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쟁의 심장
박금만 작가의 여순그림이야기
항쟁의 심장(10.1대구항쟁)
/160X130cm/콘테/2024

나는 나름 작품으로 철학적 구축을 다져나가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할아버지의 흔적을 2017년 인터넷에서 순천경찰서기록으로 발견한다. 서울경기에서 작품 활동을 하며 약 15년간 할아버지 흔적을 찾아다녔는데 못 찾고 여수로 귀향한 지 2년 만에 기록을 찾은 것이다. 그 기록은 매우 건조했다.
- 활동유형: 좌익활동(우익,좌익,좌익활동)
- 장소: 광천 다리 밑
- 사망유형: 총살
순천경찰서의 이 기록은 그동안 우리 가족의 괴롭고 어둡던 모든 것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분노와 슬픔으로 그동안 그려왔던 모든 것을 버리고 여순항쟁 작품에 몸을 던진 계기가 되었다. 기록을 발견하고 일주일간 잠도 잘 못 자고 먹지도 못하며 생각했던 것은, 첫째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역사적 진실을 알리자, 둘째 작품에서 지형이나 복장 무기 등은 철저히 고증하자, 셋째 피나 잔인한 장면을 서정적인 슬픔으로 승화하자(많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이렇게 시작한 작품들이 방대한 여순항쟁 역사에 미미하지만 조금씩 다가가고 있다. 나는 지금도 여순에 살고 있다.
여순항쟁은 대구항쟁과 제주4.3항쟁과 그 결을 같이 한다. 그래서 여순의 기원을 그려 보기로 했다. 해방이 지난 1년 후 1946년 10월1일 미군정은 친일 관리를 등용하고 토지개혁을 지연하며 식량 공출 정책을 강압적으로 시행한다. 쌀값은 폭등해서 식량난으로 굶어 죽는 사람들이 생겼다. 또한 콜레라가 창궐했는데 어린이들은 의약품이 없어 죽어가고 있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대구시민들은 "쌀을 달라! 생필품을 달라! 어린이를 치료할 의약품을 달라! 친일경찰 물러나라!" 외치며 차라리 길에서 죽겠다는 각오로 거리로 나온다.
10월1일 대구부청 앞에서 기아 대책을 세우라는 시위 도중 민간인 황말용, 김종태 2명의 노동자가 경찰의 발포로 사망하게 된다. 다음 날 민간인 2명이 사망했다는 소식으로 대구의 굶주린 일반시민들, 노동자, 학생들까지도 시위에 합세하게 된다.
만여 명의 시민들은 대구경찰서를 포위했고 결국 경찰들은 무장해제를 한다. 대구 시민들은 질서를 지키며 경찰권을 인수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동안 참아왔던 분노로 민중들은 거리 한쪽에서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다. 위 작품은 분노한 대구민중들이 돌을 들기 직전을 작품화한 것이다.
이후 몰리고 있던 경찰들은 발포를 해서 24명의 시민들이 사망한다. 이를 기점으로 대구항쟁은 영남일대로 번지고 나중 제주4.3항쟁, 여순항쟁까지 항쟁의 불꽃은 전국적으로 이어졌다.
대구시는 '10월 항쟁'이란 명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지난 2016년 대구시가 '대구 10월 항쟁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사업 지원 등에 관한 조례'를 마련한 것이다. 이전에는 주로 '대구 10월 사건', '대구 10·1 사건' 등으로 불렸다. 일각에서는 폭동, 소요사태 등 부정적인 단어가 쓰이기도 했다. 지금도 극렬 유튜버들은 이런 용어들을 사용하며 대구항쟁의 정신을 훼손시키고 있다.
<지리산人>에서 박금만 작가의 '여순그림이야기' 연재를 시작합니다. 여순항쟁을 담아 사실적인 역사화를 그려 오고 있는 박금만 작가의 이번 칼럼을 통해, 여순항쟁(여순10.19항쟁)의 역사와 아픔 나아가 항쟁에 함께한 민중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지리산人> 드림
박금만 작가는, 여수에서 나고 자라 세종대학교 미술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서울과 고흥, 부산과 여수 등의 개인전 및 초대전에 참여했고, 아트페어를 비롯한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작품 소장처로는 전남도립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