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12-05(금)
 

  가장 낮은 곳으로 향한 사람 

 

성심원 원장 엄삼용 알로이시오와의 만남

 

 

사람들에게 왜 이곳에 와 사느냐고 물으면 지리산이 거기에 있어 왔노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거기에 있어 와 보니, 여기에 지리산이 있는 사람도 있다. 성심원 원장인 엄삼용 알로이시오가 그런 사람이다.

그는 늘 밖에서 노동복 차림으로 일을 한다. 넓은 성심원 이곳 저것을 고치고, 수리하고, 풀을 뽑고 하는 일과가 종일 계속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심원을 방문했을 때 우연히 마주쳐도 그가 원장 수사라는 것을 알아차리기 어렵다.

그런데 오늘은 정식 수사복 차림으로 카페(성심원 카페 나루터)에 들어섰다. “신부님 뵙게 돼서 기쁩니다”하는 인사에 자신은 신부가 아니라 수사라고, 그렇게 호칭을 정정하면서 ‘예수님’과 ‘사부님이신 프란체스코 성인’을 따라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고자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온 수도자라고 말한다. 그래서 오늘 인터뷰 때는 정식 수사복을 입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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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란체스코와 작은 형제회

 

 

“ 프란체스코 성인은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분이셨어요. 작은 형제로 살고자 하는. 이분의 유언에 보면 ‘우리는 무식하였기에 모든 이에게 복종하였습니다’라는 말이 있거든요. 사실 뭐 많이 배우고 적게 배우고 중요한 게 아니라 작은 형제로. 대중 속에 아울러서 그냥 이렇게 살아가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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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뒤에 있는 이 벽화는 수도사이신 작가분이 제작하신 건데, ‘태양의 찬가’라는 주제로 한 거거든요. 프랑스코 성인의 정신은 ‘만인의 형제’, 그러니까 ‘우주적 형제’입니다. 만인, 만물, 만성. 그리고 여기 보이지만. 태양을 형제라고. 형님인 태양, 누님인 달. 어머니이신 땅. 물, 불. 이런 것들을 크게 인격화하셨습니다. 성인은 ‘광활한 자연 속에서 ‘나란 존재가 정말. 이렇게 미약하고 작다’라는 걸 아마 느끼셨던 것 같아요. 저희 수도회 정식 명칭은 ‘작은 형제회’인데, ‘작다’라는 것은 말하자면, 대자연 앞에서 느끼는 것처럼, 하느님 앞에서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한다. 저흰 가난한 자일 수밖에 없죠. 우리는 한계가 많고 유한하고 사실은 부족함이 많잖아요. 인간일 뿐이기 때문에 가장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그래서 이분은 사제는 안 되셨어요. ‘작은 형제로 살겠다’고 그러셨고 형제들에게도 이 점을 강조하셨지요.”

 

 

성심원 –우린 ‘800년전 이태리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성인’의 제자

 

 

시대를 막론하고 한센인은 가장 혐오스럽고 배척받는 대상이었다. 프란체스코 성인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나환자를 만났는데, ‘정말 몸과 마음이 역겨웠고 도저히 쳐다볼 수 없어’ 피했다. 성인은 한센인들에게서 ‘그 안에 계신, 버림받고 소외받은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한 것’으로 해석하고, 모든 걸 다 버리고 집을 나와 나환자들 곁으로 갔다. 이것이 작은 형제회가 출발하게 된 어떤 모태와 같은 원형이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한센인들과 함께하는 작은 형제들의 삶이 되었다. 성심원은 그런 의미를 가진다.

우리나라는 이제 한센 마지막 세대를 살고 있다. 그래서. 이 시대에 가장 버림받고 소외받은 사람들과 함께해야 된다는 메시지를 늘 생각하게 하는 곳이 바로 성심원이다.

성심원에 ‘한 번 안 와본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한 번만 온 사람은 없다’고 한다. 특히 프란체스칸(프란체스카 성인을 따르는 가족들, 수도자, 사제, 평신도)에게는 성심원이 아주 중요한. 회개 생활의 상징적인 장소가 된다.

