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인>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벗자편지>>를 펴낸 니은기역 출판사입니다.
자급을 어렵게 하는 허울을 벗어던지고 나와 둘레를 돌보며 고귀한 하루를 살려는 농부들의 편지,
<<벗자편지>>를 여기 <지리산인>에 한 달에 한 번, 한 꼭지씩 들려드리게 되어 기쁩니다.
나의 시간을, 나의 생산수단을, 나의 재주를 좀 더 아름답게 쓰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책이 용기를 주면 좋겠습니다.
지난 시간 '들어가며'에 이어 이번 시간엔
❷ 김정희 : 몸을 잃어 허공에서 떠도는 젊은 벗들에게 "일상을 고귀하게, 몸을 풍요롭게"
꼭지를 함께 읽겠습니다.
다음 시간엔
❸ 칩코 : 말이 글이 되게 해 주는 이들에게 "삶이 신비가 되려면"
이 함께합니다. 고맙습니다.
몸을 잃어 허공에서 떠도는 젊은 벗들에게
"일상을 고귀하게, 몸을 풍요롭게"
김혜련
몸을 찾아 땅으로
저는 나이 오십에야 몸을 찾아 땅으로 내려왔습니다. ‘네가 평생 가장 열심히 한 일이 뭐지?’ 스스로 물으면 저 아래쪽 깊은 곳에서 나오는 대답이 있습니다. ‘음… 나 자신을 탐구했지.’
평생의 방황과 추구가 자기탐구였음을 이제는 아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제가 그토록 자신을 찾아 헤맸던 이유는 아마도 엄마가 절 부정했기 때문일 거예요. “첫날밤에 들어선 웬수”, “천하에 쓰잘데없는 지지배”라는 말을 듣고, 매 맞으며 자라면서 전 늘 허기와 결핍을 느꼈어요. 그리고 자신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지요. ‘넌 왜 숨을 쉬어야 하니?’ ‘왜 밥을 먹지?’ ‘넌 누구니?’ ‘어떻게 살 거니?’ 이런 물음은 사실 인간다움에 관한 질문이었습니다. ‘인간다움이란 무엇일까?’, ‘어떻게 사는 게 인간다운 일일까?’ 일찍이 문학에 탐닉했고, 심리학과 철학에 관심을 두고, 여성학을 공부하고, 교사직을 접고 입산해서 수행까지 한 모든 행위가 그런 탐구의 여정이었어요.
그런데 그런 탐구를 통해 ‘나의 허기는 해결되었나?’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나?’ 아니었어요. 내 갈증과 허기는 여전했어요. 결국 그 모든 과정이 관념에서 관념, 허공에서 허공을 떠도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절망적!’으로 깨달았어요. 그러면서 평생 아무것도 아니라고 무시했던 가장 뿌리가 되는 것들로 내려왔어요. 그건 바로 몸과 자연이었어요. 몸을 유지하고 기르는 일상, 그 가운데서도 핵심은 밥과 집이었고요. 내 허기가 심리나 관념적인 것만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이었음을 깨닫게 된 거죠. 평생 집에서 살았지만 집이 없었고, 평생 밥을 먹었지만 밥이 없었어요. 몸을 가지고 살지만 몸이 없는, 아주 이상한 삶을 보게 된 거예요.
지금 우리가 맞고 있는 위기 상황, 지구의 존립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은 저처럼 살아온 많은 사람이 만들어 낸 일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근원인 몸(생명)을 없는 것처럼 여기고, 도구나 수단으로 쓰고, 심지어는 학대하고 착취하는 문명은 회생 가망이 없는 문명이라는 깨달음 같은 것이 이 글을 쓰게 합니다.

