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11-17(월)
 

오늘 나는 김길동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그는 1916년 경남 함양군 휴천면 문정리 문하마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1959510일 생을 마쳤다. 내가 그에 대해 처음 들은 건, 지리산종교연대가 사단법인 숲길과 공동 주관해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에서 진행했던 <지리산생명평화기도회>에서였다. 그날 성염 선생님(전 로마 교황청 대사)우리 마을에 조그만 공덕비가 있어요. 학살사건 때 동네 사람들을 전부 살렸어요.”라고 말씀하셨다. 장마가 막 시작된 날이었다.

 

그날 이후 김길동이라는 이름이 자주 떠올랐다.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 그래서 어떻게 살아갔는지가 궁금해졌다. 그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 지리산인(편집장 김인호편집위원들과 함께 문하마을을 찾아가 성염 선생님과 전순란 선생님을 만났다. 그날 역시 장맛비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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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염 선생님 집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지리산인편집위원들

 

문하마을은 법화산 자락에 자리해 지리산을 바라보고 있고, 앞으로는 엄천강이 흐른다. 내가 이곳을 처음 찾은 것은 2000년대 초반이다. 초등학교 아이들과 지리산을 종주한 뒤 실상사에 들러 도법스님을 뵙고, 마을청년회가 폐교를 고쳐 운영하던 숙소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 뒤로도 성염 선생님을 뵙기 위해 몇 차례 더 찾아왔기에, 문하마을은 내게 낯설지 않다. 올 때마다 하늘에는 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있던 기억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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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바라본 엄천강과 문하마을

 

문하마을 뒷산에는 고려 말 충신 이억년의 묘가 있다. 성염 선생님은 마을 이름의 연원을 이렇게 설명했다. “고려 말 나라가 망하자 이백년, 이억년 같은 분들이 지리산으로 들어와 이 부근에 살았지요. 그래서 산골임에도 문하(文下)’라는 이름이 붙은 겁니다.” 그 말처럼, 문하마을은 예로부터 바른 길을 지키며, 함께 살아가는 가치를 소중히 여겨온 곳으로 전해져 왔다. 성염 선생님의 집은 마을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해 지리산이 한눈에 펼쳐졌다. 그곳에서 우리는 김길동 이장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성염 선생님은 마을에 살았던, 이제 아흔을 훌쩍 넘긴 아주머니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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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과 숲으로 둘러싸인 문하마을

 

이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그가 이장을 맡았던 1950년대 전후 지리산 자락에서 벌어진 일을 알아야 한다. 1951년 초, 산청·함양 일대에서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 국군은 빨치산을 도왔다는 이유로 주민들을 모아 총살했는데, 아이와 노인, 여성도 예외가 아니었다. 공식 기록만으로도 천 명이 넘는 희생자가 있었다. 전쟁 속에서 적이 아닌 자기 나라 주민이 군의 총에 쓰러진 사건이었다. 추모공원이 세워졌지만, 가족을 잃은 이들에게 그날의 상처는 여전히 생생하다.

 

김길동이라는 분은 당시 이장이었어요. 군인들이 집에 사람이 있으면 모두 죽인다고 해서, 중풍 걸린 시아버지를 업고 나온 며느리도 있었다고 하지요. 그날 군인들이 기관총 앞에 주민들을 세워 놓고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이장이 달려가 왜 사람들을 죽이냐며 항의하며 막아섰답니다. 목숨 걸고 총구 앞에서 버틴 겁니다. 그 덕분에 마을 사람들은 살 수 있었어요. 바로 아래 한남마을부터는 100여 명씩 세워놓고, 이장이 손가락질하면 아기든 노인이든 끌려가 총살을 당했지요. 산청·함양 추모공원에 가보면 약 1,300명의 희생자가 기록돼 있습니다. 그중 7세 이하 아이들까지 공비라 불리며 죽임을 당했고, 그걸로 훈장을 받은 사람도 있었어요.”

