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흥왕의 손자가 지리산으로 피신한 사연은?
[지리산 문화] 함양 삼정산 삼불주암 사찰 기행
함양군 마천면 군자리에 있는 삼정산(三丁山, 三政山)[1,156m] 정상의 세 봉우리는 상무주암, 문수암과 삼불주암(三佛住庵)을 거느리고 있다. 가운데 문수암에서는 지리산 천왕봉이 암자 앞의 산줄기에 막혀서 보이지 않고, 상무주암과 삼불주암에서는 동남쪽으로 10km 직선거리의 지리산 천왕봉과 중봉, 하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리산 삼불주암 천왕봉 전망, [사진, 이완우]
이들 세 암자는 지리산 7암자 코스의 셋째, 넷째와 다섯째 암자로서 지리산 칠암자 코스의 중심 지역에 있다. 삼정산의 남쪽으로 지리산의 도솔암과 영원사가 지리산의 주능선에 가깝게 높은 위치에 있고, 북쪽에 약수암과 실상사가 지리산 북쪽의 람천의 흐름을 지켜보며 지리산 7암자 코스의 시작과 마무리 지점을 이룬다.
11월 중순의 늦가을 지리산 문수암을 거쳐 삼불사 찾아가는 산길은 낙엽 밟는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이 암자는 도마마을에서 2시간을 걸어와야 하므로 찾는 이가 거의 없는 조용한 암자이다. 법당에는 ‘삼불주(三佛住)’ 편액이 한가롭게 걸려 있을 뿐이고, 산신각과 요사채 등 사찰 전각들은 황토와 돌을 섞은 돌담 벽으로 이루어져 소박하고 친근한 느낌이다.
지리산 삼불주암 편액, [사진, 이완우]
법당 옆에는 3층 석탑이 서 있는데, 개성적인 양식이 눈에 띈다. 석탑의 1층과 2층의 탑신 네 면에는 불상, 사천왕상과 신장상 등의 부조가 있다. 1층 탑신의 전후 면에 있는 이불병좌상(二佛倂坐像)은 흔하지 않은 양식이고, 옥개석에 기왓골을 표현한 양식 기법은 거의 이곳이 유일하다고 한다. 최근에 조성한 석탑이지만 미래의 석탑 양식을 지향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지리산 풍경을 수십 년간 사진 찍어왔던 류요선(남원시 이백면 강촌마을)씨는 20여 년 전에 이곳 삼불주암이 비구니 참선 도량이었을 때 실상사에서 약수암과 도마마을을 거쳐서 찾아왔다고 말한다. 그가 이 암자에 도착한 봄날 늦은 오후에 뜨락 옆의 정갈한 텃밭에는 금낭화가 군락을 이루고 피어 있었다며, 그때 찍은 금낭화 사진을 보여주었다.
지리산 삼불주암 금낭화(1995년 봄) [사진, 류요선]
이곳 삼불주암의 주지인 효성(曉星) 스님이 류요선 씨에 향기로운 차 몇 잔을 여유롭게 권하였다. 스님은 지리산 천왕봉 너머로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르는 풍경은 참으로 맑고 깨끗하여 인상적이며, 비 내린 후 산자락에 피어나는 운무는 무념무상의 경지를 표현하는 듯하다고 했다. 밤하늘의 별빛과 고요한 달빛에 환한 도량은 또 얼마나 고적하며 평온하게 아름다울까?
류요선 씨가 효성 스님에게 지리산 풍경 사진 몇 장을 우편으로 보내주기로 약속한다. 스님은 메모지에 암자 아래의 마천면 도마마을 한 집 주소를 써서 건네준다. 이곳 암자에 오는 택배나 우편물은 아랫마을의 한 집에서 수령하여 머물러 있다가, 마을 주민이 이 암자에 올라올 일이 있을 때 가져다준다고 한다. 지리산 암자의 시간은 속세와는 다르게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지리산 삼불주암 법당 벽면 채반, [사진, 이완우]
이곳 삼불주암으로 도마마을에서 올라오는 삼정산 자락이 견성(見性) 골이다. 이 골짜기에는 “까마귀나 까치도 경(經)을 외우며 간다”는 속담이 예로부터 전해온다.