나는 고양이만큼도 모른다
얼마 전 <<고귀한 일상>>이라는 책을 썼어요. 이 책 제목에 대한 말들이 많았어요. “고귀한 일상이라니, 참 낯설다. 난 한 번도 내 일상을 고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매우 역설적으로 들린다.” “정말 멋진 제목이다.” 등등. ‘고귀한 일상’이란 ‘일상이 고귀하다.’라는 말인데, 이 말은 사실 낯섭니다. 한 번도 일상을 고귀하다고 해 본 적이 인류 역사에는 없으니까요. 고대로부터 일상을 가능하게 한 일들은 노예에게 전담시키다가 노예가 사라지자 여자들에게 시켰습니다. 늘 일상은 하찮은 그 무엇이었어요. 그런데 일상이 고귀하다니? 황당하게 들리지요. 사실 문명이 워낙 강한 세상에서 일상을 이야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야기하기도 전에 무력해지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일상이 뭔가요? 사전에는 ‘매일 반복되는 보통의 일’이라고 정의하네요.
아침에 일어나고, 숨을 쉬고, 해를 만나고, 밥을 먹고, 설거지하고, 오후에 빛이 바뀌고, 바람을 느끼고, 비를 맞고, 친구를 만나서 웃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돌리고, 이불을 펴고, 잠을 자고, 계절이 달라지는 것을 느끼고… 이루 다 표현하기 힘든 그 모든 게 일상인데, 그 가운데 절대 빠질 수 없는 게 있지요. 일상의 핵심은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가 자기 생명을 유지하고 키워 나가는 행위들’입니다. 인간만 일상이 있는 게 아니죠. 모든 생명은 일상이 있습니다. 고양이, 두더지, 개구리, 풀 한 포기… 다 자기 일상이 있어요. 일상은 생명을 유지하고 기르는 가장 근원적인 것이고, 날마다 반복하는 것이고,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것이에요. 그러니 일상이 고귀하다고 하는 건 곧 생명이 고귀하다고 하는 것과 같은 말이에요. ‘생명이 고귀하다’는 전제가 있어야 그 생명을 유지하고 키우는 일상은 고귀한 게 되니까요.
그런데, 인류 문명은 일상을 하찮게 여기고 그 위에서 뭔가 특별한 것을 하는 걸 고귀하다고 여기는 쪽으로 발전해 왔어요. 어떤 사람(생명)이, 어느 한 곳에 집중해서―그게 이념이든 예술이든―꽃을 하나 피웠다 하면 그걸 고귀함이라고 보았죠. 생명은 복잡한 수많은 느낌과 감정, 희로애락이 복합된 감수성의 덩어리인데, 그 꽃은 특정한 감수성만 발전시키고 나머지는 다 배제하고 피운 거예요. 소위 말하는 성공한 사람들이 공통으로 느낀다는 게 허망함, 피폐함이라고 하지요. 그 까닭은 생명을 다 써 버리는 성공이어서 그럴 것입니다. 생명을 키우고 향유하는 방식으로 이룬 성공이 아닌 거지요. 인류 문명은 생명 자체를 억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왔어요. 특히 서구 근대 문명은 생명을 ‘생각하는 자’로서 주목했어요. 생명을 사유로 특화했죠. 모든 것을 수량화하는 기하학적 사유로.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인간에게서 사유를 뺀 나머지 생명의 영역에 대한 관심이 없다는 선언이지요. <<식물의 사유>>에서 페미니스트인 이리가레Luce Irigaray는 이 대전제에 대해 반론을 제기합니다. “나는 살고 싶었고 생명을 키우고 싶었습니다. 생명의 대체물로서 사유는 나에게 맞지 않았습니다.”하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생명이라는 말 자체가 낯선 세상에 살고 있어요. “내 몸이 생명이다.” 이런 말이 낯설어요. 내 생명, 내 몸에 대한 관심이 없어요. 내 생명이 뭘 원하는지, 무엇을 기뻐하고 거부하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고양이만큼도 모르고, 풀 한 포기만큼도 모를 거예요.
