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인>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벗자편지>>를 펴낸 니은기역 출판사입니다.
자급을 어렵게 하는 허울을 벗어던지고 나와 둘레를 돌보며 고귀한 하루를 살려는 농부들의 편지,
<<벗자편지>>를 여기 <지리산인>에 한 달에 한 번, 한 꼭지씩 들려드리게 되어 기쁩니다.
나의 시간을, 나의 생산수단을, 나의 재주를 좀 더 아름답게 쓰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책이 용기를 주면 좋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 이번 시간엔
❸ 칩코 : 말이 글이 되게 해 주는 이들에게 "삶이 신비가 되려면"
꼭지를 함께 읽겠습니다.
다음 시간엔
❹ 똥폼이 월간정상순에게 “함께 살자는 그 말, 아주 힘이 센 그 말”
이 함께합니다. 고맙습니다.
말이 글이 되게 해 주는 이들에게
“삶이 신비가 되려면”
칩코
도인의 딸
엄마와 아빠는 이혼했습니다. 어느 부부나 그렇듯 둘은
상극이었습니다. 아빠는 멋쟁이셨어요. 어딜 가나 사람들
시선을 사로잡는 유머와 언변이 있었고, 동안 외모에 옷은
명품을 두르고 다녔습니다. 명품이 아빠의 지갑 형편에
맞아서는 아니었습니다. 저흰 집도 차도 없었으나 아빠는
‘없어 보이지’ 않는 게 중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빠는
태어나서부터 줄곧 집도 차도 없이 자랐습니다. 친척 집을
전전하고 길거리에서 물건을 팔고 아는 형들에게 얻어터지는
것이 아빠가 기억하는 그의 유년 시절이에요. 아빠는 세 딸을
‘없어 보이지’ 않게 기르는 것에 가장 열과 성을 쏟았습니다.
어쩌다 돈만 생겼다 하면 딸들을 백화점에 데려가 비싼 옷을
입혔고, 먹다 체할 듯한 분위기의 고급 식당에 앉히곤
했습니다. 대학 시절 저는 또래에게서 찾기 힘든 브랜드 옷을
입고 다니는 바람에, 우리 집 사정을 모르는 친구들은 제가
왜 국가장학금을 꼬박꼬박 받는지, 학교 근로장학금은 왜
학기마다 신청하는지 이해를 못 하기도 했습니다.
엄마로 말하자면 도인이었습니다. 어디서 배우지도 않았는데
벽을 보고 틀어 앉아 명상했다는 것이 엄마의 유년
시절이에요. 결혼 생활이 힘들어지면서 엄마는 더더욱 내면에
몰두했고, 온갖 영성 서적들을 탐독했습니다. 덕분에 안방엔
아빠의 ‘박정희 평전 시리즈’와 엄마의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따위의 ‘영성 서적’이 뒤섞인 책장이 자리
잡았어요. 어릴 적에 전 엄마와 함께한 기억이 없습니다.
엄마를 떠올릴라치면, 집에선 워낙 아빠의 존재감이
압도적이어서 엄마는 술 취한 아빠의 안주를 만들어 주거나
발을 씻겨 주시던 것만 기억날 뿐입니다. 엄마와 대화를 많이
하게 된 것은 이혼 후 아빠가 집을 나가고 난 고등학교
시절부터였어요.
전 미운 친구가 생기면 엄마에게 하소연했는데, 엄마는 그럴
적마다 그 친구는 네 거울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엔 사실
나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고요. 세상은 내 마음의 슬픔, 오만,
증오, 기쁨 등을 비추는 거울일 뿐이기에, 마음 외의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잘난 척해서 미운 친구는 사실은
내가 잘나고 싶은 마음 때문에 미운 것이고, 날 소외시켜서
미운 친구는 관심받고 싶은 내 마음 때문에 미운 것이었어요.
내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나의 질투와 탐욕마저 온전히
사랑하지 않는 한, 계속 다른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서 저를
괴롭힐 거라고 했습니다. 냉정한 상담이라고 들릴 법도
하지만, 어린 저는 그 말에 용케 고개를 끄덕였던 것이
기억납니다.
