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5-12(화)
 

          긴긴 겨울의 한복판, 소한 일기

                          안철환(전통농업연구소 대표)


동지 지나자마자 온 이번 추위는 아무리 봐도 동지 추위보다는 소한 추위라 해야 맞을 것 같습니다. 따뜻한 애동지라 동지 추위라고 하기엔 어울리지가 않아서지요. 소한인 오늘 지나면 날이 잠깐은 풀릴 수 있으나 또 다시 추위가 와도 이상하진 않을 겁니다. 어쨌든 소한과 대한은 긴긴 겨울의 한복판이거든요. 다만 지난달 내내 이상하게 따뜻했듯이 온화한 겨울이 올까 걱정은 됩니다. 추위가 일찍 왔으니 일찍 갈 테니까요. 암튼 겨울답지 않은 따뜻한 겨울은 여러모로 좋을 게 없습니다.


그래도 긴긴 겨올 농한기엔 몸과 마음의 건강을 다지는 기회로 삼으면 좋겠습니다. 우선 겨울엔 따뜻한 음식을 먹어 몸에 추위를 버틸 에너지를 비축해 둡니다. 전통농업 취재차 농촌을 다닐 때 한 할머니가 이런 말을 해주었어요. “여름은 거지처럼 나고 겨울은 임금처럼 나야 한다”고 말이죠. 여름엔 배불리 먹지 말고, 겨울에나 배불리 먹으라는 얘길 텐데 왜 그럴까요?

한 번은 시베리아 도시라 불리는 러시아 이르쿠츠크를 여름에 가 봤습니다. 공원에 가서 신기한 모습을 보았는데요, 참새들이 뚱뚱한 거예요. 우리보다 훨씬 추운 겨울이 6개월이나 되는 지역인데 뭐 먹을 게 많다고 쟤들은 저리 살이 쪘지 하고 한동안 그 놈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어요.

제 괴팍한 여행 취미 중에 하나는 그 지역의 작은 동물들과 벌레들을 살펴보는 일입니다. 특히 길개, 길고양이, 참새, 파리 등에 관심이 많지요. 이 놈들은 이상하게 어디 가나 다 비슷비슷해요. 특히 참새와 파리가 비슷한 게 신기하죠. 참새는 철새도 아닌 텃새인데 왜 그럴까요? 쳇GPT에게 물어보니 제 추정과 비슷하게 이 놈들은 사람 따라 이주했기 때문이라네요. 한 종인 참새와 달리 파리는 종은 다르지만 형태가 별 차이 없어 다 비슷하게 보인답니다. 어쨌든 우리의 이웃인 거죠. 그렇지만 지역과 나라마다 약간씩 다른 점이 있어요. 그 차이를 살펴보면 그 나라를 더 재밌게 이해할 수 있답니다.

그럼 왜 이르쿠츠크 참새들은 뚱뚱할까요? 눈치챈 분들이 있을 거예요. 맞습니다. 바로 긴긴 추운 겨울을 이기기 위한 진화 전략인 거예요. 그러고 보니 사람들도 대체로 뚱뚱하고 덩치가 크더라구요. 북유럽 사람들도 마찬가지죠. 그걸 우리에 맞게 적용한 게 앞에서 말한 할머니의 말씀이지요. 여름은 거지처럼 겨울은 임금처럼..... 그래서 찰지고 기름져 맛있는 음식은 여름보다 겨울에 먹으라는 얘긴데요, 그러고 보니 찹쌀떡 장수도 긴긴 겨울밤에 팔러 다녔죠. 요즘은 떡 하면 사계절 모두 찹쌀떡이에요. 매떡이 사라졌어요. 더불어 구성진 “찹 싸~알 떠~억....” 목소리도 사라졌지요. 불과 5년여 전까지만 해도 우리 집 골목 입구에서부터 그 소리가 들리기라도 하면 얼른 뛰어나가 사 오곤 했는데 말이죠.  

