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의 곁’
- 두레공동체 마을에서 열린 생명평화연대 모임에 다녀와서
‘고통에 곁이 필요한 만큼 고통의 곁에도 곁이 필요하다’라는 엄기호 시인의 시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중 한 구절이다. 이 문장을 ‘어두운 날의 우정과 영성’이라는 주제로 성공회대 교수 정경일 교수가 강연(5월 30일, 지리산종교연대 초청강연) 중에 인용했다.
곁은 이웃, 친구가 될 수도 있고, ‘곁의 곁’은 더 큰 차원의 종교, 교회, 공동체가 될 수도 있다. 이렇게 곁의 곁이 되고자 모인 사람들이 종교를 초월하여 지리산을 중심으로 뭉친 ‘지리산종교연대’ 사람들이다.
나는 특별한 종교를 갖지 않는다. 절에 가면 불상 앞에 엎드리는 겸손과 비움을 배우고, 교회에 가면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고통과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해 괴로워하며, 성당에서는 아름다운 성가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한다. 토속신앙을 접하거나 굿판에 참여해서는 만물에 깃든 영혼들의 아우성에 마음이 쓰리다. 이런 까닭으로 종교연대 사람들이 각자의 믿음과 신앙을 초월하여 하나로 힘을 합치고 타인의 종교를 인정하는 모습을 너무도 좋아한다.
종교연대 사람들은 개신교, 가톨릭, 불교 등 각기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모이는 연대모임이다. 오늘은 그 연대의 사람들이 함양으로 모였다.
함양의 두레공동체 마을은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개신교 목사님이 세우시고, 지금도 서로의 곁이 필요한 사람들이 모여 살아간다.
오늘 오전 모임은 두레공동체 마을의 ‘예수행전순례길’을 산책(순례)하는 프로그램으로 시작했다.
‘십자가의 길’은 두레공동체마을 뒷산에 산책로를 만들고, 그 길을 따라 14개의 기도처를 마련했다. 조각가 김익수 장로님이 직접 제작하신 예수의 행보를 나타낸 동판이 각 처마다 십자가와 함께 세워져 있다. ‘만남, 용서, 치유, 가르치심, 긍휼, 섬김, 성찬, 기도, 재판, 십자가 지심, 수난의 걸음, 쓰러지심, 도움받으심, 십자가에 달림(용서, 원망), 예수의 죽음, 부활·승천(못자국, 창자국을 보아라, 제자들을 기다림, 예수님의 승천)’ 이렇게 19개의 묵상 주제를 가지고 있다.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걸으며, 하나하나의 기도처에서 묵상 주제를 겸허히 생각해 본다. 얼마나 용서하고, 얼마나 섬겼으며, 또 다른 이들을 나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비난했는가를. 마음이 무거워지려는 찰나.
“오,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을 좀 봐요!”
하며 옆 순례자 한 분이 감탄을 한다. 눈을 들어 위를 올려다보니 나뭇잎들 사이로 파란 하늘이 빛난다. 나무들은 아래 작은 식물들이 햇빛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늘 전체를 덮지 않고 공간을 만들어 준다고 한다. 정말 그랬다. 울창하게 자란 나뭇잎들이 만들어낸 공간들 사이로 맑은 햇살들이 작은 들꽃들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자연의 지혜다.
숲속의 자그마한 연못이 나타났다. 연못에는 올챙이들이 까맣게 모여 살고 있었다. 그곳에 새끼 도롱뇽, 소금쟁이 등의 작은 생물들을 발견하고는 신비로운 기쁨에 탄성을 질렀다.
“예수의 부활처럼 많은 생명을 품고, 잉태시키는 연못이라.”
한 불자님이 말씀하신다. 그러고 보니 그렇다. 막 깨어난 잠자리들이 은빛 투명한 날개를 퍼덕이며 파란 막대처럼 날아다닌다.
처음 보는 풍경이다. 파란 자그마한 막대들이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광경이 신기하여 한참을 관찰했다. 저 작고 여린 생명이 잠자리 성충으로 자라 날아다니게 된다니 그 또한 신비롭다. 연못은 수중 생물뿐 아니라 그곳에서 자라 물 밖으로 나오는 많은 생물도 엄마 품처럼 안고 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생명들에게도 곁이 되어준다. 이 또한 늘 당연하게 여겼던 자연의 지혜다.
허물어진 언덕에 조그마한 굴이 파였다. 물총새의 둥지라고 한다. 앞에 늘어진 나뭇가지(혹은 드러난 나무뿌리) 위에 앉아 주둥이로 흙 비탈에 굴을 파고 그곳에 알을 낳아 새끼를 기른다고 한다. 물총새는 집 밖으로 엉덩이를 내밀고 똥을 누는데, 집 밖 절벽으로 똥을 떨어뜨림으로써 둥지 안이 더러워지는 것을 방지한다고 하니, 재미있고, 지혜로운 새의 습성이다.