어릴 적엔 아빠의 영향을 많이 받다가, 나이가 들면서 엄마의
영향을 빠르게 흡수하며 자랐습니다. 그래서인지, 제 삶은
아빠와 비슷했다가 엄마와 비슷한 방향으로 선회하면서
흘렀어요. 저는 유행에 민감한 10대를 보냈습니다. 외출을
준비하느라 무려 두 시간 가까이나 쓰곤 했으니까요. 머리를
손질하고 옷을 고르고, 손톱과 발톱까지 멋을 낸 후에야 집을
나섰습니다. 화장대와 옷장은 늘 가득 차 있었습니다. 집에
돌아오면 종아리에 알이 밸까 봐 맥주병으로 마사지하며
하루를 마쳤고요. 이십 대 초반을 넘고부터는 서서히 이런
일과에 의문을 가졌습니다.
서른을 바라보는 지금 저를 그때와 같은 사람이라고 보려면
과감한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캄캄한 새벽에 일어나 명상하고,
방의 모퉁이마다 깃든 보이지 않는 존재들에게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나면 해가 밝아 옵니다. 집에는 거울이
없습니다. 외출 준비 시간은 필요하지 않다고 보는 편이
나아요. 계절별로 단벌인 개량 한복을 입고 집을 나서면, 내
까까머리를 보고 이웃 할머니는 ‘여잔지 남잔지 모르겠어’
하면서 나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리십니다.
이제 저는 아빠와 썩 데면데면합니다. 아빠는 ‘남자인 척하는
여자’를 가장 혐오하는데, 제가 머리를 밀고 화장하지 않고
젖꼭지를 가리지 않는 것이 남자 행세하기 위함이라고
이해하신 듯합니다. 아빠에게 여자를 만난다고 커밍아웃을 한
적은 없으나 아마 고백한다면 아빠의 이런 오해에 더욱 힘을
실어줄 듯합니다. 언젠가 아빠는 불안한 예감이 들었는지
협박식으로 ‘난 내 자식이 홍석천 같은 놈이면 죽여 버릴
거야.’라고 한 적이 있는데요. 저는 아빠의 말을 살인 예고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아빠의 눈에서 살기보다는 두려움을
읽은 까닭이어요. 살인 협박이 전혀 먹히지 않은 것은 아니라,
저도 두려움 때문에 아빠와 계속 거리는 두고 있긴 하지만요.
제가 돌연 시골 생활을 시작해 버린 것으로, ‘남자 행세’가
아니라 ‘스님 행세’였나 헷갈리시는 듯합니다.
그런데도 아빠와 영 만나지 않는 것은 아니에요. 마치
이혼하지 않은 것처럼, 예전의 그 정상 가족이었던 것처럼,
아빠는 딸들을 비싼 식당에 데려가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입히는 것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중처럼 하고
다니니, 이제 더는 아빠가 사 주시던 금팔찌나 가죽가방이나
원피스 따위가 도저히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채식하니, 아빠가
데려가던 식당에서 제가 먹을 메뉴는 전혀 없었어요. 아빠의
당황스러움과 서운함도 십분 이해는 갑니다. 아빠는
허탈하면서도 쓸쓸하게 웃으며 말하곤 했습니다.
“네 엄마 명상하러 다니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었는데…
딸도 똑같이 되다니.”
늘 그렇듯이, 오랜만에 만난 아빠와 도리어 더 외로워진
마음으로 헤어지고 나면, 엄마의 말이 생각납니다. ‘삶 속에서
반복해 아빠를 괴롭힌 아내와 딸’이라고. 신은 아빠가 자신을
스스로 사랑하게 만들기 위해, 저를 엄마와 똑 닮은 삶을
살도록 했을까요?
명상을 너무 했네
벌써 세 차례 화장실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밤새 메스꺼움에
발만 비비적대다가, 기어코 밀려오는 토기를 참을 수 없던
것이죠. 그날 새벽은 원인을 알 수 없는 구토를 여러 차례
하고, 결국 토를 받을 대야를 가져와 침대 아래에 두고서야
겨우 잠든 날이었습니다. 명상센터에서 장기 봉사를 하던
때였어요. 다음 날은 쫄쫄 굶고 나서도 메스꺼움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새벽에도 두 차례 속을 게워 낸 이후,
결국 센터를 나와 병원으로 향할 참이었습니다.