“우주 만물을, 자연을 인격적으로 우리가 대하지 않잖아요. 우린 갑과 을의 관계를 이용하고 차지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기는데, 이분은 800년 전에 이미 인격적으로 다 하느님이 주신 피조물로, 나와 똑같이 그 동등한 관계로 보셨던 분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정신에 따르면 종교도 남녀노소, 장애, 비장애 할 것 없이 열린 공동체가 돼야 한다는 거죠.”

성심원은 그런 식으로 만인에게 열린 공간이 되길 바란다. 그리고 이제 공공재로 쓰여지길 지향한다.

“이 곳은 여러분들의 도움과 특히 우리 한샘 어르신들의 애완과 피땀이 들어간 그런 장소이기 때문에, 만인들에게 개방된 공간, 함께 할 수 있는 공간. 같이 갖고 가는 공간이에요.”

 

성심원 원장이 되기까지

 

 

그가 처음 성심원을 접한 것은 직장생활을 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성심원으로 봉사활동을 오고부터였다. 그렇게 접하게 된 성심원에 감동을 받아 여름 휴가 때, 겨울에 이렇게 자주 방문하게 되고, 그러다 수도자 생활을 결심하고, 수도원(프란체스코회)에 들어오게 되었다.

“처음 수도사가 되겠다고 했을 때 집안에서 반대 많이 했죠. 제가 큰아들인데, 아버지한테 얻어맞기도 해보고. 고모는 제사 지내러 집에 왔다가 그 얘기 듣고 졸도해 버리시고, 그런 일들이 있었는데, 반대하니까 왜 역작용이라는 게 있잖아. 고집 피우는 거. 하도 고집을 피우니까, 반대하시던 어머니께서 먼저 허락해주시고, 누나들과 남동생도 찬성해주고, 그래서 들어오게 되었지요. 누나는 ‘너 친구 좋아하고 그러는데, 수도원 생활 견디겠나? 들어갔다 나오겠지’ 아마 그리 생각한 것 같아요” (웃음)

평생 구도자로 하나님만을 섬기며 한센인, 장애인들과 함께 살아가는 삶은 어려운 일이다. 그 또한 7년 정도의 수행 기간 동안 수도원을 나가려고 갈등한 적도 많았다. 가끔은 자신이 없어지기도 했고, 가정을 갖고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내다 보니까 뭐, ‘어쩌다 어른’ 그런 말 있잖아요. 어쩌다가 세월이 이렇게 흐르고, 책임도 이렇게 맡겨져 있는 거예요.”

평범한 듯,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는 그에게서 가장 낮은 데로 내려온 수도자의 쉽지 않은 결정이 느껴진다.

예전에는 자격이 없어도 성심원의 책임을 맡고 일을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자격을 갖춘 사람에게 책임이 주어지는 까닭에, 사회복지를 전공한 그가 부임해 옴으로써 그에게는 천직으로 제2의 성소 같은 곳이 되었다.

30년 전에 다리를 건너 우연히 봉사를 왔던 성심원에, 7년 부원장으로 일을 하였고, 강릉의 장애인 시설에서 일하다, 이제는 다시 성심원에서 원장으로 3년째 일을 하고 있다.

 

원장이라는 책임을 짊어진 수도자

 

 

책임자로서의 막중한 책임과 무게를 이기는 방법을 그는 ‘즐거움’이라고 한다. 어떤 일을 하든지 ‘자신이 즐거워야 한다’고, 여기서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최고 중요하고, ‘즐기면 힘들지 않다’고 말한다.

낮에는 원장으로서 많은 활동을 해야 하기에, 그에게는 새벽 시간이 제일 중요하다. 아침 일찍 그날 미사에 읽게 될 성서를 읽고, 복음 내용을 미리 읽는다. 그리고 기도실(경당)에서 묵상하고 기도를 드린다.

“미사하고 나면 이제 기도를 잃어버리죠.(웃음) 저는 신자들이 너무 시도 때도 없이 막 이러는 거 싫어요. 놀 때는 놀고 밥 먹을 때는 밥 맛있게 먹고, 자꾸 심각한 표정을 짓지 말고, 그게 사람을 은근히 얽매이게 하는 것 같아요. 사고도 -너무 이건 개인적인 거예요.- 기도할 때만 딱 하고 나머지는 그냥 자유롭게 알아서 하느님이 해주시겠지. 이런 걸 믿고 하는 게 중요해요”

1년에 한 번, 일주일 넘게 연피정(관상수도)을 하게 되는데, 거기에 그냥 푹 빠져버리고, 모든 것의 동력과 원천이 되는 힘을 얻는다.

