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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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칩코

 

<가까운 이웃이 되어주고픈 산달에게>


반가운 산달! 이번 편지는 자중해야겠어요. 웃기다는 말에 살짝 벅차오를 뻔했는데요. 신이 나 적당한 익살의 경계를 넘어버리는 것은 하수들의 흔한 실수죠. 저는 하수라서 긴장의 끈을 놓으면 안되겠습니다. 


저는 몇 주 전에 본가에 다녀왔던 터라 설에는 구례를 지켰어요. 귀촌한 첫 해에도 설에 집에 안갔었는데요. 엄청 외롭더라고요. 시골은 명절만 되면 텅 비었던 마을 어귀의 주차장이 가득 차요. 집집이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들리지 않던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려요. 손자들 놀러왔다고 맛있는 음식을 해주시는가봐요. 벚꽃시즌 다음으로 지리산이 붐비는 때일 거예요. 첫 해는 왁자지껄한 속에 저만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된 기분이었는데… 해가 쌓이니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시골인심이 좋다는데 정말이에요. 이번 설에는 이웃께서 나물과 부각을 잔뜩 챙겨주셨어요. 제가 채식하는 걸 알고 일부러 젓갈도 넣지 않으셨다면서요. 저희 집엔 냉장고도 없고 전 먹는 양도 적어서, 그 많은 반찬을 상하기 전에 해치우느라 복에 겨운 고생을 했답니다. 시골은 동지나 새해 같은 날엔 이웃끼리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는 가봐요. 저 같은 외지인에게도 꼭 한 솥씩 챙겨주시더라고요. 도시에서 나고 자란 제게는 매번 놀라운 경험이에요.


작은 방에서 혼자 일어나 외출했다가 다시 혼자 침대로 돌아온다는 산달을 그려보면서 꼭 예전의 제 모습이 겹쳐보였어요. 산달이 제 이웃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 많은 나물 반찬을 나눠먹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요. 동치미랑 김부각은 먹어본 중에 최고였어요. 산달, 대단한 걸 놓쳤다고요. 그렇지만 인심이 푸진 이웃 대신으로, 산달에게는 사랑과 기다림을 허락한 가족들이 곁을 지켜주었나봐요. 오랜 반려자들과 따뜻한 시간을 보냈다니 다행한 마음입니다. 


산달! 이번 입춘의 주제는 ‘나의 전투복’이에요. 회동을 앞두고 서로를 상상해볼 수 있도록 정하긴 했는데요. 저한테 그닥 이득이 있는 주제인지 모르겠어요. 썩 근사한 전투복은 아니거든요. 저는 계절별로 단벌인 펑퍼짐한 절복을 입고 지내요. 겨울을 제외하곤 나머지 계절은 머리에 터번을 두르곤 해요. 색은 온통 파란색입니다. 지독한 컨셉을 가진 듯 보이지만 사실 누구보다 실용성을 중시해요. 절복은 밭일과 환경운동, 어느 때고 편안한 옷이에요. 색이 통일 돼 있어 모든 옷을 돌려입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어요. 외출 준비가 양치질보다 빨리 끝나는 기적의 실용성! 


특별한 전투복이라기엔, 딱히 골랐다고 볼 수 없는 단벌이지만… 좀 웃긴 얘기를 해보자면 본의 아니게 이게 환경운동에 먹히더라고요(?) 기자회견 같은 곳에 가면 꼭 기자들이 저를 가운데 세우려고 하세요. 외관이 독특하니까 기사사진으로 쓰기 좋다나 봐요. 그들의 전문용어로 말하자면 “그림이 된다”는 거죠. 뭐랄까… 약간 꼬질꼬질해서 사연이 있어보이고, 시골에서 보기 드문 젊은이에, 방금 밭일을 하다 나온 듯한 현장감… 이게 그림이란 걸까요? 덥수룩한 수염에 떡진 머리를 풀어헤치고 다니는 친구가 한 명 있는데, 그도 저와 같은 신세에요. 사진 찍을 때 어리둥절한 채로 나란히 세워지곤 합니다.


아마 회동에서도 더 멋진 옷을 고르는 덴 실패하고 똑같은 옷을 입을 텐데요. 기자회견 사진처럼 떫은 감을 먹은 표정이진 않을 거예요. 산달의 편지를 읽을 때처럼 활짝 웃고 있을 거예요. 제게도 산달의 편지는 기쁨이거든요. 산달은 한 문단마다 한 번씩은 꼭 저를 번뜩 놀래는 문장을 숨겨놔요. 싣지 못한 산달우드향이 코끝에 덥썩 매달린대도 그 문장들만큼 이목을 끌지 못할 지도 몰라요. 저는 그 문장들 앞에선 일순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다음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서성거려요. 그래서 두번째 산달의 편지는 꼭 여명의 숲길 같았어요. 


