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8-18(화)
 

가식 없는 세계

 

정지아(소설가)

 

 

 

 

어린 시절에는 공부 잘한다고 소문깨나 났었다(중학교에 간 뒤로 줄곧 내리막길을 걷긴 했지만). 간혹 모르는 어른들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이, 니가 공부를 고로크롬 잘한담서이..., 말끝을 흐리고는 쯧쯧쯧 혀를 찼다. 어렸지만 이상하다는 건 알았다. 공부를 잘하는데 왜 혀를 찬단 말인가. 아버지가 빨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그 의미를 이해했다. 공부를 잘해봐야 빨갱이의 자식이라 소용도 없을 텐데 불쌍해서 어쩌냐는 한탄의 축약이라는 것을. 구례에 사는 한 빨갱이의 딸이라는 주홍글씨를 뗄 수 없을 것 같아 엄마를 졸라 서울로 떠났다. 서울서 사는 내내 나는 서울의 익명성이 참으로 좋았다. 토요일이면 하릴없이 연신내 사거리를 쏘다니기도 했다. 햇볕조차 들지 않는 단칸셋방에 있으면 나는 가난한 빨갱이의 딸이었다. 인파에 섞여든 순간, 나는 그 수많은 사람 중의 하나가 되는 듯했다. 그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그 익명성이 나를 숨 쉬게 했다.

 

고향에 돌아온 뒤, 우연히 옛날 작은고모 살던 집 앞을 지났다. 그곳만 시간을 피해간 듯 옛 모습 그대로였다. 팽나무 아래 평상에서 사오십 년 전 그때처럼 동네 아낙들이 모여 고구마 줄기의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험담을 하면서.

 

그 시절, 엄마가 바람나서 도망간 언니가 있었다. 친하지는 않았다. 엄마에게 버림받은 그 언니는 노상 고개를 푹 수그리고 다녔다. 언니 얼굴을 똑바로 본 기억이 없다. 어깨 축 늘어뜨린 언니 모습이 저만치 나타나면 고모나 혹은 누군가 쯧쯧 혀를 찼다. 빨갱이의 딸이었던 어린 나에게 그랬듯.

 

“아이고, 샛서방이 암만 좋아도 글제 자석을 두고 발짝(발걸음의 구례 사투리)이 떼졌으까? 옘벵에 걸려도 땀도 못 빼고 뒤질 년!”

 

언니도 필시 그 말을 다 들었을 터다. 한 마디 한 마디 비수가 되어 심장을 찔렀겠지. 그래서 언니는 생각했겠지. 아무도 내 엄마가 바람나 도망간 사실을 모르는 곳으로 가고 싶다고. 그 시절의 나처럼. 그러나 공부에 목매다는 엄마가 없던 언니는, 아니 그냥 엄마도 없던 언니는, 나와 달리 도망가지 못했다. 언니는 말의 비수를 견디며 중학교까지 구례에서 졸업했다.

 

언니를 마지막으로 본 건 내가 전학 가기 직전, 언니의 초등학교 졸업식 날이었다. 아버지가 앞장서고 언니는 서너 발짝 뒤에서 늘 그랬듯 고개를 푹 숙인 채 뒤따르고 있었다. 언니 손에는 그 흔한 꽃다발 하나 들려있지 않았다. 아마 졸업장이 들었을 동그란 통을 가슴에 꼭 안은 채 언니는 아기새처럼 부들부들 떨며 걸었다. 나는 연탄난로가 지펴진 자전거포에서 고모가 삶아준 물고구마를 먹는 중이었다. 고모가 나지막이 언니를 불렀다. 아이, 아가, 라고. 고모는 코끝이 빨간 언니를 자전거포로 불러 고구마 하나를 쥐여주었다.

 

“아이, 느그 어매는 왔드냐?”

 

고구마 껍질을 벗기다 말고 언니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감청색 낡은 운동화 위로 후두둑 굵은 눈물이 쏟아졌다. 고모는 언니의 등을 따숩게 두드리며 말했다.

 

“아매 워디 숨어서 니 얼굴이라고 보고 갔을 것이다. 하모. 지 자석 졸업날인디 워치케든 왔겄제.”

 

고모는 고구마 몇 개를 바구니에 담아 건넸다.

 

“움시로 묵으먼 목 멩게 가서 동상들이랑 노나묵어라이.”

 

언니는 고개를 까닥하고는 바구니를 낀 채 멀어져갔다. 그 뒤에 대고 동네 아낙 누군가 푸짐한 욕설을 퍼부었다.

 

“오기는 멋을 와. 왔으먼 새끼헌티 돈이라도 멫 푼 쥐여주고 갔겄제. 자석도 잊어불고 아조 샛서방 아랫도리에 홈빡 빠졌는갑구마. 호랭이가 칵 씹어물어갈 년!”