우리 집 뜰에는 고양이 두 마리가 살고 있어요. ‘나비’와 ‘웅’이에요. 걔들을 보면 어찌나 자기 생명을 잘 알고 향유하는지요. 폭신한 담요, 따뜻한 햇볕, 서늘한 그늘, 높은 곳을 매우 좋아합니다. 그리고 기가 막히게 그런 곳을 잘 찾아내 즐깁니다. 물을 싫어해서 물이 있는 곳은 어찌 그리 잘 피해 가는지요, 그 젤리같이 부드러운 발바닥을 들어 톡톡 차면서요. 저는 고양이를 보면 부러워요. 자기 생명을 맘껏 누리는 그 고요하고도 신비한 몸짓에 매료되지요.
식물이 자라는 것을 봐도 그래요. 같은 식물이 봄과 가을에 달리 자라요. 봄 쑥갓은 위로 자라지만 가을 쑥갓은 옆으로 자라요. 사라져 가는 햇빛을 조금이라도 더 받으려고 힘껏 잎을 넓히면서. 어떻게 하면 자기 생명을 향유할까, 햇살을 더 잘 받을까……. 전 고양이나 쑥갓만큼도 제 생명을 향유할 줄 모른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요즘 많은 사람이 건강에 관심을 가져요. 하지만 건강한 생명 그 자체를 향유하는 게 아니에요. 건강해서 뭔가 다른 것을 하겠다는 거지요. 여전히 내 몸을 수단으로 삼습니다. 식민지 이후 근대화된 자본주의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생각이지요. 내 생명을 도구로 쓰고 수단으로 여기고 사는 거에 우린 너무도 익숙해져 있어요. 몸을 뜯어고치기도 하고 마음대로 마구 쓰지요. 자기착취, 자기학대의 역사인데 마치 개성을 추구하는 것처럼 여겨져 왔어요. 내 몸을 그렇게 대상화하고 수단으로 쓰니 당연히 다른 생명을, 자연을 그렇게 대하지요. 마구 쓰고, 훼손하고……. 그러다가 현재 이 위기 상황까지 온 겁니다. 기후위기라는 두려운 상황, 지구의 존립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 말입니다.

몸을 향유하지 못하니 소비한다
생명은 복잡하고 미묘한 감수성의 덩어리라, 미세한 바람결이나 설핏 스쳐 가는 꽃향기, 해가 질 무렵 깊어지는 고요, 촉촉하게 젖어 드는 가랑비, 봄의 형용하기 힘들 만큼 아름다운 새소리, 애인의 콧등에 송송 돋는 땀……. 이 모든 일상의 기쁨, 충만함을 다 느끼고 있어요. 그런데 그 느낌을 우리는 잘 알아채지 못해요. 사유만이 과장되게 발달된 문명 속에서는 명백한 몸의 느낌 체계를 들여다보는 게 너무도 힘듭니다. 특히 저 같은 사람은 몸이 없는 사람으로 오래 살아서 몸의 느낌에 둔합니다. 내 몸에 머물러 본 적도 없고, 몸 자체를 향유한다는 개념이 아예 없었으니까요.
우리가 일상을 향유할 때 생명은 자기구현을 다하는 겁니다. 내 생명을 꽃피우는 거지요.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일상을, 생명을 향유하고 있을까요? 매일 밥을 먹는데 밥을 먹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적이 없어요. 밥 먹는 행위를 향유하지 못해요. 밥 먹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를 몰라요. 밥은 다른 일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 먹을 뿐이에요. 그러니 아무거나, 대충 먹어요. 마치 자동차에 주유하듯, 쓰레기통에 휴지 던지듯 그렇게 먹기도 해요. 오죽하면 마이클 폴란 같은 학자는 <<행복한 밥상>>에서 ‘음식을 먹어라’ ‘식사를 하라’고 말할까요. 음식이 아닌 ‘음식 비슷하게 만들어진 상품’을 차 안에서든, 걸으면서든, ‘아무 데서’나 우물거리는 현실 속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숨을 쉬면서 희열을 느껴본 적이 있나요? 숨 쉬는 나, 살아 있는 나를 경이로워해 본 적이 있나요? 몸이 얼마나 경이로운지 느껴 본 적이 있나요? 이런 질문들이 계속 다가옵니다.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면서 우리에게 준 건 정말 많지만, 그것으로 인해 잃어버린 것이 존재의 신성성입니다. 모든 게 수량화되어 이해득실을 따지는 세상에서 우리는 생명이 신성하다고 느끼기 어렵습니다. 삶이 먼지처럼 허무하게 흘러가는 건 존재의 기쁨, 아름다움을 잃은 시대에 사는 사람들이 공통으로 겪는 일입니다.
