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11-17(월)
 

                  한로 소식

                                안철환(전통농업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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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 이슬 맺는 한로답게 아침이 제법 차갑습니다. 열대야로 힘들었던 때가 바로 어제 같았는데 오늘은 이불 속에서 나오기가 싫네요. 이 글도 지금 이불 덮고 폰 화면에 긁적이고 있답니다. ㅎ,  이제 세상은 찬 기운이 지배적이고 더위는 한 낮 잠깐 지나치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일교차가 꽤 매서운지 어르신들 부고 소식이 많네요. 최근 보름 정도에 세번 문상 갖다왔으니요.

마지막 더위마저 쫓아내겠다는 심보인지 추적추적 가을비는 끊이질 않습니다. 보통 추석엔 비가 오지 않는데 이번엔 아니었어요. 해석이 잘 안되니 이상하긴 이상합니다. 제주에는 아직 열대야라니까요. 아마 윤달로 길어진 여름의 마지막 기운이 질기게 남아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 같습니다. 액이 빠져 나갈 때 꼬리로 뒤통수를 치고 간다는 말이 떠오릅디다. 

그 여운이 길게는 음력 9월9일, 양력으론 10월 29일까지는 남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날은 양이 겹치는 중양절重陽節 중에 마지막인 중구절重九節로 겨울 나는 맥류들 파종 때입니다. 강남 제비와 함께 완연한 봄이 돌아오는 삼짓날과 중구절이 옛날엔 명절이었답니다. 찬 기운의 세상이 도래하니 마을의 노인들 응원 잔치를 벌였다는군요.

맥류는 음력으로 중구절 근방, 양력으론 한로 근방에 심는데요 중구절과 한로의 격차가 큰 해에는 고민도 큽니다. 올해는 양력으로 한로가 10월 8일인 반면 중구절은 10월 29일이니 21일이나 격차가 나는 겁니다. 그럼 도대체 언제 심어야 할까요? 일찍 심어 웃자라도, 늦게 심어 못 자라도 겨울에 동해 입기 십상이거든요. 저는 그냥 한로와 중구절 사이에 심습니다. 그러다보니 매해 심는 날이 다를 수밖에 없는데요, 심하면 보름 차이 날 때도 있지요. 암튼 파종일은 음력과 양력을 다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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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정신없이 그냥 한로만  보고 밀을 심은 적이 있어요. 바깥 일이 있어 외출할 생각에 숙제하듯 파종하고 뛰어나갔죠. 일주일 쯤 지나 싹이 트는데 발아 기운이 꽤 좋아보이대요. 그냥 기분 좋다 생각하고 지나치길 며칠 되어 다시 보니 너무 잘 자라는 거지 뭡니까? 이상하다 싶어 심은 날이 음력 며칠인가 보니 8월 하순인 거에요. 위 기준으로 보아 일주일 이상 일찍 심어 웃자란 겁니다. 야~이러다  겨울 추위에 영락없이 얼어 죽게 생겼네, 어쩌나, 낫으로 벨까, 아님 추위 오기 전에 뭐라도 덮어줄까 궁리만 하는 중에 희한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우리 밭 위 산 속에서 동네 분이 키우던 염소 중 한마리가 탈출해 우리 밀을 죄다 끊어 먹은 겁니다. 그 현장을 본 순간 어이 없기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데 소식 듣고 온 염소 주인장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담배만 뻐꿈뻐꿈 피고 있네요. 연짱 미안타를 반복하는 그 이웃을 오히려 제가 위로할 수 있었던 건 나름 딴 생각이 퍼뜩 떠올라서 였습니다. 밀이 웃자라 낫으로 벨까 했던 내 생각을 염소가 알아채서 도와 준 꼴이네 했던거지요. 