“마음속에 있는 게 말로 나오고, 시각으로 나오고, 그걸 또 보게 되는 것처럼, 모든 것이 마음속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저희는 ‘관상’이라는 말을 이렇게 하는데. 시대 증표도 못 읽으면 기도 헛하는 거죠. 시대가 뭘 원하는지, 앞으로 비전이 뭔지, 이런 것을 보고자 기도하는 거 아니겠어요? 그냥 나 혼자 그러는 게 아니라 이걸 통해서 바라볼 줄 아는 시각을 갖는, 비전을 볼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거죠.”

 

그가 생각하는 비젼-열린 공동체

 

열린 공동체를 지향하는 그는 스스로도 말하듯이 ‘일을 만들어서’ 한다. 성심원 공간이 ‘만인의 유익한 공간’이 되도록, 골프장, 카페를 6월에 개장했다.

“성심원은 약간 고립된 그런 면이 있어요. 또 한센 정착촌이고. 지금도 산청에 계신 분들 중에는 ‘여기 갈 수 있는 곳이냐’고 묻는 분들도 의외로 있더라고요. 그래서 ‘카페가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했죠.”

성심원은 지리산 둘레길 종점이자 시점이다. 지리산 자락에 자리 잡아 경관도 빼어나고, 앞에 강도 흐른다. 그래서 지어진 곳이 성심원 입구의 카페 ’나루터‘이다. 옛사람들이 나루터에서 오가며 사람들을 만났듯이, 이곳이 많은 만남이 이루어지는 나루터 역할을 했으면 하는 원장의 바람이 담긴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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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또한 ‘탈시설’을 추진한다. 장애인들이 사회와 격리돼서 고립된 이곳에서 일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 지역사회로 많이 내보낸다. 장애인들도 처음에는 시설 생활만 하다 나가니 어려워했는데, 이제는 오히려 ‘안 들어오려고 한다’고 한다. 그래서 지역에 많이 내보내고 그들의 일자리와 잠자리도 마련해주어야 하니, 할 일이 더 많아졌다. 살 곳뿐만 아니라 취미생활 여가 생활. 종교 생활 이런 것들도 하나하나 지원해 주어야 한다. 또 중요한 것이 ‘장애인들이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네트워크’여서, 연결해 주고 잘 돌아가도록 코디하는 일들을 하다 보면 일이 아주 많아진다.

 

나루터와 애환

 

초기 성심원이 생길 당시에는 다리가 없어서 나룻배를 타고 건넜다. 나룻배가 세상과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인 셈이다. 그들이 사람들로부터 쫓겨, 배를 타고 강을 건너, 세상과 단절된 지리산 자락으로 숨어들었을 때는 얼마나 많은 애환을 나룻배에 싣고 건넜을지 안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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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을 건너던 마지막 나룻배)

 

“옛날에는 한센인들 가면 학살 당하고 그랬거든요. 여기도 마찬가지였어요. 곡갱이 들고, 삽 들고 쫓아왔던 거지요, 위협하려고요. 쫓아내려고 정착 못하게. 파출소 이런 데서도 묵인하고. 여기는 산이 높고 각도가 있고, 앞에 강이 흐르니까 외부에서 해코지하기가 쉽지 않잖아요. 그래서 여기 지리산에 자리 잡은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낮에는 저 산으로 숨었대요. 쳐들어오니까. 그리고 밤에 내려와 밥 해먹고 쉬다가 해 뜨면 또 도망가는 거예요.

초기에는 이런 생활을 반복하다가 다행히 신부님 수녀님들이 같이 사니까 종교적인 힘도 있었어요. 교회에서 관심도 갖고 그러면서 이 자리에 정착을 하게 된 거죠.“

 

지리산, 어머니의 산

 

지리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그는 지리산은 ‘어머니 산’이라고 대답한다. 그래서 종교 연대도 가능한 거라고.