또 한 번은 이집트 가서 파리를 살펴보니 크기가 작아요. 똥파리 왕파리는 못 찾겠고 제가 본 것은 집파리 뿐이었어요. 그게 왜 신기하냐 하면, 그 나라는 쓰레기가 많은데요. 그러면 당연히 파리가 득실 할 텐데 그렇지가 않은 거지 뭡니까. 곰곰 살펴보니 아주 건조한 나라라 쓰레기는 많아도 썩는 냄새가 별로 없는 겁니다. 미라가 많은 것도 같은 이유일 겁니다. 거기는 습한 것보단 건조한 게 문제인 거죠. 사람들도 옷차림이 별로 깔끔하지 않은데 냄새가 거의 없어요. 향수 바르는 것 같지도 않은데 말이죠. 깔끔한 백인들한테서 노랑 내 나는 것과 비교해 보면 참 대조적이죠.


몸은 그렇고, 마음은 어떻게 다질까요? 저는 농한기답게 놀기를 권합니다. 근데 요즘 사람들 보면 노는 일도 바빠요. 매사 모든 게 바쁘죠. 가만히 놀질 못합니다. 술을 먹든, 노래방을 가든, 영화를 보든, 골프를 치든, 여행을 가든 뭔가를 바쁘게 합니다. 저도 여전히 술 좋아하고 여행도 종종 가는 입장이라 뭐라 탓할 처지는 못돼요. 다만 이 긴긴 겨울엔 빈둥빈둥 가만히 노는 재미를 권하고 싶지요. 앞 글 중 대설인가에서 말했듯 겨울잠 자듯 겉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듯한 놀이예요. 명상을 하든, 산책을 하든, 음악을 듣든, 책을 읽든, 묵은 청소를 하든, 새해 농사 준비차 종자 정리를 하든, 맛있는 겨울 음식을 해 먹든 말이죠. 정중동(靜中動) 놀이랄까요.

겨울에 단식하는 분들도 있는데, 조심해야 하지만 이도 괜찮은 방법이에요. 에너지를 비축하라 해 놓고 단식을 권하니 이율배반 같지요. 근데 곰곰 보면 원리는 간단합니다. 이게 진짜 겨울잠 자는 거거든요. 곰이나 뱀이나 개구리처럼 겨울잠 자는 애들 보면 알 수 있지요. 에너지 비축은 잠자기 전에 충분히 해 둡니다. 그리고 단식을 하는 거예요. 잠을 자면서.... 에너지를 거의 쓰지 않는 거죠.

이게 중요한 것은 마음의 건강까지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단식을 하며 몸도 비우지만 마음도 비우는 겁니다. 일 하느라 많은 사람들 만나면서 얻은 마음의 상처와 피로를 비웁니다. ‘도 닦으라는 거군’ 하시겠지만 그리 거창한 거는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 살면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살잖아요. 그걸 털어내는 일은 도 닦는 일이 아니라 생존의 일인 겁니다.

근데 보통 사람들에게 단식이 쉬운 일은 아니에요. 저도 이맘 때면 단식을 몇 년 하다 결국 포기했거든요. 회복식까지는 잘했는데 꼭 끝나기 무섭게 맛있는 술 먹고 사람들 만나고 하니 도로나무타불이 되곤 했어요.

저는 그냥 외부활동을 줄이는 것으로 하고 있습니다. 2~3일에 한 번은 밭에 가서 나무 전지도 하고 마무리 못한 퇴비장 정리도 하고 그런 일마저 없으면 그냥 점검 핑계로 밭 구석구석을 살펴봅니다. 단골 길고양이에게도 아는 척하고, 산에서 가끔 먹을 것 찾아 내려오는 너구리 족제비 안 오나 살펴보고, 어쩌다 마주치면 짝사랑하는 마음으로 살금살금 다가가 보지만 금방 사라지고 말지요. 혹여 제가 좋아하는 매나 수리부엉이 오지 않나 하늘도 살펴봅니다. 며칠 전엔 수리부엉이 한 마리가 까치 떼들에게 이리저리 쫓겨 결국 도망가는 처지를 보곤 에이 깡패 같은 놈들 하곤 욕만 했어요. 도와주고 싶었지만 헛된 꿈이죠. 밤하늘 쳐다보는 것도 중요한 일인데요, 이곳도 도시라 별들이 뭐 보이겠냐 하지만 그래도 달이나 목성, 화성, 토성, 금성 정도는 잘 보입니다. 그 정도 살펴보는 재미도 그럴싸하지요. 천문 전문가는 아니지만 언제 기회 되면 별들 얘기도 소개하겠습니다. 절기도 다 별들에서 왔거든요.

