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네의 사사로운 사토리 2: 보름밥 먹으러 모두의 집으로
산청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의 커뮤니티 공간 '모두의 집'
지난 2월 12일이 정월대보름이었죠. 묵은 나물과 곡식을 모두 꺼내어 차려먹고 헌물건과 헌옷을 태우고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알리고, 보름달로 상징되는 대지의 여신에게 풍요를 기원하며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우리 민족 고유의 명절.
대보름날에는 저녁을 먹으러 의료사협에 갔습니다. 경남산청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은 경남에서 처음 만들어진 의료협동조합으로, 2021년 650여 명의 조합원과 1억원의 출자금으로 설립되었습니다. 한센인 요양원인 성심원에서 유휴공간을 제공받고, 산청군에서 지방소멸대응기금 5억원을 지원받아 건물을 리모델링해서 2023년 11월 11일에 화목한의원이 문을 열게 되었습니다. 화목한의원을 기점을 해서 내과, 치과 개원을 준비하며, 2024년에는 한의원 위 2층을 리모델링해서 주민들의 커뮤니티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커뮤니티 공간 이름은 ‘모두의 집’.
현판 개소식 후 환하게 웃는 조합원들
모두의 집에는 사무실과 다목적홀, 식당, 주방, 손님방(숙소), 상담실이 있습니다. 12월 22일에 모두의 집 오픈기념 바자회가 있었지만, 지리산 사람들 동지모임으로 성심원에서 1박을 하고 읍으로 나왔는데 다시 돌아가는 것이 번거로워 가보지 못하고 건물을 밖에서 구경만 했어요. 그러다가 1월에 민들레 모임을 모두의 집에서 가졌고, ‘공간과 사는 이야기’ 모임에서 신년 타로를 보면서 상담실을 이용했습니다. 조합원 누구나 예약하면 사용할 수 있는데, 아직 이용 시스템이 완전히 갖추어지지는 않았다고 하네요. 조금 시간이 지나면 체계가 잡히지 싶어요.


소국 선생님과 자원봉사자들이 나물과 밥을 준비하여 조합원들이 모두의 집에서 푸짐한 식사를 했습니다. 현판 개소식도 있었고요. 산청에서는 의료사협 행사에 가면 안면 있는 분들을 꽤 만날 수 있습니다. 따로 약속하지 않고 지인들과 가볍게 얼굴 보고 안부와 소식을 주고받으려면 의료사협 행사에 가면 되지요. 산청의료사협은 지방소멸대응기금이 적절하게 쓰인 사례로, 단순히 돈을 받고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병원을 넘어 지역 커뮤니티의 중심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침, 뜸, 처방 같은 의료행위만이 치유의 방법이 아니지요. 이웃끼리 한 번 더 만나고, 잘 지내냐고 안부를 물어봐주고,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돌봄의 행위가 진정한 치유와 질병의 예방으로 가는 길이죠. 이런 취지에서 의료사협에서는 매주 화요일, 목요일에 이동이 불편한 주민을 찾아 방문의료봉사 활동을 하고, 건강강좌와 소모임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건강수다모임, 치유단식모임, 이로운모임, 이로운식탁, 합창단, 족구모임, 바둑모임, 당구모임 등 다양한 소모임이 있어요. 저는 ‘이로운식탁’ 모임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소모임에 참여하면 포인트를 지급해줍니다. 포인트는 진료나 약을 살 때 사용할 수 있어요.


화목한의원 김명철 원장님과 식사 준비를 지휘하신 소국 선생님의 인사말이 있은 후, 뷔페로 차려진 맛있는 밥을 먹었어요. 정갈하게 요리한 각종 나물들, 오곡밥, 시락국, 귀밝이술, 식혜, 부럼. 나물 종류가 너무 많아서 한 젓가락씩만 접시에 담아도 가득했어요. 여기까지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분들의 노고가 있었을까요? 조합원으로서 출자금만 냈을 뿐 별로 보탠 것도 없는데 이렇게 맛난 밥을 얻어먹다니, 감사한 마음입니다. 아직 아픈 곳이 별로 없어서 다행이지만, 좀처럼 의원 갈일이 없는 건 아쉽습니다. 이런 행사 때만 오네요.
