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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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칩코

 

<가로에게>

 

가로 안녕하세요!

고등학교 때 매일 다니던 등굣길에는 개나리 꽃이 펼쳐진 언덕이 있었어요. 작고 귀여운 것들을 연상시키는 상큼한 노란 개나리 꽃이 길게 늘어뜨려진 꽃 터널을 지나 걸어내려가면 봄의 생명력이 풍성하게 느껴졌어요. 싱그러운 봄 기운이 상쾌한 아침, 이 길을 지날 때 내가 ‘아, 살아있다’는 감각이 몽글몽글 피어올랐어요. 그러면 뜨거운 눈물이 차올라서 순간 그 길이 뿌옇게 흐려졌어요. 기지개를 펴고 일어나는 꽃망울들에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던 시간들이 있었어요. 몸에 닿는 포근한 햇살과 바람이 이 맘 때쯤 갑작스럽게 떠나보내야만 했던 존재와의 추억이 떠오르게해서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학교에 갔어요.


중학교 2학년 새학기가 시작된지 일주일도 되지 않은 어느날, 따스한 햇살을 맞으며 창가쪽 뒷줄에 앉아 교과서로 슬쩍 가린 소설책을 몰래 읽던 저를 선생님께서 따로 부르셨어요. 앗, 들켰구나 하는 생각에 잔뜩 긴장한 마음으로 밖으로 따라 나갔는데 예상치 못하게 들려온 것은 어머니의 부고 소식이었어요. 

 

그 뒤로 봄은 자연스럽게 죽음을 연상시켜요. 3월, 내가 태어난 날을 함부로 축하하는 것도 어찌나 미안하던지.. 생일이면 꽁꽁 숨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겨우내 기다렸던 봄이 반갑지 않게 되는 마법에 걸린 것처럼 오랫동안 봄 날엔 늘 마음이 저릿저릿해요. 언제쯤 마음 놓고 이 따스함을 반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글쎄요, 이 슬픔 또한 나의 일부인 것을요! 눈물로 등교하던 내면의 아이를 매년 봄날이 되면 안아주고 토닥여주는 수밖에요. 


오랜만에 읽는 가로의 편지에 마음이 복잡했어요. 궁금했던 소식에 반가운 마음과 또 한편으로는 허탈한 마음도 있었어요. 펜팔을 통해 내 안에는 상대방으로부터 배려받고 싶었던 마음, 친밀한 관계를 만들고 싶었던 마음에 아쉬움이 있었던 것 같아요. 편지에 적어내린 진솔한 이야기가 서로에게 의미있는 발견과 회복이 되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어요. 감히 가로의 마음도 나와 일치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도 있네요. 가로가 제 마음에 ‘저도, 그렇고 말고요’ 라고 환하게 답해줄 것 같긴하지만.. 가로만의 펜팔에 대한 기대는 얼마든지 다를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인지 이번 편지에는 조금 더 솔직한 나의 이야기로 용기를 내보고 싶었어요. 


사실 가로의 편지를 읽을 때면 나와 닮은 구석을 꽤 많이 발견하곤 해요! 하나씩 나열하자면 한 문장 한 문장 저도 참 할말이 많은데요. 너무 주책맞게 하나씩 ‘저도 그래요! 저도요!’ 라고 하면 ‘이것은 누구를 위한 공감인가..’ 하는 생각이 들것 같아 조금 자제하려고 해요. 누구나 저마다의 차마 꺼내지 못하는 이야기 주머니가 있잖아요.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면 상대를 훨씬 많이 이해하고 사랑하는데 도움이 되더라구요. 

 

그렇다는 걸 알면서도, 사뭇 진지한 이야기 같아서 상대가 머쓱할까봐, 행여 분위기가 가라앉을까봐 조바심 나는 마음에 그런 진솔한 이야기를 꺼내기 보단 유쾌한 이야기들로 산뜻한 분위기를 갖는데에만 애를 쓰는 경향이 있더라고요. 사실 펜팔을 통해서 그 주머니를 하나씩 꺼내보고 싶었는데 가로에게 잘 보이고만 싶었는지 동화처럼 아름답고 행복한 이야기만 써내려가진 않았나 하고 생각이 들었어요. 