집 뒤편에 바로 이어진 지리산둘레길이 있어요. 매일 아침, 사물의 푸르스름한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하면 재빨리 집을 나서요. 해가 다 뜨도록 게으름을 피우면 놓치는 것들이 많아요. 숲속은 동틀 무렵이 가장 분주하거든요. 아침 산책을 하며 다람쥐를, 붉은배새매를, 운이 좋으면 담비를 만나고 친구들에게 자랑하는 게 제 낙이랍니다. 요즘은 나무 공부에 푹 빠졌어요. 나무의 수피와 겨울눈을 요리조리 살피다 도감에서 본 나무가 딱 등장하면 그때의 환희란! 그 나무를 지나칠 때마다 덩실덩실 손을 맞잡고 아는 체하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에요.


그런데도 숲길은 여전히 수수께끼에요. 저는 새들의 ‘송’과 ‘콜’을 구분하지도, 바위 위에 놓인 불그스레한 똥이 누구의 똥인지, 진흙에 찍힌 멧돼지 발자국이 어디로 향했는지 알 수가 없어요. 알고 싶은 것들 투성인데 다 알 수 없어 숲을 떠나지 못해요. 한동안 서서, 바람의 방향이나 나뭇잎이 흩어진 모양새를 골똘히 노려만 보다가 돌아온답니다. 그 수수께끼의 숲을 지나고 나면 아침 해가 다 차올라있어요. 알쏭달쏭한 공간을 헤매고 제게 남는 건 놀랍게도 고단함보단 아름다움이에요. 신비이고 눈부심이에요. 


저는 궁금해요. 산달은 어느 누군가를 닮고 싶어 어떤 색으로 물들어있는지, 갸우뚱한 표정과 미지근한 미소를 짓고서도 어떻게 사랑에 대해선 거침없이 말할 수 있는지, 자신을 감당하기만도 벅찼던 지난 날들은 어땠는지. 저는 산달에게 꼬치꼬치 캐묻지 못해, 수수께끼 같은 문장들 앞에 주춤거리는 발자국을 남기는 걸로 대신해요. 온통 동글동글한 그 문장들의 잔상을 바라보는 걸로 만족하기로 해요. 산달의 편지가 제게 남긴 것 역시 아름다움이에요. 산달의 전부를 알지 못해도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어요. 신비와 눈부심이 있어요.


산달의 사진을 보고 신기했어요. 어디인지 모를 그 숲이 제가 늘 걷는 숲과 꼭 닮았거든요. 저도 모르게 마치 산책하는 것처럼, 그 사진 속 어린 나무의 겨울눈과 낙엽 틈에 있을지 모를 고라니 똥을 찾고 있더라고요. 산달이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먼 곳에서도 비슷한 풍경들을 눈에 담고 있잖아요. 산달이 작은 방에서 혼자라고 느낄 때면, 저라면 이 사진을 건네겠어요. 산달이 이 사진을 찍으려 시선을 낮출 때부터, 아마 사진 속의 존재들이 산달을 따라왔을 거예요. 생강나무꽃 색의 햇살자국이 작은 방까지 비춰주지 않나요?

그럼 이만 산달, 입춘대길입니다!


김부각 혼자 다 먹은 덕복희 올림


p.s. 새벽마다 시 한 편 읽으면서 하루를 시작해요. 타로카드를 뽑듯이 설레는 마음으로 시집의 아무 쪽이나 펼치거든요. 오늘은 달복의 예쁜 노랫말이면 충분하겠어요. 다음에 선율을 들을 행운이 오길.

 

 

 <봄을 전해준 복희에게>

 

어느덧 입춘이군요! 복희의 편지가 제게 봄처럼 도착했어요. 많이 기뻤답니다. 복희가 올해에는 제게 봄의 전령처럼 봄의 소식을 전해주었으니까요. 저뿐 아니라 도시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봄이 올 때 풍기는 향긋한 내음과 걸음 소리를 놓친 채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봄 속에 들어와 있을테니까요. 아, 얼마나 안타까운 일일까요? 저는 얼마나 많은 손짓들을 놓쳐왔던 걸까요?