“실상사하고, 저희하고, 이제 목사님들하고, 동호인들하고 있는데. 이게 다른 데 같으면 안 됐을 거야. 지리산이니까 되는 거야. 그래서 자연은 위대한 거죠. 품어주고. 어머니 산이 있었기 때문에. 종교인들도 어떻게 보면 절대 신념체계인데, 자연스럽게 서로 모이게 되고 나누게 되고, 또 공동선을 위해서 노력하게 됩니다. 자연이 주는 힘인 것 같아요. 그래서 지리산에 깃들어 사는 다양한 분들이 어우러져 좋은 생명평화 공동체가 연결될 수 있다고 봅니다. 신진 세대가 들어와 지리산 종교위원회도 세대교체가 되야 하는데, 그렇게 되도록 저는 명맥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그냥 무슨 일 있을 때 그래도 모일 줄 아는 거예요. 종교인들이 모이고, 큰 힘이 나오지는 않아도 유연한 조직이기 때문에 좋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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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살아가는 모두의 공동체를 위해

 

성심원 현재 한센인은 70명이고 장애를 가지신 분은 50명 정도 된다.

처음부터 장애인을 받으려고 한 건 아니고. 한센 어르신들이 고령화되고 병들면 한센도 중증 장애인이 된다. 따라서 전문 인력이 필요해지고, 24시간 돌봄이 필요하게 된다. 그런데 이분들을 돌볼 수 있는 요양원이 없어, 성심원이 장애인시설로 인가 받아, 24시간 케어가 필요한 어르신들을 돌보게 되었다. 그러다 지역에 중증 지체장애인을 위한 시설도 따로 없어서 성심원에서 장애인들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빌라 가정식으로 된 건물에 가정집처럼 개별적으로 살 수 있는 시설을 늘리고, 침상생활과 케어가 필요한 환자들을 위해, 베란다 설치, 통유리 설치, 넓은 식당 등 시설 개선을 해나가는 방향으로 전환되었으면 해서 건축적 안목이 필요하다’고 건축가의 역할을 강조한다.

앞으로 한센이 점점 줄어들어서 없어진다면 성심원은 앞으로 장애인 시설로 변화할 것인지 물어 보았다.

“아니오. 저는 장애인 시설은 딱 이걸로 됐다고 보고요. 나머지는 저런 공간들을 노인주택이나, 청년 주택이나, 다양하게 마을 공동체를 만들어가야죠, 요즘 의료인들이 들어와서 살고 싶은데 마땅한 거주 공간이 없어요. 그런 식으로 좀 풀어가고, 다양하게 남녀노소 거기에 맞게 구조도 세팅돼야 됩니다. 따라서 건축가가 정말 중요하다고 봐요. 동선이라든지. 제가 최근에 북해도를 다녀왔는데. ‘소통의 공간을 만드는 건축가’가 있다고 그랬고, 제주도 갔을 때 이타민 준(유동용)미술관을 일부러 가봤거든요. 정말 이래서 건축이 중요하구나. 아무 생각 없이 만드는 것과. 인간학적인 고려, 여러 가지를 생각했죠, 이런 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사람은 환경에 지배당하기 때문에, 거기에 세팅돼 버려요. 자연스럽게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존중되면서도, 절묘한 깊이. 그런 것들이 중요하거든요.”

일반인들에게 시설을 내주면 초기 수도원의 정신과 어긋난다고 생각하거나 반대에 부딪힐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해, ‘100 프로 그런 분들로만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이제 한센이나 장애인뿐만 아니라 통합 마인드로 가야 된다’고 대답했다. ‘이주민 중에 집도 절도 없는 분들에게 개방되는 공간처럼 사회에 가장 소외되고 어려운 모든 분들과 함께 해야 한다’고, ‘그것이 초기 프란체스코 정신’이라고.

 

마을과의 연대 그리고 청년

 

그는 의료협동조합과의 연대를 가장 큰 성과로 꼽는다.

