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환의 절기 이야기] 상강
안철환(전통농업연구소 대표)
가을을 제대로 느끼기도 전에 상강 추위가 닥치니 곧 겨울이 오는 것만 같습니다. 상강 이틀 전, 일기 예보도 그렇고 일진을 살펴보니 서리가 내릴 것이라는 예감이 강해 서둘러 서리에 약한 애들을 수확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토란, 고구마, 호박, 오이 같이 서리 맞으면 뜨거운 물에 데친 듯 축 늘어져 죽는 놈들에서부터 먹는 데에는 큰 문제 없으나 씨앗으로 쓰려면 서리 맞지 않는 게 좋은 생강, 벼, 조, 수수를 서둘러 거뒀습니다. 너무 정신이 없어 고구마 일부는 그냥 낫으로 줄거리만 거둬버렸지요. 줄거리만 제거해주어도 땅 속 고구마 열매에게는 별 문제 없거든요.
제가 심는 벼는 앉은뱅이라는 토종 벼로 키가 작아 그리 이름 붙여졌는데 이게 조생종에 가까워 밀과 이모작하기 딱 좋습니다. 정신은 없죠. 벼 수확하자마자 바로 밀 심어야 되고 봄엔 밀 수확하자마자 바로 물을 대서 써레질 하고 벼 모내기를 해야 하거든요.
올해는 서리나 추위가 일찍 올 것이라 봤습니다. 절기로 소서 즈음 개화하는 무궁화 꽃이 피면 100일 뒤 서리가 내린다 했는데 올해는 무궁화 꽃이 열흘은 일찍 개화했기 때문이었어요. 게다가 중복과 말복 사이가 보통은 스므날인데 올해는 열흘밖에 안되어 서리나 추위가 일찍 오겠구나 했지요. 더군다나 윤6월로 음력으로는 여름이 넉달인데다 동지는 음력 11월초에 드는 애동지라 여름은 길고 겨울은 빨리 와 가을이 짧을 수밖에요. 그런 같잖은 가을조차 비가 장마처럼 끊이지 않았으니 겨울은 오히려 가물까 걱정입니다.
사실 저는 기후위기나 기후변화라는 말을 잘 쓰지 않습니다. 그걸 믿지 않는 게 아니라 괜히 사람의 잘못을 하늘 탓하는 것 같아서 그래요. 기후변화는 분명히 진행 중이며 이번 기후변화는 특히 더 클 것이라 봅니다. 지구 차원에서 주기적으로 오는 기후변화이지만 이번엔 인간의 잘못이 더해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기후위기, 곧 탄소와 온실가스를 제일 많이 배출하는 주범은 산업현장일 겁니다. 특히 에너지와 자재에서 문제가 많이 발생하지요. 그런데 근본을 더 따져 들어가면 과소비 문화가 있어요, 소비를 부추겨야 산업과 경제가 발전할테니요. 그러니까 필요한 소비보다는 요즘 말로 가스 라이팅 된 소비, 즉 부추겨진 소비가 훨씬 클 거라는 거지요.
그렇게 해서 너무 일상이 되고 만 일회용 용기들, 과도한 청결주의가 빚은 물낭비 문화, 여름은 겨울처럼 겨울은 여름처럼 지내는 에너지 낭비문화, 얼마든지 재활용해 쓸 수 있는 것들을 쓰레기로 버리는 비순환 문화 등에서부터 기후위기를 근본에서부터 방어해야 하는 농사에서도 기후위기 재촉하는 문화가 일상화된지 이미 오래입니다.
이런 과소비 문화를 개선하지 않고서 재생에너지를 확대한다 한들 문제가 해결될까요? 탄소중립도 불가능한 얘기이지요. 그러니까 다른 한쪽에선 탄소제로이자 청정에너지인 원자력 발전을 늘리자 하지만 자칫 한방에 모두가 끝날 수 있어요.
그러면서도 AI니 스마트팜 등을 얘기하는 걸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네요. 물론 불가피한 면은 있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부작용은 애써 외면해요. 근본 문제도 살펴봐야 하는데 그럴 시간이 없다고 또 회피해요. 선진국이 되면 뭐합니까? 세계 최고 자살율, 밑바닥 맴도는 행복지수, OECD 국가 중 탄소 제일 많이 배출하는 기후악당 국가라는 데 말이죠.
주제넘은 얘기를 했나요?
서리 피해 볼까 봐 정신없이 서둘렀지만 막상 서리는 오지 않았어요. 걱정했던 상강 이틀 전에도, 상강인 오늘도 그냥 지나갔지요. 그렇지만 아침 날씨는 무척 쌀쌀했답니다. 서리는 내리지 않았지만 서리 내리기에 딱 맞는 추위였어요. 뉴스를 보니 중부 내륙지방에는 서리가 내렸다는군요.