현대인들이 무릇 그렇듯, 살아가기 위해서 도시 사람들은 너무 많은 정보들을 끌어 안고 살고 있어요. 매일 새로운 이야기들을 접하면서도 어제 들은 이야기들을 내려놓지 않아요. 아니, 그건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환상 덩어리일 뿐이에요. 사람을 마비시키는 환상 덩어리. 그것들 때문에 우리는 만성적인 신경과민에 시달려요. 저만 해도 덜렁거리지 않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만 했는걸요. 매일을 메모장에 기록하고 계획하고 신문을 읽고 새로 나온 책은 뭐가 있는지 살펴보고 저기 높으신 분들 사이에서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내키지 않지만) 지켜봐야 하고,, 놓치지 않는 정보들이 없는지 늘 긴장하게 돼요.

매일을 자극적인 음식들을 먹다보면 혀가 얼얼해지듯, 귀에 전자 음악을 늘 꽂고 살면 점점 귀가 들리지 않듯, 도시는 사람들을 무뎌지게 만들어요. 오직 어떤 의미인지도 모를 숫자들과 시곗바늘들과 정신없는 글자들이 어떤 의미인지 파악할 수 있게끔 훈련되죠. 어떤 감각들을 잃어버렸는지도 알지 못하고 저는 오늘도 버스에 탑니다. 지리산을 넘어가는 동백처럼 붉은 태양이 어떤 시를 만들어낼지 우리는 알 수 없어요.

도시라고 부를 수 없는 곳이 존재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다가 복희의 편지를 받았어요. 창문을 대뜸 넘어와 피아노 위에 자리잡은 생강나무꽃 색의 햇살자국을 전해 준 복희를 읽다 보니 지리산이 제가 더듬어보던 그런 곳일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지리산에 사는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니니 조심하셔야 해요. 다만 생명이 사는 모든 곳이 그리 아름답고 연약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지리산 숲길의 숨을, 그 생경한 시들을 편지에 한아름 담아줘서 진심으로 고마웠어요. 저는 이번 주 내내 무엇을 담아 보낼지 고민하다가 봄소식을 늦게 전해버리고 말았네요. 미안함을 전합니다. 그런데 복희가 김부각을 혼자 다 먹었으니 조금 덜 미안해하도록 할게요.

저는 명절을 끝내고 다시 본가로 돌아왔어요. 제가 살고 있는 곳, 화순은 참 걷기 좋은 곳이에요. 집을 나서서 천변을 따라 쭈욱 내려가다 보면 마른 갈대가 우거진 습지가 있어요. 그곳에서는 늘 오리들이 떼를 지어 유유히 물장구를 치고 있기도 하고 큰 백로가 기지개를 펴고 날아가는 것을 볼 수도 있어요. 어제는 잿빛 두루미를 만나 얼마나 기뻤는데요. 다시 발걸음을 돌려 집을 지나치면 무등산자락으로 들어갈 수 있어요.

우리 전라도의 산들은 침엽수와 활엽수가 함께 살고 있어 충청도나 강원도의 외로운 산들보다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대요. 따뜻한 기운과 차가운 기운이 만나는 곳이라고들 하더라구요. 그 사실을 알고 나니 저의 하늘을 따스하게 덮어주던 나무들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어요.전에는 함경도에 있는 나무나 제주도에 있는 나무나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여러 조건들이 만나 이곳에서만 살 수 있는 나무님들을 내가 보고 있다는 생각에 저는 참 감사했어요. 복희가 만나는 새벽녘의 나무들은 어떤 분들일지 문득 궁금해져요. 지리산에 가게 된다면, 제게도 그 분들을 소개시켜 주세요. 복희에게도 제가 만난 나무님들을 소개시켜 줄게요. 함께 나무 앞에서 환희를 나누는 날을 상상해봐요.

복희, 적당한 익살의 경계를 넘어버리는 것이 하수들의 실수라면서요. 복희가 덥수룩한 수염의 소유자와 함께 절복을 입고 기사 사진을 찍는 모습을 상상하게 만들다니요. 조금 더 긴장의 끈을 붙들어 매어야 되겠어요 복희. 아니, 근사하지 않다니요! 그만큼 근사한 전투복이 어디있나요? 절복과 터번을 걸치고 환경운동을 하다니. 제게도 남는 절복이 있다면 하나만 나눠 줄 수 있나요? 부탁하고 싶을 정도로 탐이 나요.

