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8-18(화)
 

히가시카와에서 상상하는 n개의 산내

   

누리 (지리산이음, 산내청년네트워크틈새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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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듯한 도로와 평야가 펼쳐진 히가시카와의 풍경.
 
 
네모반듯한 ‘칼각’으로 푸르고 광활하게 펼쳐진 논밭 사이를 국도가 가로지른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이어지는 평원 너머에는 하얀 물감을 군데군데 칠해 놓은 듯이 머리가 희끗한 설산이 자리 잡고 있다. 지붕이 비스듬한, 서로 닮은 디자인의 집들이 길가에 점점이 서 있어서, 시력 검사 기계 속 언덕 위의 빨간 집이 떠오른다. 6월의 홋카이도, 일본 1호라는 다이세쓰 국립공원은 아직 눈에 덮여 있었다.

 

6월 첫 주를 일본 최북단 북해도의 시골마을 히가시카와정에서 보냈다. 일본의 기초잔치단체인 시, 정, 촌 중 정은 한국으로 치면 ‘읍’ 정도에 해당한다. 요즘은, 평소와 다른 풍경 속에서 쉬엄쉬엄 일하라고, 여행 대신 ‘워케이션’을 오라며 현대 도시인들에게 말을 거는 지자체들이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각지에 많다. 우리는 바다 건너 히가시카와에서 워케이션을 보냈다. 이번 여정에는 제주, 태백, 거창 등 전국 곳곳, 각자의 지역에서 작은 변화를 만들어 가고 있는 사람들 13명이 함께했다.

 

사람들의 말소리보다 새들의 지저귐이 훨씬 크게 들려오는, 한적한 히가시카와에서 13인의 한국인들은 서로 약속하지 않았는데도 마주쳤다. 미슐랭의 인정을 받았다는 작은 소바집에서, 행정에서 운영하는 공공도서관이자 복합 교류 공간인 ‘센토퓨어’의 서가에서, 동네에서 가장 큰 마트의 조리식품 코너 앞에서. 일행 중 누군가가 자전거를 타고 몇 번이나 다녀왔다는, 걸어가기에는 제법 먼 거리의 주먹밥집에 옹기종기 찾아가 아침 찬을 쓸어오기도 했다. 여정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먼저 다녀간 사람들의 평을 듣고 즐겨찾기 해 둔 구글 지도가 있었는데, 낯선 동네에서 동행들의 추천 멘트는 하나같이 강력했다. 한 사람이 대화 중에 ‘여기 다녀왔는데 좋더라’ 하면 사람들은 귀를 열고 열심히 들었다. 그게 재밌어서 '도장 깨기'하는 것처럼 여기저기 쏘다녔다.

 

내가 사는 남원시 산내면은 히가시카와에 비하면 (적어도 구글 지도에서는) 불모지에 가깝다. 일본에서 유일하게 25년 연속으로 인구가 늘어났다는 농촌 마을, 히가시카와의 성공 비결이 궁금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구해 읽는다는 『히가시카와 스타일』 처럼 특별하고 고유한 ‘산내 스타일’ 따위를 정의한 책도 없다. “왜 여기 살고 계세요?”라는 말을 지금도 가끔 듣는다. 다른 곳으로 나가고 싶지는 않냐는 일말의 걱정 섞인 질문도 동네 어른들에게, 바깥에서 온 사람들에게 골고루 종종 듣는다. 나름대로 고민은 해 봤지만, 딱히 상대를 이해시킬 만한 뾰족한 대답도 없어서 얼버무리고 만다.

 

다만 몇 해 전 동네 한의원이 문을 닫고, 어린이집이 휴업을 하게 되면서 새로이 갖게 된 물음표는 이런 것이다. 여기가 없어지더라도 계속 산내에 살고 싶을까? 예를 들면, 이사 온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이 여유 시간을 보내고 마음 맞는 커뮤니티를 찾아가는, 내 10대 시절이 담긴 품안작은도서관이 없어진 산내는 어떨까? 산내초등학교에는 4월이면 함께 추모식을 하고 노란 꽃을 심어 가꾸는 세월호 기억 꽃밭이 있는데, 꽃밭을 돌볼 어린이들이 없어진 산내는 어떨까? 지금 당장 나에게 필요 없는 옷과 물건들이 순환될 수 있도록 내어놓는 '득템'의 성지, 자원순환가게 나눔꽃이 없어진 산내는 또 어떨까? 눈인사를 건너뛰고 안부를 묻는, 서로의 맥락을 아는 이웃들이 떠난 산내라면?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계속 산내에 살고 있는 이유, 없어지면 몹시 아쉬울 산내 고유의 아름다움이라는 건 있는 셈이다.

 

산내청년네트워크 틈새에서는 올해 그러한 연유로 다른 지역에 사는 또래 청년들에게 산내에 잠깐 살아보자는 초대장을 보내고 있다. 방식은 여러 가지다. '지금 도시에서 살고 있는 방식이 마음에 들어? 고민된다면 여기 와서 조금 다른 속도로 사는 마을을 경험해 보는 건 어때?'하고 말을 걸기도 하고, 산내에 사는 사람들의 삶 이야기를 거쳐서 마을을 소개하기도, 산내에서 더 예민하게 감각할 수 있는 사계절의 세계로 안내하기도 한다.

