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然스러운 사람
13세기 지금의 터키 지역에 나스레딘 호자라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그가 당나귀를 잃어버려 울면서 하루 종일 찾으러 다니다가 갑자기 팔을 올리고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신이시여. 참으로 감사드리옵나이다.” 이 모습을 본 어떤 사람이 물었다. “당나귀를 찾다 말고 웬 감사요?” 그러자 호자가 대답했다. “내가 그 당나귀 위에 올라타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사한다네. 만약 그랬더라면 내 자신도 잃어버렸을 것 아닌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재미있는 이야기다. 당나귀는 그 지역의 특성상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고 당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살고 있는 집 다음으로 큰 재산이었을 것이다. 나스레딘은 현자였기 때문에 재물을 잃고서도 감사할 수 있었다. 재물을 잃은 것도 슬픈데 마음마저 잃고 자신을 잃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는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나귀 위에 올라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은 재물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자본주의 현대를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재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항상 일상생활에서 손해와 이익을 따지며 산다. 그렇지 않으면 현실을 살아갈 수 없는 바보가 되고 무능력하다는 말을 듣게 된다. 하지만 나무가 손해와 이익을 따지면서 서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의 별이 반짝이는 것 또한 손해와 이익을 계산해서 빛나는 것이 아니건만 얼마나 아름답게 잘 살고 있는가. 우리도 그런 자연이 될 수는 없는 것일까? 아니 자연自然스러운 사람이라도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언젠가부터 나는 ‘자연스러운 사람이 되어 자연스럽게 살자’는 슬로건 하나를 갖게 되었다. 옷차림이 참 자연스럽다고 하면 세련되고 멋지다는 말이고, 분위기가 자연스럽다는 것은 자유로우면서 편하다는 이야기고, 말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은 꾸밈이 없고 진실하다는 말일 것이다. 더 다양하게 쓰이고는 있지만 종합해보면 ‘자연스럽다’는 것은 진실하며 자유롭고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연스럽다’는 말의 뿌리는 ‘자연(自然)’이니 사실은 ‘자연’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산과 바다의 일상이나 비가 오고 꽃이 피는 일 등이 자연이고 자연의 현상인데 그것들에 무슨 거짓이 있을 것인가. 그래서 성현들은 자연은 진리요 도(道)이고 법(法)이며 생명 그 자체라고 말해왔다. 그러니 인간사 모든 문제의 답도 자연에 있다는 말은 틀림이 없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자연’보다는 ‘자연산(自然産)’만 좋아한다. 너 나 할 것 없이 자연산을 찾는다. 그리고 그것은 생태환경과 함께 사회적 문제의 본원에 있는 자본주의 대량생산이 가지는 문제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어쨌든 현대인들은 그렇게 자연과 거리를 두고 있고 자연이 가진 진리와 도(道), 법(法)이며 생명 그 자체와는 떨어져 살고 있는 것이다.
어느 책에서 본 ‘호수 위를 날아가는 기러기가 제 그림자를 호수 위에 드리우되 일부러 그러지 아니하고, 호수는 기러기의 그림자를 비추되 일부러 비추려하지 않는다.’ 라는 구절이 생각난다. ‘자연스럽다’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지 않겠는가. 흐르는 물처럼 주어진 삶의 조건과 환경 속에서 자기 본연의 삶을 충실하게 살다보면 타자와도 저절로 어울리게 되고 하나의 완성된 아름다운 그림이 되니 ‘자연’이 바로 그러하지 않은가. 그리고 그 기러기나 호수의 마음에 근접해 있는 사람이 바로 ‘자연스런 사람’ 아니겠는가.
-박두규(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