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하고 물을 긷는다
‘사유의 방’에 들어가니 전체적으로 어두운 조명 속에 미륵반가사유상 두 점이 놓여있었고 빛과 어둠의 조화 속에 스며드는 고요를 잘 연출해 내고 있었다. 고요는 사유의 시작이니 그렇다. 그런데 반가사유상은 왜 두 점을 놓았을까? ‘사유의 방’의 ‘사유’는 불가의 ‘깨달음’으로 이어지니 오히려 한 점을 놓고 지금처럼 빛과 어둠의 비율을 잘 조절하면 깨달음을 위한 ‘집중’을 더 깊고 강하게 연출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두 점이기 때문에 오는 느낌도 있었는데 그것은 따뜻한 어울림이었다. 우선 홀로가 아니라 둘이니 그렇다. 그리고 두 분의 보살은 나란히 앞을 바라보며 전시되어 있는데도 룸메이트라도 되는 듯 편안하게 어울렸다. 그것은 아마도 앉은 자세와 얼굴의 방향, 그리고 표정이 연출해 내는 자연스러운 어울림의 효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로 인해 ‘사유의 방’의 고요한 분위기는 ‘집중’과 함께 부드럽고 따뜻한 어울림을 함께 품고 있었다. 반가사유상 자체의 미소가 절정의 포용력과 따뜻함을 충분히 느끼게 하지만 두 보살의 어울림으로 사람과 사람의 관계적 친연성이 주는 상징적 효과가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서울 나들이는 오롯이 ‘사유의 방’을 만나기 위한 것이어서 이 방에 좀 오래 머물렀다. 탑돌이를 하듯 반가사유상을 천천히 돌며 걸으니 이런저런 떠오르는 생각들을 즐길 수 있었다. 사실 ‘깨달음’이라는 것도 ‘지금여기’라는 현실을 떠나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언젠가 봤던 어느 선사의 시를 떠올리니 그런 생각이 강하게 왔다.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나무를 하고 물을 길었다.//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나무를 하고 물을 긷는다.
이 시를 보면 깨달음을 얻기 전이나 얻은 후에나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 깨달음을 얻었다면 무언가 달라져야 할 텐데 물을 긷고 나무를 하는 일상의 현실에는(당시는 물을 길어 독에 채우고 나무를 해서 밥을 해 먹는 것이 먹고 사는 일의 가장 중요한 일상이었을 것이다)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이다. 현실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뭘까? 선사의 깨달음은 ‘지금여기’의 일상을 새롭게 보고 또 새롭게 사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 고통스럽고 덧없는 현실을 늘 ‘새로움’의 변화로 읽어낼 수 있다면 그 변화의 경이로움으로 세상은 신기롭고 즐거우며 의욕적일 것이다. 그렇게 늘 새롭게 현재의 일상을 살아낸다면 그런 행복이 어디 있으며 그것이 깨달음의 경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한해가 바뀌는 첫날의 일출을 보기 위해 야단법석을 떨며 정동진의 바다를 찾는 데는 새로운 한 해를 맞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이 있다. 후회와 회한이 없는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다. 그러니 매일 매 순간 새롭게 오는 시간을 새롭게 살아낸다면 깨달은 자의 그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오늘도 내일도 ‘나무를 하고 물을 긷는’ 똑같은 일상이지만 완전히 다른 일상인 것이다.
사실 우리의 몸 또한 늘 새롭게 변하는 물질이기도 하다. 명상 의학자인 디펙초프라는 우리 몸속의 원자는 매 순간 새롭게 창조되며 피부는 한 달에 한 번씩 새롭게 교체되고 위벽은 5일마다, 간은 6주마다 새롭게 바뀐다고 한다. 언제나 같아 보이지만 실은 항상 변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변한다는 것은 새로움에 다름 아니다. 변화를 새로움으로 받아낼 수 없다면 우리는 덧없는 세월의 허무를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삶의 무상함이 아니라 무엇인가 영구하기를 바라는 그 마음에 있다. ‘덧없음’을 ‘새로움’으로 읽어내고 실천할 수 있다면 ‘물을 긷고 나무를 하는’ 반복되는 일상도 경이로움으로 오는 ‘깨달음’이 되는 것이다.
‘사유의 방’에서 한참을 머물다 나오는데 문득 오래전에 ‘미륵반가사유상’이라는 제목의 시를 썼던 것이 생각났다. 내용이 가물가물했는데 그 궁금증이 가시지 않아 노트북을 꺼내 찾아보니 2001년에 낸 시집에 실려 있었다. 물론 그때도 미륵반가사유상을 실견(實見)하지 못했었는데 당시 어떤 심정을 풀어냈는지가 궁금했다.
흐르고 있구나./ 무량의 속된 세월을 만나/ 그대는 줄곧 흐르고 있었구나./ 푸르고 푸른 그대 사유의 강에/ 발목을 적신다 해서/ 정토의 땅을 밟을 수 있을까만/ 나는 그대 앞에 넋을 놓고/ 때에 절은 그리움 하나를 벗는다./ 내 어둠을 밝혀 온/ 단 하나의 오랜 불빛을 여읜다./
25년 전, 막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막연하게나마 동경해 왔던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하고 평등, 인권, 통일, 민주, 정의 등의 가치지향이 자본에 무너지던 그 무렵에 나온 시집이었다. 급변하는 현실을 맞아 치열하게 건너온 시대와 동지들에게 등을 돌리는 ‘훼절’이 있던 시절, 혼란스럽고 출구가 잘 안 보이던 그때 미륵반가사유상을 떠올려 시를 쓴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했다. ‘때에 절은 그리움을 벗’고, ‘내 어둠을 밝혀 온 단 하나의 오랜 불빛을 여의’어 다시 새롭게 흘러야 했을 것이니 그렇다. ‘새로움’이라는 출구가 절실했을 것이다. 여기의 미륵반가사유상이 누군가에게는 ‘삶의 새로움’을 발견하는 출구가 되기를 바라며 사유의 방을 나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