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5-16(토)
 

                          첫 얼음 어는 소설

                                              안철환(전통농업연구소 대표)

 

소설(小雪)에 첫 눈 기다리지 마세요. 대설이나 크리스마스에 첫 눈이 오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함박눈이 아닌 싸리눈 정도 흩날리는 게 보통이에요. 괜히 방송 등에서 첫 눈 기다리게끔 들뜨게 만드는 건데 우리 기후를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24절기가 중국 화북지방에서 만들어져 우리 기후와는 맞지 않는 표현들이 있는데 소설 대설이 대표적이고 소한 대한 추위도 그렇습니다. 우리나라의 눈은 대한 입춘 즈음해서 많이 내리고 추위도 대한보다 소한이 더 매섭거든요. 눈도 영동 지방의 경우엔 오히려 봄에 많이 내리지요.


우리 소설의 대표적인 날씨 현상은 첫 눈이 아닌 첫 얼음이 언다는 겁니다. 겨울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리는 알람이에요. 그래서 소설이 되면 나무는 잎을 떨어뜨리고 개구리 뱀 곰은 겨울잠 자러 들어가고 모든 생명은 겨울 날 준비에 바쁘지요. 그럼 사람은 뭘 할까요? 맞습니다. 김장과 땔감 준비를 하지요. 그렇게 겨울을 대비하라고 소설엔 반드시 추위가 찾아듭니다. 겨울을 알리는 알람이라고 한 이유에요.


예부터 소설추위는 빚을 내서라도 반드시 춥다고 했어요. 하필 이 즈음 대학 시험을 보느라 소설 추위는 다 잊고 입시추위로 착각들 하고 있는 게 안타깝습니다. 세상이 사람들을 다 철부지로 만들고 있는 꼴이에요.


철을 잊고 사는 세태는 소설추위를 잊은 것에 멈추지 않습니다. 한겨울에도 런닝바람으로 겨울 나는 게 요즘 모습이잖아요. 뿐입니까? 한여름엔 긴팔 와이셔츠에 폼나는 긴팔 양복 정도 입어주어야 가오(?)가 서는 분위기죠. 저 어릴 때 이런 표어가 있었어요. 새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납니다라는 말이요. 근데 이건 순전히 철을 거스르는 철부지 어린이의 표어라는 걸 제가 존경하는 한 한의사 선배의 책에서 배웠습니다. 철 든 나라의 어린이는 여름엔 늦게 자되 일찍 일어나야 하고, 겨울엔 일찍 자되 늦게 일어나야 한다는 말이었지요. 생각해보면 참으로 기막힌 말이죠? 제가 절기 공부하고부터 늘 머리에 담아 둔 구절이었습니다.


그럼 철을 거스르면 어떻게 될까요? 예를 들면 늘 가로등에 노출되어 있는 가로수를 생각해봅시다. 사계절 밤새 빛에 노출되어 있다는 건 항상 광합성을 하라고 자극하는 것과 같죠. 잠을 못자게 하는 거에요. 겨울이 되었는데 잎을 떨어뜨리지 못하는 낙엽수도 더러 있답니다. 잠을 못자는 것도 문제이지만 맹추위가 오면 얼어죽을 수 있다는 겁니다.


겨울 얘기는 아니지만 밤새 불을 켜두어 잠을 못자게 해서 재배하는 작물이 있어요. 바로 깻잎입니다. 들깨는 단일(短日)식물이라고 해서 빛이 짧아지면 꽃을 피우는 작물이에요. 꽃피고 알곡을 맺으면 양분이 그리로 몰려 잎이 부실해집니다. 깻잎은 잎을 키우는 게 목적이니 꽃피지 못하게 조명을 비춰주는 겁니다. 그런 깻잎이 과연 정상일지 의문이에요.


