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6-15(토)
 


 

지리산 의신 옛길을 가다

 

박 두 규 (시인)

 

지리산은 많은 길들을 품고 있다. 지금은 탐방로라고 하는 이름으로 등산객들에게 허용한 길만을 다니게 하고 있지만 지리산엔 아직도 지역민들이 고로쇠를 채취하러 다니는 길이 있고 약초꾼들이 다니는 길, 지능선을 가로질러 옆 마을로 가는 길까지 다 살아있다. 그리고 옛적부터 장꾼들이 주능선을 넘나들던 계곡길이나 빨치산들이 다녔던 지능선을 가로지르는 길들도 이어지고 끊어지면서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다. 모든 산길들은 산의 규모나 위치에 따라 사정은 조금씩 달랐겠지만 크게 보면 산은 옛사람들에겐 삶터였고 생활의 현장이었고 일상의 길이었다.

이번에 다녀온 지리산 길도 옛 사람들에게는 일상생활 속의 길이었던 일명 서산대사 길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의신 옛길이다. 물론 지금은 묻혀 진 길이고 의신 사람들은 건너편의 포장도로로 차를 타고 다닌다. 지리산 주능선에서 보면 의신 마을은 벽소령이나 선비샘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능선의 끝자락에 위치한 마을이다. 역으로 말하면 의신에서 빗점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벽소령이 나오고 능선을 따라 올라가면 덕평봉의 선비샘에 이른다. 말하자면 의신마을은 지리산 안 자락에 위치해 있는 세속의 끝점이면서 본격적으로 산을 오르는 시작점인 것이다.

 

의신 옛길은 그야말로 옛날에는 화개에서부터 시작한 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화개는 섬진강 가에 위치해 있으면서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초입이기 때문이다. 화개에는 지금도 화개장터가 있지만 과거 섬진강 하류에 있던 화개포구의 오일장은 해방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5대 시장중 하나로 전국의 어느 시장보다 많은 사람들이 붐볐던 곳이다. 육로로는 구례, 하동 지역에서 곡식들이 들어오고, 해로로는 여수, 광양, 삼천포, 충무, 거제 등에서 황포돛배들이 수산물을 가득 싣고 왔으며 보부상들은 전북 남원지역이나 경남 함양지역으로부터 지리산을 넘어왔다 하니 화개장의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의신 사람들은 이 화개장의 저자거리에 나와야 비로소 세상을 만나게 되고 장이 끝나면 다시 지리산을 향해 걷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의신 옛길은 서산대사가 수행했다는 원통암으로 가는 길이기도 해서 서산대사 길이라고도 불린다. 화개에서 지리산을 향해 화개천을 따라 걷다보면 쌍계사가 나오는데, 지금 그 길은 아름드리 벚나무가 터널을 이루고 있어서 봄이면 상춘객들과 그 차량으로 몸살을 앓는 곳이 되었다. 하지만 서산대사가 걷던 당시만 해도 오솔길이었을 그 길옆에는 은어 떼가 유영하는 청정한 화개천이 흐르고 호젓한 길가에는 많은 들꽃들이 피어 있었을 것이다.

 

쌍계사를 지나 한참을 더 지리산 안으로 들어가면 신흥이라는 마을에 이르고 이곳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지금의 의신 옛길이 시작된다. 여기서 의신으로 가려면 의신계곡을 따라 포장도로로 올라가는데 의신 옛길은 의신계곡 건너 반대쪽에 있는 4.2km의 산길을 말한다. 지금은 이 길을 걷는 의신마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말 그대로 의신 옛길이다. 낙엽이 수북이 쌓인 굴곡진 이 길을 걷자면 계곡의 물소리만 따라올 뿐 숲속의 적막감에 홀로 놓여 마음이 가라앉고 스스로 정화되는 느낌을 받는다. 지리산의 깊고 험한 산중에 홀로 남은 외로움이나 두려움 같은 느낌이 아닌, 가볍고 고요하며 차분한 마음의 상태라고 할 수 있는 평온하고 안정된 상태의 그런 느낌으로 걸을 수 있어서 좋다.

나는 서산대사나 된 것처럼 2km 정도를 그런 마음이 되어 걸었다. 이어서 살짝 언덕진 고개를 넘으니 서산대사의 의자 바위가 나왔다.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의신사의 범종을 가져가려 하자 도술을 부려 돌 의자로 바꾸어 놓았다는 설화를 가지고 있는 바위다. 우리 주변의 많은 설화들은 대부분 그곳 민중들의 어떤 염원이 담겨있다. 그런데 왜 굳이 의자였을까. 물론 잠시 편하게 쉬어가자는 의미도 있겠지만 서산대사의 의자라는 점에서 보면 단순히 쉼터의 의미만을 담은 것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의자는 민초들이 아무 때나 쉽게 앉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며 그들의 문화와는 거리가 먼 물건이다. 보통은 존경할만한 지체 높으신 어른이 앉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돌 의자는 서산대사께서 민중들을 높이 보고 이 길을 다니는 민초들이 잠시 앉아 쉬면서 미천한 신분이지만 자기 스스로를 귀하고 높게 보라는 부처님의 가르침(天上天下唯我獨尊)을 주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미천한(?) 나는 서산대사를 떠올리며 한참이나 의자바위에 앉아 쉬었다.