까마귀나 까치도 경(經)을 외우며 간다. 수수께끼 같은 이 속담은 함축적이며 흥미롭다. 이 속담은 이 지역에 전승하는 설화를 반영하고 있는데, 이 지역에 불교 활동과 민간에 대한 영향력이 그만큼 컸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7세기 중반인 신라 무열왕 때에 마적 대사가 이 지역 하천인 용유담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삼정산에 문수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조선 시대 중기에는 인오(印悟, 1548-1623) 대사가 이 지역 지리산 영원사에서 수행할 때 함양 장터를 다니며 백성들과 소통하고 교화하면서 함께 산을 넘던 고개(오도재)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지리산 삼불주암 삼층 석탑, [사진, 이완우]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보며 삼정산 아래 기슭인 함양군 마천면 군자리에는 군자사지(君子寺址)가 있다. 신라 진평왕(眞平王 567~632, 재위 579~632)이 국왕으로 즉위하기 이전 10살의 어린 나이에 이곳에 피신하여 3년을 지냈다고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신라 진흥왕(眞興王 534~576, 재위 540~576)이 승하하자, 진흥왕의 둘째 왕자가 진지왕(眞智王, 재위 576~579)으로 즉위하였다. 진흥왕의 태자인 동륜태자(銅輪太子, ? ~572)의 어린 아들(후대 진평왕)은 숙부가 왕위를 잇자, 신변에 위협을 느껴 국경 지대인 지리산 자락의 함양의 이곳으로 피신하였다.
진지왕이 즉위 3년만에 화백회의에 의해 폐위되고, 진평왕이 13세의 나이로 신라 국왕으로 즉위하여 18세부터 친정하였다. 진평왕 어린 시절의 함양 지리산 자락 피신과 3년 후 화백회의에 의한 진평왕 즉위 등의 역사적 사건은 당시 신라 왕실의 왕권을 향한 권력 투쟁을 암시한다.
지리산 삼불주암 삼층 석탑 조형물, [사진, 이완우]
국왕이 즉위하기 전에 잠룡(潛龍) 신분으로 거주한 저택을 잠저(潛邸)라고 한다. 진평왕은 어린 시절에 거처했던 함양 지리산 자락의 잠저에 군자사(君子寺)를 건립했다. 이곳 군자사는 조선 시대에 지리산을 유산(遊山)하는 관리나 선비들이 머물렀다가 하동암을 거쳐 천왕봉으로 오르는 주요 거점이었다.
진평왕이 어린 시절에 이곳 지리산 자락에 머물면서 아들 낳기를 지리산 산신에게 기원하여서 이곳 지명을 군자리(君子里)라고 한다는 지명 설화가 전해오는데, 진평왕의 아들은 기록에 나오지 않는다. 선덕여왕과 선화공주가 진평왕의 딸이며, 태종 무열왕 김춘추가 진평왕의 외손주이다. 진평왕이 이 지역에 세운 군자사의 사찰 이름에서 군자리라는 지명이 유래했다고 볼 수도 있다.
진평왕은 ‘왕이 곧 부처’라는 왕즉불(王卽佛) 관념을 확립하였으며, 자신의 직계 가족을 부처의 집안과 동일시하였다. 진평왕은 다양한 방법으로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정치 제도를 정비하고 활발한 외교 정책을 펼쳐서 진흥왕에 이어서 신라의 삼국 통일 기틀을 다졌다.
지리산 삼불주암 삼층 석탑 부조, [사진, 이완우]
군자사는 진평왕이 어린 시절을 보내며 국왕으로 즉위하기 위해 때를 기다렸던 의미 있는 장소로서 진평왕의 53년 재위 기간에 왕실의 안녕과 나라의 평안을 기원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왕명에 의해 국태민안을 기원하기 위해 지리산을 오르내렸을 행렬에서 “까마귀나 까치도 경(經)을 외우며 간다”는 이 지역의 속담이 발생하였을 수 있다. 이 속담 속의 까마귀나 까치에서 같은 옷을 입은 단체가 줄지어 산길을 이동하는 모습이 연상된다.
지리산 삼불주암에서 지리산의 천왕봉과 중봉, 하봉을 바라보고, 시선을 돌려 산 아래 견성골 산자락을 찾아본다. 지리산의 수많은 봉우리, 능선, 골짜기와 계곡에는 역사와 설화들이 씨줄과 날줄로 잘 짜여 천오백 년 전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지리산에서 내려오는 오후의 산길은 낙엽이 밟히며 버석거리는 소리와 조릿대 군락지가 바람에 흔들리며 서걱대는 소리로 가득하였다.
지리산 삼불주암 흙집 산신각, [사진, 이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