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향사당에 있어야 할 최초 춘향영정의 수난
일제하 조선의 문화독립운동의 아이콘 춘향영정은 죄가 없다
민족의 혼을 담은 춘향사당을 복원하고 최초 춘향 영정을 봉안한 후 춘향제 100주년을 맞이하라!
(기자회견문)
일제 강점기였던 1931년, 남원 예기조합과 항일운동 단체들은 민족의 혼을 담아 춘향사당을 건립하고 정문을 ‘단심문’, 사당 이름은 ‘열녀춘향사’라고 지었다. 춘향의 ‘일편단심’ 정신으로 조국 독립을 이룩하자는 뜻일 것이다. 사당 양쪽 출입문에는 커다란 태극 문양을, 제단에는 8괘 태극기를 네 개나 그려 넣었다.
사당에 모신 춘향의 영정은 서양화가 강신호가 그린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진주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강재순의 막내 아들이다. 그의 형은 우리나라 최초의 인권운동 단체이며 독립운동 단체인 ‘형평사’ 공동대표 강상호였다. 천재 화가로 불렸던 강신호는 춘향의 옷을 붉은 저고리와 파란 치마로 꾸몄다. 자연스럽게 태극기가 떠오르는 조합이다.
그런데 지금 춘향사당과 영정은 어떠한가?
사당 곳곳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붉은 동그라미 세 개가 박혀 있고 일본을 상징하는 오동꽃무늬 벽지로 도배되어 있으며 천황가의 국화꽃까지 그려져 있다. 더구나 세 개의 붉은 동그라미와 국화꽃은 토끼와 거북이상 머리 위부터 춘향의 머리를 지나 국화꽃에 닿도록 정확히 똑같은 높이에 자리잡고 있다. 이게 어찌 된 일일까?
춘향제는 1931년 제1회부터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이광경을 본 일제가 1938년 일본 총독부 관료출신 하야시 시게조와 친일파들은 김은호에게 새로운 춘향 영정을 그리게 해서 1939년 제 9회 춘향제에 최초춘향영정 위에 이중으로 봉안하게 했다. 이때 친일 사업가 현준호가 사당을 크게 개조하고 광한루 누각 기둥은 황군 만세등의 일제충성구호로 도배했다. 일본을 떠올리게 하는 문양들은 그때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시민들은 수년 전부터 이런 의혹을 철저히 밝히고 사당을 원상 복구하라고 촉구했지만 남원시는 지금까지 묵묵부답이다.
춘향 영정은 어떠한가?
평생 춘향제에 헌신했던 최봉선 선생이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끝까지 지켜낸 최초 영정을 1961년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이 다시 욕되게 했다. 6.25 전쟁 당시 시민들에게 찢겨져 버린 친일화가 김은호의 영정을 그에게 다시 그리게 하여 설치한 것이다. 일제는 태평양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일본과 조선은 하나다(내선일체)’라는 구호를 외치며 춘향제를 악용했고, 박정희 정권도 군사 쿠테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제주 4.3항쟁 탄압의 주역인 송요찬에 의해 친일화가 김은호의 춘향영정이 봉안 되었다. 그리고 춘향제를 비롯한 전국의 지역 축제를 이용했다. 그렇게 설치된 친일 영정이 60년 동안 춘향사당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때 내몰린 최초 영정은 현재까지 남원향토박물관 수장고에 갇혀 있다.
2020년 9월, 남원 시민들의 끈질긴 투쟁으로 비로소 김은호의 친일 영정이 철거됐다. 하지만 일부 시의원과 극소수 시민들의 반대로 최초 영정은 박물관 수장고를 벗어날 수 없었다. 남원시는 춘향 영정 문제를 민주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일방적으로 남원문화원에 위탁하여 새로 그리게 했다. 현재 사당에는 그 영정이 봉안돼 있다.
정부 차원에서도 친일 부역자의 행적을 파헤쳐 철거하는 작업이 계속되고 있고, 최근에는 친일파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도 바꿔야 한다는 여론이 지배적이다. 그런데 친일 흔적이 짙게 남아있는 사당을 그대로 유지시키고 민족혼이 담긴 최초 영정을 복위시키지 않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친일 행적을 알고도 모른 체할 수 없다. 역사를 잊으면 미래는 없다. 만인정신, 동학 정신을 이어 항일 운동기에 탄생한 춘향사당과 춘향 영정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은 남원 시민들의 마땅한 권리이자 역사적 책무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5년 후 맞이할 춘향제 100주년을 기리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하나, 남원시는 민족의 혼을 담은 춘향사당을 복원하라!
하나, 남원시는 춘향사당에 최초 춘향 영정을 봉안하고 춘향제 100주년을 맞이하라!
2025. 4. 23
최초춘향영정복위시민연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