전 서구 의학으로 치료하는 병원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제 애인은 심장이 아파서 심장 전문 병원에 갔는데, ‘이상
무’를 판정받았습니다. 도무지 이해가 안 가던 애인은 요즘
스트레스가 심했는데 그것 때문이냐고 물었더니, 의사는
자신은 심장만 알기 때문에 그건 정신과에 문의하라고
했답니다. 요즘 코피를 자꾸 쏟는데 그게 심장 통증과 연관이
있는 게 아닌지 물었더니, 다시 말하지만 자신은 심장만
다루므로 이비인후과에 가라고 했답니다. 이 사례 때문에 삐친
것은 아니고, 서구 의학은 인간을 물질로만 취급해서 믿음이
가지 않습니다. 인간을 영성과 물질의 유기조합으로 보는 게
아니고, 부품으로 구성된 자동차 정도로 보는 듯합니다. 저는
생물만큼은 1과 1을 더해서 2 이상이 된다고 여기거든요.
일반 병원 대신으로 대체의학 마사지를 치료받았습니다.
온몸이 멍이 들도록 마사지를 했는데 몸은 호전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결국 혼자 단식 치료를 하기로 했습니다.
속이 편안해질 때까지 계속 굶었어요. 그러다 보식 양을 점차
늘려 가던 중 또다시 새벽에 구토가 시작됐습니다.
임시방편으로 동네 내과에 가서 양약을 타 먹었지만 효과가
없었습니다. 제대로 먹지 못한 지 한 달이 다 되어 갔어요.
몸은 크게 지쳐 갔습니다.
집 근처에 용하다는 한의원에 찾아갔습니다. 한의원장은
무당처럼 사람을 꿰뚫듯이 보는 집요한 눈빛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제 배를 이곳저곳 눌러 보고, 혓바닥을 들춰
보고, 제 최근 일정과 변화에 대해 캐묻더니 역시나 무당처럼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기병氣病이네. 명상을 적당히 해야지, 너무 했어.”
의사는 내 몸이 정상이라고 했습니다. 위장이 건강하다고
말입니다. 다만 명상을 과하게 해서 기가 복부에서 막힌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약을 줄 테니 먹으면 한 방에
나을 것이라고, 자기도 기병을 그렇게 치료했다고 말했습니다.
별로 믿음이 가는 인상은 아니었으나, 제 믿음과는 무관하게
저는 그 약으로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구토라고 했지만, 사실 짐작 가는 바는
있습니다. 구토를 시작한 그 날. 저는 명상센터의 정화조를
홀로 청소했던 것이어요. 센터에서는 수행자들 밥을 차리고
설거지를 해 드립니다. 혼자 시골 생활을 할 적에 저는 가스
불로 요리하지 않고 장작을 주워 와서 불을 때서 밥을 합니다.
세제를 쓰지도 않고, 물은 극도로 아껴서 설거지합니다. 또
설거지로 더러워진 물은 절대 하수로 흘려보내지 않아요.
아무리 화학 세제가 없는 물이라 한들, 인간들이 사용하는
마을 전체의 오수와 합쳐지면 결국 강을 더럽히기 때문입니다.
설거지나 양치나 샤워를 한 물 모두 양동이에 받아서 텃밭에 돌려줍니다.
어차피 화학성분은 없기에 텃밭에는 유기물이
섞인 좋은 양분이 되니까요. 그럼 텃밭에 새 물을 주지
않아도 되니 물도 아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걸
명상센터에서 실천하기는 불가능했어요. 빠른 속도로 수많은
설거짓감을 해치워야 하니 말입니다. 세제는 필수적으로
사용하라고 규정에도 있었고요.
어느 날부터 설거지하는데 역겨운 냄새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알고 보니 설거지통 아래 정화조에 쌓인 음식물 찌꺼기가
썩어서 나는 냄새였어요. 정화조라는 걸 태어나 처음
봤습니다. 뚜껑이 닫힌 채로도 무시무시한 냄새가 나는 그곳을
열어 보는 순간, 제가 받은 충격이란. 설거지한 물이 하수로
내려가기 전에 음식물을 거르는 곳인데, 수챗구멍도 통과할
정도로 아주 미세하게 분해된 음식물 가루들이 사막의 고운
모래처럼 정화조 아래에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냄새는 그대로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지독했고요. 저는 숨을 참고
그곳을 청소했습니다. 잠시라도 숨을 들이켜면 정신이 아찔해
왔습니다. 정화조의 물을 다 퍼내고 가장 아래 있는 고운
음식물들을 다 긁어냈습니다.