접시에 음식을 담아서 작은 상담실로 가져갔습니다. 산청청년모임 ‘있다’ 친구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이 방에서 식사를 했습니다. ‘있다’ 에서는 성심원의 유휴공간을 활용한 청년마을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성심원은 본래 한센인 마을인데, 한센인들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면서 예전에 가동되었던 공간들이 비게 되었고, 경작지와 임야를 포함한 넓은 땅을 소유하고 있지만 이용·관리하는 사람은 없는 상황이라, 성심원에 새생명을 불어넣어줄 프로젝트를 기대하며 엄삼룡 원장님이 산청청년모임 ‘있다’에 구교육관을 맡겨주셨습니다. ‘있다’는 성심원의 빈 건물을 공방과 레지던시로 꾸미고, 유휴토지에 커뮤니티 가든을 조성하기 위해 지원을 받아보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최근 ‘공간산아’와 연계하여 행안부 청년마을만들기 공모에 기획서를 제출했는데, 공유된 기획서를 읽어보니 이만큼 청년마을만들기 사업의 취지에 적합한 프로젝트가 있을까 싶었습니다. 모쪼록 군이 잘 협조해줘서 선정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옆방에서는 김명철 원장님과 우정이 웰다잉에 관해 대화 중이었어요. 원장님은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죽음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동감입니다. 잘 살다 잘 죽게끔 도와주는 사람이 진정한 의사이지요. 의식과 존엄을 가지고 몸을 벗고 저 너머의 세계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이는 영혼의 산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산청은 매우 고령화된 지역으로, 새로 유입되는 인구도 연령대가 높으며, 암이나 난치병 활자가 요양을 하기 위해 이주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노인의 나라라고 할 수 있는 산청은 항노화를 표방하고 있어요. 늙지도 죽지도 않는 게 가능할까요? 의식을 바꾸면 노화를 극복할 수도 있겠지만, 산청에서 그러한 사례는 아직 알려진 바 없습니다. 사람이 늙고 죽는 것은 경험적 사실입니다. 그래서 ‘항노화’보다는 우선 ‘친노화’, 나이든 몸에 친화적인 생활과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체적 약자가 이웃과 자연과 교감하는 적당한 활동을 하며 즐겁고 평온하게 생활할 수 있는 환경은 노인 뿐 아니라, 장애인, 임산부, 영유아에게도 좋을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의료사협이 잘 살다 잘 죽는 문제 뿐 아니라 잘 태어나는 문제도 다루게 되고, 산청이 친노화, 웰다잉, 웰버스의 메카가 되는 상상을 해봅니다. 산청군 한해 출생아가 60명 이하인 현재의 상황으로는 성심원에 자연출산센터가 만들어지는 건 비현실적인 상상일 뿐이지만요. 우선 산청에 부족한 청년들이 와서 정착하고 다음 세대를 꿈꾸어 볼 수 있는 공간과 관계의 네트워크가 생겨났으면 합니다.
지나치게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거리에 누군가가 있어 기본적인 안전과 건강이 지켜지고, 경계를 지키면서 주변의 생명을 돌보고 가꾸는 활동을 하며 살아갈 수 있는 거주지는 아이들을 독립시킨 후 인생의 새로운 단계에 접어든 노년층에게도 필요합니다. 보름밥상을 차려주신 소국 선생님은 작년 ‘공간과 사는 이야기’ 모임에서 내가 살았던 집, 살고 싶은 집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의료사협 단식 프로그램을 성심원 교육관에서 했는데 공간이 매우 깔끔하게 관리가 되어 있었고 지내기가 좋았어요. 이런 장소가 비어있는 것이 안타깝더라고요. 아픈 사람만이 아니라 건강한 노인들도 활동을 하면서 살 수 있는 거주지가 되면 좋겠다 싶었어요. 노인들도 노동을 할 수 있거든요. 노인이 무기력하게 있는 게 아니라, 노인에게서 활력을 끌어낼수 있는 그런 환경, 노인이 할 수 있는 활동을 하며 공동체에 보탬이 되는 그런 주거가 필요해요.”
의료사협과 모두의 집을 중심으로 성심원이 다양한 세대를 아우르는 장소로 거듭나기를 기대해봅니다.
*경남산청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경남 산청군 산청읍 산청대로 1381번길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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