의료협동조합과의 인연은 30년 가까이 한방 침구 봉사를 했던 김명철 원장이 ‘의료 협동조합’을 결성할 때 장소 구하기가 어렵자, 선뜻 무상으로 공간을 내주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성심원은 한때는 한센 가족들 600여 명이 살다가 급감하면서–현재 70명/ 평균연령 80세-남는 시설이 생겼다. 처음 의료협동조합이 들어올 때는 ‘한센인들이 사는 마을이라 누가 올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효가가 컸다. 성심원이 긍정적이건 부정적이든 어쨌거나 인지도가 높고, 환경적으로도 접근성이 좋다는 장점이 살아난 것이다.

의료 사업이 들어와 지금은 제일 역점사업이 되었다. 의료 협동조합 안에 건축가, 도시 재생가 등 많은 인재들이 있는 까닭이다. 성심원은 이분들과 마을회의를 하면서 ’마을 공동체 사람살이‘를 만들어 가고 있다.

’장애, 비장애인들이 같이 살아감‘을 추구하는 원장은, 이미 구축된 의료 인프라를 더욱 확장할 계획이다. 내년에 가정의가 들어오면 성심원 내에는 한방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양방도 함께 있게 된다. 또한 성심원 내 100여 명 넘게 숙식도 가능한 센터를 활용하고, 좋은 자연환경을 이용한 산책 공간도 만들어 이를 확장한 힐링 치유마을을 구상 중이다.

또한 마을 공동체에는 무엇보다 청년마을이 중요하다고 알로이시오 원장은 생각한다.

“시골은 어느 마을이나 청년들이 없잖아요, 그런데 산청은 의외로 청년들이나 외지에서 자연이 좋아 오시는 분들이 있는데, 이 귀농 귀촌 청년들이 의외로 자립 구조가 없는가 봐요. 이분들의 조합원이기도 한데,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창고 하나만이라도 좀 비 피할 수 있는 공간이라도 좀 주시면 좋겠다‘고. 같이 회의를 하다가 저는 깜짝 놀랐죠. 아니, 그런 걸 산청군이 아직까지 안 해주고 있어? 못 해주고 있어? 너무 뚜렷한 거죠. 그래서 저희 이제 빈 공간 하나를 일단 쓰라고 해서 목공실은 만들어 놨어요. 지금.”

청년들이 정착을 하려면 자립구조가 우선 되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이 있어도 자신들의 생업들이 없으면 정착이 쉽지 않아진다. 지금은 가끔 모임을 하고, 목공 프로그램을 하는 정도지만, 내년에는 청년들 자립구조를 만들어 주는 일에 박차를 가하려고 한다.

“저희가 논과 밭들도 많고 해서 ‘퍼머 컬처’라든지 좀 다양하게 여기 청년들 또 어린이들 거주 환경도 만들어야 된다고 작년에 세미나를 했지요. 마을 공동체를 만들어가기 위해 이동식주택 이런 것들을 시범적으로라도 구비를 해야 되겠다고”

 

작지만 큰마을 성심원 마을 공동체

 

성심원 상주 인원은 약 200명 정도 된다.

“우리 어르신들하고 장애인분들. 또 저희는 직원 숙소가 안에 있어요. 봉사자들과 장기 봉사자들도 저희가 숙식을 다 해결해드려요. 그리고 저희 수도자들, 저희들하고 또 수녀님들이 있고. 의료 협동조합 외에도 조합원들이 끊임없이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약 200명. 상시적으로 200명 정도면 작은 마을이 아니죠. 그래서 내년 지방선거 앞두고 많이 들 오시죠.(웃음) 의료협동조합 조합원들이 1500명이면 사실은. 어마어마한 규모죠”

“목화장터 밴드에 보면 인원이 지금 몇 천 명, 한 5000명? 큰 시장이에요. 물론 빨리빨리 지나가긴 한데 웬만한 정보나 소통 구조가 이렇게 있기 때문에 괜찮죠.”

“조합을 할 정도면. 나름대로 의식도 있으시고 각자 자기 영역에서 발언권도 있으시고 영향력이 있으신 분들이기 때문에. 뭐 좋은 의미의 정치 세력화도 저는 필요하다고 봐요. 맨날 밑에서 세상이 왜 이래 뭐 해봐야 나만 죽어, 나만 죽고 정서적으로 피폐해지고. 패배주의에 빠지게 되죠.”