 

목소리를 줄이는 정도의 배려도 하지 않았으니 그 욕설 또한 언니는 고스란히 맞았을 것이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언니는 부산 어느 공장에 취직했다. 아무도 바람난 엄마에게 버림받은 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부산에서 언니는 행복해졌을까?

 

서울에서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나는 친구들의 입에서 너희 아버지 뭐하냐는 말이 나올까 봐 가슴을 졸였다. 화제가 아버지에 다다르면 눈치껏 자리를 피했다. 그러나 한번은 기어코 그 질문과 마주치고 말았다. 너희 아버지는 뭐하시냐는 평범한 질문 앞에서 나는 얼어붙었다. 내 아버지는 감옥에 있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어려서부터 눈칫밥 먹어 눈치가 백 단이었던 나는 빛의 속도로 머리를 굴렸다. 아니,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다시는 같은 질문을 받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죽었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철없는 아이들이라도 죽은 아버지를 다시 소환하지는 않을 테니까. 열다섯, 살아있는 아버지를 죽었다고 말할 뻔뻔함까지는 장착하지 못한 나이였다. 그래서 말했다.

 

“안 계셔.”

 

사실이었다. 집에 없으니까. 감옥에 있으니까. 친구들은 그 말을 아버지가 죽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였고, 나는 적어도 거짓말은 하지 않았으며, 다시는 그 난감한 질문을 받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다고 나아진 건 없었다. 나아지기는커녕 나는 나날이 음울해졌다. 언니는 어땠을까? 누군가 너희 엄마는 뭐해라고 묻지 않았을까? 그때 언니는 뭐라고 대답했을까? 혹여 가슴에 쌓인 한이 넘치고 넘쳐 언니가 원했던 엄마, 평범한 주부랄지, 학교 선생님이라고 대답하지는 않았을까? 그랬다면 언니는 여전히 행복하지 않을 것만 같다.

 

구례 같은 작은 동네에서는 누구도 자신의 존재를 숨길 수 없다. 내가 빨갱이의 딸이라는 것을, 언니 엄마가 바람나 집 나갔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안다. 다 아는 일이니 굳이 숨기지도 않는다. 호기심에서 혹은 염려에서 내뱉은 말이 비수가 되어 나나 언니의 가슴을 찔렀지만, 억울하게도 그게 나나 언니의 삶에 주어진 조건이다. 남들이 모른다고 해서 우리의 불행한 조건이 달라지지 않는다. 예쁘든 못생겼든, 똑똑하든 멍청하든, 부잣집 자식이든 가난한 집 자식이든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조건은 받아들이고 거기서부터 출발하는 것 외에는 달리 피해갈 방법이 없다.

 

나이 들어 고향에 돌아와 보니 알겠다. 시골 사람들이 남의 허물을 생각 없이 들쑤시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아무리 아픈 말도 듣다 보면 둔해진다. 어쩌면 그들은 상처 위에 소금을 뿌려야 빨리 아문다는 것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소금만 뿌린 것도 아니다. 부침개를 부친 이웃의 누군가는 엄마 없는 언니가 안쓰러워 몇 장 가져다주었고, 김치를 담근 누군가는 김치를 손 크게 가져다주기도 했다. 물론 이번에도 소금을 뿌리면서. 그래도 언니는 그런 사람들과 살며 아프게 배우지 않았을까? 엄마에게 버림받아도 누군가의 사소한 도움으로 그럭저럭 살게 된다는 것을. 구례의 욕은 그저 누군가를 내치기 위한 험담이 아니다. 너의 존재를, 고달프기도 가슴 아프기도 억울하기도 한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어찌 보면 철학적인 가르침이다.

 

 


글쓴이 : 정지아

_소설가. 『아버지의 해방일지』, 『빨치산의 딸』, 『행복』, 『봄빛』, 『숲의 대화』, 『자본주의의 적』, 『하늘을 쫓는 아이: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 권기옥』, 『노구치 이야기』, 『임종국, 친일의 역사는 기억되어야 한다』 등을 썼으며, 만해 문학상, 이효석 문학상, 김유정 문학상, 오영수 문학상, 한무숙 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뒤웅박 씻나락 칼럼] 

지리산 자락 삶이 우리 사회의 대안적 삶의 모습이 되길 꿈꾸는 <지리산人>의 바람을 담아, 지리산 곳곳에 계신 씨앗 같은 이들의 삶과 생각을 싣고자 합니다. 칼럼 글쓴이의 일부 주장이 <지리산人>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태그

전체댓글 0

  • 44710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뒤웅박 씻나락] "가식 없는 세계" 정지아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