삶을 경이로워하지 못하니 삶이 지루하고 진부해집니다. 그 허무를 메우기 위해 계속 소비합니다. 물건만 소비하는 게 아닙니다. 풍경도 소비하고 배움도 소비합니다. 그 많은 돈과 에너지를 들이고 가는 해외여행 대부분이 풍경이나 문화를 소비하는 일이 됩니다. 그 여행을 통해 내가 변하지 않았다면 그건 소비지요. 여기저기 배우러 다니는데 그 배움이 소비인 경우가 많습니다. 배움이 나를 바꾸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소비입니다. 소비는 내 몸에 축적되지 않으니 하면 할수록 더 공허해집니다. 공허하니 또 소비하고, 악순환입니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고 또 하면서, 내 생명(몸)을 완전히 고갈시키며 사는 것을 마치 잘 사는 것인 양 생각하는 삶에서 벗어나는 일, 그 일이야말로 새로운 문명을 생각할 때 해야 할 일이 아닐까요.
지난 십여 해 동안, 제가 전환한 삶, 몸으로 살아온 삶을 소개해 보려고 해요. 일기 형식을 빌렸습니다.
밥 일기 : “살아 있는 몸들은 다 달다.”
5월의 아침
아침을 먹는다. 늘 그렇듯 정갈하고 아름다운 아침상이다. 밥을 먹으면서 밥 먹는 몸에 머무른다. 그러면 밥의 몸이 느껴진다. 씹고 있는 밥알이 이 사이로 톡톡 뭉개진다. 쌀밥은 부드러워서 씹기도 전에 두루뭉술하게 뭉개져 넘어가지만 잡곡밥은 단단하고 거칠어 자기주장을 한다. 씹는 맛이 있다. 나의 어금니와 단단한 귀리나 보리알이 서로 부딪히며 부드럽게 마찰하면서 부수어지는 그 느낌은 든든하다. 오래 씹을수록 곡식들의 몸은 달다. 입안 가득히 달착지근한 맛이 퍼진다. 정갈한 아침상은 고추에 세워 준 지지대처럼 하루를 지탱한다.
6월의 오후
텃밭에서 따 온 채소들로 유월의 식탁은 풍성하다. 바라만 보아도 아름다운 채소들의 맛을 음미한다. 봄 채소가 지닌 여리고 상쾌한 맛, 씁쓸하면서 뒤끝이 고소한 맛, 강렬하면서 톡 쏘는 맛… 채소 하나하나가 지닌 맛과 물성을 느끼며 먹는다.
밭에서 막 따 온 채소의 맛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다. 고추처럼 아직 제철이 아닌 채소들은 여리고 밍밍하면서 살짝 비릿한 맛이 돈다. 미처 따지 못해 제철이 조금 지난 채소들이 질기고 쓴맛이 도는 것과 대조된다. 제 시기에 딱 맞게 거둔 채소들은 모두 달다. 상추나 쑥갓, 미나리, 케일, 비타민, 청경채는 물론이고, 양파나 마늘처럼 매운 채소들도 매운맛만 있지 않다. 갓 뽑은 양파에서 느껴지는 향긋한 단맛이나, 막 캐어 낸 마늘에서 나는 알싸한 매운맛 사이로 스며들어 있는 달큼한 맛.
