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5-16(토)
 

 

 

사본 -구례 사성암에서 봄 2016  140x200  장지에 수묵채색.jpg

 

 -구례 사성암에서 봄, 2016  140x200  장지에 수묵채색

 

 

사성암 (상)


구례 오산(530미터)에 있는 사성암 가는 길이 이제는 아스팔트 포장된 길로 셔틀버스를 이용하면 편하고 빠르게 오를 수 있다. 그러나 등산로는 가파라서 지그재그로 2킬로미터 남짓 되니 한 시간 가량 숨차게 올라야 한다. 왜 산에 오르는가에 따라 선택의 길은 다를 것이다.

사성암은 깎아지른 듯한 기암절벽에 세운 우리나라에선 보기 드문 고찰이다. 원효, 의상, 도선, 진각국사, 이렇게 4명의 고승이 수도하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다.

나는 조금이라도 더 길게 흐르는 강줄기와 넓은 들녘을 담아내려고 산을 오르곤 한다. 새처럼 날아올라 아래를 내려다보고 그리는 부감법을 구사하려는 마음이다.

바위에 딱 붙어 지어진 절집과 계단을 오르다보면 거무스름하며 무게감 있는 귀목나무를 만날 수 있다. 800년이 되었다고 하는데 잎이 한꺼번에 나오지 않는 해는 풍년이 든다는 말이 전해진다.

조망하기 좋은 곳을 찾아 바위를 따라 돌다보면 위험하니 올라가지 마시오. 주지 백이란 글씨가 써진 기왓장을 만난다. 하지마라면 더하고 싶어지는 법, 절벽에 올라선 바위라 오르는 것은 정말 위험해 보인다. 그래도 죄송하지만 올라보니 좋다. 이 일대 오산에 12비경의 전설이 전해온다는 것이 그럴 만 해 보인다.

진각국사가 참선했다는 좌선대 와 우선대, 석양과 노을을 바라보며 하루를 뒤돌아보았다는 낙조대등 지리산과 섬진강을 두루두루 조망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곳이다. 이곳을 여러 해 동안 오르내렸다. 어둠이 채 가시기 전의 어느 가을에 다시 찾았을 때, 또 다른 기왓장엔 제발 말 좀 들으시오라고 씌어 있다. 나를 질책 하는구나 라고 생각하면서도 역시 오를 수밖에 없었다. 모두들 스스로 조심할 텐데 왜 위험하다고 이렇게 간곡하게 표현해 놓았을까?

이곳에 올라 서보면 안다. 바위 끝 바로 발아래에 하얀 목화솜덩어리가 포근하게 깔려 있는 듯 보인다. 조심히 바위 안쪽에 앉아서 구름의 자유자재로운 변화에 신비로움을 느껴본다. 살며시 옅어진 구름 사이로 섬진강 줄기와 구례 읍내가 보이기 시작한다.

11시 방향 곡성에서 내려오는 강물은 구례구역 앞을 지나 구례읍을 휘돌아 피아골에서 내려오는 계곡물을 맞이하러 간다. 1시 방향으로는 지리산 노고단에서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강을 품고 있다.

몸이 썬득해지며 시장기가 돋는다. 빤히 내려 보이는 읍내 동아식당에서 돼지족탕 국물에 끓인 따끈한 라면을 먹으려고 일어선다.

 

 

사성암()

 

섬진강의 맑은 품성과 지리산의 강직한 성정을 지니고 사는 사람들은 나라에 대한 주인의식, 주체의식을 바탕에 두고 살았다. 이 아름답고 너른 들판엔 서럽고 아픈 역사들이 우리들의 발길을 잡는다. 천은사 못 미쳐 광의면의 매천사당(梅泉祠堂)이 그 중 하나이다.

 

난리 속에 살다보니 백발이 성성하구나.

몇 번이고 죽으려 했지만 그 뜻을 못 이뤘도다.

오늘도 참으로 어찌할 수 없게 되었으니

가물거리는 촛불만이 창천을 비추는 도다.‘

 

구례땅 월곡리에 은거하던 선비 매천 황현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목숨을 끊지 못하고 구차하게 살아옴을 서러워하다 1910년에 한일합방이 체결되자 통곡을 하며 4()의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했다. 살아남은 선비들은 그의 시를 베껴 외우며 욕된 삶을 달랬다 한다. 그는 조선말 위정자의 비리, 비행, 일본의 침략과정과 일제의 만행과 의병의 저항을 자신의 관점과 사실을 바탕으로 기록해 놓은 매천야록(梅泉野錄)을 남겼다.

 

또 한 곳은 열아홉살 백순례의 삶이 산동애가로 남아있는 산동면 상관마을이다. 1948년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무고한 양민들이 만여 명이나 학살된 여순사건의 주력부대가 지리산으로 퇴각해 빨치산이 되었다. 이들을 토벌을 하면서 구례에서도 양민들이 무참히 학살당하는 비극을 낳았다. 그 때의 상황이 노래가 되어 소녀의 넋을 기린다.

잘 있거라 산동아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열아홉 꽃봉오리 피워보지 못하고/ 까마귀 우는 곳을 병든 다리 절어절어/ 다리머리 들어오는 원한의 넋이 되어/ 노고단 골짝에서 이름 없이 스러졌네....

이 후 산동 처녀들이 산수유 열매를 딸 때 부르며 전해 내려왔으나 지금은 그러한 처녀들이 없어서인지 불리어지지 않는다.

또 발길을 돌려야 하는 곳은 하류인 화개 방향으로 토지면에 지리산과 섬진강을 배산임수하고 있는 금환낙지(金環落地)의 운조루라는 독특한 옛집이다. 토지면(土旨面)의 지명도 본래에는 금가락지를 토해냈다는 토지면(吐旨面)으로 풍수형국에서 비롯된 마을이다.

 

운조루는 명당자리답게 건축양식과 규모도 범상치 않다. 구조는 크게 안채, 사랑채, 행랑채, 제실로 나뉘고 지금은 73칸이 남아 있다. 대문 밖에는 말을 묶어 두는 하마석이 있고 지리산 문수골에서 흘러들어오는 물을 이용하여 만든 200평가량의 연못 터가 있다. 또한 운조루가 소장하고 있는 문화재의 양도 방대하며 사료적 가치도 대단하다. 나는 무엇보다도 운조루의 정신에 가치를 두고 싶다. 200여년 된 원통형 뒤주 아래 부분의 마개에는 누구나 쌀뒤주를 열 수 있다는 뜻인 타인능해(他人能解)’라고 적혀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수많은 환란 속에서도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집 주인이 지닌 인품과 주변에 쌓았던 덕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섬진강 길을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천천히 따라 가다보면 습지를 만난다. 남원 대강면과 구례 간전면으로 흐르는 곳인데 수달, 황어, 새들이 물버들과 풀섶에서 자유롭게 노니는 모습이 자연스럽고 소소해서 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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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만규화백의 섬진팔경사계] 구례 사성암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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