휴, 도시에서 기후운동을 한다는 것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답니다. 동물들이 저마다의 보호색으로 자신의 몸을 주변 환경에 맞추듯, 도시생활자들 또한 마찬가지거든요. 다만 자신 주변의 색을 닮아 물들어가는 것이 섭리인 두꺼비와 달리 도시에 사는 존재들은 때를 묻히지 않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거리 어딜 가나 서로 나서 자신이 아름답다 우기는 옷들이 돌아다녀요. 가련한 사람들은 그것들을 너도나도 가지지 못해 안달이고요. 아마 복희도 모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스 신화에서는 헤라클레스가 독 묻은 옷을 입고는 고통스러워 불에 뛰어 들죠. 수천 년이 지난 오늘에서는 사람들이 피부가 두꺼워져서 독을 입고서도 끄떡없는 존재가 된 것만 같아요. 아, 산으로 강으로 바다로 독을 흘려보내는 방법을 기어코 터득한 걸까요?

흠흠 샛길로 잠깐 샜던 것 같습니다. 제가 어떤 옷을 입었는지 궁금하신가요? 그렇다면 알려드리겠습니다. 겨울의 저는 늘 무릎부터 목까지 올라오는 검은색 코트를 입고 다닙니다. 도시인처럼 보이기 딱 좋은 옷이죠. 하지만 그 속에는 기후운동을 하는 사람다운 옷을 입고 있답니다. 많은 옷을 가지고 있지 않아 갈색 면바지와 청바지를 돌려 입구요. 몸통은 찻빛이나 하늘빛을 담은 니트를 주로 두른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건 양말이에요. 꽃이 수놓아진 양말을 입고 지하철을 탈 때면, 어느 때보다도 신난 상태로 기후악당들을 무찌르러 출동하는 기후운동가로 변신하곤 합니다. 그게 왜 기후운동을 하는 사람다운 복장인지 의문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답은 간단하답니다. 그런 옷을 입은 제가 기후운동을 하기 때문이에요 히히.

사실 어떤 옷을 입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저마다의 맥락 속에서 자신의 전투복들을 선택하니까요. 옷뿐만일까요? 우리는 각자가 가진 욕망이 허락되는 만큼 자신의 관계 방식을 만들어내요. 맨날 검은색 옷만 입는 사람도, 파란색 옷만 입는 사람도, 말을 하다가 말고 숨어버리는 사람도, 몸짓 발짓 다 해가며 온 맘 가득 표현하는 사람도, 다 저마다의 살아가는 방식이죠. 그건 선택과 의지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주어지거나 휩쓸리기 쉬운 종류의 것인 것 같아요. 사랑조차도요. 운명이란 말의 존재 가치가 분명히 있답니다.

그래서 중요한 건 저 사람이 왜 저런 옷을 입고 다니는지 이해하고 소통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요. “너가 삶을 사랑하는 방식은 이렇고, 내가 사랑하는 방식은 이런데, 우리가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우리는 함께 삶을 나누며 살아갈 수 있을까?” 이런 물음 말이에요. 거기서부터 창조적인 것이 시작된다고 믿어요.

저도 궁금해요. 복희는 언제부터 절복을 입게 되었는지, 도시에서 나고 자랐음에도 왜 지리산에서 살기로 결심했는지, 나무 공부는 복희에게 어떤 즐거움을 가져다 주는지. 아침에 지리산 둘레길에 들어서면 어떤 숨들이 복희의 몸을 그렇게 벅차게 만드는지. 복희를 읽어가는 것은 참 편안하고 기분좋은 일이에요. 곧 있을 복희와의 만남을 상상해요. 이럴 것이다 쉽게 그려지기도 하고, 어떤 이야기들이 또 오고 갈 지 잘 떠오르지 않기도 해요. 그치만 우리가 이렇게 서로를 향한 질문을 품고 있으니, 턱끝까지 벅차오를 시간이 되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아요.

내일 복희가 매일 걷는 숲에서 만나게 될 새로운 영혼은 누구일까요? 새롭게 꺼내 읽을 시는 누구의 말들일까요? 그동안 또 어떤 숨들을 모아 보내올까요? 저는 그 무한한 마음을 새롭게 받아 안으며 기다릴게요. 봄이에요. 함께하는 봄이네요. 안녕.

여전히 궁금함이 많은 산달 올림

p.s. 메리 올리버의 ‘마침 거기 서 있다가’라는 시를 아나요? 내일 아침에는 이 시를 읽으면 어때요? “해바라기는 눈부시게 빛나. 어쩌면 그게 그들의 방식이겠지. 어쩌면 고양이는 곤히 잠드는지도. 아닐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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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 편지 : 덕복희와 산달] 사진을 찍는 모습을 상상하게 만들다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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