네. 다시 하라고 하면 다음 생에나 가능할 것이라고 하겠지만,
그때는 죄책감이 저를 움직였습니다. 명상센터에 있으면서
모른 척하고 흘려보낸 물 생각에 마음이 늘 무거웠기
때문이에요. 전 이 정도 거리만도 견디기 힘든 악취인데,
이게 어느 물속 생물 그들 집으로 흘러간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못
본 척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 물을 내가 마신다면, 이 물로
내가 샤워한다면, 이 물에서 잠을 잔다면……. 불쾌한 수준이
아니라 죽을 수도 있는 악취였으니까요. 얼굴도 모르는 그
물속 생물들이 뻐끔뻐끔 제게 말을 거는 것 같은 환청
이후엔, 손이 절로 움직였습니다. 수영 선수처럼 그토록 숨을
오래 참은 것도 처음이었답니다.
어느 모로 보아도 욕본 것은 맞지만, 그날 두 시간 남짓한
청소로 한 달을 몸져누운 것은 과하지 않나, 싶습니다. 저는
본래 육신이 건강한 편은 아니어도, 제 평생 그 지경으로
아파 본 적은 없었습니다. 심지어 이때 병은 단순한 위장
문제로 설명되지 않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마사지 치료도,
내과 양약도, 단식 치료도 효과가 없었고, ‘요상한’ 무당
한의사가 준 기병 치료제만 말을 들었으니까요.
믿거나 말거나, 저는 그 고통이 물속 생물들이 내게 선물한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한 말로 표현해 보자면,
그 정화조에 깃든 물속 생물들의 한 같은 것이 제게
붙었다고도 느껴졌어요. 무려 한 달간 금식으로 갚았어야 할
어떤 마음들이었다고요.
투명한 거미줄
제가 언제부터 벽에다 대고도 인사를 하는 사람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기병을 앓은 이후 제 삼의 눈이라도 열린
것은 아니겠으나, 세상을 적어도 눈으로만 보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명상하는 동안에는 아무리 졸려도 눈을 뜨지
않습니다. 눈을 내내 감는 것은 답답한 어둠 속에 저를
가두는 일처럼 느껴졌으나, 반대로 그 아무것도 없는 칠흑
속에서 제 생각과 감정이 쉬지도 않고 팔딱거리는 것을
깨닫게 하는 장치가 되기도 했습니다. 저는 혼자서 과거의
일을 떠올리면서 후회하다가, 미래의 일을 상상하면서
불안하다가, 미워하는 이를 떠올리면서 씩씩대다가, 사랑하는
이를 떠올리면서 애틋합니다. 그러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오직
현재인 내 숨에 집중하면 진정한 쉼이 찾아옵니다. 가능한
모든 물질적 자극을 차단한 어두운 골방에서조차, 저는 자신을
천국으로 데려갈 수도 있고 지옥으로 떨어뜨릴 수도 있었어요.
명상하면서 저는 엄마의 말을 몸으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엔 결국 나 혼자뿐이라는 말. 제가 바라보는 대로 세상은
펼쳐지고, 행복도 고통도 모두 제 속에서 피었다 지는
것이라는 말도. 저는 세상이 놀랍도록 공평하다고 느꼈고,
믿기 어려울 만큼 편안해졌습니다. 삶에서 물질적 조건은
중요치 않았어요. 진짜 행복은 어차피 마음에 달린 것이니 말입니다.
얼마나 더 검소한 조건에서, 얼마나 더 풍요로운
행복을 내면에서 만들어 낼 수 있느냐가 제 삶에서 가장
중요해졌습니다.
느끼한 드라마 대사처럼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라면 우린 모두 독립된 개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러하지 않은 것 같단 말입니다. 저와 물속 생물은 몇
킬로나 떨어져 있었는데, 제 손을 움직여 정화조를 청소한
것은 그들이었으니까요. 눈을 감고 상상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투명한 거미줄로 연결돼 있다고요. 어느 것도 나와
무관한 것이 없고, 내가 아닌 것도 없다고요. 그럼 남보다
돈을 많이 벌 필요도, 더 아름다운 외모를 가질 필요도, 더
안락한 집이나 맛있는 음식을 먹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나’이니 말입니다. 우리 집 쓰레기를 남의 집 앞에 버릴 것도
없습니다. 모두가 ‘내 집’이니까요. 제가 살면서 버린 과자
봉지들이 아직도 태평양에 떠다니고 있겠지만, 태평양도 결국
내 집이라는 걸 알아차린다면요. 눈을 뜨면, 투명한 거미줄
같은 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느낄 수 있습니다.