서리가 오지 않을 수도 있는데 괜히 호들갑 떠는 거 아니냐고들 합니다. 그런데 이런 철에는 호들갑 떨지 않았다간 큰 코 다치기 십상입니다. 언제 서리가 내릴지, 언제 첫 얼음이 얼지 잘 살펴보고 행동은 아주 민첩해야 합니다. 오죽하면 이 철에는 “도둑질하듯 농사짓는다”했겠어요. 거두고 동시에 심고 하는 게 정신이 없어요. 논에서 벼 수확하자마자 밀 심었지요, 모종 키우던 양파도 추위 오기 전에 뿌리 내리라고 서둘러 심었지요, 어제 그제는 보리, 호밀도 심었어요. 사실 보리, 호밀은 먹으려고 심은 게 아니라 종자 보존 차원에서 심었습니다. 꼭 씨앗 찾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서리 오기 전에 오이 노각 거둔 것과 냉장고에 넣어둔 수박 꺼내 속은 먹고 속껍질로 깍두기 김치도 담갔습니다. 고구마 거두고 난 마지막 줄거리는 장모님이 가져가셔서 김치 담가 주신다니 또 군침이 넘어갑니다.
오늘은 주아마늘 심을 밭을 갈았습니다. 들깨 거두고 남은 들깨 밑그루들 빼내고 풀 제거하며 두둑과 골을 내었지요. 들깨 둥지를 제거하는데 시간이 좀 걸려 아내 손도 빌렸어요. 마늘주아는 일종의 종자입니다. 사실 우리나라 마늘은 꽃을 피우지 않아요. 오랜 세월 주아만 갖고 재배하다보니 꽃이 퇴화되었답니다. 그래서 육종하려면 마늘 원산지인 이집트나 중앙아시아엘 가서 해야 한다네요. 거기는 꽃을 피우니까요.
주아마늘 심고 나면 먹을 마늘을 위해 씨마늘 밭도 정신없이 만들어야 합니다. 이제 날은 점점 추워질테니 정말 도둑질이 따로 없습니다.
단풍 익을 틈도 없이 추워지면 단풍이 예쁘지 않은 건 둘째치고 낙엽수 이파리들이 털켜를 만들지 못하고 겨울을 맞이할 수 있어요. 그러면 이파리들을 그대로 매단 채 겨울을 나다 산불의 원인이 될 수 있지요. 몇 해전 그런 적이 있었는데 다행이 겨울에 비가 많이 와 산불은 나지 않았습니다. 그와 달리 제 걱정대로 올 겨울이 가물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을 겁니다. 산불에 대비해 신중하게 숲을 가꾸고 관리한 조상들의 지혜가 다시 생각납니다. 돈이 되든, 경관에 좋든 그저 몇 가지 종류의 나무만 심어버리는 조경 문화가 안타깝지요,
상강이야말로 제대로 된 수확철입니다. 그래서인지 앞의 한로에서 얘기했듯이 상강에 가까운 음력 9월 9일을 명절로 해서 축제를 즐겼습니다. 중구절이 지금까지 이어지지 않은 걸 보면 곧 닥칠 겨울을 대비해야 할 일이 많아 여유있게 축제를 벌일 틈이 없어서인것 같습니다. 우리를 늘 음주가무를 즐긴 민족이라 한 말을 볼 때마다 우리는 축제가 필요없는 사람들이었겠다 상상하곤 했습니다. 아는 건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건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 말처럼 일을 즐길 수 있다면 일은 또 다른 축제나 마찬가지 아닐까요?
지난 토요일 친구들이 달려 와 벼 탈곡을 도와주었는데 막걸리 먹으며 일하고 일 끝내곤 저녁에 쐬주 한잔과 삼겹살을 즐기니 축제가 따로 없더이다.
글을 쓴 안철환 선생은 온순환협동조합, 전통농업연구소 대표이고 경기도 안산에서 ‘산림생태텃밭 먹거리숲 농장’을 운영한다. 남은 음식물과 똥오줌, 커피 찌꺼기를 받아 직접 거름 만들기를 실천하고 있으며, 우리 토종 종자와 전통 농업 살리기에 열중하고 있다.
25년 전, 처음으로 심은 배추 씨가 3일 만에 싹 트는 걸 보고 ‘씨 안에 누가 있었구나!’ 깨닫고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우리가 먹는 배추는 단순히 물질적인 먹을거리가 아니라 나와 별 차이 없는 생명이며, 그래서 먹는다는 것은 생명을 먹고, 생명과 소통하고, 생명과 하나 되는 일이라고 믿는다.
쓴 책으로 《시골똥 서울똥》(2009), 《24절기와 농부의 달력》(2011), 《호미 한자루 농법》(2016), 《토종농법의 시작》(2020)이 있고, 옮긴 책으로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2004)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