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산청의 산들강 소식을 전하는 포네입니다. 다섯 번째 답사에서는 금서면 방곡리에 있는 <산청함양사건추모공원>을 방문했다가 지리산 둘레길을 따라 왕산 상사폭포까지 걸어갔어요.
산들강 3, 4에서 연속으로 비가 내려 우중 산행을 했었습니다. 우중 산행도 나름의 매력이 있었지만 계곡에 입수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어 오늘은 맑은 날이길 바랐는데 소원이 이루어졌어요.
산청함양사건은 한국전쟁 중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을 이유로 공산당도 아닌 국군에 의해 산청군 금서면 가현마을, 방곡마을과 함양군 휴천면 점촌마을, 유림면 서주마을에 살던 무고한 민간인 700여명을 처참히 학살당한 사건입니다. 당시 억울하게 희생된 영령들을 모신 묘역이 바로 이곳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이구요. 합동묘역조성과 위령탑 건립은 2001년 12월 합동묘역조성사업 착공이후 4년에 걸친 공사 진행으로 준공에 이르렀습니다. 건립된 지 20년이 흘렀는데 처음으로 가 보았군요. 무관심에 미안함을 느낍니다.
먼저 전시관에 들러 사건을 소개하는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동영상은 생존자의 증언과 상황재현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무고한 주민들이 어떠한 변명의 여지도 없이 작전수행의 성과물이 되기 위해 살해당한 사건. 희생자 대부분은 부녀자와 노인이었다고 합니다.
비슷한 사건들이 금서, 휴천, 유림 말고도 지리산 자락 곳곳에서 일어났고, 글쓴이가 사는 오부면 일물마을에서도 일어났었답니다. 집 앞에 있는 논에서 주민이 작두에 목이 잘려 본보기로 효수되는 일이 있었다고 하는데,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일물마을에서는 노약자, 부녀자를 제외한 남자들이 끌려가 학살당했기에, 글쓴이가 처음 이 마을에 들어온 35년 전에는 과부 할머니들이 많았습니다. 중장년 마을 원주민들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조부모에게 농사를 배운 분들이었습니다.
산청에서는 8월 14~15일에 함께평화영화제가 있었습니다. 영화제에서 <수프와 이데올로기>를 보았어요. 이것도 제주 4.3과 관련된 다큐멘터리이지요. 감독의 어머니는 4.3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가 조총련 활동을 열심히 하다가 아들들을 북한으로 보내게 됩니다. ‘수프’는 영화감독인 딸과 일본인 사위가 집에 오면 어머니가 항상 끓여주시는 닭국인데, 서로 다른 배경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할 수 있는 식탁을 의미합니다. 이데올로기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국가폭력의 희생자가 반대편의 이데올로기에 몰입하게 되고, 결국 자녀들도 이데올로기의 희생자가 되고, 본인도 치매로 기억을 잃고, 딸은 부모를 원망하다가 4.3이 얼마나 끔찍한 사건이었는지를 알게 되면서 수용과 이해에 이르는 다큐멘터리. 국가는 수프일까요, 이데올로기일까요?
거창함양사건은 이데올로기조차도 아닌, 그저 국군의 성과와 본보기가 되기 위해 주민들이 학살당한 사건입니다. 이런 일을 겪고 생존하면 기분이 어떨까요? 사실을 말해도 살해당할까봐 두려움에 떨게 될 것 같습니다. 합동묘역이 만들어진 지금은 비교적 안심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지만, 피해자들을 위로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기억하기 위해 투입되는 사회적 비용은 어마어마하지요. 병주고 약주고 하는 국가의 실체는 무엇인가 싶습니다. 많은 비용이 투입된 곳이니, 추모공원 근처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번쯤 나라를 만든다는 핑계로 행해지는 폭력에 대해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여기서 나라는 국가 뿐만 아니라 집단, 공동체, 마을이 될 수도 있겠죠. 국가는 사회적인 안전망, 돌봄의 네트워크가 되어야 하는데, 이 네트워크를 만들기 위해 무고한 구성원을 학살한다면, 돌봄의 네트워크가 아니라 소수 권력집단의 이익을 위한 구조를 만들고 있는 것이겠죠.
위령탑까지 올라갔다 내려와서 둘레길을 따라 걸어갔어요. 한창 칡꽃이 피는 계절이라, 햇빛이 내리쬐는 시멘트 길에도, 숲속 오솔길에도 향기가 났어요.
산길에서는 우리 일행 외에는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어요.
상사폭포에 드디어 도착.
물벼락을 맞아봅니다. 땀 흘리며 산에 오른 보람이 있네요. 폭포에서 무지개도 보고, 바위 위에 드러누워 봅니다. 요즘 머릿속이 복잡하고 무거운데 정수리에 물대포를 맞으면서 모두 다 씻겨 흘러가버라~ 하고 기도했어요. 울어서 머리가 가벼워진다면 이 폭포가 다 내 눈물이길. 모든 오해와 상처들도 다 씻겨가 버렸으면 좋겠어요.