마을 회의는 한 달에 두 번, 혹은 세 번 열기도 한다. 한 달에 한 번은 김명철 이사장(의료협동조합 대표)와 박인자(경영 이사) 그리고 산청청년모임 ‘있다’, 성심원 원장, 과장 이렇게 핵심만 모인다, 거기에 더하여 마을 공동체 전문가, 건축가, 행정 쪽 일을 도와주시는 분 등 도움을 주시는 분들이 참여하여 편하게 얘기를 나누는 ‘느슨한 조직’이라고 표현했다.

 

변화와 도전 그리고 난제

 

성심원은 원장, 부원장 그리고 수사 8분이 계신다. 수사들은 각자 책임과 역할이 있다. 원장은 성심원 전체와 시설, 어떤 형제 신부는 교육회관, 교육센터를 맡고 있다. 풍연마트, 카페 책임자, 본당 신앙생활을 맡고 계신 외국 할아버지 신부님. 이렇게 요소요소에서 각자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수사들 외에도 봉사자, 고용직원 들도 함께 역할을 담당하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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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심원 원장이 키를 갖고 있어요. 저죠 말하자면 (웃음) 왜냐하면 리더의 마인드와 비전이 조직을 좌우하기 때문에, 재정과 인력을 관리하는 원장의 마인드가 중요합니다. 전체를 보는 시각이 필요해요. 그리고 미래를 바라보는 시각, 현재의 현실에 가장 이슈되는 것을 보고, 비전을 제시해 주는 게 제일 중요합니다.”

현재 원장으로서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인가’하는 질문을 해보았다.

“어려움은, 저는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서. 크게. 비전에 대한 공유? 뭐 이런 것들? 저는 장애인 쪽 일을 많이 해왔는데. 우리 복지 쪽에서 보면 직원분들이 한센 어르신 케어 지원해 주는데 오랜 세월을 하다 보니까 모든 게 다 그쪽으로 길들여져 있어요. 장애인 같은 경우는 아직 젊고 여러 가지 해야 될 일들이 많고. 그런데 이쪽은 상대적으로 좀 신경이 덜 가고 경험도 좀 부족한 그런 상태였죠. 그래서 아직 장애인 지원에 대해서는 시작 단계라 변화와 혁신을 이해시키고, 직원들과 공감대를 잘 형성하는 거. 그게 제일 중요하겠죠.”

원장이 부임하여 많은 부분들에 변화를 가져왔다. 제도 혁신과 시설 개선에도 주력했다.

“사는 데도 약간의 도전이 필요하다고 봐요. 도전하지 않으면 현상 유지가 아니라 퇴보라고 생각하죠. 자꾸 나아지려고 조금씩 조금씩. 사람들이 변화를 굉장히 두려워하고 힘들어하고 하는 것 때문에 그걸 설득하기가 굉장히 힘들지요, 제가 지금 협회에서 제일 힘들잖아요.(웃음) 제가 중앙협회. 경남협회장이거든요. 중앙협회 이사하고 정책위원장도 했는데. 협회나 천주교도, 신부님들하고 저하고 막 옥신각신하죠. 그런 것 때문에 나보고 ‘탈시설주의자’라고. 제가 망하자는 게 아니고 더 잘해보자고 그런 건데, 모임 현장에서 뭔가 변화가 안 이루어지면 전국 장애인 차별철폐 연대. 박경석 씨나 이런 분들하고도 개인적으로 소통을 해요. 같이 세미나도 해보고 그랬는데 원론적으로는 맞다. 그걸 부인할 수가 없죠. 시민으로 살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방법적으로 현실 여건을 보면서 해야 되는 문제가 있는데. 반대를 위한 반대를 많이 해버리니까. 근데 뭐 시설도 죄는 없어요. 법대로 하는 거니까. 이건 국가 책임성에 관한 문제지.”

 

일상이 어울림 축제가 되는 마을

 

성심원에서 매년 6월에 열리는 어울림 축제(음악회)는 올해로 11년차를 맞이했다.

한센인과 장애인, 봉사자들과 주민 모두가 마음을 나누고 소통하는 축제로, 올해는 특히 3월 산불진화에 애쓴 진화 대원들과 공무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시간도 마련되었다.