 

이렇게 2시간 정도를 걸으면 의신 마을이 보인다. 나는 의신마을에 들어가 점심을 먹기 위해 두리번거리며 식당을 찾았으나 겨울 초입이라서 그런지 밥 먹을 곳이 없었다. 그때 작은 가게가 눈에 들어왔는데 그곳의 한 귀퉁이 누렇게 변색된 종이에 식사 됩니다라는 글귀가 눈에 띄었다. 점심을 먹으며 원통사로 가는 길도 물어볼 겸 들어가니 웬 사내가 감을 깎고 있었다. 수염을 기르고 있었지만 작은 키에 다부진 체격이 60대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 부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주방에 있었는데 식사는 김치찌개만 된다고 하여 시키니 그야말로 평소 집에서 먹는 집밥 식단이 펼쳐졌다. 봄에 채취한 듯한 산나물과 함께 김치찌개가 한 냄비 나왔는데 그 새콤달콤한 맛이 제법이었다. 그 부부도 마침 점심을 먹으려는 참이었는지 내 옆에 나와 똑같은 상차림으로 같이 식사를 하게 되었다. 나는 외지로 일보러 나갔다 돌아온 그 집 식구나 된 것처럼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한 끼 밥을 먹을 수 있었다.

밥을 먹고 나니 1230분이었는데 쌍계사로 내려가는 버스 시간을 물으니 420분이라고 했다. 무려 4시간의 시간이 있는데 원통사를 다녀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여기에서 1km 정도를 더 덕평봉 쪽으로 올라가야 서산대사의 수행처였다는 원통암이 나온다고 했다.

 

원통암으로 가는 길은 본격적으로 지리산을 오르는 것이어서 의신옛길보다는 가파른 길이고 조금 전에 밥을 먹어서 그런지 힘이 들었다. 50분 정도를 걸어 올라가니 원통암 문 앞에 이르렀는데 그곳에는 서산선문西山禪門이라는 현판이 걸려있고 문고리 옆에는 조그마하게 나는 누구인가라고 쓰여 있었다. 서산대사와 같은 고승대덕들의 수행처였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암주의 의중이 읽혀졌다. 문을 열고 들어섰으나 인기척은 없었다. 지금껏 혼자서 숲길을 걸어 올라오며 그 정적을 충분히 느꼈는데 이 문의 안과 밖은 그 정적에 있어서 어떤 차이도 없이 고요 그 자체였다. 도량은 법당 끝의 채마밭까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어서 이곳에 있는 수행자의 마음가짐을 짐작하게 했는데 앞마당에 서보니 멀리 아련히 보이는 섬진강의 S자 굴곡이 오랜 그리움처럼 걸려 있었다.

나는 헛기침도 하며 인기척을 내보았으나 아무런 반응이 오지 않았다. 혹시 참선 중은 아닌지, 아무도 없는지 확인하려다가 생각을 바로 접었다. 서산대사의 영정을 모신 사당 툇마루에 따뜻한 햇볕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래, 스님을 만나 멋쩍은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는 혼자서 저 툇마루에 앉아 지리산의 능선들과 아스라이 보이는 섬진강을 바라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따뜻한 햇볕을 정면으로 받으며 툇마루에 앉았다. 그리고 지그시 눈을 감고 호흡을 고르니 온몸이 섬세하게 깨어나는 듯했다. 귀밑머리를 스치는 여린 바람결이며 청량한 숲 내음이 온 몸을 가득 채우는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었는데 그것이 그냥 너무 편했고 그 느낌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30분 정도를 앉아 있었으나 간간히 풍경소리가 들렸을 뿐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스님도 공양보살도 없는 텅 빈 암자에서 나는 홀로 있는 기쁨을 잠시 느꼈다. 그러고 보니 오늘 하루 혼자서 참으로 호젓한 시간이었다. 아니, 아니다. 혼자는 아니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따뜻한 어머니의 품 같은 지리산에 안겨 자애로운 눈길을 종일토록 받았으니 어찌 혼자였겠는가. 내 오랜 어머니와 함께 한 하루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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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점골 단풍/ 김인호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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