 

기분이 좋아지는 편지를 쓰고 싶다는 욕심에 행복하고 따스한 것들만 찾으려고 했던 애쓰는 마음이 있지는 않았나하고 살펴보게되었어요. 이런 마음이 혹시나 편지를 시작하는 것을 어렵게 하지는 않았을까요? 가로에게 부담이 되진 않았을까요?


몇일 전 오랜만에 본가에 다녀왔어요. 툭 하면 눈물이 왈칵 쏟아지던 학창시절을 보냈던 그 방에서 나는 많이 힘들었나보더라고요. 가로의 편지를 다시 읽으면서, 나에겐 왜 독립이 절실했는지, 살기 위해서 왜 떠나야만했는지 하나둘씩 기억이 돌아왔어요. 누군가를 떠올리면 목구멍이 뜨거워지고 눈시울이 몰래 붉어지는 매일을 숨기면서 살았던 방안에서의 날들을 뒤로하고 살기 위해서 집을 떠나야했던 것 같아요. 울적한 마음을 말하지 못했던 날들이요. 그 모습들이 나에겐 꺼내기에 창피한 것으로 남아있었어요. 친근한 모습으로만 비춰지길 바라는 마음에 내 안의 이런 모습은 부정하고 싶었나봐요. 요즘은 주변에 소중한 이들에게 조금씩 꺼내놓는 연습을 하고 있어요. 이런 나를 얼마든지 사랑해주고 수용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믿어가는 연습인 것 같아요. 자연에 가까이 있는 시간에 위로받았던 것도 그 이유일지 모르겠어요. 가로의 말대로 자연은 거짓되지도 과장되지도 않은 존재 그대로의 삶의 흔적을 보여주니까요. 


가로의 솔직한 마음들이 담긴 편지를 (여러번 곱씹으며) 읽으면 기다리며 섭섭했던 마음이 신기한 형태로 변화되는 것을 알게되요.. 새로 이사간 공간에 만족하며 지내는 것 같아서 시장이 머릿속에 그려질만큼 신나게 설명해주는 가로가 귀엽고 행복해보여서 흐뭇하기도, 혼자이지만 따뜻하고 건강한 끼니를 대접하며 스스로를 돌보는 것이 대견하기도 하고, 찬 음식을 먹었다라는 말이 마음에 쓰여 잠시 그 문장에 머무르기도 했어요. 불쑥불쑥 찾아오는 불안한 마음을 솔직하게 편지에 담아주는 가로에게 고마운 마음도 느꼈어요. 마음이 무거운 날엔 몸을 움직이며 활기를 되찾는 가로가 혼자 살이 안에서도 나만의 재미를 찾아가는 것이 대단하다고 느껴져요! 주로 어떤 음식을 해먹나요? 가로가 채소 농사를 짓겠다고 하면 씨앗보물상자를 열어 가로가 심어보고 싶은 것들을 선물해주고 싶어요. 어떤 채소를 좋아하나요? 


초록생명들에 이름을 지어주는 가로의 모습에도 저는 피식 웃음이 났답니다. 믿지 않겠지만 저도요.. 저도 그런적이 있거든요! 든든한 동반식물들이 생겼다니 저도 기뻐요. 생명에게는 그런 에너지가 있나봐요. 너를 살게한다는 것은 곧 나를 살게하는 일이 되고, 그 돌봄의 에너지는 우리 모두를 살게하니까요.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는 것은 가로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혼자서 기대하고 상처받고..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을거에요. 관계를 맺고 살아갈 수 있음이 한 없이 감사한 일이다가도 어느 날은 흔적도 없이 도망가고 싶은 때가 있어요. 가로의 말처럼 사랑의 방식이 누구나 다르듯이 어떤 것도 정답은 아닐지 몰라요. 


혹시 식물들은 우리에게 그런 말을 속삭이고 싶은 건 아닐까요? 조금 더 자세히 서로를 바라보라고, 그리고 상대의 눈빛에 귀기울이라고. 혹시 흙이 메마른건 아닌지 보드랍게 조심히 만져보라고. 


가로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애정과 관심을 더 많이 보내겠어요! 펜팔 짝꿍을 매칭하기 위해 이야기를 나눌 때, 가장 먼저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이 났던 분이 가로였거든요. 쑥스럽지만 펜팔을 시작하던 저의 초심을 고백해봅니다. 어느새 이것 저것 이전에 없던 무언가를 기대하고 바라는 마음들이 생겨났지만, 사실 누군가가 나의 이야기를 이렇게 들어준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시작을 되돌아보네요.