그 매혹적인 맛과몸의 질감에 끌려 눈물을 글썽이며, 호호 혀를 내두르며 햇양파와 햇마늘을 맛볼 때 몸이 느끼는 오스스한 기쁨이라니! 양파와 마늘의 질감은 다르다. 양파의 몸은 가볍다. 살짝만 물어도 아사삭 입안에서 무너진다. 마치 반투명한 빛이 입 속에서 터지는 느낌이랄까. 마늘은 그보다는 조금 무겁다.빛보다는 그늘에 가깝다. 자연 상태에서 금방 따거나 캔, 과일이나 채소의 맛은 살아 있는 생명의 맛이다. 땅의 시간이 흙과 물, 햇빛과 공기로 스며들어 있는 생명. <<월든>>에서 소로우가 허클베리를 도시로 가져갈 수 없다고 한 까닭이다.
허클베리를 손수 따보지 못한 사람이 허클베리 맛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흔히 범하는 잘못이다. 허클베리는 보스턴까지는 결코 오지 않는다. 장사꾼의 수레에 실려 오면서 허클베리의 과분만 문질려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과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불사약 성분도 같이 사라지는 것이다. 남은 것은 단지 식품으로서의 딸기일 뿐이다. 순수한 허클베리는 단 한 알도 산골에서 도시로 가져오지 못할 것이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월든>>
그가 가져갈 수 없다고 한 불사약 성분은 다름 아닌 땅의 정기, 땅의 생명력이다.
내가 심고 기른 생명을 내 손으로 따서 먹는 기쁨은 뭐라고 형언하기 힘든 충만함을 준다. 이 생명들의 시간이 내 안에 쌓여 나 또한 싱그러운 존재가 된다. 나는 점점 살아 있는 맛에 섬세해지고, 점점 더 기뻐진다. 그리고 이 기쁨을 적극적으로 이야기해야 한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우리 몸은 우리가 먹은 음식, 즉 타 생명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 막중한 사실을 우리는 너무도 하찮게 여기고 돌보지 않는 문명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자신이 먹는 음식에 관심이 없다. 다른 곳에는 돈을 쓰면서도 먹는 것에 돈 쓰기를 아낀다. 사 먹는 음식에는 돈을 많이 쓰면서도 자신이 해 먹을 음식 재료를 꼼꼼하게 고르거나, 스스로 기르는 일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 내가 먹는 것이 음식인지 음식 흉내를 낸 ‘산업적 상품’인지 구분하지 못한다.
지난 반세기 동안 산업적 음식 시스템의 발전은 사람들을 산업적 음식사슬의 편의성에 길든 산업적 섭식자라는 존재로 바꾸어 버렸다. - 마이클 폴란, <<잡식 동물의 딜레마>>
농사 일기 : “흙을 만지면 저절로 기뻐진다.”
풀 뽑기
밭의 무성한 풀들을 뽑는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했다. 고구마 순들 다 걷어 올리고, 여기저기 무성히 자란 풀들 뽑고, 콩밭의 잡초와 병든 콩들을 제거하고, 땅콩밭에 무성한 풀들 또한 뽑아냈다. 참 이상도 하지, 풀을 뽑다 보면, 흙을 만지다 보면 나는 사라진다. 그저 내가 땅이 되거나,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여름 저녁 밭을 매다가 눈을 들어 바라보는 풍경은 문득 낯설다. 내 존재가 새롭게 보인다. ‘아, 내가 지금 여기 이 땅에 속해 있구나.’ 하는 안도감. 아주 오랫동안 갖지 못했던 낯선 안도감이다.
감자 캐기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으며 감자 몇 뿌리를 캔다. 땅속에서 하얀 살을 서로 맞대고 있던 둥글둥글한 몸들이 밝은 세상으로 나온다. 갓 땅속에서 나온, 속이 말갛게 보일 듯한 감자를 끓는 물에 찐다. 하얀 분이 파사삭 나오는 뜨거운 감자를 호호 불어 가며 먹는다. 밖에는 비가 오고 있다. 문득 비 오는 날 감자를 캐, 쪄 먹는 이 일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처럼 느껴진다. 감자는 비를 맞아 가며 캘 때 거의 예술의 경지에 이른다. 비를 맞아 촉촉해진 땅속에서 희고 둥근 알 감자들이 우르르 드러날 때, 그것을 만지는 손의 촉감과 경탄 어린 눈길, 그리고 그 풍경의 근원이 되어 주는 안개 드리운 들과 산, 하늘…이 모두가 어우러진 한순간, 감자 캐는 노동은 예술의 차원으로 훌쩍 올라가 버린다.

