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리산 人』의 생각
탐욕에 대하여
지리산 자락, 섬진강 하류 기슭 어느 구석에 거처를 마련하고 처박힌 지도 벌써 10여년 세월이 흘렀다. 나는 이곳으로 들어오면서 사실은 새로운 인생살이를 꿈꾸며 들어왔다. 누구든 자신의 새로운 삶을 위해서는 그 상황과 조건을 바꿔내려고 새로운 각오를 한다. 나도 이곳에 들어오며 새 집을 짓고 상량문에 그 마음을 새겼다. 노자와 묵자에서 빌려와 無爲無不爲무위무불위와 愛人若愛身애인약애신이라는 글을 새겼는데 집이 내려앉을 때까지 얻지 못할 말을 새겨놓고 쳐다볼 때마다 후회하며 살고 있다. 無爲無不爲를 새길 때만해도 나름의 해석을 글로 정리하기도 했는데 그 일부를 보면 대충 이렇다.
“......나무는 어디도 가지 않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세상의 비와 바람을 다 맞는다. 그리고 꽃을 피워 봄이 있게 하고, 벌과 나비의 양식이 되고, 씨를 맺어 생명을 잉태한다. 평생을 한 곳에서 한 치도 움직이지 않지만, 스스로에게 또는 세상에게 하지 않은 것이 없다. 사실은 이처럼 모든 것은 그 존재 자체로 스스로 빛나는 것이다.......”
무엇을 인위적으로 하지 않으면서도 하지 않는 것이 없다(無爲無不爲)는 그 말이 당시에는 너무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일상에서 행동하고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높은 경지의 삶이라는 것도 모르고 그냥 그 내용이 멋있어서 그렇게 나댔었나 싶다.
하지만 21세기 현대인들은 이 무위무불위의 진리를 용납하지 않는다. 저절로 운영되는 우주자연의 존재적 질서와 그 존재의 순환적 질서를 철저하게 깨며 이루어낸 것이 오늘날 현대문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현대의 과학기술문명은 자본주의를 만나 발전된 것이기에 오늘날 우리 문명사회는 자본의 본질적 특성의 하나인 탐욕을 내장하게 된다. 성장주의나 물량주의, 물질만능주의 그리고 지독한 이기주의, 이런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탐욕을 그대로 실현시켜온 현대문명의 특징들이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자본의 논리는 끝없이 탐하는 인간의 탐욕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탐욕은 반드시 폭력을 유발할 수밖에 없다.
돌아보면 이러한 탐욕이 상류 기득권층의 카르텔을 자연스럽게 형성하여 보이지 않게 우리 사회를 폭력적우로 지배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두는 아니겠지만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과 법을 집행하는 검사들과 그것의 여론을 주도하는 언론인, 그리고 재벌들이 결탁하면 대한민국은 이들의 나라였다. 그 중심에는 무소불위의 권력인 검찰이 있었다. 검찰의 눈으로 보면 누구든 털면 나오는 것이고, 누구든 죄인으로 만들고 안 만들고도 그들의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그러하니 골목대장 검찰의 주변에 붙은 언론인과 정치인들, 재벌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검찰은 이러한 자연스럽게 조성된 기득권 세력의 카르텔 속에서 중심을 형성하며 지금껏 부정부패를 저질러온 곳이지만 이것을 바로잡기는 너무 어렵다. 과거 군부독재 시절의 검찰은 모든 법의 우위에 있는 중앙정보부나 안기부 같은 기관이 충분히 통제할 수 있어서 청와대의 수족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족쇄에서 풀려난 지금은 검찰을 통제할 기관이 없으니 그야말로 최상위 포식자의 위치에 있는 것이다. 공수처 설치의 필요성은 여기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검찰개혁인데 문재인 정부가 조국을 앞세워 대대적으로 검찰을 개혁하려하자 검찰은 전쟁을 불사할 수밖에 없었다. 최상위 포식자의 권한을 내려놓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니 목숨을 건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전쟁이 벌어지면 도덕이나 상식과 같은 일상의 룰은 깨지게 되어 있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는 과정이 아니라 결론이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상대를 죽여야만 내가 살기 때문이다. 그들은 공수처라는 상위 포식자가 두려워 전 조국 장관을 반드시 죽여야만 했다. 그것을 윤석열이 진두지휘 하였으며 검찰은 이제 윤석열 이후 그냥 검찰이 아니라 정치검찰이라는 본색을 그대로 드러냈다. 대통령 선거가 진행되고 있는 지금 기득권 카르텔에 들어와 있는 언론인과 법조인과 정치인들은 자기들의 입맛에 맞는 대통령을 뽑기 위해 모두 자발적으로 참여해서 총력전을 펼치고 있는 상황이다.
사실 이 모든 것의 본질적 원인을 짚어보면 아마도 4,5백 년 동안 진화해온 자본주의 속에서 제어장치 없이 커온 인간의 탐욕에 이를 거라고 생각한다. 탐욕이라는 것은 생존의 욕구로부터 시작되고 삶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그 생존욕구가 탐욕으로 탈바꿈하는 경계선을 인간은 제어하기 힘들다. 그래서 사회적 도덕률과 법률로써 재어하려 하나 그 법률 자체가 잘못되어 있으면 그것도 어려운 일이 되고 만다. 국회라는 곳이 그러한 역할을 하는 것이지만 국회의원들은 자신의 이익과 파당적 이익에만 매몰되어 필요한 법을 만들어내는 것에도 힘쓰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게 법이 만들어졌다 해도 그것을 운영하는 판검사들이 또 조화를 부린다. 그리고 언론들은 그것을 왜곡해서 보도한다. 그러면 올바른 여론은 형성되지 않고 사회적 도덕률이라는 것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권력이라고는 1표밖에 없는 국민들이 이들에 휘둘리지 않고 올바른 투표를 해서 우리사회의 바른 잣대로서 그 몫을 해야만 한다.
하지만 현대인들이 이런 의식을 가지고 바르게 세상살이를 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국민들 또한 자본 속에서 자라난 탐욕의 울타리를 벗어나서 살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먹고 사는 일’이 쉽지 않은 세상에서 탐욕은 이미 21세기의 삶 속에서 인간의 보편적 정서로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이 탐욕이야말로 폭력의 근원이고 모든 순환 질서를 깨는 근본 원인이지만 이것은 오늘날 현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제성장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에게는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또는 당위적 삶이라는 이름으로,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자유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들 또한 우리사회나 다른 누구의 탐욕에는 분노하면서 자신의 탐욕에는 관대한 그런 뻔뻔스러운 삶을 잘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글 박두규 시인)
-반야봉 설경(사진 김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