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11-17(월)
 

 

지리산뱀사골탐방안내소 자료집

『그들이 지리산으로 찾아든 까닭』

_빨치산과 토벌부대, 그리고 사람들

 

2008년 5월 10일 지리산국립공원북부사무소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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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인>은 과거 지리산에 깃들었던 빨치산과 이들을 둘러싼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는 기회로

『그들이 지리산으로 찾아든 까닭』의 전문을 총 10회에 걸쳐 싣고자 합니다.

 

이번 시간은 <➌ 빨치산이 생겨난 배경은 무엇일까요?-1>을 함께 보겠습니다. 


 

연재 순서

➊ [연재를 시작하며] 지리산 소개 + 책을 내며

➋ 빨치산이란 무엇일까요? +지도로 보는 빨치산과 토벌부대 루트

➌ 빨치산이 생겨난 배경은 무엇일까요?-1

➍ 빨치산이 생겨난 배경은 무엇일까요?-2

➎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

➏ 토벌부대는 어떤 활동을 했을까요?

➐ 숙명의 대결, 토벌군 사령관 백선엽

➑ 뱀사골에서 있었던 일-1

➒ 뱀사골에서 있었던 일-2

❿ 뱀사골탐방안내소, 전시관을 열다

 

 


 

 

 

 알립니다.

책 <그들이 지리산으로 찾아든 까닭> 글 가운데 '반란군'이라는 표현처럼,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거나 표현이 적절하지 않은 부분이 더러 있습니다. <지리산인>의 역사 인식과 다른 점이 있음에도, 빨치산에 대한 역사적 자료가 부족한 현실에서 독자들께 빨치산 역사에 더 다가갈 기회를 드리고자 역사적 자료로서 이 책을 인용하여 싣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좀 더 나은 자료를 찾아 보여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빨치산이 생겨난 배경은 무엇일까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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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생포된 빨치산들

 

 

 

 

당시 사회 분위기

조선의 왕권이 몰락하고 일제의 탄압이 시작되자, 나라의 주권을 잃고 혼란에 빠졌던 사람들은 새로운 살길을 찾아야 한다는 불안함과 절박함을 느꼈다. 저마다 살아갈 길을 찾아 헤매었는데, 일제에 협력하거나 대항하는 두 부류로 크게 나뉘어 있었다. 그중 일제에 대항하고 조선의 독립을 꿈꾸는 세력이었던 독립운동가와 우국지사들은 독립을 이룬 뒤 나라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이때 많은 사상적인 대안이 나왔는데, 그 사상무장을 통해 조국의 광복을 이루고, 나라를 이끌어 갈 중심사상이라 주장했다.

 

조선의 왕국을 다시 수립하자는 왕정파, 민족주의 계열의 상해 임시정부파와 공산사회를 이룩하고자하는 혁명파들이 독립운동의 선봉에 서 있었다. 특히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독립한 뒤 모든 인민이 공동분배하여 누구나 잘사는 사회를 이룩하려는 공산주의 사상에 대해서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나라 밖에서도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 중국의 공산당 활동이 성공하여 선진사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지식인들은 공산주의를 공부하기 위해 러시아와 중국으로 유학을 가고, 조선에서도 지역별 세포조직을 통해 공산사상이 확산되었다. 그리하여 1925년 공산주의자들은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조선공산당을 결성했다. 1945년 해방 후에는 조선공산당 재건 활동이 본격화되었고, 북한에 북조선분국을 두게 되었다.

 

한편, 한반도는 일제패망과 함께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에 따라 남과 북이 갈라지고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미국이 통치하는 남조선과 소련의 지배를 받는 북조선에는 서로 다른 이념을 가진 정권이 탄생하게 되고, 한반도는 사상의 대립과 갈등의 회오리바람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빨치산의 불씨, 전평사건

1945815일 아무런 준비 없이 해방을 맞은 한반도는 정치·사상적 갈등과 어려움으로 여전히 혼란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서 있었다. 박헌영이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를 세우면서 좌우익의 대결도 점점 드러나기 시작했다. 마침내 1946923일 서울, 대구, 부산을 비롯한 철도노조가 전국적인 총파업을 시작하고 10월에는 대구시에서 전평(全評, 조선노동자조합전국평의회)이 주도하여 총파업이 일어났다. 전국노동자평의회가 중심이 된 이 사건을 계기로 삽시간에 서울을 비롯한 남한 전체에 미군정에 반대하는 시위가 퍼져 나갔다. 미군과 경찰이 주동자들을 체포하고 수배하자, 이들은 태백산과 소백산으로 숨어들어 우리나라 빨치산의 시작인 야산대(野山隊)’를 만들었다. 뒤에 이들을 구빨치산이라 불렀다. 수는 많지 않았지만 친인척 같은 연고자를 통해 식량을 구하고 은신하는 정도의 매우 초보적이고, 비조직적인 모습이었다. 이들은 경찰의 눈을 피해 밤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집에 다녀오기도 하고, 선거 때는 유세장에서 야유도 하고 다니는, 약간은 낭만적인 투쟁을 벌였다.

 

 

여수·순천 10.19사건

한편, 1947년 제주도에서는 3.1절 기념행사를 계기로 좌익과 우익의 갈등이 폭발하고 말았다. 경찰·우익청년단과 주민들이 조직한 자위대가 충돌하면서 보복과 잔인한 살인이 되풀이되었다. 어지러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1948년 제주도에서 4.3사건이 일어나자 야산대의 활동은 무력적이고 격렬한 게릴라 투쟁으로 바뀌게 되었다. 제주4.3사건은 육지에 있는 군인과 경찰을 파병해야 할 만큼 심각했으며, 파병에 반대하는 움직임도 일어났다. 바로 제14연대였다. 여수에서 제주도의 저항세력을 토벌하라는 출동명령을 받은 국군 제14연대는 명령을 따르지 않고 반란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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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여순 사건 당시 체포된 사람들

 

당시 한국 국방경비대(국군의 전신)는 좌익세력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경비대를 모집할 때 신원조회가 없어 좌익성향의 사람도 경비대에 들어갈 수 있었고, 사병이 되면 경찰이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따라서 사병들은 경찰에 대한 반감이 높았고 좌익계열의 피신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군부대 내에서도 공산주의 조직이 비밀리에 형성되었다. 14연대에도 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동기와 명분만 있으면 반란의 불씨는 언제든 지필 수 있었다.

 

 

19481019일 여수 14연대의 1개 대대가 제주도 토벌작전을 벌이기 위해 여수항에서 출발준비를 하는데, 선임하사관이던 지창수 상사가 제주도 출동거부, 경찰타도, 인민해방군으로 행동할 것을 앞세우며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이 일어난 지 하루 만에 반란부대는 여수 시내를 장악하고, 바로 순천으로 북상하여 20일 순천을 장악했다. 이후 광양, 벌교, 구례, 곡성까지 점령했는데, 이 부대를 이끌던 총 지휘관은 당시 중대장인 중위 김지회와 경비사관학교(육사의 전신) 3기 동기생인 홍순석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여수, 순천, 구례, 보성, 광양은 인민공화국의 세상이 되었고, 지배자가 바뀔 때마다 좌·우익 상호보복이 일어나 피가 피를 부르는 살육이 되풀이되었다.

 

 


다음 시간에 "➍ 빨치산이 생겨난 배경은 무엇일까요?-2"이 이어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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