 

다가오는 7월의 프로그램을 위해 시도해 본 방식은 바로 함께 지도를 채워 나가는 작업이다. 산내를 가로질러 흐르는 람천과 임천의 물줄기를 따라, 지리산의 푸르른 산줄기를 따라 평면 지도 위를 짚어 나가다 보면 잊고 있던 장소 속 이야기들이 되살아난다. 산내 구석구석에 얽힌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 조각도 받았다. 내가 일하고 가꾸는 지리산문화공간 토닥은 누군가에게 카페 대신 소중한 '무대'로 의미화되었고, 물 흐르는 소리의 크기로 지금 계절이 비가 많은지, 가문지 가늠할 수 있는 해탈교는 누군가가 밤하늘 가득 총총한 별을 올려다보며 산내에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은 곳이었다. 이럴 때는 같은 산내에 살고 있는 것 같아도, 100명이 경험하는 100개의 산내가 다 각기 다를 것이라는 깨달음이 찾아와 아득해지기도 한다. 수학이든 무엇이든 정말 내가 잘 이해하고 있는지 판단하려면 다른 사람을 가르쳐 보라고 하는데, 우리는 스스로 무지를 깨닫고 열심히 공부하는 중이다. 불특정 다수의 손님에게 말을 걸어보기로 한 덕분에, 오히려 내가 산내를 많이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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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토퓨어의 '너의 의자' 프로젝트 전시 코너.

 

 

주민과 여행자,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히가시카와의 복합 교류공간 '센토퓨어'의 정문으로 들어가면 이 지역이 자랑하는 '너의 의자' 프로젝트 컬렉션이 명당 자리를 차지하고 서 있다. 2006년부터 2026년까지, 히가시카와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본인의 이름과 생년월일이 새겨진 세상에 하나뿐인 수제 의자를 선물 받는다. 매년 그해만의 맞춤 디자인이 선정되고, 제작 또한 히가시카와에 위치한 목공방 중 하나에서 맡는다. 이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아이들은 의자를 통해 소속감을 느낄 것이고, 학업이나 취업 등으로 다른 지역에 가게 되어도 마을에는 여전히 내 자리가 있다는 안정감을 느끼리라 어렵지 않게 짐작해 볼 수 있다. "태어나 줘서 고마워, 너의 자리는 여기에 있단다." 적어도 그런 의미를 담아 기획했다는 모양이다.

 

'우리'라는 말에는 울타리 안의 요소들을 마법처럼 하나로 묶어 주는 힘이 있고, 동시에 그 바깥의 것들을 밀어내는 배타성도 숨어 있다. 그런 '너의 의자'의 의미가 확장된 순간이 있었다. 일본인들에게 큰 상흔으로 남은 3.11 동일본 대지진이다. 2만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거나 실종된 참사의 날에도 피해 지역인 도호쿠 지역에는 104명의 아이들이 태어났다. 800km 떨어진 북해도에서 보내온 '희망의 너의 의자' 104개에는 "다부지게 미래로."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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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카와 공민관 앞에 나란히 선 어린이용 자전거들.

 

 

히가시카와에서 보낸 시간 동안 먼 길을 떠나온 몸과 다르게 마음은 자꾸 고향으로 돌아가, 산내가 어떤 마을이기를 바라는지 상상하게 되었다. 숙소와 카페에 이 마을에서 만드는 가구와 잔, 소품들이 자연스레 비치되어 있었던 점, 거리낌없이 문턱을 넘고 자리 잡을 수 있는 장소가 있다는 점은 정말이지 마음에 들었고, 어딜 가든 외국에서 온 사람에게 편하고 친근하게 말 걸어 주는 점도 괜찮았다. 반면 마을버스를 타려면 전날 예약해야 하는 시스템은 잠시 다녀가는 입장에서는 높은 장벽으로 느껴졌고, 외식 메뉴를 고를 때에 채식 등 다양한 선택지가 없는 부분은 다소 아쉬웠다.

 

히가시카와에 함께 간 사람들은 바다를 건너가서도 참 자기다웠는데, 농사를 짓는 사람은 줄기가 아직 여린 새싹 작물을 어떻게 보호하며 키우는지 유심히 들여다보았고, 산을 타는 사람은 새벽같이 뒷산을 오르며 울창한 나무들과 새를 만나고 왔고, 일본 각지를 누비며 탐방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사람은 그곳에서도 미니 탐방 루트를 만들어서 동행들을 능숙하게 가이드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고. 13명이 만난 13개의 히가시카와가 거기 있었다. 산내 마을 구석구석에도 방문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시선이 더해지고, 경험이 쌓여 나갈 것이 기대된다. n명의 사람들이 만나는 n개의 산내. 지금 '우리'를 넘어 누구에게 손을 내밀고, 어떤 의자를 내어줄 수 있을까? 거창하지 않더라도 함께 궁리하고, 무턱대고 실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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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틈새에서 진행한 2주살이 캠프 참여자들의 그날 하루를 돌아보는 엽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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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틈새에서 진행한 '봄에살래' 캠프. 마을 길 어귀에 자란 봄의 풀들을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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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상사 천왕문을 출발점이자 도착점으로 열었던 2026년 5.18 달리기
 

   

 


글쓴이 : 누리

_지리산이음, 산내청년네트워크틈새 활동가


 


[뒤웅박 씻나락 칼럼] 

지리산 자락 삶이 우리 사회의 대안적 삶의 모습이 되길 꿈꾸는 <지리산人>의 바람을 담아, 지리산 곳곳에 계신 씨앗 같은 이들의 삶과 생각을 싣고자 합니다. 칼럼 글쓴이의 일부 주장이 <지리산人>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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