폭포에서 내려와 방곡마을 정자에서 숲샘이 준비해온 김민기의 가을 편지를 들었어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낙엽이 흩어진 날
헤메인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모든 것을 헤메인 마음 보내드려요
낙엽이 사라진 날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아름다워요
누가 나에게도 가을편지를 보내줄까요? 내가 가을편지를 보내도 그 사람은 그 마음 그대로 받아줄까요? 가을엔 아무도 곁에 없는 듯 허전하기만 합니다. 오해 속에 살다가 오해 속에 스러져가는 생명들. 한 때 아름다웠던 우리들 누가 기억해줄까요?
숲샘은 직접 필사한 오세영의 <피는 꽃이 지는 꽃을 만나듯>도 읽어주셨어요.
상사폭포를 다녀온 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그 동안 무더운 열기도 한풀 꺾인 듯 저녁이 되면 공기가 선선해지는 게 느껴집니다. 에어컨 바람이나 계곡이 아니라면 혼을 쏙 빼 놓을 정도로 녹아내리는 여름이 어제 오늘만은 아니었지만, 저는 부모님과의 관계 문제 때문에 혼이 나갈 만큼 힘들었던 여름방학이었어요. 아이들 방학 중 본가에서 책을 쓰며 머물렀는데, 나를 불편해 하는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가 아이들이 놀고 있는 공간과 주방에 내가 마음대로 가지 못하게 하고, 손님이 오는 날에 나가있으라고 하는 배척과 동선 통제, 사실 왜곡, 정신적 괴롭힘, 언어폭력 때문에 막바지에는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쏟아지고,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안절부절 못하는 우울 증상이 생겼어요.
부모님과의 관계가 이렇게 된 것은 내가 작년에 남편 말고 남자친구가 생겨 이혼을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게 다른 사람, 생각이 다른 사람과는 같이 살 수 없다고 하시네요. 뭐가 그렇게 다르다는 걸까요? 아나키즘을 주장했던 우리 부모님이 당신들은 이제 아나키스트가 아니고 주체사상이라고 하십니다. 옆에 붙어서 보살펴줄 사람은 없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상황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산들강에 갔었어요.
아름다운 상사폭포가 있는 왕산 자락에서 일어난 참혹한 일. 기억하는 이들도 사라져 가지만 학살과 폭력은 다른 모습으로 지구상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따져봤자 아무 소용이 없지요. 서로 싫어하고 좋아하는 게 다르고 생각이 달라도 공존할 수 있고, 그 모든 게 별 거 아닌 사소한 일이라는 걸 인류가 깨닫지 못해 사로 싸우다 절멸에 이르러도, 금서면 방곡리에 사람들이 왔다가 사라지고 지방이 소멸되어도, 상사폭포와 방곡계곡은 계속해서 흘러가길. 함께 걸은 분들과 상사폭포, 가을편지 덕분에 잠시나마 위로 받았습니다.
여담: 이번 주 화요일에는 쓰담 거기가 있었습니다. 경호강변을 따라 쓰레기를 줍다가 카페 한량에서 기후위기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바꾸어야 할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산림 보존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참여자 중 한 분이 케이블카를 찬성한다는 이야기를 해습니다. 연로한 어머니와 천왕봉에 가보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그럴 수 있지요. 할 말이 많았지만 제 순서가 될 때까지 다른 세 분이 발언하는 걸 들으며 기다렸는데, 제 발언 순서 되어 케이블카 이야기를 하자, 내 말을 끊고 케이블카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를 계속 말씀하셨어요. 노약자를 ‘배려’해야 한다고. 마침 참여자 중 한분이 바꾸고 싶으신 것에 ‘배려’를 적으셔서 그걸 인용하셨네요.
케이블카 찬성하시는 선생님이 제 발언 시간의 2분의 1을 소비하셔서 제가 그래도 말을 마치려고 하자 지속가능협회 회장님이 토론은 여기서 하지 말자고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딱 두마디만 했어요.
1. 우리는 인간만 배려할 게 아니라 타 종도 배려해야 한다.
2. 케이블카 예산은 2000억이고, 3억만 있어도 노약자 관광용 헬기를 100번 띄울 수 있다.
아무것도 안 하도, 아무 말도 안 해도, 그대로 가만히 두어도 아름다운 곳에 굳이 돈이 들여 개악을 시키는 건 무슨 욕심일까요? 케이블카 타고 가지 않아도 되는 왕산 상사폭포가 천왕봉 보다 경치가 좋답니다. 억지로 무언가를 만들려고 하면서 생명들을 울리지 말았으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