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11-17(월)
 

학생운동에서 생태운동까지. 민영권 위원장의 생애 운동_1

산청에서 태어나 다시 산청으로 돌아오기까지

 

 

 

민영권 위원장은 활짝 웃으면 마냥 푸근한 얼굴이다. 껄껄껄 웃는 얼굴은, 하지만 이야기를 조금만 해보면 날카로움이 비어져 나온다. 특히 투쟁과 관련해서 그의 입장은 명확하다.

액션을 취하지 않으면 바뀌는 건 없다.’

그는 정치적 실천가이고, 어떤 운동을 하든 간에 현장에서 함께 한다는 입장은 평생을 고수해왔다. 오늘 이야기 나눈 사람, 민영권 위원장은 현재 산청에 살고 있으며 산청난개발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다.

1편에는 그가 산청에 다시 돌아오기까지의 이야기, 2편에는 산청에 돌아온 이후의 이야기를 풀어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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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촬영: 김인호 님)

 

민영권 위원장은 산청에서 태어나, 진주에서 초중학교를 나오고 고등학교, 대학교는 서울로 갔다. 그는 고등학생때부터 운동을 시작했다. 일명 독서 써클이라 불리는 동아리에 들어갔고, 대학생 선배들을 따라 다니며 ‘5.18의 실상을 알리는 전단지를 돌렸다. 1980, 그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고 시대의 아픔을 모른척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정치의식이나 사회를 바라보는 눈이 그때 생긴 것 같다고 회상한다. 대학에 가서 자연스럽게 학생운동을 했는데, 중간에 녹화사업으로 징집을 당했다. 녹화사업은 1980년대 초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 국가권력이 주도한 강제 전향사상통제 정책이었다. 전국 대학가의 학생운동을 용공(공산주의적)’으로 규정하고 고문, 협박, 강제 병역, 낙인의 폭력을 가했다. 이 사건으로 피해자들은 평생의 트라우마를 얻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민 위원장은 이 시기를 고초를 겪었다고 짧게 표현했지만, 그 실상은 참혹하다. 민 위원장 역시 매일 상세하게 진술서를 쓰길 강요당했고, 물리적 폭력을 겪었다. 군대 생활을 끝내고 학교를 돌아오니 1986년 건국대 10.28 사건(항쟁)이 일어났다. 민 위원장은 대학에 다닐 당시 이른바 지하서클에서 의식화 교육을 담당하는 선배였다. 그 서클에는 일명 애학투(애국학생투쟁위원회) 후배들이 있었다. (더 많은 내용은 ‘1028 건국대학교 사건을 찾아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제대하는 날 남산 안기부에 바로 끌려갔다. 누구누구 아느냐, 애들을 더 고자질해라, 밀고하라고 프락치를 강요받았다. 심지어 학교에 가면 감시자들이 따라오고, 그의 일거수 일투족 모두 감시받는 것 같았다. 그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부모님의 걱정이 짙어지니 방법이 없었다. 집을 가출해서 잠적하는 수밖에는.

 

 

<학생운동에서 노동현장으로>

1988, 그는 인천의 한 목재공장으로 향했다. 당시 인천은 목재 수입과 가구 제조업이 호황을 누리며 인력이 부족했다. 동아리 선배들이 위장 취업해 일하고 있던 그곳에서, 그는 본격적인 노동현장에 뛰어 들었다. 인천 서구 석남동에 있는 R목재공장. 아침 일찍 눈을 떠 합판을 자르는 것을 시작으로 온종일 몸으로 일을 했고, 철야 작업이 많으면 야간까지 일했다. 그 당시 민 위원장은 가장 밥 많이 먹는 애로 유명했다고 회상한다.

내가 공장에서 가장 밥 많이 먹는 애로 유명했어요. 너무 배가 고팠어요. 밥을 해 먹을 여유도 없었고요, 그 당시 가구공장은 장사가 호황이라 한 달에 20일은 철야를 했거든요. 철야 라는 게 새벽 4시까지 하는 일을 말해요. 집에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여유가 없으니 우리 같은 경우는 공장 구석에서 스티로폼 깔고 잤어요. 한 달에 스무날 정도 철야를 했고 또 나머지 날은 노조 결성하자고 다른 동료 노동자들하고 술 한잔하면서 이야기도 해야 하니까. 몸이 다 망가졌어요. 하루는 급성 간염이 왔어요. 아침에 일어났는데 눈이 안 보이더라고요. 너무 과로한 거죠. 급성 간염도 오고 신장병도 왔어요. 몸이 퉁퉁 붓더라고요. 그때 얻은 병으로 학원을 하면서도 건강은 계속 안 좋았죠.”