 

그 시절에 토박이가 아닌 사람이 이장이 되었다는 점은 놀라웠다. 그가 문하마을에서 태어났지만 집안의 뿌리가 순창이라, 어떻게 이장이 될 수 있었는지 궁금해하자, 전순란 선생님은 잠시 생각하더니 아랫집 정 선생도 몇 차례 출마했지만, 토박이가 아니라는 이유로 뽑히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35년을 살아도 여전히 외지인으로 불릴 만큼, 마을에서는 토박이가 아니면 이장이 되기 어려운 분위기라고 덧붙였다. 이에 박두규 시인은, “아마도 인품과 생활 속 태도로 마을 사람들의 신뢰를 얻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보탰다. 전순란 선생님은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장이 그렇게 큰소리를 치며 막아설 수 있었던 데에는 이유가 있어요. 군인들이 들어오기 전날, 소를 잡아 장교들에게 대접하면서 우리 마을은 죄 없는 사람들이니 그냥 지나쳐 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 후에도 평생 마을을 위해 힘썼지요.”

 

전순란 선생님의 말대로, 그는 한평생 마을을 위해 헌신했다. 장사로 번 돈으로 땅을 사서 마을에 기증하며, “내가 평생 여기서 살았으니 마을 사람들에게 남긴다"고 했. 그러나 이상한 것은, 정작 마을 사람 누구도 김길동 이장의 이야기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제는 그를 기억하는 이도 거의 없다. 마을 입구의 비석만이 그가 살았음을 전해준다. 나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왜 마을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이야기하지 않는 걸까. 이 질문에 대해 성염 선생님은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셨다.

 

그 무렵 지리산은 빨치산 토벌 작전이 이어지던 지역이었습니다. 주민들은 낮에는 군인들의 검문과 의심을, 밤에는 산에서 내려온 무장대의 요구를 동시에 겪어야 했습니다. 어느 쪽에도 피해를 입을 수 있었기에 말조심과 침묵이 일상이 되었고, 마을은 늘 불안 속에 살았습니다. 지리산은 아름다웠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전쟁과 두려움의 공간이었지요. 그래서 주민들 마음엔 늘 복잡한 두 감정이 공존했습니다. 부모·조부모가 살아남았다는 고마움, 그러나 동시에 빨갱이를 살린 빨갱이라는 낙인이 남아 있었던 겁니다.”

 

빨갱이를 살린 빨갱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빨치산들이 와서 쌀 보급해가고, 지리산 골짜기마다 아지트가 있었거든요. 백무동의 하동바위부근에 빨치산 본부가 있었고, 그 근처에서 토벌대와 교전이 벌어졌어요. 그래서 주민들 인식 속에는 빨갱이가 산 곳, 빨갱이가 드나든 곳이라는 기억이 남아 있는 겁니다. 결국 부모가 살아났음에도, 의식 속에서는 빨갱이 마을이라는 딱지가 붙은 거죠. 김길동 이장은 문하마을에서 태어났지만, 집안의 뿌리가 전라도여서 외지인 취급을 받았고, 낙인도 더 무겁게 작용했습니다.”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은 어떤 사람에게 붙은 꼬리표가 그 사람의 다른 면모를 가려버릴 때, 그것을 낙인이라 불렀다. 김길동 이장은 마을을 살린 이장이었지만, 동시에 빨갱이를 살린 사람이라는 딱지를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기억에서 멀어졌고, 이야기는 쉽게 입에 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염 선생님은 그를 의인이라 불렀다. 잊힌 이름 뒤에 가려진 그의 용기와 희생이야말로 마을 사람들을 살린 힘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이 잊힌 이유는 단지 과거의 문제가 아니었다. 전쟁의 상처는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았다. 성염 선생님은 버스에서 만난 한 노인의 술기운 섞인 고백을 통해, 그 기억이 여전히 사람들 마음속에 남아 있음을 전해주었다. 그리고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작은 비석만이 그날의 이야기를 짧게 기록하고 있다.

 

“195128, 군인들이 주민들을 집결시켜 총을 겨누자, 김길동 이장은 웃옷을 벗어던지며 죄가 있다면 나를 죽이라, 무고한 주민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그의 호소 덕분에 주민들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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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입구의 김길동 이장 비석

 

김길동 이장은 본디 이곳 사람이 아니라는 한계를 넘어 마을의 신뢰를 얻었고, 목숨을 걸고 주민들을 지켜냈다. 그러나 전쟁의 시대는 그의 공적에 영광 대신 낙인을 남겼다. 그의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일은 한 사람의 행적을 기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전쟁의 폭력과 그 속에서 잊힌 용기를 직면하는 일이자, 우리가 어떤 역사를 기억하고 이어가야 하는지를 되묻게 한다.

 

 사진_ 김인호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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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되지 못한 이장, 김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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