제 상상이 영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작은 텃밭이나 집 근처의 지리산 둘레길을 걷다 보면
명상하는 존재를 많이 만납니다. 오직 지금 여기에만 존재하는
이들. 고양이나 귀뚜라미나 딸기나 호박이나 바위나 바람이 그렇습니다.
대부분 존재가 제 스승처럼 여겨지면서 자연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상냥하게 인사를 하거나 호명하기도
합니다. 텃밭 생물의 이름표에도 ‘토마토님’, ‘상추님’ 등
존칭을 써 두는 식으로요. 그들을 헤아릴 때도 ‘곱등이 한
마리’나 ‘옥수수 한 개’라는 단위보다는 ‘한 명’으로 셉니다.
다 똑같이 ‘목숨 명命’ 자를 사용하는 것이에요. 다른 사람이
보면 영 쑥스러워서 혼자 있을 때만 합니다. 바람이나 물에도
존대하다 보니, 문득 공기나 어떤 기운도 마찬가지로 존중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어요. 방문을 세게 닫으면 작은 곤충도
놀라지만, 보이지 않는 존재들도 놀랄 것입니다. 핸드폰에도
어떤 정령이 붙어서 쉴 수도 있으니 조심스레 내려놓아야
하고요. 누군가 마구 짜증을 내거나 투덜대면, 옆에 있던
사람도 그 파장이 전달되어 덩달아 불쾌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혼자서도 부정성이 올라올 때 분출하기보다는
정화하려 애씁니다. 제 주위의 존재가 함께 불쾌해지지 않도록
예의를 차리는 것이지요.
이렇게 말하고 나니 제가 득도한 양 공갈하는 기분이라 영
찜찜하긴 합니다. 제가 엄마를 사랑하고 섬긴다고 해서 늘
효녀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는 못하듯, 만물을 섬기긴 하되
부족한 점은 늘 많아요. 특히 혼자가 아닐 때 더욱
그렇습니다. 혼자일 때는 저보다 작거나 말이 없거나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훨씬 잘 느껴지지만, 여러 사람과 함께일 때는
잘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 동물이 너무 커서
그러려나 싶긴 합니다.
한 가지 그럴듯한 이유를 찾았다면, 영성가 에크하르트 톨레의
책에서였습니다. 인간이 꽃과 새를 보면서 유독 진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꽃과 새는 물질이 유약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톨레는 말합니다. “식물에서 나왔지만, 그
식물보다 더 덧없고, 더 여리며, 더 섬세한 꽃은 물질적인
형상의 세계와 형상 없는 세계를 잇는 다리가
된다.” 물질성이 단단하고 강할수록 영적인 힘이 약해지고,
반면 곧 사라지는 것엔 영적인 힘이 부각된다고요.
제가 추리하건대, 어린이들이 그토록 맑은 영혼을 가진 것도,
육신이 병들고 늙을수록 지혜가 생기는 것도 같은 원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명상할 때 숨에 집중하는 것도 숨은 제
육신을 이루는 것 중 가장 희미한 물질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와 부처나 테레사 수녀가 어느 것도 소유하지 않고도
충만한 삶을 살다 간 까닭 역시 물질을 버릴수록 영적인 힘이
강해진다는 걸 알아서였을 테죠. 저에게 역대급 고통을
가져다준 기병도, 육신을 약하게 해서 영적인 어떤 깨달음을
전달하기 위함이었을 겁니다.
결국 전 제 삶과 대화하는 것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저를 이
지구에 초대한 ‘내 삶’에 대해서, 신이 있다면 삶이 바로
그것이라고 여기면서. 어떤 우연도 우연이 아니라고 믿게
되었고, 삶이 제게 보여 주는 어떤 만남과 사건이든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해 배움을 찾았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아빠의 딸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면 상대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가 굳이
말하지 않는 마음도 들으려 하고, 보이지 않는 상처도
끌어안으려 합니다. 그 마음을 지구 전체로 확장한다면,
세상에 보이거나 들리지 않아도 느끼는 것들이 있다고 믿어
본다면, 삶은 하나의 신비가 됩니다. 삶에는 매 순간 상상하지
못할 다채로운 방식으로 말을 걸어 오는 신비로움이 분명히
있다고요. 아빠는 ‘나이 들면 딸은 어차피 엄마 편’이라며
볼멘소리를 하시곤 했지만, 저는 ‘딸’이어서 엄마 같은 성질을
지니게 된 게 아닙니다. 전 아주 어릴 적부터 안방의
서재에서 박정희 평전이 아니라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를
꺼내 들던 아이였어요. 저 스스로 인지하기도 전부터 제 삶은
저를 한 방향으로 이끌어 왔습니다.