 

당시 학생운동을 하다가 위장 취업한 학생들은 노동자들과 접점을 만들었고, 노동현장에서 작업조건노조결성과 같은 현장 투쟁을 조직하고 이어갔다. 당시 많은 노동자는 근로기준법조차 알기 어려웠다. ‘노동법 해설’, ‘근로기준법 읽기등과 같은 자체 교재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구술자료에 따르면 한 인천 위장 취업 운동가는 이렇게 증언한다. “우리는 노동자들에게 월급이 왜 이렇게 적을까?’, ‘산재가 나면 누가 책임질까?’ 이런 질문에서부터 시작했죠.” 민 위원장 역시 공장 노동과 노동운동을 2년 반 이어갔다.

 

당시 민 위원장이 휴학한 학교는 학생운동을 했던 학생들에게 관대했던 학교였기에 복학하려는 운동권 학생에게 100% 장학금을 주었다고 한다. 민 위원장 역시 그 물결 속에 다시 복학한다. 복학 후 졸업하려 보니, 11년 만이었다. 자연과학을 전공했기에 수학 교사로 일을 시작했지만 재단 비리 일을 알게 되어 재단하고 싸우다가 1년 만에 교사직을 내려놓게 되었다. 인생의 절반을 투쟁해온 그에게, 크든 작든 부당함은 드러내야 하는 것이었다. 그 후에는 학원 강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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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촬영: 김인호 님) 

 

<노동운동을 뒷받침하다>

학원 일을 배우며 강사로 활동한 뒤 영등포에 그는 직접 학원을 차린다. 당시에 현장에 남아서 활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역할분담을 통해 돈을 벌어 활동가 자금 지원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민 위원장은 당시 학원을 시작했고, 지속적이고 실질적인 활동을 위해 자금 지원을 하기로 한다. 민 위원장이 1999년 시작한 영등포 전망학원1년 반 만에 600명의 학생이 다닐 정도로 대형 학원으로 성장했다. 학원 선생님도 무려 20명 가까이 됐다. 학원은 더군다나 경기나 입시 흐름을 많이 타기 때문에 간판도 자주 바꾸고 콘셉트도 바뀌는데 그는 한자리에서만 20년을 해온 것이다. 그는 그가 얼마나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일했는지 느껴진다.

학원 생활이라는 게 남들하고 거꾸로 살아요. 밤새워 일하고요. 영업시간 제한이 없으므로 새벽 1~2시까지 가르쳤고, 그 후에는 너무 배고프니까 고기랑 술 잔뜩 먹고 새벽에 집에 가서 자고 그 생활을 20년을 한 거예요. 그래서 또 몸이 망가졌죠. 공장 다니면서 얻었던 병 때문에 꾸준히 병원에 다녔어야 했어요. 피를 걸러내는 일종의 투석입니다. 정기적으로 해야 했고요. 그렇게 병원을 다니다 보니 췌장이 망가진 걸 알게 됐어요. 운이 좋았어요, 췌장암이라는 걸 일찍 발견했어요. 췌장암은 아시다시피 예후가 몹시 나쁜 암인데. 게다가 전이가 잘 되는 몸통 부위에 발병했는데 운이 좋아서 살았습니다.”

 

그렇게 20년 동안 운영해왔던 학원을 2019년에 접고 항암치료 후에 산청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그의 운동관에도 변화가 생겼다.

 

대기업 주류의 노동운동은 제 생각과는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계급으로서의 노동자 의식 이런 부분을 기대하기 힘들어졌어요. 계급의 변혁이나 혁명이 무장해제됐다고 해야 하나.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면 이제 어떤 운동이 필요하나 싶었던 거지요.”

2010년대 초반, 그는 녹색평론을 접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갈등이 첨예한 시기 생태 운동은 한가한 운동으로 치부되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녹색평론에서 나오는 생태 이야기는 자본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하는 의제와 연결되어 있었고, 김종철 선생의 이야기에는 울림이 있었다. 그는 녹색당 당원으로 가입하고 당원모임에 나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여전한 목마름이 있었다. 서울에서 이뤄지는 당원모임의 한계였을까, ‘현장과 어떻게 연대할 것인가하는 실천적 액션이 아쉬웠다고 그는 회상한다. 그 런 와중에 암을 발견했고, 모든 걸 다 접었다. 항암치료 이후 요양차 다시 고향 산청을 찾게 되었다. 분명 처음 귀향하는 이유는 요양이었다. 그 외에는 아무런 계획도 없었다.

 

 

 

(후에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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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의 사람책] 산청으로 돌아온 민영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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