그리고 점점 사람 관계보단 자연의 생명들과 더 가까워지려 노력합니다. 내 밭의 작물들과 풀들, 작은 동물들과 벌레들, 주변 숲에 사는 나무들과 짐승들에 더 관심을 갖는 거죠. 물론 나도 사람이니 사람을 어찌 만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특히 별나게 사람들 좋아하는 성미이니 더 그럴 수 없지요. 그래서 찾은 방법은 새로운 관계는 맺지 않고, 기존 관계는 더 소중히 여기지만 일은 줄이고, 만남도 술자리보다는 줌으로 만나고, 만나도 심각한 얘기보다는 덕담을 많이 합니다. 말하자면 관계도 단식만큼은 아니어도 아끼고 절약하는 거지요. 젊은 사람들은 겨울을 그렇게 보내다 봄부터는 다시 활기차게 활동해야 하겠지만 저는 환갑 지나고부터는 겨울을 핑계로 점점 일도 줄이고 모든 걸 줄여나가려 합니다.


겨울이 길고 추운 건 어쩌면 하늘이 준 특혜일 수 있습니다. 한 번은 남반구 호주의 시드니를 겨울에 가 본 적이 있어요. 희한한 건 겨울임에도 춥지 않아 온 세상이 여전히 푸르른 거였습니다. 나무들은 얼마나 크고 우람한지 우리로 치면 몇 백 년은 되었을법한 것들이 겨우 50년 정도 된 거랍디다. 함께 간 사람들 다 부러워하는 눈빛이었죠. 저도 마찬가지였지만요. 근데 좀 더 생각해 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어요. 그곳엔 봄 되면 죽었다가 다시 땅 속에서 올라오는 새싹들의 부활 향연 같은 건 없을 테니요. 잎은 다 떨어져 가지만 남은 앙상한 나무들의 이른바 백골(白骨) 미도 볼 수 없지요. 저는 개인적으론 꽃보다 새순을 좋아하고 새순 다음으로 앙상하게 뼈만 남은 겨울나무를 좋아합니다. 나무만 보이는 게 아니에요. 맨바닥 흙도 다 보이고 능선과 계곡도, 바위들도 다 보이죠. 눈이 오면 더 멋있습니다. 그래서 땅을 살 때는 겨울에 사는 게 좋습니다. 여름엔 다 가려지기 때문이에요.

마지막으로 추운 겨울은 자연이 준 단련의 기회입니다. 생태적으론 청소의 기회이구요. 그래서 추울 때 추워야 하고 겨울은 겨울다워야 자연도 사람도 나도 모두 자기다워지니 추운 겨울을 자연의 혜택이라 한 겁니다. 그래도 추위에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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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쓴 안철환 선생은 온순환협동조합, 전통농업연구소 대표이고 경기도 안산에서 ‘산림생태텃밭 먹거리숲 농장’을 운영한다. 남은 음식물과 똥오줌, 커피 찌꺼기를 받아 직접 거름 만들기를 실천하고 있으며, 우리 토종 종자와 전통 농업 살리기에 열중하고 있다.

25년 전, 처음으로 심은 배추 씨가 3일 만에 싹 트는 걸 보고 ‘씨 안에 누가 있었구나!’ 깨닫고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우리가 먹는 배추는 단순히 물질적인 먹을거리가 아니라 나와 별 차이 없는 생명이며, 그래서 먹는다는 것은 생명을 먹고, 생명과 소통하고, 생명과 하나 되는 일이라고 믿는다.

쓴 책으로 《시골똥 서울똥》(2009), 《24절기와 농부의 달력》(2011), 《호미 한자루 농법》(2016), 《토종농법의 시작》(2020)이 있고, 옮긴 책으로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2004)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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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환의 절기 이야기] 긴긴 겨울의 한복판, 소한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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