사실 염소나 양, 소 같은 되새김질 하는 초식 동물은 아랫니만 있어 풀을 끊어먹는 것보다 뿌리채 뽑아 먹는 게 많습니다. 그런데 염소는 양과 좀 달라 제 밀을 먹은 놈처럼 먹을 게 많으면 끊어먹기도 한다네요. 윗니는 없지만 대신 잇몸이 튼튼해 거기에 바쳐 끊어 먹을 수 있답니다. 반면 양은 어린 풀, 큰 풀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뿌리채 마구 뜯어 먹는 놈이라 초원을 황폐화시키는 주범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목동은 약간의 염소들을 양 무리 속에 집어 넣어 함께 기른다는군요. 양은 남 따라하는 습성이 있어 큰 풀만 뜯어먹는 염소와 같이 있으면 어린 풀을 먹지 않아 초지관리에 도움이 된다는 거지요. 그러면 뭐합니까? 염소는 절벽도 지 안마당처럼 돌아다니며 나무 껍질도 벗겨 먹어치우는 놈이라 길게 보면 양이나 마찬가지로 사막화 주범이라 할 수 있단 말입니다.

밀 같은 외떡잎 벼과 식물은 생장점이 땅 속에 있어 끊어먹혀도 다시 잘 올라옵니다. 농약이 없던 옛날엔 모판의 벼 이파리가 해충에 큰 피해를 입게 되면 아얘 벼에다 불을 질렀답니다. 벌레나 세균도 죽일뿐만 아니라 벼는 순 질러 준 꼴이 되어 땅속에서 새순이 잘 올라온다는 거지요. 저도 오래 전 밭벼를 잔뜩 심었다가 중국에서 멸강나방이란 놈이 날아와 애벌레를 벼에 낳더니 까만 애벌레놈들이 벼 잎을 다 갉아 먹은 일이 있었습니다. 꼭 검은 옷 입은 저승사자처럼 보였지요. 농약은 칠 수도 없고 무기력하게 쳐다만 볼 수밖에요. 다 먹고는 그놈들은 고치가 되려고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벼는 처참히 목들이 다 베어지고 말았어요. 아, 근데 웬걸요, 새로 순이 올라오는데 감동이 이루 말로 못할 정도였습니다. 더 싱싱해보이더라구요.

 

저희는 한로 열흘 전에 벼를 2/3는 수확했습니다. 체험하러  오기로 한 아이들용만 남겨두었지요. 추석 밑에는 처서에 심은 무 솎아 물김치 담갔구요. 오늘은 담배상추 따다 마늘 파 다진 된장만 넣고 밥 싸먹으니 가을 상추의 진가를 맛 보았네요. 밤 주워다 디저트까지 먹어 세상 부러울 게 없더이다. 

나물로 미역취, 참취, 파드득, 부지깽이도 먹어달라 갖은 폼을 잡고 있어 내일은 아내 얼굴 보며 나물 입맛을 다셔보렵니다. 한로에 익어가는 가을 맛이 깊기만 합니다. 그래도 감기 조심들 하세요. 한로 소식 여기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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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쓴 안철환 선생은 온순환협동조합, 전통농업연구소 대표이고 경기도 안산에서 ‘산림생태텃밭 먹거리숲 농장’을 운영한다. 남은 음식물과 똥오줌, 커피 찌꺼기를 받아 직접 거름 만들기를 실천하고 있으며, 우리 토종 종자와 전통 농업 살리기에 열중하고 있다.

25년 전, 처음으로 심은 배추 씨가 3일 만에 싹 트는 걸 보고 ‘씨 안에 누가 있었구나!’ 깨닫고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우리가 먹는 배추는 단순히 물질적인 먹을거리가 아니라 나와 별 차이 없는 생명이며, 그래서 먹는다는 것은 생명을 먹고, 생명과 소통하고, 생명과 하나 되는 일이라고 믿는다.

쓴 책으로 《시골똥 서울똥》(2009), 《24절기와 농부의 달력》(2011), 《호미 한자루 농법》(2016), 《토종농법의 시작》(2020)이 있고, 옮긴 책으로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2004)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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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환의 절기 이야기] 한로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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