제가 상극인 엄마와 아빠를 만난 것도, ‘없어 보이지 않는
딸’이었다가 ‘남자인 척하는 여자’가 된 것도, 삶이 저를 이끈
완벽한 커리큘럼이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여기서 저를 향한
아빠의 오해를 풀자면, 저는 남자 행세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남자 행세’는 덜 귀찮고 돈도 아껴서
좋긴 했지만요. 제 삶이 가르쳐 준 게 ‘남자 행세는 편리하다!’
정도라고 여기면 삶이 조금 언짢아하실 것도 같습니다. 삶은
제게 신인데요? 신이면 더 본질적인 가르침을 주셨을 겁니다.
저는 자신을 정교한 칼로 다듬으면서, 오로지 군더더기 없는
‘나’만 남기고 싶었습니다. 어색한 까까머리의 거울 속 나를
보면서 신에게 물었어요. “나 누구예요?”라고요. 삶은 제가
매일 얼굴에 덧바르다 하수로 흘려보낸 화장품이나 그것들로
색칠된 제 얼굴이 ‘나’가 아니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제 지갑
속 형편도, 제 능력을 향한 평판이나 학교에서의 성적표, 그
어느 것도 ‘나’가 아니라고 알려 주었어요. 그리고 동시에
화장품 안전 검증 실험에 동원된 토끼나, 화장품 때문에
오염된 물에서 살게 된 물속 생물은 결국 ‘나’라고 알려
주었고, 저를 비웃거나 평가했고 그래서 제가 증오하던 사람들
역시 ‘나’라고 했습니다.
물 한 양동이로 아끼고 아껴서 샤워하다 보면, 오줌 한 번
싸고 13리터의 물을 낭비하는 사람들에 경악하게 됩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저도 수세식 변기 레버를 아무 망설임
없이 눌렀음을 깜빡 잊어버리고요. 저는 백화점의 호화로움이,
어떤 존재의 핏자국을 지우고 화려하게 치장된 금이나 가죽
따위가 미울 때가 많습니다. 그걸 다달이 열심히 소비하는
아빠 같은 사람들마저 밉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눈을 감아야 합니다.
투명한 거미줄이 보이도록요.
어둠 속에서 곰곰이 고민합니다. 삶이 제게 다른 누구도 아닌
백화점광 호모포비아 아빠를 선물한 이유를. 그런 아빠에게
저의 모든 연약하던 시절을 맡겨 저를 숨 쉬게 하고, 제가
지구에 온 순간부터 아빠에게 빚을 지게 한 얄궂은 진실을.
다시 천천히 눈을 뜨고 나면, 제가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살인 협박 속의 두려움이나, 고약한 정화조
속에 담긴 한이나, 핸드폰에 매달린 정령의 쉼 같은, 가장
여린 마음을 느낄 수 있기를 말입니다. 삶은 제가 아빠를
비롯해 세상의 모든 백화점광을 사랑하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과 다르지 않은 저 자신을 스스로 사랑하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빠가 올해는 용돈을 ‘턱’ 보내셨습니다. 백화점에서 옷 한
벌 사 입히지 못하는 딸을 두고 몇 년을 헤매시더니 결국
돈이라도 주고 싶으셨나 봅니다. ‘네가 필요한 게 뭔지 당최
모르겠으니 알아서 사라’며 무뚝뚝하게 건네시더군요. 자식
노릇보다는 중노릇에 더 재능 있는 딸이 뭐가 그리 예쁘다고
이러시는지 눈물이 핑 돌았답니다. 평소보다 한 자릿수가
늘어난 통장 잔고를 보며, 제가 돈으로 하는 일이라고는 환경
운동밖에 없다는 걸 떠올립니다. 아빠가 본의 아니게 ‘홍석천
같은 놈’에게 용돈도 주시고, 환경 운동 후원도 하게 된
아이러니를 떠올립니다. 딸을 그토록 사랑하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도 떠올려 보고요.