벼도 단일식물이랍니다. 근데 벼는 알곡이 목적이기에 빛을 쐬어주면 안돼요. 그래서 시골에 큰 건물이 들어서면 농부님들이 싫어하는 거에요. 한번은 박원순 서울시장이 도시농업을 좋아해 광화문 광장에 논을 만들기로 했는데 서울농업기술센터 직원들이 한참 바빴답니다. 거리의 자동차 라이트가 비추는 빛이 벼 이삭 패는 걸 방해할까봐 조도(lux) 조사하느라 그랬다는군요. 다행히 이삭 패지 못하게 할만큼은 아니어서 논을 조성했고 이삭도 잘 팼답니다. 우리가 매일 먹는 밥이 쌀나무(?)에서 달리는 줄 아는 아이들에게 살아있는 교육이 되었을 겁니다. 동대구역 앞에도 벼가 익는 논이 있다니 참으로 반가운 일입니다.


철이 들면 뭐가 좋을까요? 철이 든다는 건 자연의 흐름에 맞춰 사는 건데요, 반대로 자연을 거스르면 에너지가 많이 듭니다. 가령 폭염을 이기려고 에어콘 밑에 살면 전기값이 많이 나오겠지요. 그렇다고 마냥 시원할까요? 실외기 열기로 주변을 덥게 만드니 더 에어콘 의존도를 높이죠. 이게 문명 이기의 패러독스입니다.


철이 드는 일은 자연과 가까워지거나 자연과 하나되는 일입니다. 자연에 가까워지면 에너지도 적게 들뿐더러 삶에 거슬림이 적어집니다. 적당히 더위도 받아들이고 적당히 추위도 받아들일 줄 알면 삶이 순조롭지 않겠어요? 그게 깊어지면 삶에 신명이 날 겁니다. 앞에서 말한,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보다 못하고 좋아하는 건 즐기는 것보다 못하다는 말과 통하죠.


 오늘(11월 22일)이 소설인데 영하의 추위는 18일날 왔어요, 그런데 의외로 별로 춥지 않았네요. 그 추위 때문에 무가 얼까봐 이틀 전 수확해 시래기도 엮고, 김장에 쓸 것 신문지에 싸 두고 남는 건 깍두기 담고 그러고도 남는 건 무밥, 무나물 용 반찬거리로 남겨두었습니다. 물론 내년에 씨 받을 종자용 무는 제일 좋은 걸로 잘 보관해두었지요. 동치미는 놓쳤어요.ㅋ


근데 저도 이번 추위는 그리 춥지 않을거라 보기는 했어요. 일단 아직 음력으로 9월인데요, 이는 12지지 중 술(戌)월로 겨울 달인 10월(해亥月)로 넘어가는 직전이에요, 일진으로 보아도 추울 날씨 같지는 않더라구요. 그렇지만 이런 철에는 좀 호들갑을 떨어야 합니다. 자칫 한방에 공든 탑 무너질 수 있거든요. 추위 예보에도 굴하지 않고 캐지 않은 이웃의 무를 보니 역시 멀쩡하더이다. 그렇다고 방심하면 안돼요. 일단 무는 자랄만큼 자랐기에 더 놔둘 이유도 없는데다 얼진 않아도 자칫 바람들 우려가 있으니 제 때에 거두는 게 맞습니다.


소설은 음력 10월에 드는 게 정상인데요, 올해는 음력으로 10월 3일입니다, 윤6월 땜에 너무 빠른 겁니다. 일기 예보를 보니 소설 지난 다음 주 초에 비오고 추워진다는데 그게 아마 소설 추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가을 날씨가 비도 많이 오고 따뜻해 단풍도 늦고 잎도 떨어뜨리지 못하는 나무들이 안쓰럽다고 했었지요. 늦었습니다만 다행히 단풍 들자마자 떨어지는 낙엽으로 온 세상이 정신없고 쓸쓸합니다. 그렇지만 낙엽들이 쌓이자마자 가물까 걱정입니다. 뉴스를 보니 강원도엔 가뭄이 심해 벌써 큰 산불이 났어요. 저희 동네도 걱정되어 밭 주변 산 숲에 들어가 봤습니다. 역시 예상대로 수북이 쌓인 낙엽들이 말라있는 게 한 눈에 들어오네요. 가을 비로 낙엽이 적셔져야 하는데 지난 가을 비는 따뜻하게 내려 낙엽을 못 떨어뜨리게 하더니 정작 낙엽 떨어진 후로 비가 와도 찔끔이에요. 그런데다 산의 나무들은 너무 빽빽해요. 낙엽은 불쏘시개고 빽빽한 나무들은 장작 같이 보이니 제 노파심이 너무 큰 걸까요? 그러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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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숲의 쌓인 낙엽들은 거름이었고, 잡목들은 땔감이었어요. 그렇게 숲을 이용해야 빛도 들어가고 바람과 물이 잘 통해 나물도 잘 자라고 다람쥐가 수북한 낙엽 속에 가려져 도토리 찾지 못하는 일도 없으니 숲은 생명의 보고가 됩니다. 그런데 지금은 농부가 숲을 이용하지 않으니 숲이 너무 우거져 산불도 위험하지만 먹을 것도 없어요. 저는 이도 식품사막(Food desert)이라고 봅니다.


