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생태적 개발 사업의 상징, 지리산산악열차
: 토건사업시민심의제 도입을 제안하며
_이주헌(문심당한의원 원장, 남원시민)
10년 넘도록 지리산산악열차는 우리 고장의 골칫거리였다. 남원시는 지리산산악열차가 전기로 운행되기에 매연을 내뿜지 않는 친환경 운송시스템이라고 주장했다. 선로를 설치할 때도 나무 한 그루 베어내지 않고 기존 도로만을 활용하겠다고 장담했다. 남원시의 장밋빛 홍보만 보자면 산악열차는 우리 고장의 백년 먹거리요, 지리산은 한국의 융프라우였다. 정치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숟가락을 얹기 바빴다.
시간이 흐르며 사업의 실상이 하나둘 드러나기 시작했다. 환경 훼손이 전혀 없다더니 시범 사업만 해도 나무 수백 그루를 베어내고 생태자연도 1등급 지역인 원천천 비탈에 옹벽을 무려 600m 가까이 쌓아야 했다. 공공기관이 진행한 연구에선 전혀 경제성이 없던 사업이 민간 회사가 용역을 맡더니 별안간 수익성 충분한 사업으로 돌변했다. 공사비를 축소하고 유발 수요를 부풀렸기 때문이었다. 지리산산악열차를 운행할 도로는 천연기념물인 반달가슴곰 서식지였다. 게다가 그 도로에선 단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산사태가 발생했다.
지리산산악열차 사업은 처음부터 끝까지 기만이요, 엉터리였다. 무엇보다도, 남원시는 주민들에게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고 밀실에서 사업을 진행했으며 공청회를 비롯한 주민들의 공론화 요청을 죄다 무시했기에 이 사업은 철저히 반민주적이었다.
올해 2월 전북지방환경청은 남원시가 신청한 지리산산악열차 시범사업 소규모 환경영향평가에 대해 최종적으로 부동의 결정을 내렸다. 싸움은 마침내 막을 내렸다.
지리산산악열차 사업은 지난 10년간 남원시가 허울 좋은 명분을 덮어씌워 추진해 온 반생태적 개발 사업의 상징이었다. 환경청은 그 반생태성을 통렬히 지적하여 이 사업을 좌초시킴으로써 지리산 개발 광풍에 큰 경종을 울렸다.
끝없는 개발주의의 망령
산악열차는 물러갔지만 개발주의는 여전히 우리 고장 한복판에 똬리를 틀고 있다. 지난 세월 남원시가 벌여 온 대규모 토건 사업들은 기후위기 시대에 역행하는 시대착오적 개발주의의 민낯을 보여준다. 얼추 떠오르는 것만 손에 꼽아도 기가 찰 지경이다.
작은 산을 두 개나 밀어버리고 1,000억 원을 퍼부어 조성한 사매 일반산업단지는 기업 유치에 실패하고 텅 빈 땅으로 방치되면서 잡초가 산을 이루고 있다. 1,900억 원의 민간 자본을 끌어들이기로 한 남원 드래곤 관광단지 사업은 장기간 표류하고 있으며 핵심 관광 시설은 착공될 조짐조차 보이지 않는다. 지난 20년간 1,000억 원 이상을 쏟아 부은 운봉 지리산 허브밸리 또한 기대했던 관광 효과는커녕 유지, 관리 비용만 발생시키는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함파우의 아름다운 경관을 파괴했으면서도 민간 자본을 끌어들여 세금 한 푼 안 들이고 사업을 성공시켰다고 입에 침이 마르게 자랑하던 모노레일, 짚라인 사업은 개장 몇 달 만에 파산하여 400억 원 넘는 사업비를 고스란히 혈세로 갚아야 할 처지가 됐다. 소송으로 인한 지연 이자까지 합치면 배상금은 무려 500억 원에 달한다. 지금도 매일 1,300만 원 넘는 지연 이자가 쌓이고 있다. 이렇게 처참하게 망해 버린 대규모 토건 사업들은 재정을 파탄내고 생태를 파괴하는 개발주의 망령이 여전히 남원시를 지배하고 있음을 증거한다. 이 와중에도 최경식 남원시장은 2,000억 원이 넘는 함파우 아트밸리 사업을 밀어붙이고 있다.
이토록 무분별한 토건 사업이 지속된다는 건 무얼 뜻할까? 나는 이것이 대의 민주주의의 실패를 증명했다고 생각한다. 남원시의 대규모 토건 사업들은 시대의 흐름으로 추진돼 왔다. 시민들을 대신하여 생태 파괴와 재정 낭비를 막아야 할 시의회는 걸핏하면 시청의 들러리 역할을 하며 토건 사업을 방조하거나 날개를 달아 주었다. 이 과정에서 시민들은 철저히 배제되어 집단 지성을 발휘할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다.