장애인분들도 다 나와서 같이 인사 나누고, 참여하여 축제를 치루고 나면 성심원은 한층 더 조용해진다. 축제가 끝나고 나면, 이런 일시적 축제와 소통의 장이 아닌 모두가 함께 어우러지는 마을을 만들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더욱 든다고 한다.

“일상이 축제처럼. 마을을 이루며 살아야지요, 제가 독일의 슈투트가르트를 간 적이 있었는데 거기는 식당이 카페테리아처럼 중앙에 있더라고요. 그냥 장애인들도 그냥 자기 원할 때 와서 밥 먹고 식사하고. 또 방문하시는 분들, 직원들, 그런 분들이 자유롭게 거기서 만나는 거예요. 제가 여기 와서 그런 데를 만들까 했는데, 일단은 카페가 조그맣지만 그런 장소가 되고. 미래적으로는 그렇게 만들고 싶어요. 안에 있는. 따로따로 먹지 말고. 자기 편한 때 와서 식사도 하고 커피도 한잔하고. 소통과 교류의 장이죠”

성심원을 늘 개방된 열린 마을로 만들고 싶은 소망이 ‘청년 마을’로, 그리고 구상 중인 ‘문화예술 마을’로 이어진다. 상시적으로 전시회를 열기 위해 미술관을 유치하거나 경남도립미술관 분관을 둘레길에 설치하거나 하는 등으로 사람들이 찾는 곳으로. 강에서 래프팅하던 사람들이 올라와 쉬어가는 카페(나루터)로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다.

지리산 둘레길 성심원 코스에는 산티아고의 ‘야고보 사도의 순례길’처럼 12기도처와 성상들이 놓여있다. 가톨릭 정체성에 맞게 기도의 장소가 되기도 하고, 카톨릭 그리스도교 문화를 체험하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놓인 것이라고 한다.

 

봉사를 하고 싶다면?

 

‘여기 와서 자원 활동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고, 지금도 오시는 분들이 있다. 그러나 자원봉사 또한 책임성이나 지속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책임감을 갖고 꾸준히 해주는 봉사가 필요하다. 단시간 봉사도 물론 할 일이 많기는 하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봉사하더라도 관리나 일의 책임성 부분이 어렵기 때문에 웬만한 일은 직원들이 해버리게 된다.

성심원에는 장기 봉사자들도 10명 넘게 있다. 그 분들은 요소 요소에서 안정적으로 자신의 맡은 부분을 꾸준히 해 오고 있다. 숙식을 여기서 하면서 한 달 정도가 아니라 1년 이렇게 봉사하게 되면 직책이 주어지게 되는데, 그분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한다.

 

성심원의 바람

 

“이런 작업들은 성심원만의 일은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서로서로 좋아서. 좋고 같이 활용할 수 있고. 같이 만들어가야 힘도 나고 지속 가능하고 발전적으로 될 수가 있으니까 함께 해주셔야 된다고 기대하죠. 우선 종교부터 더 많이 소통 구조를 만들어 소통하고, 공감대를 이루어 같이 만들어 가는 거예요. 일단 의료협동조합이라는 큰 자산이 있고, 지리산 권역의 종교나 실상사도 함께하고 있고. 지리산 권역의 다른 지역들하고도 계속 연계를 해서 같이 해나가길 바랍니다. 이제 큰 힘을 발휘하려면 네트워크가 중요하고, 큰 차원에서 제도화가 필요한 것 같아요. 제도화시키고 교구에서 같이 하게 되면 엄청난 힘이거든요. 지역과 함께하고 지역을 섬기는 종교로 거듭나지 않으면 그냥 자기들만의 종교뿐이 안 되는 거죠”

 

‘성심원의 식구들과 같이 친구가 되어주시고. 성심원을 잘 이용해주면 좋겠다’는, 그래서 ‘더욱 파급력이 큰 공간이 되도록 함께 해주면 좋겠다’는 원장의 말을 끝으로 긴 시간 동안의 인터뷰를 마쳤다.

 ‘모든 것을 품어주는 어머니산’ 지리산을 오가며, 가장 가난한 자들과 함께하신 ‘예수님의 마음(성심)’을 생각하게 될 것 같다. 그리고 가장 낮은 곳으로 향한 사람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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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낮은 곳으로 향한 사람 – 성심원 원장 엄삼용 알로이시오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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