저희 밭은 수리산 자락 바로 밑에 있는데 겨울이 되면 산 짐승들이 저희 밭쪽으로 내려옵니다. 고라니 너구리 족제비에서부터 수리부엉이와 매도 내려와 밭 위로 날아 다니죠. 겨울이 되니 산에 먹을 게 별로 없어서 일 겁니다. 저는 수리부엉이와 매의 위용을 보면 그 포스가 주는 느낌을 참 좋아합니다. 한번은 원두막 너머에서 “끼야~”하는 매 소리가 아주 가깝게 들려 하늘을 쳐다 보았더니, 제가 있는 줄 모르고 낮게 날아오던 매가 제 눈과 마주치자 깜짝 놀라 하늘로 급상승하는 거지 뭡니까? 제가 더 놀랐을 겁니다. 저와 마주친 빛나는 눈매와 급상승하는 포스가 얼마나 대단한지 뒤로 자빠질뻔 했거든요.


근데 요즘 눈에 밟히는 씁쓸한 풍경이 있어요. 제가 매만큼 좋아하는 새로 부부가 쌍으로 날아다니는 수리부엉이입니다. 두 놈이 높은 하늘 위에서 맴도는 위세를 보면 멋있다는 탄성이 절로 나지요. 근데 이 놈이 몇년째 혼자 날아다니는거에요. 이혼을 한 건지, 짝을 못 찾은 건지 모르겠으나 삶이 힘들어진 것은 분명해 보여 참 안쓰럽기 그지없더이다. 웬지 내 탓 같아 미안하기도 하구요. ㅋㅋㅋ

 

화면 캡처 2025-11-22 213001.jpg

 

* 대문 사진 : 왼쪽부터_내년에 쓸 볍씨, 무 시래기, 옥수수 씨, 김장 때 쓸 마늘. 볏짚으로 엮은 무 시래기가 영 아마추어 티가 납니다. 멀리서 보니 그럴 듯은 하지요?

 

글을 쓴 안철환 선생은 온순환협동조합, 전통농업연구소 대표이고 경기도 안산에서 ‘산림생태텃밭 먹거리숲 농장’을 운영한다. 남은 음식물과 똥오줌, 커피 찌꺼기를 받아 직접 거름 만들기를 실천하고 있으며, 우리 토종 종자와 전통 농업 살리기에 열중하고 있다.

25년 전, 처음으로 심은 배추 씨가 3일 만에 싹 트는 걸 보고 ‘씨 안에 누가 있었구나!’ 깨닫고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우리가 먹는 배추는 단순히 물질적인 먹을거리가 아니라 나와 별 차이 없는 생명이며, 그래서 먹는다는 것은 생명을 먹고, 생명과 소통하고, 생명과 하나 되는 일이라고 믿는다.

쓴 책으로 《시골똥 서울똥》(2009), 《24절기와 농부의 달력》(2011), 《호미 한자루 농법》(2016), 《토종농법의 시작》(2020)이 있고, 옮긴 책으로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2004)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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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환의 절기 이야기] 첫 얼음 어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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