지금의 대의 민주주의 아래에서도 주민감사청구나 주민소송 등 주민들이 개입할 수 있는 수단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나 그것은 사후적 통제 수단에 불과하기에 무분별한 토건 사업을 계획 단계부터 효과적으로 막아낼 수 없다. 이제 남은 길은 하나다. '묻지마 개발'의 악순환을 끊으려면 시민들의 참여와 개입이 필요하다. 그 구체적 방안으로 토건사업시민심의제 도입을 제안하고자 한다.
토건사업시민심의제를 도입하자
내가 제안하고자 하는 토건사업시민심의제는 추정가격 고시금액 이상의 대규모 토건 사업에 대해 기획 단계부터 주권자인 시민이 참여하여 사업 타당성과 생태적 지속가능성을 심의하는 제도이다. 지자체마다 편차는 있겠지만 남원시 같은 경우 고시금액을 100억 원 정도로 정하면 될 것이다. 추첨이나 공모, 시민단체 추천을 통해 선정된 시민 대표들이 전문가, 지방의회 의원과 함께 토건사업시민심의위원회를 꾸리고, 이 위원회에서 대규모 토건 사업 계획을 검토하는 것이다. 시장, 군수는 위원회가 요청할 경우 사업 관련 정보를 공개하여 위원들의 자유로운 정보 접근을 보장해야 한다.
사회적 갈등이 예상되는 사업 계획에 대해서는 위원회가 숙의형 공론장을 열어 주민 의견을 수렴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심의 결과를 도출하면 시장, 군수는 반드시 이를 검토하고 수용 여부를 답변하게 하고, 그 답변은 모든 시민들에게 공개한다.
이 제도가 도입된다면 시민과 전문가의 집단 지성이 무분별한 토건 사업 추진에 제동을 걸 수 있는 기회가 열리게 된다. 무작위 추첨이나 시민단체 추천으로 구성된 시민 위원들은 정치인이나 관료와 다르게 정치공학 또는 상급자의 압력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것이며 공동체 전체의 미래를 위한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더 클 것이다. 만약 토건사업시민심의제가 존재했다면 지리산산악열차 사업은 숙의형 공론장을 통해 실상이 빨리 알려졌을 것이고 모노레일 사업은 진즉 폐기되었을지 모른다.
이제 시민의 손에 지역의 미래를 맡겨야 할 때
환경청이 지리산산악열차 시범사업 부동의 결정을 내리면서 10년을 끌어온 사회적 갈등이 종지부를 찍었을 때 남원시가 정신을 차리고 무분별한 토건 사업의 종말을 선언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여전히 추진 중인 2,000억 원대 함파우 아트밸리 사업은 남원시가 아직도 개발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주권자인 시민의 참여뿐이다.
우리는 기후위기라는 인류 공동의 심각한 위기 때문에 더 이상 무분별한 토건 개발을 용인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전 세계가 폭염, 산불, 홍수, 태풍으로 몸살을 앓는다. 최근 사례만 살펴봐도 끔찍하다. 작년 여름엔 인도 북부의 기온이 50도 가깝게 치솟았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선 메카 순례 중 폭염이 덮쳐 1,300명 이상이 사망했다. 올해 초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대형 산불이 번져 무려 74조 원에 달하는 피해가 발생했다. 태국, 베트남, 캄보디아 등 메콩강 유역 국가들은 수십 년 만에 최악의 가뭄을 겪고 식량 안보가 흔들렸다. 사례를 찾아보자면 수도 없다.
대규모 토건 사업은 반드시 산림을 훼손하고 토양을 유린하며 막대한 양의 콘크리트와 철강재를 사용하여 탄소 배출량을 늘린다. 기후위기 시대에 토건 사업을 무분별하게 밀어붙인다는 건 끝없는 자살 시도나 다름없다. 대의 민주주의는 개발 중독을 통제하는 데 실패했다. 이제 시민들의 집단 지성이 지역의 미래를 설계하고 책임지는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 전 인류의 멸절을 걱정해야 하는 이 시대, 우리 희망은 결국 더 많은 민주주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글쓴이 이주헌
지리산산악열차반대남원대책위 집행위원장을 지냈고, 현재 남원 시민단체 시민의 숲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남원에서 문심당한의원을 운영한다.
뒤웅박 씻나락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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