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4-22(수)
 

 

지리산뱀사골탐방안내소 자료집

『그들이 지리산으로 찾아든 까닭』

_빨치산과 토벌부대, 그리고 사람들

 

2008년 5월 10일 지리산국립공원북부사무소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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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인>은 과거 지리산에 깃들었던 빨치산과 이들을 둘러싼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는 기회로

『그들이 지리산으로 찾아든 까닭』의 전문을 총 10회에 걸쳐 싣고자 합니다.

 

연재 순서

➊ [연재를 시작하며] 지리산 소개 + 책을 내며

➋ 빨치산이란 무엇일까요? +지도로 보는 빨치산과 토벌부대 루트

➌ 빨치산이 생겨난 배경은 무엇일까요?-1

➍ 빨치산이 생겨난 배경은 무엇일까요?-2

➎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

➏ 토벌부대는 어떤 활동을 했을까요?

➐ 숙명의 대결, 토벌군 사령관 백선엽

➑ 뱀사골에서 있었던 일-1

➒ 뱀사골에서 있었던 일-2

❿ 뱀사골탐방안내소, 전시관을 열다

 

 

이번 시간은 <➍ 빨치산이 생겨난 배경은 무엇일까요?-2>을 함께 보겠습니다. 


 


 

 

 알립니다.

책 <그들이 지리산으로 찾아든 까닭> 글 가운데 '반란군'이라는 표현처럼,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거나 표현이 적절하지 않은 부분이 더러 있습니다. <지리산인>의 역사 인식과 다른 점이 있음에도, 빨치산에 대한 역사적 자료가 부족한 현실에서 독자들께 빨치산 역사에 더 다가갈 기회를 드리고자 역사적 자료로서 이 책을 인용하여 싣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좀 더 나은 자료를 찾아 보여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빨치산이 생겨난 배경은 무엇일까요?-2

 

 

 

지리산 빨치산, 조직력을 갖추다

 

그러자 국군은 반란군 토벌을 위해 1021일 광주에 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10개 대대를 동원하여 공격하기 시작했다. 토벌부대는 1027일까지 순천과 여수를 탈환하고 진압작전을 벌였는데, 반란군 패잔병 350여 명이 광양 백운산과 지리 화엄사골, 웅석봉 같은 깊은 산으로 숨어들었다. 이듬해인 194949일 지리산 뱀사골 반선마을에서 반란부대장인 김지회와 홍순석이 사살되면서 여수, 순천 사건은 막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잔여부대원들은 빨치산(야산대)에 합류했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인 정규군의 형식을 갖춘 빨치산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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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19522, 빨치산의 습격에 대비하여 요새 같은 방어 태세를 갖춘 경찰서)

 

이들은 지휘관이 되어 구빨치산을 이끌었다. 이때 빨치산의 대표 인물인 이현상이 등장했다. 남로당의 지령을 받은 이현상은 지리산 빨치산의 정치위원으로 참가했는데, 스스로 지리산으로 지원해서 반란군 잔여세력을 기반으로, 부근의 야산대와 반란에 동조했다가 도피 중인 민간인을 모아 지리산 인민유격대를 조직했다. 19497월부터는 공식 명칭을 2병단이라 했는데, 이것이 지리산 빨치산의 시작이었다.

 

 

격렬했던 투쟁

 

1950625일 전쟁과 함께 빨치산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이현상이 이끄는 구빨치산은 지리산을 떠나 월북을 결심하고 북상하던 중 전쟁소식을 들었다. 이 부대는 다시 낙동강전선으로 배치받아 활동했는데, 915일 유엔군과 한국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상황은 다시 뒤집어졌다. 북으로 후퇴하던 이현상의 구빨치산은 다시 당의 지령을 받고 남하하여 19515월 중순 덕유산 송치골에서 도당회의를 열어 남부군이라는 대규모 군사조직 체계로 개편했다. 이때 빨치산의 조직총책인 이현상이 남부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이들 남부군 850여 명은 남쪽으로 진군하며 속리산, 덕유산을 지나 지리산에 자리잡았다.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갔다 인천상륙작전으로 퇴각로를 잃어버린 북한의 정규군, 인민위원회 주도세력, 우익세력의 보복이 두려웠던 사람들이 다시 산으로 모여들게 되는데, 이때부터 한국전쟁기의 빨치산(산빨치산)’ 역사가 시작되었다.

 

대규모 군사조직체제롤 개편한 남부군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강력한 유격투쟁을 전개했다. 주로 밤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게릴라전에서 대낮에도 전면전을 불사하는 전투를 하게 되었다. 전쟁 기간 동안 이 일대에는 2만여 명이 모여들어 남한 내의 인민공화국 지대가 만들어졌다. 이때 지리산은 빨치산의 왕국이라 부를 정도로 그들의 세력과 규모는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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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952114, 전주교도소로 이송되는 빨치산들

 

 

역사 속으로 저물다

 

빨치산으로 인한 피해가 계속되자 19501011사단이 창설되어 빨치산의 근거지가 될 만한 모든 곳을 제거한다는 견벽청야작전을 통해 토벌작전을 시작했다. 그리고 남부군 창설과 함께 위기감을 느낀 유엔군 사령부는 19511126일 남원에서 백선엽을 사령관으로 하는 백야사(백선엽 야전전투사령부, Task Force Paik)’를 창설하여 이듬해 3월까지 군인과 경찰합동으로 대대적인 동계토벌작전을 벌였다. 이때 빨치산은 큰 타격을 받게 되는데, 사살되거나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죽음을 맞게 되었다.

 

19537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약 2개월 뒤 지리산 빗점골에서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이 빨치산 5명과 함께 사살되었다. 이후 1954227일 전남도당부위원장 김선우가 백운산에서 전사하고, 도당의 지도자들이 죽음을 맞았다. 산속으로 뿔뿔이 도망친 빨치산은 정부의 끊임없는 항복 유도 방송과 추격전으로 점점 소멸되었다.

 

195571일 빨치산 토벌을 목적으로 편성되었던 토벌부대 또한 빨치산 소멸과 함께 해체했다. 그리고 19631112일 새벽, 산청에서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이 생포되면서 빨치산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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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마지막 빨치산인 정순덕과 이홍이가 가지고 있었던 무기

 

 

 

치열했던 빨치산의 역사는 저물었지만 지금도 그들에 대한 연구와 평가 작업은 이루어지지 않고 그저 현대사의 아픈 역사로 남아있다. 살을 에는 듯한 혹한의 겨울산을 누비며 그들은 무엇을 주장하고, 어떤 세상을 꿈꾸었을까? 지금 그들이 살아 있다면 현 시대를 향해 무어라고 토로할 것인가? 지리산은 그들의 못다 이룬 꿈마저도 조용히 품어주고 있다.

 

 

 


 

다음 시간에 "➍ 빨치산이 생겨난 배경은 무엇일까요?-2"이 이어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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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지리산으로 찾아든 까닭]4 빨치산이 생겨난 배경은 무엇일까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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