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피어난 삶: 이인순 할머니의 기억
구례 냉천리 이인순(1933년생) 님 인터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피어난 삶: 이인순 할머니의 기억
구례 냉천리 이인순(1933년생) 님 인터뷰
8월 말이었다. 냉천리 마을회관 옆집이라는 말을 듣고 마을회관 옆에 주차했다.
[구례 냉천리 이인순(1933년생) 님. 사진김인호]
냉천리는 구례읍에서 가까운 마을로, 화엄사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제법 큰 마을이다.
“니 어머니 찾아 묻어 두었응께 언능 가서 찾아 묻어 줘라잉.”
1948년 구례는 밤낮으로 좌와 우가 바뀌는 사상 전선에 격전지였다.
낮에는 경찰이 빨치산의 흔적을 찾아 마을을 헤집고 밤에는 빨치산이 굶주린 배를 움켜쥐며
먹을 것을 찾아 산에서 내려왔다.
“우리 어머니는 빨갱이가 아니었어요”
“군대 간 오빠 친구들이 찾아와서 밥을 달랑께 준 것이 전부였죠”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챙겨 주면 총살을 당한다고 말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빨갱이가 아니라 며칠을 굶었는지 모르는 피골이 상접한 몰골로 찾아온
군대 간 아들의 친구들이었다. 밥을 챙겨 주는 것은 당연한 인지상정이었을 뿐이었다.
“알았다면 그렇게 했겠어요.”
서시천에서 끌려가 차가운 총알이 가슴을 관통할 때까지 그 누구도
그 일로 그렇게 허망하게 인생이 끝나 버릴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어머니는 명지 누빔 저고리를 입고 있었지”
“보통 여자가 아니구나! 생각이 들어서 따로 묻어 두었다고 했어!”
“그래서 어머니 시신을 수습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어요!”
어머니의 장례는 어떻게 하셨나요?
"아버지는 한학자였습니다. 구례에서 꽤 유명하신 분이었죠."
“어머니가 평생 고생만 하다 죽은 것이 너무 미안하다면서 아버지는 가장 좋은 땅을 찾아다녔어요"
"그리고 또 빨갱이라고 해코지나 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어"
"어머니를 지리산 어디 좋은 곳에 묻어 두었다는 말만 했어요."
"좋은 곳이니 찾지 말라고 아버지가 그랬어."
"그래서 어머니 무덤이 어디 있는지도 몰라…"
"잘 계시겠지.”
[우리 어머니도 빨갱이는 아니었고 그냥 정이 많은 사람이었을 뿐이었어요. 사진김인호]
"어머니를 고발한 사람은 김 형사라는 사람이었어요."
"광의면에서 살던 형사였는데 나보다 10살쯤 많았어요."
"그놈이 어머니를 밀고했죠."
"어머니가 빨치산들에게 밥을 해줬다고…….그때 내 나이가 17살이었어요."
어머님 때문에 그 이후에 피해를 보지 않았어요?
빨갱이 딸이라고 손가락질을 당한다거나 하는 일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저는 빨갱이라면 아주 싫어했어요."
"우리 어머니도 빨갱이는 아니었고, 그냥 정이 많은 사람이었을 뿐이었어요."
"그래서 그랬는지 별 피해를 보고 살지는 않았어요."
"제 아버지가 항상 그렇게 말씀하셨거든요."
“역사에서 혁명으로 성공한 사람은 없다.”
“항상 조심하면서 살아라.”
[저는 아버지 말대로 좌익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사진김인호]
“저는 아버지 말대로 좌익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중학교 다닐 때도 학생동맹 같은 것을 만들어 활동하는 친구들이 있기는 했지만, 나는 관심이 없었어요."
"제가 중학교 3학년까지 다니다가 중퇴했거든요."
"제가 구례 중학교 1회 입학생입니다."
"해방이 되고 나서 구례에 중학생을 모집한다는 공고나 나왔는데
아버지가 여자도 배워야 한다고 중학교를 보냈어요."
"아마 구례 중학교에 여학생이 50여 명 되었을 겁니다."
"제가 25번이었어요."
“제가 좀 예쁘게 생겼었는지 선생님들이 항상 예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공부도 아주 잘했고요”
“3학년이 되니까 남자들이 가만 두지를 않아요”
“광의에서 구례읍까지 걸어 다니니까…”
“아버지가 위험하다고 졸업을 얼마 남겨 두지 않고 그만두게 되었어요”
“그리고 서당에 가서 한문도 배우고”
[제가 총부리를 붙잡고 그랬어요." “울 엄니는 빨갱이가 아니라고. 사진김인호]
"처음 어머니를 잡으려고 경찰이 찾아왔어요."
"어머니에게 총을 겨누고는 빨갱이를 잡으러 왔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총부리를 붙잡고 그랬어요."
“울 엄니는 빨갱이가 아니라고”
“그랬더니 경찰이 움찔하더라고”
“내가 너무 당차게 말하니까 그날은 그냥 갔어요”
“얼마 지나서 구례지역 5개 마을에서 사람들을 차에 태우고 서시천 다리 밑에서 총살해 버린 거야”
“빨갱이인지 아닌지 확인도 안 하고….”
[1948년 여순 사건으로 죽은 시체를 확인하고 있다.]
