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 드는 추분 이야기
안철환(전통농업연구소 대표)
추분이 되면 낮이 밤보다 짧아져 이제 성장을 돕는 양의 기운은 저물고 이삭과 과일의 성숙을 돕는 음의 기운이 지배를 합니다. 벼도 성장을 주도했던 잎사귀는 시들어가고 이삭줄기가 커져 이삭은 누렇게 익고 무거워 고개를 숙이게 되지요.
그런데 올 해는 벼가 빨리 익는데다 가을비가 장마처럼 쏟아져 벼가 일부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다 죽어가는 목련 나무 살려보려고 수분 공급 원활한 논둑에 심었던 게 화근이 되었지 뭡니까. 의연하게 살아나 몇년째 우아하게 피운 흰꽃 보길 즐기다 그늘진 그 밑의 벼들이 웃자라 작년부터 쓰러지기 시작한 걸 이제야 깨달은 거에요. 참~, 나무는 함부로 심는 게 아닌데 말이죠. 또 목련을 옮길 생각하니 그 놈의 순탄치 않은 팔자에 미안한 마음만 드네요. 이번에 옮기면 세번째 이사가 될테니 말이죠.
아무튼 추분 지나면 가물어야 돼요. 비는 성장에 필요하지 이삭과 열매 익는 데는 별 도움이 안되거든요. 근데 추분이 든 오늘은 맑았지만 내일은 비가 온다네요. 좋은 소식이 아닙니다. 그러지 않아도 며칠 전 비로 쓰러진 벼 세우느라 애쓴 아내에게 절로 고개 숙여졌는데 또 쓰러질까 조마조마 합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추분 전후로 추석이 듭니다. 근데 참 궁금했던 건 추석 때 먹는 올벼 쌀이었어요. 토종 씨앗 수집한다고 어느 시골 한 할머니 농부님을 만나 물어봤습니다.
"할머니, 소출도 적은 올벼는 왜 심었나요?"
요즘은 사라진 풍경이지만 옛날엔 어느 마을이나 농가에선 다 올벼를 심었거든요.
"추석 차례상에 조상님께 올리려 한 거지~."
조상님이 드시긴 뭘 드시겠어요. 그건 다 핑계일거고, 사람들이 먹으려 한 것이겠죠. 그럼 왜 추석엔 올벼를 먹어야 했을까요? 답을 못 찾아 의문은 거기에서 멈추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한참 지나 우연히 이런 얘길 들었어요. 추석이 되도록 보리밥 먹으면 탈 난다는 말을요. 아~ 그래 알았지요. 찬 기운 돌기 시작하는 추석부턴 따뜻한 쌀밥을 먹어주어야 한다는 걸 말이죠. 그 때 먹을 수 있는 건 일찍 익는 올벼 쌀밖에 없잖아요. 맞았어요. 추석은 올벼 쌀 먹는 명절이었던 거에요.
사실 추수 감사 축제를 하기에 추석은 너무 일러요. 수확할 게 별로 없거든요. 미국이나 기독교에서 하는 11월 중순 경의 추수감사절이 제대로 된 수확철일겁니다. 특히 추석이 추분보다 빨라 양력 9월 하순 경에 들 때는 사과조차 귀하죠. 그런 추석이 늘 의문이었던 거에요.
추석이 올벼 먹는 명절이라면 그 다음으로 알게 된 것은 추석 전까지 먹던 보리밥은 먹을 게 없어 먹는 구황곡식이 아니라 여름 철 필수로 먹는 주식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보리는 찬 음식인데다 섬유질과 비타민, 미네랄이 풍부해 소화도 잘 되고 건강에도 좋은 밥이죠. 여름엔 찰지고 기름진 음식 많이 먹으면 더위를 견디기 힘들어요. 찹쌀떡 장수가 긴긴 겨울 밤에 팔러 다닌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겁니다.
암튼 추석이 우리에겐 제일 큰 명절이지만 먹을거리는 차라리 백중 때보다 못한 면이 있어요. 그런데도 우리의 유일한 토종 명절이자 가장 소중한 명절인 것은 아마도 계절의 가장 큰 전환점이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추분과 함께 양의 시대가 음의 시대로 접어드는 극적인 길목이거든요. 명절은 다르게 보면 축제인 셈인데 추석은 설날과 함께 시끌벅적하게 먹고 노는 여느 축제와는 사뭇 다르죠. 우리에게 축제 다운 명절은 아마 단오와 백중이었을 거에요. 마을 축제였거든요.
추분과 추석 즈음에 농부의 손을 더 바쁘게 만드는 것으론 씨앗 받는 일일겁니다. 여름 끝무렵에서 백중 즈음 농부의 배를 불리운 각종 여름 열매들의 씨앗들이 영글고 있지요. 오이가 익은 노각오이 씨앗에서부터, 고추, 가지, 수박, 참외, 토마토 등 뿐 아니라 조선호박, 수세미, 여주, 목화 등도 씨앗이 잘 익도록 챙겨야 합니다. 폭염을 겨우 버텨낸 농부에게 가을 농사와 더불어 씨 받는 일까지 기다리고 있으니 한시도 쉴틈이 없어보이지만 내년 농사의 희망을 생각하면 시름 거두기에 모자람이 없을 겁니다.
올해는 윤6월로 인해 6월이 두 번 들어 추분이 8월 2일에 들었어요. 빠른 추분답게 가을도 빨리 온 건데요, 초가을은 여름 폭염에 가려 온 지도 모른 사이에 가을의 피크인 추분이 슬며시 들이닥친 꼴이에요. 며칠 전부터 귀뚜라미 소리는 확 줄어들었고요, 밭을 둘러싼 숲의 나무들 잎에는 녹색의 기운이 약해지고 있더만요.
그렇지만 추분 지나고도 보름 가까이 지나야 추석이 오니 아직 더운 기운은 남아 있을 겁니다. 물론 한 낮에만 그렇구요, 그 시간만 지나면 그냥 가을이에요. 벌써 초저녁 6시만 되면 어둑어둑해지고 있어요.
사람도 추분 지나면 이젠 음의 시대를 대비하는 게 좋겠어요. 왕성하게 성장하고 활동하는 양의 시대는 지나갔으니, 이젠 2세를 준비하고 겨울 날 대비를 하며 희망을 품는 음의 시대에 맞게 사는 거죠. 절기를 알면 철이 들고, 철이 들면 몸이 반듯해지고, 몸이 반듯해지면 마음의 모가 둥글둥글해진답니다. 마음은 둥글둥글한 하늘을 닮고 싶어하거든요.ㅎ
글을 쓴 안철환 선생은 온순환협동조합, 전통농업연구소 대표이고 경기도 안산에서 ‘산림생태텃밭 먹거리숲 농장’을 운영한다. 남은 음식물과 똥오줌, 커피 찌꺼기를 받아 직접 거름 만들기를 실천하고 있으며, 우리 토종 종자와 전통 농업 살리기에 열중하고 있다.
25년 전, 처음으로 심은 배추 씨가 3일 만에 싹 트는 걸 보고 ‘씨 안에 누가 있었구나!’ 깨닫고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우리가 먹는 배추는 단순히 물질적인 먹을거리가 아니라 나와 별 차이 없는 생명이며, 그래서 먹는다는 것은 생명을 먹고, 생명과 소통하고, 생명과 하나 되는 일이라고 믿는다.
쓴 책으로 《시골똥 서울똥》(2009), 《24절기와 농부의 달력》(2011), 《호미 한자루 농법》(2016), 《토종농법의 시작》(2020)이 있고, 옮긴 책으로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2004)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