십자가의 길에서 다시 교회로 되돌아오는 길. 산딸기와 오디가 주렁주렁 열렸다. 난 산딸기를 따 먹느라 정신이 없는데, 나이 많으신 한 순례자분이 까맣게 익은 오디를 보고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며느리가 친정 나들이를 했다가 빈손으로 돌아오자, 이를 얄밉게 여긴 시어머니가 ‘넌 친정 다녀오면서 빈손으로 오냐?’ 하고 묻자, 며느리가 말했지, ‘갈 때 없던 오디가 올 때 있다요?’라고.”
참 현명한 며느리다. 시어머니의 얄궂은 심성에도 전혀 기죽지 않는 당당함이 느껴져서 웃었다.
공자는 세 사람만 모여도 스승이 있다고 했는데, 잠깐의 산책으로도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운다. 더군다나 늘 남의 곁이 되어주는 사람들이 모이니 모두가 나의 스승이다.
점심시간, 바람이 시원하게 부는 나무 그늘에 각자 가지고 온 도시락들을 펼쳤다. 여러 사람이 모이는 식사 자리에는 늘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다. 난 내 먹을 것만 조금 싸 왔는데, 다들 다른 사람을 생각하여 풍성한 음식들을 준비해 왔다. 김치와 나물, 떡과 빵. 김밥과 찰밥, 채소와 과일. 이것저것 다 먹어보느라 배가 부른 데도 자꾸 손이 간다.
풍성한 점심을 먹고, 드디어 오늘의 정식 프로그램인 강연이 시작되었다. 모두 교회에 둘러앉아 ‘어두운 날의 우정과 영성’을 주제로 한 교수님의 강연을 듣는다. 한 문장이라도 놓칠세라 진지한 모습들이다.
우린 책을 읽을 때도 그렇고, 강연을 들을 때도 자신에게 필요한 말, 혹은 자신의 마음에 와닿은 말들을 주로 듣고 기억한다. 나도 그렇다. 그러기에 마음에 와닿은 강연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어둠의 성인 마더 테레사, 파국에 의한 관상가 파커 파머, 어둠의 날들을 이야기한 틱낫한. 어둠의 날들을 경험한 자가 어둠에서 나오는 길을 안내할 수 있고, 어둠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알베르 카뮈는 소설 『페스트』에서 ‘(재난 속에서) 더 이상 그 무엇도 사랑하지 않는다면 투쟁은 뭐 하려 하는 겁니까?’라고 리유의 입을 통해 묻는다. 어둠 속에서 서로에게 위안이 되어주고, 신뢰를 가질 때 더 이상 어둠은 어둠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랑을 잃어버린다면 어둠은 그 끝을 모르게 된다. 이렇게 어두움 속에서 우린 서로의 곁이 되어줄 수 있다. 비단, 인간과 인간만이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과 비인간과의 우정과 협력으로 우정의 써클을 넓힘이 필요하다.”
외국 학자가 주장한 언어를 우리식으로 번역한 언어임에도 ‘비인간’이라는 말에 거부반응이 다소 일었다. 그때 옆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
“비인간이나 나무 사람이라는 말보다는 자연의 현자들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요?”
우린 만물에 이름을 붙이고, 개념 지워서 인간의 입장으로 판단하고 평하려 한다. 언어는 우리가 구별 짓는 기준이 되기도 하는데, 그러므로 늘 인간의 위치에서 생각하게 된다. 자연을 현자의 위치로 규정하고 바라보는 태도, 그 또한 겸허함이다.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지혜, ‘생명, 평화, 공존’의 사상은 늘 ‘현자’의 지혜임이 틀림없다.
십자가의 길은 무겁다. 우린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삶을 홀로 살아가야 하고, 비틀거리고 쓰러질 때 도움이 필요해진다. 꼭 십자가라고 하지 않아도 그렇다. 우린 살아가다 보면 삶이 어깨 위에 걸터앉아 무겁게 짓누를 때가 있다. 그래서 늘 곁이 필요하고, 함께함이 필요해진다. 또한 내가 좀 힘이 있을 때는 누군가의 곁이 되어주고 싶어 한다.
‘그동안 난 누구의 곁이 되어준 적이 있을까?’ ‘나는 어두움이 주는 지혜를 얼마나 깨닫고 살아왔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교회를 나와 마을 길을 내려온다. 다음 모임은 암자에서 있을 예정이라고 한다. 스님이 주관하시는 모임에서는 또 어떤 지혜를 얻을 수 있을까? 또 어떤 따뜻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
글쓴이 : 비아(非我)
_지리산을 바라보면 늘 행복해지는 마음으로 그렇게 자락 한쪽 끝에 깃들어 살아갑니다. ‘더불어 삶’이라는 말을 가장 소중히 여기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