농사일의 기쁨
흙을 만지는 일에는 이상한 희열이 있다. 그 기쁨의 원천이 무엇일까. 잘 모르겠다. 다만 그 기쁨이 땅에서 온다는 것을 알 뿐이다.
농업과 관련된 노동은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묘한 희열이 따른다고 많은 사람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농업과 관련된 노동을 하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열락을 느끼는 대지의 몸과 일체가 되는 순간을 체험하게 된다는 데 있을 겁니다. - 나카자와 신이치,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물신 숭배와 허구의 대안>>
촉촉한 비를 맞으며, 또는 산들바람, 따스한 햇볕을 받으며 땅에 엎드려 있을 때, 기쁜 줄도 모르게 기쁘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른다. 흙을 만지고 작물을 돌보고 수확하는 일은 그 노동이 아무리 힘들어도 피곤하지가 않다. 피곤한 게 아니라 고단할 뿐이다. 지쳐서 툇마루에 쓰러져 누워서도 비시시 웃음이 나오는 이상한 충만감이 있다. 내 몸도 자연이고, 땅과 풀, 채소, 곡식들도 자연이다. 하늘도 바람도, 비나 햇살도 다 자연이다. 자연인 내가 자연에 속해 일하는 것, 내가 농사일에서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은밀하고 깊은 기쁨일 게다.
걷기 일기 : “사계절을 걸으며 내 몸은 풍요의 곳간이 되었다.”
5월
걷는다, 매일. 구릉을 낀 복숭아밭 사이나 벌판 가득 모내기한 들길을 한 바퀴 돈다. 걸으면서 걷는 내 몸에 집중한다. 어느 날은 아주 몸이 무거워서 걷기가 힘들다. 다리가 천근만근 무겁다. 어느 날은 몸이 가벼워 다리가 날렵하고 기쁘게 나아간다. 이런 날은 몸을 스쳐 가는 많은 것들을 느낀다. 벌판 쪽에서 부는 비람 소리, 한껏 생생하게 올라오는 억새가 서걱대는 소리, 새들이 주고받는 소리, 냇물 흐르는 소리, 그리고 햇살과 나뭇잎… 이 모든 것이 걷는 내 몸과 함께한다. 내 몸은 걷는 장소와 하나가 되고 몸은 기쁘다. 적당히 땀이 오르는 몸은 따뜻하다.
십여 해 동안 사계절을 날마다 걸으면서 내 몸엔 많은 것이 쌓였다. 봄부터 여름, 가을까지 벼들의 일생이, 바람과 개구리 소리, 벼 익어 가는 냄새, 스러져 말라 가는 억새를 한순간에 황금 깃털로 바꾸는 가을 햇살, 겨울에 독경讀經하듯 낭랑한 개울 물소리,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새들의 날개……. 온갖 소리와 냄새와 촉감과 빛깔들, 숱한 감각들이 켜켜이 쌓인 것이다. 내 몸은 깊고 풍요로운 곳간이 되었다.
6월
요즘처럼 걷기 힘든 세상은 걷는 것도 일종의 상품이 된다. 그 많은 ‘걷기 답사’ 프로그램이 그렇다. ‘트래킹’이라는 희한한(?) 상품이 개발된다. 그러나 큰돈을 들여 몇 박 며칠 히말라야 트래킹의 ‘심오한’ 경험을 하고 와서도 여전히 일상을 걸을 수 없다면, 그것은 소비다. 경험은 삶의 일상으로 축적되는 것이다.