[구례경찰서 경찰은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 7월까지 사찰계가 중심이 되어
구례군 일대에서 반군과 좌익에 대한 협조 혐의로 민간인을 구례경찰서와 각 지서로 연행
하여 구금하였다. 구례경찰서 사찰계는 연행된 민간인을 고문․취조한 후, 사살대상자를
정하여 구례경찰서 옆 공터, 구례읍 봉성산, 섬진강 양정지구, 서시천 변(서시교 아래) 등
지에서 사살하였다]당시 신청인들이 주장하는 피해 이유는 대체로 반군과의 관련성 여부에 집중되어 있다.
[▲사진=LIFE, 촬영일 1948.10. 사진기자 칼 마이던스]
첫째는 가장 일반적인 반군 협조 혐의로서, 숙식이나 식량 제공․노무도원․반군과의 연락이나
반군 은폐 등이 대표적이었다. 여기에는 반군이 활동한 작전지역에 거주한다는 이유로 희생된 경우도 포함된다.
둘째는 남로당 등 좌익 단체에 가입한 혐의로 희생당한 경우이다.
이러한 경우 좌익 혐의로 지목되었다는 추정만 있을 뿐, 구체적인 가입 사실을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군경의 가해는 자의적인 성격이강했다.
셋째는 본 사건 자체와 무관한 대살(代殺)로, 좌익과 입산자 가족 또는 동료라는 이유로 희생된 경우이다.
이 밖에도 연행 이유와 피해 이유를 모르거나, 무고와 모략, 고문으로 희생된 경우도 있었는데,
이는 당시 군경이 민간인을 자의적이며 무리하게 연행 및 취조하고 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출처] 구례 지역 여순사건 보고서|
당시 17살이었던 이인순의 어머니 김애남(49세)씨는 한 발의 총성 소리와 함께 쓰러졌다.
차가운 바람이 지리산에서 화엄사 계곡을 따라 구례로 불어왔다.
수많은 영혼이 골짜기로, 강으로, 산으로, 바람처럼 사라져 갔다.
이름만 들어도 눈물 나는 어머니, 든든한 아버지, 생각만 해도 좋은 아들,
그리고 가여운 딸들이 그렇게 죽창과 총으로 허망하게 쓰러져 사라졌다.
하지만 비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인순씨의 결혼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큰오빠는 낙동강 전선에 육군으로 참전해 행방불명이 되었다.
해군이었던 작은오빠는 밤재에서 빨치산 공격으로 사망했다.
어머니는 빨갱이로 몰려 총살 당하고, 큰오빠는 육군으로 징집되어 낙동강 전선에서 행방불명이 되었고
작은 오빠는 빨치산에게 죽은 것이다.
하지만, 죽은 사람은 다시 살릴 수 없고, 산 사람은 억지로라도 잊으며 또 살아야 한다.
인생의 시간에 따라서 삶은 계속 변해간다.
“어머니가 죽고 2년이 지나 19살에 결혼을 했어요."
"구례 중학교 동창이었죠."
이인순씨의 남편은 일본에서 학교에 다니다가 해방이 되고 돌아왔다.
남편의 고향은 제주였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넘어가 메리야스 공장을 해다고 한다.
해방이 되고 구례로 장착했는데 화엄사에 아는 분이 있어 제주로 가지 않고 구례 냉천리로 왔다.
“남편이 중학교 들어왔을 때 일본에서 온 학생이 있다고 해서 보러 간 적이 있었어요.”
“내 생각에 시커멓고 잘생기지도 않고 뭐 그랬는데 그것도 인연이 되었는지
친척이 중매를 선다고 가보니 딱 그 사람이더라고요. “
"그렇게 인연이 되어서 6남매를 낳았어요. 자식들이 모두 똑똑하고 잘 되었어요.
[징하게 힘들고 고생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또 행복했어요. 사진김인호]
아버지가 여자도 배워야 한다고 해 배운 것이 있어 무시당하지 않고 살았어요.
여기저기 글도 써서 상도 받고 그랬죠.
어렸을 때 교사가 되고 싶었는데 여기서 동네 사람들에게 한글도 가르치고 했으니까
그 꿈도 반절을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 고요.
내가 33년생이니까 올해로 94살인데 아직도 책도 읽고 노래도 부르고 건강하게 살고 있고요.
징하게 힘들고 고생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또 행복했어요.
그런데 어머니를 고발한 김 형사는 어찌 되었나요?
“나쁜 짓 하고 살면 벌을 받는지 김 형사 엄마는 이웃집 똥통에 빠져 죽고
김 형사는 친구들하고 노고단으로 사냥하러 갔다가 친구들이 멧돼지인 줄 알고 총을 쏴 죽여 버렸어.”
할머니와 긴 인터뷰를 끝냈다.
연신 먹을 것을 챙겨 주며 먹고 가라고 하셨다. 아마 어머니를 닮은 것 같다.
대문을 나서며 하늘을 보니 여전히 불볕더위가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멀리 보이는 지리산 노고단을 바라고 보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이 김 형사를 멧돼지로 오인해서 김 형사가 친구들 손에 죽은 이유가
혹시 지리산에 묻힌 원혼이 김 형사를 멧돼지처럼 보이게 한 것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