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흔적인가?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흔적을 남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여러 종류의 야생동물이 함께 살고 있다. 비록 눈으로 확인은 힘들지만, 흔적을 통하여 그들의 존재를 알 수 있다.
농경지나 숲으로 들어가면, 길 위의 똥이나 발자국, 지속적인 왕래로 풀이 눕거나 맨땅이 드러나 길이 보이고, 나무를 긁은 발톱자국 등을 통해 주변에서 살아가는 야생동물들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발자국
풀 위가 아닌 땅이나 모래, 젖은 진흙 위를 걸어간 동물들이 남긴 발자국으로 그들이 누구인지, 어느 방향으로 걸었는지, 아니면 뛰었는지, 몇 마리가 지나갔는지를 알 수가 있다.
우제류인 사슴의 경우 두 개의 갈라진 발톱이 찍히고, 무른 땅일 경우엔 뒤쪽에 며느리발톱까지 찍히는 경우가 있다. 족제비과는 발가락이 다섯 개지만 대개 네 개가 찍히고, 개과와 고양이과의 경우에도 네 개의 발가락이 찍힌다. 조그마한 쥐의 경우 앞발가락은 네 개, 뒷발가락은 다섯 개가 찍히고, 곰은 다섯 개의 발가락이 찍힌다.
고라니의 경우 앞 발가락은 뒷발가락에 비해 벌어져 있으며, 고양이과의 삵은 뒷발에 비해 앞발의 발볼이 넓으며, 개과의 너구리 역시 앞발이 뒷발에 비해 크게 찍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람의 경우 걸을 때 발바닥이 찍히지만, 개나 고라니의 경우 찍히는 발자국은 사람으로 치자면 발가락에 해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발 뒷꿈치까지 찍으며 걷는 사람에 비해 앞 발가락만으로 걷는 고라니가 더 빨리 뛸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이 뛸 때 발가락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발자국을 관찰하는 것도 맨땅보다는 비가 온 다음의 축축한 땅이나, 눈 위에 찍힌 발자국을 보는 것이 좋다.
그리고 동물들이 지속적으로 이용하는 길은 사람의 그것처럼 풀이 나지 않은 맨땅이 계속 이어져 있음을 볼 수가 있다.
비온뒤 고라니가 걸어갔다. 무른 땅이라 발굽이 벌어졌고, 뒤쪽의 부속지(며느리발굽)까지 찍힌걸 볼 수있다.
-똥(배설물)
똥의 내용물을 보면 풀을 먹는 초식동물인지, 털과 뼈가 섞인 육식동물인지를 알 수 있다. 임도의 중앙에 털이 거의 대부분이고 약간의 뼛조각이 보이는 길쭉한 똥을 누는 살쾡이(삵)와 농로의 중앙에 많은 무더기의 똥을 누는 너구리, 똥돌을 이용하는 족제비과 동물과 콩알같은 똥을 누는 고라니나 노루, 질퍽한 똥을 누는 오소리 등, 똥의 형태로 종을 구분할 수도 있다.
대개 여러 마리가 한 군데 똥을 누어 똥자리(분장)를 만드는 동물로는 너구리와 산양이 있는데, 가끔 오소리도 똥자리를 만들기도 한다.
제주의 사려니 숲길에서 본 들개들의 오줌자리의 경우 발자국과 오줌자국으로 암수의 구분이 가능한데, 시설물에 묻어있는 오줌은 수컷, 맨 바닥에 눈 오줌은 암컷으로 볼 수가 있다.
족제비과의 수달의 경우 물 위로 튀어나온 똥돌을 이용하는데, 돌이 없는 경우엔 모래를 긁어모아 그 위에 똥을 누는 습관이 있으며, 고양이는 똥을 누고 흙을 긁어 똥을 덮는 습관이 있다.
계절에 따라 다르기도 하는데, 초여름 벚나무 열매가 익을 때와 뽕(오디)이 익을 때에는 그걸 먹고 검은색의 똥을 누는 경우(오소리, 너구리 등)가 많고, 가을엔 홍시똥(담비, 너구리)을 누기도 한다.
거기에 보석똥을 누는 아이도 있는데, 오소리의 경우 오솔길 옆을 파고(똥굴) 입구에 똥을 누었다가 다음날 거기에 모여드는 딱정벌레(보라금풍뎅이, 홍단딱정벌레, 먼지벌레 등)를 주워 먹고 소화가 되지 않은 딱정벌레들의 등딱지(보석)들을 똥으로 누는 경우이다.
가끔 고양이과나 개과의 똥에 선충이 섞여 나오는 경우와 풀들이 섞여 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이로서 이들의 건강상태까지도 추측해 볼 수가 있을 정도로 똥은 우리에게 많은 정보를 알려주고 있다.
왼쪽은 버찌를 먹었고, 오른쪽은 오디를 먹고 싼 오소리 똥.
-먹이흔적과 마킹(뿔질, 발톱흔적)
이른 봄, 길가의 원추리 새순이 뜯겨 있고 바로 옆에 우제류(발굽동물)의 발자국이 보이고, 작은 나뭇가지를 잘라 먹은 흔적이 보이기도 한다.
겨울철 임도 주변에 작은 나뭇가지의 아랫면의 수피를 돌아가며 벗겨 먹은 설치류의 흔적과 털이 뽑혀있는 꿩의 발가락이 보이기도 한다.
먹힌 꿩이 뼈가 온전하니 살점만 뜯겨져 있고 다리도 그대로 있다면 맹금류인 매에게 먹혔을 가능성이 높고, 뼈가 바스러져 털만 무성하다면 살쾡이일 가능성이 높다.
잣나무 숲에 잣을 빼먹고 남긴 잣방울은 청설모의 흔적이고, 돌 위의 참개암나무 껍질은 다람쥐가 빼먹은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뿔질로 나무에 흔적을 남기는 노루나 산양, 사슴, 흑염소등은 주변환경을 잘 살피고 뿔질을 한 나무의 굵기나 높이 등으로 누구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길을 가로막고 있는 나무에 있는 발톱자국이나 서 있는 나무에 있는 발톱자국을 통해서도 어느 종인지의 구분도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
묘지 앞에서 맹금류가 새를 뜯어 먹었다. 포유류라면 뼈가 거의 남지 않으나 부리로 뜯는 맹금류 특성상 왼쪽 아래 뼈가 남아있다.
-털
살쾡이 똥에 섞인 털이나 까치가 집을 지을 때 바닥에 깐 털을 통해 주변에 어떤 야생동물들이 사는지 짐작할 수 있다.
사람이 옷을 입듯, 동물들은 털이 있음으로 체온을 유지하며, 짝짓기 경쟁이나 천적의 공격으로 인해 털이 빠지기도 하고, 새로 돋아나기도 한다.
소나무나 잣나무, 일본잎갈나무 등 송진이 베어 나오는 나무의 아래쪽 비빈 곳에 붙어있는 뻣뻣한 털의 위쪽이 두세 가닥으로 갈라져 있다면 멧돼지가 진흙목욕을 하고 비빈 흔적임을 알 수 있다.
산행중에 발견한 뭉툭하게 붙어있는 털이 구불구불하고 속이 비었다면 고라니나 노루일 확률이 높고, 오솔길옆 조그마한 굴 입구에 떨어져 있는 털이 모근은 흰색, 중간은 검정이다가 끝이 흰색으로 끝난다면 오소리 털임을 알 수가 있듯이 털도 우리에게 많은 정보를 준다.
오소리털
-추적자학교장 하정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