얼마 전 지인이 ‘만보기’를 스마트폰 앱에 깔아 주었다. 자신은 하루에 육천 보 이상은 걷는다고 했다. 하루에 ‘오천 보를 걷고, 만 보를 걷는다’는 건 내 몸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내 발이 시멘트 길을 걸을 때 느끼는 감각과 맨땅을 걸을 때의 감각이 얼마나 다른지, 봄에 언 땅이 녹아 마치 이스트에 잘 부풀려진 빵처럼 부드러운 땅을 밟을 때 발이 얼마나 기뻐하는지, 언덕을 오르거나 내릴 때의 무릎이 느끼는 감각의 차이, 스쳐 지나가는 바람결에 온몸이 환하게 열리는 환희, 냇가에 떼 지어 놀던 오리들이 내 발소리에 놀라 후두둑 솟아오르는 모습, 논을 가로지르며 달리는 고라니를 보면서 터져 나오는 웃음……. 그 어떤 것도 만보기는 이야기할 수 없다.
모든 것을 수량화하는 문명은 생명의 느낌, 그 복잡한 감수感受의 세계를 지운다. 생명을 생명으로 볼 수 없게 한다. 그러니 너무도 쉽게 생명을 파괴한다. 사람이 생명으로 보이면 ‘구의역 김 군’과 같은 일이 계속 일어나겠는가? 강이 생명으로 보이면 거기에 포클레인을 들이대고 파헤칠 수 있겠는가?

새로운 문명의 키워드
- 존재의 신성성, 일상의 성화, 몸의 풍요
인간은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길을 간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역사는 말해 줍니다. 망해야 달라졌습니다. 기후위기라는 무시무시한 이 현상 앞에서도 우리는 뉘우치지 않고 망할 때까지 갈지도 모릅니다. 싸움으로 치면 길고 긴 싸움이고, 승부로 치면 이길 가망도 없는 싸움일지도 모릅니다. 이기기 위해서 싸우기보다는 이 고통을 함께 겪기 위해 싸워야 하고, 진다 해도 그 싸움을 통해 내가 달라져 있어야 하는 싸움을 해야 합니다. 내 생명을 해치는 방식이 아니라 나를 살리고 든든하게 하는 방식으로 싸워야 합니다. 두려운 시절이지만 두려움 속에 소망을 품어야 합니다. 두려움으로 하는 일은 오래가기 어렵습니다.
어떤 삶이 아름다운 삶인지 물어야 합니다. 절실하게, 마음을 다해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도 오랫동안 어떤 삶이 아름다운 삶인지 묻지 않았습니다. 물질의 양을 어떻게 내 욕망에 따라 소비하는가가 중요했습니다. 내가 먹을 것을 기르고 거두어 요리해 먹는 과정이 사라지니 그 길에서 느낄 수 있는 무수한 감각과 깨달음도 사라집니다. 소비로 채운 배는 내가 무엇을 먹었는지, 내가 먹은 게 어디에서 왔는지,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르고 금세 더 자극적인 걸 찾으려 합니다. 남들 눈에 더 있어 보이려고, 더 잘나 보이려고 소비하고 벌고 또 소비하다가 하루가, 한 해가, 인생이 저물어 갑니다. 아름다운 삶인가요?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나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가?
삶이 아름다워지려면 몸을 유지하고 기르는 일상, 그 가운데서도 고갱이인 집과 밥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우리는 아름다움이나 신성함이 먼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하고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성스러운 곳이 ‘저기’에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내 생명이 사는 바로 ‘여기’ 내 집이 성스러운 공간입니다. 그러니 집을 아름답게 가꾸어야 합니다. 단칸방에 살더라도 내 생명을 모시는 공간이니 정갈하고 아름답게 가꾸어야 합니다.
