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나무는 열매를 맺기 위해 뿌리를 깊고 넓게 확장해 나가며 필요한 영양분을 섭취한다.

뿌리가 빨아올린 영양분은 든든한 몸통을 타고 올라 줄기를 형성하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사람을 나무에 비유한다면 어머니와 아버지는 뿌리고 자식은 열매라고 볼 수 있다. 

사람 뿐 아니라 모든 살아있는 생물은 거의 비슷하지 않은가.


이정록시인의 글을 읽으면 '뿌리'와 '열매'가 바로 생각난다. 이정록이라는 시인은 그의 어머니, 아버지라는 뿌리가 주는 양분을 야금 야금 아니 듬북 듬북 받은 열매라는 생각이 당연히 드는 것이다.'어머니 학교'는 어머니의 말씀에 이정록이라는 시어를 입혀 탄생한 시나무다. 그는 그저 지나칠, 어떤이는 잔소리라 할 어머니의 말씀이 '아름다운 시'라는 진리를 발견하고 글로 적는다. 어머니는 교회나 절에 가지 않았지만 하느님과 부처님의 마음을 이미 삶으로 터득한 사람이다.

 

이정록.jpg

 

가슴 우물(어머니학교 48)


허물없는 사람 어디 있겄냐?

내 잘못이라고 혼잣말 되뇌며 살아야 한다.

 

교회나 절간에 골백번 가는 것보다

동네 어르신께 문안 여쭙고 어미 한 번 더 보는 게 나은 거다.


저 혼자 웬 산 다 넘으려 나대지 말고 말이여.

어미가 이런저런 참견만 느는구나.


늙을수록 고양이 똥구명처럼 마음이 쪼그라들어서

한숨을 말끔하게 내몰질 못해서 그려.

 

뒤주에서 인심 나는 법인데

가슴팍에다 근심곳간 들인 지 오래다 보니

사람한테나 허공한테나 걱정거리만 내뱉게 되여.

 

바닥까지 두레박을 내리지 못하니께

가슴 밑바닥에 어둠만 출렁거리는 거지.


샘을 덮은 우덜거지를 열고 들여다봐라.

하늘 넓은 거, 그게 다 먹구름 쌓였던 자리다.

 

어미 가슴 우물이야, 말해 뭣 하겄더.


대숲처럼 바람 소리만 스산해야.(가슴 우물 /전문)


이꼴 저꼴 다 본 어머니의 말씀 "된장 고추장 빼고는 숫제 간도 보지 마라"는 말씀을 가장이 된 시인은 금쪽 같이 받아 적는다. 


 가장(어머니학교 58)


높은 데다 꾸역꾸역 몸 올려놓지 마라.

뭐든 잡아먹으려고 두리번거리는 놈하고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흘깃거리는 것들이나

꼭대기 좋아하는 거여. 상록회장에

이장만 안 했어도 십 년은 더 사셨을 거다.


대통령한테 마을 밤나무단지 하사금 타내려다가 시비가 붙어

코뼈가 가라앉은 것도 책임 떠맡은 죄 때문이 아니냐?

 

남자는 가장 하나만으로도 허리가 휘고 그늘 벖을 날 없는 겨.

된장 고추장 빼고는 숫제 간도 보지 마라.

 

가장 힘들어서 가장인 거여.(가장/전문)


어머니 뿐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했던 순간을 기억하면 글이 되는 사람이 이정록이다.(아들과 아버지)

그러니 어머니와 아버지라는 뿌리가 없었다면 이정록 시인이란 열매도 없었을 것이다.

 

어린 이정록(아들과 아버지)이 생쥐 꼬리에 불을 붙여 친구 '놀새'에게 하려는 복수를 보면 분명히 '커서 뭐하나 할 넘'이라는 생각이 든다. 집요하고  계획적이다. 그렇다고 뭐 꼭 성공하지는 않지만. 역시 그는 커서 놀새에게 복수하듯 끈질기게 글을 써 시인이 되었다. 역시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

옛말은 틀린 적이 없다.

 

성장하는 나


아버지는 저에게 꿈을 적어 보라고 했죠. 

오래도록 머리를 긁적이다가 

부끄러운 얼굴을 쳐들었죠.


아버지가 볼까 봐 한 손으로

종이를 가렸죠. 거기에는 세로로





라고 쓰여 있었죠.

 

화가 난 아버지가

다짜고짜 머리통을 쥐어박았죠.

 

내 꿈 위로 눈물이 떨어졌죠.

울긴 왜 울어? 뭘 잘했다고?

아버지가 역정을 냈죠.


아버지의 우람한 손아귀에서 

나의 초록 꿈이 부르르 떨었죠.


아버지가 내 손을 힘껏 떼 내자

나의 당찬 꿈이 드러났죠.


성장하는 나

행복한 가족

위로할 줄 아는 어른

 

(성장하는 나 /전문)


시인의 눈엔 사물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처럼 보이다가도 그것들 때문에 또 마음이 아프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 때문에, 산다

 

자주감자가 첫 꽃잎을 열고

처음으로 배추흰나비의 날갯소리를 들을 때처럼

어두운 뿌리에 눈물 같은 첫 감자알이 맺힐 때처럼

싱그럽고 반갑고 사랑스럽고 달콤하고 눈물겹고 흐뭇하고 

뿌듯하고 근사하고 짜릿하고 감격스럽고 황홀하고 벅차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 때문에, 운다

 

목마른 낙타가

낙타가시나무뿔로 제 혀와 입천장과 목구멍을 찔러서 

자신에게 피를 바치듯

그러면서도 눈망울은 더 맑아져

사막의 모래알이 알알이 별처럼 닦이듯

눈망울에 길이 생겨나

발맘발맘, 눈에 밟히는 것들 때문에

섭섭하고 서글프고 얄밉고 답답하고 못마땅하고 어이없고 

야속하고 처량하고 북받치고 원망스럽고 애끓고 두렵다.


눈망울에 날개가 돋아나

망망 가슴, 구름에 젖는 깃들 때문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전문)


 

몇개의 말로 우리의 삶을 표현하는 사람이 바로 시인 아닌가.

삶의 축약이다. 그늘과 햇살, 마을과 무덤, 파란만장, 나비!




느티나무는 그늘을 낳고 백일홍나무는 햇살을 낳는다.

느티나무는 마을로 가고 백일홍나무는 무덤으로 간다.

느티나무에서 백일홍나무까지 파란만장, 나비가 난다.

 

(생/전문)

 

 

 

이정록 시인은,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고, 1989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며 등단했습니다. 한성기문학상, 박재삼문학상, 윤동주문학대상, 김달진문학상,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림책 『아니야!』 『어서 오세요 만리장성입니다』 『나무고아원』 『황소바람』 『달팽이 학교』 『똥방패』, 동시집 『지구의 맛』 『저 많이 컸죠』, 『콧구멍만 바쁘다』, 동화 『미술왕』 『대단한 단추들』, 청소년시집 『아직 오지 않은 나에게』 『까짓것』과 시집 『동심언어사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 『정말』 『의자』, 산문집 『시가 안 써지면 나는 시내버스를 탄다』 『시인의 서랍』 등을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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