2월 회동에 가로와 인사를 나누지 못한 것은 저 뿐만 아니라 다른 펜팔친구들에게도 많은 아쉬움이었을거에요. 다음 지리산에서의 만남이 더욱 기대가 되요! 우리 그때는 꼭 만나서 뜨거운 포옹을 나눌 수 있으면 좋겠어요. 가로가 산뜻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와주면 좋겠어요. 우리가 편지로 나눈 시간들이 있어서 그런지 처음 만난 펜팔러들과도 내적 친밀감이 자연스럽게 생기더라고요. 다른 펜팔 짝꿍들과 편지 구절을 함께 읽던 시간이 있었는데 저는 가로의 쓰레기더미가 말을 건네와주었다던 구절을 골랐답니다. 있는 그대로의 흔적들을 아름답게 바라봐주는 가로의 마음이 따뜻해서요. 그리고나서는 겨울나무를 가까이서 보기 위해 산책을 나섰어요. 봄에 지리산에 온다면 꽃과 나무들이 온 팔을 벌려 가로를 환영할 거에요. 저도 그렇고요.


이번 편지는 저도 많이 늦었어요. 가로가 부디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주세요.

온 마음을 담아


토토

 

 

<토토에게>


토토 저에요 가로, 

 

오늘 제가 우연하게 만난 문장을 토토에게 선물해줘도 될까요?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란 자기 자신을 가지런히 하는 일이라는 것, 자신을 방기하지 않는 것이 누군가를 기다려야 하는 사람의 의무라고 다짐했다. 그렇게 해서 최선을 다해 초라해지지 않는 것이라고."

저는 오늘 이 문장을 보면서 어쩐지 큰 위로를 받았거든요. 제가 기다려왔던 누군가는 어쩌면, 저렇게 다짐할 수 있는 내 자신이 아니였을까 하고요. 문장처럼 누군가를, 잃어버린 무언가를 기다리더라도 내 자신과 주변을 가지런히, 내버리지 않고 돌보면서 따듯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발견해 낼 수 있는 힘을 잃지 않는 나를 오래도록 기다려왔던 것 같아요.

저는 사실 무겁고 진지한 이야기를 참 쉽게 하는 편인 것 같아요. 좋아하기도 하고요. 왜그럴까요. 토토처럼 이런 이야기들을 듣는 사람들이 얼마나 마음이 불편하고 무거웠을지 전혀 생각을 못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내가 괜찮으니까 상대방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어요.

저는 어느날 문득 어떤 불행, 어떤 행복, 어떤 특별한 감정들을 동반한 기억들은 나를 평생동안 떠나지 않고 언제나 내 옆에 있어 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거에요.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요. 그래서 이제는 이런 요상한 나를 떠나지도 않고 심심하지 않게 해주는 구나, 참 고맙구나 하고:)는 행복도 불행도 기꺼이 반겨주기로 했어요.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안녕, 하고 웃으면서 인사를 건내는 거에요. 그러면 먼 과거도 뻔뻔하게 그래 안녕했다고 이야기해주더라구요. ‘아휴.. 못산다 못살아, 고맙다. 고마워 또 찾아와줘서!'

ㅎㅎ 징글징글하지만 결국은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관계들 있잖아요. 혹시 알아요? ㅎㅎ 고운정 미운정 다든 오랜 사이들.

제 이야기가 토토에게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저한테는 굉장히 좋은 방법이 되었어요. 요새는 진지한 사람보다 좀 모자라고 웃긴 사람들이 편하고 좋더라구요? 그래서 나도 그런 편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많이 노력중이에요. ㅎㅎ

토토는 앞으로 과거를 어떻게 만나고 싶어요?

PS. 토토가 주변에서 발견하는 다정하고 따듯하고 아름다운 반짝이는 소중한 시선들을 나눠줘서 그동안 저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다는걸 알았어요. 정말 고마워요!

아, 그리고 토토 ! 토토의 소중한 봄을 진심으로 축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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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칩 편지 : 토토와 가로] 이 슬픔 또한 나의 일부인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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