내가 찾은 밥의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언어는 동학東學의 언어입니다. 이천식천以天食天, 향아설위向我設位. 이 언어를 얻고 나서 밥이 지닌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밥을 소중히 하는 것이 왜 그리 중요한 일인지 납득하게 되었습니다. ‘이천식천’, 하늘님인 내게 하늘님을 주는 게 먹는 일입니다. 하늘님인 나는 타他존재를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타 존재가 이미 하늘님입니다. ‘향아설위’, 나를 위해 위패를 모신다는 말입니다. 자신을 향해 올리는 예배입니다. 예배는 나 밖의 대상, 신이나 위대한 존재를 향해 올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자기 예배를 이야기합니다. 이때의 나는 주관적, 심리적인 내가 아닙니다. 우주 생명인 나입니다. 우주 생명이 나한테 들어와 있는 거죠. 그 생명에게 올리는 예배입니다. 내가 단순히 몇십 년을 산 존재가 아니라, 수억 년의 몇십 년이라는 역사성을 지닌 ‘온 생명’이라는 것을 아는 이야기입니다.
‘신神이 신을 먹는다’는 사유의 거대함을 생각해 보셔요. 먹히는 존재도 예배받는 대상이고, 먹는 나도 예배의 대상입니다. 이때 일상은 얼마나 거대하고 위대한가요. 대충 먹고 하찮게 여겨 왔던 ‘밥’이 거의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장엄한 아름다움으로 펼쳐집니다. 밥 한 끼는 내 생명에게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러니 밥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나 자신과 타 존재에 대해 깊이 감응하는 ‘심미적 감수성’이야말로 우리가 회복하고 길러야 할 지성이자 감성입니다.
몸과 함께하면 많은 것이 달라집니다. 밥 먹을 때 밥 먹는 몸에 머물러 봅니다. 밥 먹으면서 티브이나 스마트폰을 보거나 딴생각을 하지 않으며 밥을 먹습니다. 내 생명이 밥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섬세하게 깨어서 느껴 봅니다. 걸으며 걷는 내 몸과 함께합니다. 걸으며 만나는 뭇 생명과 사물들을 느껴 봅니다. 설거지할 때 설거지하는 몸에 머물러 봅니다. 무감각하게 하는 습관적 설거지가 아니라, 설거지를 하는 내 몸을 인식해 봅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놀랍게도 고요해지고 기뻐집니다. 지루한 일상에 빛이 들어옵니다. 늘 하던 설거지가 최초의 설거지가 되는 낯선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무언지 모를 생기, 충만함으로 몸이 차오릅니다. 삶이 아름다워지고, 든든해집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몸에 머문다는 건 바로 그 순간에 머문다는 의미고, 우리가 경험하는 건 순간밖에 없으니까요. 그런데 우린 순간마다 내 몸에서 분리되어 있기 십상입니다. 그러니 순간에 머무르지 못하고, 순간에 머무르지 못하니 삶은 허무하게 흩어집니다. 순간에 머무는 것은 과정에 머무는 것이기도 합니다. 무엇이든 결과에 매달려 치달으면 순간을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삶에서 기쁨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일상을 소중히 하면 몸이 풍요로워집니다. 몸의 감수성이 깊어집니다. 그러면 외부의 욕망, 소비 욕망, 타자지향적 욕망이 줄어듭니다. 일상을 귀하게 다룰수록 그러해집니다. 하루에 한 번이라도 내 몸에 머무는 법을 익혀 보셔요. 그러면 삶이 조금씩 아름다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어요. 왜냐하면 내 몸이 곧 내 생명이니까요. 생명을 돌보면 그 생명은 든든해집니다. 생각을 끄고 몸의 말을 들어 보셔요.
감각을 투명하게 벼려 스스로 악기 같은 몸이 되길 바랍니다. 몸을 연주하고 몸의 축제를 만나 보셔요. 젊은 그대들은 몸으로 살아가는 축복이 무언지 배우길 바랍니다. 나를 찾겠다며 허공에서 허공으로 떠다니느라 일상을 외면하지 않길 바랍니다. 소비적 시간 대신 창조적 시간을 살아가길 바랍니다. ‘존재의 신성성’, ‘일상의 성화聖化’, ‘몸의 풍요’는 새로운 문명과 아름다운 삶을 생각할 때 중요한 키워드가 되지 않을까요?

◌ 김혜련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