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 산천
신동엽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꽃 펴 있고,
바위 모서리엔
이름 모를 나비 하나
머물고 있었어요.
잔디밭엔 장총(長銃)을 버려 던진 채
당신은
잠이 들었죠.
햇빛 맑은 그 옛날
후고구려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남햇가,
두고 온 마을에선
언제인가, 눈먼 식구들이
굶고 있다고 담배를 말으며
당신은 쓸쓸히 웃었지요.
지까다비 속에 든 누군가의
발목을
과수원 모래밭에선 보고 왔어요.
꽃 살이 튀는 산허리를 무너
온종일
탄환을 퍼부었지요.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꽃 펴 있고,
바위 그늘 밑엔
얼굴 고운 사람 하나
서늘히 잠들어 있었어요.
꽃다운 산골 비행기가
지나다
기관포 쏟아 놓고 가 버리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그리움은 회올려
하늘에 불 붙도록.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바람 따신 그 옛날
후고구려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잔디밭에 담배갑 버려 던진 채
당신은 피
흘리고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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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빨치산 사람들 이야기이다. 나는 등단하기 전 대학 1년 때나 되었을 때 이 시를 접했다. 그때만 해도 그냥 전쟁의 한 모습이려니 했는데 시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하면서 이 시는 빨치산 이야기를 쓴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숨막힌 긴장과 처절했던 시대의 빨치산 이야기를 가장 서정적이고 아름답게 그려낸 최고의 수작이라고 스스로 평가했다. 언젠가 신동엽 문학관에서 그의 유물을 보니 시인은 암벽까지 했던 등산 마니어였던 것 같았다. 내가 3,40대에 전교조나 여순항쟁, 생명평화결사 등의 사회단체 활동을 하며 바쁘게 살던 때에도 꾸준히 지리산에 올랐던 것은 빨치산에 대한 궁금함과 인간적 연민 때문이었다. 그들의 삶에 가까이 접근하면서 그 연민은 존경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들은 당시의 사회적 화두였던 통일의 상징적인 전사였고 이후 옥살이 하며 20~40년의 수행을 하고 나온 장기수 어른이었기 때문이다. 그분들의 겸손한 인품을 접하며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지리산 털진달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