴보았지요. 말하자면 음력이 늦어 늦게 찾아 온 꽃샘추위가 아무리 드세도 봄이 여름으로 가는 길목을 막을 수는 없는 거거든요. 다만 아쉬운 건 봄이 봄답지 못한 건데요, 곡우에 곡식 심기 좋은 비가 내리지 않고 꽃샘추위가 내렸으니 제대로 된 곡우비는 좀더 기다려 봐야겠습니다. 하긴 곡우날인 어제 비가 온다기에 그건 곡우비가 아닐거라고 보긴 했어요. 음력 3월 초순이라 너무 이른 거지요. 그래서인지 5미리도 안 되는 찬비가 찔끔 내리고 말았어요. ㅋ 아무튼 곡우비가 가져다 주는 생명의 기운은 매번 감동적이지만 처음 곡우비의 신비를 보았을 때의 감동은 20여년 지난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저희 밭은 군포에서 안산 넘어 오는 영동고속도로 밑 토끼굴 지나 산 밑에 있는데 곡우비 그친 다음날 어두운 그 굴을 지나자마자 내 눈앞에 펼쳐진 온 산 나무들의 새순은 생명들의 팡파레이자 세레모니였어요. 입과 눈을 닫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걸 예수님 못지않은 생명들의 부활이라 느꼈지요. 우리나라의 봄의 부활이 감동적인 것은 모든 게 죽는 추운 겨울 때문일 겁니다. 겨울이 별로 춥지 않아 변함없는 녹색을 자랑하는 호주의 겨울을 보았을 때 부럽기까지 했어요.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런 나라의 봄은 별로 부활의 감동이 없을 거라는 걸 알았지요. 너무 추워 모든 게 죽는 우리의 겨울이 역설적으로 축복이라는 걸 느낀 것도 한 참 나이 들고 나서였죠. 춘분에서부터 부활하기 시작한 기운이 곡우에 와서야 완성되는 셈입니다. 춘분을 기점으로 부활하는 생명들은 아직 뒤통수를 노리고 있는 꽃샘추위를 조심해야 합니다. 때문에 여전히 움추리고 있는 생명들이 적지 않아요. 그러나 곡우 때 따스한 봄비로 이젠 모든 추위가 물러가니 만물이 마지막 기지개를 켜 약동의 계절을 준비하는 겁니다. 곡우(穀雨) 지나면 여름 나는 작물들은 대부분 파종할 수 있습니다. 곡식 심기에 좋은 비가 내린다는 말 그대로이죠. 벼를 비롯해, 옥수수, 수수, 콩 등 곡식에서부터 고추, 오이, 수박, 호박, 참외, 토마토 등 과채류까지 심을 수 있으나 들깨, 조, 고구마, 메주콩, 팥 등은 장마 근방에 심는 게 좋습니다. 일찍 심으면 웃자라 오히려 피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인데 그래서 늦게 심는 이런 작물들은 감자나 마늘, 양파, 밀, 보리 등을 6월 중에 수확해 그 자리에 이어심는거지요. 이를 그루작물이라 하는데 앞 작물 수확 후 남는 그루(밑둥)들을 갈아엎어 심는다 해서 그렇게 부릅니다. 앞 그루 갈아엎는 거는 그루갈이라 하지요. 고추나 가지 토마토 등 과채류 모종들은 보통 곡우 지나 심지만 보통은 입하 지나 심는 게 안전합니다. 최저 기온이 10도 이하로 내려가면 냉해를 조심해야 하거든요. 곡우 근방에 논을 잘 갈아둡니다, 밭은 경칩부터 갈지만 그렇게는 못해도 곡우부터는 갈아둡니다. 보리나 밀과 이모작 하는 논은 갈 수 없겠지요. 곡우 즈음 보리가 이삭 패고 곡우 조금 지나 보리보다 일주일 늦게 이삭 패는 밀을 위해 이삭거름을 주어야 합니다. 이젠 풀들도 억세집니다. 냉이는 벌써 꽃 피고 져서 씨를 맺고 있어요. 날은 아직 춥지만 풀들은 추위를 무릅쓰고 제 날에 올라와 기세를 부리니, 이래저래 풀을 인간이 이기기는 힘들기만 합니다. 곡우 직전 낮 28~29도까지 여름날씨 처럼 기온이 올라 산의 나무들이 여름 기세로 힘차게 녹색 기운을 뽐 내더니 곡우 지나자 마자 꽃샘추위가 급습하곤 이내 봄 가뭄이 시작됐네요. 곡우 다음날 비온다기에 곡우비인가 했더니 찔끔 오고 말아 봄 가뭄을 막지도 못했지요. 다음 주 음력 3월 중순 즈음 비 소식 있어 곡우 비이길 기대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최고의 봄 가뭄이 올까 저어됩니다. 글을 쓴 안철환 선생은 온순환협동조합, 전통농업연구소 대표이고 경기도 안산에서 ‘산림생태텃밭 먹거리숲 농장’을 운영한다. 남은 음식물과 똥오줌, 커피 찌꺼기를 받아 직접 거름 만들기를 실천하고 있으며, 우리 토종 종자와 전통 농업 살리기에 열중하고 있다. 25년 전, 처음으로 심은 배추 씨가 3일 만에 싹 트는 걸 보고 ‘씨 안에 누가 있었구나!’ 깨닫고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우리가 먹는 배추는 단순히 물질적인 먹을거리가 아니라 나와 별 차이 없는 생명이며, 그래서 먹는다는 것은 생명을 먹고, 생명과 소통하고, 생명과 하나 되는 일이라고 믿는다. 쓴 책으로 《시골똥 서울똥》(2009), 《24절기와 농부의 달력》(2011), 《호미 한자루 농법》(2016), 《토종농법의 시작》(2020)이 있고, 옮긴 책으로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2004)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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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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