아무리 미워도 아빠는 역시 저보다
사랑에 대해 많이 아시니까요. 아빠만큼만 제가 사랑을 배우게
되기를 바랍니다.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인디언들은 바구니를 만들려고
삼나무껍질을 벗길 때면, 나무를 향해 노래를 바치고 허락을
구했답니다. ‘너에게는 쓸모없는 것이 하나도 없다. 나를 부디
가엽게 여기고 너의 옷을 달라’고 말입니다. 저도 이렇게 제
글을 책에 보태게 됐는데요. 제 말이 글이 되도록 해 준
존재들에게 가장 먼저 편지가 가닿으면 좋겠습니다. 지리산은
겨울만 되면 산등성이 한 편이 훤해지도록 나무가 베어집니다.
비울 때를 놓친 휴지통이 넘치듯, 몸통만 남은 나무들이
마구잡이로 쌓이고 구릅니다. 이 종이는 어느 나무에서 왔을까
헤아려 보면서, 그 나무를 먹여 살린 물과 바람과 새들마저
그려 봅니다. 당신들이라면 제 몸을 깎아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을까 고민하면서 편지글을 채웁니다. ‘나’도 결국
당신들이니까 제가 그런 고민을 감히 대신해도 되겠지요.
해가 떠오르는 동쪽을 향해 한 번, 물줄기가 흘러가는 남쪽을
향해 한 번, 집 뒤편에 서 계시는 지리산을 향해 한 번. 절과
합장.
입맞춤을 담아 칩코 드림.
◌ 칩코 ◌
8살. 죽는 상상을 처음 했다. 죽는 상상도 못 하도록 영영
사라지는 것이 죽음일까 봐 엉엉 울었다. 무척이나 살고 싶던
사람이었다. ‘나의 목숨’을 ‘나’라고 여겼다.
14살. 학교 성적이 좋았다. 동시에 외모에 관심이 많았다. ‘예쁜데
공부도 잘하는’ 타이틀을 놓치고 싶지 않던 사람이었다. ‘나의
성적과 외모’를 ‘나’라고 여겼다.
19살. 학교 성적이 떨어졌다. 하루 14시간을 학교에서 보내는 것을
지옥이라고 생각했다. 도서관에서 책만 읽으며 다독상
문화상품권이나 챙기는 것을 좋아했다.
‘나의 지식’을 ‘나’라고 여겼다.
20살. 국문과에 갔는데 천국이었다. 책만 읽었는데 성적이 좋을 수
있는 게 국문과였다. 정말 공부가 재밌어서 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외모를 향한 관심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예쁜데 공부도 잘하는’
타이틀에 다시 욕심을 냈다. ‘나의 지식과 외모’를 ‘나’라고 여겼다.
22살. 책을 열심히 읽다가 환경운동에 열정을 갖게 됐다. 외모에
쏟던 노력을 과감하게 철수하고 머리를 싹둑 잘랐다.
‘환경운동’을 ‘나’라고 여겼다.
25살. 살다 보니 빡빡머리의 타투가 많은 강경 환경운동가가 돼
있었다. 동물과 식물과 곤충은 사랑했는데 낭비가 심하고 돈 욕심
많은 인간은 도저히 사랑하지 못했다.
‘쟤보단 나은 인간’이 ‘나’라고 여겼다.
26살. ‘쟤’들이 늘어나면서 마음이 힘들어졌다. 명상을 시작했고
지리산으로 향했다. 지리산에 생전 받아보지 못한 사랑과 겸손을
배웠다. ‘쟤를 사랑하고 싶은 인간’이 ‘나’라고 여겼다.
29살. 아침에 토마토를 먹고 토마토와 하나가 된 사람. 내가
내뱉은 숨을 지리산이 들이키는 바람에 지리산과도 하나가 됐다.
하나라고 저절로 조화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요가할 때 팔다리가
따로 노는 것처럼 아직은 지리산과 따로 놀 때도 많다.
‘쟤’가 결국 ‘나’라고 여긴다.
<<벗자편지>> _자급하는 삶을 어렵게 하는 허울을 벗어던지자
• 지은이 : 김혜련, 칩코, 똥폼, 문홍현경, 풀, 상이, 아랑, 김정희
• 펴낸 곳 : 니은기역
• 펴낸 날 : 2022년 11월 22일
• 판형 120*188 / 쪽수 256쪽
• ISBN 979-11-968328-4-1 (033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